우리는 인식 안에서 존재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혹은 우리 유인원 류는 두 가지 사건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으로 인식하는 사고-인과-를 발명해냄으로서 서사와 논리를 만들어냈다.

 어째서일까, 좀처럼 글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토마토 스프를 끓이고 빵을 버터에 발라 구워먹었고 미드를 한 시즌 통채로 보고 나니 그제서야 뭔가를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담배를 필 줄 알았다면 글을 시작하기 편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나의 동료 일반 인간들, 혹은 유인원들의 사고체계와는 다르게 이 글은 논리적인 서사가 없다. 

 17년 5월 31일 부터 6월 7일 까지 홋카이도를 여행했다. 올해로 3년 째, 초여름에 홋카이도를 여행하고 있다. 이미 길고 긴 홋카이도 여행기를 쓴 적이 있기 때문에 굳이 여행기를 쓸 필요는 없겠지만, 나중을 위해 간단한 메모를 써서 남기려고 한다. 친구는 이번에는 음식에 대해서만 정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는데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 전과 같이 플레이 리스트와 먹을 것에 대해서 정리하겠다.

- 프롤로그
 여행의 주제가는 Codes In the Clouds <Where dirt Meets Water>였다. 여행 중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이다. 이지리스닝에 가까운 곡(뭐라고? 이지 리스닝을 뭘로 보는거야) 이고 실은 어느 곳에 있어도 듣기에 알맞은 노래였다. 무섭도록 홋카이도의 어느 곳에서도 잘 어울렸다. 아마 아이누 민속 체험을 할 때 들었어도 좋았을 노래이다. 문과생의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지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노래의 제목이었다. 

 그 다음은 Kyte <Boundaries> 낮은 선율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같은 가사가 반복된다. Hear Silence choking you, Listen to the World. Run away speaking true, Break down in the cold. 라고. 맙소사 가사가 왜 이래. 하고 계속해서 들었다. 홋카이도에 있을 때는 항상 세상의 끝을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끝을 바라보는 것은 내 나쁜 습성인지도 모르겠지만 홋카이도에서 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그 어떤 경계를 넘어선 듯한 느낌이다. 네 물론 동네 마다 24시간 편의점이 있는 섬에서 그런걸 느끼다니 자의식 과잉은 확실합니다.

 여행 내내 별 심각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변을 흘끔 거렸고 그렇지 않을 때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문제다.

- 오타루의 플레이 리스트
 이 곳에 마을이 생겨난 것은 1596년, 1800년대 초의 홋카이도 개척 초기에만 해도 오타루는 삿포로보다 훨씬 커다란 홋카이도 제2의 도시였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와 고풍스러운 일본은행 건물,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있는 회관들. 모두 좋았던 오타루를 보여주는 유산이다. 지금이야 삿포로의 위성도시에 관광업으로 유지되고 있는 작은 거리가 되었다. 물론 도시 자체의 활력도 많이 줄어들어 오후 6시가 되면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고 거리에선 사람들이 자취를 감춘다. 아무리 비성수기의 거리라지만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나 신나던지!


 숙소가 보통 오타루라고 얘기하는 오타루 운하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오타루 짓코였기 때문에 항상 산책을 하며 왔다갔다 할 수 있던 점은 좋았지만 홋카이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황폐한 곳이 군데군데 있었다. 뉴욕의 힙스터들 한 떼가 몰려들어서 이제부터 갤러리를 열겠다고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거리는 결국 사람의 흐름, 아무리 관광지가 되어 유지가 된다고 해도 그 거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정한 흐름이 도시를 성장시키고 유지시킨다. 오타루가 관광지로서의 매력을 얼마나 유지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이 곳에서는 오타루 짓코의 보트 선착장을 바라보며 Glenn Gould 가 녹음한 Bach BMW 988, Bach BMW 1048 을 들었다. 그냥 바다를 보면 바흐를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보통은 그냥 사무실에 있을 때 듣고 싶어집니다만 네...그냥 좋아해서 들은 거 로군요. 겨울 바다도 아닌데 슈베르트나 쇼팽을 들을 순 없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겨울에 여길 왔다면 블루스를 들었겠지 싶다. 밝고 명랑한 Analogfish <Baby soda pop>은 어떨까? 오타루 짓코의 밤 풍경은 멋지다. 그리고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몹시 낭만적인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 오타루의 거리
 나는 홋카이도 여행을 가는 사람들에게 항상 오타루는 여행의 마지막에 배치하도록 권유하는데, 보통은 말을 듣지 않는다. 삿포로에서 너무 가깝기 때문에 무심코 오타루에 먼저 가게 되는게 아닐까 싶은데 하여튼 오타루는 홋카이도 3대 과자 대장인 롯카테이, 르타오, 기타카로가 거리 하나에 모여있기도 하고 오르골 공방 등 도 있어서 자칫 잘못하다간 세일만난 비단장수 처럼 봇다리 단위로 쇼핑을 하게 될수도 있다. 더 안 좋은 경우는 오타루에서 잔뜩 산 과자를 홋카이도 여행 내내 다 먹어치우고 출국하기 전에 한 번 더 사는 것이다. 당신이야 말로 오타루 지역 상권의 수호자이십니다.

 특히 르타오는 (이번 여행에서 깨달은거지만) 이름부터가 오타루(おたる)의 애니그램 (オタル->ルタオ)이라서 그런지 도시 전체에 아주 각양 각색의 컨셉의 르타오 지점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들 6시 전에 문을 닫았다 어쩌란 말인가) 수공예품과 디저트를 좋아한다면 오타루는 정말 개미지옥 같은 곳이다. 내가 추천하는 곳은 오르골 공방과 캔들 공방 정도. 특히 캔들 공방은 해외의 희귀한 캔들이 많아서 항상 공부하겠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르게 된다.

 다양한 경로로 미스터 초밥왕을 읽은 한국인에게 오타루의 먹을거리라면 역시 스시인데, 초밥 거리가 있을 정도로 스시가 유명한 오타루에서 기대한 만큼 맛있는 스시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생선의 신선도가 아주 뛰어난데도 실제로 스시로 먹어보면 기대한 만큼 맛있지 않다. 아니 어째서 이 곳은 쇼타의 고향이 아닌가.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도 오타루의 스시에 대해서는 기대가 높지 않았는데, 친구의 추천으로 스시집 ㅋ의 오마카세를 시켜보고 그냥 내가 스시를 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스시를 꽤나 먹어봤다고 해도 내가 스시와 스시의 재료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스시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초밥을 쥐는 요리사. ㅋ에서 스시를 먹은 후 뛰어난 재료를 선택하고 기술을 다해 만들었을 때 스시가 정말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맛있는데 인당 오천엔 오마카세라니, 인류에게 재능을 기부해서 다음 생에 진짜 좋은 걸로 태어나시려고 그러는 걸까.일본어를 모르면 예약도 주문도 안되는 시스템인데(예약할 때 오마카세로 할 것인지 다른 요청이 없는지 물어본다) 스시를 먹다 보니 중간에 예약없이 중국인 청년이 식사가 가능하냐고 물어보러 들어왔다. 거절하시는걸 보고 딱 예약 받은 만큼만 재료를 준비해두신다는 걸 깨달았다. 과연... 그리고 이 년 전에 예약 없이 ㅇ스시집에 갔다가 거절당했던 기억이 나서 왠지 유쾌해졌다.

 가장 맛있던 것은 광어 같은 기본적인 재료였는데, 사장님께서는 도키사케(홋카이도의 자연산 연어이다)같은 걸 더 맛있다고 생각할거라고 생각하셨는지 좀 시무룩해 하셨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일본의 오래된 도시는 항상 그렇듯이 소바가 맛있었다. 오타루에서 스시를 못 먹겠으면 그냥 소바를 먹는게 좋을 것 같다.


- 샤코탄, 바다와 하늘과 카무이미사키
 샤코탄은 오타루의 서쪽에 있다, 비쿠니 같은 어항도 있지만 바다에 맞닿은 산으로 이어진 지역이라 교통이 불편하다. 샤코탄에 가는 길의 버스에는 나 말고 세 명 밖에 손님이 없었다. 제복을 입은 운전기사가 모는 버스는 조심스럽게 시골길을 달렸다. 해변을 달리다 나무로 만든 집이 가득한 마을에서 방향을 돌려 산 위를 오른다. 샤코탄은 산과 바다가 맞닿은 곳이다. 가는 도중에 내가 먹은 체리 냄새가 났고 길가에는 작약도 패랭이도 아닌 보라색 꽃이 잔뜩 피었다. 오르막 길 옆 산 속에는 야구장이 있고 그 너머의 숲은 푸르렀다.

 비가 왔기 때문에 카무이미사키를 갔지만 오래 체류하지 않았다. 바다가 아름다웠지만 기후에 따른 영향이 커서 날씨가 맑은 날에만 샤코탄이 자랑하는 "샤코탄 블루"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바람이 조금만 쎄도 위험해서 올라가는 길을 폐쇄한다고...
그도 그럴 것이, 1900년대 초반에만 해도 카무이미사키의 등대에 살고 있는 등대지기 일가가 해변의 길을 건너 등대로 가다 사고를 만난 적이 있었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이 곳에 있는 염불터널은 위에 나온 등대지기 가족의 사고 이후 만들어진 터널이다. 양쪽에서 파기 시작했지만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염불을 외우면서 서로 방향을 맞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안 쪽에서 두 번이나 꺾이는 동굴이 되었다.(지금은 폐쇄된 곳이다)

 여러가지 전설이 있지만 사실 바다의 끝에 닿은 카무이미사키의 아름다움에 어울릴 정도로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다. 어떤 이야기도 이 곶보다 아름답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갈대가 핀 언덕을 오르면 곧 관문이 보이고 그 뒤로 곶이 보인다. 관문 뒤로는 보이는 것은 하늘과 바다.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고 그 발판은 몹시 좁았다. 분명 끝까지 올라가면 스크롤이 올라가고 엔딩이 나왔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 엔딩을 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중간에 돌아왔다. 카무이미사키 끝까지 가 보신 분은 알려주세요 엔딩 나오던가요.

 여기서는 아무 노래도 듣지 않았다. Death cap for cutie <I will Follow you into the Dark>를 들었으면 어떨까 싶다. 돌아오는 길에는 Arizona <Oceans Away>를 들었다. 버스의 창으로 빗방울이 부딪히고 거칠어진 바다가 아름다웠다. 지금 생각하면 이현우 10집의 <마취>도 괜찮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 삿포로의 샌드위치
삿포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썼다. 특히 몇 번이고 길을 잃고 있다는 얘기를 썼는데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길을 잃었다. 더 이상은 슬퍼서 쓰지 않겠다.
친구가 삿포로는 샌드위치가 맛있다고 했을 때 나도 샌드위치라면 환장하는 몸이지만,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한국에 오면 "닭한마리"를 먹는데 나는 그런 걸 먹어본 적이 없다. 그냥 한국인 블로그에서 돌아다니는 정보인가 하고 생각했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홋카이도의 노포 카페인 ㅅ에서 먹은 샌드위치는 엄청나게 맛있었다. 계란 샌드위치와 가츠 샌드위치는 나도 워낙 좋아하다보니 자주 먹었는데 이 곳의 샌드위치는 진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이 단연 이제까지 먹었던 모든 계란 샌드위치 보다 맛있었고 같이 시킨 후르츠 샌드위치는 소박 단순하나 대단한 맛이었다. 아주 신선한 부드러운 촉감의 하얀 빵에 신선한 제철 과일을 넣고 빵의 부드러운 식감에 지지 않는 살짝 단 신선한 크림을 넣으면 완성되는 샌드위치다. 내가 너무 신선함과 부드러움을 남발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먹어보면 알 수 있다 소프트 앤드 신선데쓰.

 오도리 공원 벤치에 앉아서 울면서 먹었다. 다음에 홋카이도에 가게 되면 꼭 다시 먹으리라.

 그러고보니 친구가 추천해준 홋카이도의 먹거리는 모두 다 맛있어서 이런 것이 재능의 차이인가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친구는 홋카이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면서 "이거 맛있을거야"하고 추천해준 것이다. 그 때의 나의 마음은 서울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홋카이도처럼 맛있는 후르츠 샌드위치는 만들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을 때의 감정과 비슷했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질투한 것처럼 질투가 났다.

 삿포로를 떠나면서 들은 노래는 신나는 락 음악인 Jimmy Eat World <The Middle>과 Gnash <I hate u, I love u> 좀 복잡한 심정이었다는 걸 밝혀둔다. 노래를 그닥 열심히 듣지 않았기 때문에 라인업이 거의 비슷비슷하다.


- 도야호
 여행 중에 마지막 까지 고민한 루트가 바로 이 도야호로 가느냐 아니면 니세코로 가느냐 였다. 렌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삿포로까지 송영버스를 보내주는 도야호로 가게되었다고 합니다. 보고 싶었던 요테이 산은 버스 안에서 볼 수 있었다. 도야호로 가는 길과 도야호에 도착해서까지 생각이 이것저것 많아서 복잡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 여행이 힘들어진다.

 하지만 도야호의 리조트에 도착하고 호수를 한 바퀴 걷자 많은 것들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용기가 생겼다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는 아름다웠다. 체류한 2박 동안, 호수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는데 전혀 질리지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의 거칠어진 호수도, 다음 날 나카지마에 다녀와서 낮잠을 자며 보았던 호수도, 날이 흐려져 수묵화로 그린듯했던 호수도. 그리고 매일 밤의 불꽃놀이와 비오는 하늘 아래서의 온천을 하며 보는 호수도 좋았다. 맑은 날이면 호수 너머로 요테이 산이 보였다. 분명 누군가는 산을 보고 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당신을 떠올렸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숲을 올라 꼭대기에서 공터를 걸었다.
 비가 오는 산을 올라 꼭대기에서 구운 계란을 먹었다.

 이렇게 이틀 밤을 보냈다.

 이곳에서 주로 들은 곡은 Olafur Arnalds <Near Light>, Douglas Dare <Swim> 이다. Arnald의 노래를 이지 리스닝의 부드러운 곡이지만 Swim은 불안하고 슬픈 곡이다. 날씨가 안 좋을 때 도야호는 먹물로 만들어진 세계처럼 변한다. 우리가 호흡하는 것이 공기가 아니라 물로 만들어진 무언가고 저 하늘은 우리가 알기 전에 물에 잠긴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나는 너무 많은 물을 보면 두려워진다. 그래서 이런 곡을 들었던 것 같다.

- 도야호 온천 리조트의 식사
 온천 리조트의 식사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온천 료칸의 식사라고 하면 좀 환상을 가지고 있겠지만, 혼자서도 씩씩하게 료칸을 잘 가는 저는 거기에 환상이 없습니다. 맛있는 곳은 맛있고 맛 없는 곳은 맛없지만 가격은 평등하게 비쌉니다. 그래서 의외로 온천 료칸과 리조트의 식사는 신경써서 고르는게 좋다. 굳이 고르자고 하면 리조트 쪽을 더 좋아하는데, 식사가 망할 가능성이 적고 온천 탕이 다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에 묵었던 ㄴ리조트의 식사는 훌륭했다. 부페의 퀄리티는 그냥 먹을만하지 싶었지만 따로 주문하였던 가이세키 석식/조식은 둘 다 수준급이었다. 가이세키 요리를 시키면 꼭 전반부에 사시미가 나오는데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막판에 나오는 튀김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시미도 튀김도 단독으로 먹을 때 훨씬 맛있다.

 실은 내가 일본에서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얀 쌀밥과 밥반찬. 절대로 부페로는 나올 수가 없는 맛이다. 야채 요리를 먹으면 그 지역의 음식문화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밥과 함께 오이절임 같은 걸 우물우물 씹고 있노라면 일본여행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국그릇에 뚜껑을 열고 국을 마시고 우물우물 밥을 씹는다. 정말로 잘 먹었습니다 하는 인사가 나온다. 물론 제가 이번에 먹은건 음식이 나오기 전에 전체 코스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요리장의 도장까지 찍히는 그런 가이세키였습니다. 미안합니다. 하나도 안 소박해.


- 비에이의 거리
홋카이도에 왔을 때 한 번도 비에이를 빼먹은 적이 없다. 아름다운 언덕과 그 바람들을 잊을수가 없다. 이번에도 청의 호수(아오이이케)에 다녀왔는데 비도 오고 성수기도 아닌지라 사람이 나 외엔 딱 두 명 밖에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듣고 있는 곡은 Olafur Arnalds & Nils Frahm <Life Story>이지만, 비에이에서 계속 흥얼거린 노래는 Beatles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Yellow submarine>이다. 그 외에 자이언티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선곡하는 재주는 없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구릉을 넘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푸른 언덕을 넘어서 바람이 불고 멀리 나무가 보이는 곳에 올라오면, 나는 이 곳이야 말로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곳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을 생각하면 머릿 속 어딘가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 비에이의 야채
 이번에 먹은 것은 만날 가서 먹는 대중식당 ㅈ의 튀김덮밥과 레스토랑 ㅇ의 요리.
한국인에게 너무 잘 알려진 것이 틀림없다. ㅈ에 들어갈 때는 한 무리의 붉은 등산복 한국인들이 있어서 압도당하고 말았으나 변함없이 맛있었다. 물론 큰 소리로 가게에서 떠드는 사람들 덕분에 피곤해졌다. 도대체 왜 본인들이 무리지어 있으면 좀 시끄러워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달리 생각해보면 한국인 등산객(등산객이 아닐수도 있다, 그냥 등산복을 입었을 뿐이다) 한 무리가 있는데 조용하다면 그거대로 무서울 것 같긴 하다. 

 먹는게 정말 즐거웠던 것은 역시 레스토랑 ㅇ의 요리. 특히 야채요리는 아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요 싶을 정도로 맛있었는데, 풍요로운 비에이의 밭에서 자란 야채인만큼 삶고 끓여서 그릇 위에 올려놓은 것만으로도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알고보니 얼마 전에 미슐랭에 새로 등재되었다고, 비에이에는 미슐랭에 등재된 가게가 둘이나 있는 셈이다. 한 곳은 프렌치, 다른 한 곳은 이탤리언이다.

- 후라노의 멜론
 (달리 쓸 곳이 없어서 비에이 부분에 쓰는거다) 내가 좋아하는 멜론은 후라노에서 판매하는 칸탈로프 멜론인데, 이제까지 유바리시에서 재배하는 유바리 멜론과 같은 종으로만 알고 있다 아무리 먹어봐도 맛이 달라서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유바리킹멜론은 스파이시 칸탈로프와 얼즈페이버릿을 교잡한 종으로 일반 멜론에 가까운 맛과 식감이 특징이라고 한다.
실은 후라노의 멜론이 유바리보다 수확철이 좀 늦기 때문에 이번에는 먹지 못했다. 홋카이도의 멜론 하면 유바리를 떠올릴 정도로 일본인의 유바리 멜론 선호도는 절대적인 것 같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보수적인 유바리 멜론보다는 부드럽고 진한 후라노의 레드퀸 품종이 좋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홋카이도의 멜론 얘길 하면서 후라노의 멜론이라고 정확하게 적지 못한 것에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 다음에 여름의 홋카이도를 방문하게 된다면 더 열심히 후라노의 멜론을 먹어줄 생각이다. 굳은 결심을 한다.


- 삿포로의 스프카레
 역시 스프카레라고 하면 야채인가. 이번이 스프카레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것 같은데 항상 고기투성이의 녀석을 먹다가 이번에는 야채 위주의 녀석을 먹었더니 즐거웠다. 꼭 겨울밤 땅에 묻어놓은 야채를 꺼내다가 자 스프 해먹자 하고 호호 불어가며 먹는 느낌이다. 홋카이도 대학 앞의 스프카레 집이었다. 국적불명의 인테리어에 딱히 인도 같지도 않고 네팔 같지도 않은게 맛은 일본풍이었다. 왜 이런 집이 맛있는 걸까. 한국에서 이런 디스플레이의 집은 100%의 확률로 맛이 없다. 

 홋카이도는 치사하다 고기도 싸고 맛있는 주제에 야채도 싸고 맛있다. 한국은 어차피 농산물시장 개방할거면 쌀 농사 말고 밭 농사 위주로 구조를 바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맛있고 신선한 야채는 항상 수요가 있다. 이미 망한거 어쩔수 없긴 합니다만 아쉽다.

- 삿포로의 징기스칸
 이번에 와서 안 건데, 징기스칸도 여러가지 스타일이 있었다. 처음 징기스칸을 먹은게 아사히카와, 그리고 그 다음이 다루마 - 둘 다 비슷한 한국식 고기 요리이다. 판 위에 야채를 깔고 양고기를 먹지만 소스 같은 것은 올리지 않는다 - 였기 때문에 꼼짝없이 징기스칸이란 양고기를 한국식으로 먹는 요리이다. 하고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새로 가본 마츠오의 징기스칸은 탕이 있었고 그 외엔 양고기와 야채 위에 소스를 뿌린다. 그리고 그것은...불고기 양념입니다. 어찌 되었든 한국식 고기 요리였습니다. 취향인 쪽은 다루마 같다 아무래도.

- 마지막, 소프트 아이스크림
 공항에 내려서, 그리고 공항에 돌아와서 르타오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훌륭한 맛이었다.
여기에 쓰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여행 내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계속 사먹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일 훌륭했던게 바로 이 공항에서 먹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었다. 왜 이 곳의 소프트가 맛있는지야 100개도 넘는 이유가 있겠지만, 소프트크림을 먹으며 이 여행을 오게되서 잘 되었다는 생각했다. 

 홋카이도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그것은 홋카이도에 오는 아주 훌륭한 이유가 된다.


- 에필로그
에필로그 곡을 고르는게 쉽지 않다. 어쩐 일인지 여행 중에 한 번도 듣지 않았던 노래를 고르게 된다.
밝고 명랑한 락인 The Charlatans <So Oh>, Kleerup <With Every Heartbeat> 그리고 (나에겐) 항상 홋카이도를 기억하게 하는 John Butler Trio <Young And Wild> 이 정도가 좋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한다면 여행 도중에 저스틴 비버의 <What do you mean>을 꽤 들었다. 좀 복잡했던 것 같다.

 굳이 추가 한다면 한 곡을 더 추가하고 싶다. Aaron Carter <Sooner or later>란 팝 음악이다. 이 글을 고치면서 이 곡을 들었다.

"빠르든 늦든 그녀는 시카고로 떠날거야, 빠르든 늦든 그녀는 가버릴거고, 나는 그녀에게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해"

 이 노래는 결국 용기에 대한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용기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다.


 지난 1월 여행 후 나는 반성이 없는 삶의 훌륭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몇 년 간 나는 계속해서 고민-꼭 다른 생에 있었던 일처럼 멀고 먼, 그러나 아직도 나와 같이 있는 그런- 하고 있는 것이 있고 나는 그 고민이 어떤 형태로도 해결 될 수는 없으나, 어딘가에 그에 대한 답, 혹은 보답이 있을거란 희망을 갖고 있다.

 여행 중에 문득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과거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미래는 오지 않았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연속 선상 어디에 우리가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건은 계속해서 과거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인과와 순차적인 사고 방식-서사-의 노예이길 거부한다면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총합이 현재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에 의해서 과거가 선택적으로 기억되어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기억이 바로 과거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 쯤의 좌표에서 당신의 인생에 놓이게 될까. 

 우리가, 우리를, 어디서부터 우리라고 여기고. 어느 시점에서 드디어 만났노라고 말 할 까.

17년 6월11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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