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도 않은 도쿄 여행이었는데. 그 후로 몹시 앓았다. 돌아오는 날은 아침비행기라 낮에 집에 도착해 짐을 정리하고 그날의 러닝을 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날 밤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니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독감도 아니라는데 몇 년에 한 번 정도 있을까 싶게 앓았다. 여행까지 가서 러닝이나 하고 그러니까 아픈게 아니냐고 누가 그랬다만. 생일을 지나고 동짓날을 그대로 침상에서 맞았다. 여독이란 실존한다. 아무리 괜찮다고 생각해도 쉬어야 한다.

이번 생일과 동짓날은 - 내 생일은 대체로 동짓날과 붙어있다.- 한국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에 미신을 믿는 우리의 선조들이 대체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걸로 그걸 대신하려고 했지만 아시아나의 마일리지 비행기표를 적절한 때에 잡지 못해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예상했던대로 생일날 저녁에는 더더욱 열이 올라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할 때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 언젠가는 내 귀 까지 들려올 얘기였는데 왜 하필 내 생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생일이 아니었다면 그걸 피하기라도 할 수 있었다는 건가 싶어서 스스로를 비웃었다. 열이 올라서 제대로 생각 할 수가 없어서 알려온 소식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동짓날에는 거의 굶다시피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 결국 큰일이 나겠지 싶어서 냄비에 아무거나 넣고 아무거나 끓여서는 반쯤 흘리며 먹었다. 따스한 뭔가가 뱃속에 들어가니 그제서야 살 것 같아서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워서는 대낮부터 잠이 들었다. 잠결에 새가 홰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비둘기들이 제법 살고 있어서 가끔 침실 옆 창가에 비둘기들이 쉴 때가 있다. 하지만 한 겨울인데 새가 있을리가 없다. 나는 잠이 들면서 생각했다. 이 겨울에 아파트의 비둘기들은 어디서 겨울을 나는 걸까.

잠에서 깨어나니 이미 해는 지고. 베개 머리맡은 내가 자는 동안 흘린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땀을 왜 이렇게 많이 흘렸지 하고 얼굴을 만져보니 얼굴 또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잠이 든 동안 계속해서 울었던 것 같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모두 다 둘둘 말아서 빨래를 했다. 광화문의 시위가 끝났고. 남태령에 모여있는 농민들의 트랙터 시위를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차를 끓여 마시며 유튜브 라이브를 켰다. 그리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고도 며칠을 더 아팠다. 나는 항상 그렇다 모두에게 모든게 다 끝나고도 며칠을 더 아파한다.

이 24년 12월의 도쿄여행기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들은 것은 윤마치의 <새벽에게>이다.
이 노래의 앨범 커버에는 멋있는 부엉이가 그려져 있다. 나에겐 이 그림이 내가 받지 못한 올해의 내 생일 선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도쿄현대미술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시나가와에선 도쿄 어디든 1시간이지만 도쿄 현대미술관은 멀다. 길고 긴 리노베이션이 끝났는지도 감이 안 잡혔기 때문에 전혀 갈 생각이 없었는데, 전날 순전히 변덕으로 탄 전철 안에 광고판이 있는 것을 보고 간만이니 가보기로 했다. (여행 전에 세운 사전 계획 메모에는 여행 다음날 부터 미술관이 재개장 하는 것으로 체크는 해두었다.)

다른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대충 해두었으니. 전시에 대해서만 쓰고 싶다. 현대미술관의 애뉴얼 전시인 행복의 섬은 퀄리티가 정말 별로였다. 애초에 여기에 기대를 두고 왔다면 화가 나서 티켓을 잘근잘근 씹어먹었을지도 모른다. 컬렉션 전이자 여성 미술가에 대한 헌정전인 Seven beauties in the Bamboo forest 쪽이 질과 양, 양 쪽에서 훨씬 충실하고 보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행복의 섬 쪽이다.

전시의 시작을 보여준 시미즈 유키의 작품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이번 도쿄 여행 중에 봤었던 어떤 작품보다도 아름다웠다. 슬라이드로 촬영한 사진들과 서사, 그리고 음성을 결합하고. 영상을 넣은 시미즈 유키의 작품은 한 1980년 쯤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예술의 하나로 인정받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2020년이고 오히려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흔적들이라는 강렬한 주제로 만든 그의 작품은 그냥 미적으로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래 이것이 현대미술이다. 하고 너무 흡족해서 작품마다 사진을 파바밧 찍고 대체로 영상 작품을 잘 보지 않는 나도 한참이나 작품을 봤을 정도이다.

재료의 질감과 표현에 집중해서 아예 미술관에서 프레스코를 그리고 있었던 카와타 사토시의 작품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깨끗한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방치되어 있다는 이유로 오염된 취급을 받는 “생수병”의 위치에 대해서 천착한 우스이 류헤이의 작품은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현대미술이란 그냥 요즘 만들어진 작품이란 뜻이니까 하고 나름의 인정과 만족을 건방지게 중얼거리면서 지나쳤다.

하지만 마지막 순서이자 위치 상 클라이막스인 쇼지 아사미의 회화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요소를 꾹꾹 눌러 만든 것 같은 작품이었다. 투명한 아크릴판을 지지체로 해서 그린 그 유화는 모든 작가의 소개에서 공통적으로 신체와 신화적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이라고 소개하는데
구상으로서 뛰어난지도 의문이고…본인의 우울과 죽음에 대한 강박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것 외에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기는 한가. 도대체 이 작품이 애뉴얼전의 클라이막스 위치에 있는가 하고 아주 심술궂은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장에 묘한 그림자를 보았다. 어떤 설명도 없고 맥락도 없이 미술관의 높은 천장 위에 얼룩처럼 검은 새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냥 전시회 장을 지나쳐 나가려다가 혹시 내가 놓친게 있나 하고 다시 돌아가 그림 하나를 다시 살펴보려다가 발견한 것이다. 우연하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 명확하게 새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주변을 돌아보니 전시회장 구석의 벤치 위에 쌍안경이 있었다. 쌍안경 위에는 너무나 일본인스럽게 사용한 뒤 다시 자리에 올려놔주세요 라고 메모가 붙어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쌍안경으로 새의 그림자를 보았다.

국립신미술관에 잠시 들렀단 얘기를 어딘가에 썼던가. 그 곳의 아라카와 내쉬 전을 보다가 잠시 샛길을 돌아가니 햇볕이 비추는 곳에 빈백이 여러개가 놓여있었고 사람들이 앉거나 자거나 하면서 쉬고 있었다. 10분만 딱 앉아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나도 빈백에 앉았다가 아이코 사악한 일본인들의 술수구나. 한 20분을 잠들어 있었는데 살풋 깨어나니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내 오른 쪽 옆자리를 손으로 만지며 누군가를 찾았다.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쌍안경을 내려놓고 나는 전시를 떠났다.


<국립과학박물관 (우에노)>

우에노 공원에는 도대체 박물관과 미술관이 몇 개나 있는걸까? 일단 우에노 공원에는 가장 넓은 면적을 우에노 동물원이 차지하고 있고. 도쿄국립박물관이 있다. 전의 여행기에서 쓴 호류지 보물관을 포함해 6개 동과 넓은 정원이 있는 넓은 국립 박물관이다. 그리고 도쿄도 미술관과 모네 전을 했었던 국립서양미술관이 있다. 도쿄문화회관에서도 전시를 하던가? 그건 모르겠다. 우에노모리 미술관 같은 곳도 있지 않았던가 싶은데. 정말 많기도 하다. 그리고 우에노공원에는 내가 한 번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국립과학박물관이 있다.

모네전을 보려고 우에노역으로 왔더니 보기도 좋게 개찰구에 기세도 좋게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새>특별전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보기도 좋게 노란색 배경에 각종 새들로 가득한 (뒤에 알았지만 전부 전시품이었다. 박제였던 것이다) 사진이 있고 일생동안 볼 분량의 새를 볼 수 있는?! 특별전 이라고 써있었다. 정말이다. 기세가 너무 좋아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의 3시간 이상을 계획에도 없는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쓰게 되는데 결말만 먼저 말씀드리자면 어마어마하게 충실한 쓸데없는 시간이었다. 일단 특별전의 이야기는 둘째치고 국립과학박물관 자체가 온갖 과학에 관련된 교육으로 가득차 있는 곳이라서 같은 속에 속한 나비들의 표본들을 있는만큼 전부 벽면에 전시해둔다거나. 같은 종 쥐들의 색에 따른 차이를 비교해두고. 해양표유류들의 뼈들을 천장 가득하게 전시해두고 (대왕오징어의 표본까지 뒀더라고…) 우리가 상상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현생 포유류들의 박제들을 전부 거대한 한 전시실에 모아두고 사람들을 쳐다보는 구도로 진열해두었다. 분명 모형이겠지만 공룡 뼈까지 박진감있게 전시해둬서 나는 지치고 힘들고 지겹고 근데 안 볼 수는 없어서 거의 울먹이며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전시실을 돌았다. 동물의 숲에서 나오는 박물관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던 컨셉인건지 알 수 있게 된 기회였다…결국 나중에는 일본의 잠수함 모형 앞에서 아 이제 됐어 과학 기술 따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하고 심술이 날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지쳤지만 말이다.

지금도 글을 쓰며 - 내가 찍은 - 해양 공룡류들을 박진감 넘치게 천장에 매달아 둔 사진을 보고 있는데. 이 곳이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메세지는 인간 존재의 하찮음과 자연의 거대함인 것 같다. 추가한다면 그 거대한 자연에 과학의 힘으로 비벼보아요 예헷!! 이 정도랄까. 내가 어릴 때 이 곳에 왔다면 너무 좋은 나머지 기절도 하고 네네 꼭 과학자가 될게요 하고 피의 맹세도 했을 것 같은데. 다행히 중년의 나이에 이 곳에 왔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너무나도 충실하고 쓸데 없는 시간이었다. 상설전만 보는 것만으로도 8시간 정도는 여기서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뼛속까지 이과라서 천체물리학이나 원자력이라도 연구하는 사람이랑 왔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틀 정도는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입술이 파랗게 될 때 까지 밥도 안 먹고 하나하나 구경했겠지.

특별전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새”가 주제였다. 특별전이 하고있는 전시관의 지하로 내려가면서 평일이라 사람이 많진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특이한 주제야 그렇게 내용이 많진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엔 넓고 넓은 특별 전시관에 전시물이 가득 차있고…무엇보다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일본에 이렇게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단 말인가. 걷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다들 진지한 얼굴로 새의 박제 같은 것을 쳐다보면서 메모도 하고 사진도 찍고 있었다. 그 전시에 아무 생각 없이 껄렁껄렁한 마음가짐으로 온 것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여러분은 모든 종류의 새의 형태가 균형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중심축을 기준으로 흔들리지 않게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하지만 깃털은 비대칭이어야 양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날 수 있는 새들은 비대칭의 깃털을, 날지 못하는 새들은 대칭의 깃털을 갖고 있습니다. 새라고 한다면 날 수 있는 것이 전제처럼 여겨지지만 대멸종의 시기에 살아남은 수각류의 일부인 새들은, 크지 않다는 특징 덕분에 살아남은 공룡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서 새의 중요한 특징이 이빨이 대부분의 종에서 퇴화되고 부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부리가 이빨보다 훨씬 변형이 쉽게 적은 에너지로 생성 될 수 있으며 심지어 같은 종 안에서도 여러가지 모양으로 분화될 수 있어서 적응에 유리한 특성으로 여겨집니다. 먹이를 거의 가리지 않는 것도 새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흔히 비어있다고 알려져있는 새의 뼈 안도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일 뿐 정교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새가 어느 순간 비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적응의 결과와 같은 것이고 실제로는 작아지고 빨라지는 과정에서 생긴 특성일 것이라 말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런 비행의 결과로 인해서 새들은 먹이 다툼에서 유리해졌고 높은 대사율과 높은 산소이용률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보통 같은 크기의 동물의 비슷한 수명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새들은 포유류보다 훨씬 높은 수명을 가지는 경우가 많게 되었습니다.

나는 대체로 아무거나 다 알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나도 이런 새에 대한 매니악한 정보를 단시간내에 마구 익히니까 조금 멍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매 종류가 수리류 보다 앵무새류에 유전적으로 가까운 친척이라는 정보라든가 특정한 종류의 참새 종류는 일부일처제지만 실제로 유전자를 확인해보면 자식이 부부사이의 낳은 자식일 경우는 40%가 되지 않는다는 정보 같은거 말이다.

그런 유익한지 안 유익한지 헷깔리는 정보 사이에, 전시측에서는 페라고르니스(존재가 확인된 새 중에서 가장 큰 새로, 추정된 최대 길이가 7미터 정도 된다. 그냥 진짜 공룡만하다.)의 재현 박제를 천장에 매달아 놓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두었다. 나도 너무 유쾌해서 부리 사이에 뾰족뾰족한 것이 달려있는 모습을 확대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굳이 저건 치조골이 없기 때문에 이빨이 아니라 그냥 이빨처럼 보이는 부리라고 설명을 해두었다. 과학자놈들은 철저하군 감사합니다.

전시의 대부분은 새들의 박제였다. 우리가 상상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새들의 박제가 있고. 대체로 새들의 박제들은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고 무심하게 우리는 볼 수 없는 과거를, 혹은 누군가의 앞에 있는 내세를 바라본다.

나는 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새들은 대체로 너무 뜨겁고 작으며 부서질 것 처럼 약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파트였던 내 어릴 적 집에 거대한 새장을 만들어 거기서 앵무새를 포함한 새들을 길렀다. 내 방 바로 창 앞에 있었던 그 커다란 새장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이면 새들이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문조와 카나리아, 왕관앵무.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새들. 나는 높이가 2미터, 바닥 면적이 3제곱미터는 넘지 않았을 그 작고 커다란 새장에서 살고 있는 새들에게 어떠한 애착도 느끼지 못했다. 새는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었고 아버지는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슬프기 짝이 없는 새들의 사회를 지켜보는 왕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정말로 새를 사랑했는지 아니 아버지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 여러번 의심하곤 했다.

나는 그래서 새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다. 그들이 겁을 내고 도망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애도하는 모습을 내 방 창가에서 보았다. 내가 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표정이 없어 보이는 그들의 얼굴과는 다르게 그 작은 몸 속에 우리가 영혼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 한 명 분의 영혼이 새 한 마리에게도 똑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당신은 새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을까? 새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시의 중간. 나는 한 앵무새의 박제를 보았다. 먼지처럼 푸석해져가고 있던 어떤 커다란 앵무새. 나는 어째서인지 그 앵무새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회색의 깃털 안에 검은 유리로 대신한 그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앵무새가 나를 여기로 불렀다는 비상식적인 생각을 하였다.

나는 네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냐. 그렇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부른거겠지. 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리인으로서 그 앵무새의 박제 앞에 서는 것이 나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앵무새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 냄새를 맡고 내 눈을 쳐다보고 내 슬픔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모든 앵무새들이 그런 것처럼 그 앵무새의 박제는 나에게서 흥미를 잃고는 고개를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러니? 나는 묻고 싶었지만 애초에 박제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무언가의 흔적일 뿐이다. 나는 시간을 더 들여 더 많은 새들의 박제를 살펴보고 곧 다른 곳으로 떠났다.

공룡의 뼈들을 모아둔 전시관은 말도 안되게 멋이 있었다.


이걸로 나의 24년 도쿄 여행기는 끝이다.

오늘 아침 체중을 재보니 더 줄어서 앞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하얗고 지친 얼굴을 한 남자가 보였다. 바싹이라고 할 정도로 빠르게 말라가고 있는데 내가 나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실제로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다만 나는 세상의 작은 곳에서 다른 작은 곳으로 가는 것이 필요했다. 당신을 잃어버리는 여행이 되었어야 할 이 여행은 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음악을 좋아하며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의미도 없이 세 권씩 들고 여행을 가는 사람이며 카페 테이블에 앉으면 공룡과 로봇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계란 후라이는 써니사이드 업. 오믈렛은 플레인이 좋다. 여행을 가면 신발에 구멍이 날 때 까지 걸어다니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신발 하나를 버렸다.

좀 달라지기로 한 것도 있다. 바지가 좀 비싸더라도 마음에 드는 바지면 꼭 사기로 마음 먹었고 러닝을 할 때는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지 않기로 했다. 짐에 티셔츠를 적당히 싸기로 했고 기내 사이즈 캐리어만 고집하지 않기로도 했다. 가끔 그냥 이유 없이 여행 중에 낮잠을 자기로 했다.

그리고 새들과 화해했다.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나는 이제 새를 싫어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부디 새들도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새들은 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로 잠이 들기 전에 새 소리가 들리길 기다릴 때가 있다.

세어보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세 군데의 성지를 들렀다. 마사카도의 묘, 죠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도쿄 카테드랄이다. 탄게 겐조의 건축 미학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갔을 뿐인 도쿄 카테드랄이었는데. 대성당의 뒷자리에 앉자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나의 기도는 그러했다. 제가 당신 앞에 서게 될 때 조차 거짓과 불의로 서지 않게 해주소서. 나는 내가 무엇을 비는지 제대로 모르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유일한 친구인 당신은 내가 정말로 무엇을 위해 그런 기도를 했는지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24년 12월 28일의 글이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깃들지만. 때때로 장소야 말로 사람의 마음이 깃들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번 이야기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쓸까 싶어서 고민하다가 nujabes <Modal soul>을 올렸다. 시부야에 가보니 누자베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았다. 타워 레코드의 한 켠에는 그의 LP가 가득 쌓여있었고 어떤 가게에서는 앨범 이미지를 프린팅한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무슨 시부야 전통 민요 같은게 된건가 하고 빈정거리기는 했다만. 이해해주기 바란다 내 20대의 가장 소중한 순간 중 일부에 그가 있었다. 아마 그가 평생 그리울 것이다.

Gregorio Allegri가 작곡한 Miserere, Mei Deus를 듣는 것도 어울릴 것 같다. 시편 51편을 주제로 만들어진 성가이다.

<타니구치 요시오>
우연히도 내가 일본에 체류하는 도중 건축가 타니구치 요시오씨가 사거하셨다. 그의 아버지인 타니구치 요시로씨도 유명한 건축가로 다름 아닌 제국극장의 로비와 객석을 아름답게(그리고 불편하게) 설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또한 우연히 동선이 겹쳐서 이번 체류 기간 동안에 방문하였다. 황궁런에 대해서 썼을 때 저 건물은 누구의 설계일까 하고 궁금해져서 가봤다는게 바로 이 제국 극장이다.)

타니구치 요시오씨 본인은 캐릭터성을 두드러지지 않으나(말이 별로 많지 않다는 뜻이다), 뉴욕근대미술관 신관의 설계를 중정을 포함해 뛰어난 퀄리티로 해낸 것에 대해 유명세를 얻었고. 세련된 모더니즘 건축을 기반으로 한 미술관 설계는 정평이 나있다. 내가 그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도쿄국박의 호류지보물관이었는데 얕은 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작은 다리를 건너야 갈 수 있는 이 별관은 입문 조차도 정면이 아닌 옆으로 돌아가야 하는 특이한 구조이다. 또한 외곽을 둘러 싸고 있는 원형기둥들은 밖에서 보물관 안을 바라보는 것과 보물관 안에서 밖으로 바라보는 것 양 쪽에 기묘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과장을 좀 섞어서 말하자면 자연에 존재하지 않을 관념상의 직선과 투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물아일체의 장소라고 설명해도 좋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보물관을 보는 바로 그 순간 마음에 들었다.

풍부한 조광을 바탕으로 한 자연스러운 직선을 추구하는 점에서 묘하게 마음에 든다 싶었더니 교토국박의 남문과 헤이세이 신관도 그의 설계였다. 그는 탄게 겐조 건축 사무소에 한 때 적을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행기랑은 관련이 없다만, 왠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써두고 싶었다.



맛있는걸 먹지 않으면 여행은 단조로워진다. 뭘 먹어야지 어떻게 먹어야지 하고 고민하는게 여행의 절반 쯤은 될텐데 요즘 부쩍 식욕이 없는 나는 뭘 먹을 생각을 하지 않다 보니 여행의 컨텐츠가 몹시 단조로워졌다. 내가 여행을 가기 전에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던게 미스터 도넛의 도넛과 낫토를 넣은 흰죽이었는데. 흰 죽이야 그냥 호텔 조식 부페로 먹으면 되는거고 미스터 도넛은 지나가면서도 몇 번 씩 봤지만 귀찮아서 먹지 않았다. 지금 또 하나가 생각났다 맛 없는 나폴리탄을 먹어야지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내가 여행 중에 굳이 쓸데없이 찾아가봤던 건축물에 대해서 몇 개 적어두려고 한다. 건축물을 찾아가본다는 건, 애초에 별로 좋은 여행 컨텐츠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애초에 전문가도 아니고 유명한 미술품이나 공공기관이 아닌 한 자기 맘대로 들어가 볼 수 도 없는데. 멀리서 찾아가봤더니 외관 사진을 몇 장 찍고 끝낸다? 맙소사 정말 가성비가 안 좋은 여행 컨텐츠 같다. 공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겉에서 사진이나 좀 찍는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닐텐데 말이다.

<죠죠지>
죠죠지는, 이름만 들어도 죠죠러의 가슴을 끓게 만드는 이 곳은. 사실 1393년에 창건된 일본 정토종의 총 본산이다. 도쿠가와가의 가문 사찰로도 유명했던 이 절은. 2차 세계대전때 폭격으로 소실된 도쿠가와 가묘를 일부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관광객으로서 이 절에 대해서 말할 것은…없다. 단지 도쿄타워의 바로 아래에 있는 절이기 때문에 도쿄타워의 사진을 찍으면 엄청나게 멋있게 나온다. 그 외에 도쿠가와 가 묘로 들어가는 입장료가 500엔인데 개인적으로 에도막부가 너무 좋고 그런게 아니라면 보지 않는 걸 추천한다. 유명 관광지가 아닌 것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도쿄에 살고 있는 친구가 말했다.
애초에 여러분 대부분은 내가 죠죠지에 대해서 썼기 때문에 그런 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화려하고 돈이 많은 이 번화가 한가운데의 절이 쓸쓸한 이유는 어쩌면 절 경내 한 쪽 구석에 마련된 좁은 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길의 한 쪽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공양해둔 작은 미륵보살의 석상들이 줄을 이어 놓여있다. 석상들이 진짜 아이들이라도 되는 듯이 그 앞에는 바람개비가. 머리 위에는 털모자가 씌워져 있다.

<주일본 쿠웨이트 대사관>
시간 순서 상으로는 상당히 뒤에 방문한 곳이긴 하지만. 이 곳은 경사도도 높은 히지리자카(고개) 중간에 세워져 있는 이 동네의 명물 쿠웨이트 대사관이다. 설계는 다름아닌 탄게 겐조.
이 건물의 외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히지리자카를 올라가다 보면 따분해 보이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있다. 분명 따분해 보이는 직사각형의 건물인데 밑에서 보면 이상하게 건물이 공중에 떠있는 듯 하게 보인다. 어떻게 된거지 하고 헉헉 거리며 고개를 올라 가까이 가보면 베이스먼트와 로비층은 여느 건물과 다르지 않지만 3층 이상의 공간은 중간을 일부러 공백으로 지우듯 계단과 기둥으로만 이어두었으며 이렇게 바깥으로 공개된 땅에는 정원을 만들어두었다. 가장 큰 중앙부의 공백에는 자랑스럽게 쿠웨이트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구글에 검색을 해보기 바란다. 진짜 이상하다니까.

<국립 요요기 경기장>
이 또한 탄게 겐조의 설계이다. 그래서 제목에도 썼지 않은가 이것은 탄게 겐조를 찾아다니는 모험이라고.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굴곡진 용마루와 나선형의 지붕에 대해서는 이 경기장에 대해서 묘사하는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이지만.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고 찾아보니 1체육관의 경우 높은 장력을 이용해 매달림 지붕 방식을. 2체육관의 경우엔 원추형 천장을 통해 만들어진 절구형 건물이라고 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진 이후로 현재까지 현역인 이 경기장은 21년에는 국가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데. 하라주쿠를 갈 때 마다 보이는 이 경기장에 굳이 시간까지 들여서 방문한 이유는 역시 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때는 무슨 종합 격투기의 챔피언 전이 하는 중이라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하튼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장엄한 이 경기장의 모습은. 국가 대항전이야 말로 현재의 종교의식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각 격투가들의 팬들이 밖에서 오오 우오 하는 함성을 지르고 있어서 그 쪽에 신경을 쓰지 않고 구경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경기장 꼭대기부터 사면으로 내려가는 천장 곳곳에 새들이 앉아있는게 인상적이었다. 마침 석양이 질 때라서 날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너희들이 패배자들의 간을 쪼아먹는거겠지 하고 마음 속으로 말을 걸어보니 엄청나게 멋진 모습으로 편대를 지어 경기장을 한 바퀴 돌고 그랬다. 그래 믿고 있었다구.

<도쿄현대미술관>
내가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꽤 오래 전이라서 리뉴얼 작업이 완료되기 전이었는데. 리뉴얼 작업을 도대체 누가 한거지 하고 찾아보니 조 나가사카였다. (원래 건물의 설계는 야나기사와 다카히코)
아니 조 나카사카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나름의 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검색해봤는데 건축은 뺄셈이다 어쩌고 말을 한걸 보니 새삼스레 타니구치 요시오가 뉴욕근대미술관 신관을 설계 할 때 돈만 많이 주시면 건물을 아예 없애드릴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한게 떠올라서 그가 그리워진다.

도쿄현대미술관, 도쿄신미술관, 교토국박 등 최근의 일본 미술관은 어떠한 트렌드를 확실히 보여주는데 밝고 확장되어 있는 로비 공간. 빛을 충분히 받아들여 관람객들에게 휴식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하는 통로를 구성하고. 건물의 반 정도를 써서 전시실을 구성한다. 전시실이 너무 좁아지지 않을까? 상설전시보다는 특별전을 위주로 구성하는 일본의 최근 미술관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은 되지 않는다. 미술관은 길쭉해지거나 네모나지기보다는 가로로 긴 형상이 되는데 사람들은 공간에 대한 만족감 때문에 전시가 아무리 별로였어도 좋은 체험이었어 하고 만족하게 된다. 너무 비열하게 공격했나.

내가 위에 설명한 모든 것을 갖춘 바로 그곳 도쿄현대미술관은 공원의 한 쪽 끝에 위치해있다는 것 까지 해서 완벽한 가족들의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다. 지하에 아트 식기를 갖춘 패밀리 레스토랑을 갖춘 것까지 완벽해서 불만의 여지가 없다.

지하로 이어지는 길에는 물과 돌의 산책로라고 하여서 그야말로 징검다리 비슷한 것으로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는데 바깥에서는 볼 수 없는 숨겨진 장소같은 곳이라서 직접 가지 않고는 그 전모를 알 수 없게 해두었다. 풀이 없는 정원이구나 하는 느낌이라서 제법인데 조 나가사카! 같은 감상을 갖고 찾아보니 거긴 야나가사와 시절부터 있었던 장소라고 한다. 음 그렇구나.

참고로 2층의 카페는 영 별로였다. 점원이 엄청 많았는데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이런 생각만 든다.

<도쿄 주교좌 세키구치 대성당>
1899년 처음으로 지어졌던 도쿄 주교좌인 이곳은. 도쿄 대공습때 소실 1963년도 독일의 쾰른 교구의 지원으로 지금의 건물로 다시 지어지게 되었는데. 도쿄 대학 음향기사와 구조기사의 지원이 있었으며 설계자는 단게 겐조이다.
이곳이 내 여행의 목적 중 하나였던 이 곳은 성마리아 대성당이라고도 불리운다.

어느 곳을 가든지 전철이 쉽게 이어지는 도쿄 내에서 굳이 버스를 타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곳에 위치한 이 성당은, 현재 도쿄의 한인 성당 역할 또한 하고 있다. 성당을 찾아가려고 했던 날이 한국에서 탄핵 표결일인 12월 14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꽤 초조한 상태였는데. 도대체 이 딴 경기장이나 절을 찾아가보는게 무슨 의미인가 술이라도 사서 호텔방에 기어들어가서 유튜브나 보는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다. 그래 도쿄 카테드랄은 성당이잖아 기도라도 하자 - 라는 내 나름의 유머감각으로 하라주쿠에서 전차를 탔다. 플랫폼에 서서 유튜브의 실시간 뉴스 생방을 들었다. 어째서인지 내가 선택한 eSIM는 어째서 지하철에서 인터넷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전철에서 내리니 저 멀리 다리 너머 석양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토요일의 저녁이다. 사람들은 바쁘게 어디론가 떠난다. 대부분 집일 것이고 대부분은 가족들의 곁일 것이다. 집도 가족도 없는 나는 성당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여행을 떠나 오기 전 친한 사람들에게 이번주는 시위 못 나간다 라고 말하고는 꼭 한마디 농담을 덧 붙였다. 나 없는 동안 탄핵 가결 좀 시켜둬라. 누구는 그러마 했고 누구는 너무 어려운 걸 바라는거 아니냐고 했다만. 그게 농담만이 아니라는 건 다 알고 있었다.

버스에 내리니 정류장 앞에는 주교좌에서 만들어둔 걸로 보이는 작은 동방박사와 그보다 더 작은 아기예수, 그리고 마리아의 인형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서 하늘을 보니 나무 끝에 걸린 구름, 겨울의 저녁 하늘이 보였다. 아직도 해는 지지 않았다.

세키구치 대성당은 한국의 대형교회랑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작은 부지에 있는 성당이다. 도쿄 전체를 총괄하는 곳이 이 정도로 작은 곳이어도 될까, 요요기경기장의 4분의 1이나 될까 하고 전체 부지를 가늠하다가 내가 한국 교회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서 쓴 웃음이 나왔다.

본성당은 멀리서 보기엔 은색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방주처럼 보인다. 배처럼도 보이고 책처럼도 보이는 이 건물이 1963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건물이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원형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도로 알려져 있는 탄게 겐조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이 건물을 설계하였는데. 그의 묘한 유머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성당 건물에서 그가 정말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바로 전에 본 것이 요요기 경기장이었기 때문에 비교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짜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국가 규모의 스포츠 대회란 왜곡된 열정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거 설계한 건물 중 가장 유명할지도 모르는 신주쿠의 도청 건물 - 많이 본 건물이기 때문에 이번엔 굳이 가보지 않았으나 - 에서 느껴지는 장엄한 차가움은 그가 국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어렴풋하게 추측하게 해준다. (1청사의 외양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모티브를 많이 따왔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이 그의 비틀린 유머감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성당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봐야 한다. 오후 5시에까지만 일반에 공개되기에 아슬아슬하게 4시가 되기 전에 도착한 나는 고갯길을 거의 뛰어올라 성당에 도착하였는데. 나도 모르게 숨이 차서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성당의 문을 열었다.

성당의 안은 어둡다.
사무실에서는 몇명의 수녀와 봉사자들이 일하고 있지만 성당에 들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곳은 넓지도 좁지도 않으며 의자들로 가득차있다. 경내는 어둡지만 아주 어둡지는 않다. 눈이 어두운 사람도 충분히 사물을 인식 할 수 있을 정도로는 밝아, 나는 당 내의 가장 뒷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아서야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이 곳은 석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좁고 어둡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다. 제단은 저 앞에. 희미한 조명은 제단 위의 십자가를 비추고 있고. 십자가 위로 각이 진, 자연에서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직선. 그 회색의 벽이 석굴의 모습이 되어 그 위에 놓여있다.

Averte faciem tuam a peccatis meis et omnes iniquitates meas dele.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돌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없애 주소서.
Cor mundum crea in me, Deus, et spiritum firmum innova in visceribus meis.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Ne proicias me a facie tua et spiritum sanctum tuum ne auferas a me.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나는 성당에서 1시간 동안 기도를 하는 사람처럼 앉아있다 친구가 보낸 탄핵이 가결되었다는 메세지에 일어나 성당을 나갔다.
5시를 넘기고도 성당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던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24년 12월의 글이다.


다음은 내 티스토리에 비공개로 게시되어 있는, 지추 미술관에 관한 글의 일부인 모네의 수련에 대한 글이다. 17년 1월의 글이고 나는 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서 쓰다 마지막 결론을 내지 못하고 글을 닫았기에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해도 괜찮을 듯 하다.

(2)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수련Warter lilies

바닥이 이상하다. 흰색의 작은 (일반적인 주사위보다 작은) 정사각형으로 바닥을 깔았다. 물 빠짐과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것 일까. 습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까. 신발을 벗고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습기가 가득찬 공간에 있다는 착각이 든다. 그렇다 그것은 착각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 습기란 작품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는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한 공간에 있다는 착각은 작품 앞에 서있는 때 더 강해진다. 모네의 수련. 늪의 표면에서 터져나온 색과 생명.

전시 공간 안에 수련 다섯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이즈에 따라 배치 한 것인지 뒷면 양쪽에는 100*200의 작품이. 양 옆에는 200*200의 작품이. 그리고 정면에는...200*300의 두 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걸려있다. 압도적인 이미지. 물기가 하나도 있을리 없는 공간에 느껴지는 습기. 높은 천장으로 소리가 난반사되어 울린다. 들릴리가 없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수련이란 원래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었던가. 어쨰서 이렇게 거대하고 무질서하며 깊은 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늪으로 가득한 이 전시공간에서 수련이라는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혼돈이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그 혼돈에서 터져나온 생명이다.

사실 나에게 이 작품은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 지추 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이 수련을 보기 위해서 였다. 같은 여행에서 오하라 미술관의 수련을 보았지만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동양화를 전공하였는데 몇 안되는 서양화 그림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같은 그림이 식탁의 내 자리에서 보이는 곳에 걸려 있었는데 검은 밤과 숲을 그려넣은듯한 그림으로 항상 아무도 이 그림의 윗쪽과 아랫쪽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농담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수련을 몹시 닮았다.


모네의 그림을 그리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때때로 그리워 질 때가 있다. 그것은 모네에게 느끼는 그리움이라기 보다는 내가 어릴 때 부터 가장 많이 봤던 최초의 회화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이번 도쿄여행의 계기는 우에노의 서양미술관에서 하는 모네전에 수련 중 몇 점이 온다는 기사를 본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말을 꺼내보았지만 그 때 이미 나에게서 마음이 떠나있었던 여자친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간다고 하면 겨울 쯤이 되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어떤 변덕으로 나는 도쿄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혼자였다.

6일짜리 여행이었지만 실제로 여행이 가능한 일정은 4일 뿐이었고. 미술관의 휴일을 생각하면 그래도 인파를 피해서 관람을 할 수 있는 날은 금요일의 낮시간 잠시 뿐이었기 때문에 모든 일정은 수련을 보기 위한 일정을 먼저 정한 후에 하나씩 정했다. 아메카지를 하려고요. 러닝을 하려고요. 라고 말했지만 그건 모두 거짓말이었다. 나는 단지 한 점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여행을 왔다. 그 그림을 볼 수 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요즘 그릇이 깨져버린 사람처럼 자주 슬퍼하고 쉽게 화를 낸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질 때 마다 밖에 나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면서 러닝을 하고 긴 문장을 읽지 못하게 되어 불을 끈 채로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를 한다.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는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소원을 빌지 않기 위해서 너무 슬퍼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기도이다. 사람들은 세상 어디엔가 기도를 들어줄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말들을 한다. 자신의 말을 들어줄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영혼에 구원이 된다. 기도를 하는 행위 자체가 그 영혼을 위로한다. 하지만 나는 가끔씩 변덕스럽게 기도를 할 때 마저 거짓말을 한다. 그저 평화를 바란다고.

그렇게 거짓말쟁이가 되고 있기 때문에 바싹마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엔 식욕이 별로 없어요 라고 웃으면서 말을 하지만, 며칠 예전처럼 먹어보았는데도 살은 찌지 않고 그대로 세상 어딘가의 구멍에 떨어진 것처럼 체중이 다시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먹는 것은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그냥 눈 앞에 있는 것을 먹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여행에 와서도 무언가를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아무 것이나 먹었고. 야채가 부족한데 싶어서 호텔 조식을 두 번 먹은 것 외엔 정말 되는대로 먹었다. 커피? 향이든 뭐든 상관없이 커피면 그냥 아무 거나 먹었다. 제대로 된 커피는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여행 사실 상의 첫날 금요일. 황궁런을 뛰고 애플워치까지 사고 나니 배가 고플 만 했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우에노로 향했다. 아침에 호텔 조식을 성의있게 먹었기 때문이다. 흰 쌀죽에 명란젓과 낫토를 듬뿍 넣고 슬슬 비벼서 먹는 것이 내가 일본 호텔에서 제일 좋아하는 조식이다. 계란 후라이(써니사이드 업이어야 한다)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우에노의 서양미술관은 내가 언제나 좋아하는 곳이다. 미술관의 카페 겸 레스토랑 스이렌(그렇다, 그곳의 이름 또한 수련이다.)은 풍광이 좋아서 한가할 때 가면 기분 좋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를 보고 그곳에서 밥을 먹어야지 하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가을. 12월이 되었는데도 도쿄는 가을 같았다. 도쿄 사람들 나름의 고충이 있었겠지만 나는 바람이 쎄지도 춥지도 않은 12월의 도쿄가 마음에 들었다. 황궁런을 이미 한 번 해봤기에 방한 도구를 꽁꽁 싸매지 않아도 러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이 정도 날씨라면 매년 12월에는 도쿄에 와서 달리기를 해도 되겠어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우에노 공원은 언제나처럼 사람이 많았고 사람보다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은행잎들과 융단처럼 깔린 은행잎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떼를 지어 개찰구에서 쏟아져나왔다. 저 때는 뭘 해도 친구들과 함께라면 즐거울 시기이다. 나는 좀 외따로 떨어져 가방에 넣어둔 책을 읽을 생각이나 하던 아이였지만 그래도 친구들이랑 있는게 싫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우르르 어딘가로 향한다 서양미술관의 모네전 보다는 국립과학박물관에서 하고 있는 조류에 관한 특별전이 목표인가보다. 나도 저 전시는 꼭 보고 싶다.

아침에 편의점에서 티켓을 미리 사뒀기 때문에 줄을 서지 않고 수월하게 입장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네 전이 도쿄에서 개최 후 내년부터는 교토에서 또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아버려서(편의점의 예약 티케팅 예약 리스트에 떠있었다.) 내가 왜 기를 쓰고 여길 이 시기에 왔는가에 대해서 회의가 잠시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괜찮겠지. 미술관 앞에 웨이팅을 위한 배리어를 설치해둔게 말도 안되게 긴걸 보고 내가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기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좁지도 않은 서양미술관의 앞마당에 구불구불하게 줄을 설 수 있는 곳을 만들어두었다.

* 혹시 모르니 써둔다. 도쿄의 서양미술관에서의 전시는 25년 2월 11일 까지이고, 교토의 교세라미술관(아이구)에서 25년 3월 7일부터 6월 8일까지. 그리고 도요타시미술관에서 6월 21일부터 9월 15일까지 전시가 이어진다.

사람은 적지 않았지만 모네 전 관람은 1시간을 조금 넘겨서 다 볼 수 있었다. 모네 전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아는 모네이고. 당신도 모네에 대해서는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전시에 대해서 코멘트 하자면 전시품은 충실했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작품들로 잘 구성되어 있었다.

5개인가로 나눠져있는 전시 중에 해외에서 가져온 작품들을 모아둔 3전시의 작품들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두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보존의 목적이 아닌 이상 작품의 사진 정도는 마음 껏 찍게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3전시실에 이르자 사람들이 모두 작품을 보지 않고 온 힘을 다해서 사진만 찍고 있는 것을 보자 생각을 바꾸었다. 나도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하지만 위대한 회화를 볼 때 마음 속에 남는 그 충격과 감상이야 말로 회화를 보는 진정한 보상일텐데 사진을 찍어서 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으면 그 회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가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여간. 아무렴.

전시를 다 보고서는 서양미술관의 상설전을 보았다. 훌륭한 작품이 꽤 많다. 교과서에나 있는 그런 작품들도 있어서 나는 꼭 상설전을 챙겨본다. 다 보고 나니 힘이 쭉 빠져서 미술관 굿즈를 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모네 특별전 굿즈들은 모두가 사고 싶어했는지 굿즈를 사러 입장하는 줄이 미술관의 중정부터 이어져있길래 포기하고 상설전의 굿즈를 조금 샀다. 엽서와 마그네틱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는 기대하던 카페 스이렌으로 가서 파스타와 커피를 시켜서 먹었다. 모네 특별전을 기념해서 뭔가 웃기는 특별 메뉴라도 있을줄 알았는데 만날 나오는 그 뭐냐 파스타+디저트+커피의 세트가 전부였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리 싸지도 않는 세트인데 좀 웃기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문득 교토국박에서 마신 블렌드 커피 류노스케가 생각났다.
자리는 어디에 앉아도 미술관의 중정이 잘 보인다. 공항에서 사온 메모장에 러닝을 할 때 봤었던 큰부리 까마귀의 그림을 그렸다. 까마귀들은 지성을 가지고 사람을 쳐다보는 것이 제법 무섭다. 하지만 그 까마귀는 내가 뭔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날아가버렸다. 왜?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눈이라도 쫄 생각이었던거야?


모네의 전시를 보던 중, 어떤 그림 앞에서 나는 울었다. 나라는 그릇이 깨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쉽게 우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울었다는 말에 몹시 놀라는 지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흐느꼈다기 보다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서 계속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두었다. 어떤 그림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꽃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 색과 형태의 흐트러짐이. 너무나 영원같고 덧없어서 눈물을 흘렸다. 아니 거짓말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노쇠한 화가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너무나 기가 막혀서 울었다.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다. 이 그림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서 괴로웠다. 말이 흘러넘치는데 그 말들이 그대로 바닥 어딘가에 흘러 떨어지고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그런 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고독했다.

나는 꽃을 찾으러 이곳에 왔지만. 그것 뿐이었다. 꽃을 찾는 일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덧없이 사라져 버릴 그런 마음이다. 어쩌면 나의 유일한 친구인 당신이라면 내가 어떤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알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다만. 다만 그 조차도 큰 의미는 없는 일이다. 하찮기 그지 없다.

잘 생각해보면 사람의 생명만큼이나 그 소원이란 대체로 하찮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 꽃을 당신과 함께 보고 싶었다 라든가.


24년 12월의 글이다.


<이전 까지의 스토리>
나는 일본에 여행을 가서라도 러닝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실제로는 그게 꽤나 바보 같은 아이디어란 것을 깨닫는다.

이 글을 쓰면서 들은 것은 Laufey - Let you break my heart again 이다. NPR에서 한 라이브 버젼 밖에 없는 줄 알고 있었는데. 22년에 발매한 앨범에 (스튜디오는 아니고 이것도 라이브지만) 수록곡으로 있는 걸 발견해서 열심히 듣고 있다. 이 아티스트에 대해서는 몇 번 적은 것 같지만 모든 것이 정확하다 박자와 음정, 이 사람이 부르는 노래의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피치포크의 어떤 앨범 리뷰에서는 심술궂게 그에 대한 수식어로 틱톡이 가장 사랑한 현대 재즈 보컬리스트라고 적었다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티스트의 기량은 항상 모든 심술궂은 말들을 반박해낸다. 어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정도로 엄청난 곡은 아니긴 하다. 나도 그냥 피치포크에서 뭐라고 하면 일단 빈정거리고 싶은거다.


<시부야>

6년만의 시부야는 엄청난 곳으로 변해있었다. 내 딴에는 히카리에 정도가 최신 트렌드였다만. 어느새 생긴 시부야 스크램블과 스트림 때문에 길을 찾는게 정말 어려웠다. 일본은 올해 25년 엑스포를 준비하고있기 때문에 좀 번화가다 싶은 곳은 어디나 공사 중이다. 특히나 시부야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공사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많이 바뀌었는데 또 뭘 바꾸겠다고? 어떤 느낌이냐면 교차로와 거리들을 너무 꼬아둔 나머지 직관적으로 눈 앞에 보이는 곳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한 거리가 되었다. 도겐자카도 이제 더 이상 라멘이나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원래부터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쇼핑이 아니면 시부야에 올 일이 없는데, 앞으로 더 시부야에 올 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부야의 사람들은 열심이었다. 어딜가나 관광객이 많은 도쿄지만 시부야와 하라주쿠는 좀 특이하게 일본인들의 비율이 꽤 높은 느낌이다. 너무 복잡해진 거리 때문에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흥미를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시부야에 흥미를 느낄 사람이면 역시 일본의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원래 시부야의 완전한 중심지였던 하치공 광장 근처에 거대한 주술회전 광고판이 있는 것을 보고 엄청 웃었다. 주술회전에서는 작 중 시부야에서 사고가 터져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는다. 야 너희들 여기 있다간 다 죽어 이런건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시부야에 오면 으레 갔었던 음악감상 카페 같은 것은 가지 않았다. 더 이상 뭔가를 먹는 것에도 듣는 것에도 미련이 없는데 그런걸 해서 뭘 하겠어 하는 생각이었는데. 거꾸로 좀처럼 들르지 않는 타워레코드에서 잘 모르는 음반들의 청음을 하다보니 묘하게 즐거워졌다.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음악을 듣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정작 음악을 열심히 들을 때는 타워레코드 놈들 음반 리뷰들은 다 엉망이야 라고 투덜거리면서 1층만 훑어보다 나가곤 했는데. 7층의 구석진 코너에서 추천 음반을 청음하고 있노라니 내가 오랫동안 잊어버린 어떤 애정을 다시 찾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음반 리뷰들은 엉망이고 알 수 없는 말이나 길게 늘어놓았지만. 거기에 음악이 있다는 것이, 아직도 이렇게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다음에 들른다면 꼭 맘에 드는 엘피를 한 뭉치 정도 사서 가야지 하고 다짐했다. (이번엔 안 샀다는 이야기이다. 말했지 않는가 유니클로 파커코트 엄청 두껍다고)

시대는 틱톡의 시대가 되었고. 3분도 못참아서 40초의 음악만을 듣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고리타분하게도 판 위에 바늘을 올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나에겐 안심이 되었다.


<긴자-유락쵸-신바시>

한 때 유락쵸에는 무인양품의 비공식적인 본점이 있었다. 거대한 건물에 무인양품 물건이 가득차 있는 멋진 곳이었는데 그 곳이 사라진 이후로 나는 유락쵸를 조금 덜 좋아하게 되었다.

전에 내가 이 거리에 대해서 썼던 글이 생각난다. 회사원으로 가득해서 무심코 눈이 마주친 사람들마다 다 나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속해 있는 거리는 여기가 아닐까 싶다. 라고 했던가. 이제는, 이제는 택도 없지. 나는 이제 사시사철 회사원의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대체로 멍하고 풀린 눈을 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황궁에서 부터 도쿄역까지의 거리를 깨끗하게 정비 중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몰라볼 정도로 깔끔해져있었다. 마루노우치 스트리트 같은 속빈 강정(퉷)도 생기고 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가게들은 엄청나게 사라져서 여기가 내가 알던 도쿄역 인근이 맞나 하며 투덜거리다가 유락쵸 근처로 가보니까. 사람이 많고 시끄럽고 좁은 곳에 복작복작한 것이 내가 알던 유락쵸가 맞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심지어 4억엔? 정도 최종 1등 상금이 붙어있다는 점보 어쩌고 복권을 사려고 500명 정도가 줄을 서있는 모습을 보자(500명이란 말은 농담도 과장도 아니다. 나는 운동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 이것이 유락쵸지 하는 생각에 흐뭇해졌다.

이번 여행 중에 가장 많이 간 곳이 이 도쿄-유락쵸-긴자 라인이다. 나이가 드니까 새로운 맵을 열고 싶지 않다는 그런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서 꼭 가야할 것이 아니면 다른 곳에 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대체로 이 동네에 있었다. 어쨌거나 나에겐 익숙한 동네이고. 긴자는 좀처럼 가게들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도쿄도에서도 압도적으로 길을 찾기가 쉬운 곳이다. 긴자의 버버리 매장은 아직도 위치를 알 고 있다. 신입사원 때 쯤에 아직 버버리 같은 것에 대해서 동경이 있었던 그 시절 아시아에서 버버리 코트를 산다면 바로 거기지 하는 추천을 받아서 갔는데. 무려, 놀라지 마라 무려 버버리 코트가 90만원이었다. 지금은 350쯤 할 것 같은데. 어…하여간 거기서도 어깨에 사이즈가 맞지 않아서 코트를 사지 못하고 내심 안심한 기억이 있다.

이제는 긴자에서 간다면 츠타야 서점이나 유니클로 말고 딱히 가고싶은 곳도 없다.

긴자 미츠코시 지하에 벤치가 있었던 곳에는 벤치를 치워두었다. 어느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본에 출장을 온 ㅊ차장과 이미 30일을 넘긴 장기 출장 중이었던 나는 시간을 맞춰서 만났는데. 일본에 왔으니 뭐라도 그럴 듯한 걸 해야지 하는 ㅊ차장의 의견에 굳이 긴자에 가서. 그 지하의 식품관에서 본 것 중에 가장 신기하게 보였던 복숭아 빛깔을 한 커다란 딸기를 사서 나눠먹었다. 그렇다 지금은 없어진 그 벤치에서 먹은 것이다.

뭐냐 이거 맛이 특이하다. 그러게요. 너 일본에 대해선 뭐든지 아는거 아냐? 제가 일본 대통령이라도 되나요 뭐든지 알진 못해요. 같은 소리를 하면서 ㅊ차장(차장이라고 하지만 나에겐 그냥 형 같은 사람이었다.)과 좀 잡담을 했지만 ㅊ차장은 긴자는 역시 너무 복잡하다고 진절머리를 내며 숙소로 돌아가버렸다. 왜 미국에서 태국으로 가던 길에 여길 들른 걸까? 그 때는 이해가 안 갔지만. 글쎄 지금도 이해가 잘 안간다.

하지만 세어보면, 내가 당시의 ㅊ차장과 비슷한 연차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왜 ㅊ차장이 일본에 들렀는지 알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시나가와>

시나가와 같은 곳을 왜 좋아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오해가 있다 나는 시나가와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도쿄 도내 어디를 가더라도 1시간이면 도착하는 탁월한 교통편의성을 높이 사는 것 뿐이다. 이번에 황궁런을 하면서 느낀거지만 다음엔 꼭 도쿄역 근처에 숙소를 잡고 매일매일 황궁런을 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애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한 300밤 정도는 시나가와에서 잤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교통이 편리하면서 비교적 조용한 곳이 그렇게 많지 않다. 잠깐만 너무 이상한 말인데 일단 시나가와는 하나도 조용하지 않다. 그나마 조용하다는 평판에 도움을 주던 다카나와의 상가건물 몇개가 통채로 철거되었고. 더럽게 비싸고 맛은 없던 싱가폴 게요리점도 사라지고 말았다. 더럽게 비싸고 맛이 없더라도 사라지는건 다른 문제이다 아쉬운 건 아쉽다 이거다.

황궁런을 뛴 후, 러닝이 그렇게 편안한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번 시나가와 숙박이 마지막 시나가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핑계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다이바나 아라카와에 가서 러닝을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3일 동안 내내 시나가와 근처를 달렸다. 골목 하나 상가 하나 전부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분히 감상적인 나의 시나가와에 대한 작별인사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말도 안되게 비싸져서 더 이상 가성비가 좋다고는 도저히 말 할 수 없게 된 다카나와 호텔에 대한 작별 인사라고 해도 좋다.

시나가와 근처를 달리기로 한 첫번째 날에는 시나가와 역을 가로질러 소니 건물까지 간 다음 러닝을 시작했다. 덴노즈아이루와 부둣가를 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시나가와라고 한다면 그 동네를 떠올릴텐데 나는 거기에 가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냥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언덕처럼 경사가 있는 다리를 건너자 끝에서부터 천천히 바다가 보이고. 다리를 내려와 사거리를 건너 공터 옆을 지나자 야구를 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부둣가의 컨테이너 하역장이 가까워 먼지가 많고 트럭들이 점잖은 거인들처럼 신호를 지키고 섰지만, 막상 스치기만 해도 박살이 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아 이렇게 먼지가 많다니 완전 실패다 부둣가 달리기에 이상한 로망을 갖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바다 옆 물류 지대를 뛰었다. 낄낄 웃음 소리가 나왔다. 상상도 못하게 맹렬한 바닷바람이 불어서 순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온이 분명 2~3도 정도 였을텐데 이 추위는 뭐지 하고 생각하며 부둣가를 달렸다.

돌아오는 길엔 부리또를 사 먹었다. 된장국에 생선구이라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나에게도 일본인에게도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돌아오기 전 날 마지막 날에는 호텔 주변을 뛰었다. 호텔 부지를 뛰기엔 좀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어서. 고갯길을 달려 내려가 할 수 있는 한 - 신호등이 허락하는 한 - 멀리 북쪽으로 달렸다가 방향을 꺾어서 커다란 사각형을 그리며 달렸다. 해가 뜨기 전의 밤이었고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때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부지런한 일본인들은 뭐지 이 미친 새끼는? 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동네 골목길에서 러닝을 할 정도로 짜증나는 인간은 일본에도 몇 없었을 것이다. 골목에 대해서 뭐라고 묘사를 하면 좋을까.

나는 사실 이 동네의 골목길을 알 고 있다. 출장을 와서 숙소에 돌아가면 보통 심야였고 그러면 나는 그대로 짐만 풀고 일을 하다가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걸로 자는 걸 대신했다. 때때로 시간이 남으면 호텔에서 기어나와 멀지도 않은 이 동네를 혼자 산책하곤 했다. 어디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지. 어디에 자판기가 있는지 대체로 알 고 있다. 어느 기업인가 새로운 연수원을 만든다고 역시나 공사를 하고 있어서 내가 좋아하던 나무가 없어진 것을 보고 꽤 기분이 나빴지만 외국인인 내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그냥 그렇게 골목을 달렸다.

차갑게 낮아진 공기가 천천히 떠오르는 해에 달궈지는 걸 느껴보려고 노력하면서. 계속해서 러닝을 했다.
다음 언젠가는 너무나 먼 훗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24년 12월의 글이다.


며칠 째 몹시 아프다. 여행기를 쓰면서 여행을 다닌 시기 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은 생각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생일날을 독감 3일째와 맞으면서 겨우 집에서 기어나와 우유와 롤케익, 군고구마를 샀다. 불쌍한 초등학생의 구호식품 같네 싶어서 롯데리아에 들러서 버거도 두개 샀지만 하나를 다 먹지 못했다. 목이 너무 아프다.
이번 여행을 하는 내내 말이 넘쳐 흘러서 고통스러웠다. 내뱉지 못한 말들은 원형으로 서로의 꼬리를 물며 커다란 그림을 그렸고 나는 내가 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12월 14일 도쿄 주교좌의 마리아 대성당의 뒷자리에 앉아있다 깨달았다. 고독보다 불행한 것은 쓰여지지 못한 글이다. 나는 계속해서 쓸 생각이다.

이 글을 쓰면서 들은 것은 Orihusay - Eternal Slumber 이다. 많은 시부야계가 솟아 올랐다 사라졌고 누자베스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설이 되었다. 이제 누자베스는 거의 시부야의 전통민요 같은게 되어서 티셔츠까지 파는 그런 아티스트가 되었는데. 과연 그를 따라갈 아티스트가 있을까? 모르겠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의 스타일을 따라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유튜브 로우파이채널에나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음악이다. 너무 가혹한 평가라고? 설마…


내가 어디까지 얘기 했더라. 아메카지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는 얘기까지 했고 그들에게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패션으로 피의 복수를 한다면 역시 엄청난 패션력과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서 24년 전국 고교 패션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그 정도의 스토리가 필요하겠지?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복수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다.

바로 전의 글에 썼던가, 내가 결정적으로 잘못 생각한 것 중에 하나가 러닝용 도구를 너무 많이 챙겼다는 것인데. 비싼 돈을 들여서 킹사이즈 베드 룸을 고른 주제에(심지어 혼자 쓴다) 러닝용 셔츠를 매일 밤마다 대충 물 빨래를 해서 걸어두면 된다는 생각을 안 했다. 대체로 러닝용 의류들은 세척이 장난 아니게 쉬운데 못생김을 댓가로 이런 무시무시한 힘을 얻은걸까? 하여간 러닝용 티셔츠를 4세트나 챙겼는데 실제로 쓴 건 러닝용 셔츠+바지+바람막이 뿐이었다. 바람막이야 애초에 세탁을 하는 의류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황궁런을 한 첫날 11시에 방에 들어와 왠지 심술궂은 기분이 들어 땀내가 나는 셔츠를 뜨거운 물로 촥촥 씻어서 걸어놓았더니…다음날 아침 깔끔하게 말라있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옷을 입고 러닝을 했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동행이 있었다면 꽤나 민폐여서 할 수 없는 방법이겠지만 정작 나 본인은 그렇게 깔끔한 사람이 아니라서 전혀 상관없었다. 그래서 3세트나 되는 러닝용 의류는 전혀 쓰지도 못하고…그냥 자리만 차지했다.

이렇게나 캐리어에 공간이 남을거면 최대한 유니클로가 아닌 옷을 입고 여행에 올 걸 하는 무의미한 생각을 하면서도, 네 여러분 여행의 사실상 첫날이었던 금요일에도 아메카지를 시도했습니다.

<아메카지 1트, 우에노의 아메요코>

그야말로 10년 만에 우에노 근처의 아메요코 시장을 가서 유명한 아메카지 편집 스토어들을 돌아다닌건데. 나는 사실 아메요코에 그런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시끄러운 술집이랑 노점 있는 곳이 아닌가 정도로 이제까지 생각해왔고. 우연히 지나치다가 한 번 들른 후로는 올 생각도 안한 곳이었다.

아무리 날티를 내봤자 묘하게 단정한 느낌의 아르켓 헌팅 자켓에 아르켓 진즈를 입은 저는 도대체 어떤 멋쟁이들을 만나게 될 까 두근두근 거리면서 아메요코 시장을 향했습니다만. 과거의 나를 찬양하라. 예전에 내가 기억했던 대로 그냥 시끄럽고 노점이 많은 곳이 맞았다. 지나가는 옷가게 마저도 AI로 각종 고양이들과 트럼프 대통령을 디자인한 프린트 셔츠들을 잔뜩 진열해놓은 곳이나 있었을 뿐. 그 외엔 지나치게 털옷이거나 지나치게 가죽옷인 가게들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5분을 넘게 걸어서 그나마 유명한 ㅎ점포에 도착했을 때는 기대가 거의 없었으나, 역시 유명한 곳은 달랐다. 꽤 괜찮아 보이는 거친 자켓과 클래식한 디자인의 청바지들. 그리고 너무 유명한 나머지 현금을 잔뜩 이고 지고 온 한국인, 중국인 하여간 여러나라의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관광객놈들아.

나는 돈이 있다는 티를 내려고 비싼 자켓을 들춰보기도 하며 열심히 구경을 했지만. 돈 있는 티는 중국인들을 당해낼수가 없었던게 도대체 왜 청바지 똑같은 디자인을 4장 씩 사는거지? 왠지 기가 죽은 나는 옆에 있는 그 가게의 분점에 가서 친절한 응대와 상담을 받았으나. 원래 목적했었던 브랜드는 없었고 웨어하우스 진의 한정판이라고 주장하는 바지를 판촉하려고 하셔서 (비쌌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웃으면서 인사했다. 예쁘기는 예뻤기 때문이다.

<유니클로 1트, 긴자의 유니클로>

촌스럽다고 하지 마라. 내가 도쿄에 제일 많이 가던 시기에는 긴자의 유니클로 플래그십 스토어가 제일 간지나는 유니클로였다. 현재 도쿄에 살고 있는 선배의 말로는 그 건물 디자인이 너무 이상한 관계로 미어터지는 관광객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 물건이 그리 많지 않다고. 그러면서 추천해 준 것이 유락쵸의 유니클로였는데. 그 곳의 이름은 도쿄 유니클로이고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안 그래도 선배와 저녁을 할 약속이 있었는데. 나에게 면세 셔틀을 시키는게 주 목적이었던 선배가 유니클로 가실래요? 살거 없어요? 살거 있죠? 아 여기 유니클로가 딱인데. 하면서 나를 마구 충동질 하였으나. 기억하라 유니클로와 동키호테는 사람이 갈 곳이 못 된다. 어찌저찌 일본여행을 가면 한 번은 가게 되지만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다. 나도 그래서 주로 갔던 곳은 단층으로 되어 있었던 아키하바라 유니클로였다. 그런 조그만 곳에는 관광객들이 덜 몰린다. 도대체 왜 그럴까 너희들은 크다고 뭐 너희가 옷을 백점씩 사는 것도 아닐텐데 말야.

사려고 했던 것은 정확히 정해져 있던게 유니클로U에서 나왔던 롤업백이었는데. 실은 한국에서 발매되자마자 뭐지 이거 하고 클릭해서 기계적으로 샀습니다. 사놓고 보니 너무 좋아서 왜 이런 좋은 가방이 나온거지 하고 당혹스러워서 보니 다들 사고 싶어서 난리가 난 아이템이었다. 적당히 세련되고 적당히 싸고 후루룩 펴면 수납력이 아주 좋아서 한국에서 메인 가방으로 쓰고 있다. 근데 그걸 다른 색으로 하나 더 사고 싶다는게. 나의 요즘 이상한 습성. 뭔가 하나를 샀는데 아주 좋아 -> 그럼 하나를 더 사면 더 좋겠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논리인데 하여간 옷장에 똑같은 옷이 자꾸 늘어난다. 그런데 그 롤업백의 마지막 재고가 제가 일본에 도착하기 이틀 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도쿄에만 없는걸까? 하여간 일본 유니클로의 시스템에서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겨울엔 코트만 입는다는 나의 정책을 무시하고 하이브리드 어쩌고 한 파카 코트와 한국에서 품절이지만 딱히 살 생각은 없었던 셔츠를 샀다. 같이 줄 선 중국인들이 30점씩 사는데 나 혼자서 1점을 사는 것은 좀 바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면세품 계산의 줄이 엄청나게 길고 그 계산 속도도 느려서 5점 정도는 사야 그 줄 서는 시간이 보상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여간 유니클로의 큰 규모 매장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뭐 패스트 리테일에서 공짜로 옷을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막 바닥에 앉아서 뭔가 계산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가족들이 태그를 이뤄서 한 명은 줄을 서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옷을 주워오고 그러는데.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는데도 줄을 서야 했다. 그것도 꽤 긴 줄이어서 나는 너무 후회가 되어(이것이 첫번째 후회가 아니었다.) 그냥 집(호텔)로 가버릴까 유니클로 따위 없어도 되지 않나? 유니클로가 우리나라에 한 짓을 생각하자 막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2층은 더욱 난장판이었다. 묘하게 무신사 티가 나는 옷을 입은 청년들이 앞다투어 지나갔고 각 나라 사람들이 각 나라의 말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 이것이 지옥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입장을 한 이상 시간을 최대한 들이지 않고 뭔가 사긴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코트와 셔츠를 산 것이다.

나는 딱 2점을 들고 계산대에 줄을 섰으면서 너무 후회가 들어서(이것이 마지막 후회가 아니었다.) 그냥 이걸 버리고 집(호텔)에 갈까 아니면 그냥 옆에 진열대에 놓인 목도리라도 쓸어담을까 하고 있었는데. 내 바로 앞에 서있던 마른 남자가 딱 1점. 파커 베스트만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아 그래 세상엔 저런 지혜로운 사람이 있구나 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지혜로다 이러고 참고 있었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길고 긴 기다림이 필요 없이 그냥 면세가 아닌 줄을 서서 옷을 계산하고 가면 될 것을. 그 사람은 딱 한 점 파커 베스트를 들고 현금으로 깔끔하게 계산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내 차례가 되어 여권을 제시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인과도 같은 모습에 질려서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성난 러시아인(내 뒷 차례)의 호통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여권을 꺼냈다. 도대체 뭐였을까 그 사람.

<아메카지 4트, 에비스의 W와 J>

여러분에게 하나하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계속해서 도쿄 도내의 유명 아메카지 매장을 찾아다니면서 아메카지를 테스트해보았다. 예를 들자면 2트쯤 되었던게 마루노우치 스트리트의 빔즈 플러스 매장으로, 일단 바버를 말도 안되는 가격에 팔고 있는 것에 좀 질린데다가 어떤 사이즈로 입어도 팔이 짧아서 아메카지가 맞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일본에서 사는 옷들은 대부분 팔 길이가 맞지 않는다. 내가 팔이 약간 긴 편이긴 하지만 애초에 일본에서 유니클로 옷만 죽어라고 사는 이유가 팔길이가 맞는 옷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슬램덩크의 등장인물들은 평소에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얘네는 나이키 갸쿠소 마저도 팔이 짧은데 혹시 겨울에도 반팔만 입고 다니는 걸까. 오기가 좀 들어서 마루노우치에 그럴 듯한 옷 가게는 다 들어가봤는데 대체로 몸통은 엄청나게 좁고 팔은 지나치게 짧았다. 여행 중에 입은 것은 아르켓에서 나온 헌팅 자켓인데 나에겐 좀 커서 팔을 접어서 입고 다닌다. 이 정도 천 크기면 일본 기준 엠사이즈 옷은 세벌도 만들겠다 싶다.

시부야에서 몇 군데 돌아다닌 구제 스토어도 비슷비슷했다. 친구가 시부야에 살고 있어서 어쩔수 없이 간 시부야지만 최대한 즐겨보려는 마음으로 구제 스토어를 돌아봤는데. 닌텐도 스토어에 갔을 때의 10분의 1만큼도 신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분 저는 키가 188에 90킬로그램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저처럼 너무 과하게 크지 않다면 충분히 시부야의 패션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엘든링의 알렉산더 티와 괴혼의 왕자님 후드티가 사이즈 스몰 밖에 없다고 했을 땐 정말로 화가 났다. 바가지란 걸 알면서도 사겠다는데 왜 팔지 않는가?

하여간 여행 전에 보아뒀던 유명 청바지 브랜드 웨어하우스와 제라도를 가려고 굳이 역 하나 거리인 에비스까지 갔는데. 원래 웨어하우스 청바지를 사고 싶었던 터라 웨어하우스를 갔는데 점원의 대응이 정말 별로였다. 시착을 하려고 내가 들고 있는 청바지를 갑자기 들고 가버리지 않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일본어를 써서 그런가 영어도 내가 너희보다 잘할텐데 하는 일본에 올 때 마다 수십번씩 하는 의문이 또 머릿 속에 떠올랐는데. 실제로 내 친구 중에 하나는 일본어를 꽤 잘하는데도 일본 여행에서는 절대로 일본어로 말하지 않는다. 친절한 일본인이라는 이미지는 결국 권력관계에 충실한 일본사회의 왜곡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꽤 마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고 별로 기대하지 않고 다른 브랜드인 제라도에 갔다.

제라도는 비교적 한가한지 점원들 끼리 재미있게 놀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엄청나게 친절했다. 홈페이지에서 봐두었던 자켓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서 살 뻔 했는데. 이제까지 어떤 아메카지 매장에서도 얘기하지 않았던 면세처리 얘길 먼저 하면서 외국인이시면 이 가격에 살 수 있어요 하고 가르쳐주었다.

묘하게 감동한 나는 가까운 카페에 가서 팬케잌을 먹으면서 1시간 정도 고민한 다음, 웨어하우스에서 홀대 당한거에 열받아서 사는거 아닌가 하며 잘 생각해보다 제라도에 가서 34천엔 짜리 청바지를 샀다. 지금 잘 사시는거에요 얼마 전에 가격이 내렸거든요 라는 그럴듯한 손님 접대용 코멘트에 대해서 반감도 들지 않았고 또 올게요 하고 인사를 했다. 아니 자켓은 진짜 못 사겠더라고요 그거 정가면 10만엔이던데. 그거 사면 나는 파산이야. 파산은 둘째 치고 유니클로에서 파커 자켓 사서 공간도 없어…

이상이 이번 여행에서 나의 아메카지를 둘러싼 모험의 결과이다.

34천엔짜리 청바지 한 벌

피의 복수 실패.
이상.


24년 12월의 글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크고 작은 판단을 내린다. 그건, 매일 같이 판단의 숫자가 늘어가는 만큼 실수도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라고? 우리는 실수를 하는 것만큼이나 잊어버리기도 잘한다. 그래서 결국 시간이 지나면 틀린 판단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고 어느새 자기 판단력의 뛰어남에 대해서 자신하고 만다. 바보처럼.

하지만 감히 말하고 싶다.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이다. 그 지난한 과정은 지루하고 때때로 치명적이기까지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일 중 하나이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냐면 내가 여행지에서 러닝을 하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러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여행 중 매일 5킬로미터 정도 뛰었고. 원래 피트니스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호텔(6년 만에 왔으니까 그럴만하다)에도 피트니스가 생겼으니 굳이 실외 러닝을 할 필요도 없어서 몹시 편리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애초에 여행을 가서 매일 러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 나간 짓이라는 거다. 고작해야 달리기인데 얼마나 힘들겠냐 라고 생각해선 오산이다. 운동용 워치를 켜고 달려보면 안다. 10분만 달려도 칼로리가 빠르게 소진되고 30분, 40분이 넘어가면 말도 안되는 숫자가 찍힌다. 내가 일상적으로 달리는 페이스는 40분 혹은 5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인데 요즘 등에 문제가 생긴 나는 한 번 그렇게 러닝을 하면 등이 아파서 한참을 쉬어줘야한다.

그런데도 러닝을 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러닝을 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선량한 민주시민들이지만 아니 일부는 선량한 민주시민들이지만 일부는 아니 대부분은 정신나간 미친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 러닝을 하는 형과 이야기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나라에 마을버스를 전부 없애고 다들 뛰어다니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할 수 없는 몸 상태인 사람들을 위해서 공공인력거 같은 걸 만드는 건 어때요 라고 맞장구를 쳤다. 여행을 하면서 더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국민들에게 러닝화랑 운동용 워치를 주고, 달리기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선 자동차만큼 빠른 슈퍼 전기 자전거 같은걸 공공 보급하는게 어떨까. 이 정책이 성공만하면 차기 대선도 꿈이 아니야.

이번 글의 주제가는 MJ Lenderman - She’s Leaving you 이다. 2024년 발매된 앨범 Manning Firework는 여러모로 인디락의 올해 최고 걸작이라는 평이다. (나의 애증 매체) 피치포크는 심지어 이 앨범을 베스트 뉴 뮤직 상을 줬고 롤링스톤은 심지어 인디록의 보석이라는 평을 했는데, 이 정도까지 칭찬을 받는 앨범이라면 예전 피가 끓는 때의 나라면 오기가 나서라도 안 들었지만 나도 어느덧 어른이 되서 성장을 했다. 앨범 자체는 락음악의 문법에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 잘 만들어진 전통 음악이다. 윤마치의 <새벽에게>만 들은게 아니라 러닝을 할 때 들었다. 과연…역시 러닝에는 락 음악이다. 아니 진짜로.

여러분도 한 번 쯤은 황궁런을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아니 정신나간 러닝인간들, 해외까지 나가서 러닝을 하려고 드는 인간들에게는 상식 같은 용어지만. 여러분도 물론 알고 계시겠거니 하는 기대를 품어봅니다. 하지만 일부 아는게 없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러닝코스로. 도쿄의 황궁이 주변이 도쿄역 근처라 접근성이 높으면서 풍광이 아름답고 신호등 같은게 없이 비교적 쾌적하게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도쿄 지역 내 러너는 물론이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심지어는 해외의 러너들에게도 유명하게 되었다. 궁금하면 한국어로 황궁런이나 고쿄런으로 검색하기 바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신나간 달리기맨들과는 딱히 교류가 없던 나는 황궁런의 존재를 알게 되자 신나서 여러가지 언어로 검색을 하게 되었고 개중에서는 여행을 가서 러닝을 하고 싶은 이상한 사람들 - 아 저 또한 당신들 중 일부입니다. - 이 모여있는 웹사이트도 알게 되었고 도쿄 여행 중의 러닝에 대해서 여러가지 모색을 하게 되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도쿄는 수십번은 이미 가본 터라 대략적으로는 도쿄를 알고 있는 내가 여행 전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찾아본 것이 도쿄의 러닝코스였다.

황궁을…요요기 공원을…다마가와 강가를…오오 도쿄에 이렇게 좋은 러닝코스들이 있을 줄이야. 하고 감동했다. 심지어 도쿄에는 러닝스테이션이라는 공간이 있어서 물건을 맡길 수 있고 샤워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러닝용 용품을 빌려주는 곳까지 있다고 하니 주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도 오산이라는 게 후에 밝혀졌다만)
나는 신이 나서 러닝스테이션 서비스를 해주는 동네의 목욕탕들 까지 찾아가며 러닝 코스를 짰다! 왜 목욕탕이냐, 그냥 러닝이 유행하게 되니까 기존에 모든 설비를 갖춘 목욕탕들도 런너들을 위한 서비스를 하기로 한 것 같았다. 이 블로그에는 정보성 글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도쿄에서 러닝을 하고싶은 달리기맨 여러분 구글에서 러닝스테이션이라고 검색만 하지 말고 러닝 코스 별로 주변에 목욕탕도 찾아보세요.

다른 달리기맨들은 모르겠다만. 새로운 야외 코스에 항상 목이 말랐던 나는 일본에 도착하고(밤에 도착해서 달릴 수가 없었다.) 바로 다음날이 되자 뭐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채비를 갖추어서 황궁으로 향했다. 나는 이미 장비가 있는데 돈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기에 한국에서부터 러닝화를 준비했고 러닝용 의류들을 바리바리 싸들고(이것도 오산이라는게 후에 밝혀졌다만22) 호텔 타올을 가방에 넣고 황궁에서 제일 가까운 걸로 보이는 러닝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더럽고 사람 많던 도쿄역 주변은 마루노우치 스트리트 등 재개발이 계속되면서 어느새 깔끔하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바뀌었고. 복잡하고 사람이 많은 그런 지역은 모두 신주쿠-시부야 라인에 넘겨버렸다는 것이 좀 우습다. 요는, 관료들이 상주해있는 라인들은 어느새 깔끔하고 땅값이 비싼 쾌적한 지역으로 계속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도쿄역 부근이 상점가가 밀집해있는 긴자-유락쵸에서 넘어오기만 해도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장소가 되었다. 묘한 기분이 든다. 외국인은, 혹은 일반 일본 국민들은 이해하지 못할 천천히 흘러가는 거스를 수 없는 땅값의 변동같은 것이 이 지역을 이렇게 만든걸까?

쾌적하게 정비된 대로를 건너서 가려고 마음 먹었던 러닝스테이션으로 향하는데. 그 위치가 불길하게도 도쿄 도내 최고의 심령스팟인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머리 무덤 바로 옆에 있는 곳이라서 외국인인 나는 엄청나게 웃었다. 가까이에 있는 일본인들을 생각해서 소리내서 웃지는 않았다만, 평생 일부러 찾아갈 생각도 안한 이런 역사적 스팟이 도심지에 덩그러니 있다니. 비슷하게는 오다 노부나가의 사망 장소이자 묘지인 혼노지가 교토의 번화가 중심에 있긴 하다만. 정말로 작고 좁은 공간에 묘지만 세워져 있다. 거기가 마사카도의 묘지란 것을 알아낸 것은 거기가 얼마전에 한 게임 - 그렇다 나는 많은 일본 문화를 게임에서 배웠다 - 에서 나오는 마사카도의 무덤과 너무 똑같이 생겨서 찾아봤기 때문이다. 공통적으로 공식 정권이 두려워한 인물이지만 결국 나라의 정통 계승자가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좋은 취급을 받고 있지는 못하다는 느낌이다. 악역 역할을 맡은 프로레슬러처럼 인기는 좋지만 대전료는 그렇게 높지 않은 선수의 뒷 사정을 들은 기분이다.

러닝스테이션은 기본적인 서비스인 락커와 샤워만 사용해도 천엔을 내야하는 무시무시하게 비싼 곳이었다. 그런만큼 신발은 물론 여러가지를 빌릴 수도 있고. 자체 러닝 대회나 강습도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나으리들이 이용하시옵는 이런 동네에서 장사를 하니까 비쌀 수 밖에 없지 싶다. 별로 멀지도 않고 살짝 북쪽인 칸다의 지점은 기본 사용료가 600엔에 심지어 곧 폐업이 예정되어 있다고…역시 매니아 - 정신 나간 달리기맨들 - 상대의 장사는 하지 않는게 좋지 않는게 좋다. 벽에 빽빽히 진열되어 있는 러닝 신발의 모델은 나이키의 고급 라인으로 한국에서는 최저 23만원은 줘야 살 수 있는 모델이다. 나이키가 비싼 나라인데 라인업을? 도대체 일본 나으리들은 돈을 얼마나 많이 벌고 있는 걸까.

황궁런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뭘 잘못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일단 러닝화를 포함한 짐이 무겁다. 겨울철의 러닝이라 바지+바람막이+비니+장갑 정도만 가지고 왔는데도 짐이 한가득이다. 보스턴 백이라도 가져왔어야 하는건데 얄팍한 샘소나이트 백팩으로는 꽉차는 느낌으로 수납을 했어야했고 러닝을 한 다음에는 젖어서 부피가 늘어난 가방이 부담스러워졌을 정도다. 그렇게 러닝을 한 다음에 그 가방을 그대로 들고 관광을 한다는 것은 제 정신이 아닌 짓이었다. 이건 순전히 내가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인데, 내가 갔던 러닝 스테이션이 용품 일체를 빌려주는 - 유료료, 그리고 비싸게 - 곳이긴 했지만 그냥 빌려쓰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최소한 러닝화를 신고 외출을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여행이 끝난 다음에 하는 이야기지만 출국 전날 저녁 (러닝화가 아닌 그냥) 신발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바닥을 보았더니 구멍이 나있었다. 내가 도대체 얼마나 걸어 다닌걸까.
여기서 정신 나간 달리기 인간인 선배의 의견을 인용해보자 “러닝화가 내구도가 안 좋다는건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러닝화를 아무데서나 신고 다녀서 그래.” 그렇다고 한다. 나도 그 선배의 말에 감명을 받아서 러닝화는 가능한 달릴 때만 신기로 하였기 때문에 차마 러닝화를 신고 나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자 본질적인 부분을 잘 생각해봐라. 관광객 주제에 도대체 왜 이런 것에 돈을 아끼려고 하는가. 시간과 체력과 캐리어의 공간이 훨씬 중요한 여행에서 돈을…왜 이런 것에 돈을…나는 한국의 쇼핑몰에서 일본의 120%정도 되는 가격으로 파는 물건을 굳이 아끼겠다고 돈키호테에서 2시간 들여서 보따리처럼 사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한다.(이에 대해서는 이번 여행기의 뒤에 더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나의 두번째 착각은 내 체력이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람이 러닝을 5킬로미터 쯤 하면 쉬어줘야한다. 10킬로미터 쯤 뛰면 농담이 아니고 체중자체가 줄어들 정도로 러닝은 쉽지 않다. 나는 야간 비행기로 도착 후 다음 날인 이날 대충 이런걸 했다.

<황궁런(5킬로미터 러닝) - 유락쵸로 가서 애플워치 구매 - 우에노로 가서 모네 전 등 서양미술관 관람 - 과학박물관 어쩌고에 가서 조류 전시를 봄 - 아메요코 시장에 가서 옷을 구경함 - 친구가 부탁한 커피 콩을 삼(야 이 새끼야 너 때문에 진짜 내가…아우…) - 선배가 면세셔틀 해주면 밥사준다고 해서 긴자로 가서 카페에 앉아 힘들어서 울기 시작함 - 선배가 위치 잘못 알려줘서 30분 넘게 돌아다님 - 하브스 케익 얻어먹음, 3시부터 배고프다고 했더니 케익 사주냐고 그러니까 파스타도 사줌 - 선배랑 돈키호테에서 2시간을 같이 있음(선배한테 꼭 복수해야지 하고 다짐함…이 사람이 그렇다고 많이 아꼈는가? 한 6만원 아끼긴 했음) - 호텔에 도착하니 11시 직전>

그렇다. 러닝을 여행의 아이템으로 삼았으면 철저히 러닝을 하려고 했어야 하는 것이다. 나처럼 이도 저도 아니게 계획을 짰다가는 배가 고프고 슬프고 등이 아프고(안 그래도 등 건강에 문제가 있는데 러닝도구를 전부 지고 다녔고. 이날 나의 걸음 수는 34천보에 달했다…) 하여간 삶이 고달파진다. 여러분. 달리기 동지 어려분 그리고 달리기를 안해도 하여간 동지 여러분. 이도 저도 아니게 계획을 짜지 맙시다. 그리고 이상한 것에 돈을 아끼지 맙시다.

옷을 갖춰입고 러닝화를 신은 채 바닥을 밟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한국과는 다르게 도쿄는 그렇게 춥지 않았다. 거꾸로 좋은 기록이 나올 것 같은 기온이다. 다른 일본의 러너들처럼 반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오전 일찍 나와 황궁을 구경하려는 사람들과 아무 옷이나 대충 들쳐입고 달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내가 따라 가야 하는 것은 학생들이었다. 차도가 가까운데도 공기는 더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이 시작점으로 삼는 북쪽 끝이 아니라 동쪽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하여 잘 정비된 도로를 밟으며 나아가니 금세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일본인 러너들이 달리고 있었다. 혹시 너희는 성경에 나오는 여리고성을 아니? 일곱번을 돌고 큰 소리를 지르면 성이 무너진다고 하는데 너희들 …숫자를 세면서 달리고 있는거 맞니? 일곱번 넘은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그 사람들에게 합류했다. 누군가는 빠르고 누군가는 느리다. 단지 정해져 있는 방향 - 시계 반대방향 - 으로 달리는 것은 똑같다. 일본 사람들은 이런 기분으로 살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궁런에 대해서는 할 말은 별로 없다. 나는 얼마 전에야 달리기를 다시 시작한 재활 러너이고. 러닝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쓸 글들이 많을테니까. 아니 조금만 써볼까.

러닝은, 결국 어느 곳에서 달리든 간에 러닝이다.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새로운 곳을 찾아 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는 황궁런이 너무 즐거웠다. 적당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잘 정비되어 있는 길을 달리며 지나가는 경찰들에게 모두 오하이요고자이마스 라고 인사를 했는데 한 열 번은 인사를 한 것 같다. 나는 짧게 두번 들이마시고 두번 내쉬는 리듬을 반복하면서 땅이 계속 거기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사진은 없다. 달리는 도중 사진을 찍을 정도로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달리는 것에 집중하는 그 순간이 너무 즐거워서 달리는 내내 웃었다.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되어 - 나는 동네방네 유명한 길치이다 - 스마트폰을 들고 뛸 생각이었는데. 갈림길이 나올 때 마다 내 뒤 어딘가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선배 러너가 나타나 나를 추월하며 길을 알려주었다. 다들 겨울인데도 손바닥만한 팬츠만 입고 독기 넘치게 달리더라. 저것이 선배러너라는 것이구나. 나는 선배님들의 앞서 가는 길을 따라가며 달렸다. 도쿄에서 사는 사람을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는데 딱 그 때 황궁을 달리면서 도쿄에 살고 있는 사람이 부러워졌다. (손바닥만한 팬츠를 입고 달리는 러닝 선배들 때문에 그런건 아니었다. 솔직히 좀 꼴보기 싫었다.)

성의 해자에 배를 탄 사람들이 청소를 하고 그 위로 물새가 떼를 지어 날아갔다. 은행 나무 아래 잘 치워둔 은행잎을 잘못 밟아 잎들이 튀어올랐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을 쳐다보며 저건 누구의 설계일까 궁금해했다. 한 바퀴를 돌고 5킬로미터를 넘자. 나는 조금 더 달리고 싶은 기분과 싸웠다. 한 바퀴만, 딱 한 바퀴만 더 돌면 어떨까. 내가 요즘에 하는 농담이 있다. 자네는 마지막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을 해본 적이 언제인가. 네 오늘 아침에 러닝을 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심장이 엄청 뛰더라고요.

글이 너무 길어진다. 다른 날의 러닝에 대해서는 다시 쓰도록 하겠다.

24년 12월의 글이다.


도쿄에 굳이 여행을 갈 필요가 있을까. 출장을 도대체 몇 번을 왔을까. 어림잡아 50번은 넘는다. 예전 여권을 찾아보면 확실히 몇 번 인 지 알 수 있을텐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 출장을 가는 날엔 대체로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다 공항 리무진을 타기 때문에 버스에 타기 전부터 늘어져있다. 짧은 비행인데도 물걸레처럼 피곤해져서 심야의 하네다 공항에 내리면 며칠을 체류하든 기내 사이즈 캐리어에 정확히 맞춘 짐을 끌고는 전철을 타고 시나가와 역에서 내린다. 또 여기구나 하고 다카나와 출구의 엉망인 보도블럭 위에 질질 끌리는 캐리어 소리를 들으며 사쿠라자카를 올라 다카나와 호텔에 들어간다. 오래되고 조용한 호텔이라 직원들도 말이 없다. 데스크 앞에서는 체크인하겠습니다. 라고 짧게 한 마디를 할 뿐이다. 또 오셨군요 라든가 오랜만입니다. 같은 말은 없다.

내가 한창 다닐 때는 15만원 정도면 일박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 충동적으로 호텔을 잡으며 보니 조식도 포함하지 않았는데 일박에 25만원이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럼 숙박 예산이 안되잖아 넌 일본 출장 갈 때 뭐 도요코 인 같은데 묵니?하고 묻자 아직도 일본 출장을 가야하는 후배가 표정을 구긴다. 그렇죠 뭐. 시나프리 타워(시나가와 프린스 호텔의 4개 중에서 가장 가격이 싸고, 좁다) 정도는 되긴 해요 엄청 좁아서 그렇지(그렇다 좁다). 전에 일본인 동료 하나가 구겨진 채로 밤을 새며 일만하다 호텔에서 나온 나를 보며 제가 고향에 있을 때 꿈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건 도쿄에 출장을 와서 프린스 호텔에서 묵는거였습니다. 시나프리 호텔 방은 니네 집보다 좁을걸? 하, 저희 집보다 좁은 호텔은 없어요. 후에 그가 자기 집을 찍은 방을 보여주었는데 실제로 호텔보다 좁았다.

맙소사. 도쿄를 여행으로 가다니. 잘 기억나지 않는 기억들을 잘 떠올려보니 서너번 도쿄를 여행으로 온 적이 있긴 하다. 한 번은 좀 긴 여행기를 쓴 적도 있다. 그 때는 그 당시의 여자친구와 사귀기 전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단계였기에. 나는 여행기란 형태로 아주 긴 러브레터를 쓴 것이었다. 어쩜 그럴 수 있냐고? 아니 알게 뭔가 여긴 내 블로그고 내가 맘대로 아무 거나 적는 곳이다. 단지 이 블로그를 읽어주는 독자 여러분에게, 그리고 그 여행기를 읽은 그 당시의 여자친구 후보(대학교 후배였다)에게 아무 설명도 안 했을 뿐이다. 하지만 혹시 그 여행기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그걸 러브레터가 아니면 뭐라고 한단 말인가.

도쿄에 가긴 해야겠군 하는 생각을 한 건. 4월 쯤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여자친구가 있었고(맙소사) 나는 여자친구와 하고 싶은 액티비티를 모아서 리스트해두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에 가을부터 우에노의 서양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모네전에 여자친구를 데려가고 싶었다. 수련 시리즈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얘기 할 필요도 없겠지. 수련을 보여줬을 때 여자친구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나는 처음 수련 시리즈 중 하나를 보았을 때 안절부절 못하며 전시실을 나갔다 들어오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십 년은 지난 일인데도 나는 아직도 그 때의 감정에 대해서 정의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언어로 수련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나는 그 마음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애정 중의 하나라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는데. 늦가을 쯤 여전히 여자친구는 없고. 매달 카드값을 400 쯤 쓰고 있다가 모 항공사의 마일리지가 올해 만료 된다는 것을 깨닫고 별 고민 없이 겨울의 도쿄 비행기를 예매했다. 별로 좋지 않은 시기에 비행기를 예매했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마음에 드는 전시들은 다 끝나거나 신년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도쿄에 갈 때면 항상 휴관을 하는 네즈미술관은 이 여행시기에도 휴관이었다. 그래 도쿄에 가도 할 게 없다. 애초에 나는 홍콩이나 교토에 가지고 있는 애틋한 감정이 도쿄에 없다. 그냥 한국에서 가까운 메갈로폴리스 중 한 곳일 뿐이다. 일로나 가던 곳인데 거기를 여행으로 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이왕 이렇게 된거 아메카지를 좀 해볼까 싶었다.

아메카지가 뭐냐면. 아 왠지 이 설명을 하는 것 부터가 좀 수치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 아메리칸 캐쥬얼을 일본인들이 대충 섞어버린 조어로. 실용성을 강조한 미국의 캐쥬얼, 가령 워크 자켓이나 리바이스 진즈 같은 것들을 일본인들이 재해석한 패션을 의미한다. (내 설명이 어딘가는 틀렸을게 뻔하니 제발 다른 곳에서 정확한 정의를 알아봐주기 바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스타일에 꽤 열심이라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한물 간 20년대나 30년대의 청바지들도 일본의 로컬 업체들이 제조설비들을 일본에 수입해와 그 스타일들을 복각해서 판매하고 있어서 이름이 아메리칸 캐쥬얼이지, 실제로는 일본의 스타일이다. 미국의 위세와 문화가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시절 세계인들이 접한 최초의 미국 문화, 미국 스타일에 대한 동경이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데.

내가 아메카지에 마음이 들었던 점은 옷이 튼튼하고 엄청나게 실용적이어서 어릴 때 부터 옷의 방어력을 중시한(나의 실친들은 알고 있다. 왜 이런 옷을 샀어 라고 물어보면 주머니가 많아 라든가 튼튼해서 방어력이 좋아 같은 소리를 정말로 한다.) 나에겐 너무나 만족스러운 패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트렌드는 트렌드라 언젠가는 유행의 저 멀리로 사라지겠지만. 뭐 어떤가 튼튼하고 좋은 옷은 10년도 20년도 입는다. 한 번 사서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 까지 입는다고 생각하면, 어 아니다 내가 할머니가 될 일은 없지 하여간 요지는 중년의 남자가 트렌드에 좀 벗어나는 옷을 입는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일은 없으니. 최근 한국에 아메카지가 각광받고 있는 지금 뻔뻔스럽게 그 트렌드에 올라타서 장비를 갖추겠다 이거다.

회사의 가장 친한 동료 중 하나인 부장님께 도쿄에 좀 다녀오려고요 라고 하자. 부장님은 자연스럽게 도쿄 가서 뭐하려고라고 물어보셨는데. 나는 그만 경솔하게도 아메카지를 좀 하려고요. 라고 대답했다. 내 잊지 않으리다. 내가 가장 친한 사람들 몇 명에게 도쿄 여행의 목적을 아메카지를 하는 것으로 말했더니 가장 심하게 비웃은 사람들이 아래의 사람들이다.

회사 선배이자 친한 선배 ㅅ부장님.
대학교 신입생때부터 내가 꾸준히 귀여워한, 현재 패션 유통사에서 일하는 후배ㅎ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아는 동생ㅇ

셋이 얼마나 비웃었는지 여러분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 ㅇ는 안부 전화를 하다가 말이 나왔는데 내가 평소에도 워크자켓 사고 싶당. 어쩌고 했기 때문에 그 날도 자연스럽게 아메카지를 좀 하려고 했더니 며칠 간 우울했다는 것은 거짓말인 듯 껄껄껄 웃기 시작했다. 내가 최대한의 침착함을 모아서 조용히해 개자식아 라고 말했는데도 아니 오빠 돌았냐구 껄껄껄 하며 한 5분은 웃은 것 같았다.

그리고 후배ㅎ는 밥을 먹다가 아메카지를 하려고 라고 하자. 말 없이 크로와상을 뒤적거렸다. 오빠가요? 라고 했던가 니가요?라고 했던가. 충격 때문에 잘 기억이 안난다. 나는 뭐라고 했더라. 왜 나는 안되니? 아뇨 그런건 아니고요. 그리고 크로와상을 계속 뒤적거렸다. 모모타로 진 같은거 있잖아 아 오카야마에 대한 애향심이 솟아나는 바지죠 이러면서 후배는 딴청을 부렸다.

ㅅ부장이 제일 통렬하게 비웃었는데. 부자이자 왜인지 모르게 힙스터 스타일로 옷을 입고 다니는 나의 후배 J얘기를 꺼내며. 카레야 너 아메카지 하면 J된다. 라고 해서 나는 어리둥절해서는 부장님 제가 부장님한테 무슨 실수 했어요? 왜 그런 막말을 하세요? (오해 말기 바란다 나는 후배J과 정말 친하다) 라고 했는데. 부장님은 하여간 그건 진짜 아냐 카레야 도대체 왜 이래 이러고 성의를 담아 조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아메카지라는 말을 입에 담은 것 만으로도 이렇게 가장 친한 사람들 중 일부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내가 무슨 일장기를 온 몸에 두르고 다닌다고 한 것도 아니고 젖꼭지를 드러내고 살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나를 비난하고 조롱했으며. 한국의 중년 남성인만큼 멘탈이 더럽게 약한 나는 엉엉 울며 일본 아메카지 브랜드들의 유튜브를 밤에 정독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내가 여행기를 작성하는 이유는 보통 더럽게 한가해서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기는 나의 복수를 담은 슬픔으로 가득찬 이야기이다. 나는 이 글을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작성하고 있다. 기대하기 바란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고 하였으나 나는 빠르고 뜨거운 인스턴트 복수를 원한다.

이것은 아메카지를 둘러싼 모험이다.

이 것도 여행기이기 때문에 일단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써야할텐데. 출발시점에서 나는 윤마치의 앨범 두 개 만을 다운 받았다. 이대로 가다간 12월의 윤마치 0.1% 배지는 내가 딸 것이 틀림없다.

윤마치 - <새벽에게>
윤마치 - Oh, Life 앨범 중 <항복>, <Lovers>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이자.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 말도 안되게 매력적인 이 아티스트는 23년에 발매된 이 두 앨범에서 묘한 시도를 하는데. 이전까지 OST 혹은 아이돌 앨범 B사이드 수록곡처럼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듣기 편안한 음악을 만들더니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음악을 통해 어떤 장면 - 심상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겠다 -을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재주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를 위해 한국어로는 정확하게 맥락이 이어지지 않게 느껴지는 보컬을 선보이는데. 이는 개별 언어에서 단어 의미보다 언어의 음악성이 보여주는 흐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게 아닐까 싶다.

이 여행기를 읽는 동안, 내가 주로 저 음악들을 들으면서 다녔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24년 12월의 글이다.


the Animals -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을 듣는다.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교토국립 박물관>
 
교토역에서 가모 강을 건너 산쥬산겐도를 근처에 있는 이 조용한 박물관은 항상 교토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서점을 좋아하는 이 습벽은 어디 가질 않아서 혼자 여행을 하면 사양하지 않고 한참 시간을 보낸다. 18년도 도쿄에서 여행을 했을 땐 여행 전체를 도쿄의 미술관과 도쿄국립박물관을 돌아다니는데 썼다. 몰라서 못 간 적은 있어도 사양 한 적은 없다니, 도박꾼이 하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대단한 것은 아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좋아한다.
 
교토의 미술관들은 기대보단 그리 대단하지 않은데. 일본 미술의 성지 같은 곳이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에 교토에 처음 왔을 때는 미술관들을 주로 찾아다녔는다. 그러다 깨달은게 있다면 뮤지엄이란 뭔가를 모아둔 곳인데 말 그대로 천년의 교도인 교토의 미술과 유물들을 모아두게된다면 아무리 큰 장소로도 부족하다. 굳이 따진다면 교토라는 장소 자체가 거대한 뮤지엄이구나 거기 지하철도 있고 빵집도 있고...너무 무서운데...
그래서 여행 중에 굳이 찾는다면 보통 동선이 이어지는 교세라 미술관이나 교토국립박물관을 찾는다. 물론 마음에 드는 전시가 있는지 찾아보는 건 매번 하고 있다. 이번 여행중에는 무라카미 다카시와 로산진 기획전 정도가 흥미로웠는데 소중한 시간을 할아버지가 주물주물한 무언가를 보면서 보낸다고? 아니 아니 그럴 순 없지.
 
뮤지엄에서 좋아하는 활동 중 하나는 기념품 샵에 들르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추억 삼아서 마그네틱을 수집하고 있는데(우연히도 지금 방금 다시는 안하리라 마음 먹었다) 공항에서 살 수 있는 마그네틱보다 그나마 볼 만한 건 언제나 뮤지엄 기념품샵의 물건들이다. 아무리 전시가 훌륭해도 기념품 샵의 구성이 별로라면 나는 일단 실망하고 보는데. 좋아하는 것은 대표 전시물을 마그네틱으로 만든 것. 그게 아니라면 엽서 뭐 이렇다. 만약에 인형이 있다? 인형이 있다 그럼 최고다. 나는 인형을 모으지 않지만 일단 사고 주변의 아무나에게 준다. 그 대상은 대체로 조카나 친구들인데 예전에 펠메르의 그림을 이미지로 만든 미피 인형은 아직도 조카의 장식장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선물을 한 사람으로서 다시 바랄 수 없는 영광이다.
 
블로그에서 몇 번 박물관에서 봤던 불상의 이야기를 썼던 적이 있다. 그 중에서 '숨'이라는 소제목으로 부동명왕 상과 대일여래상을 봤었던 일을 쓴 적이 있다. 그 정도의 이야기를 쓸만큼 인상적인 전시물은 없었기 때문에 전시물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그 전시는 최근 몇 년 간 교토국박의 가장 성공적인 전시 중 하나로 불리우는 국보전이었다 표를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사실 반년이 지난 지금 전시물에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을 할려면 할 수 있는데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기억하지 않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한 장소인 뮤지엄에 대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하다니. 너무 일부러 만들어낸 아이러니 같아서 스스로를 좀 비웃게 된다.
 
뮤지엄에서 좋아하는 활동 또 다른 걸 말해보자. 뮤지엄에 딸려있는 카페나 음식점에서 뭘 먹는 것이다. 이 오래된 습성은 혼자 미술관을 다니다가 생겨났는데. 우리나라의 뮤지엄들은 이전에는 카페가 없었던 엄격근엄진지한 곳이라서 그렇지 않았지만(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게 좀 기쁘다) 해외의 뮤지엄들은 작은 카페라도 하나 딸려있는 것이 대부분. 
언제인가 기억도 안나는데 우에노의 미술관을 반나절 만에 돌아야지 하고 마음 먹고 돌던 중 너무 배가 고파서 그 중 하나에 딸린 카페에서 파스타와 샌드위치를 시켜서 먹었는데 가격이 합리적인 것은 물론이고 꽤 맛이 있어서 대만족한 나머지 기회가 있다면 뮤지엄에 딸려있는 장소에서 뭔가를 먹고 있다.
항상 가격이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전시물들을 보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가까운 거리에서 달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사실 이번 박물관 방문에서 내가 항상 가던 가게가 없어졌다는 것에(뮤지엄 직원이 알려주었다. 그 분도 정말 쓸쓸한 표정이었다.) 격노했지만 뮤지엄 부지 안에 있는 마에다 커피를 갔더니 이게 웬걸 이 곳 한정 블렌드인 류노스케가 허세스러운 이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맛있고 다른 음식들도 먹을만해서 분노가 사그러들었다. 보통은 밥을 먹고 급히 일어나서 다음 곳으로 가는데 여유가 좋아서 류노스케를 한 잔 더 마시며 혼자 한참을 앉아있었다.
 
"혼자 한참을 앉아있었다.“

<가이유칸>

여러분은 수족관을 좋아하십니까? 이제까지 힘들게 비밀로 해왔지만 저는 동물원과 수족관을 둘 다 좋아합니다.
어느날 아사히카와 동물원에서 불행해 보이는 동물들을 보고 동물원은 예전보다 적극적으로 가진 않게 되었지만 수족관은 그래도 저항감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고등어나 정어리가 불행한 표정을 지어도 나는 모르니까…아니 농담입니다.
 
그날은 엄청나게 비가 왔다. 애들을 데리고 굳이 저기에 간단 말이지 하고 생각하며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간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혀를 찼는데.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가지 않은 것은 먼 미래의 기후조차 예상하는 뛰어난 지혜 덕분이 아니라 그냥 익스프레스 티켓을 여행가기 한달 전에나 예매해야지 하고 생각한(보통 두달 전에 오픈된다) 나의 멍청한 실수 때문이었다. 그 대신 간 곳이 오사카의 가이유칸이었다. 처음부터 가이유칸은 갈 생각이었지만 이왕 가는 김에 좀 더 느긋하게 보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맞겠다.
 
가이유칸에 생긴 지 몇년 안팍의 비교적 최근에 생긴 프로그램으로 보이는 "백야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다. 고래상어 등 대형어류가 전시되어 있는 태평양 수조를 위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투어인데. 정면이나 옆모습을 그냥 볼 수 있는데 굳이? 위에서?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나와 동행은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백야드 투어가 포함된 티켓을 샀다. 애초에 나도 그렇고 동행도 그렇고 "그런 인간"인 것이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면 모를까 시간이 맞다고 하자 고민이 없었다.
 
백야드는 정말로 백야드이다.입장을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입장을 해야하는 곳은 그냥 스탭들이 이용하는 통로로 보여서 여기서 정말로 기다려도 되는걸까 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기다려야 한다. 어색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가 맞을까요 하고 물어보면 확신이 없다는 듯이 아아 그렇겠죠 하는 식으로 대답한다. 애초에 그렇게 경험해본 사람이 많지 않은 서비스인 것이다. 
시간이 되면 스탭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하고 물건을 떨어트리면 되찾을 수가 없으니 모두 로커에 넣어달라고 설명을 해준다. 휴대폰은 당연히 휴대 할 수가 없다. 꽤나 다들 진지해서 동행에게 귓속말로 아이돌 콘서트 티켓이랑 각성제 팔아요, 총이랑 칼도 제시하면 싸게 드려요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 둔다. 나와 동행 말고도 외국인과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이 많다. 
 
백야드는 춥고.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 말소리가 울리는 공간에서 스탭이 마이크로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고래상어와 가오리. 그리고 여러 물고기 들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설명은 그렇게 길지 않다. 너희들은 굳이 여기 들어올만한 녀석들이니까 내 설명 같은건 하나도 필요 없을거야. 하는 태도이다. 그 말이 맞다. 사람들은 각자 적당한 위치를 잡고 물 속의 거대한 짐승들을 내려다본다.
 
고래상어는 일정한 서식지가 없다. 물고기 치고는 아주 느릿한 초속 1.3m/s 정도의 속도로 헤엄치며 사람의 걸음걸이로도 조금 급하게 걸어가면 따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속도이다. (마이크 펠프스의 수영 속도는 시속 9.7km...그러니까 초속 2.7m/s 정도이다. 장하다 펠프스 고래상어를 이겼구나.)
가이유칸의 고래상어는 오키나와에 있는 츄라우미 수족관의 고래상어보다는 작은 크기지만(작다. 왜냐하면 물어봤다.) 두마리 다 좀 더 활발하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원래 집이 없는 생물인 것 처럼 끊임없이 헤엄을 친다. 멀리 가버렸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금세, 그리고 천천히 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고래상어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쥐 가오리, 숏테일 가오리 등 가오리들은 상어의 친척다운 우아한 태도로 헤엄을 친다. 사람들은 대체로 물고기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그들의 표정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표에서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육상 동물이 3차원을 인식하여 살아가는 바다생물보다 뛰어날지 의문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 안에 물고기들이 가득 헤엄치는게 보인다. 나는 수영장에 누군가와 가면 두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첫번째는 어느날 헤엄치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수영을 하다보면 내가 보지 못하는 이 물 밑에 커다란 물고기가 있을까봐 무서워진다는 이야기이다.

백야드의 철책에 기대어 서서 나는 이거야 말로 내가 무서워 하는, 바닥을 보지 못하는 물 밑의 커다란 물고기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백야드에서의 체류시간은 짧다. 20분 정도이다. 물고기에 환장한 녀석들과 아이들의 시간이 끝나고 나와 동행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물고기를 구경한다. 나는 나가기 전 동행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대관람차>

오사카에는 유명한 대관람차가 세 개나 있다. 요즘 유명해진 도심 속의 헵파이브. 바다 가까이에 있는 린쿠노호시. 그리고 가이유칸에 과하게 가깝게 있는 텐포잔의 대관람차이다. 잊어버리고 말을 안 했지만 나는 관람차도 무서워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가이유칸에 간 날엔 비가 내렸다. 동행은 대관람차를 타고 싶어했다. 물론 동행은 내가 대관람차를 무서워한다는 걸 잘 알 고 있었다. 다만 동행이 나에게 뭔가를 하자고 말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비바람이 부는 슈퍼 악조건에서도 관람차를 타기로 하고. 쪼잔하고 집요하게 그럼 탑승료는 네가 내라고 투덜거렸다.

내가 애초에 탈 것 전반에 약한 것은 사실이다. 20대 후반 쯤 친구들과 이유없이 놀이공원에 가서. 이유없이 후룸라이드-바이킹-롤러코스터를 연속으로 타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어어 나는 괜찮아 어서 다음 탈 것으로 가자고오오 하고 가다가 속이 메스꺼워져서는 토하기 직전이 되어 벤치에 누워버린 적이 있었다. 생리적인 영역에서 일단 멀미에 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리적인 부분을 뛰어넘어 관람차 그리고 그와 비슷한 케이블카는 정말로 타는 것을 무서워한다. 나는 내가 왜 관람차를 무서워하는지 정확하게 알 고 있다.

동행은 엄청나게 즐거워했다. 겁쟁이 주제에 탈 것은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곤란해하는걸 보는게 좋은 것 같다. 심지어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는 대관림차(하느님 맙소사 일본인들아 천벌이 내릴 것이다.)가 타고 싶은지 그 쪽을 지긋이 보길래 사정을 하며 일반 관람차 쪽을 타자고 했다. 아니 제안했다. 아니 솔직히 빌었다. 부탁드렸다.

저승 아니 천포산의 대관람차는 기다리는 사람도 적었다. 애초에 비바람이 부는 날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관람차에 올라타니 천천히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고 저 멀리 도심과 바다 모두가 보였다. 나는 스스로가 충분히 위엄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이 들자. 동행에게 내가 덜덜 떨거나 바닥에 쓰러져 훌쩍훌쩍 울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서 내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자. 바람이 또 엄청나게 불었고 관람차의 창에는 비가 부딪혀서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대관람차를 무서워하게 된 것은 처음에 고베에 갔을 때 하버랜드의 대관람차를 탔기 때문이다. 그 때는 겨울이었는데 도대체 몇년 전인지도 바로 숫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옛날이다. 길고 지겨운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얘기하자면 하버랜드의 대관람차 안에서 당시의 동행이자 여자친구였던 사람이 이제 그만 만나자는 얘기를 했다.

왜 거기였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떴다는거야 당연히 알았다 그러나 이 타이밍에? 그것도 관람차 안에서?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거꾸로 알았다는 말을 해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갔던게 료안지였던 것 같다. 그래 이야기가 그렇게 이어진다. 2년…아니 3년이었던가. 하여간 그 후로 몇 년을 더 만났다. 싸우고 헤어진 것도 여러번. 다시 만난 것도 여러번.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차였다. 내 생일 바로 전 주의 일이었고 그 뒤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관람차를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무슨 90년대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얘기라고 나도 생각한다. 케이블카도 관람차와 비슷해서 그런지 무서워한다.

그리고 (놀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정말로 무서워하는게 관람차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정말로 무서워 한 것은 관계가 끝나는 것이다. 나는 그걸 혼자서 케이블카에 타면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천포산의 관람차에서 동행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한 것이다. 당신을 잃는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더 이상 뭔가를 쓰기에는 너무 지쳤다. 요즘 나는 하루에 2시간 이상 자는 날이 드물고 오즈의 나라 용감한 허수아비처럼 마르고있다. 아니 심장이 없는 허수아비인가. 그래 그게 맞겠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직도 다 못했음을 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정말로 갖고 싶어한 것은 헤어질 걱정을 하지 않고 앞으로의 일을 함께 얘기 할 수 있는 사람 - 가족 - 이라는거 라든가. 관계란 결국 서로가 가진 마음의 병을 나누어 갖는 거라는 거라든가.
무엇보다 내가 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 마지막으로 방문한지 7년 만에 다시 교토에 오게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얘기들을 해야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동네 대장 고양이가 죽었을 때와 같다 혼자가 된 나는 그 누구에게도 고양이가 죽은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얘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여기까지다. 우리는 이야기로만 스스로를 이해 할 수 있고 이야기-개인서사를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정의마저 바꾸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이야기를 바꿔 당신이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존재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만든다고 해도 그걸로 내가 정말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나에게 스며든 당신을 그대로 그림자로 만드는게 옳은 결정이기는 할까?

나는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바싹 말라버렸고 어떤 소원도 빌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입을 다물고 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옳은 일이길 바란다.


24년 8월의 글이다.


 
내가 여행기에 쓰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과장이나 거짓말은 없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판단을 잘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7년 후, 교토>의 이어진 여행기인 이 글을 쓰면서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작사/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Ave generosa를 들었다. 더 높은 존재를 위한 찬양가를 듣고 있노라면 그 존재들을 위한 사랑과 사람들이 갈구한 구원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존재가 진실이든 아니든, 그 사랑이 진실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
 
예전에 친구와 광화문 어딘가의 유명한 카페에서 얘기를 했었던 걸 떠올린 것 부터 시작하자. 친구는 큰 키와 만 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유머감각을 지닌 이공계 여성으로. 너에겐 도저히 이성으로서 매력을 못 느끼겠는걸 하고 나에게 티를 너무 내서 몇 년이나 가느다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다.(그렇다, 이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웃기다. 유머감각에서 패배했다는 그 열등감에 나는 이 친구에게 주기적으로 집착한다.)
무슨 질문을 하다가 그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하면 개를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보호소 같은 곳에서 봉사 좀 하다가 마음이 가는 개가 생기면 집에 데리고 가는거 아냐? 라고 대답했는데. 그 친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개는...그냥 어느날 엄마가 데려오는거야. 
데려온다고?
어, 그냥 엄마가 어느날 데려와서 이 개가 니 동생이야. 라고 말하는거야. 그리고 평생 사랑해주는거지.
내가 선택하면 안돼?
안돼.
안된다고?
안된다니까.
 
거기에 나는 이해하지 못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몇 년 동안 친구가 한 말을 곱씹었다.
 
<오하라大原>
 
교토역에서도 한시간 사십오분 쯤 걸리는 (버스의 운행 간격이 30분이고,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1시간 15분이다. 중간에 산조-시조를 거치기 때문에 말도 안되게 막히는 구간이 있다) 북쪽의 시골 마을이다. 역사적으로는 유래가 깊은 곳인데 교토 어디든 역사적 유래가 없는 곳이 없을테니 딱히 설명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다. 굳이 설명하자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인 헤이케모노가타리의 배경 중 하나가 되는 곳이다. 너무 성의가 없는 설명으로 들리겠지만 교토는 애초에 그렇다. 지나가다가 본 이자카야가 사실은 신선조가 칼부림을 했던 곳이고 술집이 잔뜩 있는 번화가를 걷다가 보면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장소가 나온다.
 
내가 오하라를 좋아하는 이유의 30%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기 때문이다. 카페도 있고 기념품 가게도 잔뜩 있는 것을 보면 일년 중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시기가 있을텐데 지금까지 5번 정도 찾아왔지만 항상 그런 시기가 아니었다. 나중에 료칸의 주인분께 언제쯤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나요 라고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보았더니 요즘에는 한국분들이 많이 찾아와주세요 하고 웃으며 대답하신다. 비밀이지만 난 오하라 사람들한테 똑같은 질문을 한다.
 
사람이 없다. 시끄러운 소리도 나지 않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내가 항상 이 동네에서 제일 시끄럽고 분주한 사람이 된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멀리 학교가 보이고 좁은 길 사이로 갈대와 계절에 맞지 않게 피안화가 보인다. 시골이다.
오하라에 오는 사람들이 보통 목표로 하는 곳은 산젠인과 잣코인이다. 물론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고도 가는 길이 불편하다. 온천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오하라 산소우 라는 곳인 것 같은데 한 번도 가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지도를 보면 길고 긴 언덕 길을 - 제대로 포장이 안되어 있다.- 한참 올라가는 곳이여서 픽업 서비스를 운영한다고 한다. 길 주변은 평범한 시골 마을이라서 동행은 일본의 공포게임 배경 같다고 감격한다. 그런거에 감격할 때가 아닌데 하고 생각보다 언덕길이 길어지니 초조한 기분이 들어서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가다보면 료칸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한다. 
 
너무 일본 특유의 사찰 거리 기념품 가게 같은 곳들을 지나서 도착한 작은 료칸이 내가 오하라에 오는 이유의 40%이다. 사람이 많아서 예약을 못 할 정도가 되는 것은 또 바라지 않아서 블로그든 어디든 이 료칸의 이야기를 잘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유명해진지 오래라서 사람이 없는 계절인데도 한국인 숙박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너무 좋아하는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곳이 있지 않은가. 이 료칸은 나에게 그런 곳이다. 7년만에 오는 겁니다. 오하라에 7년만에 오세요? 그것도 그렇지만 이 료칸에 7년만에 와요. 지난번엔 가을에 와서 송이버섯이 있었죠 점심을 먹으러 혼자 왔었어요. 아 그렇군요.
저녁을 먹을 땐 나이가 드신 점원 분이 와서 시중을 드시다가 슬쩍 얘기 한다. 저는 7년 전에도 여기 있었습니다. 나는 짐짓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웃다가 엊그제 뵌 것 처럼 하나도 변한게 없으신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에요. 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를 좋아해. 하고 스무 번 쯤 반복해서 말한다. 그래서 같이 오고 싶었어. 하고 열 번 쯤 이어서 말한다.
 
오하라에서 구경할 만한 가장 훌륭한 것은 스팀에서 칠천오백원에 파는 공포게임의 배경이랑 마을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지만. 그 외에 가장 유명한 것은 사원. 산젠인三千院, 짓코인実光院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호센인宝泉院이다.
 
산젠인은 훌륭한 본당과 넓은 정원이 유명한데. 특히 이끼가 잔뜩 낀 작은 동자등 석상이나 줄지어 서있는 아기 지장보살이 은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짓코인도 지지 않는다. 헤이케이모노가타리의 배경이라는 점이 소수의-정말 소수의- 매니아들을 두근거리게 만드는데다가 2천년대 초반 범인 불명의 방화로 인해서 천년 이상 내려오던 소나무는 물론 본존인 지장보살 상 마저 파괴되었다는 스토리 텔링이 있는 절이다.
 
그러나 호센인은 그런거 없다. 절의 규모도 다른 절의 반토막인데다가 이 절의 가장 유명한 스토리텔링은 무사들이 피묻은 칼 싸움을 하다가 묻은 핏자국이 묻은 나무판자를 (맙소사 중세 일본피플 맙소사) 절의 천장에 그대로 썼다 뭐 이 정도인데. 절의 사람에게 물어보면 바로 저쪽이에요 하고 알려준다. 무섭지도 웃기지도 않은 스토리 텔링이라고 보면 된다.
 
아름다운 것은. 이 절의 정원을 툇마루에 앉아서 감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떡과 말차를 주는데 천년 전통을 지켜가는 맛인지 그닥 맛은 없다. 하지만 정원의 모든 시야를 사로잡는 나무는 굉장하다. 아무 일정도 없이 아침 일찍이나 절이 문을 닫을때 쯤 - 일본의 절들은 보통 5시면 문을 닫는다 - 가면 사람도 별로 없이 툇마루에 원하는 만큼 앉아 있을 수 있는데 이것도 천년 전통인가 싶을 정도로 춥고 외로운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호센인을 오하라에서 제일 좋아한다.
 
내가 오십년이 지나서 다시 온다고 하여도, 이 마음만 그대로 가져간다면 오하라는 그대로겠지 하는 기대를 한다.
 
 
<가츠라리큐桂離宮>
 
교토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든 명승지라고 한다면 사이호지西芳寺이다. 얼마 전까지 무려 엽서로 신청서를 내고 일본 내 주소로 그 회신이 오면 그걸로 예약을 확정해주던 말도 안되는 곳인데. 홈페이지가 생기더니 이제 인터넷으로 예약을 받아준다고 한다. 여전히 겨울에는 운영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진짜인가, 여름에 교토를 오라는 건가. 너희 외국인들도 한 번 혼나보라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키부네 신사도 가본 나도 사이호지는 가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2등은 어디인가. 그건 모르겠지만 일본 궁내청에서 관리하는 가츠라리큐와 슈가쿠인리큐도 사전 예약이 꼭 필요한 쉽지 않은 장소이다. 원래 교토의 유명 관광지 중 궁내청이 관리 하던 곳에는 교토고쇼, 교토센토고쇼도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 정도 까진 관리 안해도 되지 않을까요 하는 의견이 있었는지. 이제는 리큐 두 곳 정도만 예약하기 쉽지 않은 장소가 되었다. 홈페이지에서 신청 후 궁내청으로부터 승인 메일을 받아. 그 승인 번호를 입장 시에 가져가야한다. 물론 돈도 내야한다.
 
그래서 그럴 가치가 있나요. 라고 누가 물어보면 항상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예약하기 힘들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닐까요 하고 대답하지만. 이거야 말로 거짓말이다. 가츠라리큐는 모든 일본 정원 문화의 정수이며 아직까지도 해외 정상들이 방문할 때 견문하도록 짜여져 있는 곳이라서 아직도 궁내청에서는 온 힘을 다 해 이 곳을 관리하고 있다. 교토에 갈거면 가츠라리큐를 가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키요미즈데라 봣서여 이나리 진쟈 봣서여 이러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속으로 이 바보놈들 그런데 가서 뭐하게 하고 투덜거리고 있다. (우연이지만 24년 2월 키요미즈 데라와 이나리진쟈 양 쪽을 다 다녀왔다. 간만에 가니까 웅장하고 좋더라.)
 
나는 여기 벌써 세번째야 하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한다.
 
정원이란 결국 우주의 작은 축소품이다. 보통 정원의 3요소는 빛과 흙 그리고 물이라고 여겨지는데. 가레산스이의 뛰어난 점은 모래, 바위 그리고 이끼를 통해서 - 기존과 재료를 달리해서- 우주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재료가 달라지니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표현이 필요하였고. 자연스럽게 이는 우주에 대한 추상화로 이어졌다. 
사찰의 정원이 그 표현 목적을 지상의 땅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이상적인 현실 즉 정토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 할 것이다. 다만 이런 목표와 재료의 변화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정원을 자연의 축소판에서 자연의 추상화로 어떻게 연결 시켰는지는 나로서는 의문이다.
애초에 료안지와 같은 거대한 연못과 그 주변을 산책하는 식으로 구성된 정원은 소위 지천회유池泉回遊라고 부르며. 이는 이전까지의 왕궁귀족들의 정원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료안지의 충격적인 가레산스이는 거대한 정원의 아주 작은 부분 일종의 상자 정원으로 구성된 것이다. 나의 일본 사찰과 정원 양식에 대한 집착도 일본인들의 추상화된 세계를 통해 극락정토라는 개념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가츠라리큐는, 그 모든 정수를 모아서 만들어진 정원이다. 넓은 부지와 막대한 비용. 세계에 대한 추상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기에 작은 원막은 배를 상징하고.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어부들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는 제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놓은 작은 장난 같은 추상화이다. 가츠라 리큐는 황궁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에 대한 이상화와 더불어서 가장 느슨한 형태로 재현을 시도한다.
영토만을 축소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정원은 4계절에 대한 재현 또한 시도한다. 모든 계절이 이 정원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되도록 다양한 나무를 심고 또 관리하려 한다. 나는 아직 달이 뜨는 밤이나 꽃이 피는 계절에 이 곳에 와본 적이 없다. 아름다운가요? 라고 물으니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라는 대답을 듣는다.
 
정원을 1시간 남짓 구경하고 나오면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역까지는 그럭저럭 걸을만하지만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역까지 가면 맥도날드 정도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새삼 눈치를 본다. 여길 보여주고 싶었다는 걸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여기 이미 세번째야 하고 안해도 될 말을 한다.
 
 
<산조-시조>
 
나는 교토의 밤 길을 걸어간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닥 바뀌지 않은 거리는 그대로이다. 소품가게와 오래도록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가방 가게. 지나갈 때 마다 내 시선을 끄는 경양식 집과 극장도 그대로 있다. 저 건물을 지나 꺾어서 계단을 올라가면 내가 자주 가던 카페이다. 저 쪽으로 좀 더 가면 아침에 커피와 팬케익을 주는 가게이다. 수십번을 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이 거리를 지나쳤다.
 
예전 어느날 밤의 일이다. 나는 완전히 쓸쓸해져서 사거리를 건넜다. 교토에 왔을 때는 보통 혼자였지만 그건 다른 곳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 대단한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1시간 정도 아니 30분이라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머릿 속에 나 자신의 이야기가 가득차서 독처럼 나를 점점 무너트리고 있었다. 내가 나의 머릿 속에서 나갈 수 있도록 당신을 읽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그냥 당신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허락을 받을만큼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았다.
 
다시 교토의 산조 거리에서.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달래려고 하지만 당신의 말은 어느 것도 소용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내 옆에 있기만 한다면 나는 금세 화가 풀린다.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줄거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마귀 같은 얼굴을 하고 내 안의 당신을 본다. 당신은 내가 처음 봤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다. 당신에 대해서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의 감정도 마음도 나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의문투성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정말로 당신을 마음 속 깊이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부정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모든 분노와 증오가 사실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이고 애초에 그 감정은 모두 당신에게서 느끼던 애정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
마지막 문장을 쓰며 들은 것은 Víkingur Ólafsson – Bach: Organ Sonata No. 4, BWV 528: II. Andante [Adagio] 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사랑했으며. 앞으로 그걸 계속해서 후회하며 살아가야한다. 그래서 계속 걸어보려고 노력하지만, 밤이 좀처럼 끝나질 않는다. 
그리고 여기까지 쓴 시점에서 24년 2월의 교토에 대해서 아직 다 쓰지 않은 걸 깨닫는다. 나는 한 편의 글을 더 써야만 이 이야기를 완성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미친 사람의 말이고. 24년 8월의 글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강한 햇볕을 좋아하지 않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싫어해서 그늘지고 사람이 없는 곳을 좋아한다. 시끄럽지 않은 곳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하는 걸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좋아한다. 시끄러운 곳에 가서 햇볕을 쬐는 건 어떨까? 라고 말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신이 짖궂은 농담을 하면 어떻게 받아야할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시끄럽고 사람이 많으며 햇볕이 내리쬐는 곳 중에 내가 좋아하는 곳이 있다. 나는 교토를 좋아한다. 출장을 포함하면 10번도 넘게 갔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싱가폴이나 도쿄는 출장을 포함하면 각 30...50...100번쯤 갔다...)

왜 교토를 좋아하느냐고 하면. 거기 보다 자체 컨텐츠가 넘쳐나서 아무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아무 곳에나 갈 수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혼자 일주일을 있는다고 하고 친구들은 만나지 않는다고 하면 4일 쯤 후부터 도대체 뭘 해야하나 고민해야하지만 교토는 그렇지 않다. 돈과 시간만 있다면 나는 한달 정도는 매일 매일 다른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어서 말해두지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 거의 모든 교토 여행은 혼자서 하는 여행이었다. 오사카나 다른 곳에 숙소를 두고 누군가와 같이 교토를 들린 적이야 많다. (특히 출장이 그렇다. 별로 되지 않는 예산으로 교토에 숙소를 잡긴 쉽지 않다.) 다만 교토는 정말로 좋아하는 곳이라서 혼자서 가기에 거부감이 없어서 가야겠다 생각이 들면 그 누구와도 조정을 하지 않고 슥 다녀오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농담처럼, 난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교토를 같이 가자고 하니까 내가 교토에 같이 가자고 하면 조심해 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언젠가 교토에 같이 가자는 말은 수 없이 듣고 또 하고 다녔지만(하하 흘리기 대장) 정말로 교토에 같이 가자고 말을 한 적은 딱 한 번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요 얼마 전에 7년만에 오사카와 교토에 다녀왔다.
아주 오랫동안 교토를 다녀오지 않은 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해외여행을 몇년 동안이나 가지 않은 탓도 있었고. 해외여행을 계획 할 만큼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교토에 다녀온 것은 2017년 늦여름-가을 쯤이었다. 7년이나 되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왜 그 동안 교토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다. 몇 년을 그냥 꿈처럼 보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쓴 웃음이 났다.

이 여행의 여행기는 아직도 쓸 생각이 없다. 하지만 7년 만의 교토에 대해서는 뭔가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글을 쓰고 있다. 정말로 여행기를 쓰게 된다면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나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이 여행에선 어떤 음악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 여행기와는 다르게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게 없다.
하지만 절대로 쓰지 않으려고 생각해놓고 마음을 바꿔 이 글을 쓰기로 했을 때, 그리고 또 쓰는 동안 들었던 음악은 다음과 같다.
 
- Laufey, <Where or When>
노래 제목이 이 블로그의 이름과 같다. 핀란드의 싱어송라이터 Laufey의 최신곡으로. 원래 클래식을 했던 사람(첼리스트였다고 한다)이 도대체 어떤 계기로 재즈풍의 싱어송 라이터가 된건지 궁금해진다. Be witched 앨범도 훌륭했는데.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딱 하나를 고르자면 이 곡이다. 이 글의 주제를 Where or When으로 정하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 박영미,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
도입부부터 가사까지 이 노래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바다의 노래이다. 예전, 누군가가 나에게 이 노래의 가사를 리퍼런스로 편지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대체로 타인에 무심한 편이다.
 
- 이현우, <마취(Unquantize mix)>
나는 사실 노래 부를 때 목소리가 이현우씨와 똑같다. 물론 노래는 형편없이 못 부르지만 이현우씨 노래를 듣고 있다보면 내가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 곡 하나를 몹시 좋아하는데. 국내서비스에서만 곡이 올라와있기 때문에 몇년에 한번 멜론에 가입하고 질릴 때 까지 들은 다음 서비스를 해지하길 반복한다. 07년도의 앨범인 Heart Blossom의 완성도 또한 말이 안될 정도로 높다.
 
다음에 나오는 장소들의 순서는 내가 24년 2월에 방문했던 장소의 순서가 아니다. 심지어 이번 여행에서 방문하지 않았던 곳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을 뿐이다.
 
 
<아라시야마, 아다시노넨부츠지あだし野念仏寺>

교토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아라시야마를 간다는 얘기를 할 때 마다 나는 질색한다. 우웩 그냥 관광지잖아요 거길 도대체 왜 가는거에요. 카페 간다고요? 치쿠린? 그거 대나무 숲 별로 길지도 않아요. 곰세마리 동요를 다 부르기도 전에 끝난다구요. 이렇게까지 말해도 그래도 아라시야마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보통 추천한 것은 아다시노넨부츠지あだし野念仏寺였다. 아라시야마 남쪽에 진짜로 대단한 신사랑 절이 있는데요. 아 나를 믿고 예약을 아 제발...! 이렇게 비는데도 왜 사람들은 내가 추천하는 곳을 안 가는 걸까 툴툴 하면서.
 
아다시노넨부츠지는 아라시야마에서는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산길을 조심해서 올라가면 있는 절인데. 그 기원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200년 전의 절로 내가 아는 한 교토에서 가장 성지에 가까운 장소 중 하나이다. 그곳은 일본 절 고유의 요소인 경내의 묘지와 죽은 이들의 공양에 특화되어 있이며. 돌로 된 지장 보살과 나무로 된 묘표가 가득차 있는 고요한 장소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곳을 찾았을 때 자전거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했지만 그곳에 있던 것은 몰래 졸고 있던 입장소의 직원과 아기 지장보살 앞에 나란히 서서 말도 없이 조용히 울고 있던 젊은 부부 밖에 없었다. 나는 묘지에 가득한 나무 묘표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망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묘표는 흔들리며 서로 부딪혀 소리를 냈다.

아직도 아다시노넨부츠지 뒷 뜰의 죽림에서 녹음한 대나무가 스치는 소리 파일을 가지고 있다. 울고 있던 젊은 부부가 자리를 떠나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기다리느라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편지를 반장 정도 쓸 수 있는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 산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사람 하나 없는 작은 식당에서 두부요리를 먹었다. 왜 사람이 한 명도 없지 아참 여기 산길이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났다.  오히려 예전에 봤던 것보다 아라시야마는 사람이 더 많아져서 찻길과 인도가 구분이 안 갈 정도가 되었다.
아니 슬슬 여기에 별거 뭐 없다는거 알잖아 라고 투덜투덜 거리며 길가에서 유명하다는 두부 요리를 먹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카페에 들어가 커피도 마셨다. 역시 온 김에 치쿠린을 가볼 까 하고 곰세마리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지만 있다면 대나무 숲은 순식간에 생겨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라시야마의 치쿠린은 무책임한 국가의 정부 부채처럼 엄청나게 늘어있었다. 30분쯤 걸었는데 대나무 숲은 끝나는 일이 없이 다른 대나무 숲으로 이어져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이어 나갔고 중국인 한국인 인도네시아인 하여튼 온갖 외국인들은 그 분위기에 빠져들었는지 다들 싱글벙글 웃으면서 치쿠린에 대 만족해 하고 있었다. (물론 고갯길이라 그걸로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나는 여기 대나무 숲 아니었는데. 여기도 아니었는데 하면서 시끄럽게 투덜거렸다.)
나는 평소에 치쿠린이 고작 뒤뜰 정도 수준이라고 욕하고 다닌것이 면구스러워서 그 뭐냐 내가 아라시야마를 처음 온 것은 2012-3년이었거든 어쩌고 하면서 변명을 했다.
 
역시 이러면 너무 부끄러우니 아다시노넨부츠지를 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길을 찾는데 분명 방향은 맞는데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잘 포장된 길에 예전에 가파른 고갯길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양쪽에 새로 조성된 주택가와 (이미 한 번 유행을 타고 다시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의) 카페와 양식집이 있었다. 어째서지 싶어서 일단 한참을 걸어서 아다시노넨부츠지에 도착하니. 유튜버 한 명이 택시를 타고 절에 들어가고 있었고. 서양 청년들 4,5명이 동양문화의 심취해서 묘지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라고 외국인인 건 다를바 없지만 왠지 젠체하며 확인해보니. 입장료가 500엔이었다. 여기가 500엔이라고? 팜플렛도 있어? 하고 생각은 했지만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절은 그대로지만 왠지 팻말이 많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 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대나무 숲은 그냥 고갯길의 뒷 뜰 같았다. 내가 느꼈던 외로움과 신비로움은 도대체 어디 간거야 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잔뜩 늘어놓았다.

돌아오는 길에 안되겠다 싶어서 길거리의 킷사텐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궁금해서 사장님께 아니 여기 언제부터 이렇게 도로가 포장이 된거에요? 라고 하더니 이해를 못하셨다. 여기 원래 산길이었잖아요. 라고 재차 묻자. 아니 손님 진짜 여기 오랜만에 오셨나 보다 이거 한 십년 되었어요. 라고 말해서 아라시야마가 너무 싫어서 이 곳에 온지 정말 10년이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두부를 먹었던 가게를 검색해보니 어떤 사이트에서 별점이 4.0을 넘는 무시무시한 유명 맛집이 되어있었다.
 
 
<가라스마, 롯가쿠도六角堂>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날 니조성에 나와 가라스마로 정처없이 걷다가. 제대로 방향을 찾지 못해서 (변명을 하자면 오열을 하며 걷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방향치지만 그렇다고 교토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방향치는 아니다.) 원래 가려던 방향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불쑥 들어간 곳이 이 작고 아름다운 절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죠호지頂法寺의 롯가쿠도六角堂이다. 도심 속의 절이라는 매력적인 모순과 육각형을 한 본당-롯가쿠도-의 모습 때문에 많은 관광 도서에도 소개가 되어 있는 곳이지만 그닥 크지도 볼 것이 많지도 않다. 절에서 보여줄 수 있는 컨텐츠라는게 정해져 있는게 아닌가.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가고 있었던 터라 어디 멀리에 갈 수도 없었고, 눈물이 범벅이 되어 얼굴이 끔찍해진 상태로 다른 어디 가게에 들어가는 것도 민폐라서 얼굴을 대충 정리하고 (남자가 얼굴을 정리했다는 말은 사실 큰 의미는 없는 얘기다) 절의 경내를 구경하는데 육각형을 하고 있는 본당이 제일 아름답긴 하였지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절의 경내에 백조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데 백조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문득 외할아버지가 다시 태어나신다면 저런 커다랗고 무심한 새 같은게 되셨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를 다니는 어머니가 알면 질색을 하시겠지만. 이모는 잘했다고 칭찬을 했을 것이다. 지갑에 들어있던 몇만엔을 통채로 꺼내서 절에 시주를 했다. 내 짧은 일본어로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의 사람은 외국인인 내가 어떤 이유로 시주하는지 이해한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매번 교토에 들를 때 마다 롯가쿠도에도 들렸다. 내 사정으로는 꽤 고액을 그 곳에 시주하고 항상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빌어달라는 기도를 부탁했다. 그러기 위해서 숙소도 보통 가라스마 부근으로 잡아서 귀찮아서라도 롯가쿠도에 가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들르는 것은 항상 즐거웠다. 과일가게를 들르거나 좁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경양식 집에 들어가 아무 거나 먹다가 저녁이 오기 전에 롯가쿠도를 가면 되었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백조를 구경하다가 절의 원무과에 들러서 사정을 설명하고 시주를 할 수 없겠느냐고 물으면 익숙한 듯이 종이를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글을 제대로 못 쓸 정도로 눈이 흐려져서 한참이 걸렸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름을 쓰고 준비한 봉투에 시주를 부탁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조를 구경하는 시간은 더욱 늘었다. 백조들은 항상 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었고.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절이 닫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다시 와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하고 절 뒷 쪽 카페에서 본다면 백조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외조부의 명복을 비는 시주를 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가셨겠지. 이제는 다른 곳에 있으시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올해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딱 10년이 되었다. 누군가 백조는 30년을 가까이 산다고 말해주었다. 백조들은 나를 기억 할 까 라는 덧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료안지龍安寺>

인기 없는 여행지가 되었다. 유명한 가레산스이의 바위 정원龍安寺方丈庭園도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버렸다. 바위와 물 그리고 이끼만을 통해서 우주를 표현하려고 한다는 간지나는 설정도 어느새 긴가쿠지를 포함 다른 절들이 따라해서 교토의 절을 구성하는 한가지 필수 요소가 되었다. 다른 절에 비해서 형편없는 접근성과 비싼 입장료. 컨텐츠라고는 가레산스이 말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벚꽃철 처럼 저절로 절이 아름다워지는 시기가 아니면 사람들이 대체로 찾지 않는 곳이 된 듯 하다. 두 번이나 말했지만 사실 예전에 비해서 그렇다는거지 지금도 충분히 찾아오는 사람은 많다.
 
절이라고 하면 애초에 사상과 미학을 전달하는 일종의 테마 파크 아냐?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그들의 고양된 감정에 맞춰서 돈도 받아내고. 물론 위대한 미술작품 같은게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거고. 정말로 미술작품을 보고 싶으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면 되잖아? 하고 별로 대단치 않은 이론을 힘줘서 얘기해본다. 듣는 사람은 또또 저런다 라는 느낌으로 내가 하는 말을 흘려듣는다.
 
12년쯤 되었을 것이다. 내가 료안지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정말 마음 속 깊이 감동했다. 오사카를 가던 도중에 시간을 내서 교토를 온 거니까 다른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텐데. 나는 가레산스이의 컨셉에 정신적 오열을 하는 중이기 때문에 여행에 왔던 동행을 설득해서 접근성도 나쁜 료안지로 향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절의 경내는 춥고. 전날 크게 싸운 동행과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냥 둘이서 서로 보고 싶은거나 보고 나중에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그건 또 그러고 싶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감동과 더불어 약간의 고집을 더 해서 1시간 정도 료안지에 있었던 것 같다. 바위 정원의 앞에 앉아서 바위의 갯수를 세고 또 세면서 난방이라고 하나도 없는 료안지의 추위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날 대들보에 기대서 정원을 보던 동행인의 사진은 정말 아름다운 사진이었지만, 그 사진을 지워버려서 나에겐 없다. 사진을 지우자. 나는 오랫동안 내가 처음 료안지를 간 것은 혼자서였다고 기억하게 된다.
 
하여튼 료안지는 나에게도 바위 정원을 제외한다면 그냥 경내가 크기만 할 뿐인 절이 되었다. 나는 내가 료안지에서 했던 말도 거기서 느꼈던 마음들도 자꾸 잊어버린다. 언젠가는 누군가와 같이 간 적이 한 번도 없는 곳으로 기억하고 다시는 가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교토를 수없이 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료안지의 차가운 마룻바닥과 정원 앞에서의 어떤 순간이라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가모강변>

철이 들고 혼자 살게 된 다음에야 강변 근처에서 살게 되었지만 물 가까이에서 산다는 것은 특별하다. 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바다 근처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한 번도 바다 근처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의 언어로는 그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옮길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때 이미 그 사람을 마음 속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곱씹고 곱씹고 곱씹었다.
나는 내가 그 때 했었던 곱씹음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나는 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서 산책하는 거리에 바다가 있는게 어떤 의미인지 내 언어로는 설명 할 수 없다.
 
나는 가모강을 좋아한다. 강변의 둑길에 그냥 앉아있는 것도 강변을 따라 의미 없이 걸어가는 것도 좋아한다. 시조부터 산조로,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 데마치야나기로 향한다. 가모가와 델타까지는 가봐야 비로소 좀 기분이 풀린다. 교토 시민들이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 모양인지 도시를 종단하는 하천인데도 불구하고 가모강은 깨끗하다. 가장 더울 여름에도 냄새 같은 건 나지 않는다. 물새들이 때때로 날아와 풀 숲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분명 철학적이고 품위있는 행동이겠지. 개구리와 논쟁을 벌이다가 꿀꺽 삼킨다든지.

밤이 되면 강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강을 볼 수 있는 테라스가 갖춰진 술집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들어가 술을 마신다.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각자 뭔가를 쥐고 둔덕에 앉는다. 서로들 적당한 자리를 벌리고 있어서 뭘 하러 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는 때때로 그리고 자주 가모가의 둑길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술을 마시거나 했다. 웃음 소리가 들린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져온 맥주 캔을 다 마실 때 까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숙소가 여기서 멀다면 굳이 여기서 그러고 있을 필요는 없을텐데 나는 대체로 가라스마나 기온 근처에서 숙소를 잡았다. 롯가쿠도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7년이 지난 후 가모강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없고 나는 더 이상 이 동네에 숙소를 잡지 않는다.

나는 가모강을 건너다가 문득 네 얼굴을 본다. 이번에도 강변에서 맥주 마실거에요? 아뇨 이번에는 안해도 될 것 같아요. 라고 말한다. 아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고개를 돌려 다시 네 쪽을 본다. 너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다. 갑작스러운 상실에 나는 정신을 잃을 것 처럼 흔들린다.
 
 
모든 것을 후회한다. 내가 했던 말들, 내가 했던 모든 행동을 후회한다.
내가 숨쉬고 내뱉고 있는 모든 호흡을 전부 후회한다. 바다를 갔던 것. 파도를 보며 혼자 등대를 보고 서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편지를 쓴 것을 후회한다. 마음을 열었던 것을 후회한다. 어깨위로 내려 앉은 꽃잎을 주먹에 쥐고 가만히 서있었던 일을 후회한다. 혀 위에 닿은 눈 송이도 무릎 가에 닿던 물결도 후회한다.
 
빛 때문에 흐트러지는 그림자와 벽 위에 느슨하게 서있는 그림자와. 오후의 온도에 늘어지는 소음과 바깥으로 점점 퍼져가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물드는 색과. 세상 어느 곳에도 없을 것 같던 파란 하늘과. 어떤 때보다도 선명하게 보이던 그 말들을 떠올린다.
웃었던 일들 울었던 일들 화를 냈던 일들. 혼자 생각했던 일들 기다렸던 일들. 그 모든 일들이 처음부터 그리고 다시. 그리고 처음부터. 그리고 다시 떠오르고 또 사라진다. 생을 되감는 것처럼.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해도 목이 쉬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어서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게 ■년 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후회한다.
■■에 대한 글을 쓴 것을. 그리고 참아 내지 ■하고 ■ ■ 에 대한 글을 ■ 것을 후회 ■ 다.
그리고 ■ 는 견디지 못하고 ■을 크게 ■ ■ 소리를 ■ ■ ■ ■ ■ 모든 ■ 들을 ■ ■ ■ .

...
이제 7년 후의 나에 대해서 쓸 차례이다. 잠시만 눈을 감고 쉰다. 이 모든 것은 미친 사람의 말이고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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