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를 먹는 즐거움. 2014년 5월 12일.


인천에서 싱가폴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다. 

이번 내 비행시간은 몹시 생산적이고도 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영됐는데, 이번 비행 동안 마왕이 찢어놓은 세계를 복구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마물을 화염마법으로 지져놓았고. 4월 17일부터 5월 12일 까지의 가계부를 정리하였고(게을러서 항상 한 꺼번에 정리한다) 아베코보를 4페이지 읽었고 옆자리 꼬마에게 눈을 흘겨주었다(나는 너보다 나이가 25살은 더 많다고 크왕). 물론 그 중간중간 체력을 보충하는 잠까지 잤으니 이렇게까지 효율적이게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업에 성공하고 싶으면 저처럼 시간을 사용하세요!


어쨌든 온갖 효율적인 일들을 다 하고 보니 뭔가 생산적이지 않은 일을 하고 싶어져서 아이패드를 열었는데 별로 할일이 없다. 

(사실 닌텐도의 배터리가 다 닳았다. 왜 닌텐도는 돌리면 충전되는 미니 발전기와 발전기를 돌려줄 요정 두마리를 같이 팔지 않는 걸까)

한참이나 아이패드의 문서작성 어플을 열어놓고 뭔가를 써보려고 했는데 글은 무슨, 영어에세이 한 편을 뚝딱 쓸 기세였는데 실제론 5줄 쓰니까 더 이상 쓸 말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 정도 되면 본인의 재능을 탓해야 하지만 뻔뻔스러운 나는 '나는 배가 고픈걸까 배가 고파서 글을 쓰지 못하는거야' 하고 생각하고 있는 참에, 고맙게도 어탠던트 분들이 축축하고 끈쩍하게 늘어진 물건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그게 살아있는 붕어나 물에 적신 키친타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크로와상에 치즈와 뭔가 이것저것을 싼 샌드위치였다. 

아 무엇을 숨기랴 나는 샌드위치를 너무나 좋아한다. 

그게 설령 랩으로 대충 싸서 안에는 습기가 차고 밖에는 마요네즈가 묻어나오는 물건이라고 해도 말이다.


샌드위치의 기본에 대해서 빵이라느니, 내용물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재료의 본질에 집착한 나머지 샌드위치라는 먹거리의 본질을 잊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도 좋은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가 좋다. 치즈는 한국의 슬라이스 치즈보다는 까망베르가 들어간 쪽을 좋아한다(그러려면 빵이 맛이 강해야지) 고기보다는 빵의 안 쪽에 버터를 발라 육류 맛이 나게 하는 편이 신나고 ...

아 미안합니다 이런 식으로 재료 얘길 꺼내면 끝이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진짜 기본은 샌드위치를 먹을 때는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맛있는 먹거리는 다 먹을 수 있었던 샌드위치 백작 나으리가 샌드위치를 찾은 것은 바로 져서는 안되는 카드 게임 때문이었고 분명 김혜수를 닮은 미녀가 옆 테이블에서 고혹적인 눈으로 '백작님이 이번 게임을 이기면 오늘 저 흐트러질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있었을 것이고 12게임 연속으로 꽝카드만 나와서 이제야 말로 풀하우스 정도는 한 번 나오지 않을까 이런 느낌이 오고 있는 그런 때였을 것이다. 맙소사 절대로 자리를 뜨지 않을꺼야. 야 집사! 빵이든 뭐든 아무거나 가져와! 네? 빵에다가 내가 좋아하는 소화 잘 되는 고기라도 껴서 가져오라고! 넵! 우오 샌드위치 먹는다 고기랑 빵 먹는다! 우오오!! 하고 먹었을 것이다. 굿럭 샌드위치, 당신은 멋진 남자였을게 틀림없을거에요.


샌드위치를 맛있게 만드는 것은 결국 그것을 먹는 상황이다. 당신이 맛없고 비싼 부페에서 연어 샌드위치를 찾아 접시에 놓든, 여름의 낯선 거리를 헤매다 돌로 만들어진 계단에서 계란 샌드위치의 포장을 풀든. 

샌드위치의 본질은 바로 애타는 그 상황에 있고 그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그 상황이 당신을 샌드위치 적인 공간에 밀어넣는다. 당신이 여자친구와 있든, 여자친구에게 차였든, 여자친구가 될 사람 앞에 있든지 간에 샌드위치와 당신 밖에 없는 그 고독한 공간은 우리에게 흔치않은 성찰의 기회를 준다.


그럼 이제 샌드위치의 포장을 풀자. 갓 만들어진 거라면 모를까, 만든지 조금 된 샌드위치라면 포장지에 분명 소스가 잔뜩 묻어있을 것이다. 손가락에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포장을 풀자. 어차피 소스가 손가락에 묻어 범벅이 되겠지만 빵을 만질때 까지 소스를 묻히는 것은 참아보자. 포장을 다 풀면 샌드위치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네가 바로 오늘의 샌드위치구나. 네 빵이 치아바타건 크로와상이건 상관없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하고 말해주자.

그리고 양손으로 샌드위치를 잡아라. 당신은 배가 고프고 이 신성한 먹거리는 몇시간 동안 당신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손으로 잡지 말자, 두 손으로 잡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샌드위치라면 경건하게 떨리는 손으로 잡아주자) 준비가 되었으면 크게 한입 물자. 눈을 감고 물어야 하는지 뜨고 물어야 하는지 물어보지 말고 크게 한 입 물어서 빵과 삐져나온 내용물과 소스를 맛보자. 빵은 이빨에서 입술로, 입가로 번져가고 소스는 어느새 혀에 닿아 내용물과 섞이기 시작한다. 코에 기름기가 묻고 손가락에 빵가루가 묻었다.


알고 있다, 생각보다 맛이 없지. 샌드위치는 항상 그렇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맛있을수도 없고 이걸 따로따로 먹는 편이 훨씬 맛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정신을 차리기 전에 입안에 든 샌드위치를 삼켜라. 두번째 한입은 분명 첫번째 한입 보다 맛있을 것이다. 인생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말이지.


샌드위치를 다 먹는 동안 그만 비행기가 착륙할 때가 되었다. 글은 언제 쓰지?

에라 모르겠다. 다음 샌드위치를 먹을 때 쓸수 있겠지. 항상 그런것 처럼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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