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처럼 푸르고, 기억처럼 앙상하나. 아름답기 그지 없다"


15년 7월 1일.

남자는 도북버스 시로가네 선의 시간에 맞춰서 자전거를 반납한다.

키가 크지만 등이 굽고 안경을 썼다. 낡은 유니클로 청바지에 아메리칸 어패럴에서 산 회색 후드티를 입었다. 

안에 입은 남색 셔츠는 땀과 비가 섞인 냄새가 나서 고약하기 그지 없다. 남자는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멀찍히 떨어져 선다.

가방은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한 긴 사각의 백팩이고 비교적 새것 인 것은 나이키 신발 밖에 없다.

좀처럼 웃지도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다. 따분한 인상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음료수를 사고 있으니, 가게의 주인이 말해준다.

저 여자아이들도 아오이케에 가. 슬쩍 쳐다보니 튼튼하고 따뜻하게 옷을 입었지만 묘하게 새것.

대만 사람이나 싱가폴 사람이려나, 하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가겠군.


버스는 하루에 고작 네 번, 아사히카와 역에서 비에이 역을 거쳐 시로가네 온천까지 가는 노선이다. 

9시 26분, 12시 11분, 15시46분, 17시26분. 비에이역 출발, 아오이케 도착.

15시 46분 버스를 타고 가면, 16시 06분에 도착. 돌아오는 버스는 16시 43분에 출발한다.

37분 밖에 체류 안하잖아. 괜찮으려나. 왕복 40분에 37분짜리 체류라니.


비에이의 시가지는 보잘 것 없다. 

후라노도 비에이도 농촌치고는 비교적 세련되었지만 건물들은 평범하고 화려하게 뭘 먹거나 쇼핑을 하는 건 바라기 힘들다.

"비에이센카(비에이 북쪽 시가지에 있다)"나 "후라노마르쉐(후라노 시가지에 있다)"같은 농산품과 기념품을 손쉽게 살 수 있는 곳도 생겼고 

비에이의 북쪽의 주택가에는 온통 이탤리언과 프렌치 뿐이지만 비에이역 주변은 평범하게 약국과 도장가게, 꽃집 같은 것들이 있다. 

관광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으로 보내고 자기들의 삶을 침범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농지로 들어가지 마세요. 비에이가 아름다운 이유는 농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는 안내문을 어딜가나 볼 수 있다.

두시간도 넘게 비에이의 구릉을 자전거를 타고 굴러다녔기 때문에 젖은 휴지처럼 지친 남자는 사실 아무 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홋카이도에 도착한 뒤 매일 짧게는 세시간에서 길게는 여섯시간 정도의 기차이동을 하고 있고,

매일 매일 적어도 8킬로미터 정도는 걷고 있다. 오늘은 오전 내내 비오는 길을 걸었고 오후 내내 자전거를 탔다.

더 이상 움직이기도 싫으면서 앉을 곳도 없는 낡은 버스 표지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여자 둘은 사이가 좋은지 지친 행색을 하고도 서로 끊임없이 소근대며 얘기를 나눈다.

키득키득 웃으며 잠시 남자쪽을 쳐다보다가 남자가 쳐다보자 금방 고개를 돌려버린다.

생각 했던 것보다 더 오래 기다려 버스가 온다.


낡은 버스는 덜컹거리며 숲길을 달려간다. 언덕과 밭과 숲과 구릉이 스쳐지나간다.

이 땅에서 버스를 타면 아름다운 광경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아무런 감흥없이 가버린다.

여길 여행하는데는 자전거를 타는게 좋겠지. 오토바이가 제일 좋으려나. 하고 남자는 생각한다.

바람을 느끼고, 소리를 기억하는데 차는 좋지 못한 탈 것이다. 

그는 아주 잠시 졸고, 버스는 정류장에 도착한다.


버스가 내리고 아주 잠깐 흙길을 걷자 거기에 푸른 연못이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작은 연못이 있었고 죽은 나무들이 있었다

연못은 파랬고, 나무들은 희디 희였다

연못의 반을 도는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연못가에 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모두 푸른 색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흙길을 빠져나와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에 선다. 

그는 혼자 였기 때문에 그가 그 연못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아무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남자는 울컥하는 무언가가 핏덩이처럼 목 아래 차오르는 걸 느낀다. 버스 정류장 뒤의 숲으로 들어가 숨을 들이쉰다.

녹슨 철창과 군데 군데 보이는 콘크리트에도 불구하고 길 옆의 숲조차도 주먹질처럼 빽빽하게 녹색이 들어서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손목 냄새를 맡는다. 땀 냄새가 아니라 아까 본 푸르디 푸른 연목에 시체처럼 서있는 흰 나무 같은 냄새가 난다.

이 연못은 88년에 재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콘크리트의 연못, 

어째서 이런 물 빛을 내는지는 알수가 없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물에 잠겨 있는 흰 나무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사라져갈 것이고

언젠가 산 속의 그냥 평범한 연못이 될 것이 틀림없다. 

남자는 어느날 처음으로 이 "만들어진"연못이 푸른 물을 머금고 있는 걸 본 사람의 마음을 떠올린다.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하자. 그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든다.

한참을 지나 같이 버스를 타고 온 여자 둘이 연못이 있는 숲길에서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온다.

그들은 버스 시간이 다 되도록 연못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우산이 없는지 둘은 서로를 반쯤 얼싸안고 나무 아래에 선다.


남자는 영어로 말을 건다. 우산 쓰세요, 저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두 여자는 당황한듯 애매모호하게 우산을 받아 하나의 우산을 같이 쓴다. 

생각 했던 것보다 더 오래 기다려 버스가 온다.

오늘 오전부터 비가 내렸으니 우산이 있었을거야.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남자는 버스의 오른 쪽에 여자들은 버스의 뒷 편에 앉는다. 시로가네 온천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몇 명 타고 있지만.

아오이케에서 버스를 타는 것은 외국인인 그들 세 사람 밖에 없다. 빗줄기가 점점 세지고 세상이 젖어서 녹아들어가는 것처럼 추워진다.


남자는 비에이 역에서 내리려던 걸 포기하고, 아사히카와 역까지 그대로 버스를 타기로 한다.

그리고 친한 누나가 쓴 문장을 떠올린다.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버스를 타기로 한다"

눈을 감고 버스가 도착하길 기다린다.



16년 6월.

주인어른, 아오이케는 요즘 어때요?

그대로야 사람이 엄청나게 많이 찾긴 하지.

자전거를 타면 얼마나 걸리죠?

작년에도 말했잖아 가는데 두시간 오는데 두시간, 중간에 언덕이 있어서 힘들고.

12시에 버스가 있어. 지금 8시 정도니까 밥먹고 가면 되지 않을까?

요즘은 비가 와서 별로 파랗지 않을거야.

날이 개어야 파란가요?

그렇지, 날이 개면 물이 그렇게 파래. 그래서 겨울엔 볼 수 없어.


남자는 잠시 생각한다. 지난 번에도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페달을 두 세번 밟는 듯 하더니 금방 역의 광장을 벗어나 휙하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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