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진다. 

어느날 남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를 듣자 그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신은 그에게 소명을 부여하기 위해 불타는 나무나 광휘에 휩싸인 사람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우연과 망상의 세계에서 그것은 어떤 형태라도 취할 수 있다.

비논리적인 흐름으로 이어지는 광고, 우연히 주변 사람들이 건네는 한 마디. 갈 생각이 없었던 곳으로 길이 이어지고.

우리의 편리한 뇌는 알아서 커다란 사람의 얼굴을 공백에서 발견하고, 커다란 누군가의 의지를 우연과 우연사이에서 연결해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5년 6월29일. 구시로.


(몇 번이고 똑같이 그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


너무 늦게 일어났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조식을 먹었다.  

캐리어를 맡기고 역에 오니 구시로 습원과 호수를 잇는 노선을 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노롯코라는 이름의 구식 열차를 타고 습지와 호수를 달리는 것이 구시로의 중요한 관광 상품인데 노롯코의 첫차를 놓쳤다.

관광센터가 열리기를 기다려서 물어본다. 어떻게든 안될까요? 아 다음열차 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기다리셔야해요

혹시 구시로에서 하고 싶으신거 다른게 없나요? 아뇨 그냥 구시로 습원을 걸어다니고 싶습니다.


내가 홋카이도에 오기로 한 것은. 구시로 습원에 대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동부의 구시로시 바로 북쪽에서부터 양탄자같이 펼쳐지는 것이 바로 구시로 습지. 일본에서 최초로 람사르조약에 등록된 총면적 183평방킬로미터의 거대한 습지이다. 이곳에는 에조 사슴, 흰꼬리 독수리를 비롯하여 2천 종류에 이르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여름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며 겨울에는 특별천연기념물인 단학도 찾아온다. 대습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주위의 구릉에는 여러 개의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구시로 시 습지전망대는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어 초록의 양탄자 위를 산책할 수도 있다. 특히 호소카 전망대는 눈 아래로는 구시로 강의 물굽이를, 멀리로는 아칸의 연봉들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일본정부 관광국 구시로 습원 안내 부분)


내가 본 사진은 넓은 녹색 사이로 오래된 기차가 대각선으로 난 철길을 따라 달리는 모습이었다. 스펙타클하거나 아름다울 것도 없는 비인간적인 광경.

달리는 기차는 이 땅에 무신경한 녹색을 사진으로 담을 때 촛점을 찾지 못해 당황한 사진 작가가 놓아둔 절취선 같았다.

도서관에서 빌린, 발간된지 10년쯤 된 가이드북은 다른 페이지는 너덜너덜했지만 이 페이지는 아주 깨끗했다. 

그래 여기를 가야지, 여길 걸어다닐거야. 하고 홋카이도 여행을 결정했다. 


하와이든가 프랑스든가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안가, 홋카이도에 갈거야. 나는 여길 걸어다닐거야. 하고 습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너도 참. 친구는 그것말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하와이에 갈 예정이었다. 그래 홋카이도 여행을 가기 전에는 그런 계획이 있었다. 나도 내가 그럴 줄은 생각도 못했다)


노롯코를 타고 전망대로 가는 것도 있고, 구시로 습지를 걸어다니고 싶으면 네이쳐 센터로 가서 하이킹 코스를 가보세요.

네이쳐 센터는 버스를 타고 가나요? 네, 시간표를 보여드릴게요.


구시로는 그 자체만으로도 조용하고 평안한 도시이다. 2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좀 그렇지만. 

항구는 깨끗하고 넓으며 본격적인 어항이라기 보다 잘 꾸며진 항구도시처럼 느껴진다. 성수기가 되면 로바다야끼나 구시로 주변의 아칸호 등을 즐기러 많은 사람이 온다고 하지만 구시로 시 자체에 상주하는 인구는 많지 않아 보인다. 미술관과 관광객을 위한 시장, 예를 들어서 항구에는 피셔맨즈 워프라는 순수하게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 있다. 식물원에 밥집 그리고 작은 해산물 소매 시장 까지 있어서 과연 홋카이도 동쪽의 중심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사람이 그닥 많지 않았고. 여름에는 이 주변에 로바다야끼의 가판이 쭉 늘어선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외의 시설물들은 붉은 벽돌을 써서 만든 것들이 많았다. 넓은 땅을 마음 껏 써서 다리와 석상을 배치해서 의외로 이 도시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활감은 적고, 어디랑 비슷한가 싶으면 러시아의 항구가 이런 느낌이겠지. 싶다.


(구시로에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비가 있다. 그가 쿠시로신문사의 기자로 잠시 일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쿠시로를 떠나기 직전에야 알았다)


아침시간이 지나서야 노롯코를 탔다. 석탄운송용 화차를 승객이 탈수 있게 개조한 차체는 안은 나무이고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차량은 아니다. 거꾸로 그 느릿느릿함과 불편함이 매력으로 여러가지 노선에서 같은 이름으로 운행되고 있는 열차이다. 항상 인기가 많고 성수기에는 어느 정도 사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탈 수 없다. 하지만 비성수기에 여기를 방문하는 사람이 그닥 많지 않아 이 열차를 탄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어린 사람이란 것은(서른이 한참 넘었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구시로 습원역에서 내려서 전망대를 구경했다. 구시로 습원의 전체 크기는 서울의 3배 정도 된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걸로 반족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나는 전망대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구시로 역으로 돌아가는 열차가 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저 쪽에서 부터 이 쪽까지 산도 없이 넓게 펼쳐진 광경을 보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바로 구시로 역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올라 네이쳐 센터로 들어갈 수 있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버스는 구시로 역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올라가 네이쳐 센터로 갔다. 거기엔 누구나 구시로 습지를 걸어다닐 수 있는 코스가 있다.

산 틈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길로 들어가니, 나무로 만든 센터가 보였다.

실례합니다. 

나는 센터에 들어가 안에 들어가 있는 아무에게나(한 명 밖에 없었다)말을 걸었다.

약초꾼 처럼 생긴 중년의 남자였다. 남자는 센터가 닫을 시간이 다가와 귀찮은듯 고개를 들었다.

여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횡단하려면 얼마나 걸리죠?

2시간? 3시간? 중간에 길이 공사 때문에 막혀서 오래 걸릴거에요.

중년의 남자는 종이 지도를 꺼내 선을 긋는다. 이렇게 나아가요.

선은 거칠고 곧게 종이의 반을 가로지른다.


(나는 구시로 습원을 나올 때 그가 가르쳐준 코스를 그대로 따라 나왔다 정말 한참을 걸어서 슬슬 무리다 한계다 하는 시점에서 "작년 곰이 출몰한 지역이니 주의해주세요"하는 표지판을 보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기어나왔다)


센터 밖에는 나무 잔교가 놓여져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갈 수록 소리가 커져간다.

그것은, 처음에는 바람소리처럼 들렸다.

새가 부르고, 바람이 부르고 나무가 몸을 흔드는 소리. 거칠 것이 없는 평평하고 광활한 습지를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

잔교를 조금 더 걸었을 뿐인데,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이곳 까지 오지 않는다.


녹색이, 녹색이, 녹색이, 녹색이 펼쳐져 있다.

녹색의 소음이 산불같은 소리를 내면서 사방에서 떨어져 내린다.

상상하고 있던 흙의 비린내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싱싱한 풀을 갓 잘라내었을때 나는 냄새만이 느껴진다.

여긴 거대한 풀의 한 가운데야. 세상에 놓여진 세상의 끝 중 하나야. 너는 그래서 여기까지 온거야.


나는 습원에 놓여진 나무 잔교의 한 쪽에 서서 귀를 기울여 사방을 본다. 눈으로는 어떤 새도 동물도 볼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내 옆을 치고 가버렸다. (나는 순순히 나의 끝을 인정했다)

나는 여기에 무너지기 위해 온 것이다. 멀리 바다를 건너, 기차를 타고 밤의 끝에 도착한 도시에서. 습지로.

무엇이라도 혼잣말을 해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음이 나를 안았다.


나는 그렇게 통곡하기 위해 찾아간, 그 땅 끝 같은 벌판에서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왔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음. 우주의 모든 곳에서 떨어져 나온 신호 같았다.

그것은 내 삶의 끝이고. (언젠가 혹은 바로 지금) 이빨처럼 나를 찢어 흩뿌릴 것이다.

나의 일부가 저 푸른 습지에서 소음이 되어 사라졌다. 

나는 소음과 끝의 위로를 받아들였고 습지를 걸어나온 나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조각이 되어 습지에서 산으로, 그리고 도시로 각자 걸어나갔다.


여기에 있는 나는, 3시간에 걸쳐서 구시로 습원을 가로 질러 산을 넘어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고,

구시로 역에서 오비히로 역으로 밤 기차를 탔다. 밤은 길었고 내내 같은 노래를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소음으로 인해 조각난 나를 채우려는 듯이 굴었지만 분리된 나를 이을 수는 없었다.

여러분은 영영 구시로 습원에 남은 나와 길을 돌아 나온 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남은 것은 일부분의 나 뿐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내 일부는 아직도 습지의 한가운데서 그 소음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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