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아룁니다.

노츠케 반도 네이쳐센터 I상.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저는 6월에 노츠케 반도를 방문하였던 한국인 K라고 합니다.

지금쯤 노츠케 반도는 여름을 맞이해서 더욱 아름다워졌겠군요. 꽃들이 피어나고 더 많은 새들이 반도를 찾아왔겠죠.

저는 홋카이도 여행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어느덧 몇개월이 지났지만 노츠케 반도를 방문하였던 일은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I상의 친절하신 가이드에 노츠케 반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봤던 추억은, 이번 홋카이도 여행의 가장 소중한 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노츠케 반도를 다시 한 번 가게 된다면 모래밭도, 바람도, 거품처럼 날리던 바다도 그대로 일까요. 

I상께서는 시간이 지나면 사구도 사라지고, 숲도 사라져서 이 곳이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거라고 말하셨었지만,

저는, 어째서인지 노츠케 반도의 모습이 변할 거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어떤 세상의 끝이라는 개념의 하나로서, 모습을 바꾸더라도, 위치를 바꾸더라도 영원히 이 별 어디엔가 

노츠케 반도의 풍경이 남아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만큼 그 곳은 아름다웠습니다. 

다시 뵙기를 기대하며.

 

16년 8월.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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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상,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떠올리지 않았던 것들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 하고 자아란 것은, 파도 위를 표박하는 물거품 같은 것이겠지요.

어떤 중요한 기억만이 사람의 깊숙한 곳에 남아 그 사람을 규정하고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는데

저는 아무래도 얕은 바다에서 튀기던 물거품과 황량한 사구 위에 불던 바람소리를 깊숙히 간직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날 아침 어항에서 I상을 만나던 일부터 배를 탈 때의 일. 바다를 달려 사구 위에 도착한 일

시간 순서대로, 아니 그 시간 그대로를 기억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듭니다.

 

과연, 싶을 정도로 홋카이도의 바다는 추웠습니다. 6월 인데도 불구하고 귀가 얼어붙을 것 같고

뺨이 덜덜 떨려오더군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가져온 후드티 두개를 겹쳐서 입어야 했을 정도였어요.

꼬락서니가 굉장히 우습게 되었는데. 웃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무시해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얕은 바다라 그런지 물거품이 튀어오르고 한참 해주시던 설명은 제대로 듣기가 힘들었습니다.

시레토코 곶에서 밀려나온 흙들이 모여서 사구가 만들어졌고 매년 조금씩 스러져서 앞으로 백년 쯤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실 상 지금의 노츠케 반도는 사라진다고 하셨던가요. 

 

실제 제가 노츠케 반도를 보았을때의 감상은 그런 불안정한 지형이라기 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육로로 본섬과도 이어져있고 네이쳐 센터나 등대, 산이 보이지 않게 사바나처럼 넓은 공터(물론 진짜 사바나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넓겠죠)

철새들이 도래하는 습지가 있는 땅이니 그리 쉽게 이 곳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100년, 긴 시간이죠. 100년 뒤에 제가 살아있기나 혹은 제 이름이라도 기억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애닳은 마음이 들은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처럼, 생명처럼 반도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세상의 어느 누가 강의 사라짐을, 산의 사라짐을 걱정할 까요. 누구의 평생 동안 그걸 목격할 날이 있을까요.

오직 사람의 힘으로, 때때로 하늘의 힘으로 땅이 패이고 무너져 다른 풍경이 되는 것을 보는 일이 있을 뿐이지요.

 

배를 타고 도착한 반도를 보는 순간, 저는 바로 이 곳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하하 하고 웃었을 때, (분명, 와아 저 사람 미친 사람인가봐 하고 생각했을게 틀림없을텐데도) I상은 제 쪽을 안 쳐다보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기가 차서 웃은게 아니라 이 곳이 마음에 들어서 웃고 말았습니다. 

언덕이나 산 처럼 높은 곳이 없이 높은 곳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2,3미터 정도의 평탄하게 넓은 땅.

바람이 멈출 곳이 없고 물이 고일 곳이 없이 황량하고 아름다운 땅. 이 곳에 발을 디뎠을 때의 감상은 그야 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약간의 흙 위에 바람을 이기고 자라난 풀들, 진흙을 밟지 않도록 해변에 놓여진 잔교를 건너자. 

바람이, 바람이,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아무 것도 거칠 곳이 없는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흡사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물 그림자도 없이 해변, 아니 해변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물거품 부서지는 흙과 바다의 경계에서 공기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엔 새가 많아요. 알고 계시나요? 하며 준비해온 쌍안경을 건내주셔서 바라보니 두루미가 있습니다.

몇 쌍 정도 두루미가 여기에 와 있어요. 오늘은 짝궁이랑 떨어져서 혼자 먹이를 찾으러 나왔나 보네요.

다른 동물들은 뭐가 있죠? 새 말고? 여우요. 여우. 네 홋카이도에는 여우가 많으니까요. 모르긴 몰라도 개보다 여우가 많을 걸요.

그냥 길에서 지나가다가 아 여우다 하고 보는 일도 많고. 아 여우다 할 정도로 여우가 많다구요. 그냥 마을에서도?

물론 삿포로 같은 도시는 다르겠지만, 여긴 시골이니까요.


그리고 급작스럽지만, 여길 찾는 분들의 반은 이걸 보러 오시는거죠. 라며 잔교 위를 걸어 I상은 해변가 위에서 말라버린 숲으로 갑니다.

분명 에전에는 잡목림이었을 곳이, 지형의 변화로 그대로 말라 죽어가며 소금끼 짙은 바람에 하얗게 말라서 남아있습니다. 

분명 지형이 변화함에 따라 전에는 그나마 비옥한 흙이 있었던 곳 위에 짠물이 들어온 것이겠지요. 

짠물이 올라와 땅은 갯벌이 되었고 어느새 주변은 바다로 둘러싸였습니다.

나무들은 금세 죽었고 썩어가고 무너져가며 하얀 풍경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더 울창하고 잔목들이 많았지만 점점 규모가 작아져가고 있어요. 이 마른 숲도 사라지고 있는거죠. 새로 잔목이 생겨날리 없으니까.

10년 전에는 훨씬 많았나요? 그렇죠 10년 전에는 정말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어요. 그래서 유명해졌고 사람들이 많이 왔었죠.

어때요 맘에 드시나요? 아주 맘에 듭니다.


갯벌을 지나면 좀 더 풀 숲이 우거진 곳이 나오고 잡목림이 있습니다. 본토에는 고산에만 나는 여러가지 꽃들이 여기엔 그냥 피어있어요.

춥기 때문에? 춥기 때문이죠. 봐요 고토리에요, 일본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새에요. 보이나요?

넓게 펼쳐진 풀 숲에는 일부러 뿌려놓은 것보다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또 죽어가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풀 숲 너머 네이쳐 센터 건너편에는 홋카이도 본섬과 맞 닿지 않은 거친 바다가 있었습니다. 깊고 푸르고 검다.

노츠케 반도를 넘어서면 쿠니시리가 있죠.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는 섬? 네 북방영토. 저 쪽엔 고래가 굉장히 많아서 반도의 등대에서 보면 가끔 고래가 보여요. 아 진짜? 엄청나게 빠르게 들어가버리기 때문에 사진은 아직까지 한 장도 못 찍었는데  한 번 보면 엄청나게 감동하게 되죠.

많이 보셨어요? 많이 보지만 볼 때 마다 감동해요. 고래니까요. 고래니까 그렇죠.


등대 밑 모래 밭에서는 뭐지 하고 발을 굴러보다, 여우가 뚫어놓은 굴에 발이 빠집니다.

여긴 엄청나게 넓군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거의 다 어부들이죠. 그리고 별장처럼 가끔 놀러오는 사람들.

초원을 걸어서 외딴 오두막에 들어갑니다. 새들을 관찰하는 작은 오두막이지요. 안에는 넓은 창을 열고 새들이 쉬는 연못을 볼 수 있습니다.

창문을 단단히 고정하고 자리에 앉아서 새들을 봅니다. I상이 가리키는 새들을 보며 새들의 이름을 따라합니다.

물새들은, 평온하게 앉거나 졸거나 헤엄을 치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하늘로 날아가고 또 그만한 수의 새들이 연못으로 날아옵니다.

영국 사람들이 겨울이 되면 찾아와요. 가끔 태국 사람들이 여름이 되서 찾아올 때도 있죠. 여기서 밖에 볼 수 없는 새들이 몇 종류 있으니까

그렇군요. 저는 연못 수면에 반사되는 햇볕을 망연히 쳐다봅니다. 


제가 이 모래투성이의 반도를 방문한 이유를 설명드렸던가요.

이 곳의 사람들은 이 홋카이도에서도 끝인 이런 곳에 왜 한국인이 혼자 찾아왔는지 궁금해 하더라고요.

하긴, 비행기를 두 번,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배를 타야 하는 곳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도 아닌데 혼자 이런 곳에 오는게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겠군요.

저는, 사실 홋카이도에 노츠케 반도를 보기 위해 왔습니다. 이 곳을 떠난 후에 이곳 저곳에 갈 계획이 있긴 하지만...


저는 꽤 오랫동안 살아갈 이유가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량한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을 보려고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해도 존중은 해야하는 법. (일종의 인권 보호인가. 하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저열함에 실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찾아온 이유는, 풍경이 아닌 개념에 가까운 것을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땅 끝이나 세상의 종말 같은 거창한 말로 설명하긴 그렇지만, 저 먼 곳에 있는 "피안"을 보고 싶었다고 하는게 비슷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가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이름의 고통, 무의미한 삶에 대해 느끼는 고통. 거기엔 해결책도 없고 결론도 나지 않으니

저는 저 멀리를 보고 싶었습니다. 저 멀리에 무엇이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반도를 나오는 길에 I상이 보여주신 숲을 기억합니다.

반도 중심의 마른 숲처럼 흰 색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숲. 지금은 사유지라서 들어갈 순 없고요.

언젠가 저 숲이 점점 가라 앉아서 또다른 세상의 끝 같은 풍경이 되겠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세상의 끝은 사라지지 않고 "이동"할 뿐이구나. 숲이 생명을 다하는 것처럼 끝도 생명을 다하고

또다른 숲이, 세계가 이어지게 되는구나. 하고 납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I상, 이 사구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그 전에 이 말라붙은 숲이 사라지고, 그 전에 "제"가 사라지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개념"들이 사라지기 전 까지는 제 안의 기억을 할 수 있는 한 소중히 간직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그것이 제가 저라는 개념의 종말을 맞이하는 가장 건전한 자세가 되겠지요.


차를 몰고 가다가 아 여우다. 하고 말하시고는 손가락을 해변의 한 점을 가리키셨었죠.

거기에 정말 여우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시는거죠? 하고 물어보니 뭐라고 대답하셨더라.

틀림그림 찾기 같은거에요. 라고 하셨었죠. 틀린그림 찾기.


다시 만날 날 까지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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