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날씨였다.

아십니까, 비가 오는 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털복숭이 아저씨처럼 술잔을 기울이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사내다운 풍취가 없어서 온천에 들어갔다 와서 책이나 읽는거죠.


전날 다이세츠잔의 한 쪽 구석인 소운쿄에 도착해서 오후를 보내고 나니, 멈추지 않는 비 때문에 쿠로타케를 가볍게 등산하려던 계획도 망해버렸다.

이상한 곳에서 부지런하기 때문에 소운쿄의 케이블카를 타고 쿠로타케의 중간 지점까지 올라가 산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지만

슬로프를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또 산 정상까지 왕복 2시간이 좀 넘는 스케쥴을 소화할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사방에 곰을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가득해서 그 전 날 시레토코에서 정말로 곰을 만난 나로서는 겁을 먹고는 일찍 숙소에 들어와 온천을 하고 잠이 들었다.

달리 할일이 없기도 해서인데 리조트형 관광지로 꾸며져 있다고 해도 결국은 산 속의 골짜기, 기념품 샵이나 라멘집, 이탤리언 레스토랑이 있지만 본토의 화려하게 디자인된 온천마을에 비하면 아무래도 소박하다. 야생의 사슴들이 그냥 공터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걸 보았다.

다음날 호텔 뒤의 산책로를 걸을 때도 얼마나 사람이 없던지 곰나오겠어 라는 생각을 서른 번은 한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문제는 날씨였다.

원래대로라면 다음날 일정은 비에이에 가서 자전거로 아오이케에 가는 거였는데, 이렇게 비가 내려선 3분만 자전거를 타도 독감에 걸릴 정도다. 호텔의 송영버스를 타고 아사히카와에 가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떠나는 아사히카와-비에이-후라노 라인은 15년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곳. 대략 어떤게 있는지도 알고 뭘 볼수 있는지도 안다. 어디를 가든 갔던 곳을 한 번 더 가는 수 밖에 없는데...하고 지도를 보던 나는 버스안에서 충동적으로 로쿠고를 가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후라노 시내에 위치한 곳이라서 비가 와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겨울 시즌이 아닌 후라노 시는 커다랗게 4개 정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비에이와도 이어지는 후라노 북부 지역으로 사실상 하계 후라노의 클라이맥스인 라벤더 밭과 멜론 농장이 있으며. 도미타 팜은 홋카이도에서도 아사히카와 동물원에 필적하는 유수의 관광지이다. 중심지인 후라노 시내는 사실 별다르게 볼 것이 없는 곳으로 시골 읍내답게 번화한 곳으로 후라노 마르쉐 정도가 그나마 볼만한 지역. 후라노의 서쪽은 겨울 관광의 중심지인 후라노 프린스 호텔이 있는 지역으로 와인공장이나 치즈 공방 같이 참가형의 액티비티도 가능한 곳이지만 비 겨울 시즌이라면 역시 약간은 애매하다. 후라노 지역이 상상 외로 넓기 때문인데(다른 홋카이도와 똑같다) 동쪽에는 로쿠고麓郷가 있다.

숲과 구릉으로 이루어진 후라노의 숲, 로쿠고. 후라노 시내에서도 꽤 멀기 때문에 유리 공방이나 잼 공방, 그리고 앙팡맨 숍 정도가 유명한 곳인데. 후라노의 다른 공방/농원들이 그렇듯이 메인이 되는 것은 방문자가 같이 참여해서 뭘 만들거나 하는 클래스가 유명하다.

달리 생각하면... 체험 클래스에 안 들어가면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곳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가 왜 로쿠고에 가겠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여기서 결말을 미리 말해주겠다. 나는 로쿠고에 가 수 킬로미터 시골길을 비를 맞으면서 걸었고. 시골길을 걷는 내내 나는 왜 자꾸 이런 여행을 할까 반성을 했다. 결국은, 그냥 뭐라도 해야지 하는 동아시아인 적인 부지런함이 아니었을까. 혼자 하는 여행 내내 나를 저주처럼 묶고 있는 동아시아인 적 부지런함. 오오 공자여 오오 맹자여. 농사천하지대본이여.


버스에 내려 아사히카와에 도착 할 때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심을 굶고 편의점에서 대충 빵을 사서 전차를 탔다.

아사히카와와 후라노는 가깝다는 이미지가 있는데도 1시간은 걸리고 그나마 전차도 많지 않다.(그건 작년의 여행때 뼈저리게 느꼈다)

비는 전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갈 수록 강해졌고 후라노 역에 도착해서 짐을 맡기고 후라노 사람들도 잘 모르는 로쿠고행 버스를 탈 때 쯤이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에이에 가지 않기로 한 본인의 현명함을 칭찬하고 그대로 호텔에 들어가 쉬기로 하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비는 중학교 수학여행의 벌칙게임 처럼 내렸다. 집요했고 개 중에 팔꿈치로 치는 비매너인 녀석이 있었고 가끔 멈추는가 싶더니 더 씩씩하게 내렸다.

버스는 다리를 건너 구릉을 타고 올라가 내가 봤던 그 어느 홋카이도의 거리보다 작고 초라한 시내에 도착했다. 로쿠고였다.

건물들이 있지만 가게는 아닌것 같고, 건물은 모두 적어도 20년은 될 듯하게 오래 되었다. 구글맵을 살펴보니 밥집은 두 서너 곳. 버스 정류장은 하나 뿐이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자전거를 빌렸을텐데 자전거를 어디서 빌려야 하는지도 알수가 없었다.


이제는 소똥이나 말똥 냄새가 난다 정도로 홋카이도의 어딘가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는다.

이 로쿠고는 로쿠고 숲과 전망대를 중심으로 작은 시내가 있고 농지와 여러가지 관광지가 흩어져 있는 구조이다. 그닥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찾아오는 것 같진 않지만 산천은 수려하고 길가의 농가가 평범하게 아름답다. 80년대 부터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촬영지였는지 여기 저기 그런 곳이 있다고 안내문이 붙어있지만 외국인인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차라리 아름다운 농토와 숲이 있어요 하고 홍보하는게 낫지 않았으려나. 8,90년대의 드라마가 어디에서 촬영되든 너무 오래 전 아닌가? (슬프게도 후라노 서부 지역도 그런 안내 푯말이 꽤 많다. 여기선 이런 드라마를 촬영했어요. 라고 써있지만 오다 유지 이전의 일본 드라마는 나에게 있어서 유사 이전보다 멀디 멀다. 대부분의 일본인에게도 그럴 것이다)

5시 경엔 후라노 시내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간다. 그 때 까지 글래스 포레스트라는 유리 공방과 잼 공방을 둘러보고(그래 가볍게 둘러보자고 생각했지) 후라노 시내로 돌아가기로 했다. 유리 공방은 로쿠고 읍내에서 바로 옆, 잼 공방은 5킬로미터 정도 시골길을 걸으면 있는데 학습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비가 좀 오지만 걸어서 가지 라고 또다시 생각했다.


유리 공방은 4,5건물 정도의 판매 건물과 유리 제조 공방이 같이 있는 곳이다. 어느덧 유리 공예 자체가 촌스러운 것으로 변했지만 이 공방은 그런 점은 전혀 부정하지 않고 물량으로 그걸 극복해내려는 것 같았다. 유리로 된 것이라면 거의 모든 종류를 다루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 오타루의 오르골 공방처럼 할수 있는 한 모든 종류를 진열해두고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이 중에 하나는 말야. 하는 느낌이다. 

가장 압도 당한 것은 작은 크기의 유리 공예품들, 각종 동물들을 갖가지 디자인과 포즈로 제작해놨는데 중형 전시대에 양쪽으로 가득차 두줄 정도 그런 물건들로 가득차 있다. 이런 집착이면 유리로 디오라마를 만들라고 해도 만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 토끼 인형이 제일 맘에 들어서 주의깊게 보고는 다시 올게요, 하고 나왔다.

가장 사고 싶었던 것은 묵직하게 언더락을 마시면 제일 좋을 듯한 유리잔들. 때마침 일본의 아버지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제품들을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공방의 앞에는 작은 화로가 있고 사람들이 유리를 불거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님, 이 유리는 베네치아적인 데포르메와 투명도가 핵심이군요. 부드러운 곡선은 얼마전 뉴욕에서 전시회를 한 그 분의 영향인가요.

자네는 공부를 많이 하는군, 이런 데이비드 카퍼필드 적인 디테일의 가장 중요한 점은 유리를 불 때의 호흡량에 따라 달라지지 나는 요즘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자전거를 육십킬로미터씩 탄다네.

(위의 대화는 제가 제 멋대로 생각한 것들입니다) 같은 훌륭한 대화를 하고 있겠지. 멀리서 멍하니 공방을 쳐다보다 걸음을 돌렸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이 정도면 잼 공방에 다녀와야 한다.

비 때문인지 길가에 피어있는 꽃에서 강한 향이 느껴진다. 공기가 맑은 홋카이도인데 하늘이 흐려 멀리 까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세븐 일레븐에서 사서 일본에 올 때 다시 가져온 우산은 너무 작다. 비는 지치지도 않고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한다. 

멀리서 아이가 보였다. 여자아이같은 뒷 모습에 우산이 없이 시골길을 걸었다. 어쩌면 5분 전 쯤에 지나갔던 초등학교의 학생인 것 같다.

예비 우산이 있던가.

우산을 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에서 우산 없이 걸어다는 아이에게 우산을 빌려준다고 했을 때 한 번도 우산을 받았던 아이가 없었다.

아무리 쫓아가려고 해도 의외로 걸음이 빨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잠시 길 옆에 떨어진 솔방울이 귀여워 사진을 찍느라 눈을 돌렸더니 사라져버렸다. 


길고 우아하게 굽은 시골길을 4,50분 걸었을까 표지판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가면 잼 공방이 나온다.

이 떄 쯤이면 비는 그치기를 포기하고 쏟아져내리기 시작하고 6,7팀 정도의 사람이 잼공방에 비를 피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잼 공방은 70평쯤 되어보이는 1층에 잼이 가득하다. 홋카이도의 자연은 풍요로워 일본내에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식량 자급율을 가지고 있다. 그건 일반적인 곡물 뿐만이 아니라 고기, 우유 등의 부식들의 생산량에서도 마찬가지라서 각종 과일 또한 엄청난 양으로 생산된다. 의심이 나서 제쳐본 잼들은 열이면 열 모두 홋카이도에서 생산된 과일들로 만들어진 잼이었다. 하나 정도는 외국산 잼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포기하고 크로와상 카탈라나와 카레를 시켜 밥을 먹었다. 온 몸이 노곤해져 3년만에 먹는 식사 같은 기분이다.

한 떼의 대만인들이 인당 하나 씩의 카레를 시켜 커다란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주방에는 쉐프의 음식을 쉐프의 어린 딸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일본의 카레는 한 접시로 모든게 설명되는 훌륭한 음식이다.


카레를 먹고 나오면 바로 보이는 것이 앙팡맨 샵과 앙팡맨의 석상들이다. 하나같이 비를 맞고 있지만 씩씩하게 여기 저기를 바라보며 서 있다.

히로시마의 어떤 절에서 아이들을 공양하기 위한 절에 앙팡맨의 석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비를 맞고 있는데도 쓸쓸하기 보다 용감하게 보인다.


호빵맨, 그러니까 앙팡맨 기념관은 고치현(야나세 타카시의 고향이다), 후쿠오카와, 나고야, 고베, 요코하마 같은 곳에 위치해있다. 홋카이도에 있는 곳은 앙팡맨 샵이니까 뮤지엄보다는 격이 낮은 곳인데, 1층에는 앙팡맨 구즈로 가득하고 2층에는 야나세 타카시의 "앙팡맨 전설"에 대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그림은 세균맨에게 주먹을 날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픈 동물들에게 자신의 머리를 떼에서 주는 장면. 작가는 태평양 전쟁의 참전병으로 전쟁 중에 전우 대부분이 죽고 기적적으로 생환하지만 전쟁 중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바로 배가 고팠던 것,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고 한다 영웅 중에 가장 훌륭한 영웅은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영웅이 아닐까. 그렇게 앙팡맨이 탄생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만화가가 된 그는 50이 훨씬 넘은 나이가 되어야 만화가로서 대성하고 90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일하다 94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별의 생명이 내려와 사람들에게 끝없이 자기를 베푸는 영웅, 귀환병은, 만화가는,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앙팡맨의 이야기를 그렸을까.

그가 처음에 그린 앙팡맨은 그를 전투기로 오인한 사격에 의해 격추되어 앙팡맨이 죽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전쟁으로 한줌의 재와 폐허가 된 고향에서 그는 어떤 생각으로 만화를 그린 걸까.

어딘가로 날아가는 앙팡맨. 석양으로 향하는 앙팡맨. 동물들과 손을 잡는 앙팡맨.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팝아트가 있을까.


돌아오는 길엔 비를 맞으며 시골길을 가던 아이를 생각했다. 가까이 갈수도 더 이상 멀리 떨어질 수도 없는 거리를 가던 아이.

우산도 없이 길을 걷다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숲이 시작하는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麓郷(로쿠고)의 로쿠란, 산 아래의 언저리를 의미한다.

그곳에는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살며, 산으로 간 사람들은 그곳을 고향처럼 여겨 때때로 돌아오기도 한다.


돌아가는 길에 글래스 포레스트에 들려서 유리로 된 토끼인형과 몇가지를 사야지. 선물을 해야겠다. 기뻐해줄지 잘 모르겠다.

"무엇을 위해 태어나 뭘 하며 살아있는가를 대답할 수 없다니, 그런거 싫다"

앙팡맨 샵에 새겨져 있는 야나세 타카시의 말- 이것은 앙팡맨 행진곡의 가사이기도 하다-이 잊혀지지 않는다.


16년 6월9일 후라노시에서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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