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때 진 모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행색이 단정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 인물이 될 거라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이상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질 못하고 서른이 되도록 진사에 머물러 있었다.

본인도 세간의 평가와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바,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으나 잘 풀리지 않아 살림은 기울고 단정했던 외모도 초라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밝은 표정으로 장터에 나타나 비싼 술과 고기, 그리고 비단을 사기에 그의 친구들이 간 밤에 무슨 좋은 기별이라도 있었는가 하고 물으니 진 모는 아니 글쎄 어젯밤 집 근처에서 귀인을 만났어. 라고 말하였다.

이마가 곧다랗고 눈이 커다란 것이 분명 훌륭한 이였는데 나보고 지금은 시골의 촌부지만 장차 높은 자리에 올라 가문을 빛낼 것이라고 하고 가시더군. 곧 수도에서 좋은 소식이 올테니 걱정마시오. 하며 아무래도 내가 벼슬길에 오를 건가 보이.

친구들은 책상을 치고 웃으며 자네 놀림 받은 것은 아닌가. 그것은 꿈이 아닌가 하고 말했지만 만면의 희색이 가득했던 진 모는 아랑곳 하지 않고 집에 달려가 수도에서 손님이 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비단으로 새 옷을 짓고 좋은 술을 따라두고. 그러나 그 날 진 모의 집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그를 꿈에서 장원에 급제한 사람이다 장원공이다 라며 놀려대기 시작했고 진모, 아니 장원공은 낙심한 듯 보였지만 귀인을 만난 것은 사실이었는지 아침 저녁으로 집안을 쓸고 책을 읽고 용모를 단정히 하며 손님을 준비했다.

그러기를, 3년. 장원공에게 손님은 오지 않았다.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좋은 술을 준비할 수 없던 장원공은 장터의 놀림꺼리가 되었고 그는 대신 종이꽃과 깃발 같은 잡동사니를 사서 집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장원공, 장원공. 아이들은 종이 꽃을 가득 사 집으로 가는 그를 보며 놀려대기 여념이 없었고 그는 점점 야위여갔지만 어째서인지 단정한 얼굴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기를, 또다시 3년.

어느날 동문수학하였던 그의 오랜 친구가 장원공을 방문하였다. 집은 황폐하고 문은 부숴져 있는데 온갖 화려한 잡동사니가 장원공의 집에 가득하였다.
친구는, 놀랍도록 단정하고 평온한 얼굴의 장원공에게 소식을 들었다. 격조해서 미안하다. 라고 말문을 튼 후. 이제 그만 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을 하였다.

자네는 재주가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인데 어째서 이렇게 세월을 보내는가. 집안을 잡동사니로 가득 채우고 장터의 웃음소리가 되다니.

친구는 다정하나 엄하게 장원공을 꾸짖었다. 장원공은 오랜 친구의 질책에 몹시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가 돌아간 후, 장원공이 세상을 떠나는데에는 달포가 걸리지 않았다. 집을 차마 치우지 못해 아직 종이꽃이 가득 남아있는 장원공의 집엔 그리 많은 사람이 모이진 않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친구는 누구보다 슬퍼했다.

그리고 2달 후, 수도에서 사자가 와서 진 모를 찾았다. 6년전 암행 중에 이 고을에서 그를 보았던 태자가 그를 좋게 보아 새로운 관청을 세우게 된 올 중추절에 그를 등용하겠노라. 하고 물론 사자가 만난 것은 그의 쓸쓸한 무덤 뿐이었고 사자는 그의 집에 사람이 없었다는 증거로 그의 집을 가득 채웠던 종이꽃 중 하나를 들어 수도로, 태자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장원공 진모의 종이 꽃을 떠올린다. 오지 않는 소식을 기다리며 잡동사니로 자기 자신을 가득채우고 또 텅비어버렸던 사람의 마음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길 바라며. 다만 고개를 숙이고 입을 틀어막고 아무 말도 새어나가지 않기를 바라한다.

17년11월1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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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위성 카시니는 토성과 그 위성을 탐사하기 위해 97년 발사되었다. 금성과 지구, 그리고 목성 사이를 떠돌다 2004년 토성궤도에 진입하여 13년간 그 탐색을 계속하다 17년 4월 토성의 고리 맨 안 쪽을 조사하는 그랜드 피날레 궤도에 진입. 동년 9월 15일 토성의 대기에 돌입하여 별의 일부가 되었다.

17년의 10월 4일인 오늘, 그저께는 K와 저녁을 먹었다. 어제는 소설 한 권을 들고 바를 돌아다녔다. 김렛을 시키고 카운터에 앉아 메모장을 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나오시마 여행기의 후편이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첫 번째는 이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글을 쓰는가...>

나는 술을 한 잔 더 시키고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늘은 혼자서 다른 가게에 가기로 한다. K는 어제 귀국했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며 이번 교토의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다.


- 술

나는 칵테일 중에는 김렛을 많이 마신다. 문학적인 이유입니까 라고 한다면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슴슴하지도 시지도 상쾌하지도 않은 그 묘한 경계선의 향이 좋다. 나도 술을 시작한 것은 소주였기 때문에 너무 단 술은 좋아하지 않는다.

김렛은 크게 보아 진 베이스로 구분되는데 그 유명한 마티니(베르무트를 반 섞는다)도 진토닉도 김렛도 금주법 시대의 느낌이 나는 톰 콜린스도 모두 진 베이스이다. 유럽에서 크래프트 진의 붐이 일어난 것은 09년 경,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는 술의 제법이 공인되어 명문화 된 것은 08년이 되서야였다고 한다.

모든 술은 세금의 역사이기 때문에 술의 제법은 거의 세법이 정한다. 하지만 곡물의 증류주, 즉 싸구려 재료로 대량으로도 만들수도 있어서 대충 대충 사탕수수로 만들면 럼이고 곡물로 만들면 진이지 하하하 하는 식으로 생산(알콜 도수는 40%정도로 조정한다)되고 판매되어 왔기 때문에, 다시 말해 국가에서 일일이 신경써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싸구려 술이었다. 

아직도 쥬니에브르 혹은 쥬네바는 네덜란드의 오리지널의 약용술 스타일을 뜻하지만 많이 퍼진 것은 영국 스타일의 드라이한 진. 크래프트 진 쪽은 여러가지 약초 예를 들어서 크랜베리 나 제라늄 같은 걸 쓰기도 하는 것 같다. 영국에서 진의 위치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그래 진로의 빨간 뚜껑 소주 정도 였던게 아닐까 싶다. 역시 술 또한 그 태어난 지역, 사랑 받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 후에도 오랫동안 칵테일의 베이스 정도로 오래 쓰이다 요즘에는 특정하게 정해진 형태가 없다는 점 때문에 로컬 크래프트 진이 많이 생겨나 진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난 모양이다.

우연히 들어간, 아니 거짓말이다 오후 3시부터 이미 오늘은 낮부터 술을 마셔야지 하고 마음 먹고 호핑할 술집을 찾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호텔에 반납하고 술집이 많은 시죠를 거쳐 폰토쵸, 모토마치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남아있을 때 구석 3층의 바에 올라가 유일한 손님으로 카운터에 앉았다.

추천이 있을까요. 라고 묻자 나온 술은 와사비 잎을 올린 진토닉이 나왔다. 

기본에 충실한 진토닉이지만 향은 압도적이다. 진하기 때문에 압도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와사비 뿌리보다 더 맑은 물에서나 수확이 가능한 잎와사비의 향은 맵지 않다. 맑다.

과연, 술도 결국 그 지역의 특산물이라는 걸까요. 굉장한 향이군요.

마스터는 아주 살짝 웃는다.

나는 연달아 술을 시킨다. 이미 바 호핑을 하겠다는 생각은 버린지 오래다. 이 다음은 김렛을, 그리고 그 다음은 앱생트를 베이스로 한 마스터의 추천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꼬냑을 베이스로 한 술을 시킨다. 향의 미묘한 부분을 캐치해서 그걸 얘기해주면 그럴 수록 마스터는 특이하고 재미있는 향을 가진 술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되지도 않는 외국어로 낄낄거리며 마스터의 술을 칭찬한다.

계산을 하고 일어서려는 참인데 마스터가 명함을 건낸다. 나도 명함을 공손히 받는다. 실은 저는 이 가게 이름을 읽는 방법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웃었다

아직 오후 6시가 막 된 참인데. 예정은 있으신가요.

꽃이라도 사러 갈까 싶어요.

네 꽃을 사러 갈 생각입니다.


- 미소

K와 스페인 요릿집의 카운터 자리에 앉아 칠레 와인을 마신다.

우리는 이미 엉망으로 취해있다. 모츠나베를 파는 작은 가게의 카운터에 앉아서 맥주를 각 두 잔씩 마시고 나베를 한 번 더 시켜서 두 잔을 더 마셨다. 오이무침이니 뭐니 하는 안주를 잔뜩 시켜서 먹고 마시기를 반복한다. 가게에서 나왔지만 비는 많이 그쳐있었다. 

아직 돌아가기엔 시간이 이르다. 아쉬워져서 칵테일을 마셨다. 외국인으로 가득한 가게에 들어갔지만 노래는 시끄럽고 칵테일은 이름만 봐도 싸구려 리큐르로 말았다. 잔당 860엔. 좋은 칵테일을 마시기엔 너무나 싸다. 옆 자리 러시아인들은 너무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K의 이마를 쳐다본다. K는 신기할 정도로 각도에 따라 얼굴이 달라져서 쳐다보는 재미가 있다. 되는 대로 싸구려 칵테일을 한 잔씩 들이켰지만 역시나 입만만 버릴 맛이었다.

어쩌지 하고 가게를 나왔지만 아직도 숙소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 축구를 틀어놓은 밝은 가게로 들어갔다. 역시나 여기도 외국인이 가득하다. 나도 외국인이지 나도 외국인이지. 하고 일본어로 칵테일을 두 개 시켰다. 여기 무한정 마실 수 있는 플랜이 있는데요, 라고 메뉴를 가리키니 선배 여기 칵테일 무한정으로 마시고 싶으세요? 라고 반문하길래 싸구려 칵테일을 두 잔씩 들이켰다. 역시나 싸구려는 싸구려였다. 입 맛을 계속 버렸다.

아까 비가 오니까 나베를 먹어요. 라고 말한 뒤 검색을 돌리기 시작했다. 교토는 항상 혼자 왔기 때문에 맛있는 가게가 어딘지 잘 모른다. 대충 아무 가게나 들어가 밥을 먹고 종일 걸어다니고 절을 보는게 내 교토 여행이기 때문이다.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서 모츠나베 가게 두 개를 찾아냈다. 맛있는 집인건 사실일텐데 전화를 돌려보니 예약이 가득차있다. 급해진 나는 검색어를 바꾸다 아까 찾은 가게의 분점을 찾아낸다. 여기다 싶어서 예약을 걸고는 백화점의 로비에 앉아서 K를 기다린다.

종일 걸어다녔고 저녁을 같이 먹을 줄 몰랐기 때문에 피곤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연기를 하는게 힘들었다. 시간이 남아서 백화점의 지하층에서 꼭대기 층까지를 왔다갔다 돌아다녔다. 그것이 무의미하게 체력을 낭비하는 일이란 것을 그 때는 몰랐다. 비는 생각보다 많이 내렸다.

정확히 시간에 맞춰서 도착한 K는 내가 비오는 날 무슨 고생이야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됩니다. 하고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가게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실은 예약을 해두고 딱 중간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그 중간 이후에 아주 좁은 골목길에서 현지인들과 몸을 좁게 구기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골목길 두 개를 지나고 모퉁이 세 번을 돌아 찾아봐야 작은 나무 간판을 볼 수 있다. 일행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여기에요, 라고 뒤를 쳐다보는데. 왜인지 K는 웃고 있었다. 

오늘 교토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오전 혼자 교토의 외곽 루리코인에 가서 그 유명한 창문을 찍었다. 예정에 없이 방문한 루리코인이지만 어차피 교토는 너무 많이 와서 어디를 가야할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가지 않은 곳이 남아있다는게 더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그 창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K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K의 이야기는 술에 취하든 취하지 않았든 아주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진다. 밤을 새도 한 순간도 끊기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재미있어하기 시작한다. 길게 이어지던 K의 이야기가 어느새 커다란 원을 그리기 시작하고 그가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K는 취했다. 나는 술이 깨기 시작했다. 와인을 마시면 머리가 아프고 나는 술이 아주 쉽게 꺤다. 괜찮아요 선배 얼굴이 엄청나게 빨간데. 그것은 제가 홍인종이기 때문입니다. 홍인종 인디언, 네이티브 아메리칸. K는 너무 오랜만에 듣는 단어라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안주를 시킨다. 안주는 올리브와 문어 타파스.

이야기는 원을 그린다. 다양하게 이상한 소리와 헛소리를 한다. 나도 K도 이제 못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이상한 소리를 주어섬기기 시작한다. 오늘 밤은 이게 마지막이다 우리는 이걸 마시고 K와 나는 언제 취했냐는 듯이 똑바로 걸어서 사거리에서 헤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K와 나는 같은 손등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많은 부분이 같고 아주 작은 부분이 다르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캐나다의 리조트와 일본의 여행과 오늘 걸어다닌 이야기와 서로의 날씨 경향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또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한다. 아무리 화제를 바꿔도 서로는 막힘없이 서로 딴 소리를 해댄다.

표정을 만드는게 귀찮다는 듯이 K는 되는대로 지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그제서야 그날 처음으로 웃는다.


- 꽃

교토의 꽃이라면 사라쌍수의 꽃이려나, 헤이케이 이야기는 그 첫머리 "기온정사"에서 이렇게 읊는다.


祇園精舎の鐘の声 기원정사(祈園精舍)의 종소리 諸行無常のひびきあり 제행무상의 울림 있으니

沙羅双樹の花の色 사라쌍수의 꽃의 빛깔 盛者必衰のことわりをあらはす 성한 자 필히 쇠한다는 이치를 드러낸다


사라쌍수란 석가모니의 열반시에 그 동서남북에 서 있었다는 사라수 나무를 뜻한다. 아열대에 가까운 인도의 나무가 교토에서 관리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힘든 관리가 필요한 모양이다. 실제로는 거의 노란 색 혹은 붉은 색을 띄나 교토에서 자라는 사라수 꽃의 빛깔은 희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아열대 기후에서 피어나는 꽃이라 초여름인 6월에 잠시 아름답고 풍성하게 피어나지만 쉽게 변색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필쇠의 이치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반대로 불교식 장례에서 쓰이는 종이 꽃의 모델은 사라수 꽃이다. 그렇다면 그 종이 꽃은 영원하다고 할 수 있을까.

교토는 일년 내내 꽃이 핀다. 아마 오래된 귀족 취미와 정원 문화에 의해서겠지만 겨울인 12월, 1월에도 남천이 만개하고 백량금이 피어난다. 봄은 말할 것도 없다 매화가 지자마자 복숭아 꽃이 피며 영산홍이, 사라쌍수가 여름이 시작하면 도라지 꽃. 가을이 시작되면 베고니아, 털머위, 사가키쿠가 피어난다. 그러나 일년 내내 피어나는 꽃은 당연히 없다. 사람들은 꽃이 피어나고 짐을 보며 생명의 유한함을 생각하고 생명이 이어짐을 떠올렸다.

꽃은 매년 같은 모습으로 피어나지만 사람은 서로 닮지 않는다. 하고 읊은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는 뜻일 것이다. 

곧 사라질지도 모를 꽃을 매년 매 계절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시간이 꽃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때문일 것이다.


- 밤

아직도 내 일부는 교토의 밤 거리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이미 한 달이 훨씬 지나서 계절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내 유령은 초가을의 옷을 입고 기온의 시조와 산조를 거쳐 카라스마루의 사거리를 돌아다닌다. 밤의 엘리펀트 팩토리와 이쿠보시를 들르고 다리 위에서 멍하니 달을 쳐다보고 밤을 생각한다.

내가 아는 밤은, 키가 크고 단정한 이마와 눈썹을 하고 있다. 흰 얼굴을 하고는 달처럼 웃는다.  곧은 손목과 손가락 나를 잡아채고 잰 걸음으로 달려가 나를 새벽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몇번이나 몇 번이나 밤은 내 잠을 빼앗았다.

밤이 나를 쫓아오길 기다린다. 아마 밤은 또다시 바람소리를 내며 내 앞에 나타나 나를 기다렸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밤을 위해 준비한 꽃을 건네며 당신은 어땠느냐고 물을 것이다. 당신도 나를 기다렸나요.


- 사거리

나는 기온시조 역 2번 출구 뒤의 벤치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다.

고로케 두 개를 샀고. 먹고 싶은 저녁을 골라뒀다. 너무 비싼 저녁이긴 한데 어차피 내가 살 거고 가격이 어떤지는 죽어도 얘기해주지 않을 생각이다. 오늘 저녁 하루 보고 다시 안 볼 사람에게 너무 과도한 것 같긴한데 내가 먹고 싶은 것이기도 했고 그럭저럭 아무거나 먹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밥을 먹고 혼자 커피를 마시러 갈 생각이다. 가지고 온 책을 더 읽고 일찍 자야지. 내일은 어디에 갈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이번 교토 여행은 너무 즉흥적으로 온 거라서 남은 일정에 뭘 하든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른다.

한참을 걸려서 교토로 오고 있는 사람이라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10월 1일 오후 7시 30분의 일이다.

......

이번 교토 여행기를 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오직 서툰 사람들만이 자기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를 문장으로 고백한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내가 보았던 순간들, 그 말들과 순식간에 번져나가던 미소. 진동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서.나는 추한 것 보다 사라져 가는 것들을 더 용서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표현 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의 순간이 괴롭다.

어쩌면 결국 아름다움이란, 스쳐지나가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천년을 이어진 이끼의 정원 위에 내리는 빗 소리이고 오후 나절 창 에서 내리 쬐어 테이블의 윤곽을 흐리게 만드는 햇살이다. 숨소리만큼 짧고 미소처럼 번져가는 것이며. 무참히도 아름다운 분홍빛 꽃잎. 어느날 밤 당신이 나에게 말할 그럴까 라고 말하는 짧은 대답이다. 

긴시간에 걸친 질문이 짧은 대답으로 끝나는 것처럼.  나는 아름다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이 스쳐지나가는 것이라면, 나는 언젠가 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하고 겁에 질려서는. 두 번을 세 번을 반복해서 말한다.우리(내)가 아름다움에게 할 수 있는 보답은 사랑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위성 카시니의 마지막 항해는 그녀의 고향 시간으로 2017년 9월 15일이었다. 자기가 태어난 별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인사는 토성과 고리 사이를 22번 통과하고 탐사하지 않은 곳을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위성은, 안테나를 지구 쪽으로 돌려놓기 애쓰며 - 토성의 일부가 되며, 토성의 하늘에서 그 여행을 끝냈다 (In the skies of Saturn, the journey ends, as Cassini becomes part of the planet it self) 카시니가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에는 희미하게 토성의 위성 안셀두스가 찍혀있다. 20년 간의 항해를 끝으로 그녀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그리워해온 별과 하나가 되었다.

우리시대의 누구도 카시니처럼 사랑하지는 못했다. 우리의 위안은 아직 우리에게 많은 순간들, 혹은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 뿐이다. 

설령 어떠한 끝이 약속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우리가 우리의 삶보다 더 긴 단위로 숫자를 셀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일종의 영원과 닿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낮과 밤이 간다고 해도 정말로 우리가 가진 사랑이 다 할 날이 있기야 할까?

아름다운 당신, 정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입 밖에 내지 않고 기도하는 것 뿐일까.


Olafur Arnalds의 "August"를 듣는다. 17년 11월의 글이다.

17년 9월 30일 이제껏 없었다던 10일간의 휴가 중 5일을 보내기 위해, 교토로 갔다. 이번에도 여행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연휴 기간 동안 내가 밥을 해먹고 싶지 않았고, 이런 여행이라도 가야 연휴 동안 아무 것도 안 했다고 징징 안 대시겠죠- 라고 후배가 이야기를 했으며 때마침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비행기가 있는 곳이 간사이 뿐이었다. 계획 이라고는 아이폰을 사는 것과 일본에서 놀고 있는 후배와 저녁을 먹는 것 뿐이었다.

4박 5일 간의 교토 여행 동안 나는 아이폰을 사고 친구와 두 끼의 저녁을 먹었고 비가 오는 루리코인과 오하라를 들렀으며 사이호지에 갔다 사전 예약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일 해지는 가모가와의 강변에 앉아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칵테일 바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호텔에 가기 전 커피 하우스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여기저기 호텔이나 카페에서 밥을 먹었고 교토국립미술관과 산쥬산겐도를 들렀다. 나는 여행 내내 하고 싶은 말을 찾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직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고 나는 여행의 기록을 정리한다. 

이번 여행기는 <낮>과 <밤> 두 개로 정리한다. 두 가지의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야기를 거의 완성하고 보니 어쩌면 여행의 기록을 정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핑계이고 나는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진 건지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가 우리에게 혹은 내가 당신에게 할수 있는 말은 제한되어 있고 나는 힘들게 힘들게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한 마디만을 여기에 쓴다.

이번 여행에도 음악을 많이 듣진 않았다. 교토는 여러분의 생각보다 조용하다. 가게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는 편이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여행 중 월요일에는 종일 비가 내렸다. 이끼의 정원 위에 비가 내렸다. 당신은 어떤 소리가 날지 상상 할 수 있을까? 


가장 많이 들은 것은 Sonder의 Too fast
https://youtu.be/zZmPZDySFMI

그리고 Kamasi Washington 의 harmony of difference 앨범이다.
https://youtu.be/rtW1S5EbHgU


괜찮으면 이 글을 듣는 동안 이 곡들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 커피

커피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건 안하려고 드는 속물 근성 때문에 믹스 커피를 거부하고 살아온 기나긴 삶. 그 후 시애틀의 카페 체인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믹스가 아닌 커피가 당연해진 것도 20년이 다 되어 가건만. 
좋아하는 커피라면 몇 개 정도는 항상 댈 수 있지만, 커피라면 글쎄요 싶다. 콩의 차이와 배전의 차이를 아직도 모르겠다. 주는대로 마십니다. 
교토의 커피를 이야기할 때면 보통 8,90년대의 소위 서드 웨이브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콩을 쓰더라도 균일한 향과 맛을 내는 추출방식이 대세였던 시대에서 산지와 추출방법을 다양하게 하려고 했던 시도 말이다. 지금에야 당연하게 생각되던 콩 산지에 대한 애호가 대중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공급망을 통일함으로서 균일한 커피 맛을 만들려고 했던 대규모 커피 체인점이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지점과 일치한다. 거꾸로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산지"를 중요시하는 점이 교토인의 마음에 든걸까? 아니면 예술의 영역에 가버려서 귀찮게 변해버린 차노유(다도)에 질린 걸까. 가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만 교토의 번화가에는 골목 골목 마다 커피 하우스가 있다. 물론 교토의 여러 커피 전문점들은 길어야 겨우 100년 (그렇다, 소바 집에 500년을 넘게 하고 당고 집이 400년을 이어가는 동네에서 100년은 고작인 것이다) 정도의 역사를 가졌지만 실은 교토는 일본 내에서도 인구 당 커피 소비 량이 최고인 도시. 일찍 부터 아침을 먹으러 커피 하우스에 가보면 동네 사람일게 분명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 지역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내는 스타벅스의 컨셉 스토어도 교토에는 두 점포나 있으며, 니넨자카의 다다미 방 형식의 스타벅스는 한국에서도 기사화가 될 정도로 이슈가 되었다. 해당 사실로만 보면 그냥 스타벅스가 노력하는구나 정도겠겠지만 교토 인들의 커피 사랑을 생각하면 그래 이 동네는 그럴만 하다 하는 생각이 든다.
교토의 커피는 조금 특이하다. 배전은 지독하리만큼 진하게 하지만 추출은 맑다. 마시는 순간 차를 마시고 있는건가 하는 착각이 든다. 내가 잘못 주문한 건가 하고 커피를 내려놓고는 맛을 느끼려고 눈을 감아본다. 기름지지 않다. 향은 훅하고 들어오는 듯 하지만 결코 진하지 않다. 그래 나는 착각하지 않았어 내가 마시는 건 차야 커피가 아니라고. 나는 안심하며 잔을 다시 들고 조금 더 마셔본다. 아 하지만 커피이다. 카페인이 올라오지도 않고 입안에는 쓴맛이 아주 얇게 남다가 날아가버린다. 고소함은 없다.
교토의 오리지널이라고 불릴만한 커피라면 역시 이노다 커피인데 커피에 밀크와 설탕을 넣어주는, 일본에서라면 특이한 커피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응당 진해야할 이노다 커피 조차도 맛이 느슨하다. 이걸 싫어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에 극단적으로 가까우면서 결코 차의 맛은 아니며 성의가 없는 맛 또한 아니라니.
몇개의 커피 하우스에 들러서 커피를 마셨다. 의자는 딱딱하고 서비스는 과한 곳 하나 없이 딱 맞아 떨어진다. 팔짱을 끼고 괜찮은 문장이 떠오르기를 기다힌다. 교토에 와서 콜드브루 같은 걸 시킬리가 없다. 커피가 나오는데는 항상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커피가 나와도 금방 마시진 않는다 괜찮은 문장이 떠오르면 그걸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 밖으로 버리며>

매일 아침 일찍 교토의 커피를 마신다. 좋아하건 싫어하건 교토를 시작하게 하는 것은 커피이다.


- 강변
쇼와 39년 7월 10일 일본법률 167호 하천법에 의거하여 하천은 원류에서 하구 혹은 합류 지점까지 동일한 명칭으로 통일되게 되었다. 가모가와는 비와호에서 부터 흘러나오는 “요도가와”의 지류로 요도가와는 지역에 따라 세타가와, 우지가와 등으로 이름을 바꿔 바다로 흘러가게 된다. 고도 교토를 관통하며 흐르는 강 답게 많은 문학 작품에 등장하며 때로는 그냥 “동하(동쪽의 하천)”이라고 불린 적도 있는 듯 하다.
한국인이라면 아무래도 동서를 관통하는 하천에 익숙하기 때문에 어째서 이런 곳에? 하며 방향을 착각하기 딱 좋은 북남 방향의 하천이다. 거대한 분지인 교토를 오사카와 잇는 수운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어 왔으며 의외로 풍수지리적으로는 그닥 좋지 않은 위치라고 해서 후세에 말이 있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으나,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이미 교토는 천년 동안의 수도였고 그 동안 험한 일도 좋은 일도 수도 없이 많았는데. 
가모가와에 오게 되면 놀랄만한 것은 수서생물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대도시를 관통하는 강 치고는 깨끗하게 관리 되어 있어서 특히 새들이 많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점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가모가와 강변을 산책하거나 운동을 하고 있고 밤이 되면 산조와 시조 사이의 번화가를 중심으로 “가와도코”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가와도코는 나무로 된 바닥을 강변에 설치하여 음식점이나 술집을 강변에서 영업할 수 있게 한 장소인데, 밤이 되면 가와도코에서 설치한 노란 색 등롱들이 아름답게 빛난다. 결코 밤의 어둠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명을 설치해두었다. 
이런 가와도코를 제외하고도 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거나 밤의 강을 감상하는데 일본인들이 그들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를 자조적으로 “가모가와 등간격의 법칙”이라고 일컬으며 이런 무리들 사이는 자동적으로 등간격으로 배치된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데 과연, 딱히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 없이 다들 적당한 간격을 두고 강을 바라보고 있다.


- 숨

아마노산 콘고지의 목조 대일여래상은 항삼세명왕, 부동명왕과 같이 한 조로 취급되고 있지만 <국보>를 주제로 한 이번 교토 국립박물관의 전시에는 대일여래와 부동명왕만이 전시되었다. 
실상, 불상 미술은 간다라 미술에 의해서 기초적인 기술은 모두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성한 인간, 혹은 신으로서의 불상을 표현하는 방법 자체는 끊임없이 발전과 쇠퇴를 거듭해왔다. 신상이 상당한 과장, 데포르메를 가진 다는 것은 상식이다. 보통 거대한 인체의 형태를 하는 신상은 거대할 수록 그 모습을 한 눈에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작가는 신상의 머리를 상대적으로 크게 설계하고 참배자가 바닥에서 “우러러”볼 때에 자연스러운 위엄을 갖도록 한다.
태양의 화신이자 우주 제공의 조화를 상징하는 대일여래, 그리고 그 대일여래의 뜻을 받아 일체의 장애를 제거하는 그의 분노를 나타내는 이 부동명왕.
이 두 상도 동일한 강조와 불균형을 통한 조화를 통해서 만들어졌는데 기본적으로 실제 인체의 몇배나 되는 형태를 한 이 좌상들은 조형미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물론 우주가 혼돈 속에서 태장의 질서 속에 수태되고 완성되는 모습을 그리긴 하나, 이 조상의 기본 목적은 장엄함과 숭고함에의 표현이다.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설령 그것이 공포라도 좋다. 이걸 보는 자들이 이 앞에 엎드리고 신의 세계를 편린이나마 맛볼 수 있게 하기 위한 종교 철학의 구현이다.
부동명왕. 자리에 앉아 항마의 검과 금강삭을 지닌 채 자신의 앞에 선 참배자를 휘둥그레 쳐다보는 이 명왕은 정면이 아닌 아랫쪽에서 볼 때 솟아오른 어깨와 부푼 흉곽 때문에 자연스럽게 명왕의 동작 - 숨을 들이키는 호흡과 오른 쪽의 칼을 들고 휘두르려는 준비 자세-을 떠올리게 된다. 명왕의 정면에 있는 이상 그의 시야 밖을 벗어날 수 없다. 항마의 검은 당신을 향하며 금강삭이 겨누고 있는 상대는 당신이 된다. 신상이 숨을 다 들이키는 순간 동작은 시작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다. 아무리 정교하다고 하여도 목조로 만든 신상이 움직일리가 없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숨을 들이쉬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일여래. 원래는 가운데에 놓여있어야 할 이 금색의 조상은 부동명왕의 상과는 반대이다. 그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지혜의 수인인 지권인을 한 대일여래는 황금 빛으로 빛나며 눈을 반쯤 감았다. 그의 숨은 고요하며 들이키는 숨이 아니라 들이내쉬는 숨을 암시한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당신을 벗어난 모든 세계이며 그게 비추는 것은 당신을 포함한 모든 세계이다. 
내쉬는 대일여래와 들이쉬는 부동명왕. 세계는 불타의 한 호흡 위에 놓인다.


- 나무
서기 594년 건립된 오하라의 잣코인에는 일본의 유명한 “헤이케이이야기”에도 나오는 소나무가 있다. 그 구절은 대략 1186년의 봄, 고시라카와 법왕이 오하라에 행차하며 헤이케 일족의 명복을 빌고 있던 겐레이몬 도쿠코를 방문하는 장면이다. 
나카시마의 소나무에 기대어...애달프게 너울거리는 보랏빛 등나무 꽃이여, 라고 시인은 읊는다.
이 유명한 나카시마의 소나무는 2000년에 발생한 본당의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고 2004년 말라죽고 만다. 
오래된 이야깃 속에서 옛날과 지금을 이어주던 천 년의 세월을 보낸 소나무를, 지금의 우리는 흔적만을 볼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가 아니 어떤 사람들이 이 나무를 너무나 사랑하여 천년을 살게 했으나 그들의 사랑으로 조차 나무의 생명을 더 이어지게 하는 것은 어려웠구나. 



- 창
어두운 방안에 빛이 들어오고 손 때가 묻어 까맣게 되고 만 기둥들, 꺼끌꺼끌한 다다미. 사람들이 그 위를 걸어다니는 소리. 이끼 낀 정원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또 하나의 눈꺼풀을 감는다. 
눈꺼풀 뒤에 있는 방, 자리에 앉아 어딘가에 있는 창문을 연다. 볕이 충분히 들어오도록. 
나는 한참을 창 앞에 서서 소리를 듣는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언제인지 모를 녹색의 계절들이 스치면, 이윽고 충분하리만치 볕이 들어온다. 빛을 받은 사물의 윤곽선들은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한다. 색은 더 진해지고 형태는 더 분명해진다. 사물들은 따뜻해져가고, 그 직선과 곡선의 모든 형태를 더 날카롭게 빛내는 것도 잠시. 무너져내린다. 흐트러진다. 
먼 곳 하얀 모래의 별이 모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부드럽게 가라앉는 것 같다. 나는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색도 윤곽도 모두 그림자가 벌인 행위임을. 빛이 오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녹아없어지는 형태들. 밤이 오길 기다린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야 말로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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