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글을 7월 말에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주 단위로 예약을 걸어서 내가 제 때에 예약을 연장하지 않으면 글이 올라가도록 해두었다.

당신이 이 글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예약의 연장이 제 때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연장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글을 쓰는게 지겨워졌을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사는게 지겨워져서 그만 죽어버렸을 수도 있다.

예전의 작가들은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차마 불태우지 못하고 남겨둔 메모들이 오랜 후에 발견되어 책이 출간되고 그랬으나, 작가는 되지 못할 현대의 우리들은 그저 블로그를 지우지 못하여 그 흔적을 남긴다. 서비스가 상업성을 유지하는 한 우리의 문장은 서버에 남으리. 하여간 누군가 마지막 손질을 하지 못한 글이라니 으휴 완성도가 부족할 것 같다.

이 글 또한 완성도도 몹시 걱정된다.
나는 이 글을 더 손 볼 생각이 없는데다 지금 술을 몹시 많이 마셨고 그것도 운치있게 홀짝홀짝 먹는 것이 아니라 병을 들어서 꿀꺽꿀꺽 마셨다. 제대로 생각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왜 글을 쓰겠다고 키보드 앞에 앉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쓸지도 모르면서 그냥 한가지 아이디어 - 내가 예약을 갱신하지 않으면 블로그에 그대로 올라갈 글을 쓰자 - 를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유치한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어쩌면 이 글의 예약을 연장해야할 때 쯤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글의 어디를 고쳐야 할지도 생각날 지 모르지.

게다가 나중에 너희들에게 뭔가 나에 대한 이유가 필요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막연한 불안ぼんやりした不安”같은거. 농담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면 넘어가자.

그냥 내가 블로그를 업데이트 하는 걸 잊었을 때의 예비라고 봐달라. 아 이것도 농담이다. 내가 블로그를 그렇게 진지하게 할까? 진짜 진지하게 하려면 내 아이패드의 메모 앱과 스프링 노트들을 털었을 것이다. 내 서재 어디에 놓여있는지도 모를 것들.

아이고 술을 너무 마셔서 슬슬 숨이 막힌다. 빨갛게 올라온 취기가 딸꾹질을 일으킨다. 나는 보통 이렇게 까지 취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은 숨기고 타인에게만 솔직함을 강요하는 것이 나의 나쁜 버릇이긴 하다. 일단 뭐라도 솔직하게 말해보자. 내가 죽기 전 까진 말하지 않을만한 것으로.

나는 지금 서재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내 서재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던가? 쾌적하거나 아늑한 것과는 상관없이 숨이 막히는 공간이다. 나는 혼자 살고 있는 남자들이 대부분 그런것처럼 거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데 끊임없이 쌓이는 책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서재를 따로 두고 그곳에 컴퓨터를 두고 있다. 효율이나 깔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방에는 책장으로 가득차 있고 거기엔 또 책으로 가득차있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책도 아직 읽지 않았던 책도 대중없이 쌓여있다. 오래된 데스크탑들이 구석에 놓여져 있고 그나마 자주 쓰는 데스크탑 위주로 정리가 되어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냥 모든 것이 모든 것 위에 쌓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뭐 대대로 “나의 방”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서재 쪽이 진짜 내 방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어느 정도 철이 들자. 나는 쓸 수 있는 모든 돈을 써서 책을 샀는데. 책장을 사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책은 계속해서 위로 쌓여만 갔다. 나는 책으로 성을 쌓고 잡지로 해자를 만들어 어린 시절의 나를 보호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였을까.
어른이 된 지금의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여러가지 공포가 있었지만. 당시의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세계가 폐색되어 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끝이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갈 수 있는 곳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이의 공포는 어떤 때는 어른의 공포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솔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아니다 당신은 잘못 생각했다.
나는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다. 더더욱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끝을 직면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의 방을 찾아왔던 사람이 내 방에 대해서 감옥 같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는 그 편지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인생에 받았던 편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편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면 할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편지 정도로 중요하다. 그 편지는 멋진 글씨체로 나의 손자에게, 라고 써있다 내가 지구 어디에 있어도 나는 홍식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 편지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감옥과 같은 방의 주인에게, 라고 첫머리를 적었다. 당신은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는지 알 수 있는가? 자세한 편지의 내용은 여기서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걸로 나를 정의했다는 사실이다. 편지들은 대체로 누군가를 부르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한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엔 외면 했고 그 뒤엔 몇 번이나 읽었으면서도 결국 그 편지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네 말들이 다 맞다는 사실도, 너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너를 피하기로 했다는 것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답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수년이나 지난 지금. 비열한 변명을 해보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스피노자던가 세네카던가 희망과 공포는 비슷한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애정은 근거없는 희망과 내면의 욕망의 결과인 만큼 그 근원에서부터 공포를 담보한다. 나는 그의 얼굴를 똑바로 볼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짝사랑은 하지 않는거라고 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시간을 들여 답장을 쓰기는 하였다. 우리가 그냥 카페에 앉아서 잠시 농담이나 하는 친구였다면 좋았겠지 어쩌고 너는 나보다 한참 어리고 네 재능은 내 외로움을 구원하는데 쓰기는 너무 반짝거려 어쩌고. 그렇게 쓰고는 바로 찢어버렸다. 너무나 자기애로 가득찬, 그렇다고 솔직하지도 않은 한심한 답장이라서 보내지 않는게 맞았다.

얼마 전 친구는 나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대답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게 잔혹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단지 내가 벽에게서 자기에게로 잠시 눈을 돌려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감옥에 아직까지도 영원처럼 갇혀있는거고. (나는 아주 오랜 후에 그 사람에게 해야했어야 하는 대답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한다. 그건…또 다른 이야기고 속죄에 관한 이야기이다.)

때때로 나의 생명체로서의 수명에 대해서 생각한다. 회사원을 한지 십년이 넘었는데. 앞으로 십 년 더 회사원을 할 수 있을까 싶으면 잘 모르겠다.
이십 년 후는? 내가 보기에 이십 년 후엔 확실히 회사원은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서 정부 규탄 시위라도 하면 모르겠다.
아니지 지구 온난화로 물 속에 뽀글뽀글 잠겨 있을 가능성이 더 높겠다.

사람들은 어떤 나이가 되면, 그러니까 사회적인 위치가 안정되기 시작하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 같다.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혔다고 힙합전사처럼 투덜거릴 때야 모르겠지만. 십대 이십대때 생각하는 죽음은 사회적인 본인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필사적인 보정작업이라면
먼 훗날 벌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절망의 결과물에 가낍다. 네 여러분은 적응에 실패했습니다.

뭐라도 해보려고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해서 밥벌이를 하기 시작하고 또 그게 그럴 듯 해질 때가 되면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이 직업을 통해서 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보이는 시점이 오는데. 그게 사람을 좀 미치게 만든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놀라울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에서만큼은 굉장히 자신감에 차있고. 주변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니까. 네가 몰랐다면, 단지 그냥 내가 너와는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를 가볍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성장 한계점이 아직 보이지 않고 노력을 하면 할 수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일을 엄청나게 잘하게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이는 더 이상 열 여섯살이 아니어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생리작용 같은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는 일.

그것은 바로 폐색이다.

나는 어린 시절 항상 세상이 내 생각보다 좁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어른이 되면 그 기분이 나아질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시시각각 삶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고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뚜렷해지기 시작할 때 사람은 겁을 먹기 마련이다.

폐색이란 결국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이곳에 갇혀 있다는 감각이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뛰어난 역량과 노력으로 남들보다 더 높은 성과를 발휘한 사람일수록 그 고통은 더 크다. 내가 이걸 죽을 때 까지 해야한다고? 라는 마음과 내가 이걸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서로 싸운다. 내 인생에 다른 길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이제까지 쌓아올린게 아쉽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싸운다. 애초에 정답은 없다. 그냥 여러분은 폐색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머릿속에 갇히고 말았다. 판옵티콘의 완전한 반대니까 뭐라고 불러야 하지? 모노스옵티콘이라도 되나.

이런 폐색에 갇힌 사람들은. 여러가지 행동으로 자신의 폐색을 부정한다. 갑자기 자신의 주변 - 가족과 친구 - 에게 집착하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아이의 성장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20대 시절에 대한 향수인지 갑자기 사랑을 찾겠다고 불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에 더욱 매진하는 사람이야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더 얘기해볼까? 더 큰 가치에 매몰되기 위해서 종교에 빠져들거나 정치와 사상을 통해 본인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도 하고. 그냥 단순히 직업적인 측면에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재테크를 하고 놓쳐버린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운동을 하고.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요지는 그들 모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폐색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게 쾌락이든, 신앙이든, 관계이든 간에 하여튼. 그들이 진짜로 폐색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는…모르겠다. 나는 그들이 아니고 나는 저 방법 중 어떤 것도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나는 애초에 폐색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한가지 종류를 말해두는 걸 까먹었다. 그냥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죽음을 선택한 부류들은 확실히 자기 자신의 세상에서 탈출하는데는 성공하였다. 대단한 멍청이들이다.

직접적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나는 요즘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꼭 누군가에게 마음이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파형이 상승하고 또 하강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 죽음이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언젠가 주파수가 낮아지고 파형이 잦아들 때 점이 한개의 점으로 수렴하게 되는 바로 그 지점. 그 끝 점에 대해서 생각한다.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돌려도 결국 생각은 다시 돌아와 죽음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정말 질릴 정도로 지겨운 반복이다. 내가 정말로 죽지 않는 이상은 멈추지 않을 생각인 것처럼 느껴진다. 제기랄.

나는 한 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한 번에 보고 수많은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면 당신도 놀랄 것이다.
하지만 웃으며 농담을 하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달리기를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결국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구르는 돌과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 같이. 모든 하찮은 존재들의 기도같이.

나는 가끔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마다 나의 상상력이 빈약한 것에 진절머리를 낸다. 가끔 앞일에 대해서 뭐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면 문득 답을 말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저 사람들은 그냥 여러분보다 상상력이 빈약해서 가장 일어날 법한 일을 말하는거랍니다.

빈약한 상상력으로 노력해보자.
그러니까 내 삶은 아무 것도 없어.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사랑해야하는 사람도 없어. 근데 내가 왜 10년, 20년을 더 살아야하지? 하고 친구에게 말하자.

친구는 짜증을 내며 그래도 좀 만 더 살아봐 라고 말했다. 친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 더, 그게 나에게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때면 무언가를 내 인생에 삭제하는 것으로 삶을 유지해나갔다.

만약에 이 글이 내 블로그의 마지막 글이 된다면. 그건 내가 그냥 이 블로그를 버렸다는 뜻이다.
혹은 블로그가 아니라 글 쓰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거나.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겠지.
어느 쪽이든 당신과 나 둘 모두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당신을 정말로 소중히 여긴다는 고백이고 나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만약에 내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그것은 내 실수이다.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언젠가 아무 것도 없는 습지에 간 적이 있다. 흰색의 바람이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고 녹색의 풀들이 서로에게 부딪혀 엄청난 소리를 냈다. 마귀와 악령들이 공중에서 난폭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고 새들이 새된 소리로 날아다니며 그들을 비웃는 268제곱킬로미터의 녹색 땅에서 나는 정말로 몇 없는 두 발로 걷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공중에서 불어와 난폭하게 떨어져내려오는 그 무엇에 나의 일부는 불려 날아올라 굉음과 밝은 빛 아래에서 영원히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는 나는 나의 이름을 한 어떤 일부이다. 나의 일부는 영원히 바람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그런 내가 어떤 애정이나 행복을 갈구하는 것이 마땅한 일 일까? 그냥 웃기는 얘기이다.
나는 자격이 없는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영혼도 없다. 나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 폐색되어 있다.

나는 이미 몇번을 죽었다. 결국 여기에 있는 글들은 대체로 나의 헛된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아마도 실패했다. 하지만 바란다. 누군가는 실패하지 않기를. 당신을 봄을 만난 것처럼 사랑해주길.

처음에는 이 글을 7월에 썼다고 말했지만. 글의 예약 기간을 연장하며 글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7월에 쓴 글 위에 8월에 쓴 레이어가 올라와앉았고 지금은 9월이다. 처음 글을 썼을 때처럼 술을 마시고 있다. (외할아버지를 조문하러 갔을때 받았던 죽은 사람들을 위한 소주이다.)

지금은 더 이상 뭔가를 더해서 쓸 생각은 들지 않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샐린저의 어쩌고 라는 소설이다)중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글의 예약을 다시 연장해둔다.
가능하다면 당신이 이 글을 읽지 않기를, 정확히는 이 글이 오직 스스로를 위한 글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인용문은 이렇다.

“시모어는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이 결국 ‘거룩한 땅’의 어느 작은 곳에서 그 다음의 작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그는 절대 틀리지 않는 것일까? 이제 자러 가자. 빨리. 빨리 그리고 천천히.”

저 책의 주인공은 간절하게 자신의 형 시모어가 자살한 곳인 307호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주와 샐린저와 우리들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래 어떤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라틴어 경구였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빨리. 빨리 그리고 천천히 Festina Lente 혹은 급할 수록 돌아가라. 우습다. 결국 가장 멀리 돌아가는 것만이 307호에 당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니.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이 폐색에서 탈출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가? 누군가 내가 갇혀있는 머릿속에서 나를 끄집어내어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아가게끔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없는 다른 곳으로?

지루해졌다. 이제 그만 자러 가자.


24년 7월부터 여름 동안에 쓴 글이다.




바닥에 고무공을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색의 공이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넓은 바닥 위에 고무공을 던진다면, 그 공은 탄성에 의해 튀기기를 반복하다가. 점점 그 튀는 높이가 낮아지고. 어느 순간 바닥을 구르기 시작한다. 당신과 나는 그 굴러가는 공을 보면서 그 공이 어디까지 굴러가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날이 덥다. 금세 시원해질 것 처럼 매일매일 선선해지더니 그랬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덥다.
오늘은 뭐라도 해야했기에 연두색 티셔츠에 갈색 반바지를 입고 장을 보러 나갔다. 아주 느릿하게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바닥을 밟고 다시 뗄 때 마다 웃기는 소리가 난다. 밟지 좀 마, 안 그래도 참고 있으니까- 라는 의미의 행성의 투덜거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햇볕이 쎄다면 바닥은 금방 마를거야.
촤악, 촤악 소리를 내며 걷고 있으니까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요즘은 로드 러닝을 주로 한다. 아침엔 슬로우버피 3세트를 하고 어깨 스트레칭과 무릎 강화 운동 양쪽 3세트씩을 하고 출근한다. 러닝은 저녁 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이 하진 않는다. 나는 뛰는 걸 굉장히 좋아해서 쓸데없이 무리를 하고는 하는데. 20대때 다친 왼쪽 무릎과 발목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 이번에는 무리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가볍게 시속 7-8킬로미터로 3킬로미터 정도를 뛴다. 원래는 시속 10-11킬로미터 정도로 30분을 달리는게 내 운동 루틴이었지만. 체중은 늘고 근육은 줄어들은 지금 - 공평하게도 그렇게 되었다 - 그렇게 뛰면 반드시 다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안 그래도 지난주 주말 조금 신나길래 토일 연속으로 6킬로미터를 달렸더니 왼쪽 무릎이 묘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무릎이란 무리를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강화가 되지만 무리를 하면 바로 탈이 나는 신비로운 곳이라서 바로 고무밴드를 사서 레그 익스텐션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달리던 러닝도 하루 건너로 인터벌을 주었다.

로드러닝보다는 트레드밀에서 러닝하는게 무릎에는 더 안전한데. 나는 트레드밀이 너무 싫다. 트랙 러닝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진짜로 달려서 세상의 어느 곳에서 다른 어느 곳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러닝의 재미인 것 같다. 설령 그게 실제로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그냥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

나의 로드러닝은 크게 특이할 것은 없는데.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몸을 풀다가 현관문을 나가면 냅다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속 7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는거니까 절대로 빠르지 않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동네의 거리를 달리다가 아파트 단지의 커브가 있으면 틀고, 횡단보도가 때마침 파란불이 되면 길을 건넌다. 아니 왜? 이유는 없다. 정해진 코스도 없고 이정도 뛰면 된다- 정도로 정해둔게 있긴 하지만 어차피 동네는 동네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고 해봤자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앞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물론 길치 이슈는 있다. 나는 남해보타락산 관세음보살도 구해내지 못할 정도로 길치라서 신나게 뛰다 보면 여기가 어디지 하는 생각이 들게 길을 잃는데. 로드러닝을 할 때는 애플워치와 에어팟만 가지고 길을 나서기 때문에 - 그 외엔 수상할 정도로 짧은 반바지를 입은 중년 남성 정도죠 - 어차피 길도 찾을 수 없다. 그냥 내가 너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가길 간절히 기도하며 일단 신나게 달리는 것이다. 여러분 저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신이 납니다. 강도들 도둑들 소매치기 놈들아 너희가 나에게서 가져갈 것은 반바지 뿐이다. 아니 애플워치는 가져가시면 안됩니다 제 달리기 이력이 입력되어 있다구요.

어차피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뛰어나갈 체력은 없다. 삼십분 정도 연속으로 달리면 숨을 너무 심하게 쉬어 등이 아프기 시작하고. 심박수 평균 150을 넘어가는 페이스로 달리기 때문에 유산소 운동이 아니라 무산소 운동이 된지 오래이다. 오래 달리면 온 몸이 아프다. 고통스럽다. 땀이 범벅이 되고 코와 입 동시로 숨을 쉬다 보니 목이 갈라진 소리가 난다. 그런데도 왜 로드러닝이 즐겁냐고 하면. 나도 이유는 모른다. 상대가 없이 하는 섹스랑 비슷한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인류에게는 상대가 없는 성행위에 자위라는 적당한 이름을 붙여두긴 했는데. 무의미하고 가학적이고 육체를 소진한다는 점에서 로드러닝은 정말 그 뭐시기 그런 훌륭한 활동이다.

그렇다면 트레드밀에서 달리는 쪽이 훨씬 훌륭한 활동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텐데. 아니 트레드밀 러닝은 진짜로 아니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짓이고. 영국 공상과학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트레드밀은 시급 9,860원을 챙겨주는 노동으로서 나라에서 보상해줘야만 할만한 활동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트레드밀로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트에 갔다. 사람이 많기도 하지. 뭘 특별히 사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배추 두 포기를 사니까 의욕이 사라졌다. 나는 알배추를 좋아하는데. 그냥 잡곡밥이랑 쌈장 정도가 있으면 그걸로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농촌의 촌로 같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진짜로 그걸로 매일매일 먹는건 아니니까. 그냥 귀찮을 때 그렇게 먹는다는 뜻이다. 또 묘한 자책감이 들어서 깻잎도 사고 훈제연어와 중량이 그럭저럭 많지 않아 보이는 호주산 쇠고기도 샀다.

가족 단위로 모여있는 곳에 유일하게(정말 유일하게) 혼자 와 있으니 프랑스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내 쪽을 향해 환하게 웃길래 옆을 돌아보니 무릎 높이 정도의 아이 하나가 꺄르르 웃으면서 뛰어가는게 보였다. 흑백 영화겠지. 파란색 원피스와 검은색 원피스는 구분이 가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또 유니클로를 들렀다. 먹을 것이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며, 집 근처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유니클로 정도 밖에 없다. 먹을 것은 사두면 썩는다 얼마전에도 포도를 잔뜩 버렸다. 샤인머스캣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살려면 부피가 작아야 하는데 필기구는 좀처럼 쓰질 않는다. 책은 이미 너무 많이 샀다. 읽는 것보다 사는게 더 쉬운 물건이라니 이번 연휴 동안 도대체 몇 권을 읽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집 근처에 백화점이 있었던 시기에는 아무 이유없이 백화점에 갔더랬다. 그 덕분에 단칸방 자취 생활을 오래동안 벗어나질 못했다.

어머니는 내 나이에 쓸데없는 물건들을 사서 방에 쌓아두는 취미가 있으셨다. 대단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커트러리라든가 그런 것들. 굳이 살 필요가 없는 것들이 할인을 나쁘지 않게 한다 싶으면 일단 사서 가져다 놓으셨다. 이걸 왜 사는거에요 라고 하면 너나 너희 누나가 결혼할 때 주려고 라고 말했는데. 내심 이런 잡동사니를 나한테 떠넘기려고?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취를 하려고 집을 나갈 때도 어머니가 주는 잡동사니를 다 그대로 집에 두고 도망쳤다.

어머니가 마음이 공허하여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자식이었고 어머니 마음의 공허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나도 내가 먹지도 않을 음식들을 사고 읽지도 않을 책을 사며 입지도 않을 옷을 사고 있는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 어머니 차라리 그냥 비싼 물건들을 하나씩 사는게 어떠세요. 이런거 하나도 필요 없잖아요 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좀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어머니는 마음이 약하고 때때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잘 살아계신다. 그러나 왠지 과거형으로 쓰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두 자식들은 모두 어머니의 일종의 안티테제 같은 존재인데. 나는 내 안에서 어머니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 할 때 마다 징그럽다는 생각을 하지만 또 내심 안심하기도 한다. 그 안심이란 결국 내가 아버지의 클론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오는 안심이긴 하다.

유니클로에서 산 건 속옷과 후드티였다. 내 나름의 합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소모품이고 필요한 것이고 말야. 집에 가득 쌓여있는 언젠가는 버려야할 옷들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을 해보기로 한다. 집에 정리 해야할 옷들과 책들이 가득하다.
내 옷도 내 책도 아닌데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걸 정리하지 못하면 난 영원히 쓰레기더미에서 살아야 할텐데. 아직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용기라기 보다 의욕에 가까운 것이다.

고무공을 바닥에 쎄게 던지면 공은 크게 튀어오르지만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고, 튀어오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바닥을 구르게 된다.

어떤 생각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인생이 그러는 것처럼.
모든 운동은 크게 튀어오르는 것 같다가도 결국 바닥을 구르고, 또 어떤 한 지점에서 멈춘다.

당신과 나는 공이 언젠가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어떤 때는 그 공이 어디에서 언제 멈출지도 거의 정확하게 맞춘다. 그것은 공을 여러번 튀겨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그 공이 영원히 튀어 어딘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까지 올라가고 보이지 않을 천상에 다다를 것을 바라기 때문에 오히려 거꾸로 그 공이 어디서 멈출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나는 그냥 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삶에 대한 용기 그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그것은 결국 어떤 운동이다. 비가역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무의미에 대한 저항.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은 세상의 작은 어떤 곳에서 다른 어떤 작은 곳에 도달하는 것 뿐이다.

나는 내가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두렵다. 저 별로 멀지 않게 보이는 그곳.
내가 그 지점을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 또한 두렵다.

24년 9월의 글이다.



친구가 얼마 전에 <패스트 라이브즈>를 봤던 얘기를 하며. 가장 맘에 안 들었던 부분이라고 투덜거린건, 극 중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들의 전생 그러니까 패스트 라이브 때문이라고 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냥 취향에 안 맞는 영화를 굳이 본 것이 아니냐고 웃었지만 친구는 그게 몹시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설자楔子라고 부르는 동양 문학의 전통이다.

설자란 무엇인가. 옥스포드 랭귀지 사전에서는 설자를 이렇게 정의 한다.
1. 꺾쇠
2. 문예 작품에서, 어떤 사건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따로 설명하는 절(節)

그러니까 중국의 소설이나 혹은 경극류의 작품에는 앞 부분에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어떠한 주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는데. 현대적인 서사의 관점으로는 왜 이런게 있지? 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서술이나…사실 그 부분은 이야기의 주제와도 관련이 깊으며, 불교의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연결된 인과의 원인 부분에 해당하는데. 좀 더 간단히 말하자면 등장인물이나 중요 사건의 카르마 자체를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말 할 수록 뜬 구름 잡는 소리인거 같으니까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다.

<홍루몽>은 청나라 때 조설근이 지은 중국 문학사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소설 중의 하나로.
이걸 진짜로 처음부터 다 읽은 사람은 한국인은 나의 이모 밖에 보지 못했으나…설자 개념을 설명하기 좋은 책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사촌 남매들이기도 한 가보옥, 임대옥, 설보차 (한국인 감각으로는 어느 쪽이 남자고 여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텐데 가보옥이 남자이다)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와 공작위를 받은 개국공신 가씨 가문의 몰락과 재흥.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허무함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설자가 되는 부분은 주인공 가보옥과 임대옥의 전생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가보옥은 여와가 하늘을 복구하기 위해 모았던 돌이 오랜시간 동안 자아를 갖게 되어 선술로 인해 인간으로 전생한 것이고. 임대옥은 (가보옥이 되는) 전설의 돌이 인간이 되기 전에 우연한 기회로 물을 주어 살렸던 풀이 은혜를 갚기 위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설보차에겐 이런 대단쓰한 전생의 내용이 없는가? 없다…덕분에 세상은 가보옥-임대옥 커플링을 정설로 여긴다.)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이런 설자는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 홍루몽의 본래 이름은 석두기石頭記로 이 소설은 딱히 배경이 되는 설화가 없이 조설근의 창작 - 실은 작가인 조설근의 자캐가 주인공인 가보옥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돌머리의 이야기라는 석두기라는 제목이 지어진 이유는 조설근이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이 소설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 이기 때문에 작가가 이 작품의 설자인 여와의 돌이 전생하는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할 수 있다.

다르게 설명해보겠다. 주인공 가보옥은 사촌들인 임대옥, 설보차 사이에서 시종 갈등하는데. 몸이 약했던 임대옥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가보옥의 가족들은 결혼상대가 임대옥이라고 가보옥을 속이고 설보차와 결혼을 시키는데. 임대옥은 상심한 나머지 가보옥의 결혼식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너무 과한 설정이라고 생각하는가? 애초에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가보옥이 여와의 돌이 전생한 존재로서 고귀한 출생이나 어리석음을 설명했으며. 임대옥이 돌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풀에서 전생한 존재로 아름답지만 덧없이 사라질 존재임을 설명했다. 이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전개는 그들의 배경-전생의 삶-을 통해서 설득력을 가지고 현실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설명된다.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 모든 현상은 상호 의존적이며 어떠한 것도 독립적인 현상은 없다. 이러한 연기를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현대 이전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우리 현대인에게 뜬금없어 보이는 설자의 존재가 거꾸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패스트라이브스의 이야기를 하자면. 결말에 이르러서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게 그들이 인생에서 계속 서로 집착하고 잊지 못하고 인생이 겹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전생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와는 관련없이 이 부분이 영화의 앞부분에 삽입되어 있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훌륭한 설자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배경이 앞에 나와있다 : 동아시아 문학 전통의 설자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원인이 마지막에 가서 등장한다 : 할리우드 문화 전통의 반전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설자에 대해서 또 그럴듯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어떤 남자가 유명한 호수를 지나치다가 아름다운 두 명의 여인을 본다. 총명하고 부유하기까지 한 두 여인 중 하나는 평범한 서생인 그 남자에게 관심을 가져 개수작을 부려온다. 남자는 금세 그녀에게 빠져들고 결혼까지 하고 말지만 어느날 흉측한 승려 하나가 나타나더니 이보게, 자네는 큰일났어. 자네가 결혼한 여자는 엄청난 요괴일세. 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쓰면 오오 남자는 죽는건가. 큰일나는건가. 전형적인 요괴이야기겠군. 하겠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에는 어떤 판본이든 관계없이 항상 맨 앞에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수련을 거듭해서 쌓은 뱀으로 호수가 너무 아름다워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여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전따윈 없다.
원래부터 독자도 여자들도 스님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남자만 몰랐다.

다름아닌 이 이야기는 항주 뇌봉탑 설화가 변형된 <백사전>이다. 이 이야기 또한 여러가지 판본이 있지만. 공통적인 주제는 사랑이다. 처음부터 둔갑한 뱀이란 정체가 나오고, 영원처럼 천년을 살던 이 뱀은 정말로 그 남자를 사랑하여 같이 살고 싶어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악당은 중간에 나와서 남편에게 그 정체를 아웃팅한 승려이다. 잠깐만 이렇게 쓰니까 되게 현대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데…하여튼. 백사전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니 굳이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설명하지 않겠다. 홍루몽에 비해 분량도 짧다.

이제 여러분도 이제 설자가 무엇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거이다.

설자를 바이두에서 검색하면. 쐐기가 나온다. 애초에 설자라는 말 자체가 쐐기나 꺾쇠를 의미한다. 나는 쐐기의 사진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부처는 연기를 우리에게 설파했지만. 우리는 인생에 펼쳐지는 고통과 기쁨의 원인을 알 수 없다.
어떠한 이유로 이 마음이 나에게 왔는지 그리고 떠나가지는지도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기계는 적절한 입력값을 넣었을때도 항상 같은 출력값을 내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는 충분히 현명하지 못하여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다른 어떠한 영향을 줄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때때로 내가 당신의 인생에 그저 설자로서 존재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로 적힌 이름. 따로 적힌 말. 아니 이름조차 되지 못하는 배경.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참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설자가 되고, 우리의 현재의 삶은 미래의 설자가 된다.
이 마음조차 또 어떤 설자가 되어 누군가의 서사에 끼어들지, 나는 알 수가 없다.

24년 9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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