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1월 21일부터 1월 29일까지 있었던 일본여행의 정산을 마쳤다.

누구에게 돈을 주거나 할 필요는 없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혼자서 정산을 하고 반성을 한다.아무런 반성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깔끔하고 단정한 것으로 변할까.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반성이 없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우리는 전혀 나아짐이 없이 어린이 만화동산에 나오는 동물들처럼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살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이번 여행은 여행기를 안 쓰게 될 혹은 부분 부분의 감상기만을 쓰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플레이 리스트로 여정을 정리해두려고 한다. 평소에는 플레이 리스트를 준비하고 여행에 갔지만 이번 여행은 좀 급작스럽게 갔기 때문에 현지에서 노래를 찾아서 하나하나 들었고 개중에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못들은 노래도 많다.

어떤 상황에서 어울리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바람이 부는 나오시마의 바닷가에서 혹은 고야산의 눈내리는 밤 오래된 절방에 앉아서- 음악을 듣는 것.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번 여행에서는 음악을 그닥 많이 듣지 않았다. 가끔 어떤 음악보다도 여행지에서 들었던 소음들에 대한 기억이 나를 위로할 때가 있다.

이번 여행의 가장 명확한 주제가라고 한다면 San Holo의 "Light"일 것이다. (웃기지도 않지만) 여행 중에 이 곡은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갔다온 후의 1주일 동안 내내 이 곡을 들었다. 나는 이번 여행으로 무엇을 바랐을까. 

San Holo - Light

https://www.youtube.com/watch?v=ULHeRdgeT54


#추가

글을 다 쓴 다음에 깨달았지만, 링크가 아닌 소스코드로 연결시킬 경우 저작권 위반이다. 곡을 듣고 싶으신 분은 알아서 링크를 복사하시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작업 다 해놓고 다 지웠다. 무의미한 노가다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1) 출국, 새벽

새벽 4시, 밤을 새다시피 하며 나와서 캐리어를 끌고 버스에 탔다. 종일 피곤했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미친 아저씨처럼 중얼거리고 방향을 자꾸 틀렸다. 공항에서는 전직하신 부장님을 만났는데 둘 다 피곤에 절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항의 커피샵에 멍하니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는 금방 서로 갈 곳으로 가버렸다. 도대체 이 여행을 왜 가는건지, 왜 거기에 가겠다는 건지 나로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닥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래의 4곡은 아이폰을 플라이트 모드로 바꾸기 전에 급하게 애플 뮤직에서 찾았던 곡이다. 그렇다, 저 중에서 모임별의 곡은 애플 뮤직에 없다. 그래서 히로시마 공항에 도착 후 유투브로 노래를 찾아 들었지만 왜 이게 그렇게 듣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Coldplay - Fix You

https://www.youtube.com/watch?v=k4V3Mo61fJM 


모임별 - 영원이 시간을 관통하는 그 순간 나를 보지 말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9HO08GwRMG0


P!nk - Just Give Me A Reason ft. Nate Ruess

https://www.youtube.com/watch?v=OpQFFLBMEPI


Lukas Graham - You're Not There

https://www.youtube.com/watch?v=IC-bSbXZBcU


(2) 히로시마, 후쿠야마, 오카야마(쿠라시키 미관지구)

히로시마는 전에도 "거대한 영등포"라는 감상을 피력한바 있는데, 미야지마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등포. 이번 여행에는 뜻하지 않게 비중없는 조연 정도의 위치에 머물렀는데 16년에 히로시마 풍 뎃판야끼 먹다가 체한 것은 절대 잊을 수 없다. 언젠가는 복수하러 가고 싶다.

이번 여행의 세 개의 목적지 중에 하나였던 쿠라시키. 후배는 이 곳에 대해서 "커다란 전주 한옥 마을이지요"라고 얘기 했는데 그 말에 100%동감하지만 동시에 이 곳이 어떤 우아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 없다. 관광객들로 들끓으면서도 도시의 벽들이, 운하의 물들이 단단함을 가지고 존재했다. 우습게도 구라시키 시 자체는 일반적인 일본의 중소도시로 역에 내리는 순간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평범하다. 단지 구라시키 미관지구와 오하라 미술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로 아름다운 곳이 되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게도 찬란하게 빛나다가 쇠락한 도시가 주는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로서의 매력은 후쿠야마시가 더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공통적으로 히로시마에서 카가와에 이르기 까지 모든 도시가 조용한 우아함을 가지고 있다. 후쿠야마에서 겪은 교통정체 조차 뭔가 의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는 Dusko Goykvich의 곡 중 "The Fish"를 주로 들었는데 유투브에서 찾을 수 없어서. 하기 전체 앨범의 링크로 갈음한다. 

(실은 듣다 보니까 멈출 수가 없어서 이 앨범을 글 쓰는 내내 읽고 있다)


Dusko Goykovich - Samba Do Mar

https://www.youtube.com/watch?v=NCk1TrwVgAA


지금 생각해보니, 구라시키의 운하를 보면서 이 노래를 들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을의 코스모스와 좋은 여행을

山口百恵 秋桜コスモス

https://www.youtube.com/watch?v=89HBcy08960&list=PLREXMY7xQwKlyeUlpwptZ9KJ3_24Dlqw4


山口百恵 いい日旅立ち

https://www.youtube.com/watch?v=Dgv3vNdRVfU


(3) 오카야마(고라쿠엔)

오카야마를 상징하는 것은 오카야마 성과 고라쿠엔이며 이 지역에 가장 특징적인 것은 데님 소재의 직물들이다. 오카야마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세련된 도시였다. 전에 고베가 상상했던 것보다 근엄했던 도시였듯이 말이다. 화려한 조명이나 활기차게 들리는 음악 같은건 여기엔 필요 없어요. 하고 "거리"자체가 말을 하는 느낌이다. 나는 어쩔수 없이 여기서도 재즈를 엄청 들었는데 실은 나에게 재즈는 우아하거나 세련된 이미지가 아니라, 후회와 불안정함을 드러내는 이미지이다. 예전을 되돌리려는 듯이 클래시한 옷을 입고 길을 나서도 전과 똑같이는 절대로 될 수 없다. 나에겐 그런 것이 재즈이다.

아래의 곡들은 고라쿠엔의 찻집에서 팥죽(젠자이)를 마시면서 나온 음악들을 사운드 하운드로 잡은 것들이다. 과연, 훌륭하군 하고 감탄했는데. 팥죽은 별로였다. 애기를 들어보니 원래 녹차원이라서 녹차가 맛있지 젠자이는 그저 그렇다는 듯. 아이고


João Gilberto - LP Amoroso

https://www.youtube.com/watch?v=b81ywX5cUmQ


Desafinado - Eliane Elias

https://www.youtube.com/watch?v=iGctJbPaCBI


(4) 카가와(나오시마)

여행의 목적 중 하나가 지추 미술관에 소장중인 모네의 수련 이었던만큼 좀 억지로 루트에 포함이 되었다는 느낌인데(구라시키의 오하라 미술관에서 연작 중 하나를 본 뒤에 역시 그냥 나오시마는 가지 말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겨울 바다의 섬치고는 따뜻했고 역시나 겨울바다의 섬답게 미친듯이 바람이 불었다. 트위터에다가도 적었지만 이번 여행 중 가상의 여자친구와 동행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12번 차였고 그 중에 8번을 나오시마에 관련해서 차였다. 좀 명랑하려고 락 음악을 들으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대 실패였다. 바람 소리를 듣는게 더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세토 내해의 겨울은 맑았고 밝았다.

나는 자전거를 몰고 산길을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가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해변에 내려왔다. 바람이 불었고 저기 어딘가에 해가 떠있었다.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간절하게 바다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Maroon 5 - Don't Wanna Know

https://www.youtube.com/watch?v=ANS9sSJA9Yc


The Chainsmokers - Closer (Lyric) ft. Halsey

https://www.youtube.com/watch?v=PT2_F-1esPk


내가 너무 멀리 가버리기 전에 내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지만. 하고 중얼 거렸다.


(5) 카가와(다카마츠), 도쿠시마(도쿠시마)

도쿠시마에서 새벽3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첫 페리를 타러 갔다. 그 때는 Olafur analds의 "Island Songs" 앨범을 계속해서 들었다. 뭐 여행 내내 이 앨범이 거의 주제가라도 되는 양 짧게 짧게 이동하면서도 계속 들었지만. 이 앨범이 가장 어울리는 순간이 바로 이 때였을 것이다. 새벽이라 승객은 나 말고 여섯 팀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같이 탄 젊은 어머니. 간이 식탁에서 도시락을 먹던 남자. 구석에 앉아 바로 잠을 자던 사람. 나는 음악을 들으며 무언가를 그리고 쓰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깨어나보니 해가 떠있었고 와카야마에 도착해 있었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Ólafur Arnalds - Particles ft. Nanna Bryndís Hilmarsdóttir

https://www.youtube.com/watch?v=wEj7xYyj9n4


Ólafur Arnalds - Doria

https://www.youtube.com/watch?v=wFp6xnJbs0w


(6) 와카야마(고야산)

내가 장담하건데, 와카야마의 고야산이야 말로 블루스가 어울리는 땅이다. 전세계에서도 손꼽히게 블루스 땅이다. 물론 아무도 블루스를 안 들을 것 같긴 하다. 이 시기(1월)의 고야산은 눈이 많이 내리고 춥기 때문에 일본인은 앵간 해서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고야산의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서양인이거나 동양인 관광객(나) 뿐이었다. 석양을 찍으러 다이몬에 갔을 때 일본인 관광객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을 정도다. 그 사람들 사진만 찍더니 차에 타고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블루스가 어울린다고 쓴거 치고 블루스를 안 들은 것은 눈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련다.


Anthony Hamilton - Do You Feel Me

https://www.youtube.com/watch?v=1in5wAVOyIk&list=PLb75VpbNymWVrgZkU47_70_HGGFSxAsN1&index=2

B.B. King - The Thrill Is Gone ft. Tracy Chapman

https://www.youtube.com/watch?v=xVxCtt3s_1M&list=PLWCJOLJ9si2lFFJ_3lh3d3j9LbgIuVIhK


오래된 사찰인 콘고잔마이지에서 템플 스테이를 했다. 고다츠와 이불을 깔아줬고 저녁은 유토후의 가이세키 요리였다. 절에서 한게 아닌듯 맛있었고 즐겁게 먹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다 방의 창을 여니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가. 소리가. 소리가. 소리가 내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Nujabes - luv (sic.) pt 3 [ft.shing02]

https://www.youtube.com/watch?v=UyoYf7rZVGI


오쿠노인으로 가는 산 길에서는 아무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곳에 가게 된다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산 그 길에는 오직 나 밖에 없었다. 입산 제한이 걸렸었거든. 착한 어린이는 따라하지 마세요. 저도 거기 스님께 자기 책임하에 가라는 허락을 받고 간겁니다.

긴 산 길에는 수많은 묘지가 있었다. 천녀에 걸쳐서 모인 묘지 들이다. 아주 오래된 것들도 새로운 것들도 있었다. 나는 묻는다, 어떠한 번뇌가 있든지 이 곳에서 풍상을 맞고 시간을 보내고 생각하고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다 보면 부처가 될 지도 몰라. 

길은 대답한다. 우리는 바람이 되고 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겨울이 되고 번개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따뜻함이 될 것이다. 우리는 흐름이 되고 우리는 빛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아아, 우리는 소리가 될 것이야. 하고 나는 말한다.


(7) 오사카(난바, 신사이바시)

오사카는 나에게 내내 이런 느낌이다. 오래 된 영상으로 젊은 여성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듣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과 같은 나이였다면 나는 분명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을텐데. 하고


Tina Charles - I Love To Love

https://www.youtube.com/watch?v=ug2P9o6di2k


실제로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짧은 기차에서는 놀런즈의 다음 노래를 들었다. 

찾아보니 놀런즈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80년대 초반 일본에서 개최된 국제 가요제에서 우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과연 80년대 일본이 추구 하던 어떤 아름다움이 놀런즈가 원조란 말이지.


The Nolans I'm In The Mood For Dancing

https://www.youtube.com/watch?v=4UZYXFgQnAo


(8) 교토

교토에 있던 3박 4일 동안 매일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첫번째 날엔 이나리 신사, 두번째 날엔 가모가와 델타에서, 세번째 날은 롯카쿠인의 벤치에 앉아서였다. 지루하지 않았다. 지루 할 수가 없었다.


PETIT BISCUIT - Sunset Lover

https://www.youtube.com/watch?v=wuCK-oiE3rM


haruka nakamura - Lamp feat.Nujabes

https://www.youtube.com/watch?v=cHQ-oVSYkeU


Luv(sic) Part6 - Uyama Hiroto Remix featuring Shing02

https://www.youtube.com/watch?v=FvcyZOVCORM&list=RDcHQ-oVSYkeU&index=7


이번 교토에서 방문한 곳은 차례대로 도호쿠지, 후시미 이나리, 도호쿠지(재 방문), 센뉴지, 기온, 교토 고쇼, 가모가와 델타, 도다이지였다.

3박 동안 교토에서 묵으며 많은 생각을 했고 혼자 매일 술을 마셨다. 돌아다니고 후회하고. 고민하고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했다.

내 삶엔 아무 것도 없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번 여행 동안 계속, 진실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했다. 나는 봄에 닿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토요일은 따뜻했다. 흡사 봄처럼. 삶처럼 아름다운 토요일이었다. 토다이지의 정원이 보이는 툇마루에 앉았다. 그림자가 드리우고 햇볕이 내 손등에 와서 닿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 처럼 깜짝 놀랐다. 토다이지의 각 사찰에는 토요일을 맞아 다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이가 든 부인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모여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시를 읊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나는 불룩하게 튀어나온 주머니처럼 그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만 누구도 나를 내쫓지 않았다.

나는 상냥한 목소리를 들었다. 봄이 나에게 말을 거는 소리였다. 타인이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서 상냥함을 느꼈다면 사랑을 느꼈다면 그것은 내 안에 상냥함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봄이 나를 찾아올 것이다. 봄이 그렇게 말했다. 당신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넌 내가 없어도 괜찮아. 하고 다시 없이 사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빛. 그것은 중력이었다. 아직도 나의 삶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봄이. 봄이 올 것이다. 


(9) 돌아오면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1월 11일에 발매 된 이 곡을 계속 들었다.

누구도 날 알지 못해 내 어머니 집의 피아노처럼은. 넌 내가 뭔갈 가지고 있다고 했지 어떤 사람들은 그걸 소울이라고 했어.

너도 알지만, 나는 떠났어 내 둥지에서 날아갔지. 그래도 나는 혼자가 아닐거야 내 가슴 속에서 최고가 뭔지 내가 돌아올 거란걸

그래 너도 알고 있지.


Sampha - (No One Knows Me) Like The Piano

https://www.youtube.com/watch?v=njHcZMLDdSc


지금 생각해보니 이 음악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Roosevelt - Moving On

https://www.youtube.com/watch?v=ruNW8MeR_tM


Marshmello - Alone

https://www.youtube.com/watch?v=YnwsMEabmSo


山下 達郎 - Tatsuro Yamashita - Ride on Time

https://www.youtube.com/watch?v=s19SzmIcFmU


위의 플레이리스트보다 더 많은 노래를 들었다. 간단히 더 쓰자면 찰리 푸스의 "We Don't Talk Anymore"나 라라랜드의 OST들, Seafret의 "Wildfire", 윤하의 "빗소리" 같은 노래는 틈틈히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언젠가는 이 노래 들을 듣지 않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들었다.

사실, 내 예전 여행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내 여행기의 제목들도 거의 노래 제목이기 때문에 플레이리스트로 여행을 정리한다는게 이번만의 일이란게 아닌 걸 알 것이다. 사진은 나의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을 참조하기 바란다.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야 말로 현실의 증거라고.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고 현실에 닿아 이 글을 쓰고 있다. 

17년 2월 5일의 글이다.


지추미술관地中美術館에 대해서 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지추 미술관은 나오시마直島라는 섬/그리고 지추 미술관이라는 건물/그리고 그 안에 전시되어 있는 많지 않은 수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어느 하나를 빼고는 말할 수 성립될 수 없다. 구성요소가 적기 때문인가? 아니다, 안 그래도 각개의 전시물 사이의 느슨한 연결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구성요소가 너무 많지 않은가 생각이 될 정도이다.

(쓸 수 있을지 몰라도) 결론 부분은 명확하다. 비효율과 자연에의 접합. 나오시마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관람자의 체험이다.

여기 지추 미술관을 방문하고 전시물들을 본 뒤 부분적인 감상을 기록해두도록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그게 아주 먼 미래의 나 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있는 글은 아마추어의 인상비평 정도의 글이기 때문에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하신 분은 다른 글을 읽으시는게 좋겠다.

(1)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의 작품 시간/지연/정지, Time/Timeless/No time, 2004

콘크리트의 복도를 내려와 어두운 문을 지나면, 지추 미술관의 가장 심층에 놓인 이 작품을 보게 된다.
직경 2.2미터의 검은 색 구체가 중심에 놓여있으며 27개의 금박을 입힌 목제 기둥이 방의, 아니 공간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작품은 계단 위에 놓여진 ...일종의 오브제의 형태이다. 가장 낮은 바닥에 입구가 있으며 (계단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는) 그 위의 중간 단에 검은 색 구체가 놓여있다. 우리는 (관찰자라는 행운으로) 가장 낮은 단에서 시작하여 구체와 같은 단에, 그리고 구체보다 한 단계 높은 단위에 까지 오를 수 있다. 동쪽에 입구가 있는 이 공간의 천장은 궁륭형태에 사각지대 천창이 있어 나오시마의 태양광을 그대로 받아 비춘다. 일출과 정오, 그리고 일몰에 맞추어서 이 공간의 빛은 시시각각 변하나 공간은 넓다. 밝고 선명하며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 처럼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다. 우리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 뿐이다.

우리가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의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먼저 관찰하게 되는 것은, 사방에 배치되어 있는 기둥의 각도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황금색으로 코팅되어 있는 이 기둥은 바로 공간에 입장하기 전에 큐레이터가 친절하게 노란색 기둥에는 손대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했던 그 기둥이다. 어째서 각 기둥이 똑같은 규격이 아닌지 관찰을 하게 되면 금세 이 기둥들이 천장에서 쏟아지는 태양광을 반사하기 위한 오브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천창을 통해서만 조명이 변화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도 이 작품의 양상은 변화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중앙에 놓여진 검은 구체이지만 검은 구체에 주목하지 않고 이 공간만을 바라보게 된다면 예를 들어서, 미술관에 들어와 처음으로 이 작품을 보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확인하게 된다면 예민하지 않은 관찰력을 가지고 있어도 "시간"의 흐름이 이 공간의 주제이자 작품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지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나오시마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데.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인 <오픈 스카이>는 사각형의 닫힌 공간에 하늘에 집중 할 수 있는 사각형의 천창을 뚫어놓아 관찰자가 시간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나오시마의 하늘을 통해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의 중간에 놓여진 검은 구체-화강암으로 만들어진 2.2미터의 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오브젝트는 나오시마의 해변 열린 공간에 전시되어 있는 동일 작가의 작품인 seen/Unseen/Kown/unknow에 주요 전시물이 두개의 거대한 구형과 비슷하게 보이는데. 전시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시선을 잡아 끄는 이 검은 오브제는 "방점"이자 "소실점"으로서 이 공간에 있는 동안 우리가 이 오브젝트를 무시하고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전시 공간에 있는 이상 이 구형의 주변을 돌고 인식하고, 심지어 우리가 이곳을 떠나도 전시 공간을 떠올리게 되면 가장 먼저 이 구체를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시간에 의해 변화하지 않고 위치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으며 공간 자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점, 그렇다면 나는 감히 말할수록 있다. 이 검은 구체는 이 공간의 신이다.
신에 대한 은유이며 이 공간을 지배하는 신 자체이다. 우리가 말을 걸수도 없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 굴러떨어지거나 소실되는 일 또한 없다.
우리, 공간의 밖에서 온 관찰자가 검은 구체에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검은 구체의 곡면에 의해서 계단이 기묘한 모습으로 일그러져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양광을 비추기 위해 만들어진 천창과 함께, 흡사 한 개의 눈을 지닌 얼굴이 웃으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곳처럼 보인다.
그것은 신의 얼굴이다. 방 한 가운데에 위치한 신. 그 신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바라본다.

(2)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수련Warter lilies

바닥이 이상하다. 흰색의 작은 (일반적인 주사위보다 작은) 정사각형으로 바닥을 깔았다. 물 빠짐과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것 일까. 습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까. 신발을 벗고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습기가 가득찬 공간에 있다는 착각이 든다. 그렇다 그것은 착각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 습기란 작품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는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한 공간에 있다는 착각은 작품 앞에 서있는 때 더 강해진다. 모네의 수련. 늪의 표면에서 터져나온 색과 생명.

전시 공간 안에 수련 다섯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이즈에 따라 배치 한 것인지 뒷면 양쪽에는 100*200의 작품이. 양 옆에는 200*200의 작품이. 그리고 정면에는...200*300의 두 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걸려있다. 압도적인 이미지. 물기가 하나도 있을리 없는 공간에 느껴지는 습기. 높은 천장으로 소리가 난반사되어 울린다. 들릴리가 없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수련이란 원래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었던가. 어쨰서 이렇게 거대하고 무질서하며 깊은 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늪으로 가득한 이 전시공간에서 수련이라는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혼돈이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그 혼돈에서 터져나온 생명이다.

사실 나에게 이 작품은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 지추 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이 수련을 보기 위해서 였다. 같은 여행에서 오하라 미술관의 수련을 보았지만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동양화를 전공하였는데 몇 안되는 서양화 그림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같은 그림이 식탁의 내 자리에서 보이는 곳에 걸려 있었는데 검은 밤과 숲을 그려넣은듯한 그림으로 항상 아무도 이 그림의 윗쪽과 아랫쪽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농담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수련을 몹시 닮았다.


잊지 못하는 기억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외할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난 날. 

커다란 키에 양복과 목도리, 지팡이를 한 외할아버지는 턱을 굳히고 주변을 쳐다보았다. 


두번째로 만난 날 누워있던 어머니는 아버지, 아이들을 봐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눈썹을 찌푸리셨던 걸로 기억한다. 

외할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쳐다보고 장갑을 벗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에게는 총명하고 씩씩하구나. 

나에게는... 너는 새끼여우 같구나. 라고 하셨다. 새끼여우. 

누나는 그날 외할아버지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서 네 기억이 잘못된거라고 말했다.




17년 1월 5일은 외조부의 3주기이다.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항상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탄다고 하셨지만 

오늘 외할아버지를 만난다면 그 누구보다 수다쟁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몇 번이나 외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려고 했지만 3주기가 다 된 지금까지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겠다. 


입 밖에 내지 않은 사실들이라도 그것이 잊혀지진 않듯이 감정이나 기억들이 스러지지 않고 신발 속의 모래처럼 남겨져 있듯이. 

나는 이 마음이 완전히 가시는 일 없이 그대로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원히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사람은 이미 가버렸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감정이 남기고 간 것들이 계속해서 움직여간다.


기묘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2015년 9월 나는 교토에 여행을 갔었다. 

그 당시 나온 아이폰을 사러 간거였고 교토에 갔던 것은 일종의 벽에 도배할 때 쓰는 덧붙임 종이 같은 거였는데. 

생각보다 예약한 아이폰을 빨리 구매 할 수 있어서 오사카에서 교토에 도착하자 오후 한 가운데 쯤이었다.


내가 왜 굳이 니죠 성을 가려고 했는지, 교토역에서 내리자 별로 고민도 없이 캐리어를 질질 끌며 니죠 성에 갔다.


처음 가는 곳이었는데도 니죠 성에 가자 익숙하게 여기가 어떤 곳인지가 떠올렸다. 사람이 많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헤이안쿄의 궁궐이었던 니죠 성은, 그 후로 계속된 증축과 개축을 겪었으며 니죠의 어전과 그 정원은 우아하다. 

병사들을 막기 위해 축조된 벽과 해자, 그리고 연못들. 총을 쏠 수 있는 각도를 생각하여 꺾여진 길들.

끊임없이 니죠 성에 대한 것들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성을 관람하는 것이 다 끝나고 성 앞의 벤치에 앉자.

나는 그제서야 나에게 이런 것들을 설명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외할아버지였다.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일본의 정경을 사랑하셨기에 분기에 한 번은 일본에 다녀오셨다.

자주 어떤 곳이 아름다운지를 설명하셨다. 즐거운 듯이 예전의 일들을 얘기해주셨다.

크게 앓으셔서 더 이상 해외를 가지 못하게 되시고 나서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일본 출장에 다녀올 때 마다 외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먹거리들을 사서 보내드렸다.


할아버지가 조금 나으시면 제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일본에 며칠 다녀올게요.

어머니나 이모가 같이 가면 오히려 불편해 하실테니까. 어떠세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마음에 안드는게 있을 때면 그러시던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먼 곳을 쳐다보셨다.


니죠 성에서 가라스의 길을 건너 로쿠도인으로 가는 사거리. 나는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이제야 왔네요. 이제야 이해했어요.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반팔의 소년이던 외할아버지가 앉아 책을 읽던 곳.



나는 외할아버지가 얘기했던 정경을 근거로 4개 정도 후보지를 구글 맵에서 찾아냈다.

물이 흐르다 느려지고, 굽이 치고. 다리가 멀리 보이며 기온의 한참 남쪽. 강변으로 내려가는 경삿길.

밤이 되면 금방 까맣게 되었지만, 경삿길 부근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해가 질 때 까지-하고 말씀하셨다.

오래 찾을 것도 없었다. 북쪽에서 부터 차례대로 후보지를 가보다 세번째 쯤 나는 여기가 외할아버지가 있던 곳이란 걸 알았다.

반팔의 소년이 밤이 올 때 까지 산시로를 읽다가 일어서던 곳. 이제는 찻길이 생겨서 조용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모가와의 강변에서 조용히, 서른도 넘었으면서 새끼 여우처럼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뭐라도 해라. 돈을 벌어. 버러지처럼 살지 말아라. TV를 트시더니- 봐라 저기 자막 나오는 거

보험쟁이든 외판원이든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것이 아니냐. 제 밥값을 못하면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어.

할애비는... 할애비는 늙었어. 외손자가 제 몫을 할 때 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을 자신이 없어.
너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돼. 뭐라도 해라 뭐라도 제발.

혹은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큰 손자를 자주 그리워하셨다.

서울대 병원에 큰 병환으로 입원하고 계실때 병실을 지키다 이모와 교대하는 나에게 들리란 듯이 외손자는 어쩔수 없군. 이라고 중얼거리셨다.

친손주들은 영화에 음악을 공부하는데 그건 뭐라도 제대로 하는거에요 이모? 네가 참아. 너한테 투정부리시는거야 알면서.

외할아버지가 첫번째 쓰러지셨던 날. 나는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로 차를 돌려서 댁으로 갔다. 외할아버지는 낭패해하셨다. 

일어설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어. 걷지 못하는 짐승은 죽는거다.

이모와 외삼촌과 어머니와 내가 외할아버지의 옆에 있었다.

할애비는...이제 다 틀린 것 같다.

괜찮을겁니다. 외할아버님. 이라고 말하자 외할아버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외할아버지 댁에 있을 때의 내 자리 - 외할아버지의 애장서들을 모아둔 책장 옆 -에 서서 나는 외할아버지을 보았다. 

그래요? 외손자니까요?

일주일 후 두번째 쓰러지셨고 ICU에 들어가셨다.

1월 4일은 토요일이었지만 나는 회사일이 있어서 하루 종일 다른 곳에 있었다.

팀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장례 지원을 하는 일이었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외할아버지 많이 아프셔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일원동에서 흑석동의 병원 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
그리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 

나는 강남역에서 멈춰섰다. 외할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가실 분이 아냐. 그렇다고 해도 기다려주실거야. 

한시간이 넘게 강남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은 아무 나쁜일도 일어나지 않을걸 믿는다는 듯

(외할아버지가 나를 버리고 먼저 갈 일이 없을 거라는 듯이)

ICU의 면회시간이 끝날때 쯤, 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 할아버지는요? 응 괜찮아 많이 나아지셨어 하고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내일 일요일이니까 내일 면회시간에 올게요. 응 그래 고마워.

어머니와 나는 병원 주차장에서 한참을 그냥 앉아있었다. 너무 늦게와서 죄송해요. 아니야, 회사일 하고 있었잖아.


1월 5일. 나는 버스를 타고 종로에 도착했다.

아이패드 케이스를 사고. 커피를 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딴 짓을 하고도 어쩔수 없이 외할아버지가 누워 계신 병원에 왔다. 

혜화동의 병원으로 정오 쯤에 옮겨지셨다. 나는 이모가 울면서 건 전화에 잠에서 깨었다.

외할아버지에게 나는 세 명의 친손자와 네 명의 외손자 중 하나였다.

당신이 가장 사랑한 친손자는 외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서울의 집을 물려받았고 

외할아버지의 책장들을 물려받고 싶었던 나는 친척들과 등을 돌리게 되었다. 내내 장례식장을 지키던 나는 이제 이걸로 됐어요. 

하고 한 마디를 하고 식장을 나가 집으로 갔다. 

나는 당신의 시신도 묫자리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려주실거죠 외할아버지. 제가 갈 때 까지요. 

제가 할아버지를 뵈러 갈 때 까지 그대로 있어주실거죠?


입으로 내지 않은 진실이라고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내가 왜 외조부 댁 바로 옆의 대학에 갔는지, 의미없이 특차로 그 과에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할 사람이 물어보지 않았다.

네가 대학에 들어갔으니 이제 한 달에 한 번 할애비와 점심을 먹자구나. 괜찮겠느냐.

네 외할아버님. 

하지만 제가 왜 이 학교에 갔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물어보시지 않으시네요. 당신은 몇년 후에 저에게 미안하다고 하십니다. 

뭐가 미안하세요. 하나도 안 미안해요. 할아버지 저한테 미안한거 하나도 없어요. 안 미안해 할아버지 그런 말 하지마.

 
입으로 내지 않은 감정이라고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이야 말로 내 어린시절을 지켜준 내 진짜 아버지이며 당신이야 말로 내 이상의 "신사"라고. 

결국 나의 마음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뒤로 가끔 외할아버지의 책장에 대한 꿈을 꾼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란 것이 시간이나 공간 같은 보통은 넘어서지 못하는 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기억이나 감정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이 찌꺼기가 아니라 어떤 씨앗이 혹은 복수의 평면에 작용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몹시도 후회하는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대해 몹시도 부정적이다. 가모가와의 강변은 여우를 묻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16년 12월 30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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