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의 기억이다. 모든 기억의 본질은 거짓말이지만. 

나는 거기에 진실이 한 줌 쯤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억들을 소중하게 간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2015년 봄, 나는 마포구 어디 쯤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다. 우리 둘은 자주 밤새 술을 마셨다. 문을 여는 술집을 찾아다녔고 아침이 올 때 쯤이면 카페에 앉아서 미역처럼 늘어져 있었다. 친구의 집은 걸어서도 갈수 있게 가까웠다. 친구는 집이 먼 나를 버리고 휙 가버리지 않았다. 미안해진 나는 마포구에서 분당까지 어떤 경로로 가면 제일 싸게 나오는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왜 우리 둘이 그렇게나 술을 마셔댔는지 모르겠다. 친구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의 이유는 간단했다 나에겐 강을 건너서 만나러 갈만큼 친한 친구가 많지 않았다.


"너 그래서 죽을 날 정해놓으니까 좋냐?"

"어어???"

"너 그거 거기에 써놓은거 너 죽을 날이잖아. 너같이 자기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애들 하는게 뻔하지 뭐"

"푸하하하 무슨 소리야 도대체"

"내 말이 틀려? 아냐 맞아 그것만 말해"

"어 맞아"

"얼마나 됐어?"

"음... 한 일년 좀 더 됐나. 조건을 걸어놓고 그게 안되면 죽기로 했어"

"조건이 뭔데?"

"이런 식으로 내년에도 살고 있으면 죽어야지, 하고 생각했어"


나의 플랜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서 빚이나 보험 같이 꾸준히 돈이 나가는 것들을 다 정리했고

주변 친구들에게 농담인듯, 농담이 아닌 듯 물건들을 나눠줬다. SNS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메모해서 책상에 올려뒀다.

언제쯤 회사를 관둬야 할지, 언제쯤 계약들을 해지해야할지 그런 것들도 일정을 정해놓고 차근차근 움직이고 있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구체적이고 집요하며 의지를 꺾지도 않는다. 한 번 정하면 망신창이가 될 때 까지 멈추질 않는다.

무엇보다 죽어야 할 이유가 아주 심플했다.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다. 나는 해야할 것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워?"

"나 어려운거 없어. 알잖아 나는 사는게 어렵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건 대체로 했고 못하는 것도 없어, 그냥 단지"


그냥 단지. 나에겐 이유가 없었다. 나의 실험은 실패했다.

나는 더 큰 것을 바라야 했지만, 작은 것을 바랐고. 내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들에 집중했다.

공부를 해야할 때 알바를 하고, 시험을 봐야할 때 책을 읽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단지 내 재능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걸 손에 넣었지만. 그게 다 였다. 그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사실"

'어, 나는 사실 가족을 갖고 싶었어'라고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단어 하나하나에 담겨진 내 마음이 너무 구질구질하고 구차해서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얌마, 이 누나가 너 안 죽게 해줄게"

"???무슨 소리야"

"봐봐 잘 봐봐. 너 같은 애들은 목표가 사라지면 아무 것도 못하니까. 죽기로 한 날을 잊어버리면 넌 못 죽어"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진짜라니까, 봐봐 자아 내가 하나 둘 셋, 하고 말하면 까먹는다 너"

"어??"

"하나, 둘, 셋. 자 까먹어라"

"어??"

"어??"


나는 그 뒤로 정말 내가 죽기로 한 날짜를 잊어버렸다. 

얼마 뒤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시계를 보더니 "자아, 지났다 짠"하고 말했을 때 나는 그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친구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 지금도 나는 그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홋카이도 여행은 친구와 계획한 것이었다. 친구는 내 계획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차라리 프랑스라던가 미국이라던가. 그게 낫지 않겠니?

하고 말했길래 홋카이도 여행은 플랜C정도로 홋카이도에 뭐가 있는지만 사전에 체크해두었다. 

하지만 여행을 같이 가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혼자 여행을 갔더랬다. 이것이 내 홋카이도 여행기의 가장 처음에 붙어있었어야 할 오프닝이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지 않을 뿐이다.


이제 여행기는 두 개가 더 남았다. 두 개 다 삿포로에서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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