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의 이름에는 어떤 M도 들어가 있지 않다. M을 사랑한 적도 없지만, 첫사랑에 대해서 떠올리면 M이 떠오른다.
M에 대해서 이제 까지 몇 번이나 글을 써보려고 시도해보았는데. 좀 처럼 쉽지 않다. M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M에 대해서 떠올리면 약하게 보이기 싫어하는 그 나이 여자애 특유의 말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너 여고 나왔지? 라고 물어보면 응, 이러거나 어, 라거나 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왜? 문제 있냐? 라고 대답한다. 네가 어떤 개소리를 하려는지 안다는 듯이 말이다. M은 강남에 있는 유명한 사립여고를 나왔다. 여자애들은 귀찮아 라고 말하길래 왜? 라고 물어보니 아니 쓸데없이 꺄꺄 거리고 기회만 있으면 손잡으려고 하고. 가끔 안아달라고 그러고. 라고 하길래 너 고등학교때 숏컷했지? 라고 하니까 어떻게 알았어 2학년때 까진 숏컷이었지 하고 씨익 웃었다.
 
M은 도대체 뭐랑 닮은걸까 하는 생각을 곰곰히 한 적이 있었다. M은 눈썹이 칠한 것 처럼 두껍다. 눈은 무쌍에 시원한 눈매인데 웃고 있으면 만화에 나오는 눈웃음 처럼 된다. 콧대는 곧고 입은 담배를 필 때가 아니면 꾹 다물고 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곧다. 찰랑거리게 긴 검은 머리를 대충 매만지며 턱을 까딱하며 나를 바라본다. 뭘 쳐다보는데? 라는 뜻이다. 너는 동물을 닮았어. 라고 말하니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무슨 동물? 이라고 물어본다. 그 때 나는 머릿 속으로는 미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암사자를 떠올렸지만 19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리를 하면 안된다는 분별 정도는 있어서.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빨이 많고 뾰족한 동물 닮았어 라고 대답한다. 19살인 M은 나에게는 특히 가차가 없어서 너는 해서는 안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라고 말하며 내 이마를 민다.
 
인터넷으로 사람을 만나면 안된다고들 많이 말하기 전에 M과 나는 인터넷으로 알게 되었다. 수능보기 1개월 전부터 자체 휴식을 한 덕에 여유로웠던 나와 수능 보는 날에 어쩔수 없이 시험은 보러 갔지만 시험 시간 내내 잠만 잔 M은 친구들이 온갖 입시 준비에 바쁜 무렵 인터넷을 해대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채팅과 게시물 기능.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그리기 기능이 있는 커뮤니티였다. 나는 M의 말투가 너무 거칠어서 또래의 남자아이라고 생각했고 M은 내 말투가 너무 점잖아서 또래의 여자아이라고 오해해 우린 금세 친구가 되었다.
 
내가 수능을 보기 1개월 전부터(그 시절엔 수시가 없었다. 나는 나이가 많다 까불지 마라.) 자체적으로 공부는 안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M은 본인과 비슷한 케이스 (나는 고3 내내 모의고사 전국 5% 이내를 유지했다.) 라고 생각했는지 왠지 이것저것 나에게 장래의 고민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지는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그림을 그리는 프로가 되고 싶다는 얘기였다. 도대체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 커뮤니티에 그림 좀 올려보실래요? 라고 하자. M은 처음에 엄청 쑥스러워하면서 지금 PC방에서 하는건데 마우스로는 잘 못 그려요 잠시만요. 하고 후다닥 뭔가를 올려서 보여주었다.
 
반전은 없이 엄청 이해하지 못할. 형태도 색도 엉망인 그림이 하나 올라왔다. 중학교때 부터 친구들 중에 한 명 씩 있지 않은가? 나는 만화가가 될거야 하고 연습장에 하루 종일 뭘 그리는데 뭘 그리는지는 모르겠고. 뭐 그런 친구들. 딱 그런 그림이 하나 올라왔기에 아 이 친구는(나는 직접 만나게 될 때 까지 M을 계속 동갑인 남자애로 생각했었다) 대학에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등학생의 나 치고는 굉장한 분별력을 발휘해서는. 그림을 몇 개 더 올려주세요. 지금은 진짜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대답했다. 마우스가 진짜 손에 안 익네요 하며 M은 정말 많이 쑥스러워했다.
 
직접 얼굴을 보게 되기 까지 얼마나 걸렸던가. 2개월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M도 한가하기 짝이 없었고 M은 경솔하게도 본인이 알바하고 있는 장소를 나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뒷 쪽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길래 갔더니 검은 생머리의 예쁜 여자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어서 나는 깜짝 놀라. 아 죄송합니다. 하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M은 이 예의없는 새끼야 하고 나를 쫓아와서 삥을 뜯는 깡패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나를 질질 끌고 갔다.
 
그냥 멀쩡하게 공부로 대학을 갔다는 것 부터 시작해서 내가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재수없는 새끼야. 기만자 새끼야 하고 M은 화를 냈지만. 사실 더 놀라운 것은 M쪽이었는데. 그림을 올린지 3일 정도가 되자 갑자기 아 이제 마우스가 손에 익네 하더니 말도 안되는 뎃생으로 그림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속도였는데 나와 30분쯤 채팅을 하다가 야 다 그렸다 누나 그림에 댓글 달아라 라고 해서 가보면 프로가 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러프를 올려뒀고. 정말로 손이 익지 않았을 뿐이었는지 그림을 올리면 올릴 수록 뎃생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일반 인문계를 나왔을 뿐인 내가 누군가의 진짜 재능을 목격 한다는게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짝이었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주변에서는 우리 둘을 한 쌍인 것처럼 다뤘지만. M은 그 나이대의 여자애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를 더 좋아했고 당시의 나는 놀라울 정도로 이성에게 담백했다. 남중에 남고를 나와서 이성이 접근하면 깜짝 깜짝 놀라고 과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웃겼을 수는 있었던 것 같다. 나보다 딱 2개월이 어린 M이 나와 대화할 때의 1인칭은 누나였다. 누나가 말야. 누나 배고프다. 누나 담배피러 간다 따라와라. 나는 그렇게 M의 말이면 고분고분하게 듣곤 했다. 20대 내내 M이 나에에 남긴 영향은 컸다.
 
예를 들어 몇 년이나 후에 데이트 상대의 학교를 물어보면 이상하게도 M이 다녔던 학교 출신이 엄청 많았는데. 어느날 결국 그 학교 출신의 사람과 사귀게 되어 그 학교를 진짜로 가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친구에게도) M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M이 워낙 학교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처음 가본 곳인데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쯤엔 이미 M과 연락 할 수 있는 채널이 다 끊겨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강남 어딘가 사무실 뒷편 흡연장에서 야 요즘 뭐하냐 하고 서로 배실배실 웃으면서 안부를 나누고 헤어진 것이 다였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M이 나에게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은 18살, 19살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얘기라고는 학교와 가족 그리고 친구 얘기가 다이기 때문이다. M은 항상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지만(이 누나가 너 말고 친구가 없겠냐?) M의 최초의 이성친구였던 나는 M의 그 때 까지 인생을 통채로 알게 되었다. 거꾸로 나는 M에게 내 그 때 까지의 인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딱히 이유는 없었다. 나는 사실 항상 M의 재능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M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더 중요했지 내 얘기를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내가 M을 쳐다보면 M은 항상 재수없어. 내가 그렇게 좋냐? 하고 쳐다보지 말라고 윽박질렀지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일은 없었다.
 
M에게 6살인가 7살이 많은 남자친구가 생기기 전. 서울 어딘가에 골목을 나와 나란히 걸어가던 M은 뜬금없이 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는 찐따 답게 어어 뭐야 라는 얼간이 같은 리액션을 했는데. M은 당황하지도 않고 누나 춥다. 라고 하며 내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역에 도착할 때 까지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이라서 정말 추운 날이긴 했고 M은 빰이 얼어서 빨갛게 되어 있었다. 나는 18세 하고도 1개월 쯤. M은 생일이 지나지 않아 17세 하고도 11개월쯤 되었다.
 
글을 쓰다가 M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한다면 M은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M이라면 아마 시큰둥하게 추워서 손 좀 잡은거 가지고 그렇게 기억씩이나 하고 있는거 보면 넌 달라진게 없다. 라고 할 것이다.
 
어느날 SNS에서 내가 처음 보는 계정이 나를 차단한 걸 발견했다. 나를 차단한 계정이 한 두개가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기엔 팔로워가 수천명이 넘어가 만명이 다 되어 가는 계정이다. 궁금증이 일어서 구글에서 검색해서 들어가보니 일러스트레이터의 계정이다. 온갖 언어로 계정주의 그림에 대해서 상찬하는 코멘트가 가득하다. 예전에 날 알던 사람인가 싶어서 미디어를 찾아보니 그림이 눈에 익다. 네 그림은 십년이 지나도. 이십년이 지나도 알아 볼 수 있다.
 
하, 이 새끼. 하고 생각한다. 하여간 나는 아직도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좋아한다.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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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 Feather, Fly like an arrow.  (0) 2024.08.18

만22살이 되고 2개월 쯤 후였다고 기억한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나는 좋아하던 누나한테 연락이 와서 누나가 살고 있는 동네로 갔다. 피씨방에 있던 그 누나는 어 왔니 잠깐만 하고 게임을 계속했고 나는 3시간 정도를 따로 떨어진 자리에서 게임을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게임이 끝나고 그 누나(누나라고 해도 겨우 만23살이었다)는 나를 동네의 콩나물국밥집으로 데려갔는데 거기서 눈도 잘 마주치지 않으며 누나가 했던 이야기는 두가지이다. 1. 예전에는 네가 편했지만 요즘에 네가 불편하다. 2.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동생으로서 좋아한다.
 
나는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한 입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누나가 하는 얘길 들었다. 그럼 누나랑 나랑 몇년 동안 있었던 일은 뭐였어요? 같은 질문은 하지도 못했다. 지금의 나라면 푸하하 하고 웃고는 아주 웃기고 있구나 하고 말했을텐데 그 때의 나는 22살이 가지고 있을 법한 질문과 대답 밖에 없었다. 누나가 내 친구의 친구(나와 같은 나이였다)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걸 안 건 그 뒤 몇 주가 지난 뒤였다. 누나로서는 그닥 내키지 않는 정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누나는 깨작거리고 있는 나에게 근데 너 어떻게 집에 갈거야 라고 물어보았다. 지하철은 끊긴지 오래였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목이 메어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아직 차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뒤돌아서 가면서도 누나가 나를 다시 불러주길 기다렸다. 차가 있을 리가 없지. 새벽 2시 쯤이었고 차가 없는 건 누나도 모를리가 없었을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22살이 가지고 있을 법한 생각 밖에 없었다. 택시를 타려다가 누나가 불렀다고 술자리도 중간에 취소하고 이렇게 휭하고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멍청하고 싫어서 집에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 걸어가면 몇 시간이나 걸릴테고 누나와 거리가 떨어졌다는 실감이 들테니 다시는 이렇게 쉽게 여기까지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5시간이 걸렸다. 지금 다시 지도를 켜서 5시간이나 걸릴건가? 하고 찾아보았는데 역시 22살이나 가질 법한 지혜밖에 없었던 나는 아는 길로 간답시고 학교를 거쳐서 노량진-영등포를 거쳐서 집에 갔기 때문에 5시간이나 걸린거였다. 새벽이 끝나고 있었고 nujabes 앨범을 8번쯤 들었지 않았나 싶다. 졸립고 이상하게 상쾌해서 오전 알바도 취소하고 내내 잤다. 그 뒤로 누나가 몇 번 나를 불렀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19살부터 22살까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였던 누나와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의 내가 평가하기로는 나의 그 비이성적인 믿음 - 걸어서 집에 가느라 몇시간이나 걸린다면 이제 앞으로 이렇게 부른다고 쉽게 가지 않을 거란 생각 -이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다. 비이성적인 믿음이야 말로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법이다.
 
공정하게 말하기 위해 그 누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사회화도 덜 되어 있던 야생의 남자애 -내 얘기임- 하나를 잡아다가 밥도 먹이고 칭찬도 하면서 열심히 교육해서 쓸만해졌다 싶었더니 갑자기 자길 좋아한다고 드니까 침팬지 연구를 하는 인류학자에게 어느날 부터 침팬지들이 구애를 하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 누나는 나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애로 키우고 싶었던게 아닐까. 테이블매너나 데이트 하는 방법. 여자가 생각할 법한 좋은 남자가 되는 법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불행히도 나는 친누나도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도 잔소리를 들었기에 교육효과는 두배였다. 어디를 가나 아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지 말랬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래 여자애들을 대했다.
 
나는 그래서 그 나이대에는 또래 여자애들한테 그럭저럭 인기가 좋았는데. 그야 70%이상 집 안과 집 밖에서 계속되었던 사회성 교육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누나는 본인이 그렇게 키워놓고 내가 또래들한테 인기가 있는 걸 티내지 않게 못마땅해했고 인정도 하지 않으려고 들었는데 누나의 가장 친한 후배가 나에게 집착해서 셋이서 만나는게 불가능해졌을 때에도 누나는 나에게 네가 뭐 잘못한거 아니야? 예의범절을 지켜야지 하고 내 탓을 할 정도였다.
 
누나는 한 번 그리고 뜬금없이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거 아니니?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그냥 게임을 하듯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할 뿐이고 나도 그런 대상인거잖아. 나는 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라고 말했다.

내가 그 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여기에 쓰지 않는다. 제법 대단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그걸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나는 내 대답을 퍽 마음에 들어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앞서서 결말을 먼저 이야기했다. 누나가 나와 데이트 하는 사이가 되는 일은 없었고 (웃기고 있네 그 전에 하던건 데이트가 아니고 뭐냐 진짜 22살, 23살 둘이서 염병 천병 아이구 정말) 사실 그 누나가 하는 말이 맞았다. 연애의 관점에서 나는 그 누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후에 갑자기 깨달은거지만 나를 연애의 상대로 좋아했던 것은 그 누나 쪽이었다.

그 누나도 그 때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야 무엇이 사랑인지 이해하는 법이다. 우리의 관계는 반대로였다. 그 누나가 나를 연애대상으로 생각하고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나는 항상 그랬다. 나는 그 뒤로 오랫동안 거울처럼 누군가가 바라는 것을 되돌려주는 그런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나의 오랜 병이 되었고. 이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누나의 이상적인 연애대상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 후에, 좀 비극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누나를 잃은 나는 좀 더 차갑고 건조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 누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단지, 그 전에는 그 누나가 그걸 바랐기 때문에 친절하고 햇살처럼 밝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와 동갑이었던 남자친구와의 연애는 몇개월 가지 못했다. (그 후에 나를 차고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1개월 길어봤자 3개월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구여친들 중 그 누구도 확인 및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가설로만 남아있다. 쳇)
 
위에서 얘기한 것 처럼 누나는 때때로 나를 찾았고 부르기도 했으며 나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따로 만나는 일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그 뒤로 연애를 쉬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여자친구가 있을 때 여자들이랑 연락하면 안된다고 가르친게 다름아닌 그 누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뒤로 딱 두 번 더 단 둘이서 만났다. 나는 좀 더 건조하고 냉정한 사람이 되어 누나의 이상적인 남자애와는 거리가 멀게 되었고. 누나는 여전히 날씬하고 예뻤다. 두 번 다 술을 마셨다. 

이 시험 합격하면 뽀뽀해준다면서 나 합격했어. 진짜로? 어려운거 아니었어? 어...나는 천재니까...정도로 실없는 이야기나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뽀뽀는 해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게 엄청 짜증나는 걸 보니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대체로 그 누나의 연애 얘기를 들어주고 공통의 지인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누나는 한 번도 내 여자친구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술을 마시던 나는 뜬금없이 누나 첫째는 딸이야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처녀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얘가 라고 말했지만 나는 누나가 결혼하려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누나 이게 누나랑 나랑 만나는 마지막 날이야 라고 말했다. - 우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야. 누나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쳐다봤다.
 
내가 21살때의 일이다. 어느 역인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우리의 관계에 지치고 실망했던 나는 이제 이 누나랑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어느 역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얼굴을 쳐다보지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이걸로 끝이라는 생각에 안심과 짜증이 뒤섞여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누나는 남자친구와 만나러 가기 위해 역에서 밖으로 나가야 했고 나는 그 때 ...하여간 어딘가로 가는 길이었다. 여기서 - 그 누나가 있는 곳에서 - 벗어나기만 하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누나는 개찰구를 찍고 가는 나를 뛰어서 쫓아오더니 나를 붙잡고는 울기 시작했다. 너 그러면 죽여버릴거야 너 진짜 죽여버릴거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누나는 겨우 22살이었으니까 그럴만했다.) 나는 내가 뭘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살짝 겁을 먹어서는 이 사람이 어떻게 안거지? 하는 생각만 했다.
 
친구의 말로는 나는 가끔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있다고 했다.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누나가 결혼하는 주에는 전화가 와서 받았다. 나 진짜 결혼하기 싫어, 니가 나 어디로 데리고 도망가면 안되니? 라고 말하며 울었다. 나는 통화를 듣고 있다가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 사람은 나의 19살때부터 22살때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의 20살때부터 23살때 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또한 내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우리는 그 뒤로 정말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공정하게 말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 만난 여자친구는 누나와 같은 나이에 키도 비슷한, 학교도 같았던 사람임을 밝힌다. 3개월을 못가고 헤어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차였다)
 
그리고 그 누나의 첫째는 딸이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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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9] Forest, Gone are the days.  (0) 2024.08.18

 
광고 사진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찌푸린듯 웃는 듯 저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다. 흰 옷을 입고 바싹 말라서는 머리 끝이 부드럽게 말려있다. 이 사람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떠오른다. 떠오른 사람은 친구일 때도 있고 후배 일 때도 있다. 광고를 멍하니 오래 쳐다본다. 요즘 나는 자주 이런다.
 
이제는 죽은 캐나다 문학 평론가 노스럽 프라이의 얘기를 잠시 해보자. 이제는 내용도 가물가물한 책 <비평의 해부>와 <구원의 신화>에서 그는 원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신화적 이야기의 요소는 그 이야기 안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형으로서 전유되고 또 유비되어 다른 상징에 사용되고, 그렇게 변형된 신화의 원형은 현대의 서사에서도 발견된다...정도의 이야기이다.

신화나 문학에 익숙한 몹쓸 인간들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를 뭣하러 저렇게 설명하고 있지? 하는 생각을 하겠지만. 좀 더 설명을 해보자.
 
현대의 탐정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인 싸움도 잘하고 고독한 탐정은 아무런 댓가 없이 약자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데 이런 영웅의 이미지는 캔터베리 이야기 등 중세의 낭만시 영역에서 왕과 기독교에 충성하고 약자를 위해 댓가 없이 싸우는 용감한 기사의 이미지에서 시작했으며. 이 용감한 기사의 이야기가 시작한 원형은 술자리에서의 약속을 위해서 메두사를 해치우기 위한 여행을 떠난 페르세우스이다.

이처럼 모든 이야기에는 원형이 존재한다. 우리가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원형의 변주일 뿐이다. 설명하고나니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누구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나는 자주 듣는다.

인상적인 경험이 있다. 외가 어른의 장례식장에서 그냥 정문에 서있을 뿐인데. 생전 만나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한명 씩 ㅇㅇㅇ님 장례식장이 몇 호실인가요? ㅇㅇㅇ회장님은 와 계시나요 하고 물어보기에 신기해서 어 혹시 제가 누군지 알고 여쭤보시는 건가요? 라고 물어보니까 우아한 숙녀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 쪽 집안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생기셨는걸요 라고 대답해주셨다.

물론 지금 하는 이야기는 얼굴이 닮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완전히 남남인 누군가가 있는데. 나를 보고 그 누군가를, 혹은 그 누군가를 보고 나를 떠올리는 일, 말하자면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누가 우리를 보고 있을 때 우리의 무엇을 보는지 이해할 수 없긴 하다만.
 
어느날의 일이다. 온수역 1호선 플랫폼의 상행선 중간 쯤 벤치가 놓여져 있는 곳에 서있는데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좀처럼 전화를 하는 후배가 아니어서 이동하는 중이었지만 일단 전화를 받았다.

별로 대단하지 않은 신상 얘기를 주고 받더니 후배는 갑자기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응. 되게 똑똑한 척을 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에요. 응. 그러고는 후배는 머뭇거리더니 말한다 선배를 되게 많이 닮았어요.
 
내가 평범하게 생겨서 나랑 자기 아는 사람 누구 닮았다는 얘기 많이 듣는데 실제로는 안 닮았을걸?
아니 진짜 많이 닮았어요. 그리고 되게 좋은 회사 다녀요. ㅇㅇㅇㅇㅇ이에요.
오 좋은 회사다 나는 면접도 못 본 회사인데 능력있는 사람인가 보지.
선배도 좋은 회사 다니잖아요.
아니요 선배는 그냥 공장 다닙니다.
 
이미 약속은 늦었다. 그런데 후배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과 아직 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그런 이유없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다.) 
 
근데 얘기하는 것만 들어보면 진짜 비호감에 잘난척만 엄청 하는 사람인데 너랑 친해?
네 저랑 많이 친해요. 연락도 자주 하구요.
나랑 닮았다는 것 빼고는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말야.
괜찮은 사람이에요. 여자친구도 되게 예뻐요. 선배랑 닮은게 오히려 단점이죠. 
 
후배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 시점에서 그래 나 약속 있어서 이제 그만 끊어야겠다 또 연락하자. 라고 말해야한다는 걸 알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머릿 속에 떠오른 여러가지 말 중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그 사람 좋아한거니?
 
후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그거 알아요 선배는 진짜 잔인해요.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그 후배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나중에 다른 후배에게 물어보니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어느 한가한 날의 변덕으로 SNS를 뒤져 뭘 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머리가 하얗게 된 남자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귀여웠다.
...
 
형은 항상 내 여자친구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놀린다. 그렇게 10년 쯤 놀리기에 과학적인 접근법을 써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 어 뭐였지 맞다 공부를 잘함. 그리고 성실함. 가장 중요한 웃는 얼굴이 예쁨. 이라고 메모지에 쓰고는 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길 수 밖에 없어.
내가 안경을 쓴 사람을 좋아하는게 아냐 공부를 잘 하려면 안경을 쓰기 마련이고 (여기서부터 NG였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바싹 마르고 타질않아서 얼굴이 하얗게 된다고. 라고 말했더니 형은 웃는 얼굴이 예쁨 부분을 가리키고는 그냥 앞니가 큰 사람을 좋아하는거겠지.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니 맞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요새, 아니 요 몇년 동안 내 삶이 어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누군가를 볼 때 마다 누군가를 떠올린다. 웃는 얼굴이 겹쳐 보이고 예전에 들었던 말투를 들으면 속으로 깜짝 놀라 놓고는 다른 곳을 쳐다봐 표정을 감춘다.

나는 이 규칙성이 너무나 기묘하게 느껴져서 어느날 정리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머릿 속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를 선으로 이어보았다. 이 사람은 이 사람과 닮았어. 이 사람은 이 사람을 떠올리게 해. 그렇게 한참을 머릿 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머릿 속이 더 복잡해진다. 
모든 관계선을 지우고는 처음부터 다시 긋는다. 이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있었어 이 비슷한 일이 다른 사람과 있었지. 그리고 이 사람과 이야기하다보면 저 사람을 떠올리게 돼. 

그렇게 계속해서 줄을 잇다가 어떤 생각에 다다르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계속해서 생각한다. 이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었기 때문에 후회했어. 그래서 저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사죄인지 아니면 후회를 반복하지 않는 것인지 헷깔리기 시작했다.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전에 알았던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한다고? 왜 그런 짓을 하지?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백지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두개의 점을 연결하는 것 뿐이야.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나는 단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 사람들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지금을 후회하고 있을 뿐이란걸 깨닫는다.
 
언젠가 어느날 누군가를 만났다. 검은 셔츠를 입고 바싹 말라서 덩치가 작은 남자아이, 혹은 작은 새처럼 보였다. 나는 바람에 꽃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이 사람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미 가슴이 아려와서 오히려 쾌활하게 웃으며 조금 걸을래? 라고 말했다. 나는 걸어가며 내가 사과를 해야할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더 시간이 지난 어느날. 정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으면서 나는 순수하게 변덕으로 미안해. 하고 사과한다. 너한테 그렇게 하지 말아야했어 라고 말한다. 상대가 놀랐는지 아니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무 동요 없는 문자열이 다음에 커피나 한잔 해요 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제대로 말했는지 아니면 뭔가 실수를 했는지. 이 모든 것이 그냥 이기적인 충동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 그러자 하고 대답할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 그리고 쿳시의 지옥을 생각하자.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가들의 내세는 죽음의 순간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은 대심문관의 앞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이 전부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이야 말로 그들의 소설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언젠가 내가 대심문관의 앞에 섰을 때 대심문관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정말로 대심문관 같은 것이 있다면 그는 내 인생에 가장 친밀한 사람일 것이다. 내 인생 전체를 이해하고 판결을 내려 줄 사람 일테니 나의 모든 개인 서사를 꿰뚫을 수 있는 -  그러니까 내가 가진 모든 원형이 합쳐진 그런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볼까? 아니면 내가 이제까지 사랑해온 어떤 원형과는 상관없는 얼굴을 한 채로 나를 쳐다볼까?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무심코 기대한다. 어쩌면 대심문관은 당신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보길 바란 - 그리고 보지 못할 - 당신의 나이 든 모습을 하고 나를 내려보고 있지 않을까? 단정한 이마와 흰 얼굴을 하고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보며 지금부터 내가 해야할 일-참회와 고백-을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나는 혹시 그 때가 오면 눈물을 제대로 참고 대심문관에게 당신을 만난 지금이 나의 모든 인생 동안 기다려온 단 한 순간이라고 제대로 말 할 수 있을까?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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