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아룁니다.

노츠케 반도 네이쳐센터 I상.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저는 6월에 노츠케 반도를 방문하였던 한국인 K라고 합니다.

지금쯤 노츠케 반도는 여름을 맞이해서 더욱 아름다워졌겠군요. 꽃들이 피어나고 더 많은 새들이 반도를 찾아왔겠죠.

저는 홋카이도 여행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어느덧 몇개월이 지났지만 노츠케 반도를 방문하였던 일은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I상의 친절하신 가이드에 노츠케 반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봤던 추억은, 이번 홋카이도 여행의 가장 소중한 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노츠케 반도를 다시 한 번 가게 된다면 모래밭도, 바람도, 거품처럼 날리던 바다도 그대로 일까요. 

I상께서는 시간이 지나면 사구도 사라지고, 숲도 사라져서 이 곳이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거라고 말하셨었지만,

저는, 어째서인지 노츠케 반도의 모습이 변할 거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어떤 세상의 끝이라는 개념의 하나로서, 모습을 바꾸더라도, 위치를 바꾸더라도 영원히 이 별 어디엔가 

노츠케 반도의 풍경이 남아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만큼 그 곳은 아름다웠습니다. 

다시 뵙기를 기대하며.

 

16년 8월.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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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상,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떠올리지 않았던 것들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 하고 자아란 것은, 파도 위를 표박하는 물거품 같은 것이겠지요.

어떤 중요한 기억만이 사람의 깊숙한 곳에 남아 그 사람을 규정하고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는데

저는 아무래도 얕은 바다에서 튀기던 물거품과 황량한 사구 위에 불던 바람소리를 깊숙히 간직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날 아침 어항에서 I상을 만나던 일부터 배를 탈 때의 일. 바다를 달려 사구 위에 도착한 일

시간 순서대로, 아니 그 시간 그대로를 기억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듭니다.

 

과연, 싶을 정도로 홋카이도의 바다는 추웠습니다. 6월 인데도 불구하고 귀가 얼어붙을 것 같고

뺨이 덜덜 떨려오더군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가져온 후드티 두개를 겹쳐서 입어야 했을 정도였어요.

꼬락서니가 굉장히 우습게 되었는데. 웃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무시해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얕은 바다라 그런지 물거품이 튀어오르고 한참 해주시던 설명은 제대로 듣기가 힘들었습니다.

시레토코 곶에서 밀려나온 흙들이 모여서 사구가 만들어졌고 매년 조금씩 스러져서 앞으로 백년 쯤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실 상 지금의 노츠케 반도는 사라진다고 하셨던가요. 

 

실제 제가 노츠케 반도를 보았을때의 감상은 그런 불안정한 지형이라기 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육로로 본섬과도 이어져있고 네이쳐 센터나 등대, 산이 보이지 않게 사바나처럼 넓은 공터(물론 진짜 사바나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넓겠죠)

철새들이 도래하는 습지가 있는 땅이니 그리 쉽게 이 곳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100년, 긴 시간이죠. 100년 뒤에 제가 살아있기나 혹은 제 이름이라도 기억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애닳은 마음이 들은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처럼, 생명처럼 반도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세상의 어느 누가 강의 사라짐을, 산의 사라짐을 걱정할 까요. 누구의 평생 동안 그걸 목격할 날이 있을까요.

오직 사람의 힘으로, 때때로 하늘의 힘으로 땅이 패이고 무너져 다른 풍경이 되는 것을 보는 일이 있을 뿐이지요.

 

배를 타고 도착한 반도를 보는 순간, 저는 바로 이 곳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하하 하고 웃었을 때, (분명, 와아 저 사람 미친 사람인가봐 하고 생각했을게 틀림없을텐데도) I상은 제 쪽을 안 쳐다보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기가 차서 웃은게 아니라 이 곳이 마음에 들어서 웃고 말았습니다. 

언덕이나 산 처럼 높은 곳이 없이 높은 곳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2,3미터 정도의 평탄하게 넓은 땅.

바람이 멈출 곳이 없고 물이 고일 곳이 없이 황량하고 아름다운 땅. 이 곳에 발을 디뎠을 때의 감상은 그야 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약간의 흙 위에 바람을 이기고 자라난 풀들, 진흙을 밟지 않도록 해변에 놓여진 잔교를 건너자. 

바람이, 바람이,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아무 것도 거칠 곳이 없는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흡사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물 그림자도 없이 해변, 아니 해변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물거품 부서지는 흙과 바다의 경계에서 공기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엔 새가 많아요. 알고 계시나요? 하며 준비해온 쌍안경을 건내주셔서 바라보니 두루미가 있습니다.

몇 쌍 정도 두루미가 여기에 와 있어요. 오늘은 짝궁이랑 떨어져서 혼자 먹이를 찾으러 나왔나 보네요.

다른 동물들은 뭐가 있죠? 새 말고? 여우요. 여우. 네 홋카이도에는 여우가 많으니까요. 모르긴 몰라도 개보다 여우가 많을 걸요.

그냥 길에서 지나가다가 아 여우다 하고 보는 일도 많고. 아 여우다 할 정도로 여우가 많다구요. 그냥 마을에서도?

물론 삿포로 같은 도시는 다르겠지만, 여긴 시골이니까요.


그리고 급작스럽지만, 여길 찾는 분들의 반은 이걸 보러 오시는거죠. 라며 잔교 위를 걸어 I상은 해변가 위에서 말라버린 숲으로 갑니다.

분명 에전에는 잡목림이었을 곳이, 지형의 변화로 그대로 말라 죽어가며 소금끼 짙은 바람에 하얗게 말라서 남아있습니다. 

분명 지형이 변화함에 따라 전에는 그나마 비옥한 흙이 있었던 곳 위에 짠물이 들어온 것이겠지요. 

짠물이 올라와 땅은 갯벌이 되었고 어느새 주변은 바다로 둘러싸였습니다.

나무들은 금세 죽었고 썩어가고 무너져가며 하얀 풍경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더 울창하고 잔목들이 많았지만 점점 규모가 작아져가고 있어요. 이 마른 숲도 사라지고 있는거죠. 새로 잔목이 생겨날리 없으니까.

10년 전에는 훨씬 많았나요? 그렇죠 10년 전에는 정말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어요. 그래서 유명해졌고 사람들이 많이 왔었죠.

어때요 맘에 드시나요? 아주 맘에 듭니다.


갯벌을 지나면 좀 더 풀 숲이 우거진 곳이 나오고 잡목림이 있습니다. 본토에는 고산에만 나는 여러가지 꽃들이 여기엔 그냥 피어있어요.

춥기 때문에? 춥기 때문이죠. 봐요 고토리에요, 일본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새에요. 보이나요?

넓게 펼쳐진 풀 숲에는 일부러 뿌려놓은 것보다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또 죽어가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풀 숲 너머 네이쳐 센터 건너편에는 홋카이도 본섬과 맞 닿지 않은 거친 바다가 있었습니다. 깊고 푸르고 검다.

노츠케 반도를 넘어서면 쿠니시리가 있죠.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는 섬? 네 북방영토. 저 쪽엔 고래가 굉장히 많아서 반도의 등대에서 보면 가끔 고래가 보여요. 아 진짜? 엄청나게 빠르게 들어가버리기 때문에 사진은 아직까지 한 장도 못 찍었는데  한 번 보면 엄청나게 감동하게 되죠.

많이 보셨어요? 많이 보지만 볼 때 마다 감동해요. 고래니까요. 고래니까 그렇죠.


등대 밑 모래 밭에서는 뭐지 하고 발을 굴러보다, 여우가 뚫어놓은 굴에 발이 빠집니다.

여긴 엄청나게 넓군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거의 다 어부들이죠. 그리고 별장처럼 가끔 놀러오는 사람들.

초원을 걸어서 외딴 오두막에 들어갑니다. 새들을 관찰하는 작은 오두막이지요. 안에는 넓은 창을 열고 새들이 쉬는 연못을 볼 수 있습니다.

창문을 단단히 고정하고 자리에 앉아서 새들을 봅니다. I상이 가리키는 새들을 보며 새들의 이름을 따라합니다.

물새들은, 평온하게 앉거나 졸거나 헤엄을 치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하늘로 날아가고 또 그만한 수의 새들이 연못으로 날아옵니다.

영국 사람들이 겨울이 되면 찾아와요. 가끔 태국 사람들이 여름이 되서 찾아올 때도 있죠. 여기서 밖에 볼 수 없는 새들이 몇 종류 있으니까

그렇군요. 저는 연못 수면에 반사되는 햇볕을 망연히 쳐다봅니다. 


제가 이 모래투성이의 반도를 방문한 이유를 설명드렸던가요.

이 곳의 사람들은 이 홋카이도에서도 끝인 이런 곳에 왜 한국인이 혼자 찾아왔는지 궁금해 하더라고요.

하긴, 비행기를 두 번,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배를 타야 하는 곳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도 아닌데 혼자 이런 곳에 오는게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겠군요.

저는, 사실 홋카이도에 노츠케 반도를 보기 위해 왔습니다. 이 곳을 떠난 후에 이곳 저곳에 갈 계획이 있긴 하지만...


저는 꽤 오랫동안 살아갈 이유가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량한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을 보려고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해도 존중은 해야하는 법. (일종의 인권 보호인가. 하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저열함에 실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찾아온 이유는, 풍경이 아닌 개념에 가까운 것을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땅 끝이나 세상의 종말 같은 거창한 말로 설명하긴 그렇지만, 저 먼 곳에 있는 "피안"을 보고 싶었다고 하는게 비슷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가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이름의 고통, 무의미한 삶에 대해 느끼는 고통. 거기엔 해결책도 없고 결론도 나지 않으니

저는 저 멀리를 보고 싶었습니다. 저 멀리에 무엇이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반도를 나오는 길에 I상이 보여주신 숲을 기억합니다.

반도 중심의 마른 숲처럼 흰 색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숲. 지금은 사유지라서 들어갈 순 없고요.

언젠가 저 숲이 점점 가라 앉아서 또다른 세상의 끝 같은 풍경이 되겠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세상의 끝은 사라지지 않고 "이동"할 뿐이구나. 숲이 생명을 다하는 것처럼 끝도 생명을 다하고

또다른 숲이, 세계가 이어지게 되는구나. 하고 납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I상, 이 사구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그 전에 이 말라붙은 숲이 사라지고, 그 전에 "제"가 사라지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개념"들이 사라지기 전 까지는 제 안의 기억을 할 수 있는 한 소중히 간직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그것이 제가 저라는 개념의 종말을 맞이하는 가장 건전한 자세가 되겠지요.


차를 몰고 가다가 아 여우다. 하고 말하시고는 손가락을 해변의 한 점을 가리키셨었죠.

거기에 정말 여우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시는거죠? 하고 물어보니 뭐라고 대답하셨더라.

틀림그림 찾기 같은거에요. 라고 하셨었죠. 틀린그림 찾기.


다시 만날 날 까지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진다. 

어느날 남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를 듣자 그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신은 그에게 소명을 부여하기 위해 불타는 나무나 광휘에 휩싸인 사람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우연과 망상의 세계에서 그것은 어떤 형태라도 취할 수 있다.

비논리적인 흐름으로 이어지는 광고, 우연히 주변 사람들이 건네는 한 마디. 갈 생각이 없었던 곳으로 길이 이어지고.

우리의 편리한 뇌는 알아서 커다란 사람의 얼굴을 공백에서 발견하고, 커다란 누군가의 의지를 우연과 우연사이에서 연결해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5년 6월29일. 구시로.


(몇 번이고 똑같이 그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


너무 늦게 일어났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조식을 먹었다.  

캐리어를 맡기고 역에 오니 구시로 습원과 호수를 잇는 노선을 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노롯코라는 이름의 구식 열차를 타고 습지와 호수를 달리는 것이 구시로의 중요한 관광 상품인데 노롯코의 첫차를 놓쳤다.

관광센터가 열리기를 기다려서 물어본다. 어떻게든 안될까요? 아 다음열차 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기다리셔야해요

혹시 구시로에서 하고 싶으신거 다른게 없나요? 아뇨 그냥 구시로 습원을 걸어다니고 싶습니다.


내가 홋카이도에 오기로 한 것은. 구시로 습원에 대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동부의 구시로시 바로 북쪽에서부터 양탄자같이 펼쳐지는 것이 바로 구시로 습지. 일본에서 최초로 람사르조약에 등록된 총면적 183평방킬로미터의 거대한 습지이다. 이곳에는 에조 사슴, 흰꼬리 독수리를 비롯하여 2천 종류에 이르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여름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며 겨울에는 특별천연기념물인 단학도 찾아온다. 대습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주위의 구릉에는 여러 개의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구시로 시 습지전망대는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어 초록의 양탄자 위를 산책할 수도 있다. 특히 호소카 전망대는 눈 아래로는 구시로 강의 물굽이를, 멀리로는 아칸의 연봉들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일본정부 관광국 구시로 습원 안내 부분)


내가 본 사진은 넓은 녹색 사이로 오래된 기차가 대각선으로 난 철길을 따라 달리는 모습이었다. 스펙타클하거나 아름다울 것도 없는 비인간적인 광경.

달리는 기차는 이 땅에 무신경한 녹색을 사진으로 담을 때 촛점을 찾지 못해 당황한 사진 작가가 놓아둔 절취선 같았다.

도서관에서 빌린, 발간된지 10년쯤 된 가이드북은 다른 페이지는 너덜너덜했지만 이 페이지는 아주 깨끗했다. 

그래 여기를 가야지, 여길 걸어다닐거야. 하고 홋카이도 여행을 결정했다. 


하와이든가 프랑스든가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안가, 홋카이도에 갈거야. 나는 여길 걸어다닐거야. 하고 습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너도 참. 친구는 그것말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하와이에 갈 예정이었다. 그래 홋카이도 여행을 가기 전에는 그런 계획이 있었다. 나도 내가 그럴 줄은 생각도 못했다)


노롯코를 타고 전망대로 가는 것도 있고, 구시로 습지를 걸어다니고 싶으면 네이쳐 센터로 가서 하이킹 코스를 가보세요.

네이쳐 센터는 버스를 타고 가나요? 네, 시간표를 보여드릴게요.


구시로는 그 자체만으로도 조용하고 평안한 도시이다. 2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좀 그렇지만. 

항구는 깨끗하고 넓으며 본격적인 어항이라기 보다 잘 꾸며진 항구도시처럼 느껴진다. 성수기가 되면 로바다야끼나 구시로 주변의 아칸호 등을 즐기러 많은 사람이 온다고 하지만 구시로 시 자체에 상주하는 인구는 많지 않아 보인다. 미술관과 관광객을 위한 시장, 예를 들어서 항구에는 피셔맨즈 워프라는 순수하게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 있다. 식물원에 밥집 그리고 작은 해산물 소매 시장 까지 있어서 과연 홋카이도 동쪽의 중심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사람이 그닥 많지 않았고. 여름에는 이 주변에 로바다야끼의 가판이 쭉 늘어선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외의 시설물들은 붉은 벽돌을 써서 만든 것들이 많았다. 넓은 땅을 마음 껏 써서 다리와 석상을 배치해서 의외로 이 도시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활감은 적고, 어디랑 비슷한가 싶으면 러시아의 항구가 이런 느낌이겠지. 싶다.


(구시로에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비가 있다. 그가 쿠시로신문사의 기자로 잠시 일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쿠시로를 떠나기 직전에야 알았다)


아침시간이 지나서야 노롯코를 탔다. 석탄운송용 화차를 승객이 탈수 있게 개조한 차체는 안은 나무이고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차량은 아니다. 거꾸로 그 느릿느릿함과 불편함이 매력으로 여러가지 노선에서 같은 이름으로 운행되고 있는 열차이다. 항상 인기가 많고 성수기에는 어느 정도 사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탈 수 없다. 하지만 비성수기에 여기를 방문하는 사람이 그닥 많지 않아 이 열차를 탄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어린 사람이란 것은(서른이 한참 넘었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구시로 습원역에서 내려서 전망대를 구경했다. 구시로 습원의 전체 크기는 서울의 3배 정도 된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걸로 반족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나는 전망대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구시로 역으로 돌아가는 열차가 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저 쪽에서 부터 이 쪽까지 산도 없이 넓게 펼쳐진 광경을 보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바로 구시로 역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올라 네이쳐 센터로 들어갈 수 있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버스는 구시로 역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올라가 네이쳐 센터로 갔다. 거기엔 누구나 구시로 습지를 걸어다닐 수 있는 코스가 있다.

산 틈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길로 들어가니, 나무로 만든 센터가 보였다.

실례합니다. 

나는 센터에 들어가 안에 들어가 있는 아무에게나(한 명 밖에 없었다)말을 걸었다.

약초꾼 처럼 생긴 중년의 남자였다. 남자는 센터가 닫을 시간이 다가와 귀찮은듯 고개를 들었다.

여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횡단하려면 얼마나 걸리죠?

2시간? 3시간? 중간에 길이 공사 때문에 막혀서 오래 걸릴거에요.

중년의 남자는 종이 지도를 꺼내 선을 긋는다. 이렇게 나아가요.

선은 거칠고 곧게 종이의 반을 가로지른다.


(나는 구시로 습원을 나올 때 그가 가르쳐준 코스를 그대로 따라 나왔다 정말 한참을 걸어서 슬슬 무리다 한계다 하는 시점에서 "작년 곰이 출몰한 지역이니 주의해주세요"하는 표지판을 보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기어나왔다)


센터 밖에는 나무 잔교가 놓여져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갈 수록 소리가 커져간다.

그것은, 처음에는 바람소리처럼 들렸다.

새가 부르고, 바람이 부르고 나무가 몸을 흔드는 소리. 거칠 것이 없는 평평하고 광활한 습지를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

잔교를 조금 더 걸었을 뿐인데,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이곳 까지 오지 않는다.


녹색이, 녹색이, 녹색이, 녹색이 펼쳐져 있다.

녹색의 소음이 산불같은 소리를 내면서 사방에서 떨어져 내린다.

상상하고 있던 흙의 비린내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싱싱한 풀을 갓 잘라내었을때 나는 냄새만이 느껴진다.

여긴 거대한 풀의 한 가운데야. 세상에 놓여진 세상의 끝 중 하나야. 너는 그래서 여기까지 온거야.


나는 습원에 놓여진 나무 잔교의 한 쪽에 서서 귀를 기울여 사방을 본다. 눈으로는 어떤 새도 동물도 볼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내 옆을 치고 가버렸다. (나는 순순히 나의 끝을 인정했다)

나는 여기에 무너지기 위해 온 것이다. 멀리 바다를 건너, 기차를 타고 밤의 끝에 도착한 도시에서. 습지로.

무엇이라도 혼잣말을 해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음이 나를 안았다.


나는 그렇게 통곡하기 위해 찾아간, 그 땅 끝 같은 벌판에서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왔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음. 우주의 모든 곳에서 떨어져 나온 신호 같았다.

그것은 내 삶의 끝이고. (언젠가 혹은 바로 지금) 이빨처럼 나를 찢어 흩뿌릴 것이다.

나의 일부가 저 푸른 습지에서 소음이 되어 사라졌다. 

나는 소음과 끝의 위로를 받아들였고 습지를 걸어나온 나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조각이 되어 습지에서 산으로, 그리고 도시로 각자 걸어나갔다.


여기에 있는 나는, 3시간에 걸쳐서 구시로 습원을 가로 질러 산을 넘어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고,

구시로 역에서 오비히로 역으로 밤 기차를 탔다. 밤은 길었고 내내 같은 노래를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소음으로 인해 조각난 나를 채우려는 듯이 굴었지만 분리된 나를 이을 수는 없었다.

여러분은 영영 구시로 습원에 남은 나와 길을 돌아 나온 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남은 것은 일부분의 나 뿐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내 일부는 아직도 습지의 한가운데서 그 소음을 듣고 있다.




친구는 나에게 너무 가까운 이름이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쉽게 친한 척을 하기 힘들게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선배는. 하는 소릴 들었었다. 냉혈인간에 무표정하지. 하는 소리도 들었다. 사실 어디에 가나 항상 저런 소리를 듣는다.
그냥 엄청나게 같이 재미있게 놀고 얘기도 잘 통하고 보기보다 사교적인데 역시 이 사람은 마음을 안 열어. 하는 느낌이 있어요. 라는 소리도 들었다.
마음을 여는게 도대체 뭐야 이 멍청이들, 하고 마음을 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만을 친구들로 사귄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주 자연스럽게 너는 내 친구야. 하고 생각이 되는 사람들말이다.

중학교때부터의 친구 결혼 소식을 들었다.
페북에 그의 이름을 링크한 게시물이 떴기 때문이다. 오랜 연인인 그의 신부가 될 분이 올렸다. 나도 알고 계신 분이기에 "와. 결혼해요? 전혀 몰랐네"하고 댓글을 달았다. 사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둘이 아직까지 사귀고 있을거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분은 당황하셨는지 한참 남았어요 ㅎㅎ 하고 댓글을 다셨다. 정말 매너가 없었지. 그래도 한참 동안 친구에게 연락이 없었다.

서운했다.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생각보다 친하지 않은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평일 오후에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엄청나게 빈정댔다. 야 아냐 너 해외있더라구 그래서 전화 끊었어. 어이구 그러세요?
아 그래서 응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어이구 그러세요? 내가 그런 소식을 페북으로 들어야겠냐 것도 니 여친 게시물로 어이구.
친구는 변명하기를, 야 네가 보고 싶어서 연락을 하는 건 항상 나였잖아. 하고 말한다.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 몇 명 중에 제일 제정신이 아니고 퉁명스러운 것은 나였다. 그는 그런데 또 결혼한다고 연락하기 겸연쩍더라고. 하고 말했다 야 너 부천 안 오면 내가 니네 동네로 갈게 진짜 미안하다. 응? 연락하면 평일에 시간 좀 내.
물론 그 녀석은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앞둔 신랑이 얼마나 바쁜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니.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걸어와야 하는 서울의 끝은 멀어서 충분히 이것저것 생각해내기에 충분했다. 어쩌지 어머니한테는 뭐라고 인사드리지 걔 누나한테는? 일단 만나면 더럽게 멀다고 한 대 때릴까? 만나면 같이 셀카나 한 장 찍어야지 생각해보니 그 녀석 대학원 조교하던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니까-4년도 더 됐잖아.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름을 도대체 왜 바꿨는지(심지어 바꾼 이름이 촌스러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결혼식의 신랑은 바쁘니까 얘기할 시간은 있겠지. 한 2,3분 정도도 없나. 그러기엔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식 시작 겨우 10분 전이잖아. 제길 이 녀석 때문에 시험까지 취소했는데 축의금을 이렇게 많이 내다니 빅 손해란 느낌인걸...보나마나 그 녀석 친구 중에 내가 제일 멋있을텐데 너무 자리를 빛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아. 결혼식 장에는 사람이 가득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뿐이었다. 왜 저 녀석 아버지 자리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지. 그냥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신랑석이든 신부석이든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녀석이랑 나는 사람들로 가득찬 자리 구석에서 시시덕거리는 그런 학생이었다. 성적에도 운동에도 취미에도 관심없이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이 즐거워서 몇 안되는 친구들과 함께 바보같은 농담을 하는데 몇년을 보냈다.
오늘은 나랑 같이 구석에 앉을 녀석이 없구나. 신랑이잖아 그 녀석.

축의금을 내고 식장을 둘러보고 아 테이블제잖아 나 간다.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식장을 나왔다. 밖에는 아깐 없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야 뭐냐. 하고 말하고 친구는 평소처럼 뭐냐가 뭐야 꺼져. 하고 말하다가 입을 다문다.

그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때는 아주 옛날이다.

악수를 해본 적도 없는 우리는 아주 어색하게 악수를 하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간다, 하고 가버린다. 야 어디가? 하고 그가 물어보지만 이젠 내가 알던 이름도 아니고 낯선 표정에 낯선 말투의 사람에게,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만나지 않았고 나는 우리 둘 다 알던 오락실의 중학생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 뿐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옛날 우리는 학원도 가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고 오락실에 모여 오락을 했다. 집에 가고 싶지가 않았던 녀석들 뿐이었다. 작은 돈으로 오랫동안 게임을 하기 위해 오락실을 전전하면서 여러가지 게임을 익혔다. 한 명이 돈이 떨어지면 다 같이 나왔다. 매일매일 만나기 때문에 돈을 빌려주는 것도 우스웠다. 집까지 가는 길은 길었다. 내일 다시 방과후가 될때 까지 우리는 괴로웠다. 어쩌면 괴로웠던 것은 나 뿐인지도 몰랐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녀석이었으니까 내 외로움에 어울려줬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간다. 하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평소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평소처럼, 집까지는 나 혼자 가야한다.

16년 7월 23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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