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너는 웃을지도 모른다.

19년에 나온 뱀파이어 윅켄드의 신보를 듣고 있다. 오늘 오전에 그렇게 까지 급하지도 않은 업무 전화를 하다가 버스를 놓쳤다. 버스를 하나쯤 놓쳐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업무전화가 길었으니 사실은 세개 쯤 놓친 셈 이었고 그래 결국 비행기도 놓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만원 정도만을 물고 비행기를 바꿨지만, 본인의 바보 같음에 몹시 시무룩해져서는 항공사의 라운지로 기어들어가 책을 읽었다.

그러니까, 국적기의 라운지는 처음이었다. 전에 해외 출장 중에 국내선을 이용해야 했을 때 일정이 뜨자 동행한 회사 사람이 따라오라며 라운지를 데리고 갔을 때가 있긴 했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항에 넘쳐나는 것이 있다면, 눈치 없고 불평이 많은 사람들과 불편하고 별로인 의자가 아닌가. 그런걸 일부러 더 좁은 공간에 모아둔 곳이 있고 또 거기에서 굳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하지만 티켓을 새로 끊어준 직원 분께서 시간이 많이 남으셨잖아요, 라고 하며 친절하게 지도까지 그려서 주는데 달리 안 갈 이유도 없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오늘 이러한 사태가 일어날 복선이었는지 얼마 전 항공사의 등급이 하나 올라갔고 덕분에 쓰지 않으면 언젠가 없어질 라운지 사용권이 있었다. 라운지에 입장하며 라운지 사용권이 없으면 여길 돈을 쓰고 사용하는 건가, 하는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처음 들어가본 국적기 항공사 라운지의 의자는 공항의 의자보다는 나은 수준이라서 쿠션이라는 것이 있었다. 요즘 공항의 의자들은 100이면 90은 쿠션처럼 생겨먹은 구조물을 의자에 붙여놓고 앉는 사람의 엉덩이를 공격하기에 바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기개 있는 젊은이를 본 노인처럼 좀 흐뭇해지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무려 4시간이나 여기에 이러고 있어야 하잖아.

컵라면에도 볶음밥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서 찬장에서 맥주조끼를 꺼내, 탄산수를 벌컥벌컥 담아 꿀꺽꿀꺽 마셨다.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공식적으로 비행 중이라 연락도 되지 않을 상황에서 굳이 일을 해야하나. 나는 실은 어제도 10시가 넘어 퇴근했고 매주 지엄한 국법을 어기고 50시간에서 60시간씩을 일하고 있다. 출장을 가느라 오늘 내일 모레 3일은 그나마 하루 8시간 일한 것으로 체크가 될텐데 거기에 더 일을 하라고? 아니 심지어 오늘 오전 내내 일했잖아 일하느라 비행기도 늦어서 내 돈으로 차액냈잖아. 다시 한 번, 나는 탄산수를 담아 꿀꺽꿀꺽 마셨다. 그거 말고는 터져나오는 심술보를 달랠 길이 없었다.

가져온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집에서 반쯤 읽은 책인데 중간에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하면 다 읽지 못할게 될 것 같아 가져온 것이라 금세 다 읽고 말았다. 좋은 독서였다. 글을 안 쓰게 된 이후로 글을 읽는 시간이 늘었다. 좋은 책을 머릿 속에 넣고 그걸 곱씹는 것은 항상 좋은 경험이다. 하지만 어쩌나 지금은 시간을 보내는게 목적인 걸. 방금 다 읽은 책을 바로 한 번 더 읽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는다. 가져온 다른 책을 읽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읽은게 데이터와 세계의 진보에 대한 책이었는데 그 다음 책이 스티븐 킹의 단편집이라니. 균형있는 독서도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맥주 조끼에 탄산수를 담아 꿀꺽꿀꺽 마시는 것 뿐 일까.

나는 뒤늦게 아이패드와 넷플릭스를 떠올리고 벌떡 일어난다. 지난 번 비행 때 넷플릭스 동영상 몇개를 저장 해 둔 것도 떠올랐다. 의기양양하게 넷플릭스를 펴서 저장한 동영상을 보았다. 넷플릭스로 저장한 동영상에 만기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에러 메시지의 내용은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저장해주세요”였다. 그래 아무렴 상관없어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 있으니까. 하고 넷플릭스를 살펴본다.
그러고보니 요즘 입에 넷플릭스 볼거 없다는 말 달고 살지 않았었나. 주의 깊게 보고 다시 한 번 보았지만 그래 진짜로 넷플릭스에 볼 게 없었다. 굳이 비행기 안에서 볼만 한 것도 없었다. 미련을 버렸다. 이놈의 넷플릭스 내가 서비스 해지하고 만다. 하고 이를 갈았다.

이럴 거면 그냥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침 백팩에 랩탑을 넣어두었으니까, 그냥 열어서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사외접속시스템에 들어가 미뤄두었던 레포트 하나랑 메일 몇개 회신만 하면 되지 않을까. 백팩이 유혹적으로 열려있다. 그냥 손을 들이밀기만 하면 랩탑이 거기 있고... 하는 순간 거래선에서 전화가 왔다. 받기 싫다. 짜증난다. 아니 도대체 왜 이걸 받아야지. 왜 일을 해야하지 하는 생각에 또 맥주 조끼에 탄산수를 담아 왔다.

사실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별로 없으니까. 그러니까 하고 생각한다, 그래 이제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하면 너는 웃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뭔가를 하고 있으니까, 가끔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 하지 않아서 이런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한다.
나는 라운지의 소파에, 아니 그냥 쿠션이 붙은 1인용 의자에 기다랗게 기대 눈을 감고 노래를 듣는다. 나에게 남은 것이 글을 쓰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하지 말아줘. 글 같은 건 안 써도 되잖아. 차라리 그림을 그릴게. 지나가는 뚱뚱한 코카서스인을 그리는 건 어때?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림을 그리진 않는다.

그래 이럴거면 차라리 뭔가 쓰자 하고, 아이패드를 꺼내 정말로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이제 금방 비행기를 타야하는 시간이 되지만. 그래 이제 금방 시간이 다 될테지만. 지금은 글을 쓴다.

19년 5월의 글이다.




하기의 글은 단 한 줄의 진실도 없음을 사전에 공지드리는바 참조 바랍니다.

올해 2월 페낭에 갔었다. 그렇게 안가려고 갖은 수를 다 썼는데 소용이 없었다.
공항에 가니 거래선 구매가 차를 타고 마중을 나와있었다. “로컬 음식점 가려는데 괜찮아?” 괜찮아 나는 로컬을 아주 좋아해. “로컬을 좋아하면 중국어를 좀 배우지 그래” 아냐 정정할게 나는 역시 글로벌이 좋아 맥도날드 스타벅스는 내 인생의 길잡이지. 구매는 희미하게 웃었다.
작은 도시라던 페낭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우리는 정말 길가의 가게에 들어가 중국음식을 먹고 농담을 몇개 하고 음식 사진을 찍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 시간을 조금 넘겼지만 구매는 “늦어도 돼, 너랑 먹고 간다고 했어. 내 보스가 그 대신 너 돌아가기 전에 꼭 인사해야하니까 말 없이 출국하지 말라더라”하고 말했다.
몇개인가 미팅을 하고 비행기 시간에 쫓겨 나가며 나는 구매에게 인사를 했다. K 다음에 또 봐, 5월? 4월? 그 쯤에 또 올게. 구매는 양산을 썼는데도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또 봐”라고 말했다.

커서가 깜빡인다. 사람의 숨소리보다 빠르다. 심장이 뛰는 속도보단 느리다.
나는 메일을 쓴다. 친애하는 K, 당신의 퇴직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작년에 당신이 건강 상의 이유로 잠시 휴직하고 복귀 하셨을 때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퇴직하게 되실 줄 몰랐습니다.
나는 내가 쓴 문장을 다시 읽고, 잠시 생각하고 물을 마시고 다시 메일을 쓴다. 모든 말을 지우고 이렇게 쓴다.
‘친애하는 K, 우리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당신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매 담당자이고 그 회사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저의 파트너였습니다. 당신의 오랜 기간 도움과 서비스에 감사하고 당신이 퇴직 후에도 언제든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진심을 담아’ 나는 메일을 읽고 또 읽는다.

아직 나이가 젊어 내 누나 정도의 나이인 K는 4년 동안 나의 카운터 파트너였다. K는 암 말기로 더 이상 처치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퇴직을 한다고 한다. 그는 퇴직한다고 했던 날보다 4일을 더 출근했지만 나의 메일엔 회신을 보내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고 보니 꼭 공중에 돌을 던지는 것 같은 짓을 했다 싶었다. 어떤 곡선도 허공에 남는 일은 없고 다만 말도 하지 못하는 돌만 땅에 떨어진다. 돌을 던진 사람조차 어디론가 가버리면 남는 것은 땅에 떨어진 물질 뿐이다.

작년 A형이 죽었던 월요일의 아침, 나는 A형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몇달이 지난 후에야 그가 내가 전화를 건 걸 알았었는지가 신경쓰였지만 나는 그의 사망시간도 모른다. 멍청한 행사가 있어서 장례식에조차 갈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 전의 금요일 퇴근하는 A형과 같이 있었던 것은 나다. 나는 퇴근하려는 그를 붙잡고 업무 협의를 하고 형의 자리에서 메일을 보내고 담배를 피러 간다는 뒷꽁무니에 인사를 했다. 우리가 친한 사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정말 띄엄띄엄 했고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일 얘기만 했을 뿐이다.

아니 결혼을 했다고? 하고 놀라하자 “너도 참 대단하다 2년이나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결혼했는지도 몰랐냐”라고 누군가 면박을 줬다. 내가 A형에게 아 저 솔직히 결혼하신지 몰랐었어요 라고 하자 그는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가 나와 이야기 할 때 몇 번이나 웃었더라 뭘 좋아했더라 무슨 이야기를 했지. 가족의 이야기를 했던가. 아니 내가 A형과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가 뭐였지. “다다음주 쯤에 H수석 올라오면 치맥 좀 하지”라고 했었나. 뭐였지.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치맥하자고.

메신져 앱에 A형의 이름으로 새로운 친구 추천이 떴다. 모르는 얼굴이다. 나는 아직도 A형의 번호를 지우지 않았기 때문에 형의 번호를 받은 사람이 추천에 뜬 것이다. 프로필을 보니 환하게 웃고 있는 개구쟁이 소년이다. 스마트폰을 산 것이 신이 났는지 친구들의 사진을 많이도 올렸다. 그 프로필을 삭제하려다 그대로 멈춰서서 생각을 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왜 죽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의 가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형은 아이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사진 속의 개구쟁이가 형의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리도 없지만 형이 모습을 바꿔서 어딘가에 계속 살아있는게 아닐까 사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그 프로필을 지우고 전화번호를 지웠다.

여름, 친구들과 커피를 사러 단지를 가로질러 가는데 멀리 하얗게 햇볕이 비치는 곳에 A형이 얼굴을 찡그리며 지나가는 걸 보았다. 나는 어이- A책임-하고 그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흰 셔츠를 반팔로 접어 입은 그는 손으로 햇볕을 막더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가 A형을 기억해야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다.

구매 K의 후임 L은 좀 서툰사람이라 나에게 전화를 하는 걸 어려워하고, 메일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채로 똑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보내온다. 나는 꼼꼼하지도 살갑지도 않아서 L과 업무 호흡은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고집을 부리며 뭔가를 해달라고 연락을 해왔기에 전화를 하면서 아웃룩을 뒤져 K가 보낸 메일을 찾았다. 이건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 네 선임인 K랑 나랑 어떻게 협의 했었는지 메일 히스토리를 줄게. 혹시 나한테 전화연락하는게 부담되면 나만 넣어서 메일 보내도 괜찮아. 네 보스랑 내가 너보다 일 더 오래 했어. L은 어색하게 웃는다. K는 성격은 조용했는데 진짜 좀 까르르 웃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다음주에 다시 연락할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과연 다음주에 연락을 할까. 모르겠다.

나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나의 손자가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많아져서는 나를 추억하는 꿈이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 이미 죽어 공기와 먼지가 되어있을 내가 살아있는 것에, 내가 그렇게나 사랑한 나의 아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한참을 앉아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피할 수 없는 끝에 대한 위로란 것은 이렇게 허망하고 갸냘픈 것이다.

나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고 공중의 나는 새를 보살피는 우리의 신을 생각한다. 우리의 신은 지금 어디에 날아오르는 새를 보살피느라 우리를 안아주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그냥 허공에 그려진 곡선일뿐이고, 움직임과 상승 그리고 추락일 뿐이어서 신이 우리를 바라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허공에 선을 긋는다. 언제까지 손을 들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19년 4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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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말이다 너 결혼도 못할 줄 알았다 못생겨서 말야” 하고 이모부는 말했다. 친척들과 주말의 부페에 점심을 먹으러 와서는 먹고 싶은 것도 없어 메밀국수를 한 대접 퍼와서 먹으려던 참인데 난데없는 이모부의 말에 쪽파를 입에서 조금 흘렸다. 흘려서 듣고 있긴 했지만 오늘 점심 모임을 갖기 전 머리를 하고 온 내 새 머리를 형수가 칭찬하던 참이었는데. 어느새 이모부가 내 얼굴을 욕하고 계셨다. 나는 “엥 제가요? 못생겼다고요? 와...”하고 얼빠진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머리가 반백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이 못생겨서 라는 것일까.

사실 오늘은 좀 외모에 자신이 있었다. 모임에 오기 전 하고 온 머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반백으로 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놀라, 물론 놀랄 이유도 없었지만 하여간 그래서 밥을 먹는 것도 까먹고 이모부를 쳐다보았다.

사촌형은 말을 돌리려는 듯이, “쟤가 날이 갈 수록 외삼촌을 닮아가는 것 같아요.” 하고 말한다. 이모부는 그걸 놓치지 않고 “외삼촌도 못생겼지”하고 받았다. 첫째는 못생기고 둘째는 그래도 깔끔하게 하고 다녀서 낫고.

저 평생 못생겼다는 말 이모부한테 처음 들어요. 라고 끊고 갈랬더니 ”네가 너무 남의 말을 안 듣는거 아니냐? 하여간 내 요지는 너는 어릴 때 엄청 못생겼는데 서른살 넘고 나서 점점 잘 생겨져서 지금은 볼만하다는 거야.” 하고 지치지도 않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거니, 결혼하고 니 어머니랑 같이 살아라. 하고 두 마디를 더 했다.

“싫어요” 나는 대답한다. “그거 사기 결혼이잖아요”
이모부는 짐짓 마음이 상하셨다는듯이 “그게 왜 사기 결혼이야. 사기는 모-럴이지. 모-럴 메리지 어떠냐 흐하하하하.” 이모부의 역정인지 농담인지가 재미있는지 조카는 망고를 씹다 말고 헤헤 하고 짧게 웃는다. 아기는 분위기를 못 읽어서 아기인거겠지. 조카는 아까부터 테이블 반댓편에 앉아 호쾌하게 포크를 들고 망고를 찍어 먹고 있었다. 농산물 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23개월의 아기라니.

접시를 꺼내는 형을 뒤에서 때린다. 아니 여긴 왜 온거야? “누구 말야?” 이모부! “우리가 아버지랑 밥을 먹는 자리에 너를 부른거야.” 와 나 진짜 인생에서 못생겼다는 얘기 이모부한테 처음 들어봐. 형은 “뭐라고? 그럴리가”하고 가버린다. 형수는 조카의 밥 시중을 들고 있고 이모부는 식탁 가득 음식을 올려두고 먹고 있다. 그 때 그 때 먹고 싶은 걸 가져다 먹으면 좋을텐데 이모부는 부페에 오면 먹고 싶은 모든 음식을 한 번에 퍼서 드신다. 조카와 이모부가 닮았다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흔든다. 맙소사 여든이 된 이모부와 23개월을 맞은 조카라니

일요일의 스시 부페는 사람이 붐빈다. 운동을 많이 한 사람들이 샐러드를 산더미만큼 담고는 몰래 고기와 탄수화물을 야채 안에 숨긴다. 스시는 밥만 둥글 둥글 남아서 돌아다니는게 반, 나머지 반은 정말 굶주린 사람만 먹을 것 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어 대충 굴린 밥 위에 올린 묵은지다. 꼬마 한 명이 예의바르게 눈썹을 찡그리고는 바지락을 올린 스시를 겨우 하나 접시 위에 올린다. 내가 쳐다보자 음, 하는 표정으로 집게를 자리에 내려놓는다. 나는 무더기처럼 떨어져 있는 밥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우리 둘 같은 사람만 있다면 부페는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텐데 말이야. 내가 먹는 양에 대한 친척들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달고 매운 맛의 면샐러드를 펐다. 입맛이 없어진지는 오래이다.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조카가 통통 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간다. 급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형수를 쳐다보니 도와줘요 하는 눈치라 내가 조카를 쫓아간다. 아이는 걸음이 느리다. 열심히 걸어도 내가 두 발짝만 크게 내딛으면 바로 그 앞에 있다. 손을 내밀자 조카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는다. 아직 23개월인 아이는 엄마 안아줘, 라고 말할 수도 통통거리며 달릴 수도 있지만 손을 높이 뻗어도 내 손까지 손이 닿지 않는다. 나는 허리를 구부려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따라간다. 검은머리에 뒷통수가 동그란 아이는 저 아래에서 저 위를 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이 곳을 보고 저 곳을 본다.

아이는 가게 바깥으로 나가려다 문득 허락을 구하듯 나를 본다. 바깥은 안돼 엄마한테 물어보자, 라고 말하니 휘이잉 뒤로 돌아 가게 안으로 간다. 손은 나를 그대로 잡고 있다. 언제까지 두 발짝 만에 너를 따라잡게 될까. 언제쯤 되면 네가 내 손을 잡지 않고도 멀리 걸어가게 될 까. 가끔 나는 조카가 내 딸 같다는 생각을 한다. 쳐진 눈과 하얀 얼굴과 사람을 싫어하는 먹보 아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의자에 앉아 아이를 쳐다본다. 아이는 칭얼대다 안겨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졸려? 하고 입 모양으로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 아이는 세상에 어떤 사람보다 “내 아이”에 가까운 사람이다. 볼은 둥글고 발걸음은 빗소리처럼 토도독하고 난다. 아기답지 않게 음습하게 나를 쳐다보는 조카를 보면 웃음이 난다.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눈에 마음이 저릴 때도 있다. 형수는 조카의 귀에 “삼촌이 너를 사랑한대”하고 상냥하게 속삭인다. 나는 엥? 사랑까진 아닌데? 뭐 그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니. 하고 딴청을 부린다.

가장 먼저 밥을 먹기 시작 한 것이 이모부였는데, 가장 마지막에 식사를 끝낸 것도 이모부였다. 이모부는 내가 본 것만 해도 세 접시 쯤, 오뎅 그릇과 라멘과 우동을 다 먹고 나서야 아 잘 먹었다. 하고 식사를 마치셨다. 한 시간 삼십분 쯤 걸렸나보다. 밥을 다 먹으니 얘기가 하고 싶으신지 뒤늦게 야채를 집어먹고 있는 형수에게 말을 건다. 도와줘요 하는 눈빛으로 형수가 주변을 돌아봤지만 나는 조카에게 반동결 크랜베리(세상엔 그런 것이 있다)를 먹이느라 바쁜 척을 하고 있다. 이제 갈까요? 손님도 많은데 다 먹고 안 가면 실례잖아. 하며 형이 형수를 구한다.

가까운 곳에 이모부를 내려다 드리고 형이 집안일 사소한 것들을 하는 동안 형수는 이모부의 길고 맥락 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잠이 들락말락하는 조카를 쳐다보다 이제 낮잠을 좀 자야겠다는 이모부의 말에 인사를 드리고 집에서 나왔다.

형이 다시 운전을 하고 조카를 안은 형수와 내가 뒷자리에 탄자.
형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다는거 엄청 귀찮지 않아요? 아니 생각해봐요 그냥 살아가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너무 신경쓸게 많아서 귀찮잖아요. “그래서 결혼하기 싫어요? 연애도 하기 싫고?” 하고 형수는 웃었다.

(아 그렇잖아요. 타인은 불안전한 저 자신의 그림자일지도 모르고. 이제까지 최선을 다 해 살아왔다고 생각한 건 그냥 변명일지도 모르고. 감정은 언젠가 무너지고 그 무엇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건 곧 언젠가 상처에 대한 복선 같은 거잖아요)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형수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한다.

“응 가끔 귀찮다는 생각도 해요. 결혼이라는게 가정을 꾸린다는게 만만치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저는 계속해서 열심히 살아왔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외롭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서른살이 넘도록 살아왔는데 어느날 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십년 가까이 내가 해온게 뭘까.”

“나는 열 아홉 살 때 처음으로 한국에 왔어요. 이제까지 살았던 곳이랑 달랐고 낯설었고. 친구들도 가족들도 한 명도 없었어요. 이제와서 한 번 더 제 인생을 살아보라고 하면 음 어쩌려나 다르게 살아보고 싶지 않을까 내가 선택한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지 않으려나.”여기까지 말하고 형수는 조카의 얼굴을 처다본다.

“하지만 어느날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아 역시 이제까지의 내 인생은 잘못 된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결혼을 잘 했다고 생각해요. 때때로 그냥 혼자 살 걸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선택지와 결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날 누군가를 만나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거기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무섭지 않아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세상은 영원히 겨울이고, 한 번도 여름에 당도하지 않았던거라면. 내가 여름이라고 생각한 것이 모두 착각이고 그게 다 아무 것도 아니라면 어쩔거에요)

하지만 나는 생각했던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 그렇군요 하고 수긍한다. ”응 그래요 삼촌도 언젠가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 생길거에요.” 나는 쓰게 웃는다.

오늘 밤 잠이 들면 열 아홉살이 되는 꿈을 꿀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전혀 모르는 학교에서, 이제까지 내가 배워본 적도 없는 것들을 배우게 될 것이고. 새로 친구가 된 사람들은 이번의 생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흰 가운을 입고 다니는 검은 얼굴의 키가 큰 친구나, 일곱 명의 마드리드에서 온 유학생들 처럼 말이다. 나는 이번 생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인연 하나 남기지 않고 웃고 농담을 하고 뛰어다닐 것이다.

어쩌면 이런 꿈이라면 뒷 모습만 볼 수 있는 사람도 등장 할 지 모르겠다. 너무나 무서워 차마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 같은거 말이다. 길을 걷다가 뒷 모습을 보고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차마 어깨를 두드려 말을 걸지는 못하고. 다만 꿈 속에서조차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볼 때 마다 혹시 이 사람일까 놀라게 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꿈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정말로 저런 꿈을 꾼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딘가에 적을 필요는 누군가에게 말 할 필요도 없다. 현실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번 생은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았으니, 잃어버려서 슬퍼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번 생의 우리는 만난 적도 만날 일도 없을테니까.” 꿈 속의 내가 망연히 중얼거린다.

집은 아직 멀었다. 형은 계속 운전을 하고 있고 형수는 창 밖을 본다. 조카는 한 손을 나에게 맡기고 잠을 잔다. 필시 고단했으리라. 집이 도착 할 때 까지는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잡고 있을 생각이다.

아이는 짧은 그 시간 동안 꿈을 꾸는지 발을 들어올렸다 내린다. 눈은 감은 그대로이다. 나는 아이의 숨을 세어보다 노래를 부른다.

“네가 있던 여름은 먼 꿈에나 있고, 하늘에 쏘아올린 불꽃놀이는 사라져 가네. 이야기는 했지만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하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아기는 깨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자신보다 사랑하는 것은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아주 작은 소리로 노래의 나머지 부분을 부른다.



차에서 내리면 아마 그곳은 여름이 없는 세계일 것이다.

19년 3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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