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그냥 가장 바라는 세계에 다가가는 문제에 관해서예요.
- 코맥 매카시(2023), 스텔라 마리스. p327
 
오늘 퇴근하는 길에 사람들이 몰려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쪽을 보니 기가 막힌 토끼 구름이 떠있었다. 여름이었고 비가 그친 후 무더위가 시작하기 전이라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흰 색이었다. 분명 해가 질 때 쯤이면 더욱 멋진 하늘이 되겠지. 색은 보라색에 천국을 암시하는 듯한 형태의 멋진 뭉게구름.
 
나는 그 사람들과 오래 같이 있지 않았다. 그들이 감탄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방금 찍은 멋진 사진을 보내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나는 사진을 찍어도 보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웠던 탓이다. 걸음을 재빨리 해 커다란 회사 공터를 가로지르다가 그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을 깨달았는데.

애초에 나는 이 몇 년간 이런 사진을 보내도 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머릿 속의 무언가가 잘못되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완전히 혼자였다는 것을 아무런 계기도 없이 알아채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로 급하게 게이트를 넘어 집으로 도망갔다.
 

작년 여름, 작가 하나가 죽었다. 아주 유명한 작가이다. 나는 그의 죽음을 제 때에 애도하지 않았지만 세상 중에 만명 정도는 그의 죽음을 제 때에 애도했을 것이다. 아니지 이만명 정도로 하자. 아니 오만명 정도로 할까?
 
이렇게 말하면 안되겠지만 작가는 죽음으로서만 온전한 평가가 시작된다. 살아있을 때는 그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그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도 있지만. 작가가 너무 유명해지면 무엇보다 "너무 유명해서 싫어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 물론 세상에 몇 안되는 독서인구 중에 "너무 유명해서 싫어하는"사람들의 비중이 몇이나 되겠어 라고 얕볼 수야 있지만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런 세상에서 굳이 책을 읽고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는 제정신인 녀석은 별로 없다. 감히 말하건데 독서인구라는 녀석들은 기본적으로 "너무 유명하면 싫어"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 내기를 해도 좋다.

하지만 작가가 죽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갑자기 사람들은 자비로워져서 그가 현대 문학에 미쳤던 커다란 영향 같은 것을 앞다투어 얘기하고 흑백사진에 생몰을 적어서 올리기도 한다. 물론 너무 살아있는 전설이라는데 책이나 읽어볼까 같은 기특한 생각을 해주는 사람도 줄어들긴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죽어야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의 유명세는 기묘한게, 그의 몇 편의 영화와 그 영화의 명성을 완전히 갉아먹을 정도로 형편없는 시나리오 작업에서도 나타났다. 애초에 문장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희곡을 써도 그의 문장을 제대로 표현 할 수가 없어서 결과물이 형편없어진다고 해야할까.

예를 들어 내가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희곡 하나는 더 이상의 캐스팅은 없을 사무엘 존슨과 토미 리 존스의 연기로 영화화 되었는데 아무리 한국어로 읽었다지만 이게 같은 작품이 맞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잠들고 말았다. 중간에 잠이 들 정도로 길지도 않았는데 깨고 보니 엄청 상쾌하기까지 했단 말이지.

그렇게 문장이 아름답다면 시인을 해야하는게 맞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시인으로서는 치명적인 단점, 장광설이라는 버릇이 있어서 시인을 하기에는 또 적합하지 않다. 과작의 작가라서 대체로 한가한지 갑자기 뜬금없는 내용을 엄청난 분량으로 쏟아낸다. 주제에 관련이 없는 내용이냐고? 아니 기본적으로는 있다. 그래서 그런 점이 더 화가 난다. 애초에 플롯이 복잡한 작가가 아니라서 줄거리가 10줄 이내로 끝나는 소설이 오백페이지가 넘어간다.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그의 문장을 정말로 사랑한다. 왠지 집에 자동소총도 다섯 정 정도는 사뒀을 것 같은 노인네지만 (심지어 그는 군인 출신이다 없을리가 없다) 그의 소설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
예를 들어서 멸망한 세상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바다에 도착한다. 밑의 인용은 그 묘사이다.
 
저 멀리 잿빛 해변이 보였다. 둔한 납빛 물결이 느릿느릿 밀려왔다. 멀리서 소리도 들렸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세계의 해변에서 부서지는 어떤 이질적인 바다처럼 황량했다. (중략) 그리고 재가 그리는 잿빛의 스콜 선. 남자는 소년을 보았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파란색이 아니어서 미안하구나. 남자가 말했다. 괜찮아요. 소년이 말했다.
- 코맥 매카시(2006), 더 로드. p244
 
중략이라고 써두었지만 내가 생략한 것은 두 줄 반 정도의 문장이다. 짧고 간결하게 그는 상황을 설명하고 그보다 더 짧고 간결하게 사람의 마음을 묘사한다. 그는 좀처럼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의 문장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한다. 하나를 더 보자.
 
고요 속에서 눈이 소곤거리며 내렸고, 불꽃들은 피어났다 희미해지다 영원한 암흑 속에서 죽었다.
- 코맥 매카시(2006), 더 로드. p111
 
이런 글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조지 부시 주니어를 지지했다거나(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인터뷰도 아직 보지 못했다) 지구 온난화는 사기야 하고 8기통 차량을 밟으며 다녔더라도 (그가 환경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인터뷰도 아직 보지 못했다) 이런 문장을 쓴다면 남들에게 비밀로 하는 일이 있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것은 그의 유작인 연작 소설이다. 작년 겨울에 발매된 책을 이제와서 읽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리 쉽게 잃혀지지 않고 30페이지 쯤 읽다가 며칠을 쉬고 문장 몇 줄을 읽고 한 시간쯤 다른 짓을 하며 천천히 읽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엔 남녀가 나오는데. 남자는 자기를 떠나간 여자에 대한 생각을 십년도 넘게 지난 지금(작중 시간)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여자는 ... 아니 소설의 내용을 이야기 하는 것은 관두자. 그냥 말하자면, 아주 기나긴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정도로 해두자.
 
하여간 유작인 책을 읽고 있노라니. 내가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을 읽을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읽으면서 별별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가 정말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인간 존재 내면에 사라지지 않는 고독? 자아와 타자 사이의 갈등만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게 한다는 거? 모르겠다. 몇주 쯤 아니면 몇 개월  쯤 진득하게 생각해야 알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연구자가 아니니 이러다가 남이 써놓은 글을 읽고는 아이구 그렇구나 그런 내용이구나 하고 납득 할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성을 초월한 이치 같은것이 인간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가 직접적으로 "이것은 스파게티의 화신이다." "이것은 정부 관료제의 화신이다." 뭐 이런 설명을 집어넣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인간을 초월한 것이 분명한 것들 나오고. 평범한 인간인 등장인물을 말 그대로 박살내어 버리는 전개가 많이 등장한다. 어떤 초인 판사가 등장하는 서부 배경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 소설에서는 그가 문명의 화신 비슷한 것이란 걸 잘 숨기지도 않으며 책에 나오는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은 그 초인 판사의 손에 의해 말 그대로 박살난다. 말하고 보니 무슨 히어로물 같은데. 살인 강간 강도 방화 이 모든게 나오는 끔찍한 소설이다.
 
그런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는. 구원 받지 못하는 인간이다. 무언가를 구하겠다 는 의지를 가진 인간은 반드시 실패하고 그들을 정말로 구하는 것은 글쎄... 작중의 등장 인물들을 정말로 구하는 게 한 번이라도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 곰곰히 생각해봐도 기억나는게 없다.
그들이 받은 구원은 얄팍하고 불안한 것이고, 우리가 읽지 않는 동안 책 바깥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져서 순식간에 모든 등장인물들이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은 연약하다. 그들은 정말로 순간. 딱 어느 순간만 구원 받는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해야할지 우리의 필멸의 여정 중에 주어지는 잠시간의 위로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왜 갑자기 이 작가에 대해서 쓸 생각이 들었지 싶었는데. 잠시 서재에 앉아서 생각해보니 스스로 나에게 주어진 구원이 몹시 얄팍한 것이고 한 번도 구해진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아 빌어먹을. 서부극에 혼자 당나귀를 타고 가다가 머리에 총을 맞고 죽는 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닐텐데 왜 이런거에 꽂혀있지 하고 쓴 웃음이 나온다.
 
그래. 오늘 다른 사람의 책으로 가득찬 방에서 내가 정말로 혼자라는 생각을 했다.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래서 지금 글을 쓰다 말고. 그가 쓴 작은 희곡의 문장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그 희곡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구하려고 대화하는 내용 밖에 없는 책이다. 마지막 문장은 기억나지만 구원을 거부하고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말이 뭐였더라.
 
결국 원하던 구절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글을 쓰길 그만두고 서재를 뒤져가며 책을 찾아보려고 한다.

어째서인지 책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나는 필사적이 되어서 제발. 제발이라고 중얼거린다. 중얼거리다 못해 제발, 이라고 기도한다.
 
 
이제 댁이 뭘 구한 건지 알겠지요.
구하려고 했지. 구하려고 하고 있고. 열심히
- 코맥 매카시(2006), 선셋 리미티드. p135
 
24년 7월 24일의 글이다. 

사람이라면 모두 다 그런 것처럼, 나에게도 "나의 나무"가 있다.

"나의 나무"가 무엇인지 설명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나로서는 나의 나무가 없는 사람을 상상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긴 하겠다. 예를 들어 아직 나의 나무가 있어본 적이 없는...그러니까 한 3살 쯤 된 사람. 아니면 다른 별의 지적 생명체가 지구 문명의 멸망 후 인류 문명의 서버들을 어렵게 돌려서 내 글을 읽고 있다거나. 해독에 수고하셨지만 다른 별의 사람이여 이 글에 뭔가 유용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뒤로 가기를 눌러 어딘가에 있는 알콜스왑으로 물건 이리저리 닦아보기 포스팅이나 읽어보십쇼.

짧게 설명하자면, 내가 말하는 "나의 나무"는 살아가다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나무를 뜻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유명한 에세이집 <'나의 나무' 아래서>에는 소년 겐자부로가 몹시 사랑하여 자주 그 아래에 앉고, 마음이 외롭거나 할 때 위안을 받았던 커다란 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 중에 안 그런게 있는가 싶겠지만) 우습고도 슬픈, 무력한 소년시절을 쓴 이 에세이에서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이라는 가혹하고 잔인한 시대에서 아니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했던 그의 ”나의 나무“에서 나즈막한 기도나 오래된 이야기에게서 얻는 그런 위로를 받습니다. 훌륭한 책이랍니다. 아동 대상의 에세이지만 그의 다른 소설들 보다 나은거 아냐 싶을 정도니까.

아주 어릴 적에 내가 가졌던 "나의 나무"는 관목처럼 키가 작은 단풍나무였다.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뜰에 심어진 관상용의 나무이다. 크게 자라지도 굵고 단단하게 자라지도 못한채 자라버린 나무였다. 원래 그럴 태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 그 나무를 볼 때는 내가 너무 작았는데도 다른 나무보다 눈에 띄게 작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십 몇년이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는데 오래된 단지인 만큼 단지의 나무들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어떤 나무들은 5층 짜리 작은 아파트의 건물 높이 만큼이나 자라났지만. 그 단풍나무만은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 그 이유는 (아니 정말 그 이유에서 였을까)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그 나무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괴롭혀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 책을 읽지 않는다면 단지의 뜰, 아니면 주변의 야산을 쏘다녔는데. 무당벌레나 꿀벌을 수십마리씩 산채로 모으거나 개미들 위에 과자를 뿌려 개미들이 그걸 옮기는걸 구경하는데 영원같은 시간을 썼지만 그것이 지겨워지면 대체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아마 다른 나무는 내가 오르기엔 너무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그 나무에 매달렸을 것이다. 나무로서는 정말 곤란했을게 틀림없는데 어딘가에서 나무는 가지만으로 생식이 가능하다는 걸 읽고는(그건 아마 접붙이기에 대한 이야기였을텐데) 그래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단풍 나무의 싱싱한 가지를 몇개 부러트려서는 그 근처에 심고 물을 주고 그랬었다. 아니 못되쳐먹은 꼬마였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내가 점점 커지는 동안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더 쉬운 나무타기 상대가 된 그 작은 단풍나무는 결국 어른이 되어 무슨 교목처럼 키가 커진 나보다 작아지게 되었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렇게 된건 역시 내가 중학생이 되도록 그 나무에 매달려 지냈기 때문 일 것이다. 부드럽고 탄력있게 휘는 그 가지에 나는 더 커지고도 가끔 매달려보곤 했는데 부러질까 두려워 체중을 실을 수는 없어도. 어두운 밤 집에 돌아오는 길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되는 양 양팔로 가지를 잡고는 대롱대롱 매달려 마음이 내킬 때 까지 있곤 했다. 전세계의 소년소녀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 그렇게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역시나 그 작은 나무를 사랑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재건축으로 사라졌다. 나무들은 잘리거나 파내어졌다. 13동 앞에 서있던 커다란 백목련이나 6동 뒤로 줄지어 서있던 포플러는 아마 파내어져 팔렸을 것이다. 단단하고 곧은 훌륭한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작은 단풍나무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너무 매달려 커지지 못한 단풍은 그냥 잘려졌을 까 아니면 어느 좀 마음 착한 인부의 손에 파내어져 여느 부지의 정원 구석진 곳에 심어졌을까? 운이 나쁘자면 또 어디 학교의 운동장 같은 곳에 심어져 원숭이 같은 인간놈들을 세명씩 네명씩 매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단풍나무 생각을 하며 한번 알아볼까 싶다가도 자기 땅 한평 없는 월급쟁이가 나무의 행방을 알아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금세 그만둔다.

나무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게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다. 나무가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쓰다듬어 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그 등치에 기대거나 그늘 아래 앉는 것 뿐인데 나무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니. 인간은 정말 제멋대로가 아닌가. 우리가 나무를 사랑하든 증오하든 나무들이 우리를 구분이나 할 수 있으려나, 우리가 나무에 울분을 터트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그 아래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나무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싶다. 그저 바람소리에 맞춰 그 가지를 흔들고 나뭇잎 부서지는 그 소리와 함께 그늘을 내려 볕을 가리기나 할 뿐이지.
말하자면 나의 나무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다.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서 우리는 그저 서있을 뿐인 나무를, 그 그늘과 단단한 침묵을 사랑하고 마는 것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나의 나무란 대체 그런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생각하듯이 나의 나무를 생각한다. 어쩌면 당신을 나의 나무를 그리워하듯이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 시절 내가 좋아했던 나무는 단과대 옆에 서있었다. 7층에 있는 학생회실을 나와 창가에 서면 보이는 커다란 나무로. 여느 건물 3층 4층 까지는 닿을 듯한 여름이 되면 가지를 사방으로 뻗는 나무이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과 풍성하게 매달린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려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나는 어느 봄 학교에 처음 들어가 혼자 어슬렁거리다 문과대 창을 통해 나무를 보고는 한눈에 그 나무가 마음에 들어 매일매일 혹은 기회가 날 때 마다 창가에서 나무를 바라보았다. 질리는 일은 없었다. 복학을 하고 돌아왔을 때도 처음 한 것도, 졸업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것도 7층에 올라가 그 나무를 바라본 것이었다. 나의 학교 생활은 멍청하고 한심한 일화들과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읽은 책들, 그리고 변하지 않고 철이 되면 바람에 흔들려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번 겨울 볼일이 있어 학교에 돌아가 보니 그 나무는 있던 자리 그대로 있었으나 커다란 가지 대부분이 잘려져 있었다. 눈이 내렸지만 어떤 눈송이도 나뭇가지에 매달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또 7층에 올라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가 내던 소리를 떠올렸다. 항상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23년 2월의 글이다.

얼마 전 이상한 일이 있었다.

무선 이어폰을 끼고 화장실에 가며 폰을 자리에 놓고 가는 바람에 화장실 문을 닫자 블루투스의 신호가 끊겨 듣고 있던 노래의 재생이 끊겼다. 이상한 일은 노래가 끊겼던 일이 아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어 볼일을 마치고 나오며 무선 이어폰을 재작동하자 듣고 있었던 한국의 유행가가 아니라 낯선 외국어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흥겨운 리듬의 곡이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인데도 아는 노래처럼 느껴지는 건 보컬이 내가 예전에 많이 듣던 곡의 가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운 기분이 들어 노래를 몇 분 정도 듣다가 사무실의 자리로 돌아와 내 스마트폰을 보았다. 노래는 역시나 내 폰에서 재생되는게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명 다른 사람의 신호가 - 사무실 내에서 나와 같은 종류의 스마트폰을 쓰는 누군가 - 섞여서 들어간게 아닐까. 아주 예전 라디오로 음악을 듣던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일이다. 아니 그 때는 다 유선 헤드폰과 이어폰이라 그럴일이 더욱 없었으려나. 낯설고도 익숙한 외국의 노래에 아쉬운 기분 반으로 무선 이어폰 연결을 다시 설정해 내가 처음부터 듣던 노래를 들으려는데 문득, 어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익숙한 음악의 가수가 누구였지? 아니 것보다 그 가수의 그 노래, 내가 엄청 많이 들었는데 그게 제목이 뭐였지? 진짜로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나는 그리 부지런한 음악 감상자가 아니다. 스트리밍의 시대에 나만 그런 것은 아닐꺼야 하고 혼자 하고 혼자 듣는 변명을 해본다. 유튜브와 애플뮤직 두 개나 굳이 음악감상 앱으로 쓰는 것은 그냥 해둔 구독을 해지하지 않을 뿐이다. 스포티파이까지 쓰기에는 너무 듣는 노래만 들으며 멜론을 쓰기에는 내가 너무 속물이다.

컴퓨터가 되었든 스마트폰이 되었든 파일을 어딘가에 저장하던 시절에는 나름 분류도 하고 태그도 하면서 음악을 들었던 것 같은데. 요즘 음악감상 앱의 알고리즘은 너무 편리하여 어떤 가수의 곡을 하나 고르면 자동으로 그 다음곡이 알아서 흘러나온다.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고 어떤 기분인지 쓰면 검색이 괜찮은 재생목록을 골라준다. 생각은 필요 없고 그냥 기분만 있으면 된다.
앨범 전체를 들으며 앨범 전체의 구성을 하나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듣던 그런 감상법도 딱히 필요 없다. 하나의 좋은 곡이 끝나면 그것과 비슷한 그리고 더욱 포퓰러한 음악을 골라주니 항상 클라이막스만 골라서 신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얏호. 그러다보니 장르에 대해서도 가수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없다. 제목을 외울 필요도 없다. 그게 뭐 어때서요 라고 묻는다면 나도 솔직히 그게 싫다는 것도 이래선 안된다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 시대에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대체로 "소유"와 비슷한 의미였던 것 같다. 꽤 비싼 돈을 들여야만 음향기구를 갖출 수 있었고 LP나 CD, 이도 저도 아니면 Tape라도...하여간 물리적인 매체를 사서 듣는 것이 중요했다. 나도 CD의 부흥 무렵에 태어나서 그런지 그 후 대용량의 인터넷 회선이 당연한 시대가 되자마자 음악을 모으는데 열중했다. 유명한 당시의 유행가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유행곡을 하드에 저장하고 CD로 다시 리핑해서 들었다. 각자 컴필레이션 CD를 만들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이 로맨틱한 제스추어였던 시대이다.

나는 음악 수집에 꽤나 악질이라서 한국인은 나말고 아무도 모를만한 음악을 폴더로 정리하고 들으면서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때때로 인터넷에 잘난척하는 글을 써댔다. 아무도 모르는 음악에 대해서 글을 쓰니 조회수는 두자리수나 겨우 올라가고 가끔 달리는 댓글은 저 말고 이 아티스트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분이 계셨군요 어쩌고 하는 역시나 잘난척 하는 댓글들 뿐이었다. 복제된 컨텐츠의 시대일 수록 나는 내가 가진 데이터 베이스의 방대함과 희귀함에 (그리고 그걸 몹시 싼 비용 그러니까 드는 비용이 오직 나의 차고 넘치는 여가 시간인데, 생각해보면 10대 20대의 청춘만큼 귀중한 싸구려가 어디있을까 제기랄, 하여간 몹시 싼 비용으로 구축한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부심을 가졌다. 이런 취미는 본질적으로 몹시도 궁핍한 것이어서, 동시대 한국인의 기준으로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라 자부심을 가질 이유는 한 개도 없었는데 말이다.

요는, 한 때 나는 음악을 모으는 것과 듣는 것 모두에 시간을 마음 껏 낭비할 수 있었으며. 엄청난 시간을 다양한 음악을 듣는데 쏟았지만 거기에는 어떤 깊이도 없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하드디스크를 채우고 리핑된 CD에 네임펜으로 사람들은 알아주지도 않는 아티스트의 이름을 적는게 내 취미였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뒤의 결말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났다. 시대가 변하고. 인터넷이 더 발달하였으며 회선은 빨라졌다. 서버의 운용비용이 더 낮아지자 음악파일을 다운받는 시대에서 스트리밍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각 음악 사이트는 통합되었으며 결국 내 하드와는 상대도 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음악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멋진 (더 멋진?) 음악 저장고를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게 되자 금세 음악 모으는 것을 관두었다. 그랬던 것 같다.

애플 뮤직의 초기에는 전처럼 재생목록도 만들고 했던 것 같지만 뭘 쳐도 거기에 음악이 있는데 내가 뭐라고 개인 음악 저장고를 유지한단 말인가. 제기랄. 하지만 노래를 모으게 되지 않게 된 무렵부터 나는 그렇게 열심히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테니 단순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어느새부터인가 나는 더 이상 음악을 취미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외국 어딘가의 음악감상 카페에 들어가 커피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불편한 자리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한참을 울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건지 본인인 나 조차도 알수가 없다.

이제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그 노래가 유럽의 곡이 아닌건 알 수 있었다. 제목도 영어가 아니다. 유튜브에서 재생했던가 싶어서 재생 목록을 찾아보다가 1,2년 어치의 검색을 해서 나올 곡이 아니란걸 깨달았다. 샤잠 같은 곳에 콧노래로 노래를 불러보다가 내가 일반인 뺨치는 음치라는 걸 다시 기억해냈다. 기억나는 키워드로 구글링을 해보기도 한다. 무슨 짓을 해도 나오지가 않는다.

결국 집에 가는 길에 내 트위터를 검색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맘에 드는 노래는 유튜브 링크를 트위터에 올리곤 했는데 키워드 유튜브로 내 트위터를 검색하면 분명 제목이 나올 것이다 싶었다. 제목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러니까 왜 그 정도로 특이한 노래인데 제목을 기억못하는가 싶지만 하여간 내 트위터를 검색했다. 정말 다양하게 이상한 노래를 엄청나게 들었구나. 1년치를, 2년치를, 3년치를 넘어갈 시점에서 노래를 하나 찾았다.

원래 기억하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부분도 있고 가사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애초에 내가 전혀 모르는 외국어 (포르투갈어였다)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활동한 것은 1979년에 내가 듣던 곡은 1972년에 발표한 노래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찾아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 곡을 왜 듣게 된건가 싶어서 생각해보니 나는 한 때 남미의 재즈를 엄청나게 들었는데 그 때 이어졌던 것 같다. 왠지 그리운 기분으로 노래를 듣고 또 유튜브가 이어주는 다른 노래들도 따라 들었다. 아 역시 좋은 노래들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다른 곡을 듣고 있다.
유튜브에도 애플뮤직에도 없는 한 15년 전 쯤 발매된 곡이다. 혹시나 싶어서 검색해봤는데 역시나 한국의 스트리밍 사이트에나 있는 곡이다. 분명 내 하드 어딘가에 앨범 전체를 추출한 (그렇다 나는 앨범도 엄청나게 사댄 사람이다) 파일이 있을텐데 지금은 들을 길이 없다.

만오천원이든 구천구백원이든 결재해서 들어볼까 하다가 미리듣기로 음악을 들어본다. 듣고는 너무 좋아 한 번 더, 그리고 한 번 더. 그렇게 글 하나를 통채로 다 쓰는 동안 1분간의 미리듣기를 반복한다.


이 노래가 이렇게 좋았던가 아니면 내가 미리 듣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좋게 느껴지는 걸까. 그건 스트리밍 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22년 12월 30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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