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추미술관地中美術館에 대해서 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지추 미술관은 나오시마直島라는 섬/그리고 지추 미술관이라는 건물/그리고 그 안에 전시되어 있는 많지 않은 수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어느 하나를 빼고는 말할 수 성립될 수 없다. 구성요소가 적기 때문인가? 아니다, 안 그래도 각개의 전시물 사이의 느슨한 연결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구성요소가 너무 많지 않은가 생각이 될 정도이다.

(쓸 수 있을지 몰라도) 결론 부분은 명확하다. 비효율과 자연에의 접합. 나오시마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관람자의 체험이다.

여기 지추 미술관을 방문하고 전시물들을 본 뒤 부분적인 감상을 기록해두도록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그게 아주 먼 미래의 나 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있는 글은 아마추어의 인상비평 정도의 글이기 때문에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하신 분은 다른 글을 읽으시는게 좋겠다.

(1)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의 작품 시간/지연/정지, Time/Timeless/No time, 2004

콘크리트의 복도를 내려와 어두운 문을 지나면, 지추 미술관의 가장 심층에 놓인 이 작품을 보게 된다.
직경 2.2미터의 검은 색 구체가 중심에 놓여있으며 27개의 금박을 입힌 목제 기둥이 방의, 아니 공간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작품은 계단 위에 놓여진 ...일종의 오브제의 형태이다. 가장 낮은 바닥에 입구가 있으며 (계단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는) 그 위의 중간 단에 검은 색 구체가 놓여있다. 우리는 (관찰자라는 행운으로) 가장 낮은 단에서 시작하여 구체와 같은 단에, 그리고 구체보다 한 단계 높은 단위에 까지 오를 수 있다. 동쪽에 입구가 있는 이 공간의 천장은 궁륭형태에 사각지대 천창이 있어 나오시마의 태양광을 그대로 받아 비춘다. 일출과 정오, 그리고 일몰에 맞추어서 이 공간의 빛은 시시각각 변하나 공간은 넓다. 밝고 선명하며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 처럼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다. 우리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 뿐이다.

우리가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의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먼저 관찰하게 되는 것은, 사방에 배치되어 있는 기둥의 각도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황금색으로 코팅되어 있는 이 기둥은 바로 공간에 입장하기 전에 큐레이터가 친절하게 노란색 기둥에는 손대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했던 그 기둥이다. 어째서 각 기둥이 똑같은 규격이 아닌지 관찰을 하게 되면 금세 이 기둥들이 천장에서 쏟아지는 태양광을 반사하기 위한 오브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천창을 통해서만 조명이 변화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도 이 작품의 양상은 변화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중앙에 놓여진 검은 구체이지만 검은 구체에 주목하지 않고 이 공간만을 바라보게 된다면 예를 들어서, 미술관에 들어와 처음으로 이 작품을 보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확인하게 된다면 예민하지 않은 관찰력을 가지고 있어도 "시간"의 흐름이 이 공간의 주제이자 작품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지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나오시마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데.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인 <오픈 스카이>는 사각형의 닫힌 공간에 하늘에 집중 할 수 있는 사각형의 천창을 뚫어놓아 관찰자가 시간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나오시마의 하늘을 통해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의 중간에 놓여진 검은 구체-화강암으로 만들어진 2.2미터의 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오브젝트는 나오시마의 해변 열린 공간에 전시되어 있는 동일 작가의 작품인 seen/Unseen/Kown/unknow에 주요 전시물이 두개의 거대한 구형과 비슷하게 보이는데. 전시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시선을 잡아 끄는 이 검은 오브제는 "방점"이자 "소실점"으로서 이 공간에 있는 동안 우리가 이 오브젝트를 무시하고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전시 공간에 있는 이상 이 구형의 주변을 돌고 인식하고, 심지어 우리가 이곳을 떠나도 전시 공간을 떠올리게 되면 가장 먼저 이 구체를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시간에 의해 변화하지 않고 위치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으며 공간 자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점, 그렇다면 나는 감히 말할수록 있다. 이 검은 구체는 이 공간의 신이다.
신에 대한 은유이며 이 공간을 지배하는 신 자체이다. 우리가 말을 걸수도 없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 굴러떨어지거나 소실되는 일 또한 없다.
우리, 공간의 밖에서 온 관찰자가 검은 구체에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검은 구체의 곡면에 의해서 계단이 기묘한 모습으로 일그러져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양광을 비추기 위해 만들어진 천창과 함께, 흡사 한 개의 눈을 지닌 얼굴이 웃으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곳처럼 보인다.
그것은 신의 얼굴이다. 방 한 가운데에 위치한 신. 그 신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바라본다.

(2)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수련Warter lilies

바닥이 이상하다. 흰색의 작은 (일반적인 주사위보다 작은) 정사각형으로 바닥을 깔았다. 물 빠짐과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것 일까. 습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까. 신발을 벗고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습기가 가득찬 공간에 있다는 착각이 든다. 그렇다 그것은 착각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 습기란 작품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는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한 공간에 있다는 착각은 작품 앞에 서있는 때 더 강해진다. 모네의 수련. 늪의 표면에서 터져나온 색과 생명.

전시 공간 안에 수련 다섯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이즈에 따라 배치 한 것인지 뒷면 양쪽에는 100*200의 작품이. 양 옆에는 200*200의 작품이. 그리고 정면에는...200*300의 두 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걸려있다. 압도적인 이미지. 물기가 하나도 있을리 없는 공간에 느껴지는 습기. 높은 천장으로 소리가 난반사되어 울린다. 들릴리가 없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수련이란 원래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었던가. 어쨰서 이렇게 거대하고 무질서하며 깊은 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늪으로 가득한 이 전시공간에서 수련이라는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혼돈이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그 혼돈에서 터져나온 생명이다.

사실 나에게 이 작품은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 지추 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이 수련을 보기 위해서 였다. 같은 여행에서 오하라 미술관의 수련을 보았지만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동양화를 전공하였는데 몇 안되는 서양화 그림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같은 그림이 식탁의 내 자리에서 보이는 곳에 걸려 있었는데 검은 밤과 숲을 그려넣은듯한 그림으로 항상 아무도 이 그림의 윗쪽과 아랫쪽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농담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수련을 몹시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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