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과 얼음의 지옥을 상상 할 수 없다.

현대인에겐 현대에 어울리는 지옥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물리적 고통이 가깝지 않다. 

굶주림조차 농담꺼리가 되는 세상인데, 천개의 바늘과 칼로 된 산 같은 건 상상력이 부족한 우리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이다.


나는, 현대적인 의미의 지옥을 제안한다.

장소는 백화점의 지하, 이마트의 식품 매장 앞, 홍대의 메인 도로 같은 것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기에 딱 알맞는 그런 곳. 시간은, 아무래도 좋다 지옥이니까 오전도 오후도 어쨌든 상관없다.

단지 우리가 가장 지치고 별볼일 없어 보이는 한심한 시간대가 가장 좋다.


당신은 거기서 누군가를 만난다. 누가 좋을까. 동경하던 사람? 오래전에 헤어졌던 아버지? 헤어진 연인?

누구라도 상관없다. 당신의 인생을 뒤흔들만한 그런 중요한 사람. 당신의 인생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사람.

중요한 것은 아주 우연히 마주쳐야 한다. 꿈에라도 보고 싶었던 사람을 꿈에서도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우연히.


당신은 당연히 바보같은 실수를 한다. 입을 떼지 못하고. 손은 덜덜 떨리고. 다리는 힘이 빠져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나머지. 수만 번을 연습한 하고 싶던 말을 하지 못한다.

넋이 빠져 당신은 기어가다 시피 그곳을 도망쳐 어딘가의 의자에(혹은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아.

그대로 지옥에 떨어진다. 실망하던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떠올렸다.


그렇게 방금 전의 상황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런 얘기를 했었어야 했는데.

나는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또는 고맙다고, 당신을 영원히 저주 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끊임없이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다른 경우를 생각하고. 내가 잘 해냈을 경우 일어났을 수많은 경우의 수를 나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우리에게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가느다란 거미줄 조차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현대적인 지옥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