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자다가 레몬에이드 병을 떨어트려 산산조각 냈다.

아니 솔직히 말합시다. 자다가 일어나 레몬에이드를 찾아 마시고는 대충 아무데나 두다가 산산조각 냈다.

동거인이 있었다면 정말 크게 혼쭐이 났겠지만, 나는 다행히고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혼냈다.

그러면 안되지 임마. 미안합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웃기지마 넌 이제 병 음료 금지야 임마. 이러고 중얼 거리면서 

조각을 치웠다.


출근 시간이라 잘 치울 시간이 없었다. 대충 봉지에 묶어서 버리긴 했는데 역시 조각이 잔뜩 남았다.

시간이 날 때 마다 방을 치우면서 유리 조각을 찾고 있다. 물리학의 세계는 신비해서 책장 위에도 유리 조각이 있고

물론 책상 위에도 유리 조각이 있고, 당연하게도 화장실에도 유리 조각이 있었다.

방 한가운데 깔아둔 카펫을 이틀에 한 번은 돌돌이로 청소하는데 그 때 마다 유리 조각이 나온다.

내 방이 죽은 레몬에이드 병의 저주로 유리 조각을 생산하기 시작한게 아닐까. 나라도 그렇게 비참하게 조각조각나게 되면 원한이 남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조만간 술과 공물을 바쳐 원한을 위로해야지-하고 기특한 생각도 했다.

(혼자 사느라 정신이 이상해진 나머지 샤머니즘에 눈뜬 걸지도 모른다)


유리조각이라고 해도 안전하게 깨져서 그닥 날카롭지 않다. 조각면은 누군가가 마모시켜둔 것처럼 되어있으니 

방 안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는 것 빼면 해로울 것 도 없다. 라고 생각한 건 오늘 오후까지의 일.

저녁때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30분 정도 멍하니 앉아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만 생각해야지 하고 일어서는데 그만 유리 조각을 밟았다.


아야야 으아아 아야야야 유리 조각을 밟았다. 하고 생각했다.

으아 으아 으아아 으아아 아프다아아아. 하고 생각했다.

소독 소독하지 않으면 감염되겠어 으아아아. 하고 생각했다.


"아프다"하고 소리 내어 말했다. 내가 한 말을 내가 들었다. 나 말고 아무도 듣지 못했다.

평생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15년 5월 18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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