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나는 저녁꺼리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다. 까마귀 떼가 하늘을 날아 북북서에서 남남동으로 가로질러 어딘가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바깥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관심이 없었고 어떤 사람들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까마귀떼를 보았다. 나는 … 그리웠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까마귀떼를 보았다. 4년만의 일이었다.

저녁 까마귀 떼를 지어 수풀로 돌아가고.
아침무렵 흰 입김은 공중에 흩어지는데.

나는 여기까지 문장을 짓고는 뒤를 이을 연을 떠올리지 못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대신 어딘가의 연습장에 한자로 이어질 문장을 끄적이고는 어딘가에 쳐박아둔다. 언젠가의 내가 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고 그 뒤를 이어주길 바라기로 한다.

어제밤엔 비가 왔다. 불이 꺼진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누웠는데 이상하게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운동복을 입고 러닝을 했다.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었다. 추운 밤, 비까지 내리는데 러닝을 하려고 하다니 나는 나를 제어 할 수가 없구나. 씁쓸한 기분과 함께 코너를 돌고 고개를 들었다.

비다. 비가 얼굴을 때렸다. 빨리도 장갑이 축축해지고 얼굴에 비가 쏟아져 숨은 차가워져갔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처음의 씁쓸한 마음은 가시고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평온에 한없이 가까운,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에 대한 기도를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날의 달리기를 하던 중, 비로소 내가 왜 이 어둡고 외로운 마음에서 낫지 않는가를 깨달았다.

내가 애초에 낫기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거꾸로 반쯤 정신이 나간 이 미친 상태에서 그대로 머무는 것.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긴 기도를 하는 것. 이 길고 긴 밤이 언제까지고 계속되길 바라는 것. 상실을 곱씹고 곱씹어서 이 상실이 내 피와 육신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느린 발구름에 물이 튀어올랐다. 차갑게 식은 빗물이 양말 안으로 들어와 발이 딱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그대로 하얗게 되어 비에 씻겨져 사라져버렸다. 몇 주째 아픈 등은 착지 할 때 마다 나를 불편하게 찔러댔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희미한 환희에 가까웠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내가 그걸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장마철의 개미처럼 젖어서 러닝을 마치고는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잤다. 음악을 듣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주 길고 긴 시간이 지나서 비로소 겨울이 당도한 것이다. 모든 것이 씻겨가버린 후였다.

얼마 전에 주문한 헌팅자켓이 왔다. 황토색에 튼튼하고. 아주 커다랗다. 뜻하지 않게 커다란 걸 산 것이다. 오버사이즈인걸 알았는데 키가 큰 거인 족인 나는 엑스라지 입어야지 하고 샀는데 어깨가 맞지 않을 정도로 크다. 어떻게 입을까 고민하다가 기모후드를 입고 헌팅자켓을 입었더니 그럭저럭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반품해야하나 하고 고민하다가 이 정도 크기면 엘사이즈를 입었어도 나에게 크다. 그래 이건 크게 입는거야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기랄 누가 지적하면 어쩌지 패션을 모르는자야 이건 크게 입는거야 하고 받아쳐야지.

오늘은 추울테니까 싶어서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양말도 따뜻한 걸 신었다. 혹시 몰라 니트 비니도 하나 챙겼다. 혹시 몰라 목도리도 하나 챙겼다. 요즘 뿔테 안경을 쓰고 다니는데 뿔테에 니트 비니를 쓰니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려서 공항 도둑이 나타났다고 자수 할 뻔하였다.

어제 퇴근 길에 잘 쓰고 있던 장우산의 살 하나가 녹슬어서 부숴진 걸 발견했다. 어느날 종로-광화문 어딘가 쯤 비가 너무 많이 오기에 편의점에 들어가 휘릭 산 우산인데도 마음이 안 좋아서 살을 고쳐 쓰기로 했다. 다른 우산을 대신 들었는데 이것도 비가 너무 많이 오기에 그냥 편의점에 들어가서 산 우산이다. 우산을 이렇게 사대니까 부자는 못되겠다 생각이 들어서 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출근을 하려고 나왔는데 눈발이 생각보다 거셌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새벽녘에 정신이 나간 나는 눈을 맞으면서도 러닝을 하려고 나왔다가 얼굴에 부딪히는 눈발이 너무 아파서 5분은 커녕 1킬로미터도 못 달리고 다시 집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산을 쓰고 조심스럽게 걷는데 추워서 웃음이 나왔다. 흐하하 하고 웃었다.

그렇게 겨울이 왔다.


24년 11월, 첫눈이 온 날의 글이다.


카이海에게.

오늘은 비가 내렸습니다. 낮에는 종일 덥다가 저녁이 다 되어 뭐라도 해야할까 싶어서 나서는데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긴 우산을 챙겨서 나서니 11월의 중순이 다 되어서야 가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은 기묘하게 아직 덥고 겨울이 오는 길은 아직 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그랬습니다.

저는 대단치 않은 것들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체로 찍는 것들은 제 주변에 있는 것들 입니다. 정말로 아름답거나 진기하거나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얼굴을 찍지 않게 되는 그 순간 사람은 급격하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누군가가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애초에 자기 자신보다 세상 어딘가에 놓여있는 것에 관심이 많던 저는, 그리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늙은 것 같은 기분도 들지 않습니다. 다만 순간 순간 아름다운 것이 눈 앞에 나타날 때 그것을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정도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나누고 싶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모자른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출퇴근을 하다가도 종종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당신의 생각을 한 것도 어느날 출근 버스를 타고 차창 밖을 쳐다보았을 때 였습니다. 저는 멀리 회색 하늘 배경으로 늘어선 노란 잎의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자.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당신에 대한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산책의 이야기를 하다 말았었죠. 제 산책은 대체로 짧습니다. 근래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만. 혼자서 너무 오랫동안 산책을 하다보면 쓸데없이 수상受傷하고 맙니다. 사람들을 지켜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되면 결국 저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을 해야할 사람도 생각을 해야할 꺼리도 없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러닝을 할 때는 조금 다릅니다. 저에게 러닝은 조금 더 기도에 가깝게 자신의 생각을 몰아가는 행위입니다.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며 상처를 받는 일 따위는 조금도 없이 부족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뛰어오르는 심박을 부여잡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차라리 상쾌한 고행에 가깝다고 하는게 좋겠지요.

오늘의 산책 또한 길지는 않았지만 내내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로등 아래 반쯤 붉어진 단풍나무와 그 단풍 잎 하나하나에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당신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나요? 비가 무엇이고 단풍나무가 무엇인지. 아니면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사실 저도 당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일본어로 고래상어라고 구글에 키워드를 입력하고, 매일같이 뉴스를 검색하고 있습니다만. 5일 전 어느 신문에서 마지막으로 다룬 것을 끝으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커다란 실수가 있었다고 하여도 한낱 물고기가 강바닥에 가라앉아 죽은 것에 대해서 그 누가 진지하게 생각할까만. 마지막으로 다뤘던 기사의 문장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고래상어는 1, 2개월 쯤 먹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좋아서 강 하구에 들어갔을리도 없다…

누군가가 이런 말 장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한 불멸의 존재이다. 무슨 말인지 해석하자면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죽은 세계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며 자신의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우리는 불멸하다. 평행 우주론을 대충 섞어서 말하자면 매일 우리가 죽은 평행 우주가 분기 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우주는 그러한 매일의 죽음의 함정을 피한 우리가 있는 세계이다. 어때요 강 바닥에 누워있는 당신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일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 말인 즉슨, 아무리 위험한 짓을 해도 (예를 들어서 러시안룰렛이나, 단감이랑 게를 같이 먹는다거나, 선풍기를 켜고 잠이 든다거나.) 결국 어딘가의 평행 우주에서는 기적적인 확률로 우리가 끝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계속 유지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어딘가-어딘가의 우주-에서는 당신이 고치현의 바다에서 필리핀의 앞 바다로 나아가서 거기서 조용하고도 힘차게 헤엄을 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요. 그 우주에 제가 살아있을지는 모르는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저는 살풋 잠이 들었다가 바닥에 떨어져 튕겨 나뒹구는 꿈을 꾸었습니다. 추락의 과정을 삭제한 추락의 결과만을 꿈으로 꾼 것이지요. 그 꿈을 꾸고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말 한 적은 없지만, 아주 어릴 때 반 친구들과 함께 지옥에 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상당히 실감나고 꽤나 바보 같은 꿈이었는데. 지옥이라기 보다 어린아이가 생각할만한 “저승”에 가는 꿈이었다고 할 수 있었겠군요. 하여간 여러가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저승의 심판관 앞에 도착하였는데. 평소 생활이 모범되고 착했던 어린이들은 비교적 좋은 곳으로 가고 심술 궂고 생활태도가 좋지 않았던 어린이들은 말 그대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구덩이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저의 경우에는 특이했는데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저승의 심판관은 저와 저의 친구(비슷하게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았던)를 쓰레기통 같은 시꺼먼 구멍에 던져넣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끊임없이 떨어져내려갔습니다. 바닥에 추락하는 일이 없이 말입니다. 아마 끝없는 추락이 제가 받은 형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저승관은 가혹하죠. 애초에 어떤 삶을 살더라도 고통을 피할 길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극락에 간다고 하여도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도 다소간의 고통을 피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끝없이 추락하는 형벌 정도는 아주 자비로운 처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당신을 강바닥에서 들어 당신이 5년간 있었던 수족관으로 돌려보낸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5.9미터에 1.5톤 정도 되는 당신이라면 강바닥에서 들어올리는게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어째서인지 당신을 강바닥에서 들어올린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폭력적인 처사로 생각이 듭니다. 당신을 들어올려서 어떻게 할까요. 바다에 쉽게 놓아줄리는 없으니 자를까요? 해부를 할까요? 뭐가 문제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조각을 낼까요?

일본의 불교에는 구상도라는 특이한 불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의 모습을 차례대로 그리는 그림으로. 풍장하는 모습을 화가로 하여금 그리게 하는가 봅니다. 대개 미인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죠. 자연에 방치된 시신이 어떤 방식으로 부패하고 또 사라져가는지를 차례대로 보여준다고 보면 됩니다.
대체로 제행무상을 형상화한 몹시 불교적인 그림이라고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굳이 미인이 죽은 모습을 주로 그린다는 점에서 가학성의 성향을 지닌 이상한 사람의 취미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애초에 시신이 들에 방치되는 것은 문명사회에서는 일어나기 힘들고.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은 다른 인간이 죽으면 적당한 장례절차를 치르고 죽은자가 산자의 기억 속에서 평화롭게 잠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풍장이란 애초에 적당한 장례를 치르기 힘든 환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거기까지 생각한다면. 당신이 강바닥에서 들어올리는 것을 폭력적인 처사로 생각하는 제 마음은 모순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당신은 무엇을 바랄까요. 아니 무엇을 바랐을리가 없죠. 그냥 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그냥 바보 같은 상념들입니다. 어느 토요일 비가 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던 광언에 가까운 말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마음이 있었길 바랍니다. 그것이 당신의 삶에 더욱 가혹한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당신이 헤엄을 치고 물결을 느끼고 머리 위로 빛나는 해와 사람들의 말들에 용기를 얻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우주에 유일하게 불멸성을 가진 것이 저라는 것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쟁이여서 수족관의 유리를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이 정말로 유리가 아니라 아크릴의 일종인 플라스틱이라고 말 했을 때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두터운 아크릴의 촉감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딱딱하기만 한 것이라고 말 했을 때 저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당신의 세계와 우리를 나누고 있는 것이 얇고 차가운 껍질이 아니라 중량을 지닌 벽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의 마음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저에겐 사람의 마지막 양심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감정 또한 모순이지만 우리가 당신을 쳐다보았을 때 당신도 우리를 쳐다보고, 때때로 증오하고 또 어쩌다 사랑했다고 한다면. 저는 죄책감에 몇 주의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10년 전 쯤(맙소사 벌써 십년이나 되었군요), 뉴욕을 다녀온 친구가 저에게 고래가 프린트 된 캔버스 토트백을 선물해주며 네가 고래를 좋아해서 이걸 가져왔어.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어리둥절해져서 내가 고래를 좋아해?라고 묻자 친구는 어 너 고래 되게 좋아하던데 하루 종일 고래 이야기만 할 수도 있잖아 라고 말하더라고요. 물론 그렇긴 한데.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냐 라고 중얼거려봤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선물을 받으며 고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 고래가 프린트 된 캔버스 백은 아주 오랫동안 제 옷장에 걸려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지 않게 된 후에도 오랫동안 말입니다.

당신은 어차피 고래가 아니고 상어지만. 그게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당신에게 바라기를. 저는 때때로 나 자신 외에 생각을 해야할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종 제가 어두운 물 밑을 생각 할 때. 물고기들의 떼가 햇볕에 가득하게 빛나며 흩어질 때. 해변에 내려와 그 바삭이는 모래를 밟을 때. 파도를 쳐다 볼 때.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바다 끝의 무언가를 보려고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댈 때. 고래의 뼈들이 모인 것처럼 트라이포드가 쌓여있는 것을 구경 할 때. 고독하게 바다 앞에 서서 사랑해야 할 것도 사랑 할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이, 자신을 저주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럴 때.

제가 바다 밑을 헤엄치는 당신에 대해서 떠올리고 말을 걸어도 될까요?

그리고 그것을 당신이 허락한다면. 오늘의 비가 그치지 않는 동안에는 계속하여 당신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24년 11월의 글이다.





이 글은 오늘이 아닌 몇 주 전 노트에 써둔 글이다. 별로 멀지도 않은 일인데. 이 글을 썼던 나도 그 때의 내가 무엇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는지 알 수 없다.
어떠한 추측과 불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그리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뿐이다. 우리가 어색하게 미소 짓는 어린시절의 빛바랜 사진을 볼 때면 느끼는 불편한 감정과 함께 말이다.

글의 가장 위에는 이렇게 써있다. <나는 내 머릿 속의 작은 방에서 나가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나는 내 머릿 속의 작은 방에서 나가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동네의 작은 마사지 가게에서 불균형하게 엇나가버린 어깨를 눌러주시던 안마사 분이 몸에 피부 트러블이 거의 없으시네요. 라고 말했다. 없다고요? 그럴리가요. 하고 웃었는데. 아니요 피부가 깨끗하세요 라고 말하며 어깨를 누르셨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물 정도로 아팠다.

매일 매일 러닝을 하다 보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기도나 명상을 하는 것처럼 한가지 생각에 집중하게 되는데 주로 나는 머릿 속에 여러 사람을 불러내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몸을 움직이는 행위 자체가 그 생각들에 연료가 된다. 내 머릿속의 사람들은 내가 달리는 동안 쉬지도 않고 나에게 말을 걸고 나는 대답한다. 충분히 달리다못해 몸이 노곤해지면 멈춰서서 머릿 속의 사람들이 했던 말을 곱씹는다. 오늘은 뛰다 말고 밤거리를 걸어 돌아오면서 한가지 생각을 계속 했다. 귀가 찢어질 것처럼 엄청나게 큰 기타 소리를 듣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들으시오. 그것이 락 음악의 철칙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볼륨을 이렇게 작게 해서 노래를 들었지.

나는 지금의 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꾸준히 고민해보고 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 아니 생각해냈다기 보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야겠다 - 방법으로 조금씩 시간을 돌려보려고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뒤로 뒤로 계속해서 시간을 돌리는 것이다.

그 방법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달리는 것이다. 밤거리를 달린다 내가 몇킬로미터 정도 뒤로 갔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잠이 들면 꿈을 꾼다. 그렇게 계속해서 밤거리를 달리는 것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가장 먼저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점점 하얗게 되어 갔다. 몸이 가벼워져서 잘 지치지 않게 된 덕에 나는 더욱 더 긴 거리를 더 빠르게 달리게 되었다. 달리기를 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를 어떤 날에 변덕으로 안경 - 알이 없는 그냥 가짜 안경 - 을 사서 썼다. 나는 2020년 정도 쯤부터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 주변 사람들은 안경을 쓴 나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안경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래서 나는 더, 빠르게 달리기로. 길고 멀리 까지 달리기로 마음 먹었다.
체중이 2019년의 체중에서 18년의 체중으로 그리고 계속 뒤로, 뒤로 체중이 줄어가는 만큼 나 또한 뒤로 갔다. 오랜만에 복직한 선배가 예뻐졌네 하고 웃으면서 살을 뺀거야? 라고 묻기에 빠진거에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냥 머릿 속의 방에서 나가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매일 매일 달린 것 뿐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그냥 벌어진 일일 뿐이다.

후배에게 말해본다. 꿈은 너무 편리하지 않나요. 내가 무엇을 원하든 그걸 그대로 보여주잖아요. 선배는 꿈이 원하는 걸 보여주나요? 후배는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다. 그제서야 나는 이상한 것을 깨닫는다. 음, 요즘 저는 그래요 현실은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꿈에서만 내가 원하는 걸 얻게 되요. 후배는 웃는다. 두부 말고 다른 것 좀 드세요. 매일 두부 말고 다른 건 아무 것도 안 먹으니까 그런 꿈만 꾸는거에요.

어느날 꿈을 꿨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두운 건물의 계단을 혼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꿈이었다. 처음에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지 구분이 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동안 작고 속삭임 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불경을 읊고 있는지 아니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 회색의 계단참처럼 잘 구분이 가지 않는 그 중얼거림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어느 시점부터는 점점 커져서 벽에 부딪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외침 같은 것이 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입에서 굉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러닝을 하다가 문득 가을 색으로 변한 나뭇잎을 보았다. 나는 길 한 복판에 서서 울 수는 없어서 다리를 절룩거리며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나가고 싶었던 이유는. 고통이나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속죄 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그 노트는 까맣게 지운 문장들과 썼다가 지운 말들로 가득하다. 그 모든 것을 여기에 쓰는 것은 무리다.
나는 알아 보기 힘든 메모로 노트의 마지막에 이렇게 써두었다.

“우리가 먼지와 물방울, 조각난 한숨과 쉽게 없어지는 무엇이 되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지표로 삼고 어떤 한 곳에 꼼짝 않고 서서. 당신이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당신을 당신임을 알아보고 오지 않는 과거나 도달해버린 미래처럼 생각하며 살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리고. 라고 쓰고 나는 그 노트 페이지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24년 11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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