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海에게.
오늘은 비가 내렸습니다. 낮에는 종일 덥다가 저녁이 다 되어 뭐라도 해야할까 싶어서 나서는데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긴 우산을 챙겨서 나서니 11월의 중순이 다 되어서야 가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은 기묘하게 아직 덥고 겨울이 오는 길은 아직 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그랬습니다.
저는 대단치 않은 것들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체로 찍는 것들은 제 주변에 있는 것들 입니다. 정말로 아름답거나 진기하거나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얼굴을 찍지 않게 되는 그 순간 사람은 급격하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누군가가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애초에 자기 자신보다 세상 어딘가에 놓여있는 것에 관심이 많던 저는, 그리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늙은 것 같은 기분도 들지 않습니다. 다만 순간 순간 아름다운 것이 눈 앞에 나타날 때 그것을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정도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나누고 싶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모자른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출퇴근을 하다가도 종종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당신의 생각을 한 것도 어느날 출근 버스를 타고 차창 밖을 쳐다보았을 때 였습니다. 저는 멀리 회색 하늘 배경으로 늘어선 노란 잎의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자.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당신에 대한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산책의 이야기를 하다 말았었죠. 제 산책은 대체로 짧습니다. 근래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만. 혼자서 너무 오랫동안 산책을 하다보면 쓸데없이 수상受傷하고 맙니다. 사람들을 지켜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되면 결국 저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을 해야할 사람도 생각을 해야할 꺼리도 없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러닝을 할 때는 조금 다릅니다. 저에게 러닝은 조금 더 기도에 가깝게 자신의 생각을 몰아가는 행위입니다.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며 상처를 받는 일 따위는 조금도 없이 부족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뛰어오르는 심박을 부여잡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차라리 상쾌한 고행에 가깝다고 하는게 좋겠지요.
오늘의 산책 또한 길지는 않았지만 내내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로등 아래 반쯤 붉어진 단풍나무와 그 단풍 잎 하나하나에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당신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나요? 비가 무엇이고 단풍나무가 무엇인지. 아니면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사실 저도 당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일본어로 고래상어라고 구글에 키워드를 입력하고, 매일같이 뉴스를 검색하고 있습니다만. 5일 전 어느 신문에서 마지막으로 다룬 것을 끝으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커다란 실수가 있었다고 하여도 한낱 물고기가 강바닥에 가라앉아 죽은 것에 대해서 그 누가 진지하게 생각할까만. 마지막으로 다뤘던 기사의 문장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고래상어는 1, 2개월 쯤 먹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좋아서 강 하구에 들어갔을리도 없다…
누군가가 이런 말 장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한 불멸의 존재이다. 무슨 말인지 해석하자면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죽은 세계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며 자신의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우리는 불멸하다. 평행 우주론을 대충 섞어서 말하자면 매일 우리가 죽은 평행 우주가 분기 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우주는 그러한 매일의 죽음의 함정을 피한 우리가 있는 세계이다. 어때요 강 바닥에 누워있는 당신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일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 말인 즉슨, 아무리 위험한 짓을 해도 (예를 들어서 러시안룰렛이나, 단감이랑 게를 같이 먹는다거나, 선풍기를 켜고 잠이 든다거나.) 결국 어딘가의 평행 우주에서는 기적적인 확률로 우리가 끝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계속 유지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어딘가-어딘가의 우주-에서는 당신이 고치현의 바다에서 필리핀의 앞 바다로 나아가서 거기서 조용하고도 힘차게 헤엄을 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요. 그 우주에 제가 살아있을지는 모르는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저는 살풋 잠이 들었다가 바닥에 떨어져 튕겨 나뒹구는 꿈을 꾸었습니다. 추락의 과정을 삭제한 추락의 결과만을 꿈으로 꾼 것이지요. 그 꿈을 꾸고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말 한 적은 없지만, 아주 어릴 때 반 친구들과 함께 지옥에 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상당히 실감나고 꽤나 바보 같은 꿈이었는데. 지옥이라기 보다 어린아이가 생각할만한 “저승”에 가는 꿈이었다고 할 수 있었겠군요. 하여간 여러가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저승의 심판관 앞에 도착하였는데. 평소 생활이 모범되고 착했던 어린이들은 비교적 좋은 곳으로 가고 심술 궂고 생활태도가 좋지 않았던 어린이들은 말 그대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구덩이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저의 경우에는 특이했는데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저승의 심판관은 저와 저의 친구(비슷하게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았던)를 쓰레기통 같은 시꺼먼 구멍에 던져넣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끊임없이 떨어져내려갔습니다. 바닥에 추락하는 일이 없이 말입니다. 아마 끝없는 추락이 제가 받은 형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저승관은 가혹하죠. 애초에 어떤 삶을 살더라도 고통을 피할 길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극락에 간다고 하여도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도 다소간의 고통을 피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끝없이 추락하는 형벌 정도는 아주 자비로운 처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당신을 강바닥에서 들어 당신이 5년간 있었던 수족관으로 돌려보낸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5.9미터에 1.5톤 정도 되는 당신이라면 강바닥에서 들어올리는게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어째서인지 당신을 강바닥에서 들어올린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폭력적인 처사로 생각이 듭니다. 당신을 들어올려서 어떻게 할까요. 바다에 쉽게 놓아줄리는 없으니 자를까요? 해부를 할까요? 뭐가 문제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조각을 낼까요?
일본의 불교에는 구상도라는 특이한 불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의 모습을 차례대로 그리는 그림으로. 풍장하는 모습을 화가로 하여금 그리게 하는가 봅니다. 대개 미인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죠. 자연에 방치된 시신이 어떤 방식으로 부패하고 또 사라져가는지를 차례대로 보여준다고 보면 됩니다.
대체로 제행무상을 형상화한 몹시 불교적인 그림이라고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굳이 미인이 죽은 모습을 주로 그린다는 점에서 가학성의 성향을 지닌 이상한 사람의 취미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애초에 시신이 들에 방치되는 것은 문명사회에서는 일어나기 힘들고.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은 다른 인간이 죽으면 적당한 장례절차를 치르고 죽은자가 산자의 기억 속에서 평화롭게 잠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풍장이란 애초에 적당한 장례를 치르기 힘든 환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거기까지 생각한다면. 당신이 강바닥에서 들어올리는 것을 폭력적인 처사로 생각하는 제 마음은 모순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당신은 무엇을 바랄까요. 아니 무엇을 바랐을리가 없죠. 그냥 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그냥 바보 같은 상념들입니다. 어느 토요일 비가 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던 광언에 가까운 말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마음이 있었길 바랍니다. 그것이 당신의 삶에 더욱 가혹한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당신이 헤엄을 치고 물결을 느끼고 머리 위로 빛나는 해와 사람들의 말들에 용기를 얻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우주에 유일하게 불멸성을 가진 것이 저라는 것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쟁이여서 수족관의 유리를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이 정말로 유리가 아니라 아크릴의 일종인 플라스틱이라고 말 했을 때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두터운 아크릴의 촉감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딱딱하기만 한 것이라고 말 했을 때 저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당신의 세계와 우리를 나누고 있는 것이 얇고 차가운 껍질이 아니라 중량을 지닌 벽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의 마음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저에겐 사람의 마지막 양심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감정 또한 모순이지만 우리가 당신을 쳐다보았을 때 당신도 우리를 쳐다보고, 때때로 증오하고 또 어쩌다 사랑했다고 한다면. 저는 죄책감에 몇 주의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10년 전 쯤(맙소사 벌써 십년이나 되었군요), 뉴욕을 다녀온 친구가 저에게 고래가 프린트 된 캔버스 토트백을 선물해주며 네가 고래를 좋아해서 이걸 가져왔어.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어리둥절해져서 내가 고래를 좋아해?라고 묻자 친구는 어 너 고래 되게 좋아하던데 하루 종일 고래 이야기만 할 수도 있잖아 라고 말하더라고요. 물론 그렇긴 한데.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냐 라고 중얼거려봤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선물을 받으며 고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 고래가 프린트 된 캔버스 백은 아주 오랫동안 제 옷장에 걸려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지 않게 된 후에도 오랫동안 말입니다.
당신은 어차피 고래가 아니고 상어지만. 그게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당신에게 바라기를. 저는 때때로 나 자신 외에 생각을 해야할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종 제가 어두운 물 밑을 생각 할 때. 물고기들의 떼가 햇볕에 가득하게 빛나며 흩어질 때. 해변에 내려와 그 바삭이는 모래를 밟을 때. 파도를 쳐다 볼 때.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바다 끝의 무언가를 보려고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댈 때. 고래의 뼈들이 모인 것처럼 트라이포드가 쌓여있는 것을 구경 할 때. 고독하게 바다 앞에 서서 사랑해야 할 것도 사랑 할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이, 자신을 저주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럴 때.
제가 바다 밑을 헤엄치는 당신에 대해서 떠올리고 말을 걸어도 될까요?
그리고 그것을 당신이 허락한다면. 오늘의 비가 그치지 않는 동안에는 계속하여 당신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24년 11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