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도 않은 도쿄 여행이었는데. 그 후로 몹시 앓았다. 돌아오는 날은 아침비행기라 낮에 집에 도착해 짐을 정리하고 그날의 러닝을 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날 밤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니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독감도 아니라는데 몇 년에 한 번 정도 있을까 싶게 앓았다. 여행까지 가서 러닝이나 하고 그러니까 아픈게 아니냐고 누가 그랬다만. 생일을 지나고 동짓날을 그대로 침상에서 맞았다. 여독이란 실존한다. 아무리 괜찮다고 생각해도 쉬어야 한다.

이번 생일과 동짓날은 - 내 생일은 대체로 동짓날과 붙어있다.- 한국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에 미신을 믿는 우리의 선조들이 대체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걸로 그걸 대신하려고 했지만 아시아나의 마일리지 비행기표를 적절한 때에 잡지 못해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예상했던대로 생일날 저녁에는 더더욱 열이 올라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할 때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 언젠가는 내 귀 까지 들려올 얘기였는데 왜 하필 내 생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생일이 아니었다면 그걸 피하기라도 할 수 있었다는 건가 싶어서 스스로를 비웃었다. 열이 올라서 제대로 생각 할 수가 없어서 알려온 소식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동짓날에는 거의 굶다시피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 결국 큰일이 나겠지 싶어서 냄비에 아무거나 넣고 아무거나 끓여서는 반쯤 흘리며 먹었다. 따스한 뭔가가 뱃속에 들어가니 그제서야 살 것 같아서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워서는 대낮부터 잠이 들었다. 잠결에 새가 홰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비둘기들이 제법 살고 있어서 가끔 침실 옆 창가에 비둘기들이 쉴 때가 있다. 하지만 한 겨울인데 새가 있을리가 없다. 나는 잠이 들면서 생각했다. 이 겨울에 아파트의 비둘기들은 어디서 겨울을 나는 걸까.

잠에서 깨어나니 이미 해는 지고. 베개 머리맡은 내가 자는 동안 흘린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땀을 왜 이렇게 많이 흘렸지 하고 얼굴을 만져보니 얼굴 또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잠이 든 동안 계속해서 울었던 것 같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모두 다 둘둘 말아서 빨래를 했다. 광화문의 시위가 끝났고. 남태령에 모여있는 농민들의 트랙터 시위를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차를 끓여 마시며 유튜브 라이브를 켰다. 그리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고도 며칠을 더 아팠다. 나는 항상 그렇다 모두에게 모든게 다 끝나고도 며칠을 더 아파한다.

이 24년 12월의 도쿄여행기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들은 것은 윤마치의 <새벽에게>이다.
이 노래의 앨범 커버에는 멋있는 부엉이가 그려져 있다. 나에겐 이 그림이 내가 받지 못한 올해의 내 생일 선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도쿄현대미술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시나가와에선 도쿄 어디든 1시간이지만 도쿄 현대미술관은 멀다. 길고 긴 리노베이션이 끝났는지도 감이 안 잡혔기 때문에 전혀 갈 생각이 없었는데, 전날 순전히 변덕으로 탄 전철 안에 광고판이 있는 것을 보고 간만이니 가보기로 했다. (여행 전에 세운 사전 계획 메모에는 여행 다음날 부터 미술관이 재개장 하는 것으로 체크는 해두었다.)

다른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대충 해두었으니. 전시에 대해서만 쓰고 싶다. 현대미술관의 애뉴얼 전시인 행복의 섬은 퀄리티가 정말 별로였다. 애초에 여기에 기대를 두고 왔다면 화가 나서 티켓을 잘근잘근 씹어먹었을지도 모른다. 컬렉션 전이자 여성 미술가에 대한 헌정전인 Seven beauties in the Bamboo forest 쪽이 질과 양, 양 쪽에서 훨씬 충실하고 보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행복의 섬 쪽이다.

전시의 시작을 보여준 시미즈 유키의 작품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이번 도쿄 여행 중에 봤었던 어떤 작품보다도 아름다웠다. 슬라이드로 촬영한 사진들과 서사, 그리고 음성을 결합하고. 영상을 넣은 시미즈 유키의 작품은 한 1980년 쯤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예술의 하나로 인정받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2020년이고 오히려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흔적들이라는 강렬한 주제로 만든 그의 작품은 그냥 미적으로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래 이것이 현대미술이다. 하고 너무 흡족해서 작품마다 사진을 파바밧 찍고 대체로 영상 작품을 잘 보지 않는 나도 한참이나 작품을 봤을 정도이다.

재료의 질감과 표현에 집중해서 아예 미술관에서 프레스코를 그리고 있었던 카와타 사토시의 작품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깨끗한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방치되어 있다는 이유로 오염된 취급을 받는 “생수병”의 위치에 대해서 천착한 우스이 류헤이의 작품은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현대미술이란 그냥 요즘 만들어진 작품이란 뜻이니까 하고 나름의 인정과 만족을 건방지게 중얼거리면서 지나쳤다.

하지만 마지막 순서이자 위치 상 클라이막스인 쇼지 아사미의 회화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요소를 꾹꾹 눌러 만든 것 같은 작품이었다. 투명한 아크릴판을 지지체로 해서 그린 그 유화는 모든 작가의 소개에서 공통적으로 신체와 신화적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이라고 소개하는데
구상으로서 뛰어난지도 의문이고…본인의 우울과 죽음에 대한 강박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것 외에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기는 한가. 도대체 이 작품이 애뉴얼전의 클라이막스 위치에 있는가 하고 아주 심술궂은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장에 묘한 그림자를 보았다. 어떤 설명도 없고 맥락도 없이 미술관의 높은 천장 위에 얼룩처럼 검은 새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냥 전시회 장을 지나쳐 나가려다가 혹시 내가 놓친게 있나 하고 다시 돌아가 그림 하나를 다시 살펴보려다가 발견한 것이다. 우연하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 명확하게 새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주변을 돌아보니 전시회장 구석의 벤치 위에 쌍안경이 있었다. 쌍안경 위에는 너무나 일본인스럽게 사용한 뒤 다시 자리에 올려놔주세요 라고 메모가 붙어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쌍안경으로 새의 그림자를 보았다.

국립신미술관에 잠시 들렀단 얘기를 어딘가에 썼던가. 그 곳의 아라카와 내쉬 전을 보다가 잠시 샛길을 돌아가니 햇볕이 비추는 곳에 빈백이 여러개가 놓여있었고 사람들이 앉거나 자거나 하면서 쉬고 있었다. 10분만 딱 앉아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나도 빈백에 앉았다가 아이코 사악한 일본인들의 술수구나. 한 20분을 잠들어 있었는데 살풋 깨어나니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내 오른 쪽 옆자리를 손으로 만지며 누군가를 찾았다.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쌍안경을 내려놓고 나는 전시를 떠났다.


<국립과학박물관 (우에노)>

우에노 공원에는 도대체 박물관과 미술관이 몇 개나 있는걸까? 일단 우에노 공원에는 가장 넓은 면적을 우에노 동물원이 차지하고 있고. 도쿄국립박물관이 있다. 전의 여행기에서 쓴 호류지 보물관을 포함해 6개 동과 넓은 정원이 있는 넓은 국립 박물관이다. 그리고 도쿄도 미술관과 모네 전을 했었던 국립서양미술관이 있다. 도쿄문화회관에서도 전시를 하던가? 그건 모르겠다. 우에노모리 미술관 같은 곳도 있지 않았던가 싶은데. 정말 많기도 하다. 그리고 우에노공원에는 내가 한 번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국립과학박물관이 있다.

모네전을 보려고 우에노역으로 왔더니 보기도 좋게 개찰구에 기세도 좋게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새>특별전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보기도 좋게 노란색 배경에 각종 새들로 가득한 (뒤에 알았지만 전부 전시품이었다. 박제였던 것이다) 사진이 있고 일생동안 볼 분량의 새를 볼 수 있는?! 특별전 이라고 써있었다. 정말이다. 기세가 너무 좋아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의 3시간 이상을 계획에도 없는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쓰게 되는데 결말만 먼저 말씀드리자면 어마어마하게 충실한 쓸데없는 시간이었다. 일단 특별전의 이야기는 둘째치고 국립과학박물관 자체가 온갖 과학에 관련된 교육으로 가득차 있는 곳이라서 같은 속에 속한 나비들의 표본들을 있는만큼 전부 벽면에 전시해둔다거나. 같은 종 쥐들의 색에 따른 차이를 비교해두고. 해양표유류들의 뼈들을 천장 가득하게 전시해두고 (대왕오징어의 표본까지 뒀더라고…) 우리가 상상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현생 포유류들의 박제들을 전부 거대한 한 전시실에 모아두고 사람들을 쳐다보는 구도로 진열해두었다. 분명 모형이겠지만 공룡 뼈까지 박진감있게 전시해둬서 나는 지치고 힘들고 지겹고 근데 안 볼 수는 없어서 거의 울먹이며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전시실을 돌았다. 동물의 숲에서 나오는 박물관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던 컨셉인건지 알 수 있게 된 기회였다…결국 나중에는 일본의 잠수함 모형 앞에서 아 이제 됐어 과학 기술 따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하고 심술이 날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지쳤지만 말이다.

지금도 글을 쓰며 - 내가 찍은 - 해양 공룡류들을 박진감 넘치게 천장에 매달아 둔 사진을 보고 있는데. 이 곳이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메세지는 인간 존재의 하찮음과 자연의 거대함인 것 같다. 추가한다면 그 거대한 자연에 과학의 힘으로 비벼보아요 예헷!! 이 정도랄까. 내가 어릴 때 이 곳에 왔다면 너무 좋은 나머지 기절도 하고 네네 꼭 과학자가 될게요 하고 피의 맹세도 했을 것 같은데. 다행히 중년의 나이에 이 곳에 왔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너무나도 충실하고 쓸데 없는 시간이었다. 상설전만 보는 것만으로도 8시간 정도는 여기서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뼛속까지 이과라서 천체물리학이나 원자력이라도 연구하는 사람이랑 왔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틀 정도는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입술이 파랗게 될 때 까지 밥도 안 먹고 하나하나 구경했겠지.

특별전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새”가 주제였다. 특별전이 하고있는 전시관의 지하로 내려가면서 평일이라 사람이 많진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특이한 주제야 그렇게 내용이 많진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엔 넓고 넓은 특별 전시관에 전시물이 가득 차있고…무엇보다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일본에 이렇게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단 말인가. 걷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다들 진지한 얼굴로 새의 박제 같은 것을 쳐다보면서 메모도 하고 사진도 찍고 있었다. 그 전시에 아무 생각 없이 껄렁껄렁한 마음가짐으로 온 것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여러분은 모든 종류의 새의 형태가 균형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중심축을 기준으로 흔들리지 않게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하지만 깃털은 비대칭이어야 양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날 수 있는 새들은 비대칭의 깃털을, 날지 못하는 새들은 대칭의 깃털을 갖고 있습니다. 새라고 한다면 날 수 있는 것이 전제처럼 여겨지지만 대멸종의 시기에 살아남은 수각류의 일부인 새들은, 크지 않다는 특징 덕분에 살아남은 공룡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서 새의 중요한 특징이 이빨이 대부분의 종에서 퇴화되고 부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부리가 이빨보다 훨씬 변형이 쉽게 적은 에너지로 생성 될 수 있으며 심지어 같은 종 안에서도 여러가지 모양으로 분화될 수 있어서 적응에 유리한 특성으로 여겨집니다. 먹이를 거의 가리지 않는 것도 새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흔히 비어있다고 알려져있는 새의 뼈 안도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일 뿐 정교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새가 어느 순간 비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적응의 결과와 같은 것이고 실제로는 작아지고 빨라지는 과정에서 생긴 특성일 것이라 말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런 비행의 결과로 인해서 새들은 먹이 다툼에서 유리해졌고 높은 대사율과 높은 산소이용률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보통 같은 크기의 동물의 비슷한 수명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새들은 포유류보다 훨씬 높은 수명을 가지는 경우가 많게 되었습니다.

나는 대체로 아무거나 다 알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나도 이런 새에 대한 매니악한 정보를 단시간내에 마구 익히니까 조금 멍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매 종류가 수리류 보다 앵무새류에 유전적으로 가까운 친척이라는 정보라든가 특정한 종류의 참새 종류는 일부일처제지만 실제로 유전자를 확인해보면 자식이 부부사이의 낳은 자식일 경우는 40%가 되지 않는다는 정보 같은거 말이다.

그런 유익한지 안 유익한지 헷깔리는 정보 사이에, 전시측에서는 페라고르니스(존재가 확인된 새 중에서 가장 큰 새로, 추정된 최대 길이가 7미터 정도 된다. 그냥 진짜 공룡만하다.)의 재현 박제를 천장에 매달아 놓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두었다. 나도 너무 유쾌해서 부리 사이에 뾰족뾰족한 것이 달려있는 모습을 확대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굳이 저건 치조골이 없기 때문에 이빨이 아니라 그냥 이빨처럼 보이는 부리라고 설명을 해두었다. 과학자놈들은 철저하군 감사합니다.

전시의 대부분은 새들의 박제였다. 우리가 상상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새들의 박제가 있고. 대체로 새들의 박제들은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고 무심하게 우리는 볼 수 없는 과거를, 혹은 누군가의 앞에 있는 내세를 바라본다.

나는 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새들은 대체로 너무 뜨겁고 작으며 부서질 것 처럼 약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파트였던 내 어릴 적 집에 거대한 새장을 만들어 거기서 앵무새를 포함한 새들을 길렀다. 내 방 바로 창 앞에 있었던 그 커다란 새장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이면 새들이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문조와 카나리아, 왕관앵무.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새들. 나는 높이가 2미터, 바닥 면적이 3제곱미터는 넘지 않았을 그 작고 커다란 새장에서 살고 있는 새들에게 어떠한 애착도 느끼지 못했다. 새는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었고 아버지는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슬프기 짝이 없는 새들의 사회를 지켜보는 왕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정말로 새를 사랑했는지 아니 아버지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 여러번 의심하곤 했다.

나는 그래서 새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다. 그들이 겁을 내고 도망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애도하는 모습을 내 방 창가에서 보았다. 내가 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표정이 없어 보이는 그들의 얼굴과는 다르게 그 작은 몸 속에 우리가 영혼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 한 명 분의 영혼이 새 한 마리에게도 똑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당신은 새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을까? 새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시의 중간. 나는 한 앵무새의 박제를 보았다. 먼지처럼 푸석해져가고 있던 어떤 커다란 앵무새. 나는 어째서인지 그 앵무새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회색의 깃털 안에 검은 유리로 대신한 그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앵무새가 나를 여기로 불렀다는 비상식적인 생각을 하였다.

나는 네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냐. 그렇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부른거겠지. 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리인으로서 그 앵무새의 박제 앞에 서는 것이 나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앵무새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 냄새를 맡고 내 눈을 쳐다보고 내 슬픔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모든 앵무새들이 그런 것처럼 그 앵무새의 박제는 나에게서 흥미를 잃고는 고개를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러니? 나는 묻고 싶었지만 애초에 박제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무언가의 흔적일 뿐이다. 나는 시간을 더 들여 더 많은 새들의 박제를 살펴보고 곧 다른 곳으로 떠났다.

공룡의 뼈들을 모아둔 전시관은 말도 안되게 멋이 있었다.


이걸로 나의 24년 도쿄 여행기는 끝이다.

오늘 아침 체중을 재보니 더 줄어서 앞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하얗고 지친 얼굴을 한 남자가 보였다. 바싹이라고 할 정도로 빠르게 말라가고 있는데 내가 나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실제로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다만 나는 세상의 작은 곳에서 다른 작은 곳으로 가는 것이 필요했다. 당신을 잃어버리는 여행이 되었어야 할 이 여행은 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음악을 좋아하며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의미도 없이 세 권씩 들고 여행을 가는 사람이며 카페 테이블에 앉으면 공룡과 로봇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계란 후라이는 써니사이드 업. 오믈렛은 플레인이 좋다. 여행을 가면 신발에 구멍이 날 때 까지 걸어다니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신발 하나를 버렸다.

좀 달라지기로 한 것도 있다. 바지가 좀 비싸더라도 마음에 드는 바지면 꼭 사기로 마음 먹었고 러닝을 할 때는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지 않기로 했다. 짐에 티셔츠를 적당히 싸기로 했고 기내 사이즈 캐리어만 고집하지 않기로도 했다. 가끔 그냥 이유 없이 여행 중에 낮잠을 자기로 했다.

그리고 새들과 화해했다.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나는 이제 새를 싫어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부디 새들도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새들은 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로 잠이 들기 전에 새 소리가 들리길 기다릴 때가 있다.

세어보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세 군데의 성지를 들렀다. 마사카도의 묘, 죠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도쿄 카테드랄이다. 탄게 겐조의 건축 미학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갔을 뿐인 도쿄 카테드랄이었는데. 대성당의 뒷자리에 앉자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나의 기도는 그러했다. 제가 당신 앞에 서게 될 때 조차 거짓과 불의로 서지 않게 해주소서. 나는 내가 무엇을 비는지 제대로 모르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유일한 친구인 당신은 내가 정말로 무엇을 위해 그런 기도를 했는지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24년 12월 28일의 글이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깃들지만. 때때로 장소야 말로 사람의 마음이 깃들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번 이야기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쓸까 싶어서 고민하다가 nujabes <Modal soul>을 올렸다. 시부야에 가보니 누자베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았다. 타워 레코드의 한 켠에는 그의 LP가 가득 쌓여있었고 어떤 가게에서는 앨범 이미지를 프린팅한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무슨 시부야 전통 민요 같은게 된건가 하고 빈정거리기는 했다만. 이해해주기 바란다 내 20대의 가장 소중한 순간 중 일부에 그가 있었다. 아마 그가 평생 그리울 것이다.

Gregorio Allegri가 작곡한 Miserere, Mei Deus를 듣는 것도 어울릴 것 같다. 시편 51편을 주제로 만들어진 성가이다.

<타니구치 요시오>
우연히도 내가 일본에 체류하는 도중 건축가 타니구치 요시오씨가 사거하셨다. 그의 아버지인 타니구치 요시로씨도 유명한 건축가로 다름 아닌 제국극장의 로비와 객석을 아름답게(그리고 불편하게) 설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또한 우연히 동선이 겹쳐서 이번 체류 기간 동안에 방문하였다. 황궁런에 대해서 썼을 때 저 건물은 누구의 설계일까 하고 궁금해져서 가봤다는게 바로 이 제국 극장이다.)

타니구치 요시오씨 본인은 캐릭터성을 두드러지지 않으나(말이 별로 많지 않다는 뜻이다), 뉴욕근대미술관 신관의 설계를 중정을 포함해 뛰어난 퀄리티로 해낸 것에 대해 유명세를 얻었고. 세련된 모더니즘 건축을 기반으로 한 미술관 설계는 정평이 나있다. 내가 그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도쿄국박의 호류지보물관이었는데 얕은 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작은 다리를 건너야 갈 수 있는 이 별관은 입문 조차도 정면이 아닌 옆으로 돌아가야 하는 특이한 구조이다. 또한 외곽을 둘러 싸고 있는 원형기둥들은 밖에서 보물관 안을 바라보는 것과 보물관 안에서 밖으로 바라보는 것 양 쪽에 기묘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과장을 좀 섞어서 말하자면 자연에 존재하지 않을 관념상의 직선과 투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물아일체의 장소라고 설명해도 좋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보물관을 보는 바로 그 순간 마음에 들었다.

풍부한 조광을 바탕으로 한 자연스러운 직선을 추구하는 점에서 묘하게 마음에 든다 싶었더니 교토국박의 남문과 헤이세이 신관도 그의 설계였다. 그는 탄게 겐조 건축 사무소에 한 때 적을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행기랑은 관련이 없다만, 왠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써두고 싶었다.



맛있는걸 먹지 않으면 여행은 단조로워진다. 뭘 먹어야지 어떻게 먹어야지 하고 고민하는게 여행의 절반 쯤은 될텐데 요즘 부쩍 식욕이 없는 나는 뭘 먹을 생각을 하지 않다 보니 여행의 컨텐츠가 몹시 단조로워졌다. 내가 여행을 가기 전에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던게 미스터 도넛의 도넛과 낫토를 넣은 흰죽이었는데. 흰 죽이야 그냥 호텔 조식 부페로 먹으면 되는거고 미스터 도넛은 지나가면서도 몇 번 씩 봤지만 귀찮아서 먹지 않았다. 지금 또 하나가 생각났다 맛 없는 나폴리탄을 먹어야지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내가 여행 중에 굳이 쓸데없이 찾아가봤던 건축물에 대해서 몇 개 적어두려고 한다. 건축물을 찾아가본다는 건, 애초에 별로 좋은 여행 컨텐츠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애초에 전문가도 아니고 유명한 미술품이나 공공기관이 아닌 한 자기 맘대로 들어가 볼 수 도 없는데. 멀리서 찾아가봤더니 외관 사진을 몇 장 찍고 끝낸다? 맙소사 정말 가성비가 안 좋은 여행 컨텐츠 같다. 공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겉에서 사진이나 좀 찍는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닐텐데 말이다.

<죠죠지>
죠죠지는, 이름만 들어도 죠죠러의 가슴을 끓게 만드는 이 곳은. 사실 1393년에 창건된 일본 정토종의 총 본산이다. 도쿠가와가의 가문 사찰로도 유명했던 이 절은. 2차 세계대전때 폭격으로 소실된 도쿠가와 가묘를 일부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관광객으로서 이 절에 대해서 말할 것은…없다. 단지 도쿄타워의 바로 아래에 있는 절이기 때문에 도쿄타워의 사진을 찍으면 엄청나게 멋있게 나온다. 그 외에 도쿠가와 가 묘로 들어가는 입장료가 500엔인데 개인적으로 에도막부가 너무 좋고 그런게 아니라면 보지 않는 걸 추천한다. 유명 관광지가 아닌 것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도쿄에 살고 있는 친구가 말했다.
애초에 여러분 대부분은 내가 죠죠지에 대해서 썼기 때문에 그런 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화려하고 돈이 많은 이 번화가 한가운데의 절이 쓸쓸한 이유는 어쩌면 절 경내 한 쪽 구석에 마련된 좁은 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길의 한 쪽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공양해둔 작은 미륵보살의 석상들이 줄을 이어 놓여있다. 석상들이 진짜 아이들이라도 되는 듯이 그 앞에는 바람개비가. 머리 위에는 털모자가 씌워져 있다.

<주일본 쿠웨이트 대사관>
시간 순서 상으로는 상당히 뒤에 방문한 곳이긴 하지만. 이 곳은 경사도도 높은 히지리자카(고개) 중간에 세워져 있는 이 동네의 명물 쿠웨이트 대사관이다. 설계는 다름아닌 탄게 겐조.
이 건물의 외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히지리자카를 올라가다 보면 따분해 보이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있다. 분명 따분해 보이는 직사각형의 건물인데 밑에서 보면 이상하게 건물이 공중에 떠있는 듯 하게 보인다. 어떻게 된거지 하고 헉헉 거리며 고개를 올라 가까이 가보면 베이스먼트와 로비층은 여느 건물과 다르지 않지만 3층 이상의 공간은 중간을 일부러 공백으로 지우듯 계단과 기둥으로만 이어두었으며 이렇게 바깥으로 공개된 땅에는 정원을 만들어두었다. 가장 큰 중앙부의 공백에는 자랑스럽게 쿠웨이트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구글에 검색을 해보기 바란다. 진짜 이상하다니까.

<국립 요요기 경기장>
이 또한 탄게 겐조의 설계이다. 그래서 제목에도 썼지 않은가 이것은 탄게 겐조를 찾아다니는 모험이라고.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굴곡진 용마루와 나선형의 지붕에 대해서는 이 경기장에 대해서 묘사하는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이지만.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고 찾아보니 1체육관의 경우 높은 장력을 이용해 매달림 지붕 방식을. 2체육관의 경우엔 원추형 천장을 통해 만들어진 절구형 건물이라고 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진 이후로 현재까지 현역인 이 경기장은 21년에는 국가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데. 하라주쿠를 갈 때 마다 보이는 이 경기장에 굳이 시간까지 들여서 방문한 이유는 역시 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때는 무슨 종합 격투기의 챔피언 전이 하는 중이라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하튼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장엄한 이 경기장의 모습은. 국가 대항전이야 말로 현재의 종교의식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각 격투가들의 팬들이 밖에서 오오 우오 하는 함성을 지르고 있어서 그 쪽에 신경을 쓰지 않고 구경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경기장 꼭대기부터 사면으로 내려가는 천장 곳곳에 새들이 앉아있는게 인상적이었다. 마침 석양이 질 때라서 날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너희들이 패배자들의 간을 쪼아먹는거겠지 하고 마음 속으로 말을 걸어보니 엄청나게 멋진 모습으로 편대를 지어 경기장을 한 바퀴 돌고 그랬다. 그래 믿고 있었다구.

<도쿄현대미술관>
내가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꽤 오래 전이라서 리뉴얼 작업이 완료되기 전이었는데. 리뉴얼 작업을 도대체 누가 한거지 하고 찾아보니 조 나가사카였다. (원래 건물의 설계는 야나기사와 다카히코)
아니 조 나카사카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나름의 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검색해봤는데 건축은 뺄셈이다 어쩌고 말을 한걸 보니 새삼스레 타니구치 요시오가 뉴욕근대미술관 신관을 설계 할 때 돈만 많이 주시면 건물을 아예 없애드릴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한게 떠올라서 그가 그리워진다.

도쿄현대미술관, 도쿄신미술관, 교토국박 등 최근의 일본 미술관은 어떠한 트렌드를 확실히 보여주는데 밝고 확장되어 있는 로비 공간. 빛을 충분히 받아들여 관람객들에게 휴식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하는 통로를 구성하고. 건물의 반 정도를 써서 전시실을 구성한다. 전시실이 너무 좁아지지 않을까? 상설전시보다는 특별전을 위주로 구성하는 일본의 최근 미술관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은 되지 않는다. 미술관은 길쭉해지거나 네모나지기보다는 가로로 긴 형상이 되는데 사람들은 공간에 대한 만족감 때문에 전시가 아무리 별로였어도 좋은 체험이었어 하고 만족하게 된다. 너무 비열하게 공격했나.

내가 위에 설명한 모든 것을 갖춘 바로 그곳 도쿄현대미술관은 공원의 한 쪽 끝에 위치해있다는 것 까지 해서 완벽한 가족들의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다. 지하에 아트 식기를 갖춘 패밀리 레스토랑을 갖춘 것까지 완벽해서 불만의 여지가 없다.

지하로 이어지는 길에는 물과 돌의 산책로라고 하여서 그야말로 징검다리 비슷한 것으로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는데 바깥에서는 볼 수 없는 숨겨진 장소같은 곳이라서 직접 가지 않고는 그 전모를 알 수 없게 해두었다. 풀이 없는 정원이구나 하는 느낌이라서 제법인데 조 나가사카! 같은 감상을 갖고 찾아보니 거긴 야나가사와 시절부터 있었던 장소라고 한다. 음 그렇구나.

참고로 2층의 카페는 영 별로였다. 점원이 엄청 많았는데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이런 생각만 든다.

<도쿄 주교좌 세키구치 대성당>
1899년 처음으로 지어졌던 도쿄 주교좌인 이곳은. 도쿄 대공습때 소실 1963년도 독일의 쾰른 교구의 지원으로 지금의 건물로 다시 지어지게 되었는데. 도쿄 대학 음향기사와 구조기사의 지원이 있었으며 설계자는 단게 겐조이다.
이곳이 내 여행의 목적 중 하나였던 이 곳은 성마리아 대성당이라고도 불리운다.

어느 곳을 가든지 전철이 쉽게 이어지는 도쿄 내에서 굳이 버스를 타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곳에 위치한 이 성당은, 현재 도쿄의 한인 성당 역할 또한 하고 있다. 성당을 찾아가려고 했던 날이 한국에서 탄핵 표결일인 12월 14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꽤 초조한 상태였는데. 도대체 이 딴 경기장이나 절을 찾아가보는게 무슨 의미인가 술이라도 사서 호텔방에 기어들어가서 유튜브나 보는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다. 그래 도쿄 카테드랄은 성당이잖아 기도라도 하자 - 라는 내 나름의 유머감각으로 하라주쿠에서 전차를 탔다. 플랫폼에 서서 유튜브의 실시간 뉴스 생방을 들었다. 어째서인지 내가 선택한 eSIM는 어째서 지하철에서 인터넷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전철에서 내리니 저 멀리 다리 너머 석양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토요일의 저녁이다. 사람들은 바쁘게 어디론가 떠난다. 대부분 집일 것이고 대부분은 가족들의 곁일 것이다. 집도 가족도 없는 나는 성당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여행을 떠나 오기 전 친한 사람들에게 이번주는 시위 못 나간다 라고 말하고는 꼭 한마디 농담을 덧 붙였다. 나 없는 동안 탄핵 가결 좀 시켜둬라. 누구는 그러마 했고 누구는 너무 어려운 걸 바라는거 아니냐고 했다만. 그게 농담만이 아니라는 건 다 알고 있었다.

버스에 내리니 정류장 앞에는 주교좌에서 만들어둔 걸로 보이는 작은 동방박사와 그보다 더 작은 아기예수, 그리고 마리아의 인형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서 하늘을 보니 나무 끝에 걸린 구름, 겨울의 저녁 하늘이 보였다. 아직도 해는 지지 않았다.

세키구치 대성당은 한국의 대형교회랑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작은 부지에 있는 성당이다. 도쿄 전체를 총괄하는 곳이 이 정도로 작은 곳이어도 될까, 요요기경기장의 4분의 1이나 될까 하고 전체 부지를 가늠하다가 내가 한국 교회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서 쓴 웃음이 나왔다.

본성당은 멀리서 보기엔 은색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방주처럼 보인다. 배처럼도 보이고 책처럼도 보이는 이 건물이 1963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건물이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원형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도로 알려져 있는 탄게 겐조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이 건물을 설계하였는데. 그의 묘한 유머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성당 건물에서 그가 정말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바로 전에 본 것이 요요기 경기장이었기 때문에 비교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짜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국가 규모의 스포츠 대회란 왜곡된 열정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거 설계한 건물 중 가장 유명할지도 모르는 신주쿠의 도청 건물 - 많이 본 건물이기 때문에 이번엔 굳이 가보지 않았으나 - 에서 느껴지는 장엄한 차가움은 그가 국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어렴풋하게 추측하게 해준다. (1청사의 외양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모티브를 많이 따왔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이 그의 비틀린 유머감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성당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봐야 한다. 오후 5시에까지만 일반에 공개되기에 아슬아슬하게 4시가 되기 전에 도착한 나는 고갯길을 거의 뛰어올라 성당에 도착하였는데. 나도 모르게 숨이 차서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성당의 문을 열었다.

성당의 안은 어둡다.
사무실에서는 몇명의 수녀와 봉사자들이 일하고 있지만 성당에 들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곳은 넓지도 좁지도 않으며 의자들로 가득차있다. 경내는 어둡지만 아주 어둡지는 않다. 눈이 어두운 사람도 충분히 사물을 인식 할 수 있을 정도로는 밝아, 나는 당 내의 가장 뒷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아서야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이 곳은 석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좁고 어둡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다. 제단은 저 앞에. 희미한 조명은 제단 위의 십자가를 비추고 있고. 십자가 위로 각이 진, 자연에서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직선. 그 회색의 벽이 석굴의 모습이 되어 그 위에 놓여있다.

Averte faciem tuam a peccatis meis et omnes iniquitates meas dele.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돌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없애 주소서.
Cor mundum crea in me, Deus, et spiritum firmum innova in visceribus meis.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Ne proicias me a facie tua et spiritum sanctum tuum ne auferas a me.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나는 성당에서 1시간 동안 기도를 하는 사람처럼 앉아있다 친구가 보낸 탄핵이 가결되었다는 메세지에 일어나 성당을 나갔다.
5시를 넘기고도 성당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던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24년 12월의 글이다.


다음은 내 티스토리에 비공개로 게시되어 있는, 지추 미술관에 관한 글의 일부인 모네의 수련에 대한 글이다. 17년 1월의 글이고 나는 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서 쓰다 마지막 결론을 내지 못하고 글을 닫았기에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해도 괜찮을 듯 하다.

(2)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수련Warter lilies

바닥이 이상하다. 흰색의 작은 (일반적인 주사위보다 작은) 정사각형으로 바닥을 깔았다. 물 빠짐과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것 일까. 습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까. 신발을 벗고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습기가 가득찬 공간에 있다는 착각이 든다. 그렇다 그것은 착각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 습기란 작품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는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한 공간에 있다는 착각은 작품 앞에 서있는 때 더 강해진다. 모네의 수련. 늪의 표면에서 터져나온 색과 생명.

전시 공간 안에 수련 다섯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이즈에 따라 배치 한 것인지 뒷면 양쪽에는 100*200의 작품이. 양 옆에는 200*200의 작품이. 그리고 정면에는...200*300의 두 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걸려있다. 압도적인 이미지. 물기가 하나도 있을리 없는 공간에 느껴지는 습기. 높은 천장으로 소리가 난반사되어 울린다. 들릴리가 없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수련이란 원래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었던가. 어쨰서 이렇게 거대하고 무질서하며 깊은 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늪으로 가득한 이 전시공간에서 수련이라는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혼돈이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그 혼돈에서 터져나온 생명이다.

사실 나에게 이 작품은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 지추 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이 수련을 보기 위해서 였다. 같은 여행에서 오하라 미술관의 수련을 보았지만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동양화를 전공하였는데 몇 안되는 서양화 그림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같은 그림이 식탁의 내 자리에서 보이는 곳에 걸려 있었는데 검은 밤과 숲을 그려넣은듯한 그림으로 항상 아무도 이 그림의 윗쪽과 아랫쪽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농담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수련을 몹시 닮았다.


모네의 그림을 그리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때때로 그리워 질 때가 있다. 그것은 모네에게 느끼는 그리움이라기 보다는 내가 어릴 때 부터 가장 많이 봤던 최초의 회화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이번 도쿄여행의 계기는 우에노의 서양미술관에서 하는 모네전에 수련 중 몇 점이 온다는 기사를 본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말을 꺼내보았지만 그 때 이미 나에게서 마음이 떠나있었던 여자친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간다고 하면 겨울 쯤이 되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어떤 변덕으로 나는 도쿄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혼자였다.

6일짜리 여행이었지만 실제로 여행이 가능한 일정은 4일 뿐이었고. 미술관의 휴일을 생각하면 그래도 인파를 피해서 관람을 할 수 있는 날은 금요일의 낮시간 잠시 뿐이었기 때문에 모든 일정은 수련을 보기 위한 일정을 먼저 정한 후에 하나씩 정했다. 아메카지를 하려고요. 러닝을 하려고요. 라고 말했지만 그건 모두 거짓말이었다. 나는 단지 한 점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여행을 왔다. 그 그림을 볼 수 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요즘 그릇이 깨져버린 사람처럼 자주 슬퍼하고 쉽게 화를 낸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질 때 마다 밖에 나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면서 러닝을 하고 긴 문장을 읽지 못하게 되어 불을 끈 채로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를 한다.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는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소원을 빌지 않기 위해서 너무 슬퍼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기도이다. 사람들은 세상 어디엔가 기도를 들어줄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말들을 한다. 자신의 말을 들어줄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영혼에 구원이 된다. 기도를 하는 행위 자체가 그 영혼을 위로한다. 하지만 나는 가끔씩 변덕스럽게 기도를 할 때 마저 거짓말을 한다. 그저 평화를 바란다고.

그렇게 거짓말쟁이가 되고 있기 때문에 바싹마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엔 식욕이 별로 없어요 라고 웃으면서 말을 하지만, 며칠 예전처럼 먹어보았는데도 살은 찌지 않고 그대로 세상 어딘가의 구멍에 떨어진 것처럼 체중이 다시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먹는 것은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그냥 눈 앞에 있는 것을 먹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여행에 와서도 무언가를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아무 것이나 먹었고. 야채가 부족한데 싶어서 호텔 조식을 두 번 먹은 것 외엔 정말 되는대로 먹었다. 커피? 향이든 뭐든 상관없이 커피면 그냥 아무 거나 먹었다. 제대로 된 커피는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여행 사실 상의 첫날 금요일. 황궁런을 뛰고 애플워치까지 사고 나니 배가 고플 만 했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우에노로 향했다. 아침에 호텔 조식을 성의있게 먹었기 때문이다. 흰 쌀죽에 명란젓과 낫토를 듬뿍 넣고 슬슬 비벼서 먹는 것이 내가 일본 호텔에서 제일 좋아하는 조식이다. 계란 후라이(써니사이드 업이어야 한다)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우에노의 서양미술관은 내가 언제나 좋아하는 곳이다. 미술관의 카페 겸 레스토랑 스이렌(그렇다, 그곳의 이름 또한 수련이다.)은 풍광이 좋아서 한가할 때 가면 기분 좋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를 보고 그곳에서 밥을 먹어야지 하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가을. 12월이 되었는데도 도쿄는 가을 같았다. 도쿄 사람들 나름의 고충이 있었겠지만 나는 바람이 쎄지도 춥지도 않은 12월의 도쿄가 마음에 들었다. 황궁런을 이미 한 번 해봤기에 방한 도구를 꽁꽁 싸매지 않아도 러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이 정도 날씨라면 매년 12월에는 도쿄에 와서 달리기를 해도 되겠어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우에노 공원은 언제나처럼 사람이 많았고 사람보다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은행잎들과 융단처럼 깔린 은행잎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떼를 지어 개찰구에서 쏟아져나왔다. 저 때는 뭘 해도 친구들과 함께라면 즐거울 시기이다. 나는 좀 외따로 떨어져 가방에 넣어둔 책을 읽을 생각이나 하던 아이였지만 그래도 친구들이랑 있는게 싫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우르르 어딘가로 향한다 서양미술관의 모네전 보다는 국립과학박물관에서 하고 있는 조류에 관한 특별전이 목표인가보다. 나도 저 전시는 꼭 보고 싶다.

아침에 편의점에서 티켓을 미리 사뒀기 때문에 줄을 서지 않고 수월하게 입장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네 전이 도쿄에서 개최 후 내년부터는 교토에서 또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아버려서(편의점의 예약 티케팅 예약 리스트에 떠있었다.) 내가 왜 기를 쓰고 여길 이 시기에 왔는가에 대해서 회의가 잠시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괜찮겠지. 미술관 앞에 웨이팅을 위한 배리어를 설치해둔게 말도 안되게 긴걸 보고 내가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기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좁지도 않은 서양미술관의 앞마당에 구불구불하게 줄을 설 수 있는 곳을 만들어두었다.

* 혹시 모르니 써둔다. 도쿄의 서양미술관에서의 전시는 25년 2월 11일 까지이고, 교토의 교세라미술관(아이구)에서 25년 3월 7일부터 6월 8일까지. 그리고 도요타시미술관에서 6월 21일부터 9월 15일까지 전시가 이어진다.

사람은 적지 않았지만 모네 전 관람은 1시간을 조금 넘겨서 다 볼 수 있었다. 모네 전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아는 모네이고. 당신도 모네에 대해서는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전시에 대해서 코멘트 하자면 전시품은 충실했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작품들로 잘 구성되어 있었다.

5개인가로 나눠져있는 전시 중에 해외에서 가져온 작품들을 모아둔 3전시의 작품들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두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보존의 목적이 아닌 이상 작품의 사진 정도는 마음 껏 찍게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3전시실에 이르자 사람들이 모두 작품을 보지 않고 온 힘을 다해서 사진만 찍고 있는 것을 보자 생각을 바꾸었다. 나도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하지만 위대한 회화를 볼 때 마음 속에 남는 그 충격과 감상이야 말로 회화를 보는 진정한 보상일텐데 사진을 찍어서 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으면 그 회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가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여간. 아무렴.

전시를 다 보고서는 서양미술관의 상설전을 보았다. 훌륭한 작품이 꽤 많다. 교과서에나 있는 그런 작품들도 있어서 나는 꼭 상설전을 챙겨본다. 다 보고 나니 힘이 쭉 빠져서 미술관 굿즈를 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모네 특별전 굿즈들은 모두가 사고 싶어했는지 굿즈를 사러 입장하는 줄이 미술관의 중정부터 이어져있길래 포기하고 상설전의 굿즈를 조금 샀다. 엽서와 마그네틱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는 기대하던 카페 스이렌으로 가서 파스타와 커피를 시켜서 먹었다. 모네 특별전을 기념해서 뭔가 웃기는 특별 메뉴라도 있을줄 알았는데 만날 나오는 그 뭐냐 파스타+디저트+커피의 세트가 전부였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리 싸지도 않는 세트인데 좀 웃기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문득 교토국박에서 마신 블렌드 커피 류노스케가 생각났다.
자리는 어디에 앉아도 미술관의 중정이 잘 보인다. 공항에서 사온 메모장에 러닝을 할 때 봤었던 큰부리 까마귀의 그림을 그렸다. 까마귀들은 지성을 가지고 사람을 쳐다보는 것이 제법 무섭다. 하지만 그 까마귀는 내가 뭔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날아가버렸다. 왜?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눈이라도 쫄 생각이었던거야?


모네의 전시를 보던 중, 어떤 그림 앞에서 나는 울었다. 나라는 그릇이 깨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쉽게 우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울었다는 말에 몹시 놀라는 지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흐느꼈다기 보다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서 계속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두었다. 어떤 그림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꽃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 색과 형태의 흐트러짐이. 너무나 영원같고 덧없어서 눈물을 흘렸다. 아니 거짓말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노쇠한 화가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너무나 기가 막혀서 울었다.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다. 이 그림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서 괴로웠다. 말이 흘러넘치는데 그 말들이 그대로 바닥 어딘가에 흘러 떨어지고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그런 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고독했다.

나는 꽃을 찾으러 이곳에 왔지만. 그것 뿐이었다. 꽃을 찾는 일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덧없이 사라져 버릴 그런 마음이다. 어쩌면 나의 유일한 친구인 당신이라면 내가 어떤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알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다만. 다만 그 조차도 큰 의미는 없는 일이다. 하찮기 그지 없다.

잘 생각해보면 사람의 생명만큼이나 그 소원이란 대체로 하찮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 꽃을 당신과 함께 보고 싶었다 라든가.


24년 12월의 글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