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 블로그 글에서 썼지만, 나는 3주 전쯤 넘어졌었다. 세어보니 정확하게 3주였다.
처음 정형외과에 갔을 때 전치6주에서 8주 쯤 되지 않을까요 라고 하셨는데. 지난주 금요일에 방문했을 때 2,3주 정도는 경과를 더 봐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라고 하셨으니 정확하게 6주 정도 되는 셈이다. (용하기도 하셔라)
차에 치인 것도 아니고 빙판길에 넘어졌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다치다니 재주도 좋다.

몸이 이런 상태이다 보니 러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남이 얼마나 아팠는가를 듣는건 정말 지루한 일이지만 여긴 내 블로그니까 내 맘대로 쓰자면.)
다친 첫번째 주에는 러닝이 문제가 아니었던게 정말 말도 안되게 아파서 4종류의 진통제를 매 끼마다 먹으면서 일상생활 비슷한 걸 했다. 입원을 왜 안 했는가? 아니 내가 노인도 아니고 빙판길에 넘어졌다고 입원을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숨이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골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용케 부러진 곳은 없네요.”) 그냥 몹시, 아주 몹시 아픈 것 뿐인데 입원을 할 필요는 없다 싶었는데. 걱정이 되셨던 정형외과 선생님은 소견서와 전원서를 써서 3차 병원에 가보라고 하셨다만…나는 가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구석에서 고집이 쎄다.

다친 지 2주차가 되자 아픈게 좀 가라앉고 걸을만해지니까,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러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러닝을 못하는게 괴로웠냐 싶겠지만. 작년 여름부터 내 인생은 철저하게 러닝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애초에 가족도 친구도 없이. 인생을 운영하고 있던 사람이니까(하하)

집중해야하는 것을 러닝으로 슬쩍 바꾸기만 한 것 만으로 자연스레 러닝 없이 못 사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매일 정형외과에 가면서 선생님이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아직 운동하시면 안됩니다. 라고 주의를 주셨는데. 그걸 보면 내가 되게 티나게 러닝을 하고 싶어한 것 같긴 하다. 어떻게 안 걸까 내가 이 겨울날 손바닥만한 바지를 입고 진료실에서 달리는 흉내를 낸 것도 아닌데 말이지. 물론 적당해졌다 싶은 주기마다 언제쯤 운동을 해도 될까요? 라고 물어보긴 했다만…아 맞다 다친 날 아침에도 러닝했다고 얘기 했었지만 뭐 그래.

길고 긴 설 연휴에도 대체로 누워있었다. 어디 미술관 구경하러 가자고 나오라는 연락도. 뭔가 먹으러 나오라는 연락도 모두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냥 누워있었다. 초조하게 도대체 언제 다리가 낫는거지 하는 생각만 했다. 설 전에 갔었던 진료에서 무릎을 초음파로 보다가 왼쪽 무릎 연골판에 파열 의심 증상이 있다는 소리를 듣자. 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든걸 보면 정말로 러닝 말고는 인생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된건가 싶기도 하다. (연골판에 파열되었을 경우, 애초에 완치는 안된다. 심한 경우에는 수술을 해야하는데 재활에 몇개월이 걸린다.)

러닝을 못하게 된지 2주가 넘어갈 때 쯤엔 러닝을 하지 못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걸까.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죽은 눈으로 게임 패드를 잡고 죄없는 병사들을 칼과 창으로 때려잡으며. 아니면 베트남, 대만의 신진 작가가 현대사의 비극을 녹여낸 훌륭한 문학 작품을 기운없이 읽으며. 내내 그냥 러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훌륭히 멘탈이 무너졌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피ㅋ민 블룸이라고. 나ㅇ언틱에서 만든 산책게임이 있다. 원래 있던 게임인 피ㅋ민을 나ㅇ언틱 특유의 위치 기반 서비스와 결합한 게임인데. 나온지 몇년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갑자기 인기를 끌기 시작해서 아주 최근에 한글판 공식 에스엔에스 계정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나도 도쿄 여행을 갔다오기 얼마 전부터 친구의 권유로 하기 시작했는다.

거기에는 “눈 데코 피ㅋ민”이라는 희귀한 피ㅋ민이 있다. 눈이 오는 시간 대에 특정한 위치에서 아이템을 쓰면 얻을 수 있는 피ㅋ민으로. 워낙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나는 얼마 전부터 그 눈 피ㅋ민을 얻으려고 노력을 아니 집착을 하고 있었다.

일단 매일 나ㅇ언틱에서 쓰는 날씨 서비스를 매일매일 찾아서 우리 지역에 눈이 올 확률을 찾아보고, 특정한 위치 (눈 피ㅋ민은 “길거리”아이콘이 딱 하나만 나오는 지점에서만 나온다. 우리나라엔 공지가 적어서 그런 지역이 드물다.)가 집과 회사 주변 어디에 있는지 찾아두었다.

설 연휴에는 폭설이 내렸는데, 우습게도 앱 안의 날씨는 매일이 흐림이었다. 눈으로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일찍 퇴근해 무릎 혈종 제거 시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갔던 날. 웃기게도 앱 안의 날씨가 눈으로 바뀌었다. 나는 붕대를 감은 채로 “길거리” 아이콘이 나올거라고 예상되는 곳으로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날씨 예보는 1시간 단위로 바뀌기 때문에 1시간 내로 예상한 곳 까지 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난리를 쳐서 눈 피ㅋ민을 두마리나 얻고 나니. 그제서야 내가 여기에 과하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게임을 한지 두달이 되기 전에 레벨이 50에 근접한 것 부터가 정신줄을 놓고 이걸 하고 있었다는 증거였긴 하다.)

이게 뭐라고 말이지. 눈 피ㅋ민이 뭐라고. 러닝이 뭐라고.

3주 정도는 더 봐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이 주말에 10킬로미터를 뛰었다. 무릎의 붓기가 빠지지 않아서 붓기가 빠지기 전에는 연골판의 파열을 확인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냥 냅다 뛰었다. 무릎이 아파오자 눈물이 좀 날 것 같았다. 계속 달리고 싶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어느 것에도 집착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였다고 생각한다.
그냥 무의미한 집착이었다. 다 알고 있었다. 사랑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집착하고. 사랑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번뇌에 빠졌다.

여름부터 썼던 포스팅을 읽자. 그 동안 내가 어떻게 매달 다치고 아팠는지 (놀랍게도 매달 어딘가를 다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괴로워했는지. 어떻게든 나아보려고 노력했는지 거기에 다 적혀있었다. 차라리 아무 것도 쓰지 않을 것을 그랬다. 의도치 않은 사고로 넘어지고 굴러 애써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게 내가 아니었다면 좋았을텐데.

어제 밤에 차림새를 갖추고 무작정 달려보려고 하는데. 허리가 아려왔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어서 새벽에 일어나 다시 달리려는데 아직도 허리가 아렸다. 디스크일까, 근막의 통증일까. 아니면 그냥 춥기 때문일까. 피트니스에 가서 트레드밀 위를 뛰었다.

모두 다 미망이고. 모두가 미련이다. 여기에 어떤 의미도 없었다.

나는 넘어졌었다. 뜻하지 않은 빙판길에 미끌어진 것 처럼 넘어졌다. 용기를 내어 혼자 걸어가야 하는데. 아무리 엉망이 되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25년 2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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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아침, 나는 넘어졌다. 넘어졌다기 보다 굴렀다.

13일 밤부터 눈이 내렸다. 새벽에 일어난 나는 막연히 괜찮을거라고 생각하고 러닝을 했다. 5.05킬로미터에 36분간의 러닝. 두번 정도 넘어질 뻔 했짐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속도로(겨울이니까 빨리 달릴 수 없다) 달렸는데 정작 넘어진 것은 출근하려고 걸어갈 때였다.

나는 떳떳하다.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주머니에 손을 넣지도 않았다. 뉴스를 듣고 있긴 했지만 하여간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지도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건 아침에 나올 때 바닥이 미끄러운 편인 나이키 모델을 신었던 것 정도다. 나는 그 신발을 신으면 어라 이거 오늘 아침 같은 날에는 좀 위험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니까 어른의 지혜로 나 스스로에게 충고를 한 것이다. (정작 나는 그 어른의 지혜를 무시했다. 항상 내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차에 치인 것 같은 몰골로 회사에 도착하자. 옆자리의 부장님은 뭐냐 어떻게 된거야 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어 넘어졌어요. 하고 얼빠지게 대답을 하고는 몸에 묻은 흙과 눈을 털고 아까부터 뜨겁고 쓸린 느낌이 나던 무릎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바지를 걷어보니 맙소사 무릎이 두개가 되었다. 심지어 아랫쪽에 새로 생긴 무릎 쪽이 더 컸다. 피야 당연히 나고 있었고 휴지로 닦아냈다. 보통 다친게 아니란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야 빨리 병원 가봐라 라고 부장님이 성화신데 나는 좀 현실감이 없어서 아침에 보고 하나 작성할 게 있어서요. 라고 얼빠지게 말하고는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회사 근처의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께서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하셨다. 병원의 직원들이 다들 한 명씩 와서 내 무릎을 구경하고 갔다. 아프신가요? 아뇨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은데요. 라고 말헀는데 엑스레이를 찍고 진통주사를 맞추고 진통제를 세 종류 처방해주셨다. 저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은데요. 오늘밤부터 엄청나게 아프실거에요 내일은 더 아프실거고요. 너무 아프면 꼭 병원 나오셔야 합니다. 진통제 더 처방해드릴게요.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그날 밤은 엄청나게 아팠고. 그 다음날은 더욱 아팠으며. 다다음날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처음 넘어진 곳은 언덕을 올라가는 횡단보도였다. 평소엔 차들이 사양하지 않고 우회전이고 직진이고 하는 곳인데 그 날은 왠지 한 쪽에 경찰차가 서있었다. 거기에 눈이 팔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펭귄처럼 걷다가 앞으로 꽈당 소리와 함께 넘어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후에 깨달은거지만 워낙 사고가 나기 쉬운 고갯길에 (나는 평소에도 그 곳에서 차에 치일 뻔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눈이 내린 아침이라 경찰차가 미리 와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도 내가 넘어지자 맞은 편에서 오던 차가 마법처럼 서행을 하고 있어서 횡단보도를 넘어서까지 밀려내려오진 않았다.

후에 알았지만 운이 좋게도 무릎으로 넘어지지 않아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나는 넘어졌다는 당혹감과(어른들은 넘어지면 굉장히 당혹해한다.) 창피함에 발버둥치며 일어났지만 차도 경찰도 행인들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여기 오늘 아침에 넘어진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나보다. 검은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무르팍에 더럽게 묻은 블랙아이스를 털고 일어나니 그냥 좀 더럽고 출근 중인 아저씨인지라 비틀비틀 걸어갔다. 회사까진 2킬로미터 정도 남았고 이 정도 넘어진 걸로 회사를 안가기엔 좀 그랬다.

무릎이 쓸리는 감각과 건조한 통증이 있었지만 찰과상이겠거니 생각하며 고갯길을 비틀거리며 걸어올라 회사 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중간 쯤 걸어내려오는 횡단보도의 중간 쯤에서, 나는 한 번 더 넘어졌다.

엄청난 소리가 났다. 아니 나도 내가 넘어지면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한번 넘어졌기 때문에 무릎에 힘이 빠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부딪혔던 왼쪽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미끌어졌고 오른쪽 바닥에 넘어졌다. 눈을 감았는지 아니면 기절을 했는지, 아주 잠시 블랙아웃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생각한 것은 머리를 부딪혔을까 였는데,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격통이 찾아왔다. 나는 숨을 토하는 소리를 냈다.

역시 우회전을 하며 진입하려던 차는 횡단보도 앞에서 비상등을 켜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본인들 눈 앞에서 사람이 엄청나게 화려하게 넘어졌는데 나와보지도 않는건, 뭐 내가 보험사기라도 칠까봐 그런걸까? 일어날 수 없었던 나는 기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기어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서 숨을 내쉬며 기었다.

눈을 뒷통수로 떨어지는게 느껴지고. 나는 건넛편까지 기어와 기는 것도 하지 못해 누웠다. 차들이 지나갔지만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도 일으켜주지도 않았다.

회사까지 1.5킬로미터.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무릎에서 나던 피가 흘러내려 발목근처에 고이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대충 피를 닦아내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았다. 일어날 수 있을까. 걸을 수 있을까. 두 개가 해결되기 전에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눈이 덮여오는게 따스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짐승이 끌려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주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정확히는 무릎 근처가 엄청나게 부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왼쪽 무릎이 원래 좋지 않다. 20대때 멍청하게 운동하다 생긴 부상이다. 조졌네 조졌어. 큰일났네 큰일났어.

나는 엉망인 꼴로 발을 질질 끌며 회사로 걸어갔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내 옆에는 없었다. 고작 회사까지 걸어가는 것 뿐인데. 뭐가 이렇게 힘든지.

25년 2월의 글이다.


길지도 않은 도쿄 여행이었는데. 그 후로 몹시 앓았다. 돌아오는 날은 아침비행기라 낮에 집에 도착해 짐을 정리하고 그날의 러닝을 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날 밤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니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독감도 아니라는데 몇 년에 한 번 정도 있을까 싶게 앓았다. 여행까지 가서 러닝이나 하고 그러니까 아픈게 아니냐고 누가 그랬다만. 생일을 지나고 동짓날을 그대로 침상에서 맞았다. 여독이란 실존한다. 아무리 괜찮다고 생각해도 쉬어야 한다.

이번 생일과 동짓날은 - 내 생일은 대체로 동짓날과 붙어있다.- 한국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에 미신을 믿는 우리의 선조들이 대체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걸로 그걸 대신하려고 했지만 아시아나의 마일리지 비행기표를 적절한 때에 잡지 못해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예상했던대로 생일날 저녁에는 더더욱 열이 올라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할 때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 언젠가는 내 귀 까지 들려올 얘기였는데 왜 하필 내 생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생일이 아니었다면 그걸 피하기라도 할 수 있었다는 건가 싶어서 스스로를 비웃었다. 열이 올라서 제대로 생각 할 수가 없어서 알려온 소식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동짓날에는 거의 굶다시피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 결국 큰일이 나겠지 싶어서 냄비에 아무거나 넣고 아무거나 끓여서는 반쯤 흘리며 먹었다. 따스한 뭔가가 뱃속에 들어가니 그제서야 살 것 같아서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워서는 대낮부터 잠이 들었다. 잠결에 새가 홰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비둘기들이 제법 살고 있어서 가끔 침실 옆 창가에 비둘기들이 쉴 때가 있다. 하지만 한 겨울인데 새가 있을리가 없다. 나는 잠이 들면서 생각했다. 이 겨울에 아파트의 비둘기들은 어디서 겨울을 나는 걸까.

잠에서 깨어나니 이미 해는 지고. 베개 머리맡은 내가 자는 동안 흘린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땀을 왜 이렇게 많이 흘렸지 하고 얼굴을 만져보니 얼굴 또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잠이 든 동안 계속해서 울었던 것 같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모두 다 둘둘 말아서 빨래를 했다. 광화문의 시위가 끝났고. 남태령에 모여있는 농민들의 트랙터 시위를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차를 끓여 마시며 유튜브 라이브를 켰다. 그리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고도 며칠을 더 아팠다. 나는 항상 그렇다 모두에게 모든게 다 끝나고도 며칠을 더 아파한다.

이 24년 12월의 도쿄여행기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들은 것은 윤마치의 <새벽에게>이다.
이 노래의 앨범 커버에는 멋있는 부엉이가 그려져 있다. 나에겐 이 그림이 내가 받지 못한 올해의 내 생일 선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도쿄현대미술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시나가와에선 도쿄 어디든 1시간이지만 도쿄 현대미술관은 멀다. 길고 긴 리노베이션이 끝났는지도 감이 안 잡혔기 때문에 전혀 갈 생각이 없었는데, 전날 순전히 변덕으로 탄 전철 안에 광고판이 있는 것을 보고 간만이니 가보기로 했다. (여행 전에 세운 사전 계획 메모에는 여행 다음날 부터 미술관이 재개장 하는 것으로 체크는 해두었다.)

다른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대충 해두었으니. 전시에 대해서만 쓰고 싶다. 현대미술관의 애뉴얼 전시인 행복의 섬은 퀄리티가 정말 별로였다. 애초에 여기에 기대를 두고 왔다면 화가 나서 티켓을 잘근잘근 씹어먹었을지도 모른다. 컬렉션 전이자 여성 미술가에 대한 헌정전인 Seven beauties in the Bamboo forest 쪽이 질과 양, 양 쪽에서 훨씬 충실하고 보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행복의 섬 쪽이다.

전시의 시작을 보여준 시미즈 유키의 작품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이번 도쿄 여행 중에 봤었던 어떤 작품보다도 아름다웠다. 슬라이드로 촬영한 사진들과 서사, 그리고 음성을 결합하고. 영상을 넣은 시미즈 유키의 작품은 한 1980년 쯤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예술의 하나로 인정받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2020년이고 오히려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흔적들이라는 강렬한 주제로 만든 그의 작품은 그냥 미적으로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래 이것이 현대미술이다. 하고 너무 흡족해서 작품마다 사진을 파바밧 찍고 대체로 영상 작품을 잘 보지 않는 나도 한참이나 작품을 봤을 정도이다.

재료의 질감과 표현에 집중해서 아예 미술관에서 프레스코를 그리고 있었던 카와타 사토시의 작품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깨끗한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방치되어 있다는 이유로 오염된 취급을 받는 “생수병”의 위치에 대해서 천착한 우스이 류헤이의 작품은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현대미술이란 그냥 요즘 만들어진 작품이란 뜻이니까 하고 나름의 인정과 만족을 건방지게 중얼거리면서 지나쳤다.

하지만 마지막 순서이자 위치 상 클라이막스인 쇼지 아사미의 회화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요소를 꾹꾹 눌러 만든 것 같은 작품이었다. 투명한 아크릴판을 지지체로 해서 그린 그 유화는 모든 작가의 소개에서 공통적으로 신체와 신화적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이라고 소개하는데
구상으로서 뛰어난지도 의문이고…본인의 우울과 죽음에 대한 강박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것 외에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기는 한가. 도대체 이 작품이 애뉴얼전의 클라이막스 위치에 있는가 하고 아주 심술궂은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장에 묘한 그림자를 보았다. 어떤 설명도 없고 맥락도 없이 미술관의 높은 천장 위에 얼룩처럼 검은 새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냥 전시회 장을 지나쳐 나가려다가 혹시 내가 놓친게 있나 하고 다시 돌아가 그림 하나를 다시 살펴보려다가 발견한 것이다. 우연하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 명확하게 새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주변을 돌아보니 전시회장 구석의 벤치 위에 쌍안경이 있었다. 쌍안경 위에는 너무나 일본인스럽게 사용한 뒤 다시 자리에 올려놔주세요 라고 메모가 붙어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쌍안경으로 새의 그림자를 보았다.

국립신미술관에 잠시 들렀단 얘기를 어딘가에 썼던가. 그 곳의 아라카와 내쉬 전을 보다가 잠시 샛길을 돌아가니 햇볕이 비추는 곳에 빈백이 여러개가 놓여있었고 사람들이 앉거나 자거나 하면서 쉬고 있었다. 10분만 딱 앉아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나도 빈백에 앉았다가 아이코 사악한 일본인들의 술수구나. 한 20분을 잠들어 있었는데 살풋 깨어나니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내 오른 쪽 옆자리를 손으로 만지며 누군가를 찾았다.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쌍안경을 내려놓고 나는 전시를 떠났다.


<국립과학박물관 (우에노)>

우에노 공원에는 도대체 박물관과 미술관이 몇 개나 있는걸까? 일단 우에노 공원에는 가장 넓은 면적을 우에노 동물원이 차지하고 있고. 도쿄국립박물관이 있다. 전의 여행기에서 쓴 호류지 보물관을 포함해 6개 동과 넓은 정원이 있는 넓은 국립 박물관이다. 그리고 도쿄도 미술관과 모네 전을 했었던 국립서양미술관이 있다. 도쿄문화회관에서도 전시를 하던가? 그건 모르겠다. 우에노모리 미술관 같은 곳도 있지 않았던가 싶은데. 정말 많기도 하다. 그리고 우에노공원에는 내가 한 번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국립과학박물관이 있다.

모네전을 보려고 우에노역으로 왔더니 보기도 좋게 개찰구에 기세도 좋게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새>특별전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보기도 좋게 노란색 배경에 각종 새들로 가득한 (뒤에 알았지만 전부 전시품이었다. 박제였던 것이다) 사진이 있고 일생동안 볼 분량의 새를 볼 수 있는?! 특별전 이라고 써있었다. 정말이다. 기세가 너무 좋아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의 3시간 이상을 계획에도 없는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쓰게 되는데 결말만 먼저 말씀드리자면 어마어마하게 충실한 쓸데없는 시간이었다. 일단 특별전의 이야기는 둘째치고 국립과학박물관 자체가 온갖 과학에 관련된 교육으로 가득차 있는 곳이라서 같은 속에 속한 나비들의 표본들을 있는만큼 전부 벽면에 전시해둔다거나. 같은 종 쥐들의 색에 따른 차이를 비교해두고. 해양표유류들의 뼈들을 천장 가득하게 전시해두고 (대왕오징어의 표본까지 뒀더라고…) 우리가 상상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현생 포유류들의 박제들을 전부 거대한 한 전시실에 모아두고 사람들을 쳐다보는 구도로 진열해두었다. 분명 모형이겠지만 공룡 뼈까지 박진감있게 전시해둬서 나는 지치고 힘들고 지겹고 근데 안 볼 수는 없어서 거의 울먹이며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전시실을 돌았다. 동물의 숲에서 나오는 박물관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던 컨셉인건지 알 수 있게 된 기회였다…결국 나중에는 일본의 잠수함 모형 앞에서 아 이제 됐어 과학 기술 따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하고 심술이 날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지쳤지만 말이다.

지금도 글을 쓰며 - 내가 찍은 - 해양 공룡류들을 박진감 넘치게 천장에 매달아 둔 사진을 보고 있는데. 이 곳이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메세지는 인간 존재의 하찮음과 자연의 거대함인 것 같다. 추가한다면 그 거대한 자연에 과학의 힘으로 비벼보아요 예헷!! 이 정도랄까. 내가 어릴 때 이 곳에 왔다면 너무 좋은 나머지 기절도 하고 네네 꼭 과학자가 될게요 하고 피의 맹세도 했을 것 같은데. 다행히 중년의 나이에 이 곳에 왔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너무나도 충실하고 쓸데 없는 시간이었다. 상설전만 보는 것만으로도 8시간 정도는 여기서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뼛속까지 이과라서 천체물리학이나 원자력이라도 연구하는 사람이랑 왔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틀 정도는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입술이 파랗게 될 때 까지 밥도 안 먹고 하나하나 구경했겠지.

특별전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새”가 주제였다. 특별전이 하고있는 전시관의 지하로 내려가면서 평일이라 사람이 많진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특이한 주제야 그렇게 내용이 많진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엔 넓고 넓은 특별 전시관에 전시물이 가득 차있고…무엇보다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일본에 이렇게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단 말인가. 걷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다들 진지한 얼굴로 새의 박제 같은 것을 쳐다보면서 메모도 하고 사진도 찍고 있었다. 그 전시에 아무 생각 없이 껄렁껄렁한 마음가짐으로 온 것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여러분은 모든 종류의 새의 형태가 균형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중심축을 기준으로 흔들리지 않게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하지만 깃털은 비대칭이어야 양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날 수 있는 새들은 비대칭의 깃털을, 날지 못하는 새들은 대칭의 깃털을 갖고 있습니다. 새라고 한다면 날 수 있는 것이 전제처럼 여겨지지만 대멸종의 시기에 살아남은 수각류의 일부인 새들은, 크지 않다는 특징 덕분에 살아남은 공룡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서 새의 중요한 특징이 이빨이 대부분의 종에서 퇴화되고 부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부리가 이빨보다 훨씬 변형이 쉽게 적은 에너지로 생성 될 수 있으며 심지어 같은 종 안에서도 여러가지 모양으로 분화될 수 있어서 적응에 유리한 특성으로 여겨집니다. 먹이를 거의 가리지 않는 것도 새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흔히 비어있다고 알려져있는 새의 뼈 안도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일 뿐 정교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새가 어느 순간 비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적응의 결과와 같은 것이고 실제로는 작아지고 빨라지는 과정에서 생긴 특성일 것이라 말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런 비행의 결과로 인해서 새들은 먹이 다툼에서 유리해졌고 높은 대사율과 높은 산소이용률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보통 같은 크기의 동물의 비슷한 수명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새들은 포유류보다 훨씬 높은 수명을 가지는 경우가 많게 되었습니다.

나는 대체로 아무거나 다 알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나도 이런 새에 대한 매니악한 정보를 단시간내에 마구 익히니까 조금 멍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매 종류가 수리류 보다 앵무새류에 유전적으로 가까운 친척이라는 정보라든가 특정한 종류의 참새 종류는 일부일처제지만 실제로 유전자를 확인해보면 자식이 부부사이의 낳은 자식일 경우는 40%가 되지 않는다는 정보 같은거 말이다.

그런 유익한지 안 유익한지 헷깔리는 정보 사이에, 전시측에서는 페라고르니스(존재가 확인된 새 중에서 가장 큰 새로, 추정된 최대 길이가 7미터 정도 된다. 그냥 진짜 공룡만하다.)의 재현 박제를 천장에 매달아 놓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두었다. 나도 너무 유쾌해서 부리 사이에 뾰족뾰족한 것이 달려있는 모습을 확대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굳이 저건 치조골이 없기 때문에 이빨이 아니라 그냥 이빨처럼 보이는 부리라고 설명을 해두었다. 과학자놈들은 철저하군 감사합니다.

전시의 대부분은 새들의 박제였다. 우리가 상상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새들의 박제가 있고. 대체로 새들의 박제들은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고 무심하게 우리는 볼 수 없는 과거를, 혹은 누군가의 앞에 있는 내세를 바라본다.

나는 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새들은 대체로 너무 뜨겁고 작으며 부서질 것 처럼 약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파트였던 내 어릴 적 집에 거대한 새장을 만들어 거기서 앵무새를 포함한 새들을 길렀다. 내 방 바로 창 앞에 있었던 그 커다란 새장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이면 새들이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문조와 카나리아, 왕관앵무.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새들. 나는 높이가 2미터, 바닥 면적이 3제곱미터는 넘지 않았을 그 작고 커다란 새장에서 살고 있는 새들에게 어떠한 애착도 느끼지 못했다. 새는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었고 아버지는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슬프기 짝이 없는 새들의 사회를 지켜보는 왕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정말로 새를 사랑했는지 아니 아버지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 여러번 의심하곤 했다.

나는 그래서 새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다. 그들이 겁을 내고 도망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애도하는 모습을 내 방 창가에서 보았다. 내가 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표정이 없어 보이는 그들의 얼굴과는 다르게 그 작은 몸 속에 우리가 영혼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 한 명 분의 영혼이 새 한 마리에게도 똑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당신은 새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을까? 새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시의 중간. 나는 한 앵무새의 박제를 보았다. 먼지처럼 푸석해져가고 있던 어떤 커다란 앵무새. 나는 어째서인지 그 앵무새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회색의 깃털 안에 검은 유리로 대신한 그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앵무새가 나를 여기로 불렀다는 비상식적인 생각을 하였다.

나는 네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냐. 그렇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부른거겠지. 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리인으로서 그 앵무새의 박제 앞에 서는 것이 나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앵무새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 냄새를 맡고 내 눈을 쳐다보고 내 슬픔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모든 앵무새들이 그런 것처럼 그 앵무새의 박제는 나에게서 흥미를 잃고는 고개를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러니? 나는 묻고 싶었지만 애초에 박제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무언가의 흔적일 뿐이다. 나는 시간을 더 들여 더 많은 새들의 박제를 살펴보고 곧 다른 곳으로 떠났다.

공룡의 뼈들을 모아둔 전시관은 말도 안되게 멋이 있었다.


이걸로 나의 24년 도쿄 여행기는 끝이다.

오늘 아침 체중을 재보니 더 줄어서 앞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하얗고 지친 얼굴을 한 남자가 보였다. 바싹이라고 할 정도로 빠르게 말라가고 있는데 내가 나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실제로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다만 나는 세상의 작은 곳에서 다른 작은 곳으로 가는 것이 필요했다. 당신을 잃어버리는 여행이 되었어야 할 이 여행은 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음악을 좋아하며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의미도 없이 세 권씩 들고 여행을 가는 사람이며 카페 테이블에 앉으면 공룡과 로봇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계란 후라이는 써니사이드 업. 오믈렛은 플레인이 좋다. 여행을 가면 신발에 구멍이 날 때 까지 걸어다니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신발 하나를 버렸다.

좀 달라지기로 한 것도 있다. 바지가 좀 비싸더라도 마음에 드는 바지면 꼭 사기로 마음 먹었고 러닝을 할 때는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지 않기로 했다. 짐에 티셔츠를 적당히 싸기로 했고 기내 사이즈 캐리어만 고집하지 않기로도 했다. 가끔 그냥 이유 없이 여행 중에 낮잠을 자기로 했다.

그리고 새들과 화해했다.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나는 이제 새를 싫어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부디 새들도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새들은 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로 잠이 들기 전에 새 소리가 들리길 기다릴 때가 있다.

세어보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세 군데의 성지를 들렀다. 마사카도의 묘, 죠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도쿄 카테드랄이다. 탄게 겐조의 건축 미학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갔을 뿐인 도쿄 카테드랄이었는데. 대성당의 뒷자리에 앉자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나의 기도는 그러했다. 제가 당신 앞에 서게 될 때 조차 거짓과 불의로 서지 않게 해주소서. 나는 내가 무엇을 비는지 제대로 모르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유일한 친구인 당신은 내가 정말로 무엇을 위해 그런 기도를 했는지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24년 12월 28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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