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11월 어떤 기사가 올라왔다. 시부야역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사망한 중년여성에 대한 기사로, 사인은 외상에 의한 지주막하출혈 - 뇌출혈의 일종이라고 담담하게 적고 있다. 뒷통수를 둔기로 가격당해 죽은 것이다.

며칠 뒤 확인된 사건의 개요는 간단했다. 죽음의 현장이었던 곳은 버스 정류장의 벤치로, 차가 끊기고 시작하는 그 짧은 심야 시간에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곤 했던 64세의 노숙인 오오바야시 미사코씨를 마음에 들지 않아한 한 남성이(그는 현장 근처에서 살고 있는 주민으로 알려져있다) 그를 돌을 넣은 페트병으로 가격하여 - 그 남성은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하였으나 - 살해한 것이다.

단신으로 처리 될지도 모르는 기사에 특이한 점이 있었던 걸까? 통행인이 많은 시부야 역의 일각에서 일어난 그 죽음의 무참함 때문 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신이 발견되었을 당시 그에 대해 신분을 증명 할 만한 것들이 없어서 최초 신원 불상으로 발표되었던 이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의 신분이 밝혀지게 되었고 범인은 그 후 일주일도 안되어 체포되었다.

내가 읽었던 기사는 범인이 체포된 시점의 기사로. 거기에는 가해자에 대한 긴 설명과 말도 안되는 변명도 같이 적혀 있었으나, 나는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기에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가지 매체에서 찾아 퍼즐을 맞추듯이 알아내었다. 피해자 오오바야시 미사코씨는 노숙인으로 시부야 근처의 사람들에게도 안면이 알려져 있었던 사람이었다. 다만 사람을 피하는 노숙자치고도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극히 꺼렸는데 노숙 생활을 한 것은 올 11월을 꽉 채워서 생각해도 9개월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히키코모리로 살면서 평생 거의 일을 하지 않았던 가해자와는 달리 30년이 넘게 일을 하면서 살았던 것이 된다. 

그는 20년 초 까지는 도내의 아파트에 혼자 살 고 있어 주거지가 안정되어 있었고 올 2월 까지도 파견직으로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주로 시식 업무를 담당하며 살아왔지만 최근 Covid-19의 확산으로 슈퍼마켓에서의 일자리를 잃었으며, 결국 어느 시점에선가 집세를 내지 못해 아파트를 나와 노숙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발표하였다.
다만, 전술한 바와 같이 노숙을 하고 있으면서도 행색이 깨끗하고 몸가짐이 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냥 보기에는 전혀 노숙인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시부야의 버스 정류장에서도 버스의 막차가 끊기고 첫차가 오기 전의 아주 짧은 시간에만 잠시 쉬어가려는 듯이 벤치 위에 앉아서 쉬기만 하였다고 하며 누워서 자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주변의 시민들은 말하고 있다.
또 그가 항상 똑같은 시간에 앉아있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노숙인인 것을 몰랐을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어쩌면 그가 노숙을 시작한 이후 짐을 두고 있는 다른 생활 공간이 있었고 단지 버스 정류장의 벤치는 밤을 잠시 피할 피난처 같은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찰이 그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3일이 걸렸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는 대해 결혼을 한 적이 없으며, 아이를 낳은 적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꼭 그가 아무도 찾지 않을 사람이었다는 듯 한 설명이었다. 죽음의 순간, 오오바야시 미사코씨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은 8엔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일본의 매체들이 8엔의 무상함과 비참함을 표현하려는 듯이 기사의 제목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보도된 후 시민들이 시부야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우리가 그 일 수도 있다고 시위를 했으며 그 모인 숫자가 100명이 넘는다는 사실은 제목에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몇개월이 지났다. 그의 죽음 이후 나는 계속해서 NHK 등 주요 언론매체에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왔지만 12월 이후 더 이상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죽음 이후로 일본사회에 무엇인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사회의 병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떠한 분열과 개인의 파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더 이상 그 기반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여러 산업 분야에서 중소 사업체는 무너져가고 실업자들이 쏟아져나온다. 투입한 자본을 돌려받지 못해 계속해서 무너져가는 사업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상황이 나은 편이다. 한쪽 켠에선 자신이 이제까지 쌓아온 기술과 숙련을 인정받지 못하고 비숙련 노동자로서 불완전한 고용상태에 몰리고 있다. 그들을, 아니 우리를 지탱해줄 그물은 어디에도 없고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일자리를 잃은 것이 우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눈짓을 몰래 보낸다.

 

여기 숫자가 또 몇 개 있다.

옥스팜은 20년 4월 Covid-19으로 인해 전체 소득이 최고 20% 감소 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며 이 경우 극빈층은 전세계적으로 4억 3천5백만명이 늘어 총 9억 2천 200만명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고, 월드 뱅크는 20년 10월 극빈층이 7억 3천만명으로 늘어났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월드 뱅크는 덧붙여서 이전까지 극빈층은 저학력의 농업 종사자들이 많았으나 현재는 기본 학력을 갖춘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극빈층이 늘어나고 있음이 두드러진다고 설명하였다.
같은 날 발표 된 미국의 재산 분석 전문기관 웰스엑스는 순자산 3천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전세계 갑부들의 수가 23만 8천여명에서 28만 여명으로 늘었으며 세계 갑부들이 5개월 동안 늘린 재산은 6조 83백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 모든 보고서는 오오바야시씨의 죽음 이전에 발표되었다. 나는 이러한 현상들이 인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부를 쌓은 사람들이 악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왕정에서 왕에 대한 무모하고 절대적인 충성이 죄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추구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 될 수 없다. 때때로 나는 그것이 우리 현재의 유일한 선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한다.
하지만 나는 숫자와 숫자화 된 사람들의 이름들을 떠올리고 이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단일화된 현상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우리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우리의 세대와 우리의 땅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신의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쌓아올린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지운다. 그리고 다시 글을 써내려간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21년 4월의 새벽의 글이다.

...
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주 옛날의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주 최근의 일도 아닙니다. 때는 숲 속에서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늘어나 열매를 줍는 동물들보다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훌륭하다는 여겨지는 평판이 생겨났고 비버씨가 댐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공터를 크게 늘려 더 많은 동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소리씨는 어째서인지 농사를 짓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가끔 사촌인 비버씨네나 이웃의 곰씨네의 밭에서 도움을 줄 때도 있었지만 한가한 시간에는 강변에 나가서 진흙을 골랐습니다. 아주 이상한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죠.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릇이라고 해도 여러분 집에 있는 그릇들 처럼 편리하고 멋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냥 진흙을 이렇게 저렇게 빚고 말려서 나무 열매 정도 넣어 둘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오소리씨의 사촌인 비버씨는 그런 오소리씨가 맘에 들지 않았답니다. 손재주가 아까웠던거죠.
며칠을 고민하던 비버씨는 그날도 강가에서 진흙을 모아 가던 오소리씨에게 댐을 만드는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네 취미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우리가 하는 일은 밭과 논을 늘리는 훌륭한 일이야. 오소리씨는 고개를 끄덕이죠. 비버는 오소리씨의 유일한 사촌이었고 훌륭한 비버가 하는 말이니 옳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아직 그릇의 훌륭함을 모르고 있어. 내가 장돌뱅이 개미햝이가 보여준 것 같은 흰 그릇을 만들어내면 알아줄지도 몰라.

오소리씨는 여름 동안 비버가 댐을 만드는 일을 열심히 도왔답니다. 비버의 댐은 나날이 갈수록 크고 튼튼해져갔죠. 해가 화창한 날에는 댐의 위쪽 끝에 햇볕이 하얗게 내리쬐어 오소리와 비버는 그 위에 누워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마른 여름이었지만 비버의 댐이 모아둔 물 덕분에 어떤 동물도 목이 마르지 않았죠.

눈을 감고 햇볕을 쬐던 오소리씨는 말했습니다. 비버, 나는 잠시 구릉지대에 다녀오려고 해. 나에게 여름 동안의 삯을 계산해주지 않겠어? 비버씨는 깜짝 놀랐죠 가을이 된다고 해서 댐의 공사가 끝나는건 아니었으니까요. 증축이 끝나면 보수공사가 있고 또 비버씨는 자신의 밭도 일구어야 했으니까요. 구릉지대는 왜 다녀오려는거야? 라고 묻자 오소리씨는 거기 좋은 흙이 있대 그 흙만 있으면 흰 그릇을 잔뜩 만들 수 있다던데. 라고 말했죠. 비버씨는 또 그릇 얘기냐 하고 한숨을 쉬었지만 오소리씨에게 나무 열매를 잔뜩 주었죠.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와. 내년 봄이 되면 새끼 동물들이 늘어날거고 숲에는 공터가 더 필요해.

비버씨는 그렇게 혼자서 오소리씨를 기다렸어요. 겨울은 금방 왔어요. 해가 길어지고 숲의 어떤 넓은 공터에도 겨울의 긴 햇볕과 그림자가 늘어져 동물들은 어떤 계절보다 더 게으르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냈죠. 비버씨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댐의 위를 돌아다녔습니다. 오소리씨와 같이 쉬던 댐의 끝에 다다르면 코를 킁킁 거리며 먼 곳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구릉은 멀고 이미 겨울이 되었으니 겨울이 지나고 오는 게 좋겠군. 비버씨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었습니다. 그 해의 봄은 유독 영원처럼 긴 봄이었지요. 많은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죠. 봄이 왔으니 천천히 출발하면 여름에는 도착하겠어. 비버씨는 일을 도와줄 일꾼들을 뽑았어요. 동물들이 찾아와 새끼들이 태어났으니 공터를 더 늘려야 한다고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죠. 오소리가 감독을 해줬으면 편할텐데...

그 영원 같던 봄은 아주 길게, 그리고 빠르게 사라졌고 금세 여름이 되었어요. 그 해 여름엔 비가 많이 오지도 적게 오지도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열심히 일했죠. 이제 비버와 오소리 둘이서 만들던 시절보다 댐은 훨씬 훌륭해지고 튼튼해졌어요. 다른 숲의 동물들이 기웃거리며 찾아와 댐을 구경했죠.
곰은 나무등걸에 앉아 바람을 쐬다 비버씨 네 댐은 우리 숲의 자랑이야 고마워 라고 감사를 표합니다. 비버씨는 머리를 긁적였어요. 오소리가 있었으면 더 좋은 댐을 만들수 있었을거야. 이런건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 가을이 되었어요. 이제 올때가 되었어 하지만 너무 늦군 오소리. 공사 현장에서 밥을 먹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비버씨는 고개를 들어서 사방을 보았죠. 하지만 이웃집의 너구리씨나 여우씨인 경우가 많았죠. 곰씨는 커다래서 아무리 몰라도 곰씨를 오소리씨로 착각할 일은 없었어요. 비버씨는 좀 퉁명스러워졌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군. 이라는 말이 비버씨의 말버릇이 되었습니다. 동물들은 때때로 그게 자기들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서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또 가을이 지났습니다. 겨울도 또 지나갔죠. 그 해 겨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비버씨의 말버릇은 변함이 없었지만 동물들은 그가 누굴 기다리는지 잘 몰랐어요. 숲의 시간은 빨리 지나가니까 몇몇 젊은 동물들은 오소리씨가 누군지도 몰랐죠. 그런 젊은 동물들이 보기에 비버씨는 숲에서 제일 훌륭한 동물이었고, 무서운 동물이었죠.

또 한 번의 봄이 지나고 그리고 어느날 여름.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날. 비버가 댐의 꼭대기에서 저 멀리 숲의 저쪽을 보고 있던 날. 오소리씨가 돌아왔어요. 흰 흙을 잔뜩 지고 그리고, 아기 오소리를 데리고 있었어요. 열매처럼 작고 아름다운 아이였죠.
오소리씨가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사촌인 비버씨였습니다. 비버씨 내 딸이야.
비버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군. 그래서 늦은거냐. 하고 생각을 했죠.
오소리씨가 원래 살던 동굴을 청소하는 동안 오소리씨의 작은 아이를 풀숲에 눕혀놓고 비버씨는 묵묵히 나무 뿌리를 갉으며 중얼 거렸죠. 이제 돌아왔으니 내 일을 도와줄수 있겠지

하지만 오소리씨는 돌아오고서도 비버씨를 돕지 않았어요. 그 댐은 이제 너와 내가 만들던 댐이 아냐 아주 훌륭해졌어. 하고 말하고 오소리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릇을 빚었고 딸을 키웠죠. 오소리씨는 정말 좋은 엄마였어요.비버씨는 댐의 높은 곳에서 나무를 갉다가 오소리씨가 딸과 산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버씨는 이제 더 이상 너무 늦는군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주 과묵해졌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오소리씨가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나 겨울이 가기 전의 어느 날, 오소리씨는 숲속의 동물들을 모아서 이제까지 만들어온 자기의 그릇을 보여주었답니다. 사촌인 비버씨, 친했던 곰씨, 이야기꾼 여우씨 등 많은 동물들이 모였죠. 정말 많은 그릇이 있었죠 나무 열매를 올려놓는 접시와 항아리. 빗살무니와 발바닥무늬 그릇. 오소리씨는 자랑스럽게 자기 그릇들을 소개했죠. 마음껏 가져가세요. 곡식을 넣는데도 쓸수 있을거에요. 이제까지 숲속에서는 곡식을 그냥 동굴에 쌓아뒀었거든요. 이제는 동굴 바닥에 두다 물에 젖는 일도 없을 거에요. 초대된 동물들은 오소리씨의 그릇을 구경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죠. 과연, 이런걸 하고 있었구나. 다들 웃는 얼굴로 오소리씨를 칭찬하고 오소리씨의 딸에게 너희 엄마는 아주 훌륭한 일을 하는구나. 하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죠.

그런데 그 때 오소리씨의 초대에 제일 먼저 나타나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던 비버씨가 갑자기 일어나 퉁명스럽게 소리쳤습니다. 말도 안돼 이런건 게으름뱅이의 취미일 뿐이야.
오소리씨는 당황해서 비버를 쳐다보았습니다. 비버 무슨 일이야.
우리가 매년 만들어내는 곡식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작은 그릇에 곡식을 채운다는거지? 나무 열매나 몇개씩 따먹고 배를 주리던 시절에나 어울리는 재주야. 우리가 털이 없어 앞발이 부드러운 인간도 아니고 이런 흙투성이 물건이 필요할리가 없잖아.
비버씨는 다른 동물들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시간 낭비 했군. 성실한 숲속 동물들의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다니 너는 어떻게 된거 아냐? 이런 걸 만들 시간에 댐에 나와 허드렛일이라도 시켜줄테니까. 동굴을 나가버리는 비버씨의 뒤를 웅성거리면서도 많은 동물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오소리씨는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은 오소리씨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은연중에 농사를 짓는 동물이 훌륭해. 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리고 비버씨는 댐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 중에 제일 훌륭했어요. 오소리씨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훌륭해 똑똑해 잘났어. 나는 상대도 안되지. 하지만 나는 그릇을 만들고 싶어. 
오소리씨는 낮에는 열매를 줍고 밤에는 그릇을 만들었어요. 동굴 가득 그릇이 쌓여갔어요. 가끔 개미핥기 장돌뱅이가 와서 그릇을 사주기도 했어요. 숲에서 만든것치고 훌륭해. 근데 여기선 아무도 안 쓰는거야?
충분히 훌륭하지 않아서 그래. 하고 오소리씨는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소리씨는 자기가 훌륭한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비버씨가 자길 인정해주지 않는거라고 생각했어요. 딸이 자라 스스로 땅을 파고 열매를 따올 수 있게 되자 오소리씨는 더욱 많은 시간을 그릇을 만드는데 쏟았습니다. 비버씨가 더 훌륭해 지는 동안 말이죠 결국 주변 숲 전체를 통틀어서도 제일 근면하고 훌륭한 동물이 되었죠.

오소리씨가 흰 흙을 가지러 구릉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황야의 문턱에서 쓰러졌을때도 비버씨는 댐을 짓고 있었죠. 소식을 들은 오소리씨의 딸이 오소리씨의 뼈를 오소리씨가 마지막으로 만든 그릇에 담아돌아왔죠.
뚜껑이 있는 항아리였어요 아주 특이한 작품이었죠. 그리고 작은 오소리씨는 이제 오소리씨와 완전히 똑같이 닮아 꼭 오소리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비버씨는 바쁜 일과 중에 부러 동굴에 찾아와 작은 오소리씨에게 말했어요. 알다시피 너희 엄마와 나는 사촌이다. 하지만 너희 엄마는 훌륭한 손재주를 썩혔어. 더 건실한 일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말야.
작은 오소리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비버씨는 앞발을 핥다가 말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너의 친척이다 일자리가 필요하면 언제라도 찾아와라. 하지만 작은 오소리씨는 비버를 찾아가지 않았어요 대신 그 많던 그릇을 숲 속의 동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죠. 나눠주고 남은 것들은 모두 팔렸습니다.
장돌뱅이가 와서 며칠에 걸쳐서 실고 갔죠. 남은 것은 엄마 오소리씨의 뼈가 든 뚜껑이 달린 항아리 뿐이었어요. 작은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들진 않았어요. 하지만 댐에서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미도 독수리도 느티나무도 알듯이 그 해 정말로 큰 홍수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손을 쓸수 없었죠. 비가 열흘 밤낮 동안 내렸어요. 해가 지나 더 크고 훌륭해졌던 비버씨의 댐이...결국엔 무너졌죠. 곡식 창고가 물이 잠겼어요. 숲의 반이, 아니 숲의 전부가 물에 잠겼죠 아무 것도 젖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파종을 위해 남겨놓은 것들도 모두 물이 묻어 썩기 시작했어요. 동물들은 아직 젖지 않은 나무 위에 올라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닷새가 지난 후였죠.

강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댐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개척한 공터는 대부분 다시 물에 잠겼고 숲은 아주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죠. 적어도 동물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모든 동물들. 살아남은 동물들이 겨우 해가 난 숲의 공터에 모였어요. 먹을수 있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파종할 씨앗에 물이 찬게 문제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습니다.

내가...인간 마을에 가서 씨앗을 구해오겠다. 곰씨가 입을 열자 모두 반대합니다. 여우씨가 말합니다. 무모한 짓 하지마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라. 털이 없어서 우릴 질투해 가죽을 벗기려고 드는 놈들이라고.
비버씨는 가슴이 타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다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았습니다. 인간 마을에 가야하는건 나야. 내 댐이 무너져서 이렇게 된거야. 내가 꼭 씨앗을 구해오겠어. 아직도 숲의 가장 훌륭한 동물이었던 비버씨가 그렇게 얘기하자 동물들은 모두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라 망설였습니다.

그 때 풀 숲에서 작은 오소리씨가 나타났습니다. 뚜껑달린 항아리를 안은채로 작은 오소리씨도 물에 휩쓸렸었는지 물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로 말했습니다. 씨앗을 구하러 가실 필요 없어요. 비가 오기 전에 제가 준비해둔게 있어요.작은 오소리씨는 뚜껑을 열어, 비버씨 앞의 겨우 마르기 시작한 땅에 항아리 살짝 기울입니다.
너..어머니의 뼈를...하고 놀란 비버씨 앞에 떨어진건

씨앗들이었습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숲에 비가 심상치 않게 오자 어머니 대신 씨앗을 넣어둔 것 입니다. 오소리씨의 뼈는 비에 씻겨 나갔지만 타타탁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젖지 않은 씨앗들이 공터에 떨어집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분명 어머니도 이걸 바라셨을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버씨는, 비버씨는 가만히 씨앗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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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나는 러닝 코스라도 찾아볼까 싶어서 가벼운 차림으로 집 근처 산책을 나갔다. 내가 사는 곳은 수도권의 공업 도시로 넓은 산업 연구 단지와 그 기반 시설로 몇천 단위의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라 어디를 돌아다녀도 길게 달릴 만한 곳은 없었다. 크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도 주변은 그래도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3킬로미터 정도의 직선 루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후보지를 몇 군데 선정하고 나가보았던 것인데. 이내 나는 길 주변을 까맣게 채운 까마귀들에 질려서, 아니 겁먹고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까마귀들의 겨울 도래지가 된 것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겨울철 이 지역을 찾아와 산과 들에서 겨울을 지내던 까마귀가 도심지나 국도로 모여든 것은 정말 최근의 일로, 이 도시의 배경지였던 전답과 야지가 차례차례 개발되어 아파트가 된 탓에 밤에 안전하게 보낼 곳이 없어진 까마귀 떼들이 나머지 도심지로 몰려든 것이다. 송전선들이 집중되는 교통의 요지일수록 (전깃줄이 많아) 말 그대로 까맣게 까마귀로 가득해서 저녁 나절이 되면 히치콕도 질릴 정도의 까마귀떼가 몰려들고, 땅에는 일부러 뿌려도 어려울 정도로 하얗게 새똥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도 이런 상황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파트 단지와 회사로 이어지는 좁은 루트만 반복해서 돌아다니고 있어서 이 정도로 심각한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전깃줄에 매달려 있는 까마귀 떼를 보고 거의 질려 도망을 갔고. 나 말고도 다른 행인들이 파랗게 질려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까마귀라고 하면 반포지효라든가 오비이락이라든가. 여러가지 관련된 사자 성어도 많지만 무수하게 몰려있는 까마귀들에 대해서 표현한 문장은 찾기가 어렵다. 지금 그나마 생각이 나는 수도 많은 까마귀에 대한 문장으로는 ‘三千世界の鴉を殺し、主と添寝がしてみたい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이고, 서방님과 늦잠을 자고싶구나)’ 라는 일본의 도도이츠 (都々逸、남녀들 사이의 사랑을 노래하던 속곡)가 있다. 이는 출처가 정확하지 않으나 19세기 일본 양이지사였던 다카스키 신사쿠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해석하면 까마귀가 우는 아침이 되면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실테니, 삼천세계 즉 사바세계의 까마귀를 모두 죽여 아침이 오지 않게해 당신과 함께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구나...라는 내용이다.
한국에서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유명한데. 하여간 여성의 깊은 애정과 그 깊은 애정을 실현하는 방식의 과격함으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왜 하필 까마귀이냐 하면, 사실 까마귀는 아침에 우는 새로 유명해서지만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사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결성 때문에 저 위의 도도이츠에서 한 발짝 더 나간 해석도 있는데.
고전 라쿠고로 유명한 산마이키쇼三枚起請라는 이야기의 베리에이션 중 하나로. 대략 내용을 설명하자면 남자손님과 쉽게 결혼 약속을 하는 기녀를 둘러싸고 그 기녀가 손님 중 세명과 결혼 약속을 한 걸 알게 된 남자들의 호들갑을 떠는 것이 이 라쿠고의 주요 스토리인데 앞 부분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다 빼고 까마귀에 대한 것만 설명하자면.
마지막 부분 드디어 기녀가 신의가 없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며 ‘너같은 신의가 없는 사람들 때문에 (계약과 신의를 담당하는) 우에노 신사의 까마귀가 한 번에 세마리씩 떨어져 죽는 것이다!’라고 말하자 기녀는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세상의 까마귀를 모두 죽이고 싶은데요?’ ‘아니 까마귀를 죽여서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럼 느긋하게, 아침잠을 자보게요’ 라고 대답하고 라쿠고는 끝이난다.
아까 위에서 설명했던 유명한 도도이츠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비틀어서 남자가 다 뭐냐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느긋한 아침잠이다 라는 기세 좋은 대답으로 끝내는 셈이다.

근본적으로 이 라쿠고에서 나오는 키쇼라는 것이 기녀가 기녀에서 은퇴했을 때 누군가에게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문서, 요는 키쇼를 세 장이나 썼다고 못난 남자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세 장을 쓰든 네 장을 쓰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종이 한 장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근성이 마음에 안든디. 나는 원본의 도도이츠보다 이 라쿠고에서의 주인공이 하는 저 마지막 대사를 몹시 좋아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까마귀는 억울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인간인데 우에노의 까마귀들이 떨어져 죽어야 하는가. 게다가 인간이 늦잠 좀 자겠다고 (까마귀가 좀 시끄럽기로서니) 그걸 다 죽이겠다고 하다니. 삼천세계이든 우에노든 까마귀가 떼죽음을 당하는 것은 둘 다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동네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까마귀의 서식지에 아파트를 잔뜩 지어버리니 도심지로 까마귀들이 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 분연히 주먹을 쥐고 역시 까마귀는 나쁘지 않다 보통은 인간이 나쁘다. 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지만 국도변 보도를 완전히 하얗게 물들인 까마귀 똥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걸 물로 청소 하고 있는 자영업자 분들을 보면 아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고 인간에게도 나름의 억울한 부분이 있어! 하는 생각이 들고 최대한 까마귀가 없는 도로로만 다녀야겠다고 결심한다.

어느 날 나는 오늘에야 말로 새로운 루트를 찾아볼까 싶어서 잘 가지 않는 길로 가보다가 국도 곁 야지가 그대로 드러나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와 쓰레기들만 가득한 구석의 어느 국도 변에서 연석과 트럭 사이에 까마귀 두 마리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주변을 찾아보았고 그 두마리 주변엔 하얗게 똥이 떨어져 있었지만 어디에도 까마귀 떼는 보이지 않았다.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무슨 연유에 떨어져 죽은 것이리라. 묻어주기라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땅이라도 팔 것이 있나 야지를 둘러보는데, 분명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까마귀가 아니 까마귀 떼가 야지 근처 나무 근처 어두운 곳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나는 쓰러진 까마귀를, 그리고 저 멀리의 까마귀 떼를 번갈아가며 보다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저 땅에 떨어진 까마귀는 어떤 이유로, 땅에 떨어지고 만 것 일까. 누가 어떤 인간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떨어진 것인가. 나는 급하게 자리를 비우고. 까마귀들은 이번만은 봐주겠다는 듯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20년 12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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