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내 티스토리에 비공개로 게시되어 있는, 지추 미술관에 관한 글의 일부인 모네의 수련에 대한 글이다. 17년 1월의 글이고 나는 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서 쓰다 마지막 결론을 내지 못하고 글을 닫았기에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해도 괜찮을 듯 하다.

(2)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수련Warter lilies

바닥이 이상하다. 흰색의 작은 (일반적인 주사위보다 작은) 정사각형으로 바닥을 깔았다. 물 빠짐과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것 일까. 습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까. 신발을 벗고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습기가 가득찬 공간에 있다는 착각이 든다. 그렇다 그것은 착각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 습기란 작품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는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한 공간에 있다는 착각은 작품 앞에 서있는 때 더 강해진다. 모네의 수련. 늪의 표면에서 터져나온 색과 생명.

전시 공간 안에 수련 다섯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이즈에 따라 배치 한 것인지 뒷면 양쪽에는 100*200의 작품이. 양 옆에는 200*200의 작품이. 그리고 정면에는...200*300의 두 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걸려있다. 압도적인 이미지. 물기가 하나도 있을리 없는 공간에 느껴지는 습기. 높은 천장으로 소리가 난반사되어 울린다. 들릴리가 없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수련이란 원래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었던가. 어쨰서 이렇게 거대하고 무질서하며 깊은 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늪으로 가득한 이 전시공간에서 수련이라는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혼돈이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그 혼돈에서 터져나온 생명이다.

사실 나에게 이 작품은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 지추 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이 수련을 보기 위해서 였다. 같은 여행에서 오하라 미술관의 수련을 보았지만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동양화를 전공하였는데 몇 안되는 서양화 그림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같은 그림이 식탁의 내 자리에서 보이는 곳에 걸려 있었는데 검은 밤과 숲을 그려넣은듯한 그림으로 항상 아무도 이 그림의 윗쪽과 아랫쪽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농담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수련을 몹시 닮았다.


모네의 그림을 그리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때때로 그리워 질 때가 있다. 그것은 모네에게 느끼는 그리움이라기 보다는 내가 어릴 때 부터 가장 많이 봤던 최초의 회화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이번 도쿄여행의 계기는 우에노의 서양미술관에서 하는 모네전에 수련 중 몇 점이 온다는 기사를 본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말을 꺼내보았지만 그 때 이미 나에게서 마음이 떠나있었던 여자친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간다고 하면 겨울 쯤이 되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어떤 변덕으로 나는 도쿄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혼자였다.

6일짜리 여행이었지만 실제로 여행이 가능한 일정은 4일 뿐이었고. 미술관의 휴일을 생각하면 그래도 인파를 피해서 관람을 할 수 있는 날은 금요일의 낮시간 잠시 뿐이었기 때문에 모든 일정은 수련을 보기 위한 일정을 먼저 정한 후에 하나씩 정했다. 아메카지를 하려고요. 러닝을 하려고요. 라고 말했지만 그건 모두 거짓말이었다. 나는 단지 한 점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여행을 왔다. 그 그림을 볼 수 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요즘 그릇이 깨져버린 사람처럼 자주 슬퍼하고 쉽게 화를 낸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질 때 마다 밖에 나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면서 러닝을 하고 긴 문장을 읽지 못하게 되어 불을 끈 채로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를 한다.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는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소원을 빌지 않기 위해서 너무 슬퍼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기도이다. 사람들은 세상 어디엔가 기도를 들어줄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말들을 한다. 자신의 말을 들어줄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영혼에 구원이 된다. 기도를 하는 행위 자체가 그 영혼을 위로한다. 하지만 나는 가끔씩 변덕스럽게 기도를 할 때 마저 거짓말을 한다. 그저 평화를 바란다고.

그렇게 거짓말쟁이가 되고 있기 때문에 바싹마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엔 식욕이 별로 없어요 라고 웃으면서 말을 하지만, 며칠 예전처럼 먹어보았는데도 살은 찌지 않고 그대로 세상 어딘가의 구멍에 떨어진 것처럼 체중이 다시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먹는 것은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그냥 눈 앞에 있는 것을 먹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여행에 와서도 무언가를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아무 것이나 먹었고. 야채가 부족한데 싶어서 호텔 조식을 두 번 먹은 것 외엔 정말 되는대로 먹었다. 커피? 향이든 뭐든 상관없이 커피면 그냥 아무 거나 먹었다. 제대로 된 커피는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여행 사실 상의 첫날 금요일. 황궁런을 뛰고 애플워치까지 사고 나니 배가 고플 만 했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우에노로 향했다. 아침에 호텔 조식을 성의있게 먹었기 때문이다. 흰 쌀죽에 명란젓과 낫토를 듬뿍 넣고 슬슬 비벼서 먹는 것이 내가 일본 호텔에서 제일 좋아하는 조식이다. 계란 후라이(써니사이드 업이어야 한다)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우에노의 서양미술관은 내가 언제나 좋아하는 곳이다. 미술관의 카페 겸 레스토랑 스이렌(그렇다, 그곳의 이름 또한 수련이다.)은 풍광이 좋아서 한가할 때 가면 기분 좋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를 보고 그곳에서 밥을 먹어야지 하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가을. 12월이 되었는데도 도쿄는 가을 같았다. 도쿄 사람들 나름의 고충이 있었겠지만 나는 바람이 쎄지도 춥지도 않은 12월의 도쿄가 마음에 들었다. 황궁런을 이미 한 번 해봤기에 방한 도구를 꽁꽁 싸매지 않아도 러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이 정도 날씨라면 매년 12월에는 도쿄에 와서 달리기를 해도 되겠어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우에노 공원은 언제나처럼 사람이 많았고 사람보다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은행잎들과 융단처럼 깔린 은행잎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떼를 지어 개찰구에서 쏟아져나왔다. 저 때는 뭘 해도 친구들과 함께라면 즐거울 시기이다. 나는 좀 외따로 떨어져 가방에 넣어둔 책을 읽을 생각이나 하던 아이였지만 그래도 친구들이랑 있는게 싫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우르르 어딘가로 향한다 서양미술관의 모네전 보다는 국립과학박물관에서 하고 있는 조류에 관한 특별전이 목표인가보다. 나도 저 전시는 꼭 보고 싶다.

아침에 편의점에서 티켓을 미리 사뒀기 때문에 줄을 서지 않고 수월하게 입장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네 전이 도쿄에서 개최 후 내년부터는 교토에서 또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아버려서(편의점의 예약 티케팅 예약 리스트에 떠있었다.) 내가 왜 기를 쓰고 여길 이 시기에 왔는가에 대해서 회의가 잠시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괜찮겠지. 미술관 앞에 웨이팅을 위한 배리어를 설치해둔게 말도 안되게 긴걸 보고 내가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기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좁지도 않은 서양미술관의 앞마당에 구불구불하게 줄을 설 수 있는 곳을 만들어두었다.

* 혹시 모르니 써둔다. 도쿄의 서양미술관에서의 전시는 25년 2월 11일 까지이고, 교토의 교세라미술관(아이구)에서 25년 3월 7일부터 6월 8일까지. 그리고 도요타시미술관에서 6월 21일부터 9월 15일까지 전시가 이어진다.

사람은 적지 않았지만 모네 전 관람은 1시간을 조금 넘겨서 다 볼 수 있었다. 모네 전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아는 모네이고. 당신도 모네에 대해서는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전시에 대해서 코멘트 하자면 전시품은 충실했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작품들로 잘 구성되어 있었다.

5개인가로 나눠져있는 전시 중에 해외에서 가져온 작품들을 모아둔 3전시의 작품들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두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보존의 목적이 아닌 이상 작품의 사진 정도는 마음 껏 찍게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3전시실에 이르자 사람들이 모두 작품을 보지 않고 온 힘을 다해서 사진만 찍고 있는 것을 보자 생각을 바꾸었다. 나도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하지만 위대한 회화를 볼 때 마음 속에 남는 그 충격과 감상이야 말로 회화를 보는 진정한 보상일텐데 사진을 찍어서 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으면 그 회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가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여간. 아무렴.

전시를 다 보고서는 서양미술관의 상설전을 보았다. 훌륭한 작품이 꽤 많다. 교과서에나 있는 그런 작품들도 있어서 나는 꼭 상설전을 챙겨본다. 다 보고 나니 힘이 쭉 빠져서 미술관 굿즈를 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모네 특별전 굿즈들은 모두가 사고 싶어했는지 굿즈를 사러 입장하는 줄이 미술관의 중정부터 이어져있길래 포기하고 상설전의 굿즈를 조금 샀다. 엽서와 마그네틱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는 기대하던 카페 스이렌으로 가서 파스타와 커피를 시켜서 먹었다. 모네 특별전을 기념해서 뭔가 웃기는 특별 메뉴라도 있을줄 알았는데 만날 나오는 그 뭐냐 파스타+디저트+커피의 세트가 전부였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리 싸지도 않는 세트인데 좀 웃기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문득 교토국박에서 마신 블렌드 커피 류노스케가 생각났다.
자리는 어디에 앉아도 미술관의 중정이 잘 보인다. 공항에서 사온 메모장에 러닝을 할 때 봤었던 큰부리 까마귀의 그림을 그렸다. 까마귀들은 지성을 가지고 사람을 쳐다보는 것이 제법 무섭다. 하지만 그 까마귀는 내가 뭔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날아가버렸다. 왜?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눈이라도 쫄 생각이었던거야?


모네의 전시를 보던 중, 어떤 그림 앞에서 나는 울었다. 나라는 그릇이 깨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쉽게 우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울었다는 말에 몹시 놀라는 지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흐느꼈다기 보다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서 계속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두었다. 어떤 그림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꽃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 색과 형태의 흐트러짐이. 너무나 영원같고 덧없어서 눈물을 흘렸다. 아니 거짓말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노쇠한 화가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너무나 기가 막혀서 울었다.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다. 이 그림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서 괴로웠다. 말이 흘러넘치는데 그 말들이 그대로 바닥 어딘가에 흘러 떨어지고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그런 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고독했다.

나는 꽃을 찾으러 이곳에 왔지만. 그것 뿐이었다. 꽃을 찾는 일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덧없이 사라져 버릴 그런 마음이다. 어쩌면 나의 유일한 친구인 당신이라면 내가 어떤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알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다만. 다만 그 조차도 큰 의미는 없는 일이다. 하찮기 그지 없다.

잘 생각해보면 사람의 생명만큼이나 그 소원이란 대체로 하찮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 꽃을 당신과 함께 보고 싶었다 라든가.


24년 12월의 글이다.


<이전 까지의 스토리>
나는 일본에 여행을 가서라도 러닝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실제로는 그게 꽤나 바보 같은 아이디어란 것을 깨닫는다.

이 글을 쓰면서 들은 것은 Laufey - Let you break my heart again 이다. NPR에서 한 라이브 버젼 밖에 없는 줄 알고 있었는데. 22년에 발매한 앨범에 (스튜디오는 아니고 이것도 라이브지만) 수록곡으로 있는 걸 발견해서 열심히 듣고 있다. 이 아티스트에 대해서는 몇 번 적은 것 같지만 모든 것이 정확하다 박자와 음정, 이 사람이 부르는 노래의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피치포크의 어떤 앨범 리뷰에서는 심술궂게 그에 대한 수식어로 틱톡이 가장 사랑한 현대 재즈 보컬리스트라고 적었다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티스트의 기량은 항상 모든 심술궂은 말들을 반박해낸다. 어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정도로 엄청난 곡은 아니긴 하다. 나도 그냥 피치포크에서 뭐라고 하면 일단 빈정거리고 싶은거다.


<시부야>

6년만의 시부야는 엄청난 곳으로 변해있었다. 내 딴에는 히카리에 정도가 최신 트렌드였다만. 어느새 생긴 시부야 스크램블과 스트림 때문에 길을 찾는게 정말 어려웠다. 일본은 올해 25년 엑스포를 준비하고있기 때문에 좀 번화가다 싶은 곳은 어디나 공사 중이다. 특히나 시부야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공사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많이 바뀌었는데 또 뭘 바꾸겠다고? 어떤 느낌이냐면 교차로와 거리들을 너무 꼬아둔 나머지 직관적으로 눈 앞에 보이는 곳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한 거리가 되었다. 도겐자카도 이제 더 이상 라멘이나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원래부터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쇼핑이 아니면 시부야에 올 일이 없는데, 앞으로 더 시부야에 올 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부야의 사람들은 열심이었다. 어딜가나 관광객이 많은 도쿄지만 시부야와 하라주쿠는 좀 특이하게 일본인들의 비율이 꽤 높은 느낌이다. 너무 복잡해진 거리 때문에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흥미를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시부야에 흥미를 느낄 사람이면 역시 일본의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원래 시부야의 완전한 중심지였던 하치공 광장 근처에 거대한 주술회전 광고판이 있는 것을 보고 엄청 웃었다. 주술회전에서는 작 중 시부야에서 사고가 터져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는다. 야 너희들 여기 있다간 다 죽어 이런건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시부야에 오면 으레 갔었던 음악감상 카페 같은 것은 가지 않았다. 더 이상 뭔가를 먹는 것에도 듣는 것에도 미련이 없는데 그런걸 해서 뭘 하겠어 하는 생각이었는데. 거꾸로 좀처럼 들르지 않는 타워레코드에서 잘 모르는 음반들의 청음을 하다보니 묘하게 즐거워졌다.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음악을 듣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정작 음악을 열심히 들을 때는 타워레코드 놈들 음반 리뷰들은 다 엉망이야 라고 투덜거리면서 1층만 훑어보다 나가곤 했는데. 7층의 구석진 코너에서 추천 음반을 청음하고 있노라니 내가 오랫동안 잊어버린 어떤 애정을 다시 찾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음반 리뷰들은 엉망이고 알 수 없는 말이나 길게 늘어놓았지만. 거기에 음악이 있다는 것이, 아직도 이렇게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다음에 들른다면 꼭 맘에 드는 엘피를 한 뭉치 정도 사서 가야지 하고 다짐했다. (이번엔 안 샀다는 이야기이다. 말했지 않는가 유니클로 파커코트 엄청 두껍다고)

시대는 틱톡의 시대가 되었고. 3분도 못참아서 40초의 음악만을 듣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고리타분하게도 판 위에 바늘을 올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나에겐 안심이 되었다.


<긴자-유락쵸-신바시>

한 때 유락쵸에는 무인양품의 비공식적인 본점이 있었다. 거대한 건물에 무인양품 물건이 가득차 있는 멋진 곳이었는데 그 곳이 사라진 이후로 나는 유락쵸를 조금 덜 좋아하게 되었다.

전에 내가 이 거리에 대해서 썼던 글이 생각난다. 회사원으로 가득해서 무심코 눈이 마주친 사람들마다 다 나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속해 있는 거리는 여기가 아닐까 싶다. 라고 했던가. 이제는, 이제는 택도 없지. 나는 이제 사시사철 회사원의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대체로 멍하고 풀린 눈을 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황궁에서 부터 도쿄역까지의 거리를 깨끗하게 정비 중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몰라볼 정도로 깔끔해져있었다. 마루노우치 스트리트 같은 속빈 강정(퉷)도 생기고 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가게들은 엄청나게 사라져서 여기가 내가 알던 도쿄역 인근이 맞나 하며 투덜거리다가 유락쵸 근처로 가보니까. 사람이 많고 시끄럽고 좁은 곳에 복작복작한 것이 내가 알던 유락쵸가 맞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심지어 4억엔? 정도 최종 1등 상금이 붙어있다는 점보 어쩌고 복권을 사려고 500명 정도가 줄을 서있는 모습을 보자(500명이란 말은 농담도 과장도 아니다. 나는 운동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 이것이 유락쵸지 하는 생각에 흐뭇해졌다.

이번 여행 중에 가장 많이 간 곳이 이 도쿄-유락쵸-긴자 라인이다. 나이가 드니까 새로운 맵을 열고 싶지 않다는 그런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서 꼭 가야할 것이 아니면 다른 곳에 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대체로 이 동네에 있었다. 어쨌거나 나에겐 익숙한 동네이고. 긴자는 좀처럼 가게들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도쿄도에서도 압도적으로 길을 찾기가 쉬운 곳이다. 긴자의 버버리 매장은 아직도 위치를 알 고 있다. 신입사원 때 쯤에 아직 버버리 같은 것에 대해서 동경이 있었던 그 시절 아시아에서 버버리 코트를 산다면 바로 거기지 하는 추천을 받아서 갔는데. 무려, 놀라지 마라 무려 버버리 코트가 90만원이었다. 지금은 350쯤 할 것 같은데. 어…하여간 거기서도 어깨에 사이즈가 맞지 않아서 코트를 사지 못하고 내심 안심한 기억이 있다.

이제는 긴자에서 간다면 츠타야 서점이나 유니클로 말고 딱히 가고싶은 곳도 없다.

긴자 미츠코시 지하에 벤치가 있었던 곳에는 벤치를 치워두었다. 어느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본에 출장을 온 ㅊ차장과 이미 30일을 넘긴 장기 출장 중이었던 나는 시간을 맞춰서 만났는데. 일본에 왔으니 뭐라도 그럴 듯한 걸 해야지 하는 ㅊ차장의 의견에 굳이 긴자에 가서. 그 지하의 식품관에서 본 것 중에 가장 신기하게 보였던 복숭아 빛깔을 한 커다란 딸기를 사서 나눠먹었다. 그렇다 지금은 없어진 그 벤치에서 먹은 것이다.

뭐냐 이거 맛이 특이하다. 그러게요. 너 일본에 대해선 뭐든지 아는거 아냐? 제가 일본 대통령이라도 되나요 뭐든지 알진 못해요. 같은 소리를 하면서 ㅊ차장(차장이라고 하지만 나에겐 그냥 형 같은 사람이었다.)과 좀 잡담을 했지만 ㅊ차장은 긴자는 역시 너무 복잡하다고 진절머리를 내며 숙소로 돌아가버렸다. 왜 미국에서 태국으로 가던 길에 여길 들른 걸까? 그 때는 이해가 안 갔지만. 글쎄 지금도 이해가 잘 안간다.

하지만 세어보면, 내가 당시의 ㅊ차장과 비슷한 연차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왜 ㅊ차장이 일본에 들렀는지 알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시나가와>

시나가와 같은 곳을 왜 좋아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오해가 있다 나는 시나가와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도쿄 도내 어디를 가더라도 1시간이면 도착하는 탁월한 교통편의성을 높이 사는 것 뿐이다. 이번에 황궁런을 하면서 느낀거지만 다음엔 꼭 도쿄역 근처에 숙소를 잡고 매일매일 황궁런을 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애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한 300밤 정도는 시나가와에서 잤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교통이 편리하면서 비교적 조용한 곳이 그렇게 많지 않다. 잠깐만 너무 이상한 말인데 일단 시나가와는 하나도 조용하지 않다. 그나마 조용하다는 평판에 도움을 주던 다카나와의 상가건물 몇개가 통채로 철거되었고. 더럽게 비싸고 맛은 없던 싱가폴 게요리점도 사라지고 말았다. 더럽게 비싸고 맛이 없더라도 사라지는건 다른 문제이다 아쉬운 건 아쉽다 이거다.

황궁런을 뛴 후, 러닝이 그렇게 편안한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번 시나가와 숙박이 마지막 시나가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핑계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다이바나 아라카와에 가서 러닝을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3일 동안 내내 시나가와 근처를 달렸다. 골목 하나 상가 하나 전부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분히 감상적인 나의 시나가와에 대한 작별인사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말도 안되게 비싸져서 더 이상 가성비가 좋다고는 도저히 말 할 수 없게 된 다카나와 호텔에 대한 작별 인사라고 해도 좋다.

시나가와 근처를 달리기로 한 첫번째 날에는 시나가와 역을 가로질러 소니 건물까지 간 다음 러닝을 시작했다. 덴노즈아이루와 부둣가를 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시나가와라고 한다면 그 동네를 떠올릴텐데 나는 거기에 가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냥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언덕처럼 경사가 있는 다리를 건너자 끝에서부터 천천히 바다가 보이고. 다리를 내려와 사거리를 건너 공터 옆을 지나자 야구를 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부둣가의 컨테이너 하역장이 가까워 먼지가 많고 트럭들이 점잖은 거인들처럼 신호를 지키고 섰지만, 막상 스치기만 해도 박살이 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아 이렇게 먼지가 많다니 완전 실패다 부둣가 달리기에 이상한 로망을 갖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바다 옆 물류 지대를 뛰었다. 낄낄 웃음 소리가 나왔다. 상상도 못하게 맹렬한 바닷바람이 불어서 순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온이 분명 2~3도 정도 였을텐데 이 추위는 뭐지 하고 생각하며 부둣가를 달렸다.

돌아오는 길엔 부리또를 사 먹었다. 된장국에 생선구이라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나에게도 일본인에게도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돌아오기 전 날 마지막 날에는 호텔 주변을 뛰었다. 호텔 부지를 뛰기엔 좀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어서. 고갯길을 달려 내려가 할 수 있는 한 - 신호등이 허락하는 한 - 멀리 북쪽으로 달렸다가 방향을 꺾어서 커다란 사각형을 그리며 달렸다. 해가 뜨기 전의 밤이었고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때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부지런한 일본인들은 뭐지 이 미친 새끼는? 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동네 골목길에서 러닝을 할 정도로 짜증나는 인간은 일본에도 몇 없었을 것이다. 골목에 대해서 뭐라고 묘사를 하면 좋을까.

나는 사실 이 동네의 골목길을 알 고 있다. 출장을 와서 숙소에 돌아가면 보통 심야였고 그러면 나는 그대로 짐만 풀고 일을 하다가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걸로 자는 걸 대신했다. 때때로 시간이 남으면 호텔에서 기어나와 멀지도 않은 이 동네를 혼자 산책하곤 했다. 어디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지. 어디에 자판기가 있는지 대체로 알 고 있다. 어느 기업인가 새로운 연수원을 만든다고 역시나 공사를 하고 있어서 내가 좋아하던 나무가 없어진 것을 보고 꽤 기분이 나빴지만 외국인인 내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그냥 그렇게 골목을 달렸다.

차갑게 낮아진 공기가 천천히 떠오르는 해에 달궈지는 걸 느껴보려고 노력하면서. 계속해서 러닝을 했다.
다음 언젠가는 너무나 먼 훗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24년 12월의 글이다.


며칠 째 몹시 아프다. 여행기를 쓰면서 여행을 다닌 시기 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은 생각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생일날을 독감 3일째와 맞으면서 겨우 집에서 기어나와 우유와 롤케익, 군고구마를 샀다. 불쌍한 초등학생의 구호식품 같네 싶어서 롯데리아에 들러서 버거도 두개 샀지만 하나를 다 먹지 못했다. 목이 너무 아프다.
이번 여행을 하는 내내 말이 넘쳐 흘러서 고통스러웠다. 내뱉지 못한 말들은 원형으로 서로의 꼬리를 물며 커다란 그림을 그렸고 나는 내가 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12월 14일 도쿄 주교좌의 마리아 대성당의 뒷자리에 앉아있다 깨달았다. 고독보다 불행한 것은 쓰여지지 못한 글이다. 나는 계속해서 쓸 생각이다.

이 글을 쓰면서 들은 것은 Orihusay - Eternal Slumber 이다. 많은 시부야계가 솟아 올랐다 사라졌고 누자베스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설이 되었다. 이제 누자베스는 거의 시부야의 전통민요 같은게 되어서 티셔츠까지 파는 그런 아티스트가 되었는데. 과연 그를 따라갈 아티스트가 있을까? 모르겠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의 스타일을 따라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유튜브 로우파이채널에나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음악이다. 너무 가혹한 평가라고? 설마…


내가 어디까지 얘기 했더라. 아메카지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는 얘기까지 했고 그들에게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패션으로 피의 복수를 한다면 역시 엄청난 패션력과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서 24년 전국 고교 패션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그 정도의 스토리가 필요하겠지?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복수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다.

바로 전의 글에 썼던가, 내가 결정적으로 잘못 생각한 것 중에 하나가 러닝용 도구를 너무 많이 챙겼다는 것인데. 비싼 돈을 들여서 킹사이즈 베드 룸을 고른 주제에(심지어 혼자 쓴다) 러닝용 셔츠를 매일 밤마다 대충 물 빨래를 해서 걸어두면 된다는 생각을 안 했다. 대체로 러닝용 의류들은 세척이 장난 아니게 쉬운데 못생김을 댓가로 이런 무시무시한 힘을 얻은걸까? 하여간 러닝용 티셔츠를 4세트나 챙겼는데 실제로 쓴 건 러닝용 셔츠+바지+바람막이 뿐이었다. 바람막이야 애초에 세탁을 하는 의류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황궁런을 한 첫날 11시에 방에 들어와 왠지 심술궂은 기분이 들어 땀내가 나는 셔츠를 뜨거운 물로 촥촥 씻어서 걸어놓았더니…다음날 아침 깔끔하게 말라있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옷을 입고 러닝을 했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동행이 있었다면 꽤나 민폐여서 할 수 없는 방법이겠지만 정작 나 본인은 그렇게 깔끔한 사람이 아니라서 전혀 상관없었다. 그래서 3세트나 되는 러닝용 의류는 전혀 쓰지도 못하고…그냥 자리만 차지했다.

이렇게나 캐리어에 공간이 남을거면 최대한 유니클로가 아닌 옷을 입고 여행에 올 걸 하는 무의미한 생각을 하면서도, 네 여러분 여행의 사실상 첫날이었던 금요일에도 아메카지를 시도했습니다.

<아메카지 1트, 우에노의 아메요코>

그야말로 10년 만에 우에노 근처의 아메요코 시장을 가서 유명한 아메카지 편집 스토어들을 돌아다닌건데. 나는 사실 아메요코에 그런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시끄러운 술집이랑 노점 있는 곳이 아닌가 정도로 이제까지 생각해왔고. 우연히 지나치다가 한 번 들른 후로는 올 생각도 안한 곳이었다.

아무리 날티를 내봤자 묘하게 단정한 느낌의 아르켓 헌팅 자켓에 아르켓 진즈를 입은 저는 도대체 어떤 멋쟁이들을 만나게 될 까 두근두근 거리면서 아메요코 시장을 향했습니다만. 과거의 나를 찬양하라. 예전에 내가 기억했던 대로 그냥 시끄럽고 노점이 많은 곳이 맞았다. 지나가는 옷가게 마저도 AI로 각종 고양이들과 트럼프 대통령을 디자인한 프린트 셔츠들을 잔뜩 진열해놓은 곳이나 있었을 뿐. 그 외엔 지나치게 털옷이거나 지나치게 가죽옷인 가게들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5분을 넘게 걸어서 그나마 유명한 ㅎ점포에 도착했을 때는 기대가 거의 없었으나, 역시 유명한 곳은 달랐다. 꽤 괜찮아 보이는 거친 자켓과 클래식한 디자인의 청바지들. 그리고 너무 유명한 나머지 현금을 잔뜩 이고 지고 온 한국인, 중국인 하여간 여러나라의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관광객놈들아.

나는 돈이 있다는 티를 내려고 비싼 자켓을 들춰보기도 하며 열심히 구경을 했지만. 돈 있는 티는 중국인들을 당해낼수가 없었던게 도대체 왜 청바지 똑같은 디자인을 4장 씩 사는거지? 왠지 기가 죽은 나는 옆에 있는 그 가게의 분점에 가서 친절한 응대와 상담을 받았으나. 원래 목적했었던 브랜드는 없었고 웨어하우스 진의 한정판이라고 주장하는 바지를 판촉하려고 하셔서 (비쌌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웃으면서 인사했다. 예쁘기는 예뻤기 때문이다.

<유니클로 1트, 긴자의 유니클로>

촌스럽다고 하지 마라. 내가 도쿄에 제일 많이 가던 시기에는 긴자의 유니클로 플래그십 스토어가 제일 간지나는 유니클로였다. 현재 도쿄에 살고 있는 선배의 말로는 그 건물 디자인이 너무 이상한 관계로 미어터지는 관광객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 물건이 그리 많지 않다고. 그러면서 추천해 준 것이 유락쵸의 유니클로였는데. 그 곳의 이름은 도쿄 유니클로이고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안 그래도 선배와 저녁을 할 약속이 있었는데. 나에게 면세 셔틀을 시키는게 주 목적이었던 선배가 유니클로 가실래요? 살거 없어요? 살거 있죠? 아 여기 유니클로가 딱인데. 하면서 나를 마구 충동질 하였으나. 기억하라 유니클로와 동키호테는 사람이 갈 곳이 못 된다. 어찌저찌 일본여행을 가면 한 번은 가게 되지만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다. 나도 그래서 주로 갔던 곳은 단층으로 되어 있었던 아키하바라 유니클로였다. 그런 조그만 곳에는 관광객들이 덜 몰린다. 도대체 왜 그럴까 너희들은 크다고 뭐 너희가 옷을 백점씩 사는 것도 아닐텐데 말야.

사려고 했던 것은 정확히 정해져 있던게 유니클로U에서 나왔던 롤업백이었는데. 실은 한국에서 발매되자마자 뭐지 이거 하고 클릭해서 기계적으로 샀습니다. 사놓고 보니 너무 좋아서 왜 이런 좋은 가방이 나온거지 하고 당혹스러워서 보니 다들 사고 싶어서 난리가 난 아이템이었다. 적당히 세련되고 적당히 싸고 후루룩 펴면 수납력이 아주 좋아서 한국에서 메인 가방으로 쓰고 있다. 근데 그걸 다른 색으로 하나 더 사고 싶다는게. 나의 요즘 이상한 습성. 뭔가 하나를 샀는데 아주 좋아 -> 그럼 하나를 더 사면 더 좋겠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논리인데 하여간 옷장에 똑같은 옷이 자꾸 늘어난다. 그런데 그 롤업백의 마지막 재고가 제가 일본에 도착하기 이틀 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도쿄에만 없는걸까? 하여간 일본 유니클로의 시스템에서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겨울엔 코트만 입는다는 나의 정책을 무시하고 하이브리드 어쩌고 한 파카 코트와 한국에서 품절이지만 딱히 살 생각은 없었던 셔츠를 샀다. 같이 줄 선 중국인들이 30점씩 사는데 나 혼자서 1점을 사는 것은 좀 바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면세품 계산의 줄이 엄청나게 길고 그 계산 속도도 느려서 5점 정도는 사야 그 줄 서는 시간이 보상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여간 유니클로의 큰 규모 매장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뭐 패스트 리테일에서 공짜로 옷을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막 바닥에 앉아서 뭔가 계산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가족들이 태그를 이뤄서 한 명은 줄을 서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옷을 주워오고 그러는데.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는데도 줄을 서야 했다. 그것도 꽤 긴 줄이어서 나는 너무 후회가 되어(이것이 첫번째 후회가 아니었다.) 그냥 집(호텔)로 가버릴까 유니클로 따위 없어도 되지 않나? 유니클로가 우리나라에 한 짓을 생각하자 막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2층은 더욱 난장판이었다. 묘하게 무신사 티가 나는 옷을 입은 청년들이 앞다투어 지나갔고 각 나라 사람들이 각 나라의 말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 이것이 지옥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입장을 한 이상 시간을 최대한 들이지 않고 뭔가 사긴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코트와 셔츠를 산 것이다.

나는 딱 2점을 들고 계산대에 줄을 섰으면서 너무 후회가 들어서(이것이 마지막 후회가 아니었다.) 그냥 이걸 버리고 집(호텔)에 갈까 아니면 그냥 옆에 진열대에 놓인 목도리라도 쓸어담을까 하고 있었는데. 내 바로 앞에 서있던 마른 남자가 딱 1점. 파커 베스트만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아 그래 세상엔 저런 지혜로운 사람이 있구나 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지혜로다 이러고 참고 있었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길고 긴 기다림이 필요 없이 그냥 면세가 아닌 줄을 서서 옷을 계산하고 가면 될 것을. 그 사람은 딱 한 점 파커 베스트를 들고 현금으로 깔끔하게 계산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내 차례가 되어 여권을 제시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인과도 같은 모습에 질려서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성난 러시아인(내 뒷 차례)의 호통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여권을 꺼냈다. 도대체 뭐였을까 그 사람.

<아메카지 4트, 에비스의 W와 J>

여러분에게 하나하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계속해서 도쿄 도내의 유명 아메카지 매장을 찾아다니면서 아메카지를 테스트해보았다. 예를 들자면 2트쯤 되었던게 마루노우치 스트리트의 빔즈 플러스 매장으로, 일단 바버를 말도 안되는 가격에 팔고 있는 것에 좀 질린데다가 어떤 사이즈로 입어도 팔이 짧아서 아메카지가 맞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일본에서 사는 옷들은 대부분 팔 길이가 맞지 않는다. 내가 팔이 약간 긴 편이긴 하지만 애초에 일본에서 유니클로 옷만 죽어라고 사는 이유가 팔길이가 맞는 옷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슬램덩크의 등장인물들은 평소에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얘네는 나이키 갸쿠소 마저도 팔이 짧은데 혹시 겨울에도 반팔만 입고 다니는 걸까. 오기가 좀 들어서 마루노우치에 그럴 듯한 옷 가게는 다 들어가봤는데 대체로 몸통은 엄청나게 좁고 팔은 지나치게 짧았다. 여행 중에 입은 것은 아르켓에서 나온 헌팅 자켓인데 나에겐 좀 커서 팔을 접어서 입고 다닌다. 이 정도 천 크기면 일본 기준 엠사이즈 옷은 세벌도 만들겠다 싶다.

시부야에서 몇 군데 돌아다닌 구제 스토어도 비슷비슷했다. 친구가 시부야에 살고 있어서 어쩔수 없이 간 시부야지만 최대한 즐겨보려는 마음으로 구제 스토어를 돌아봤는데. 닌텐도 스토어에 갔을 때의 10분의 1만큼도 신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분 저는 키가 188에 90킬로그램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저처럼 너무 과하게 크지 않다면 충분히 시부야의 패션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엘든링의 알렉산더 티와 괴혼의 왕자님 후드티가 사이즈 스몰 밖에 없다고 했을 땐 정말로 화가 났다. 바가지란 걸 알면서도 사겠다는데 왜 팔지 않는가?

하여간 여행 전에 보아뒀던 유명 청바지 브랜드 웨어하우스와 제라도를 가려고 굳이 역 하나 거리인 에비스까지 갔는데. 원래 웨어하우스 청바지를 사고 싶었던 터라 웨어하우스를 갔는데 점원의 대응이 정말 별로였다. 시착을 하려고 내가 들고 있는 청바지를 갑자기 들고 가버리지 않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일본어를 써서 그런가 영어도 내가 너희보다 잘할텐데 하는 일본에 올 때 마다 수십번씩 하는 의문이 또 머릿 속에 떠올랐는데. 실제로 내 친구 중에 하나는 일본어를 꽤 잘하는데도 일본 여행에서는 절대로 일본어로 말하지 않는다. 친절한 일본인이라는 이미지는 결국 권력관계에 충실한 일본사회의 왜곡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꽤 마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고 별로 기대하지 않고 다른 브랜드인 제라도에 갔다.

제라도는 비교적 한가한지 점원들 끼리 재미있게 놀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엄청나게 친절했다. 홈페이지에서 봐두었던 자켓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서 살 뻔 했는데. 이제까지 어떤 아메카지 매장에서도 얘기하지 않았던 면세처리 얘길 먼저 하면서 외국인이시면 이 가격에 살 수 있어요 하고 가르쳐주었다.

묘하게 감동한 나는 가까운 카페에 가서 팬케잌을 먹으면서 1시간 정도 고민한 다음, 웨어하우스에서 홀대 당한거에 열받아서 사는거 아닌가 하며 잘 생각해보다 제라도에 가서 34천엔 짜리 청바지를 샀다. 지금 잘 사시는거에요 얼마 전에 가격이 내렸거든요 라는 그럴듯한 손님 접대용 코멘트에 대해서 반감도 들지 않았고 또 올게요 하고 인사를 했다. 아니 자켓은 진짜 못 사겠더라고요 그거 정가면 10만엔이던데. 그거 사면 나는 파산이야. 파산은 둘째 치고 유니클로에서 파커 자켓 사서 공간도 없어…

이상이 이번 여행에서 나의 아메카지를 둘러싼 모험의 결과이다.

34천엔짜리 청바지 한 벌

피의 복수 실패.
이상.


24년 12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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