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0년 1월 씨엠립 여행기의 일부였던 글이다. 너무 내용이 길고 사변적이라 원래의 여행기에서 분리한다. 하지만 이 글이야 말로 내가 씨엠립 여행 동안에 정말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글의 배경이 되는 곳은 사원 유적인 반테이 삼레와 반테이 스레이이다.

“어떤 것이나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능력있는 것이 있거든, 그것은 내 광명의 단편으로 된 것이다/그러나 아르쥬나야, 이 많은 것을 네가 다 알아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이 온 누리를 내 한 조각으로 뒤덮어 지지 하고 있느니라” (바가바드기타 10장 41-42, 함석헌 역)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이단은 “현재”만이 우리의 유일한 현실이라는 주장이다.
모든 종류의 종교에서 현실은 이상세계의 불완전한 반영이며 믿는 자들이 해야할 최우선의 과제는 죄를 반성하든, 인신공양을 하든, 아니면 성스러운 전쟁을 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든 최선을 다해 이상 사회를 현실 세계에 강림시키는 것이다. 이상세계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현실세계에서 모든 것은 투쟁이며 영광은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와 희생에서만 비롯한다. 번개와 비를 믿던 원시 종교에서부터 19세기에 발생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종교는 현실과 이상과의 갈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장미는 붉고 제비꽃은 푸르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 인가. 종교와 사회가 소통하는 기본 구조에 대한 나의 주장은 기껏해야 아마추어의 논변일 뿐이다.

그럼 무언가 세상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로 바꿔보자. 모든 종교가 사회와 갈등하는 이유는 종교가 가진 이상사회가 현실에서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종교가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나, 한 사회를 완벽하게 지배 하에 둔다고 해도 그것에 만족하는 일은 없이 항상 더 많은 것을 바랐다. 그들은 믿는 자들에게 천년의 왕국을 약속했고 그 믿음을 세계의 끝까지 전하길 바랐다. 세계의 끝까지 도달하면 어떻게 되냐고? 그런 경우 믿는자들은 세계가 멸망하고도 계속해서 자신들의 신이 세계를 보살피고 그들 모두를 다음 세상으로 데려 가길 바랐다.

믿음은 항상 하나를 이루면 다른 하나를 바랐다. 이러한 끊임없는 꿈틀거림은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속성일까 아니면 이익집단이 갖는 결코 버릴 수 없는 확장의 욕망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런 것들이 종교에서 바라는 이상에 바로 그러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결국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믿음 안에서는 불완전한 세계일 뿐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두고 우리가 있는 현실의 세계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나는 4박 5일의 씨엠립 여행을 끝내고 밤 늦게 공항에 도착했다. 운전기사에게 악수를 하고 짐을 챙겨 공항에 들어갔다. 공항 앞에서는 모여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무 명이 조금 안 되었을까, 모두 20대로 보이는 밝고 명랑해보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기도가 끝나자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그들의 단체 사진을 찍어주었다. 며칠이나 있었는데 저 사람들은 얼굴이 타지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긴 나도 사나흘 있는 걸로는 얼굴이 타지도 않는다. 고소를 지으며 그 사람들을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떠들썩하게, 아니 떠들썩 하다는 표현은 이상하다 결코 크게 떠들지 않고 함께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캐리어를 끌고 표를 발행하러 떠났다. 나는 우르르 몰려가는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천천히 카운터로 갔지만 그들은 그대로 줄 바깥에 서서 서로의 여권을 챙기고 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아무래도 티케팅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 사람들을 가로질러 티케팅을 하고 역시나 이 사람들 나랑 같은 비행기인가 하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카운터에 서자 무슨 눈치라도 보고 있던 것 처럼 내 뒤로 그 사람들이 줄을 섰다. 평온하고 밝고 명랑해보이는 얼굴이었다. 아까 시끄럽게 느껴졌던 것은 이 사람들의 표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를 탈 때 까지 그 사람들은 조금씩 늦게 내 동선을 따라 왔다. 나는 비행기 시간까지 3시간이나 기다려야 했고 책을 읽다가 그 사람들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는다. 공항의 밖에 있을 이 곳의 밤에 대해서 생각한다.

씨엠립의 밤은 새까맣다. 길 위에 비추는 헤드라이트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때때로 길 주변에 누군가가 서서 전구로 불을 밝히고 무언가를 팔고 있다. 아무리 자세히 보려고 노력해도 그 사람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낮에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햇볕은 너무 강하고 먼지는 뽀얗게 피어올라, 지나가는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커다란 유적군인 이 곳은 어떤 유적을 갈 때도 삼륜차를 타고 움직여야한다. 한 두곳 쯤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금세 딱딱한 바닥과 뜨거운 해 때문에 지치게 된다.

앙코르왓 사원에서 20분이 넘게 먼지가 가득한 길을 한참이나 가면 반테이 삼레가 나온다.
길을 따라 마을이 있고 사람들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지나간다. 교복을 입은 아이가 다른 아이를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뚝뚝의 뒷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나를 흘낏 쳐다본다. 해가 내리 쬐어서인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지만 살짝 날 보며 웃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면 처음부터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투어 첫째날 오후의 첫 일정으로 가게 되었지만, 반테이 삼레는 예정에 없던 곳이었다. 오전 투어를 맞추고 혼자 점심을 먹으며 사람에 지쳐서 지도를 보다가 사람이 없을 법한 - 스몰 투어 코스에서도 그랜드 투어 코스에서도 조금 먼 - 사원을 하나 고른 곳이 반테이 삼례였다. 일본어가 적힌 헬멧을 쓰고 먼지가 많은 길을 뛰느라 더러워진 셔츠를 입은 뚝뚝 기사는 5불을 더 달라고 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이 인기 없는 사원은 사람이 한참 많을 오후 1시에 갔는데도 나와 프랑스인 부부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하긴 씨엠립의 이 사원군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 활기차고 신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뚝뚝을 내려 사원으로 가는 길은 숲 안으로 걸어들어가게 되어 있고, 그 중간 쯤 지뢰로 신체의 일부를 잃은 군인들이 캄보디아의 전통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사원의 외곽은 붉지만, 내부는 앙코르 왓처럼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사원의 앞에 서면 햇볕이 너무나 강해 새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고푸라(사원의 탑 형태의 출입문, 보통 화려한 부조로 장식되어있다)에는 신들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었고 이 세계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가 새겨져 있었다. 비슈누는 양 다리로 악마의 목덜미를 틀어 죽이고. 시바 신은 우주의 중심에서 춤을 춘다. 작은 사람들이 춤을 추는 신 주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혹자는 시바 신이 춤을 추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멸망할 때라고 했다. 자동차 도로와 이어져 있는 북쪽 입구는 원래의 입구가 아니다. 벽을 돌아 동쪽 입구로 걸어 들어가면 원래는 물이 가득차 있었을 해자가 보이고 길을 건너면 내벽. 그리고 전실로 이어진다. 전실은 누가 여기서 무엇을 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작고 좁다. 뭘 위해 만들어졌는지 뭘 할 수 나 있었는가싶다. 올 때 분명 같이 있었던 노부부는 큰 흥미가 없는지 화려한 고푸라만을 구경하고 중앙성소에서 사진을 찍더니 금세 어디론가 가버린다.

중앙 성소는 아름답고 그 안의 신상에는 작은 꽃이 공물로 놓여져 있다. 나는 중앙 성소와 테라스를 이어주는 발 받침대들에 매혹된다.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된 높이로 올려져 있는게 없고 네 방향의 연결 통로 모두 반 이상 끊어져있다. 세월이 지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복원 도중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던 탓 일까. 나는 중앙 성소로 가는 해자를 넘어 테라스 구석의 그늘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내벽 사이의 그늘에서 문 가에 새겨진 부처의 모습과 그 광휘를 베껴 그렸다. 앙코르와트 양식과 바이욘 양식이 섞여있는 이 사원은, 만다파(전실)가 안탈라라(좁은복도)로 이어져 사방에서 중앙 성소를 바라 볼 수 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서 뒤돌아보니 검고 흰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는게 보였다. 아까 무엇에 쓰일지 모르겠다고 했던 전실의 구석에 누가 몰래 고양이 먹이 그릇을 가져다둔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멀리서 사람들이 오는 소리가 들려 그리던 그림을 덮고 사원을 나섰다.

원래 동쪽에서 이어져 있던 사원의 진입로는 끊어져 있다. 나는 길이 끊어져 있는 곳까지 걸어가보았다. 거기 멀리엔 숲 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원으로 다가오는 사악한 자들을 노려봐야 할 사자 상들은 반쯤 부서진 채 놓여있었다. 그 길로는 아무도 오지 않기 때문에 사자들은 안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 병아리 한 마리가 소리를 지르며 툭툭으로 달려들었다. 기사는 급하게 핸들을 잠시 꺾었다가 툭툭이 흔들리자 더 이상 방향을 꺾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다행히 병아리는 툭툭 밑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병아리가 뛰어간 쪽을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병아리는 금세 그늘로 도망가버렸다.

투어의 세번째 날 새벽, 뱅밀리아와 반테이 스레이를 가기 위해 일찍 호텔을 나왔다. 호텔에서 소개해준 중고 렉서스의 운전기사는 깨끗한 옷에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뱅 밀리아에서 한 시간을 넘게 시간을 보냈는데도 아직 아침이 끝나지 않았다. 차로 돌아오니 기사가 생수를 하나 주었다. 기사는 반테이 스레이로 가는 길에 이것저것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고객 서비스라고 생각했던 걸까. 기사는 내가 대답을 느릿하게 하기 시작하자 톤레삽과 캄보디아 그리고 프놈쿨렌에 대해서 설명을 하다 답답했는지. 영어로 말을 하면 “내가 느끼는 걸 잘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나는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원래도 두배는 더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진짜 생각들은 우리 모국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가 입 밖에 낼 수 있는 건 원래의 생각들이 아닌 무너지고 흐트러진 생각들인 거죠.”
기사는 그럴 듯 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어본다. “당신은 한국인이죠? 당신도 교회에 다니나요?” 나는 웃는다. “제 어머니는 교회에 다녀요. 제 할머니는 당신 같은 부디스트죠. 둘은 사이가 엄청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해요. 둘은 나름 균형점이 있는 것 같아요. 서로 말을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죠.” 운전사는 또 웃는다. “많은 외국인들이 여기에 찾아와요 다들 감탄하고 유적지를 돌아다니지만 때때로 외국인들이 우리의 종교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들이 보기엔 멋지고 훌륭한 유적일 뿐이고 유적들이 우리의 종교의 대상이란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특히 한국인들이 그런가요?” 운전사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의 영어는 추상적인 단어보다 물리적인 단어로 이루어져 있어 불교도라기 보다 엔지니어나 지도제작자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전부는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다.

반테이 스레이가 있는 숲에 도착한다. 숲을 지나 사원을 보고 다시 오솔길을 걸어 나와 다시 차에 탄다. 한시간 이상은 걸리지 않았다. 기사에게 매점에서 사온 스프라이트를 건네고 나는 환타 오렌지 맛을 마신다. 그리고 이제 그만 호텔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아직도 점심 때도 되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운전사는 계속해서 캄보디아의 사람들과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외국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때로 지도를 만드는 사람 같은 말투로 때때로는 전혀 맞지 않는 단어를 써가며 나에게 말을 한다. 어떤 시점에서 그는 나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 캄보디아 사람 특유의 겸손한 태도로 - 나를 살짝 돌아본다.

나는 사실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내가 머릿속 가득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반테이 스레이, 도자기처럼 만들어진 아름다운 숲 속의 사원.

나는 내가 방금 본, 붉은 사암의 사원 반테이 스레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사원은 신의 의지의 구현이며, 신의 세계를 이 땅에 이룩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이상향이다. 분명 그 의지는 단단하고 강력했으리라. 과거 이 사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를 생각해보자. 신의 말씀이 그 땅을 정했을 것이고 왕의 의지가 사람들을 모았을 것이다.

그 사원을 만든 사람들을 상상하고 한다. 앙코르왓을 제외하고 모든 사원들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이 사원은 작은 앙코르왓 같은 구조지만 거꾸로 967년에 완성된 상당히 빠른 사원에 속한다. 어쩌면 1100년대에나 완성된 앙코르왓은 이 작은 사원을 본 따서 만들어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해도 믿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그 이유는 역시 이 사원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든 신을 믿은 것 만큼이나 아니 신을 믿은 것보다 더 아름다움을 믿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불경한 생각이 든다.

고푸라(탑형태의 출입문)의 기둥에 연꽃과 불꽃의 부조, 그리고 그 안에 원숭이 신과 턱이 없는 죽음의 신의 얼굴을 새기며. 린텔(상인방)위에 프론톤(박공지붕)을 올리고 또 그 조각들에 신과 악마 그리고 괴물 - 인간사자 나라싱하와 원숭이의 왕과 커다란 새를 탄 브라흐마, 그리고 무엇보다 비슈누와 칼리를 - 새기고나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왕국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해도 설령 왕의 이름과 우리의 믿음 마저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가 만들어낸 이 아름다움은 세세토록 영원할 것이라고, 그런 삿된 마음을 몰래 품고 신이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를 바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분명 그의 손 끝과 망치와 그리고 마음을 지켜보던 그의 신은 흡족해 하셨을 것이고, 이 사원을 당신의 것으로 선포 하셨을 것이다.

......

모든 복제품들이 그러듯이 이상향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하고 우리는 약 천년 후의 세계에서 무너진 사원을 본다. 이제는 오직 몇 명의 사람만이 신을 찬양 할 줄 알고. 사원의 신을 믿지 않는 불경한 자들만이 모여들어 사원을 돈다. 이 땅의 모든 사원은 불완전한 세계에 완벽했던 사원들이다. 단지 천년이 지나갔을 뿐이다.

나는 차를 돌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진다. 차를 돌려 저 사원의 벽 아래 내려다주세요. 해가 질 때 까지 저 곳에 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싶어요. 아주 오래 전 부터 매일 그래왔던것 처럼 말이에요.

나는 운전사의 말에 제대로 대답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지금 떠오른 생각을 말하기로 한다.
“지금은 믿음을 갖기가 힘든 시대죠, 아직도 사람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우리가 경전으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과학적 사실이랑은 거리가 멀어요.”

나는 뜸을 들이고 말을 계속 한다.
“하지만 저는 무엇이든 간에 믿음을 갖는 것이 아직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신을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 보다 큰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믿고,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을 존중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기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나 말고도 다른 어떤게 있다고 믿는게 중요해요 안 그런가요?”

그리고 나는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세상이 이상적인 세계와 다를 수록 우리는 현실을 어둡게 여기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상의 세계가 얼마나 멀리 있든 간에 앞으로 더 나아가려는 모든 의지가 아닐까 싶어요. 그게 옳든 그르든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생각한다.
저는 아직도 언젠가 왕국이 내려와 이 세상이 완벽해질거란 걸 믿고 싶어요. 알겠어요?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기사는 나의 서툰 외국어를 이해했는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를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 이로다” (시편 137편 1에서 3절)

20년 1월의 글이다.

몇년 전인가, 겨울 나절 아직 봄이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노인과 둘이서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나무는 앙상하니 얼음을 털어내지 못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 오후라 멀리까지 바라보아도 사람 하나 없었다. 

밥을 먹고 돌아가는 길이었으니 산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발끝을 바라보며 걷던 노인은 익숙치 않은 외국어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기도를 하나요?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역시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누구에게요?"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앞서보다 더 천천히 나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나요? 

나는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짧은 말은 모두 필연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지만. 질문을 받은 이상 할 수 있는 최선의 언어로 대답해야하기에 나는 한기처럼 멈춰서서 생각을 했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확한 대답을 찾았다. “저 또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저는 저의 신에게 기도를 합니다. 저의 신은 침묵이며 숨결이고 질서입니다.
그는 중력처럼 연약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제가 어떤 때 어느 곳에서 기도를 하더라도 그가 저의 기도를 듣고 있을 거란 걸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때때로 제가 아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제는 모르게 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더 정의에 부합하는 행위로 느껴집니다.

저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말과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란 구절을 믿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게으르지 아니한다면 해야할 바를 성취할 수 있고 그 모든 것은 언젠가 소멸한다는 말 또한 믿습니다.
사랑이 없는 자의 노력 또한 신에게 닿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 마저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젠가 세계의 색이 흘러내리고 그림자가 무게가 되어서도 우리의 말들이 공중에 그대로 남아 우리를 증언할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언젠가 살아있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네, 저는 기도를 합니다. 왕국도 도시도 노래도 코끼리도 책도 모두 언젠가 낡아 사라질 것이고. 별보다 이 기도가 오래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노인은, 늙은 외국인 엔지니어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하더니 이윽고 그 질문이 사실 혼잣말이었다는 듯이 기도는 하는 게 좋지요. 누구에게라도 누구를 위해서라도.

나는 몇 년이나 지나서 노인의 말을 떠올리고, 그의 마지막 말 앞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오래 전의 일이었고 그는 이미 은퇴한지 오래라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수가 없다.

나는 그 늙은 엔지니어를 위해 기도를 해보려 노력한다. 그러다 나는 변덕스럽게도 신을 위하여 기도를 했다. 

이 세상에 누군가 선량한 마음을 지닌 이가 있다면 그 누구보다 외로울것이기에, 누군가 한 명 쯤은 그의 평온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물방울이나, 새가 날개를 휘두르는 소리처럼 기도는 멀리까지 전해진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의 기도가 신에게 가서 닿을지는 아직 알수 없다.



19년 12월의 글이다.

데스크탑을 껐다. 

사람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사무실을 떠날 때는 의식처럼 정해진 순서대로 행동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든 다른 자리 처럼 지금의 내 자리도 우연히 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항상 아주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책상 위의 쓰레기를 모아 버리고. 달력과 노트를 정리한 다음, 나 대신 자리를 지킬 사람 모양의 인형 하나를 올려 둔다. 아무리 정리해도 내 자리는 다른 누구의 자리보다 내 자리처럼 보이지만, 시도를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오늘 저녁 때 가을 비가 내릴 거라고 했는데 비는 아직 오지 않는다. 챙겨온 우산을 서랍에 넣고는 잠근다. 

커다란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노래를 튼다. 가방을 멘 다음. 의자를 넣고 한 번 더 사무실을 둘러본다. 누군가 사무실에 남아있을 때는 인사를 한다. 안녕히계세요. 아무도 사무실에 남아있지 않아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설 때엔. 불을 끈다. 안녕히계세요.

나는 회사의 정문에서 우리집 현관문 앞에 떨어트려 주는거나 다름없는 통근버스 노선이 하나 있지만, 너무 더워 걷기가 곤란 할 때가 아니면 출근 할 때도 퇴근 할 때도 그 버스는 타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왜 걸어서 출퇴근을 해요 라고 물어보기에. 개를 산책시키는 것처럼 스스로를 산책시키는 거에요, 라고 대답했다. 일어나서 잠이 들 때 까지 나는 대체로 계속 혼자지만. 완전히 혼자가 되서 어딘가에서 다른 한 곳으로 걸어가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걸어가는 것이 좋다. 겨울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 거라면 더 좋다. 꼭 정신의 메트로놈을 맞추는 것처럼 기분이 좋을 때는 진정하게 해주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기분을 낫게 해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추위를 느끼며 걷고 있노라면 내가 이렇게 걷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인 것 같다.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고 다리가 납처럼 무겁고 숨이 모래처럼 갈라질때 까지 걸어다니고 싶어진다. 나는 애초에 목적을 위해서 뭘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뭘 하고 싶어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음악을 틀고 신발 안에 발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해 보고 계단을 내려간다.

요즘은 예전처럼 퇴근이 늦지 않다. 일주일에 70시간을 넘게 일하던 때보다 훨씬 낫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한가하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간에 출근을 해도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면 저녁이 되고,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시간이면 일어나 집에 간다. 일을 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얼마 전 부터는 게임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요 몇 년 전 완전히라고 할 정도로 게임을 하지 않았는데, 그 때는 게임을 하지 않아도 생각해야할 사람들과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제는 생각해야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대신 게임에 대한 생각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과일을 먹어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괴물이라거나, 그 괴물에게서 (반드시 빼앗기고 말 운명의) 과일들을 지키는 유령들 이라거나 하는 유사 셰익스피어 적인 악몽의 서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규칙을 지닌 작고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게임 안으로 각자의 작은 촉수를 내밀어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 처럼 보인다. 게임 안에서 우리의 의지가 움직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즐거운 유희인 것 처럼 불편하고 이해하기 힘든 규칙에 따라서 (예를 들어, 너는 게임 안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지만 거북이와 정면으로 맞서면 죽고 말아, 혹은 너는 뭐에 부딪혀도 죽지만 네 키보다 높이 점프 할 수 있어) 게임을 플레이 한다.

규칙이 복잡하고 그래픽이 정교해져도, 게임의 법칙은 단 하나 뿐이다. 이해하기 힘든 불합리한 세계에 우리의 의지를 구현하는 것. 그리고 때때로 거기서 이야기를 떠올리고 또 우리 스스로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실체가 살고 있는 세상 또한 게임 안의 세계처럼 불합리한 규칙의 세계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는 것. 왜냐하면 게임에서의 죽음과 실패는 현실에는 어떤 영향도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가 결코 말하지 않는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는다. 
다시 생각해보자. 걸어 다니고 있지 않을 때는 항상 무언가를 읽고 있기 때문에 내가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문제가 너무 많은 것을 읽어서 라는 걸 내심 깨닫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임을 다시 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소설 또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게임보다 훨씬 안전한 매체이다. 글은 어떤 시대에서도 총칼보다 강한 적이 없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라는 말은 총칼을 가진 권력자들이 엄살을 부리며 하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런게 아니라면 너무 많이 읽어서 지상낙원을 이룩한 곳이 한 군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 내가 아는 한 모든 지상 낙원은 아스피린과 밀가루의 부족으로 멸망한지 오래이다.

높지 않은 건물인, 사실은 원래 공장이었던 사무실을 나와서 조금 걸어가면 커다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가 나온다. 사거리는 멋지게 뻗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운이 좋으면 해가 지는 시간에 퇴근을 해 엄청난 색으로 물들인 하늘을 보면서 퇴근 할 수도 있다. 매일 매일 같은 곳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 회사 부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고. 무엇보다 항상 같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못한다면 그런 활동도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그램에서 초기에 올린 사진을 보니 무려 2011년의 사진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갈 수록 내가 사진을 찍는 폰이 바뀌어서 요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록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들은 묘하게 선명하고 밝아졌다. 나는 그게 꼭 기억의 은유처럼 느껴져서 불쾌해지고 말았다. 자연적으로 열화되지 않은 이미지가 아니라 앞으로 발전해나가며 선명해지는 이미지라니, 언젠가는 인스타그램의 이미지가 현실의 해상도를 따라 잡을 지도 모른다고 늙은이 같은 걱정을 한다.

사거리를 지나갈 때는 어째서인지 잠시 멈춰서서 왼쪽의 커다란 건물을 흘끗 보고는 헤드폰의 볼륨을 올린다. 이제는 이유도 기억나지 않고 그냥 버릇이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듣는 것은 좋은 버릇이 되지 못한다. 듣는 음악은 대중이 없지만, 항상 가장 큰 소리로 항상 가장 빠르게 걸어 거리를 지나간다. 어떤 시간에 지나가든 간에 사거리에서 이어지는 그 길에는 사람이 있다. 모두 후회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 사람 처럼 걸어간다.

문득 내 출근길과 퇴근길의 루트가 달라지는 지점이 이 지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출근 길엔 좀 더 왼 쪽의 커다란 건물에 가까이 그 바로 앞을 걸어 작은 공원 앞을 지나가는데, 퇴근 할 때는 커다란 건물에서 약간 빗겨가 사거리의 중앙부를 가로지른 중앙대로를 따라 걸어간다. 무슨 이유 일까 생각해 보려다 스스로의 행동에 하나하나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아서 그만둔다. 사람은 대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제대로 이해받기 힘든 법이다.

어쨌거나 사거리와 중앙대로는 항상 엄청난 바람이 분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실상 우리 회사가 있는 곳은 거대한 공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바람을 막아줄만한 것은 거의 없고 커다란 빌딩이 연달아 서있어서 자연스럽게 바람이 강해진다. 가끔 내가 걸어가는 곳이 경기도 어딘가의 도시인지 아니면 지구 구석 어딘가의 황야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나는 바람이 강하게 불 수록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 토요일 급하게 출근을 하며, 벼락이 치는 것을 보았다. 아파트를 가로 지르고 언덕을 올라 내려가는데 회사가 있는 단지 저 쪽에 벼락이 치고 있었다. 태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엔 아무도 없었고 나는 벼락이 치는 곳으로 계속 걸어가며 그 장면을 혼자 보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꼭 태초의 산에 변덕스러운 신이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위험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홀린 광신도처럼 계속 걸어갔다.

새삼스럽게 세어보니 벌써 10년 가까이 이 회사에 있었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으나 나는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이 똑같이 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사는 곳이 달라져도 어디에서 일해도 나는 퇴근길에는 항상 한참을 걸어야 만족을 했다. 전철이 너무 가깝다면 전 역에서 내려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고 헀다.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걸어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너무나 많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나는 내가 시간 그 자체로 되는 것처럼 굴었다. 똑딱 거리는 시계처럼, 나무 위에 달려 있는 광신도의 시체처럼, 변하지 않고 도달 할 수 없는 어떤 시점처럼 행동했다. 꼭 영원히 거기에 존재할 계절처럼 살았다.

나는 누군가의 옆 모습을 떠올린다. 정신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바쇼의 마지막 시를 떠올린다. 방랑에 병들어/꿈은 마른들판을/헤매인다. 최초의 시는 기도였으며 모든 시는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시도이다. 스산한 기분에 사거리에 서서 한 마디 입 밖에 내어보려고 하지만, 한 마디 조차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인생이 꼭 누군가의 자리 건넛편으로 보는 재미없는 영화인 것 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멀리 길 건너에 보이는 사람들과 흘끗 보이는 모르는 사람의 집안 풍경은 우스꽝스럽게 따스해 보인다. 나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의 밤 길을 혼자 걸으면, 항상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이리저리 이지러지고 망가져도 겨울의 기온이 나를 다시 한 번 나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오로지 나 였으며 앞으로도 나 외에 다른 것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겨울이고, 내가 입으로 뱉는 것마다 추위, 머리 속에 있는 것은 바람 뿐이다. 나무가 쓸려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방을 고쳐매고, 어깨를 둥글게 구부리고는 계속해서 걸어간다. 밤처럼 쏟아지는 것은 비이다. 노랗게 붉은 나뭇잎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차가운 돌바닥을 밟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하늘이 거기에 있는지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어서 물에 젖은 안경을 손으로 훔쳐가며 그대로 걸었다. 
며칠 전 아침 똑같은 길을 거꾸로 올라가다가 가로수 옆에 기대듯 피어있는 작은 꽃을 하나 보았다. 처음 그 꽃을 보았을 때는 무심결에 지나쳤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그 꽃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비는 계속해서 쏟아지고 나는 그 꽃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별이 멸망 할 때 까지 서쪽으로 계속해서 가는 것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들이 당신들의 의지를 우리를 통해 구현하는 방식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한참을 멈춰있다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19년 11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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