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 한가지 이야기의 두가지 측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자춘전(杜子春傳)은 당나라 때 이복언(李復言)이 편찬한 <속현괴록(續玄怪錄)>의 명나라 시대 판본에 실려있다. 그 원본은 대당서역기에 실려있는 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두자춘 전의 원본에 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선 원본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북주, 수 연간의 사람인 두자춘은 본디 세가의 자식으로 부유하게 자랐지만 가문의 재산을 탕진하여 빈곤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는 어느날 정말 우연히 노인 하나를 마주쳤는데 노인은 자춘을 어떻게 여겼는지 갑자기 그를 도와주며 친척도 주지 않을 큰 돈을 무상으로 그에게 줍니다. 자춘은 그에게 크게 감사하며 앞으로 착실하게 살리라 다짐하였지만 그것은 몇년을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금세 재산을 탕진하였고 상심해있던 그에게 노인이 또 다시 나타나 아까보다 더 큰 재산을 내려주며 이 재산으로 잘 살아보라고 말합니다. 자춘 또한 더욱 기뻐하고 감사해하지만 첫번째보다 더 큰 재산도 몇년이 걸리지 않아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하고 상심해있던 자춘의 앞에 노인은 다시 한 번 나타나 그에게 이번엔 더 큰 재산을 줄텐데 이 재산을 가지고도 탕진하면 너는 평생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이야.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두자춘전은 실수를 반복하는 주인공과 그를 도와주는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몹시 매력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까지 읽었을 때 두자춘이 어떤 실패를 하고 어떤 반성을 하게 될까 기대하게 되는 법인데...의외로 두자춘은 여기서 실패하지 않는다.
 
몇 번의 재산의 탕진 끝에 교훈을 얻은 자춘은, 이번에 얻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재산을 자선을 위해 사용한다. 전화에 상처입은 지방을 재건하고 사람들을 구한다. 몇년 후에 자선을 행하고 있는 자춘을 만난 노인은. 그의 삶에 기뻐하면서 이제 살만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자춘은 노인을 향해 감사하면서 이제 속세의 삶은 누릴대로 누렸기 때문에 노인과 같은 신선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과연 노인은 신선이 맞았고 자춘을 자신이 살고 있는 화산에 데려가 신비로운 선술-연단술-을 행하는데 자춘에게 신신당부 하기를. 절대 입을 열어 말하지 말라. 그렇다면 너는 어떠한 해도 입지 않고 끝까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 나는 선단을 얻으며 너는 나와 같은 신선이 되리라. 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자춘은...생각도 해본 적 없는 신비로운 환상을 보게됩니다...
 
그러니까 두자춘의 세번의 기회는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길고 긴 프롤로그다. 그리고 내가 이 시점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일본의 소설가 아쿠다카와 류노스케가 지은 두자춘 전이다.
1920년 아쿠다카와는 잡지 <붉은 새>에 두자춘전을 발표하는데. 동화를 염두에 둔 구성과 그 내용으로 원래의 두자춘전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어떤 이야기냐면 앞부분은 완전히 같다. 
 
두자춘은 명가의 자식이나 게으르고 일을 하지 않아 요행만을 노리는데 어느날 신비로운 노인을 만나서 그에게 세 번의 기회를 얻고. 그에게 감사해하지만 자신도 신선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노인은 그를 제자로 삼기로 하고 아미산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아미산에 도착하자 노인은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한다면서. 대신 내가 없는 동안 너는 온갖 유혹과 사술에 시달릴 수 있으니 내가 없는 동안 너는 어떠한 일이 닥쳐도 한 마디도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받습니다.
 
노인을 기다리던 자춘이 본 것은 과연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그를 위협하더니 그 뒤에는 짐승들이 그를 위협합니다. 온갖 자연현상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금빛 옷을 입은 장군이 그에게 너는 누구냐 왜 여기에 있느냐고 위협을 합니다. 그래도 말을 하지 않자 수천 수만의 군병들이 그를 위협합니다. 입을 벌리라! 말하라 네가 누군지! 왜 여기로 왔는지! 하지만 자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금빛 옷을 입은 장군은 자춘의 목을 한 칼에 날려버리고 맙니다.
 
자춘은 지옥에 끌려갑니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 자춘은 저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자로서 엄한 벌을 받게 됩니다. 온갖 지옥을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받지만 자춘은 노인의 당부를 생각하며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기가 찬 염라대왕은, 한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려 축생도에 떨어져 있던 자춘의 죽은 부모를 데려옵니다. 자춘의 부모는 둘 다 말이 되어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었고 자춘을 알아본 듯 합니다. 지옥의 졸개들은 오직 자춘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자춘의 부모를 가혹하게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자춘은 부모가 고통을 받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며 몇번이나 입을 열까 하다가도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참습니다. 이윽고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우리는 괜찮다. 네가 행복한게 제일이니 네가 입을 열지 않아야 한다면 그대로 다물고 있거라. 라는 어머니의 말이 들렸습니다. 자춘은 참지 못하고 달려가 어머니를 껴안고 어머니라고 부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춘이 깨어난 곳은 처음 노인을 만난 낙양이었습니다. 노인은 어떠냐 이래도 신선이 될 생각이 들더냐 라고 묻습니다. 자춘은 부정합니다. 노인은 오히려 웃으며 네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자 이제 신선도 부자도 되지 못한 너는 무엇이 될 것이냐 라고 묻고. 자춘은 사람답게 정직하게 살겠다고 대답합니다.
...
 
이것이 아쿠다카와 두자춘전. 그의 나이 28세에 지은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원전의 두자춘전은 어떻게 될까? 아쿠다카와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두자춘이 선술에 걸려 환상을 보는 것은 완전히 같다...
 
입을 다물고 있는 자춘을 금빛 옷을 입은 신장은 위협을 가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신장은 어디선가 자춘의 아내를 잡아와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차마 여기에 쓰지 못할 만큼 고문은 가혹합니다. 아내는 자춘에게 빌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춘은 처음과 같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입니다. 아내는 자춘에게 원망의 말을 남기고 죽고. 신장은 지독한 놈이라고 혀를 차더니 자춘의 목을 한 칼에 날려버립니다.
자춘은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곳에서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아 온갖 지옥을 도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산, 화탕, 한빙, 검수, 발설...모든 지옥을 한 번씩 돌고도 자춘은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염라대왕은 격노하여 이 자는 심기가 음한자이니 다음 생에서 여자로 태어나리라 하고 그를 인간계로 쫓아냅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산동성 선부현 왕근의 집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한대로 여자아이로 태어난 두자춘은 어릴때 부터 아무소리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통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벙어리 아이가 태어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벙어리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미모를 가진 규수로 자라났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그녀이기에 구혼자가 끊이지 않았으나. 아버지 왕근은 그녀가 벙어리라는 이유로 아무 곳에도 시집보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노규라는 진사가 왕씨집 딸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끈질기게 구애를 하여 결국 혼담이 성사되었고. 왕씨집 딸이 벙어리임에도 불구하고 금슬이 매우 좋았습니다. 곧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도 말 한마디 없고 표정도 없는 왕씨에게 노규는 점점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들이 두살이 되던 해 일이 터지고 맙니다. 너는 남편을 공경하지 않느냐, 너는 내 글 솜씨에 존경하는 마음이 들지 않느냐 하며 화를 내던 노규는...노규는 겨우 두살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의 다리를 잡아 돌 위에 집어 던집니다. 원전은 아이의 머리가 깨지고 피가 다섯 걸음을 걸 정도로 흘러나왔다고 말합니다. 왕씨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릅니다.
 
왕씨, 아니 자춘이 깨어나보니 선술은 실패하였고 자춘의 눈 앞에 노인이 서있었습니다. 노인은 그가 칠정인 희노애구오욕(喜怒哀懼惡欲)을 모두 잊었으나. 마지막에 하나 사랑(愛)을 잊지 못하여 선단을 만드는 것도. 신선이 되는 것도 실패하였다며 그를 크게 탓하고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고 두자춘을 남긴 채 떠나갑니다.
 
어떤가? 두자춘전의 원전은 훨씬 잔혹한 이야기이다. 누군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고 어느쪽 이야기가 더 아름답고 사리에 맞느냐고 묻는다면 열이면 아홉은 아쿠다카와의 두자춘전을 고를 것이다. 
그렇다면 아쿠다카와가 어째서 두자춘전을 이렇게 편집-아니 재창작이다-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텐데 대답은 싱겁다. 애초에 이 작품을 발표한 붉은 새 부터가 어린이를 위한 아동문예집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난세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잔혹한 이야기가 반 이상이다. 거기에 어떠한 신비로운 전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오히려 전개와 결말을 바꾸지 않았다면 어린이 잡지에는 실릴 수 없을텐데 도대체 왜 굳이 이야기를 선택해서 각색했는지가 의문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추측 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애초에 아쿠다카와의 작품 중에 특별히 뛰어난 작품도 인기 있는 작품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도 아니다.
 
다만 왜 결말을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두자춘이 새 사람으로 바뀌는지에 대해서는 추측 할 수 있는데 그건 아쿠다카와가 어릴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어머니의 발광으로 인해서 외삼촌의 집에서 양자로 키워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양부모를 진짜 부모로 여기고 살아갔다고 하지만. 그가 11살 때 죽은 친 어머니에게서 광기를 물려받은게 아닐까 스스로 평생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가 한살이 되기 전에 큰 누나의 때 어린 죽음으로 광기가 발현된 어머니...그런 그에게 어린 아들이 살해당해 비명을 지르는 젊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1920년 당시 젊은 나이(겨우 스물 여덟살이었다)인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던게 아닐까. 1919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된 그는 자신과 똑같은 젊은이인 두자춘이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결말에서 모종의 구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결말을 알고 있다. 아쿠다카와의 두자춘전은 자춘이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에서 끝나지만. 1921년 아쿠다카와는 신경쇠약을 앓기 시작한다. 위궤양(위궤양은 그의 스승 나쓰메 소세키의 직접적인 사인이기도 했다). 불면증. 매형의 자살로 인한 빚. 그는 겨우 1927년에 자살한다. 두자춘이 새로운 삶을 다짐한지 7년 후의 일인 것이다.
 
나에게 두 개의 두자춘전 중 어느 쪽의 두자춘전이 인생의 진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고민을 하지 않고 원전의 두자춘전이라고 하겠다. 아쿠다카와의 두자춘전은 너무나 아름답니다. 결말은 완벽하고 전개는 매끄럽다. 그러나 원전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고 그냥 어느날 어떤 비렁뱅이의 악몽을 적어놓은 것처럼 두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몹시 진실되다. 그래서 나는 의문을 갖는다.

이것은 두자춘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왕근의 딸에 대한 이야기인가. 살던 곳도 태어난 곳도 몹시 불분명한 두자춘과 다르게 왕근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한 질량을 갖고 있다. 흡사 두자춘이 아니라 왕근의 딸이야 말로 진짜로 있었던 사람인 것 처럼 말이다. 나는 두자춘이 떠난 후 그 세계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가 떠난 후 왕근의 딸은 자식이 죽은 그 세계에 그대로 남아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꿈처럼 스러져 사라지는 걸까.
 
여기 내가 생각한 두자춘전을 하나 더 써서 남긴다. 모든 이야기는 원전과 같다. 단지 마지막 부분이 다르다.
 
술에 취한 노규는 왕씨부인의 아름다운 - 무표정한 - 얼굴을 보면서 소리를 지른다. 옛날 가대부의 아내는 남편을 천하게 여겨 웃지 않았으나 남편이 꿩을 맞추자 마음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나의 글솜씨와 인품은 꿩을 맞추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데 너는 왜 나를 보며 웃지 않는 것인가. 남편이 아내의 존경을 얻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내가 여자에게 바보취급을 받는다면 재산이 무엇이며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보라. 노규는 방 구석에서 불안하게 부모를 바라보고 있던 자신의 장자를 들어 왕씨 부인의 앞에 들이밀었다. 술에 취한 노규는 얼굴이 붉고 그 숨은 거칠다. 왕씨 부인은 아이를 보지도 노규를 보지도 않는다. 흰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눈은 슬프게 가라앉았다. 입이 떨리는 듯 하더니 곧 굳게 닫힌다. 보란 말이다. 노규는 왕씨 부인을 다그친다. 아이를 흔들며 소리 친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운다. 노규가 굳게 잡은 손이 고통스러운 듯이 아이가 몸을 비튼다.
 
노규는 방을 나선다. 문은 연 채로 그대로다. 방 밖에서 불안하게 기다리던 하녀 하나가 비명을 지른다. 마님, 도련님. 도련님이. 다른 하녀 하나가 뛰어와 방 안을 살펴보고 비명을 지른다. 의원을...의원을...하고 말을 더듬으며 기듯이 자리를 떠난다. 노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숫제 도망치는 듯 하다.
 
바닥에 엎드린 왕씨 부인은 아이를 안고 있다. 흰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검은 머리는 더욱 검어졌다. 커다랗고 촉촉한 눈은 더욱 커다랗고 촉촉해졌다. 입은 굳게 다물고 울음을 참는다. 어매, 어매요. 어매요...중얼거리는 소리가 난다. 왕씨 부인의 목소리는 아니다. 작고 붉어진 것이 어머니를 부른다. 왕씨 부인은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는다. 다만 피가 흘러나오는 곳을 손으로 부여잡고 피를 막는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
 
왕씨 부인은 괜찮아 엄마가 여기있어 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왕씨 부인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은 아주 어릴 적 병약하여 항상 아버지에게 안겨있던 그녀에게 아버지 왕근이 그녀를 달래며 해주었던 어떤 이야기이다. 이야기에서는 두자춘이라는 건달이 있었는데 그는 재산을 탕진하고도 기회를 얻어 신선이 될 수 있는 시험을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면 신선이 되게 해준다는 스승의 말을 신의를 다해 지켜 신선이 된다. 그리고 모든 자신의 잘못과 고통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왕씨 부인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까 궁금해한다. 아이는 이제 말을 하지 않고 자꾸 축 늘어진다. 의원은 아직도 오지 않는다.
 
왕씨 부인은 아이를 꼭 껴안고 울음을 속으로 삼키다가 방 한 쪽 구석에 서있는 당신을 발견한다. 당신은 이곳에 어울리는 복장이 아니다. 왕씨 부인은 당신이 신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신의를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신선. 희노애구구욕의 칠정을 모두 잊은 자신에게 사랑마저 잊었는지 확인하러 온 신선. 그리고 이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도. 혼자 몸으로 병약한 딸을 키우느라 모든 자산을 탕진한채 늙어버린 아버지도. 바닥에 가득 흘러가는 자신의 눈물과 아이의 피도. 그래서 정신이 나가버린 눈으로 당신을 쳐다본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 당신은 왕씨 부인에게 무슨 말을 할지.
 
24년 8월의 글이다…
 
 
.....왕씨 부인은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운다. 노규는 그 날로 나서서 큰 길로 도망치다 달리는 말에 치어 죽었다. 의원이 제 때에 당도한 덕에 아이는 순조롭게 회복한다. 말이 늦되는 것은 아닌지 걸음이 느린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걱정하였지만 왕씨 부인은 서툰 발음으로 괜찮아요 그래도 고맙기만 해요. 라고 말한다. 아이는 이제 왕씨 부인을 보고 곧잘 웃는다. 왕씨 부인 또한 아이를 보며 웃는다.

아버지인 왕근은 가끔 왕씨 부인을 찾아온다. 아버지는 늙었지만 아직 정정하다. 가끔 왕씨 부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왕씨 부인은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버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왕근은 알 수 있었다. 왕근은 마음 속 깊이 천지신명과 신선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왕씨 부인이 그 뒤로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신선이나 다름없는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그녀가 불행해지는 곳으로는 갈 수 없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기로 결심하였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겠다. 20세기의 이야기이다.
 
나라고 20세기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20세기의 후반에 태어났고 이제 21세기에 살았던 시간이 더 길어져서 20세기의 일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설령 아니 그렇다고 해도. 사람에겐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어느날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창문 밖의 눈오는 밤을 쳐다본 일. 우리 외엔 아무도 없는 호텔의 옥상에 앉아서 불꽃놀이를 봤던 일. 정글짐의 꼭대기에 앉아있다가 말을 걸었던 일.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더운 여름에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던 일. 아버지가 저 멀리 해변의 트라이포트를 향해서 저건 고래의 뼈야 라고 말해줬던 일 같은거 말이다. 사기꾼 자식 진짜.
 
20세기의 전경이라고 해도 지금과 크게 다를바는 없다. 나는 공업도시에서 자랐다. 어느 정도 공업도시였냐면 아파트를 벗어나면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사는 저층의 주거지들이 있었고 바로 공장단지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를 가려면 공장 단지를 가로질러야 했으니까 말은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아이들의 통학이 위험하고 어쩌고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엔 초등학생들의 값이 쌌다. 한 두명 정도 한꺼번에 등교에 늦어도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1학년 때 나는 반친구 두명과 놀다가 깜빡 늦어서 30분 정도 늦게 등교했는데 선생님은 우리가 오지 않은 것도 몰랐다)
오히려 내가 1학년일때 고가도로로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는데 서럽게 울고 있는 나를 공장 아저씨들이 번쩍 들어서 사무실에 데려가더니 약을 발라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제강제철을 위주로 하는 2차 가공 공장이었는데 그곳에서 가공된 철강제품을 인천의 수출단지로 보내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다. 얼굴이 시꺼멓게 검댕이 묻어서는 옳지 옳지 하며 사내니까 울면 안돼 하며 나를 토닥이고 보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공장을 아주 좋아한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지금과 결정적으로 다른게 있다면,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초등학생들이 정말 값이 싸서 역곡시장에 가면 싱싱한 초등학생 한 명에 오천원 정도했으니까. 어딜 가나 친구들이 많아서 아파트 아무 곳에나 가도 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다치거나 구르거나 하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나와 누나가 이유없이 꿀벌을 포충망 가득히 잡아서 가지고 다니다가 포충망이 찢어져서 내가 꿀벌에게 수십군데를 쏘였을 때도 (중간에 좀 다른 얘길 하자면 몇 년 후 소년이 꿀벌에 잔뜩 쏘여서 아나팔락시스 쇼크를 일으켜 죽는 영화가 나왔는데. 어린 나는 와 죽을뻔 한거구나 하고 소름끼쳐했다.) 내 친구가 통학길에 진도잡종인 커다란 개한테 청바지가 찢어지도록 물렸을 때도 어른들은 대단치않게 생각했다.

우리는 어땠는가. 어린애들도 보통 자기의 생명과 안전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한달에 두명 정도는 아파트 정글짐에서 뛰어내리다가 팔을 부러트렸으니까.
 
그렇다면 20세기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생명과 안전보다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건 우리 부천시 소사구만의 가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나는 가난과 불화의 상징 부천시에서 자랐다.) 100원짜리 동전이 초등학생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 무슨 동전 몇 닢에 목숨을 파는 용병 같은 소리인가 하드보일드 하구만. 하지만 정말이다. 20세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는 재화들은 대부분 100원 아니면 200원이었고. 500원짜리는 이미 고급의 영역이었다. 
 
여러분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간단히 말해주자면 거의 모든 아이스크림이 200원을 넘지 않았다. 500원을 넘어가는 것은...부의 상징 월드콘 정도였다. 엑셀렌트? 내가 너무 늙어보이지만 엑셀렌트는 내가 이미 좀 자아가 생긴 어린이였을 시절에 번개처럼 등장했다. 황금색 껍질을 가진 그런 비싼 물건은 어른들이 사주지 않으면 절대로 먹지 못하는 고급품 중의 고급품이었다.

우리 동네 태권도 사범님이 어느날 아주 침통한 표정을 하면서 얘들아 100원이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데 왜 뽑기(그 뭐냐 요즘엔 가챠라고 하지)를 하니? 그런 잡동사니를 사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렴. 이라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다. 이는 베트남 전에도 참전하신 진짜 20세기 인간 사범님과 우리 20세기 말의 어린이, 자본주의 악마 졸개들 사이의 차이였는데 우리는 먹을 것보다 재화(아무런 가치가 없더라도)와 도박(가챠는 도박이니까 말이지)에 혼이 나간 말세의 자식들이었다.
 
그런 말세의 자식을 가졌으면 응당 장난감을 좀 사줘야 했을텐데 부모님은 누나와 나에게 장난감을 그닥 사주지 않았다. 째째하다기 보다 아버지의 월급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쯤 아버지가 집에 가져다 주시는 돈이 80만원이라는 걸 알았는데 한국의 통계청 소비자 물가 지수 화폐가치 계산에 따르면 대략 1990년의 만원은 2020년의 이만육천원이다. 생각해보니 아니 집에 고작 200만원을 가져다 줬단 말인가? 확인해보니 1990년 기준 중위 소득은 92만원인데 명문대를 나와서 당시 모 기업의 이사였던 주제에 겨우 80만원을 받았다는 얘긴데 정말 믿을 수 없어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째째해서 나는 장난감이 거의 없었다.
 
대체로 가지고 노는 것은 사촌형의 장난감 중 더 이상 갖고 놀지 않는 것인데 나는 어른들이 꼴보기 싫어할만큼 내 장난감들 - 주로 레고였다 - 에 집착했는데. 가장 즐겨했던 것은 매일 5시쯤부터 공영방송에서 하는 만화를 보고는 그 만화의 내용을 내 장난감들로 재현하고 재창작하는 활동이었다.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때는 공영방송 외에는 제대로 된 채널이 없어서 하루 종일 만화만 틀어주는 채널 같은 건 없어서 아침에 만화를 보려면 잘 기다리다가 AFKN의 TV 방송을 봐야했다. 지금은 아날로그 TV송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 같지만. 그 때는 세서미 스트리트나 각종 일본 애니의 영어 더빙 버젼을 오전에 해줬기 때문에 다음 방송이 뭘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멍하니 AFKN을 봤다. 만약에 마징가 같은 것의 더빙 방송이 나오면 대박이었다!
내가 세서미스트리트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면 외국인들은 가만 듣고 있다가 근데 너는 한국인이잖아?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나도 어릴 때 세서미 스트리트를 봤다고. 내 인생에서 가장 영어를 잘했던 건 4세에서 7세까지 였다고. 집에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혼자 영어로 노래부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녔으니까.
 
어느날 나는 환상특급 (이게 뭔지 궁금하다면 트와일라잇 존을 검색해보면 된다)을 보다가 "악당의 최후"라는 제목을 보고는 어머니에게 가서. 엄마 엄마 최후라는 게 무슨 뜻이야?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스튜어디스 출신이기 때문에 영어도 꽤 잘 했는데 하루 종일 영어를 물어보는 내게 좀 질려서는 뭘 물어보든지 좀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시기였기에 그 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건 죽었다는 뜻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는데 난 악당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죽기를 바라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결말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왈츠를 추듯이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줬으면 한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그 최후라는 말의 무서움을 떠올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나는 때때로 그렇게 아무도 모를 이유로 우는 경우가 많았어서 누구도 나를 달래주지 않았고. 나 또한 아무에게도 내 슬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공업도시라고 해도 주변은 전부 산이었다. 그야 여긴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 바다 근처에서 자란 사람이 자기 어릴 때 얘길 해주면 홀린듯이 듣곤 했는데. 아파트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바로 저수지와 논밭. 그리고 과수원이 있었다. 지금 그 곳은 멋진 이름의 수목원이 되었는데 예전 논밭과 과수원이 있던 시절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온실 같은게 생겼잖아요 라고 말하면 우리 때는 비닐 하우스가 있었다구 라며 엣헴거리고 싶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게 지겨워지면 나가서 놀았는데. 내가 좋아하는건 역시 모래 장난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 아파트에서는 동네 놀이터의 바닥재를 교체한다면서 투표를 했는데 분명 우리 동에서는 압도적으로 모래를 밀었으나 결과는 합성수지로 결론이 났다. 모래 장난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들 까먹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못 분해했지만. 생각해보면 모래 장난을 하고 온 아이가 얼마나 더럽고 집에 모래를 잔뜩 흘리는지 까먹은 것은 내 쪽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모래 장난을 할 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다름 아닌 비가 온 직후이다! 그 전 까지 함정이나 파고 탑이나 쌓아올리는게 전부였다면 비가 오면 그 꾸정물로 해자를 가득 채우고 강을 만들어 그 위에 다리를 세우는 것도 할 수 있었는데. 어릴때 부터 건축이라면 이상하게 환장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신나는 이벤트라서 비가 그치기만 하면 집을 뛰쳐나가서 거대한 마을을 축조했다. 크고 멋지게 만들면 만들수록 동네 어린이들이 몰려들어서 나의 거대 마을에 고사리손이라도 보태겠다는 뜻을 표하곤 했는데. 나는 관대한 건설자요 시장이었기 때문에 동전 하나 받지 않고 그들의 참여를 허락했다.
 
시간 제한은 항상 5시였다. 집에 가야할 시간이다. 만화가 할 시간이었기 때문에 집에 가서 손발을 씻고 혼나지 않으려면 세수도 해야했다. 만화를 보면서 모로 누워있으면 누나가 와서 나 이거봐야해 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만화를 틀었고 그것도 보면서 구석에서 누워있으면 어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불렀다.
 
나는 오늘 반찬이 뭔지 묻지 않는다. 아까부터 갈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24년 8월의 글이다.

 
M의 이름에는 어떤 M도 들어가 있지 않다. M을 사랑한 적도 없지만, 첫사랑에 대해서 떠올리면 M이 떠오른다.
M에 대해서 이제 까지 몇 번이나 글을 써보려고 시도해보았는데. 좀 처럼 쉽지 않다. M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M에 대해서 떠올리면 약하게 보이기 싫어하는 그 나이 여자애 특유의 말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너 여고 나왔지? 라고 물어보면 응, 이러거나 어, 라거나 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왜? 문제 있냐? 라고 대답한다. 네가 어떤 개소리를 하려는지 안다는 듯이 말이다. M은 강남에 있는 유명한 사립여고를 나왔다. 여자애들은 귀찮아 라고 말하길래 왜? 라고 물어보니 아니 쓸데없이 꺄꺄 거리고 기회만 있으면 손잡으려고 하고. 가끔 안아달라고 그러고. 라고 하길래 너 고등학교때 숏컷했지? 라고 하니까 어떻게 알았어 2학년때 까진 숏컷이었지 하고 씨익 웃었다.
 
M은 도대체 뭐랑 닮은걸까 하는 생각을 곰곰히 한 적이 있었다. M은 눈썹이 칠한 것 처럼 두껍다. 눈은 무쌍에 시원한 눈매인데 웃고 있으면 만화에 나오는 눈웃음 처럼 된다. 콧대는 곧고 입은 담배를 필 때가 아니면 꾹 다물고 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곧다. 찰랑거리게 긴 검은 머리를 대충 매만지며 턱을 까딱하며 나를 바라본다. 뭘 쳐다보는데? 라는 뜻이다. 너는 동물을 닮았어. 라고 말하니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무슨 동물? 이라고 물어본다. 그 때 나는 머릿 속으로는 미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암사자를 떠올렸지만 19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리를 하면 안된다는 분별 정도는 있어서.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빨이 많고 뾰족한 동물 닮았어 라고 대답한다. 19살인 M은 나에게는 특히 가차가 없어서 너는 해서는 안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라고 말하며 내 이마를 민다.
 
인터넷으로 사람을 만나면 안된다고들 많이 말하기 전에 M과 나는 인터넷으로 알게 되었다. 수능보기 1개월 전부터 자체 휴식을 한 덕에 여유로웠던 나와 수능 보는 날에 어쩔수 없이 시험은 보러 갔지만 시험 시간 내내 잠만 잔 M은 친구들이 온갖 입시 준비에 바쁜 무렵 인터넷을 해대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채팅과 게시물 기능.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그리기 기능이 있는 커뮤니티였다. 나는 M의 말투가 너무 거칠어서 또래의 남자아이라고 생각했고 M은 내 말투가 너무 점잖아서 또래의 여자아이라고 오해해 우린 금세 친구가 되었다.
 
내가 수능을 보기 1개월 전부터(그 시절엔 수시가 없었다. 나는 나이가 많다 까불지 마라.) 자체적으로 공부는 안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M은 본인과 비슷한 케이스 (나는 고3 내내 모의고사 전국 5% 이내를 유지했다.) 라고 생각했는지 왠지 이것저것 나에게 장래의 고민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지는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그림을 그리는 프로가 되고 싶다는 얘기였다. 도대체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 커뮤니티에 그림 좀 올려보실래요? 라고 하자. M은 처음에 엄청 쑥스러워하면서 지금 PC방에서 하는건데 마우스로는 잘 못 그려요 잠시만요. 하고 후다닥 뭔가를 올려서 보여주었다.
 
반전은 없이 엄청 이해하지 못할. 형태도 색도 엉망인 그림이 하나 올라왔다. 중학교때 부터 친구들 중에 한 명 씩 있지 않은가? 나는 만화가가 될거야 하고 연습장에 하루 종일 뭘 그리는데 뭘 그리는지는 모르겠고. 뭐 그런 친구들. 딱 그런 그림이 하나 올라왔기에 아 이 친구는(나는 직접 만나게 될 때 까지 M을 계속 동갑인 남자애로 생각했었다) 대학에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등학생의 나 치고는 굉장한 분별력을 발휘해서는. 그림을 몇 개 더 올려주세요. 지금은 진짜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대답했다. 마우스가 진짜 손에 안 익네요 하며 M은 정말 많이 쑥스러워했다.
 
직접 얼굴을 보게 되기 까지 얼마나 걸렸던가. 2개월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M도 한가하기 짝이 없었고 M은 경솔하게도 본인이 알바하고 있는 장소를 나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뒷 쪽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길래 갔더니 검은 생머리의 예쁜 여자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어서 나는 깜짝 놀라. 아 죄송합니다. 하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M은 이 예의없는 새끼야 하고 나를 쫓아와서 삥을 뜯는 깡패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나를 질질 끌고 갔다.
 
그냥 멀쩡하게 공부로 대학을 갔다는 것 부터 시작해서 내가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재수없는 새끼야. 기만자 새끼야 하고 M은 화를 냈지만. 사실 더 놀라운 것은 M쪽이었는데. 그림을 올린지 3일 정도가 되자 갑자기 아 이제 마우스가 손에 익네 하더니 말도 안되는 뎃생으로 그림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속도였는데 나와 30분쯤 채팅을 하다가 야 다 그렸다 누나 그림에 댓글 달아라 라고 해서 가보면 프로가 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러프를 올려뒀고. 정말로 손이 익지 않았을 뿐이었는지 그림을 올리면 올릴 수록 뎃생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일반 인문계를 나왔을 뿐인 내가 누군가의 진짜 재능을 목격 한다는게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짝이었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주변에서는 우리 둘을 한 쌍인 것처럼 다뤘지만. M은 그 나이대의 여자애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를 더 좋아했고 당시의 나는 놀라울 정도로 이성에게 담백했다. 남중에 남고를 나와서 이성이 접근하면 깜짝 깜짝 놀라고 과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웃겼을 수는 있었던 것 같다. 나보다 딱 2개월이 어린 M이 나와 대화할 때의 1인칭은 누나였다. 누나가 말야. 누나 배고프다. 누나 담배피러 간다 따라와라. 나는 그렇게 M의 말이면 고분고분하게 듣곤 했다. 20대 내내 M이 나에에 남긴 영향은 컸다.
 
예를 들어 몇 년이나 후에 데이트 상대의 학교를 물어보면 이상하게도 M이 다녔던 학교 출신이 엄청 많았는데. 어느날 결국 그 학교 출신의 사람과 사귀게 되어 그 학교를 진짜로 가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친구에게도) M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M이 워낙 학교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처음 가본 곳인데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쯤엔 이미 M과 연락 할 수 있는 채널이 다 끊겨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강남 어딘가 사무실 뒷편 흡연장에서 야 요즘 뭐하냐 하고 서로 배실배실 웃으면서 안부를 나누고 헤어진 것이 다였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M이 나에게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은 18살, 19살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얘기라고는 학교와 가족 그리고 친구 얘기가 다이기 때문이다. M은 항상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지만(이 누나가 너 말고 친구가 없겠냐?) M의 최초의 이성친구였던 나는 M의 그 때 까지 인생을 통채로 알게 되었다. 거꾸로 나는 M에게 내 그 때 까지의 인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딱히 이유는 없었다. 나는 사실 항상 M의 재능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M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더 중요했지 내 얘기를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내가 M을 쳐다보면 M은 항상 재수없어. 내가 그렇게 좋냐? 하고 쳐다보지 말라고 윽박질렀지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일은 없었다.
 
M에게 6살인가 7살이 많은 남자친구가 생기기 전. 서울 어딘가에 골목을 나와 나란히 걸어가던 M은 뜬금없이 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는 찐따 답게 어어 뭐야 라는 얼간이 같은 리액션을 했는데. M은 당황하지도 않고 누나 춥다. 라고 하며 내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역에 도착할 때 까지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이라서 정말 추운 날이긴 했고 M은 빰이 얼어서 빨갛게 되어 있었다. 나는 18세 하고도 1개월 쯤. M은 생일이 지나지 않아 17세 하고도 11개월쯤 되었다.
 
글을 쓰다가 M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한다면 M은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M이라면 아마 시큰둥하게 추워서 손 좀 잡은거 가지고 그렇게 기억씩이나 하고 있는거 보면 넌 달라진게 없다. 라고 할 것이다.
 
어느날 SNS에서 내가 처음 보는 계정이 나를 차단한 걸 발견했다. 나를 차단한 계정이 한 두개가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기엔 팔로워가 수천명이 넘어가 만명이 다 되어 가는 계정이다. 궁금증이 일어서 구글에서 검색해서 들어가보니 일러스트레이터의 계정이다. 온갖 언어로 계정주의 그림에 대해서 상찬하는 코멘트가 가득하다. 예전에 날 알던 사람인가 싶어서 미디어를 찾아보니 그림이 눈에 익다. 네 그림은 십년이 지나도. 이십년이 지나도 알아 볼 수 있다.
 
하, 이 새끼. 하고 생각한다. 하여간 나는 아직도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좋아한다.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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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 Feather, Fly like an arrow.  (0) 2024.08.18

만22살이 되고 2개월 쯤 후였다고 기억한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나는 좋아하던 누나한테 연락이 와서 누나가 살고 있는 동네로 갔다. 피씨방에 있던 그 누나는 어 왔니 잠깐만 하고 게임을 계속했고 나는 3시간 정도를 따로 떨어진 자리에서 게임을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게임이 끝나고 그 누나(누나라고 해도 겨우 만23살이었다)는 나를 동네의 콩나물국밥집으로 데려갔는데 거기서 눈도 잘 마주치지 않으며 누나가 했던 이야기는 두가지이다. 1. 예전에는 네가 편했지만 요즘에 네가 불편하다. 2.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동생으로서 좋아한다.
 
나는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한 입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누나가 하는 얘길 들었다. 그럼 누나랑 나랑 몇년 동안 있었던 일은 뭐였어요? 같은 질문은 하지도 못했다. 지금의 나라면 푸하하 하고 웃고는 아주 웃기고 있구나 하고 말했을텐데 그 때의 나는 22살이 가지고 있을 법한 질문과 대답 밖에 없었다. 누나가 내 친구의 친구(나와 같은 나이였다)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걸 안 건 그 뒤 몇 주가 지난 뒤였다. 누나로서는 그닥 내키지 않는 정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누나는 깨작거리고 있는 나에게 근데 너 어떻게 집에 갈거야 라고 물어보았다. 지하철은 끊긴지 오래였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목이 메어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아직 차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뒤돌아서 가면서도 누나가 나를 다시 불러주길 기다렸다. 차가 있을 리가 없지. 새벽 2시 쯤이었고 차가 없는 건 누나도 모를리가 없었을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22살이 가지고 있을 법한 생각 밖에 없었다. 택시를 타려다가 누나가 불렀다고 술자리도 중간에 취소하고 이렇게 휭하고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멍청하고 싫어서 집에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 걸어가면 몇 시간이나 걸릴테고 누나와 거리가 떨어졌다는 실감이 들테니 다시는 이렇게 쉽게 여기까지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5시간이 걸렸다. 지금 다시 지도를 켜서 5시간이나 걸릴건가? 하고 찾아보았는데 역시 22살이나 가질 법한 지혜밖에 없었던 나는 아는 길로 간답시고 학교를 거쳐서 노량진-영등포를 거쳐서 집에 갔기 때문에 5시간이나 걸린거였다. 새벽이 끝나고 있었고 nujabes 앨범을 8번쯤 들었지 않았나 싶다. 졸립고 이상하게 상쾌해서 오전 알바도 취소하고 내내 잤다. 그 뒤로 누나가 몇 번 나를 불렀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19살부터 22살까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였던 누나와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의 내가 평가하기로는 나의 그 비이성적인 믿음 - 걸어서 집에 가느라 몇시간이나 걸린다면 이제 앞으로 이렇게 부른다고 쉽게 가지 않을 거란 생각 -이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다. 비이성적인 믿음이야 말로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법이다.
 
공정하게 말하기 위해 그 누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사회화도 덜 되어 있던 야생의 남자애 -내 얘기임- 하나를 잡아다가 밥도 먹이고 칭찬도 하면서 열심히 교육해서 쓸만해졌다 싶었더니 갑자기 자길 좋아한다고 드니까 침팬지 연구를 하는 인류학자에게 어느날 부터 침팬지들이 구애를 하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 누나는 나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애로 키우고 싶었던게 아닐까. 테이블매너나 데이트 하는 방법. 여자가 생각할 법한 좋은 남자가 되는 법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불행히도 나는 친누나도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도 잔소리를 들었기에 교육효과는 두배였다. 어디를 가나 아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지 말랬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래 여자애들을 대했다.
 
나는 그래서 그 나이대에는 또래 여자애들한테 그럭저럭 인기가 좋았는데. 그야 70%이상 집 안과 집 밖에서 계속되었던 사회성 교육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누나는 본인이 그렇게 키워놓고 내가 또래들한테 인기가 있는 걸 티내지 않게 못마땅해했고 인정도 하지 않으려고 들었는데 누나의 가장 친한 후배가 나에게 집착해서 셋이서 만나는게 불가능해졌을 때에도 누나는 나에게 네가 뭐 잘못한거 아니야? 예의범절을 지켜야지 하고 내 탓을 할 정도였다.
 
누나는 한 번 그리고 뜬금없이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거 아니니?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그냥 게임을 하듯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할 뿐이고 나도 그런 대상인거잖아. 나는 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라고 말했다.

내가 그 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여기에 쓰지 않는다. 제법 대단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그걸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나는 내 대답을 퍽 마음에 들어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앞서서 결말을 먼저 이야기했다. 누나가 나와 데이트 하는 사이가 되는 일은 없었고 (웃기고 있네 그 전에 하던건 데이트가 아니고 뭐냐 진짜 22살, 23살 둘이서 염병 천병 아이구 정말) 사실 그 누나가 하는 말이 맞았다. 연애의 관점에서 나는 그 누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후에 갑자기 깨달은거지만 나를 연애의 상대로 좋아했던 것은 그 누나 쪽이었다.

그 누나도 그 때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야 무엇이 사랑인지 이해하는 법이다. 우리의 관계는 반대로였다. 그 누나가 나를 연애대상으로 생각하고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나는 항상 그랬다. 나는 그 뒤로 오랫동안 거울처럼 누군가가 바라는 것을 되돌려주는 그런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나의 오랜 병이 되었고. 이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누나의 이상적인 연애대상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 후에, 좀 비극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누나를 잃은 나는 좀 더 차갑고 건조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 누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단지, 그 전에는 그 누나가 그걸 바랐기 때문에 친절하고 햇살처럼 밝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와 동갑이었던 남자친구와의 연애는 몇개월 가지 못했다. (그 후에 나를 차고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1개월 길어봤자 3개월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구여친들 중 그 누구도 확인 및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가설로만 남아있다. 쳇)
 
위에서 얘기한 것 처럼 누나는 때때로 나를 찾았고 부르기도 했으며 나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따로 만나는 일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그 뒤로 연애를 쉬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여자친구가 있을 때 여자들이랑 연락하면 안된다고 가르친게 다름아닌 그 누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뒤로 딱 두 번 더 단 둘이서 만났다. 나는 좀 더 건조하고 냉정한 사람이 되어 누나의 이상적인 남자애와는 거리가 멀게 되었고. 누나는 여전히 날씬하고 예뻤다. 두 번 다 술을 마셨다. 

이 시험 합격하면 뽀뽀해준다면서 나 합격했어. 진짜로? 어려운거 아니었어? 어...나는 천재니까...정도로 실없는 이야기나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뽀뽀는 해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게 엄청 짜증나는 걸 보니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대체로 그 누나의 연애 얘기를 들어주고 공통의 지인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누나는 한 번도 내 여자친구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술을 마시던 나는 뜬금없이 누나 첫째는 딸이야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처녀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얘가 라고 말했지만 나는 누나가 결혼하려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누나 이게 누나랑 나랑 만나는 마지막 날이야 라고 말했다. - 우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야. 누나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쳐다봤다.
 
내가 21살때의 일이다. 어느 역인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우리의 관계에 지치고 실망했던 나는 이제 이 누나랑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어느 역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얼굴을 쳐다보지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이걸로 끝이라는 생각에 안심과 짜증이 뒤섞여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누나는 남자친구와 만나러 가기 위해 역에서 밖으로 나가야 했고 나는 그 때 ...하여간 어딘가로 가는 길이었다. 여기서 - 그 누나가 있는 곳에서 - 벗어나기만 하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누나는 개찰구를 찍고 가는 나를 뛰어서 쫓아오더니 나를 붙잡고는 울기 시작했다. 너 그러면 죽여버릴거야 너 진짜 죽여버릴거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누나는 겨우 22살이었으니까 그럴만했다.) 나는 내가 뭘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살짝 겁을 먹어서는 이 사람이 어떻게 안거지? 하는 생각만 했다.
 
친구의 말로는 나는 가끔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있다고 했다.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누나가 결혼하는 주에는 전화가 와서 받았다. 나 진짜 결혼하기 싫어, 니가 나 어디로 데리고 도망가면 안되니? 라고 말하며 울었다. 나는 통화를 듣고 있다가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 사람은 나의 19살때부터 22살때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의 20살때부터 23살때 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또한 내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우리는 그 뒤로 정말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공정하게 말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 만난 여자친구는 누나와 같은 나이에 키도 비슷한, 학교도 같았던 사람임을 밝힌다. 3개월을 못가고 헤어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차였다)
 
그리고 그 누나의 첫째는 딸이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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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9] Forest, Gone are the days.  (0) 2024.08.18

 
광고 사진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찌푸린듯 웃는 듯 저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다. 흰 옷을 입고 바싹 말라서는 머리 끝이 부드럽게 말려있다. 이 사람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떠오른다. 떠오른 사람은 친구일 때도 있고 후배 일 때도 있다. 광고를 멍하니 오래 쳐다본다. 요즘 나는 자주 이런다.
 
이제는 죽은 캐나다 문학 평론가 노스럽 프라이의 얘기를 잠시 해보자. 이제는 내용도 가물가물한 책 <비평의 해부>와 <구원의 신화>에서 그는 원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신화적 이야기의 요소는 그 이야기 안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형으로서 전유되고 또 유비되어 다른 상징에 사용되고, 그렇게 변형된 신화의 원형은 현대의 서사에서도 발견된다...정도의 이야기이다.

신화나 문학에 익숙한 몹쓸 인간들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를 뭣하러 저렇게 설명하고 있지? 하는 생각을 하겠지만. 좀 더 설명을 해보자.
 
현대의 탐정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인 싸움도 잘하고 고독한 탐정은 아무런 댓가 없이 약자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데 이런 영웅의 이미지는 캔터베리 이야기 등 중세의 낭만시 영역에서 왕과 기독교에 충성하고 약자를 위해 댓가 없이 싸우는 용감한 기사의 이미지에서 시작했으며. 이 용감한 기사의 이야기가 시작한 원형은 술자리에서의 약속을 위해서 메두사를 해치우기 위한 여행을 떠난 페르세우스이다.

이처럼 모든 이야기에는 원형이 존재한다. 우리가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원형의 변주일 뿐이다. 설명하고나니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누구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나는 자주 듣는다.

인상적인 경험이 있다. 외가 어른의 장례식장에서 그냥 정문에 서있을 뿐인데. 생전 만나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한명 씩 ㅇㅇㅇ님 장례식장이 몇 호실인가요? ㅇㅇㅇ회장님은 와 계시나요 하고 물어보기에 신기해서 어 혹시 제가 누군지 알고 여쭤보시는 건가요? 라고 물어보니까 우아한 숙녀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 쪽 집안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생기셨는걸요 라고 대답해주셨다.

물론 지금 하는 이야기는 얼굴이 닮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완전히 남남인 누군가가 있는데. 나를 보고 그 누군가를, 혹은 그 누군가를 보고 나를 떠올리는 일, 말하자면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누가 우리를 보고 있을 때 우리의 무엇을 보는지 이해할 수 없긴 하다만.
 
어느날의 일이다. 온수역 1호선 플랫폼의 상행선 중간 쯤 벤치가 놓여져 있는 곳에 서있는데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좀처럼 전화를 하는 후배가 아니어서 이동하는 중이었지만 일단 전화를 받았다.

별로 대단하지 않은 신상 얘기를 주고 받더니 후배는 갑자기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응. 되게 똑똑한 척을 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에요. 응. 그러고는 후배는 머뭇거리더니 말한다 선배를 되게 많이 닮았어요.
 
내가 평범하게 생겨서 나랑 자기 아는 사람 누구 닮았다는 얘기 많이 듣는데 실제로는 안 닮았을걸?
아니 진짜 많이 닮았어요. 그리고 되게 좋은 회사 다녀요. ㅇㅇㅇㅇㅇ이에요.
오 좋은 회사다 나는 면접도 못 본 회사인데 능력있는 사람인가 보지.
선배도 좋은 회사 다니잖아요.
아니요 선배는 그냥 공장 다닙니다.
 
이미 약속은 늦었다. 그런데 후배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과 아직 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그런 이유없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다.) 
 
근데 얘기하는 것만 들어보면 진짜 비호감에 잘난척만 엄청 하는 사람인데 너랑 친해?
네 저랑 많이 친해요. 연락도 자주 하구요.
나랑 닮았다는 것 빼고는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말야.
괜찮은 사람이에요. 여자친구도 되게 예뻐요. 선배랑 닮은게 오히려 단점이죠. 
 
후배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 시점에서 그래 나 약속 있어서 이제 그만 끊어야겠다 또 연락하자. 라고 말해야한다는 걸 알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머릿 속에 떠오른 여러가지 말 중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그 사람 좋아한거니?
 
후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그거 알아요 선배는 진짜 잔인해요.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그 후배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나중에 다른 후배에게 물어보니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어느 한가한 날의 변덕으로 SNS를 뒤져 뭘 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머리가 하얗게 된 남자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귀여웠다.
...
 
형은 항상 내 여자친구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놀린다. 그렇게 10년 쯤 놀리기에 과학적인 접근법을 써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 어 뭐였지 맞다 공부를 잘함. 그리고 성실함. 가장 중요한 웃는 얼굴이 예쁨. 이라고 메모지에 쓰고는 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길 수 밖에 없어.
내가 안경을 쓴 사람을 좋아하는게 아냐 공부를 잘 하려면 안경을 쓰기 마련이고 (여기서부터 NG였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바싹 마르고 타질않아서 얼굴이 하얗게 된다고. 라고 말했더니 형은 웃는 얼굴이 예쁨 부분을 가리키고는 그냥 앞니가 큰 사람을 좋아하는거겠지.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니 맞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요새, 아니 요 몇년 동안 내 삶이 어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누군가를 볼 때 마다 누군가를 떠올린다. 웃는 얼굴이 겹쳐 보이고 예전에 들었던 말투를 들으면 속으로 깜짝 놀라 놓고는 다른 곳을 쳐다봐 표정을 감춘다.

나는 이 규칙성이 너무나 기묘하게 느껴져서 어느날 정리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머릿 속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를 선으로 이어보았다. 이 사람은 이 사람과 닮았어. 이 사람은 이 사람을 떠올리게 해. 그렇게 한참을 머릿 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머릿 속이 더 복잡해진다. 
모든 관계선을 지우고는 처음부터 다시 긋는다. 이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있었어 이 비슷한 일이 다른 사람과 있었지. 그리고 이 사람과 이야기하다보면 저 사람을 떠올리게 돼. 

그렇게 계속해서 줄을 잇다가 어떤 생각에 다다르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계속해서 생각한다. 이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었기 때문에 후회했어. 그래서 저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사죄인지 아니면 후회를 반복하지 않는 것인지 헷깔리기 시작했다.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전에 알았던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한다고? 왜 그런 짓을 하지?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백지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두개의 점을 연결하는 것 뿐이야.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나는 단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 사람들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지금을 후회하고 있을 뿐이란걸 깨닫는다.
 
언젠가 어느날 누군가를 만났다. 검은 셔츠를 입고 바싹 말라서 덩치가 작은 남자아이, 혹은 작은 새처럼 보였다. 나는 바람에 꽃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이 사람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미 가슴이 아려와서 오히려 쾌활하게 웃으며 조금 걸을래? 라고 말했다. 나는 걸어가며 내가 사과를 해야할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더 시간이 지난 어느날. 정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으면서 나는 순수하게 변덕으로 미안해. 하고 사과한다. 너한테 그렇게 하지 말아야했어 라고 말한다. 상대가 놀랐는지 아니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무 동요 없는 문자열이 다음에 커피나 한잔 해요 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제대로 말했는지 아니면 뭔가 실수를 했는지. 이 모든 것이 그냥 이기적인 충동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 그러자 하고 대답할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 그리고 쿳시의 지옥을 생각하자.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가들의 내세는 죽음의 순간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은 대심문관의 앞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이 전부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이야 말로 그들의 소설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언젠가 내가 대심문관의 앞에 섰을 때 대심문관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정말로 대심문관 같은 것이 있다면 그는 내 인생에 가장 친밀한 사람일 것이다. 내 인생 전체를 이해하고 판결을 내려 줄 사람 일테니 나의 모든 개인 서사를 꿰뚫을 수 있는 -  그러니까 내가 가진 모든 원형이 합쳐진 그런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볼까? 아니면 내가 이제까지 사랑해온 어떤 원형과는 상관없는 얼굴을 한 채로 나를 쳐다볼까?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무심코 기대한다. 어쩌면 대심문관은 당신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보길 바란 - 그리고 보지 못할 - 당신의 나이 든 모습을 하고 나를 내려보고 있지 않을까? 단정한 이마와 흰 얼굴을 하고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보며 지금부터 내가 해야할 일-참회와 고백-을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나는 혹시 그 때가 오면 눈물을 제대로 참고 대심문관에게 당신을 만난 지금이 나의 모든 인생 동안 기다려온 단 한 순간이라고 제대로 말 할 수 있을까?
 
 
24년 8월의 글이다.

the Animals -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을 듣는다.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교토국립 박물관>
 
교토역에서 가모 강을 건너 산쥬산겐도를 근처에 있는 이 조용한 박물관은 항상 교토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서점을 좋아하는 이 습벽은 어디 가질 않아서 혼자 여행을 하면 사양하지 않고 한참 시간을 보낸다. 18년도 도쿄에서 여행을 했을 땐 여행 전체를 도쿄의 미술관과 도쿄국립박물관을 돌아다니는데 썼다. 몰라서 못 간 적은 있어도 사양 한 적은 없다니, 도박꾼이 하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대단한 것은 아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좋아한다.
 
교토의 미술관들은 기대보단 그리 대단하지 않은데. 일본 미술의 성지 같은 곳이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에 교토에 처음 왔을 때는 미술관들을 주로 찾아다녔는다. 그러다 깨달은게 있다면 뮤지엄이란 뭔가를 모아둔 곳인데 말 그대로 천년의 교도인 교토의 미술과 유물들을 모아두게된다면 아무리 큰 장소로도 부족하다. 굳이 따진다면 교토라는 장소 자체가 거대한 뮤지엄이구나 거기 지하철도 있고 빵집도 있고...너무 무서운데...
그래서 여행 중에 굳이 찾는다면 보통 동선이 이어지는 교세라 미술관이나 교토국립박물관을 찾는다. 물론 마음에 드는 전시가 있는지 찾아보는 건 매번 하고 있다. 이번 여행중에는 무라카미 다카시와 로산진 기획전 정도가 흥미로웠는데 소중한 시간을 할아버지가 주물주물한 무언가를 보면서 보낸다고? 아니 아니 그럴 순 없지.
 
뮤지엄에서 좋아하는 활동 중 하나는 기념품 샵에 들르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추억 삼아서 마그네틱을 수집하고 있는데(우연히도 지금 방금 다시는 안하리라 마음 먹었다) 공항에서 살 수 있는 마그네틱보다 그나마 볼 만한 건 언제나 뮤지엄 기념품샵의 물건들이다. 아무리 전시가 훌륭해도 기념품 샵의 구성이 별로라면 나는 일단 실망하고 보는데. 좋아하는 것은 대표 전시물을 마그네틱으로 만든 것. 그게 아니라면 엽서 뭐 이렇다. 만약에 인형이 있다? 인형이 있다 그럼 최고다. 나는 인형을 모으지 않지만 일단 사고 주변의 아무나에게 준다. 그 대상은 대체로 조카나 친구들인데 예전에 펠메르의 그림을 이미지로 만든 미피 인형은 아직도 조카의 장식장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선물을 한 사람으로서 다시 바랄 수 없는 영광이다.
 
블로그에서 몇 번 박물관에서 봤던 불상의 이야기를 썼던 적이 있다. 그 중에서 '숨'이라는 소제목으로 부동명왕 상과 대일여래상을 봤었던 일을 쓴 적이 있다. 그 정도의 이야기를 쓸만큼 인상적인 전시물은 없었기 때문에 전시물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그 전시는 최근 몇 년 간 교토국박의 가장 성공적인 전시 중 하나로 불리우는 국보전이었다 표를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사실 반년이 지난 지금 전시물에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을 할려면 할 수 있는데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기억하지 않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한 장소인 뮤지엄에 대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하다니. 너무 일부러 만들어낸 아이러니 같아서 스스로를 좀 비웃게 된다.
 
뮤지엄에서 좋아하는 활동 또 다른 걸 말해보자. 뮤지엄에 딸려있는 카페나 음식점에서 뭘 먹는 것이다. 이 오래된 습성은 혼자 미술관을 다니다가 생겨났는데. 우리나라의 뮤지엄들은 이전에는 카페가 없었던 엄격근엄진지한 곳이라서 그렇지 않았지만(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게 좀 기쁘다) 해외의 뮤지엄들은 작은 카페라도 하나 딸려있는 것이 대부분. 
언제인가 기억도 안나는데 우에노의 미술관을 반나절 만에 돌아야지 하고 마음 먹고 돌던 중 너무 배가 고파서 그 중 하나에 딸린 카페에서 파스타와 샌드위치를 시켜서 먹었는데 가격이 합리적인 것은 물론이고 꽤 맛이 있어서 대만족한 나머지 기회가 있다면 뮤지엄에 딸려있는 장소에서 뭔가를 먹고 있다.
항상 가격이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전시물들을 보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가까운 거리에서 달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사실 이번 박물관 방문에서 내가 항상 가던 가게가 없어졌다는 것에(뮤지엄 직원이 알려주었다. 그 분도 정말 쓸쓸한 표정이었다.) 격노했지만 뮤지엄 부지 안에 있는 마에다 커피를 갔더니 이게 웬걸 이 곳 한정 블렌드인 류노스케가 허세스러운 이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맛있고 다른 음식들도 먹을만해서 분노가 사그러들었다. 보통은 밥을 먹고 급히 일어나서 다음 곳으로 가는데 여유가 좋아서 류노스케를 한 잔 더 마시며 혼자 한참을 앉아있었다.
 
"혼자 한참을 앉아있었다.“

<가이유칸>

여러분은 수족관을 좋아하십니까? 이제까지 힘들게 비밀로 해왔지만 저는 동물원과 수족관을 둘 다 좋아합니다.
어느날 아사히카와 동물원에서 불행해 보이는 동물들을 보고 동물원은 예전보다 적극적으로 가진 않게 되었지만 수족관은 그래도 저항감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고등어나 정어리가 불행한 표정을 지어도 나는 모르니까…아니 농담입니다.
 
그날은 엄청나게 비가 왔다. 애들을 데리고 굳이 저기에 간단 말이지 하고 생각하며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간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혀를 찼는데.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가지 않은 것은 먼 미래의 기후조차 예상하는 뛰어난 지혜 덕분이 아니라 그냥 익스프레스 티켓을 여행가기 한달 전에나 예매해야지 하고 생각한(보통 두달 전에 오픈된다) 나의 멍청한 실수 때문이었다. 그 대신 간 곳이 오사카의 가이유칸이었다. 처음부터 가이유칸은 갈 생각이었지만 이왕 가는 김에 좀 더 느긋하게 보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맞겠다.
 
가이유칸에 생긴 지 몇년 안팍의 비교적 최근에 생긴 프로그램으로 보이는 "백야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다. 고래상어 등 대형어류가 전시되어 있는 태평양 수조를 위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투어인데. 정면이나 옆모습을 그냥 볼 수 있는데 굳이? 위에서?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나와 동행은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백야드 투어가 포함된 티켓을 샀다. 애초에 나도 그렇고 동행도 그렇고 "그런 인간"인 것이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면 모를까 시간이 맞다고 하자 고민이 없었다.
 
백야드는 정말로 백야드이다.입장을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입장을 해야하는 곳은 그냥 스탭들이 이용하는 통로로 보여서 여기서 정말로 기다려도 되는걸까 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기다려야 한다. 어색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가 맞을까요 하고 물어보면 확신이 없다는 듯이 아아 그렇겠죠 하는 식으로 대답한다. 애초에 그렇게 경험해본 사람이 많지 않은 서비스인 것이다. 
시간이 되면 스탭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하고 물건을 떨어트리면 되찾을 수가 없으니 모두 로커에 넣어달라고 설명을 해준다. 휴대폰은 당연히 휴대 할 수가 없다. 꽤나 다들 진지해서 동행에게 귓속말로 아이돌 콘서트 티켓이랑 각성제 팔아요, 총이랑 칼도 제시하면 싸게 드려요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 둔다. 나와 동행 말고도 외국인과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이 많다. 
 
백야드는 춥고.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 말소리가 울리는 공간에서 스탭이 마이크로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고래상어와 가오리. 그리고 여러 물고기 들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설명은 그렇게 길지 않다. 너희들은 굳이 여기 들어올만한 녀석들이니까 내 설명 같은건 하나도 필요 없을거야. 하는 태도이다. 그 말이 맞다. 사람들은 각자 적당한 위치를 잡고 물 속의 거대한 짐승들을 내려다본다.
 
고래상어는 일정한 서식지가 없다. 물고기 치고는 아주 느릿한 초속 1.3m/s 정도의 속도로 헤엄치며 사람의 걸음걸이로도 조금 급하게 걸어가면 따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속도이다. (마이크 펠프스의 수영 속도는 시속 9.7km...그러니까 초속 2.7m/s 정도이다. 장하다 펠프스 고래상어를 이겼구나.)
가이유칸의 고래상어는 오키나와에 있는 츄라우미 수족관의 고래상어보다는 작은 크기지만(작다. 왜냐하면 물어봤다.) 두마리 다 좀 더 활발하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원래 집이 없는 생물인 것 처럼 끊임없이 헤엄을 친다. 멀리 가버렸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금세, 그리고 천천히 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고래상어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쥐 가오리, 숏테일 가오리 등 가오리들은 상어의 친척다운 우아한 태도로 헤엄을 친다. 사람들은 대체로 물고기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그들의 표정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표에서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육상 동물이 3차원을 인식하여 살아가는 바다생물보다 뛰어날지 의문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 안에 물고기들이 가득 헤엄치는게 보인다. 나는 수영장에 누군가와 가면 두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첫번째는 어느날 헤엄치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수영을 하다보면 내가 보지 못하는 이 물 밑에 커다란 물고기가 있을까봐 무서워진다는 이야기이다.

백야드의 철책에 기대어 서서 나는 이거야 말로 내가 무서워 하는, 바닥을 보지 못하는 물 밑의 커다란 물고기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백야드에서의 체류시간은 짧다. 20분 정도이다. 물고기에 환장한 녀석들과 아이들의 시간이 끝나고 나와 동행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물고기를 구경한다. 나는 나가기 전 동행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대관람차>

오사카에는 유명한 대관람차가 세 개나 있다. 요즘 유명해진 도심 속의 헵파이브. 바다 가까이에 있는 린쿠노호시. 그리고 가이유칸에 과하게 가깝게 있는 텐포잔의 대관람차이다. 잊어버리고 말을 안 했지만 나는 관람차도 무서워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가이유칸에 간 날엔 비가 내렸다. 동행은 대관람차를 타고 싶어했다. 물론 동행은 내가 대관람차를 무서워한다는 걸 잘 알 고 있었다. 다만 동행이 나에게 뭔가를 하자고 말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비바람이 부는 슈퍼 악조건에서도 관람차를 타기로 하고. 쪼잔하고 집요하게 그럼 탑승료는 네가 내라고 투덜거렸다.

내가 애초에 탈 것 전반에 약한 것은 사실이다. 20대 후반 쯤 친구들과 이유없이 놀이공원에 가서. 이유없이 후룸라이드-바이킹-롤러코스터를 연속으로 타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어어 나는 괜찮아 어서 다음 탈 것으로 가자고오오 하고 가다가 속이 메스꺼워져서는 토하기 직전이 되어 벤치에 누워버린 적이 있었다. 생리적인 영역에서 일단 멀미에 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리적인 부분을 뛰어넘어 관람차 그리고 그와 비슷한 케이블카는 정말로 타는 것을 무서워한다. 나는 내가 왜 관람차를 무서워하는지 정확하게 알 고 있다.

동행은 엄청나게 즐거워했다. 겁쟁이 주제에 탈 것은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곤란해하는걸 보는게 좋은 것 같다. 심지어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는 대관림차(하느님 맙소사 일본인들아 천벌이 내릴 것이다.)가 타고 싶은지 그 쪽을 지긋이 보길래 사정을 하며 일반 관람차 쪽을 타자고 했다. 아니 제안했다. 아니 솔직히 빌었다. 부탁드렸다.

저승 아니 천포산의 대관람차는 기다리는 사람도 적었다. 애초에 비바람이 부는 날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관람차에 올라타니 천천히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고 저 멀리 도심과 바다 모두가 보였다. 나는 스스로가 충분히 위엄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이 들자. 동행에게 내가 덜덜 떨거나 바닥에 쓰러져 훌쩍훌쩍 울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서 내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자. 바람이 또 엄청나게 불었고 관람차의 창에는 비가 부딪혀서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대관람차를 무서워하게 된 것은 처음에 고베에 갔을 때 하버랜드의 대관람차를 탔기 때문이다. 그 때는 겨울이었는데 도대체 몇년 전인지도 바로 숫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옛날이다. 길고 지겨운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얘기하자면 하버랜드의 대관람차 안에서 당시의 동행이자 여자친구였던 사람이 이제 그만 만나자는 얘기를 했다.

왜 거기였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떴다는거야 당연히 알았다 그러나 이 타이밍에? 그것도 관람차 안에서?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거꾸로 알았다는 말을 해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갔던게 료안지였던 것 같다. 그래 이야기가 그렇게 이어진다. 2년…아니 3년이었던가. 하여간 그 후로 몇 년을 더 만났다. 싸우고 헤어진 것도 여러번. 다시 만난 것도 여러번.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차였다. 내 생일 바로 전 주의 일이었고 그 뒤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관람차를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무슨 90년대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얘기라고 나도 생각한다. 케이블카도 관람차와 비슷해서 그런지 무서워한다.

그리고 (놀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정말로 무서워하는게 관람차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정말로 무서워 한 것은 관계가 끝나는 것이다. 나는 그걸 혼자서 케이블카에 타면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천포산의 관람차에서 동행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한 것이다. 당신을 잃는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더 이상 뭔가를 쓰기에는 너무 지쳤다. 요즘 나는 하루에 2시간 이상 자는 날이 드물고 오즈의 나라 용감한 허수아비처럼 마르고있다. 아니 심장이 없는 허수아비인가. 그래 그게 맞겠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직도 다 못했음을 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정말로 갖고 싶어한 것은 헤어질 걱정을 하지 않고 앞으로의 일을 함께 얘기 할 수 있는 사람 - 가족 - 이라는거 라든가. 관계란 결국 서로가 가진 마음의 병을 나누어 갖는 거라는 거라든가.
무엇보다 내가 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 마지막으로 방문한지 7년 만에 다시 교토에 오게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얘기들을 해야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동네 대장 고양이가 죽었을 때와 같다 혼자가 된 나는 그 누구에게도 고양이가 죽은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얘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여기까지다. 우리는 이야기로만 스스로를 이해 할 수 있고 이야기-개인서사를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정의마저 바꾸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이야기를 바꿔 당신이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존재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만든다고 해도 그걸로 내가 정말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나에게 스며든 당신을 그대로 그림자로 만드는게 옳은 결정이기는 할까?

나는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바싹 말라버렸고 어떤 소원도 빌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입을 다물고 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옳은 일이길 바란다.


24년 8월의 글이다.


 
내가 여행기에 쓰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과장이나 거짓말은 없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판단을 잘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7년 후, 교토>의 이어진 여행기인 이 글을 쓰면서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작사/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Ave generosa를 들었다. 더 높은 존재를 위한 찬양가를 듣고 있노라면 그 존재들을 위한 사랑과 사람들이 갈구한 구원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존재가 진실이든 아니든, 그 사랑이 진실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
 
예전에 친구와 광화문 어딘가의 유명한 카페에서 얘기를 했었던 걸 떠올린 것 부터 시작하자. 친구는 큰 키와 만 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유머감각을 지닌 이공계 여성으로. 너에겐 도저히 이성으로서 매력을 못 느끼겠는걸 하고 나에게 티를 너무 내서 몇 년이나 가느다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다.(그렇다, 이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웃기다. 유머감각에서 패배했다는 그 열등감에 나는 이 친구에게 주기적으로 집착한다.)
무슨 질문을 하다가 그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하면 개를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보호소 같은 곳에서 봉사 좀 하다가 마음이 가는 개가 생기면 집에 데리고 가는거 아냐? 라고 대답했는데. 그 친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개는...그냥 어느날 엄마가 데려오는거야. 
데려온다고?
어, 그냥 엄마가 어느날 데려와서 이 개가 니 동생이야. 라고 말하는거야. 그리고 평생 사랑해주는거지.
내가 선택하면 안돼?
안돼.
안된다고?
안된다니까.
 
거기에 나는 이해하지 못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몇 년 동안 친구가 한 말을 곱씹었다.
 
<오하라大原>
 
교토역에서도 한시간 사십오분 쯤 걸리는 (버스의 운행 간격이 30분이고,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1시간 15분이다. 중간에 산조-시조를 거치기 때문에 말도 안되게 막히는 구간이 있다) 북쪽의 시골 마을이다. 역사적으로는 유래가 깊은 곳인데 교토 어디든 역사적 유래가 없는 곳이 없을테니 딱히 설명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다. 굳이 설명하자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인 헤이케모노가타리의 배경 중 하나가 되는 곳이다. 너무 성의가 없는 설명으로 들리겠지만 교토는 애초에 그렇다. 지나가다가 본 이자카야가 사실은 신선조가 칼부림을 했던 곳이고 술집이 잔뜩 있는 번화가를 걷다가 보면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장소가 나온다.
 
내가 오하라를 좋아하는 이유의 30%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기 때문이다. 카페도 있고 기념품 가게도 잔뜩 있는 것을 보면 일년 중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시기가 있을텐데 지금까지 5번 정도 찾아왔지만 항상 그런 시기가 아니었다. 나중에 료칸의 주인분께 언제쯤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나요 라고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보았더니 요즘에는 한국분들이 많이 찾아와주세요 하고 웃으며 대답하신다. 비밀이지만 난 오하라 사람들한테 똑같은 질문을 한다.
 
사람이 없다. 시끄러운 소리도 나지 않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내가 항상 이 동네에서 제일 시끄럽고 분주한 사람이 된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멀리 학교가 보이고 좁은 길 사이로 갈대와 계절에 맞지 않게 피안화가 보인다. 시골이다.
오하라에 오는 사람들이 보통 목표로 하는 곳은 산젠인과 잣코인이다. 물론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고도 가는 길이 불편하다. 온천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오하라 산소우 라는 곳인 것 같은데 한 번도 가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지도를 보면 길고 긴 언덕 길을 - 제대로 포장이 안되어 있다.- 한참 올라가는 곳이여서 픽업 서비스를 운영한다고 한다. 길 주변은 평범한 시골 마을이라서 동행은 일본의 공포게임 배경 같다고 감격한다. 그런거에 감격할 때가 아닌데 하고 생각보다 언덕길이 길어지니 초조한 기분이 들어서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가다보면 료칸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한다. 
 
너무 일본 특유의 사찰 거리 기념품 가게 같은 곳들을 지나서 도착한 작은 료칸이 내가 오하라에 오는 이유의 40%이다. 사람이 많아서 예약을 못 할 정도가 되는 것은 또 바라지 않아서 블로그든 어디든 이 료칸의 이야기를 잘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유명해진지 오래라서 사람이 없는 계절인데도 한국인 숙박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너무 좋아하는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곳이 있지 않은가. 이 료칸은 나에게 그런 곳이다. 7년만에 오는 겁니다. 오하라에 7년만에 오세요? 그것도 그렇지만 이 료칸에 7년만에 와요. 지난번엔 가을에 와서 송이버섯이 있었죠 점심을 먹으러 혼자 왔었어요. 아 그렇군요.
저녁을 먹을 땐 나이가 드신 점원 분이 와서 시중을 드시다가 슬쩍 얘기 한다. 저는 7년 전에도 여기 있었습니다. 나는 짐짓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웃다가 엊그제 뵌 것 처럼 하나도 변한게 없으신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에요. 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를 좋아해. 하고 스무 번 쯤 반복해서 말한다. 그래서 같이 오고 싶었어. 하고 열 번 쯤 이어서 말한다.
 
오하라에서 구경할 만한 가장 훌륭한 것은 스팀에서 칠천오백원에 파는 공포게임의 배경이랑 마을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지만. 그 외에 가장 유명한 것은 사원. 산젠인三千院, 짓코인実光院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호센인宝泉院이다.
 
산젠인은 훌륭한 본당과 넓은 정원이 유명한데. 특히 이끼가 잔뜩 낀 작은 동자등 석상이나 줄지어 서있는 아기 지장보살이 은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짓코인도 지지 않는다. 헤이케이모노가타리의 배경이라는 점이 소수의-정말 소수의- 매니아들을 두근거리게 만드는데다가 2천년대 초반 범인 불명의 방화로 인해서 천년 이상 내려오던 소나무는 물론 본존인 지장보살 상 마저 파괴되었다는 스토리 텔링이 있는 절이다.
 
그러나 호센인은 그런거 없다. 절의 규모도 다른 절의 반토막인데다가 이 절의 가장 유명한 스토리텔링은 무사들이 피묻은 칼 싸움을 하다가 묻은 핏자국이 묻은 나무판자를 (맙소사 중세 일본피플 맙소사) 절의 천장에 그대로 썼다 뭐 이 정도인데. 절의 사람에게 물어보면 바로 저쪽이에요 하고 알려준다. 무섭지도 웃기지도 않은 스토리 텔링이라고 보면 된다.
 
아름다운 것은. 이 절의 정원을 툇마루에 앉아서 감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떡과 말차를 주는데 천년 전통을 지켜가는 맛인지 그닥 맛은 없다. 하지만 정원의 모든 시야를 사로잡는 나무는 굉장하다. 아무 일정도 없이 아침 일찍이나 절이 문을 닫을때 쯤 - 일본의 절들은 보통 5시면 문을 닫는다 - 가면 사람도 별로 없이 툇마루에 원하는 만큼 앉아 있을 수 있는데 이것도 천년 전통인가 싶을 정도로 춥고 외로운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호센인을 오하라에서 제일 좋아한다.
 
내가 오십년이 지나서 다시 온다고 하여도, 이 마음만 그대로 가져간다면 오하라는 그대로겠지 하는 기대를 한다.
 
 
<가츠라리큐桂離宮>
 
교토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든 명승지라고 한다면 사이호지西芳寺이다. 얼마 전까지 무려 엽서로 신청서를 내고 일본 내 주소로 그 회신이 오면 그걸로 예약을 확정해주던 말도 안되는 곳인데. 홈페이지가 생기더니 이제 인터넷으로 예약을 받아준다고 한다. 여전히 겨울에는 운영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진짜인가, 여름에 교토를 오라는 건가. 너희 외국인들도 한 번 혼나보라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키부네 신사도 가본 나도 사이호지는 가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2등은 어디인가. 그건 모르겠지만 일본 궁내청에서 관리하는 가츠라리큐와 슈가쿠인리큐도 사전 예약이 꼭 필요한 쉽지 않은 장소이다. 원래 교토의 유명 관광지 중 궁내청이 관리 하던 곳에는 교토고쇼, 교토센토고쇼도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 정도 까진 관리 안해도 되지 않을까요 하는 의견이 있었는지. 이제는 리큐 두 곳 정도만 예약하기 쉽지 않은 장소가 되었다. 홈페이지에서 신청 후 궁내청으로부터 승인 메일을 받아. 그 승인 번호를 입장 시에 가져가야한다. 물론 돈도 내야한다.
 
그래서 그럴 가치가 있나요. 라고 누가 물어보면 항상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예약하기 힘들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닐까요 하고 대답하지만. 이거야 말로 거짓말이다. 가츠라리큐는 모든 일본 정원 문화의 정수이며 아직까지도 해외 정상들이 방문할 때 견문하도록 짜여져 있는 곳이라서 아직도 궁내청에서는 온 힘을 다 해 이 곳을 관리하고 있다. 교토에 갈거면 가츠라리큐를 가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키요미즈데라 봣서여 이나리 진쟈 봣서여 이러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속으로 이 바보놈들 그런데 가서 뭐하게 하고 투덜거리고 있다. (우연이지만 24년 2월 키요미즈 데라와 이나리진쟈 양 쪽을 다 다녀왔다. 간만에 가니까 웅장하고 좋더라.)
 
나는 여기 벌써 세번째야 하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한다.
 
정원이란 결국 우주의 작은 축소품이다. 보통 정원의 3요소는 빛과 흙 그리고 물이라고 여겨지는데. 가레산스이의 뛰어난 점은 모래, 바위 그리고 이끼를 통해서 - 기존과 재료를 달리해서- 우주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재료가 달라지니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표현이 필요하였고. 자연스럽게 이는 우주에 대한 추상화로 이어졌다. 
사찰의 정원이 그 표현 목적을 지상의 땅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이상적인 현실 즉 정토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 할 것이다. 다만 이런 목표와 재료의 변화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정원을 자연의 축소판에서 자연의 추상화로 어떻게 연결 시켰는지는 나로서는 의문이다.
애초에 료안지와 같은 거대한 연못과 그 주변을 산책하는 식으로 구성된 정원은 소위 지천회유池泉回遊라고 부르며. 이는 이전까지의 왕궁귀족들의 정원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료안지의 충격적인 가레산스이는 거대한 정원의 아주 작은 부분 일종의 상자 정원으로 구성된 것이다. 나의 일본 사찰과 정원 양식에 대한 집착도 일본인들의 추상화된 세계를 통해 극락정토라는 개념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가츠라리큐는, 그 모든 정수를 모아서 만들어진 정원이다. 넓은 부지와 막대한 비용. 세계에 대한 추상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기에 작은 원막은 배를 상징하고.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어부들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는 제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놓은 작은 장난 같은 추상화이다. 가츠라 리큐는 황궁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에 대한 이상화와 더불어서 가장 느슨한 형태로 재현을 시도한다.
영토만을 축소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정원은 4계절에 대한 재현 또한 시도한다. 모든 계절이 이 정원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되도록 다양한 나무를 심고 또 관리하려 한다. 나는 아직 달이 뜨는 밤이나 꽃이 피는 계절에 이 곳에 와본 적이 없다. 아름다운가요? 라고 물으니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라는 대답을 듣는다.
 
정원을 1시간 남짓 구경하고 나오면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역까지는 그럭저럭 걸을만하지만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역까지 가면 맥도날드 정도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새삼 눈치를 본다. 여길 보여주고 싶었다는 걸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여기 이미 세번째야 하고 안해도 될 말을 한다.
 
 
<산조-시조>
 
나는 교토의 밤 길을 걸어간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닥 바뀌지 않은 거리는 그대로이다. 소품가게와 오래도록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가방 가게. 지나갈 때 마다 내 시선을 끄는 경양식 집과 극장도 그대로 있다. 저 건물을 지나 꺾어서 계단을 올라가면 내가 자주 가던 카페이다. 저 쪽으로 좀 더 가면 아침에 커피와 팬케익을 주는 가게이다. 수십번을 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이 거리를 지나쳤다.
 
예전 어느날 밤의 일이다. 나는 완전히 쓸쓸해져서 사거리를 건넜다. 교토에 왔을 때는 보통 혼자였지만 그건 다른 곳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 대단한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1시간 정도 아니 30분이라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머릿 속에 나 자신의 이야기가 가득차서 독처럼 나를 점점 무너트리고 있었다. 내가 나의 머릿 속에서 나갈 수 있도록 당신을 읽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그냥 당신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허락을 받을만큼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았다.
 
다시 교토의 산조 거리에서.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달래려고 하지만 당신의 말은 어느 것도 소용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내 옆에 있기만 한다면 나는 금세 화가 풀린다.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줄거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마귀 같은 얼굴을 하고 내 안의 당신을 본다. 당신은 내가 처음 봤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다. 당신에 대해서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의 감정도 마음도 나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의문투성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정말로 당신을 마음 속 깊이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부정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모든 분노와 증오가 사실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이고 애초에 그 감정은 모두 당신에게서 느끼던 애정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
마지막 문장을 쓰며 들은 것은 Víkingur Ólafsson – Bach: Organ Sonata No. 4, BWV 528: II. Andante [Adagio] 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사랑했으며. 앞으로 그걸 계속해서 후회하며 살아가야한다. 그래서 계속 걸어보려고 노력하지만, 밤이 좀처럼 끝나질 않는다. 
그리고 여기까지 쓴 시점에서 24년 2월의 교토에 대해서 아직 다 쓰지 않은 걸 깨닫는다. 나는 한 편의 글을 더 써야만 이 이야기를 완성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미친 사람의 말이고. 24년 8월의 글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강한 햇볕을 좋아하지 않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싫어해서 그늘지고 사람이 없는 곳을 좋아한다. 시끄럽지 않은 곳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하는 걸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좋아한다. 시끄러운 곳에 가서 햇볕을 쬐는 건 어떨까? 라고 말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신이 짖궂은 농담을 하면 어떻게 받아야할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시끄럽고 사람이 많으며 햇볕이 내리쬐는 곳 중에 내가 좋아하는 곳이 있다. 나는 교토를 좋아한다. 출장을 포함하면 10번도 넘게 갔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싱가폴이나 도쿄는 출장을 포함하면 각 30...50...100번쯤 갔다...)

왜 교토를 좋아하느냐고 하면. 거기 보다 자체 컨텐츠가 넘쳐나서 아무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아무 곳에나 갈 수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혼자 일주일을 있는다고 하고 친구들은 만나지 않는다고 하면 4일 쯤 후부터 도대체 뭘 해야하나 고민해야하지만 교토는 그렇지 않다. 돈과 시간만 있다면 나는 한달 정도는 매일 매일 다른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어서 말해두지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 거의 모든 교토 여행은 혼자서 하는 여행이었다. 오사카나 다른 곳에 숙소를 두고 누군가와 같이 교토를 들린 적이야 많다. (특히 출장이 그렇다. 별로 되지 않는 예산으로 교토에 숙소를 잡긴 쉽지 않다.) 다만 교토는 정말로 좋아하는 곳이라서 혼자서 가기에 거부감이 없어서 가야겠다 생각이 들면 그 누구와도 조정을 하지 않고 슥 다녀오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농담처럼, 난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교토를 같이 가자고 하니까 내가 교토에 같이 가자고 하면 조심해 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언젠가 교토에 같이 가자는 말은 수 없이 듣고 또 하고 다녔지만(하하 흘리기 대장) 정말로 교토에 같이 가자고 말을 한 적은 딱 한 번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요 얼마 전에 7년만에 오사카와 교토에 다녀왔다.
아주 오랫동안 교토를 다녀오지 않은 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해외여행을 몇년 동안이나 가지 않은 탓도 있었고. 해외여행을 계획 할 만큼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교토에 다녀온 것은 2017년 늦여름-가을 쯤이었다. 7년이나 되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왜 그 동안 교토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다. 몇 년을 그냥 꿈처럼 보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쓴 웃음이 났다.

이 여행의 여행기는 아직도 쓸 생각이 없다. 하지만 7년 만의 교토에 대해서는 뭔가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글을 쓰고 있다. 정말로 여행기를 쓰게 된다면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나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이 여행에선 어떤 음악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 여행기와는 다르게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게 없다.
하지만 절대로 쓰지 않으려고 생각해놓고 마음을 바꿔 이 글을 쓰기로 했을 때, 그리고 또 쓰는 동안 들었던 음악은 다음과 같다.
 
- Laufey, <Where or When>
노래 제목이 이 블로그의 이름과 같다. 핀란드의 싱어송라이터 Laufey의 최신곡으로. 원래 클래식을 했던 사람(첼리스트였다고 한다)이 도대체 어떤 계기로 재즈풍의 싱어송 라이터가 된건지 궁금해진다. Be witched 앨범도 훌륭했는데.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딱 하나를 고르자면 이 곡이다. 이 글의 주제를 Where or When으로 정하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 박영미,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
도입부부터 가사까지 이 노래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바다의 노래이다. 예전, 누군가가 나에게 이 노래의 가사를 리퍼런스로 편지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대체로 타인에 무심한 편이다.
 
- 이현우, <마취(Unquantize mix)>
나는 사실 노래 부를 때 목소리가 이현우씨와 똑같다. 물론 노래는 형편없이 못 부르지만 이현우씨 노래를 듣고 있다보면 내가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 곡 하나를 몹시 좋아하는데. 국내서비스에서만 곡이 올라와있기 때문에 몇년에 한번 멜론에 가입하고 질릴 때 까지 들은 다음 서비스를 해지하길 반복한다. 07년도의 앨범인 Heart Blossom의 완성도 또한 말이 안될 정도로 높다.
 
다음에 나오는 장소들의 순서는 내가 24년 2월에 방문했던 장소의 순서가 아니다. 심지어 이번 여행에서 방문하지 않았던 곳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을 뿐이다.
 
 
<아라시야마, 아다시노넨부츠지あだし野念仏寺>

교토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아라시야마를 간다는 얘기를 할 때 마다 나는 질색한다. 우웩 그냥 관광지잖아요 거길 도대체 왜 가는거에요. 카페 간다고요? 치쿠린? 그거 대나무 숲 별로 길지도 않아요. 곰세마리 동요를 다 부르기도 전에 끝난다구요. 이렇게까지 말해도 그래도 아라시야마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보통 추천한 것은 아다시노넨부츠지あだし野念仏寺였다. 아라시야마 남쪽에 진짜로 대단한 신사랑 절이 있는데요. 아 나를 믿고 예약을 아 제발...! 이렇게 비는데도 왜 사람들은 내가 추천하는 곳을 안 가는 걸까 툴툴 하면서.
 
아다시노넨부츠지는 아라시야마에서는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산길을 조심해서 올라가면 있는 절인데. 그 기원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200년 전의 절로 내가 아는 한 교토에서 가장 성지에 가까운 장소 중 하나이다. 그곳은 일본 절 고유의 요소인 경내의 묘지와 죽은 이들의 공양에 특화되어 있이며. 돌로 된 지장 보살과 나무로 된 묘표가 가득차 있는 고요한 장소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곳을 찾았을 때 자전거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했지만 그곳에 있던 것은 몰래 졸고 있던 입장소의 직원과 아기 지장보살 앞에 나란히 서서 말도 없이 조용히 울고 있던 젊은 부부 밖에 없었다. 나는 묘지에 가득한 나무 묘표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망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묘표는 흔들리며 서로 부딪혀 소리를 냈다.

아직도 아다시노넨부츠지 뒷 뜰의 죽림에서 녹음한 대나무가 스치는 소리 파일을 가지고 있다. 울고 있던 젊은 부부가 자리를 떠나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기다리느라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편지를 반장 정도 쓸 수 있는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 산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사람 하나 없는 작은 식당에서 두부요리를 먹었다. 왜 사람이 한 명도 없지 아참 여기 산길이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났다.  오히려 예전에 봤던 것보다 아라시야마는 사람이 더 많아져서 찻길과 인도가 구분이 안 갈 정도가 되었다.
아니 슬슬 여기에 별거 뭐 없다는거 알잖아 라고 투덜투덜 거리며 길가에서 유명하다는 두부 요리를 먹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카페에 들어가 커피도 마셨다. 역시 온 김에 치쿠린을 가볼 까 하고 곰세마리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지만 있다면 대나무 숲은 순식간에 생겨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라시야마의 치쿠린은 무책임한 국가의 정부 부채처럼 엄청나게 늘어있었다. 30분쯤 걸었는데 대나무 숲은 끝나는 일이 없이 다른 대나무 숲으로 이어져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이어 나갔고 중국인 한국인 인도네시아인 하여튼 온갖 외국인들은 그 분위기에 빠져들었는지 다들 싱글벙글 웃으면서 치쿠린에 대 만족해 하고 있었다. (물론 고갯길이라 그걸로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나는 여기 대나무 숲 아니었는데. 여기도 아니었는데 하면서 시끄럽게 투덜거렸다.)
나는 평소에 치쿠린이 고작 뒤뜰 정도 수준이라고 욕하고 다닌것이 면구스러워서 그 뭐냐 내가 아라시야마를 처음 온 것은 2012-3년이었거든 어쩌고 하면서 변명을 했다.
 
역시 이러면 너무 부끄러우니 아다시노넨부츠지를 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길을 찾는데 분명 방향은 맞는데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잘 포장된 길에 예전에 가파른 고갯길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양쪽에 새로 조성된 주택가와 (이미 한 번 유행을 타고 다시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의) 카페와 양식집이 있었다. 어째서지 싶어서 일단 한참을 걸어서 아다시노넨부츠지에 도착하니. 유튜버 한 명이 택시를 타고 절에 들어가고 있었고. 서양 청년들 4,5명이 동양문화의 심취해서 묘지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라고 외국인인 건 다를바 없지만 왠지 젠체하며 확인해보니. 입장료가 500엔이었다. 여기가 500엔이라고? 팜플렛도 있어? 하고 생각은 했지만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절은 그대로지만 왠지 팻말이 많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 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대나무 숲은 그냥 고갯길의 뒷 뜰 같았다. 내가 느꼈던 외로움과 신비로움은 도대체 어디 간거야 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잔뜩 늘어놓았다.

돌아오는 길에 안되겠다 싶어서 길거리의 킷사텐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궁금해서 사장님께 아니 여기 언제부터 이렇게 도로가 포장이 된거에요? 라고 하더니 이해를 못하셨다. 여기 원래 산길이었잖아요. 라고 재차 묻자. 아니 손님 진짜 여기 오랜만에 오셨나 보다 이거 한 십년 되었어요. 라고 말해서 아라시야마가 너무 싫어서 이 곳에 온지 정말 10년이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두부를 먹었던 가게를 검색해보니 어떤 사이트에서 별점이 4.0을 넘는 무시무시한 유명 맛집이 되어있었다.
 
 
<가라스마, 롯가쿠도六角堂>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날 니조성에 나와 가라스마로 정처없이 걷다가. 제대로 방향을 찾지 못해서 (변명을 하자면 오열을 하며 걷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방향치지만 그렇다고 교토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방향치는 아니다.) 원래 가려던 방향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불쑥 들어간 곳이 이 작고 아름다운 절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죠호지頂法寺의 롯가쿠도六角堂이다. 도심 속의 절이라는 매력적인 모순과 육각형을 한 본당-롯가쿠도-의 모습 때문에 많은 관광 도서에도 소개가 되어 있는 곳이지만 그닥 크지도 볼 것이 많지도 않다. 절에서 보여줄 수 있는 컨텐츠라는게 정해져 있는게 아닌가.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가고 있었던 터라 어디 멀리에 갈 수도 없었고, 눈물이 범벅이 되어 얼굴이 끔찍해진 상태로 다른 어디 가게에 들어가는 것도 민폐라서 얼굴을 대충 정리하고 (남자가 얼굴을 정리했다는 말은 사실 큰 의미는 없는 얘기다) 절의 경내를 구경하는데 육각형을 하고 있는 본당이 제일 아름답긴 하였지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절의 경내에 백조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데 백조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문득 외할아버지가 다시 태어나신다면 저런 커다랗고 무심한 새 같은게 되셨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를 다니는 어머니가 알면 질색을 하시겠지만. 이모는 잘했다고 칭찬을 했을 것이다. 지갑에 들어있던 몇만엔을 통채로 꺼내서 절에 시주를 했다. 내 짧은 일본어로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의 사람은 외국인인 내가 어떤 이유로 시주하는지 이해한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매번 교토에 들를 때 마다 롯가쿠도에도 들렸다. 내 사정으로는 꽤 고액을 그 곳에 시주하고 항상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빌어달라는 기도를 부탁했다. 그러기 위해서 숙소도 보통 가라스마 부근으로 잡아서 귀찮아서라도 롯가쿠도에 가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들르는 것은 항상 즐거웠다. 과일가게를 들르거나 좁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경양식 집에 들어가 아무 거나 먹다가 저녁이 오기 전에 롯가쿠도를 가면 되었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백조를 구경하다가 절의 원무과에 들러서 사정을 설명하고 시주를 할 수 없겠느냐고 물으면 익숙한 듯이 종이를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글을 제대로 못 쓸 정도로 눈이 흐려져서 한참이 걸렸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름을 쓰고 준비한 봉투에 시주를 부탁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조를 구경하는 시간은 더욱 늘었다. 백조들은 항상 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었고.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절이 닫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다시 와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하고 절 뒷 쪽 카페에서 본다면 백조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외조부의 명복을 비는 시주를 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가셨겠지. 이제는 다른 곳에 있으시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올해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딱 10년이 되었다. 누군가 백조는 30년을 가까이 산다고 말해주었다. 백조들은 나를 기억 할 까 라는 덧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료안지龍安寺>

인기 없는 여행지가 되었다. 유명한 가레산스이의 바위 정원龍安寺方丈庭園도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버렸다. 바위와 물 그리고 이끼만을 통해서 우주를 표현하려고 한다는 간지나는 설정도 어느새 긴가쿠지를 포함 다른 절들이 따라해서 교토의 절을 구성하는 한가지 필수 요소가 되었다. 다른 절에 비해서 형편없는 접근성과 비싼 입장료. 컨텐츠라고는 가레산스이 말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벚꽃철 처럼 저절로 절이 아름다워지는 시기가 아니면 사람들이 대체로 찾지 않는 곳이 된 듯 하다. 두 번이나 말했지만 사실 예전에 비해서 그렇다는거지 지금도 충분히 찾아오는 사람은 많다.
 
절이라고 하면 애초에 사상과 미학을 전달하는 일종의 테마 파크 아냐?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그들의 고양된 감정에 맞춰서 돈도 받아내고. 물론 위대한 미술작품 같은게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거고. 정말로 미술작품을 보고 싶으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면 되잖아? 하고 별로 대단치 않은 이론을 힘줘서 얘기해본다. 듣는 사람은 또또 저런다 라는 느낌으로 내가 하는 말을 흘려듣는다.
 
12년쯤 되었을 것이다. 내가 료안지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정말 마음 속 깊이 감동했다. 오사카를 가던 도중에 시간을 내서 교토를 온 거니까 다른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텐데. 나는 가레산스이의 컨셉에 정신적 오열을 하는 중이기 때문에 여행에 왔던 동행을 설득해서 접근성도 나쁜 료안지로 향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절의 경내는 춥고. 전날 크게 싸운 동행과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냥 둘이서 서로 보고 싶은거나 보고 나중에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그건 또 그러고 싶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감동과 더불어 약간의 고집을 더 해서 1시간 정도 료안지에 있었던 것 같다. 바위 정원의 앞에 앉아서 바위의 갯수를 세고 또 세면서 난방이라고 하나도 없는 료안지의 추위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날 대들보에 기대서 정원을 보던 동행인의 사진은 정말 아름다운 사진이었지만, 그 사진을 지워버려서 나에겐 없다. 사진을 지우자. 나는 오랫동안 내가 처음 료안지를 간 것은 혼자서였다고 기억하게 된다.
 
하여튼 료안지는 나에게도 바위 정원을 제외한다면 그냥 경내가 크기만 할 뿐인 절이 되었다. 나는 내가 료안지에서 했던 말도 거기서 느꼈던 마음들도 자꾸 잊어버린다. 언젠가는 누군가와 같이 간 적이 한 번도 없는 곳으로 기억하고 다시는 가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교토를 수없이 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료안지의 차가운 마룻바닥과 정원 앞에서의 어떤 순간이라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가모강변>

철이 들고 혼자 살게 된 다음에야 강변 근처에서 살게 되었지만 물 가까이에서 산다는 것은 특별하다. 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바다 근처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한 번도 바다 근처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의 언어로는 그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옮길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때 이미 그 사람을 마음 속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곱씹고 곱씹고 곱씹었다.
나는 내가 그 때 했었던 곱씹음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나는 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서 산책하는 거리에 바다가 있는게 어떤 의미인지 내 언어로는 설명 할 수 없다.
 
나는 가모강을 좋아한다. 강변의 둑길에 그냥 앉아있는 것도 강변을 따라 의미 없이 걸어가는 것도 좋아한다. 시조부터 산조로,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 데마치야나기로 향한다. 가모가와 델타까지는 가봐야 비로소 좀 기분이 풀린다. 교토 시민들이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 모양인지 도시를 종단하는 하천인데도 불구하고 가모강은 깨끗하다. 가장 더울 여름에도 냄새 같은 건 나지 않는다. 물새들이 때때로 날아와 풀 숲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분명 철학적이고 품위있는 행동이겠지. 개구리와 논쟁을 벌이다가 꿀꺽 삼킨다든지.

밤이 되면 강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강을 볼 수 있는 테라스가 갖춰진 술집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들어가 술을 마신다.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각자 뭔가를 쥐고 둔덕에 앉는다. 서로들 적당한 자리를 벌리고 있어서 뭘 하러 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는 때때로 그리고 자주 가모가의 둑길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술을 마시거나 했다. 웃음 소리가 들린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져온 맥주 캔을 다 마실 때 까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숙소가 여기서 멀다면 굳이 여기서 그러고 있을 필요는 없을텐데 나는 대체로 가라스마나 기온 근처에서 숙소를 잡았다. 롯가쿠도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7년이 지난 후 가모강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없고 나는 더 이상 이 동네에 숙소를 잡지 않는다.

나는 가모강을 건너다가 문득 네 얼굴을 본다. 이번에도 강변에서 맥주 마실거에요? 아뇨 이번에는 안해도 될 것 같아요. 라고 말한다. 아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고개를 돌려 다시 네 쪽을 본다. 너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다. 갑작스러운 상실에 나는 정신을 잃을 것 처럼 흔들린다.
 
 
모든 것을 후회한다. 내가 했던 말들, 내가 했던 모든 행동을 후회한다.
내가 숨쉬고 내뱉고 있는 모든 호흡을 전부 후회한다. 바다를 갔던 것. 파도를 보며 혼자 등대를 보고 서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편지를 쓴 것을 후회한다. 마음을 열었던 것을 후회한다. 어깨위로 내려 앉은 꽃잎을 주먹에 쥐고 가만히 서있었던 일을 후회한다. 혀 위에 닿은 눈 송이도 무릎 가에 닿던 물결도 후회한다.
 
빛 때문에 흐트러지는 그림자와 벽 위에 느슨하게 서있는 그림자와. 오후의 온도에 늘어지는 소음과 바깥으로 점점 퍼져가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물드는 색과. 세상 어느 곳에도 없을 것 같던 파란 하늘과. 어떤 때보다도 선명하게 보이던 그 말들을 떠올린다.
웃었던 일들 울었던 일들 화를 냈던 일들. 혼자 생각했던 일들 기다렸던 일들. 그 모든 일들이 처음부터 그리고 다시. 그리고 처음부터. 그리고 다시 떠오르고 또 사라진다. 생을 되감는 것처럼.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해도 목이 쉬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어서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게 ■년 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후회한다.
■■에 대한 글을 쓴 것을. 그리고 참아 내지 ■하고 ■ ■ 에 대한 글을 ■ 것을 후회 ■ 다.
그리고 ■ 는 견디지 못하고 ■을 크게 ■ ■ 소리를 ■ ■ ■ ■ ■ 모든 ■ 들을 ■ ■ ■ .

...
이제 7년 후의 나에 대해서 쓸 차례이다. 잠시만 눈을 감고 쉰다. 이 모든 것은 미친 사람의 말이고 24년 8월의 글이다.

 
지난 주, 친구 한 명을 묻었다. 비유적인 표현이다. 나는 지폐 몇 장을 내고 절을 두번했다. 자리에 앉아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쓸어넣고는 딱 30분을 맞춰 앉아있었다. 프로필 사진이 너무 별로다. 라고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고 15분을 밖에서 기다려 마을버스를 탔다. 그제서야 그가 내 친구였다는 걸 실감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항상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토요일. 개의 날의 한가운데. 해가 너무 뜨거워 머리 끝까지 뜨거워지고 머리카락을 남겨두는 방향으로 진화해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했다. 커피라도 사지 않으면 주말 내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가는 김에 맥모닝도 사오기로 했다. 왕복 30분 쯤 걸려서 사온 것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나갈 때 사오기로 생각한 맥모닝과 커피(아니 거짓말이다 아샷추를 샀다. 아무래도 커피를 사왔다고 하는 편이 하드보일드해보이지만 실제로 산 것은 아샷추이다.)만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큰 길을 따라 우리집 쪽으로 걸어올라오다 보면 나무들이 듬성이 자라나 있는 언덕이 보인다. 지렁이와 쥐와 가끔 비둘기 날개나 까치 새끼 시체 같은것 까지 가끔 보이기 때문에 나는 그 언덕을 그렇게 집중해서 살피지 않는 편인데. 젖소무늬 동네 대장 고양이 - 커다란 녀석이다-가 오랜만에 보였다. 너무 편한 자세로 낮잠을 자는 것 같길래 너무 더워서 그런가 싶어서 물이라도 갖다 줄까 하고 유심히 지켜보는데. 파리가 붙어있는게 보였다.
 
맥모닝을 집에 모셔다 놓고. 경비실에 가서 삽을 빌렸다. 삼각삽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눈이나 치울 때 쓰는 사각삽 밖에 없었다. 네에 고양이가 죽어 있어서요 여름이고 그래서 일단 묻어주려고요. 네. 잘 쓰고 갖다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의점으로 가서 1.5리터짜리 생수를 한 병 샀다. 목이 말랐을테니까 지금이라도 물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니까 물을 땅에 뿌려서 땅을 파기 쉽게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부드럽지도 않은 흩날리지도 않는 적토 언덕이라 사각삽으로는 도저히 구덩이가 파지지 않았다. 생수를 반쯤 뿌려서 땅을 적시고 다시 땅을 팠다. 두 병 살 걸. 그거 별로 비싸지도 않은데. 하고 고양이를 뒤에 두고 땅을 파고 있노라니 말도 안되게 땀이 솟았다. 마지막으로 땅을 판게 언제지. 터무니 없는 이유로 교수를 죽인 일도 없어서 진짜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그럭저럭 땅을 파는 방법은 금방 기억났다. 그냥 자고 있는거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주기적으로 했다. 땅을 파는게 너무 싫어서이다.
 
이십분을 파내려가도 저 커다란 대장 고양이를 묻을만큼은 되지 않았다. 이 정도 속도로는 60분이 지나야 겨우 한마리 넣겠어. 근데 그 정도가 되면 날 넣을 구덩이도 하나 더 필요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구덩이를 물끄러미 보는데 물을 뿌리고 땅을 파서 그런지 지렁이들이 몰려들었다. 아니 뭐야 진짜 싶어서 하나하나 지렁이를 떼어내서 주변으로 옮기고 땅을 파는데 한도 끝도 없었다. 거짓말 같았다. 일단 현재 온도 32도라면서 내 느낌상 기온이 38도는 될 것 같았다. 땀이 너무 많이 흘렀다.
 
하는 수 없이 (변명이다. 사실 40분만 더 팠으면 될 것이 아닌가) 고양이 위에 파낸 흙들을 덮었다. 풀들도 가져다가 그 위에 덮었다. 뜻하지 않게 훌륭한 고양이 무덤처럼 보였다. 남은 생수를 무덤 위에 뿌리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나는 고양이가 알아들을만한 기도문은 몰라서 편히 쉬어라. 라고 했다. 처음엔 땀이 너무 많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누가 흘린지도 모를 눈물이었다.
 
몇 년 전 이 동네에 처음 왔을 때 부터 이 고양이가 이 동네의 대장 고양이였다. 가끔식 발견되는 비둘기 날개죽지 같은 것도 이 녀석 짓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덩치가 크지만 점잖아서 사람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 한 번 들려주지 않는 그런 고양이였다. 미안하다고 할 걸 그랬다. 편히 쉬어라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삽을 경비실에 돌려놓고 집에 올라가는 동안 계속 바보처럼 울었다. 누군가에게 우리 동네 대장 고양이가 죽었어 너무 슬퍼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고양이가 얼마나 커다랬는지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했기에 나는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적당한 기도문을 알아두었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집에 돌아와 울며 불며 맥모닝을 먹고 구청 당직실에 전화를 해서 죽은 고양이가 배전반 옆 흙무더기 안에 묻혀있다는 걸 신고했다. 여름의 비를 견뎌낼 정도로 내가 만든 작은 무덤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지 않기 때문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위생 문제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요. 네 배전반 옆이요 네 지도 좀 열어서 봐주시겠어요 네 샛길요 네. 제 연락처 괜찮습니다. 토요일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
며칠이 지났다. 오늘 성모 호칭 기도 Litany of loreta를 검색했다. 한줄 한줄 읽다보니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걸 참을수가 없어서 나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개처럼 울었다. 아래는 기도문의 일부이다.
 
샛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병자의 나음,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죄인의 피신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근심하는 이의 위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신자들의 도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여러분, 고양이와 저의 친구를 위하여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24년 8월의 글이다.

 
[나는 집의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있다.
이하의 이야기는 단 한 줄의 진실도 없다고 쓰려다가 관둔다. 지금 쓰는 이야기는 한 남자가 더위에 정신이 나가 망상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이마가 녹아버리 것 같은 여름이다. 남자는 땀을 흘리며 아스팔트 길을 걷는다. 햇볕이 얼마나 쎈지 그 얼굴에는 그늘 하나 보이지 않는다. 풀밭에 발목이 쓸리고 땅을 밟는 감촉은 점점 남자를 땅 속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남자는 걸어갈수록 탈수증을 일으켜 정신을 잃어간다. 더위에 익어가는 남자는 망상을 보고 환청을 듣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음 같았다. 잘 들리지도 않던 소리는 점점 더 확실한 형태와 무게를 가지고 들려오기 시작한다. 남자는 환청이 명확해지는 걸 그대로 둔다. 그러다 말겠지. 남자에겐 다음 장소로 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환청이 명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환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씨 ■■씨 내 말 들려요?
 
남자는 땀에 축축해진 목을 움츠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목소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다시 고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지마요. 뒤돌아 보면 내가 거기에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되잖아요.
 
남자는 뒤돌아보는 자세 그대로 멈춰서서 소름이 끼치는 걸 느낀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뒤를 돌아보는 선택이 있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는다. 눈썹 위에 맺혀있는 땀을 닦고는 그대로 가던 길을 다시 걸어간다.
 
웃는 소리가 들린다.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목소리는 남자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미 몇 년 전에 만났었던 연인의 목소리이다. 햇수를 세보니 만났던 때로부터 5년 아니 6년은 된 것 같다.
 
응? 뭐라고요 6년이나 되었다고요? 목소리가 물어본다.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세봐요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못 들었어요.

망상은, 그러니까 목소리는 그의 생각에 끼어들어 물어본다.

세상에 그럼 님 도대체 몇 살이에요? 진짜 완전히 아저씨인거 아니에요?

목소리는 호들갑을 떨다가 더 큰일이 났다는 듯이 말한다.

그럼 나는 몇살이지? 이봐요 ■ ■ 씨 내 나이 기억하죠? 그런거 절대로 까먹는 사람 아니잖아요 저 지금 몇 살이에요?
 
남자는 무시하려던 것은 잊어버리고 목소리에 신경을 쏟는다. 어차피 어떤 생각을 하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목소리가 듣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지. 그는 목소리의 주인의 나이를 생각하려다가 그만둔다.
 
[나는 쓴다.]
[네가 나랑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부탁한게 그거였잖아. 네 이야기를 어디에도 쓰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 누구도 내가 쓴 네 이야기를 읽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러니까 네가 정말로 누군지 특정 할 수 있는 얘기는 쓰지 않을거야.]
[나는 그렇게 한 문단을 쓰고는 끄적거리다가 물을 삼킨다. 이렇게 물을 마시면 목이 아플텐데.]
 
목소리는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너 그거 제대로 안 지켰던 것 같은데 그래도 약속이라고 일단 지키려고 하네?”
[나는 삼킨 물에 사레가 들어 콜록 거린다.]
 
남자는 생각한다. 내가 듣는 네 목소리는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의 목소리처럼 들려. 그러니까 26살...27살이겠지. 남자는 목소리가 빙그레 웃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 ■ 이 이 더운 날 뭘 하고 있었지? 하고 목소리가 물어본다.

물어보고는 목소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까부터 이름을 불러보려고 하고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이름을 제대로 말 할 수 없는거 보니 지금 하고 있는 것의 룰은 그건가? 우리 서로에 대해서 정확하게는 말하지 않으면서 대화를 나누는거? 왜냐하면 내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했던 부탁이 내 이야기를 어디에도 쓰지 말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남자는 너는 내 망상일 뿐인데도 항상 나보다 머리가 좋네. 하고 생각하고. 목소리는 또 웃는다.

왜 자꾸 나한테 머리가 좋다고 하는거야 것보다 머리가 좋다 정도는 말하면 안되는 정보에 포함이 되지 않는거야?
머리가 좋다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나?
머리가 좋았던 여자친구가 한 둘이 아니라서?
애초에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을 좋아해.
내가 특별한게 아니다?
남자는 생각한다. 네가 특별했으면 좋겠어?
목소리는 말한다. 똑바로 말해야지. 너는 지금 망상 중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특별해, 라고 생각하는게 맞아.
 
내가 하고 있는건, 하고 남자는 생각한다.
그냥 세상의 작은 어느 구석에서 다른 구석으로 가는 거야.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지.
목소리는 불만스럽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야구는 그냥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일 뿐인거 아냐?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사람들이 작은 곳에서 다른 작은 곳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숫자가 변하기도 하는 거고.
그래 네 말이 맞아.
뭐 내 말이 맞다고? 그것보다 야구는 어떻게 되었어. 어디가 1위지? 는 몇 위야? ■ ■ 아 나 요즘에도 야구 보니?
 
남자는 생각한다.
네가 야구를 지금도 보고 있는지는 몰라. 네가 지금 어디에 사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후에, 그러고도 몇 번 서로를 길에서 마주쳤지만 그냥 그게 다였어. 너는 항상 네가 좋은 여자친구라고 말했잖아 너는 내 인생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걸로 정말 좋은 여자친구였다는 걸 증명했어.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한다.
어때 너는 내가 아직도 야구를 보고 있을 것 같아?
응 넌 미친놈이고 야구가 없으면 네가 미쳐있는게 야구 때문이 아니란걸 사람들이 알게 되잖아.
그래 우리  이 말이 맞다면 그렇겠지. 아직도 야구를 보고 있을거야 너한테 1위 팀을 물어볼 필요도 없지.
 
남자는 묵묵히 걷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자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땀을 닦고 걷기를 반복 할 뿐. 지겨울 정도로 갈 곳은 아직 멀었고 여름은 덥기만 하다.
 
왜 갑자기 내 생각을 했어?
네 생각을 했다고?
응 네가 내 생각을 했고 내 목소리를 떠올렸기 때문에 지금 내가 네 머릿 속에서 말하는 거잖아.
나는 네 생각을 자주 해
얼마나 자주 하는데? 
예전엔 매일 했지.
매일 했겠지 내가 그냥 the girl next door 처럼 생겨서 그렇지. 예쁘고 귀엽고 하여튼 그러니까.
망상 속인데도 자신감은 여전하구나.
네가 생각하고 있는 나니까 그렇지
내가 네 생각을 자주 한 건 네가 예뻐서가 아냐.
예뻐서가 아니라고??
 
목소리는 자못 이해가 안가는 듯이 분해한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묻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나한테 물어본거지?]
“어 너한테 물어본건데.”
[나는 네가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어.]
“근데 쟤는 왜 저래?”
[쟤는 이야기 안에 있기 때문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너랑 영원히 잡담을 할 수 없는거지. 하고 쓴다.]
 
남자는 생각을 하나 떠올린다.
근데 너 나 좋아하긴 했었니?
목소리는 텀도 없이 빠르게 대답한다. 어어 우리 이 내가 또 엄청 좋아했지.
그럼 사랑하긴 했어?
푸하하하 야 너 뭐 그런걸 물어보십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남자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자 거의 불가능한 것 처럼 그녀에 대한 생각이 흘러나온다.
그게 진짜 단 한 순간이고. 너와 나의 즐거웠던 때는 다 끝나버렸고 그게 네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짧아서 그렇게 끝났지만. 나는 네가 잠시나마 나를 정말로 사랑했었다고 생각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유를 말하려면 나는 너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해. 내가 나한테 했던 이야기들과 네가 했던 말들을 모조리 끌어올려야 하고 그렇게 끌어올린 말들로 너를 한 번 더 만들어서 물어보면 되지. 너 자신보다 27살의 너에 대해서 잘 아는 건 나니까 널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거야.
그래서 그렇게 했어?

몇번이나 그렇게 했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했지.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그게 되돌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냥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했느냐만을 확인하는 건데도 스스로를 그렇게 불구덩이에 넣고 데굴 데굴 굴린거야?
 
[나는 쓴다. ]
[그렇게 까지 불구덩이는 아니었어. ]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이 생각한건. 너를 그냥 우연히 만나서 어머 □ □씨 뭐해요 라고 말하고 너도 어머 ■ ■씨 오랜만이에요 라고 말하는거였어. 그러면 나는 오랜만이긴요 엊그제 만났던거 아니에요? 우리 이런데서 만난 것도 웃긴데 저기 가서 커피나 할래요? 하고 걍 아무데나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고 잡담을 하는거지.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항상 했어.]
 
목소리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말한다. “너 안 했잖아.”
남자는 생각한다. 갑자기 안 했다니 무슨 소리야?
목소리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남자에게 계속 말한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불구덩이까지인가?
너를 생각하는 건 불구덩이 같은 일은 아니었어.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응 그렇게 괴롭지 않았어. 네가 나를 떠나고도 네가 해줬던 이야기들이 나를 오랫동안 지탱했었지. 친척집에 갔던 이야기나 노래를 불렀던 이야기. 대학교에서 연애를 했던 이야기. 친구들과 잡담한 이야기. 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 너는 정말 아무생각 없이 했었던 얘기 같은데 그런 것들이 나한테 비어있는 어떤 부분을 채워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느낌이었어.
전 남자친구 얘길 듣는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나보네.
알고 있었거든 네가 나를 정말로 많이 좋아했었다고.
바보 같은 소리야.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겠어? 너는 그냥 내가 너를 잠시 만났고 내가 너를 좋아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일 수도 있잖아. 몇년이나 지났다면서. 지금에 와서 지금의 나한테 물어볼수라도 있어? 너는 그냥 처음부터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텐데 이런 생각들이 어떤 도움이 되지?
 
남자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머뭇거린다.
[나는 아무 글도 쓰지 않고 그대로 있는다.]
목소리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더 이상 뭘 써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내가 그만 이 글을 닫고 침대로 가 한숨 자려고 생각하는 순간 기적처럼 남자는 생각한다.]
 
그 뒤로 누군가를 또 만났어.

그리고 그 사람이랑도 끝났어.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나는 내가 텅 빈 것 처럼 느껴져

나한테 영혼이 정말로 있는지 자신이 없어서. 네 생각을 하는거야.
내가 좋은 여자친구였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널 아주 잠시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걸 확신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응 우리가 서로를.
 
남자는 걸어간다.
등과 배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그 자국 그대로 회색의 폴로 셔츠가 젖었다. 목소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노래를 귀기울여 듣는다. 남자는 그녀의 노래를 귀기울여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지 해도 그는 항상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깨물고 뽀뽀를 하고 교차로에 멈춰서면 항상 손을 깍지껴서 잡았다. 그녀가 어땠냐하면 질색했다.

어쨌든 처음부터 아주 오래도록 그는 자기가 그녀를 사랑할 것을 알았다. 이름을 알기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다고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한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즐겁다는 듯이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님 인생에 가장 사랑한 애인 세 명은 누구죠? 이미 몇 년이나 지났는데 제가 그 중에 들어가 있나요?
남자는 너 그런 식으로 결국 네가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는 거잖아. 대답 안 할거야. 라고 생각한다. 
아항. 그러시겠다 그렇구나. 그러면 3등은 아니라는 얘기네. 그럼 내가 2등이에요? 놀랍네 지금 님 머릿속에 있는 저는 아직 27살 아닙니까? 님은 몇살 쯤 됐죠? 37? 41? 43? 그도 아니면 47 정도 되었나요?
남자는 다시 생각한다. 아니라니까 내가 널 마지막으로 만난지 몇년이나 되었는지가 얼마나 중요하지?
중요한건 아니지만 저 님 항상 여자친구 있는거 알거든요. 나이를 알면 저 이후로 여자친구가 몇 명인지 대충 알 수 있죠.
그렇게 막 살지 못했어.
막 살지 못했다구? 그러면 어디 한 번 봅시다. 님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애인이 누구죠 혹시 이름에 □ □ 가 들어가나요?
 
남자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며 말한다. “1등 너 아니거든 이 멍청아."
그는 그녀가 알던 그대로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남자가 돌아본 곳에는 여름 말고 아무도 없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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