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중의 특징적인 경향 중 하나는, 믿음을 먼저 결정하고 그 믿음에 따라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행동 방식이다. 대중이 무엇을 믿고 싶든지 간에 그들은 인터넷에서 그 근거를 찾아낼 수 있고, 모두 자신의 주장만이 사실이라고 주장 할 수 있게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이런 시대를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이 시대를 예언한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실”을 인식하는 현대인의 현실인식 체제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내린 듯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내 말이 맞아? 하고 불안하게 질문을 하는 것 뿐이다.
<여행의 핑계>
이것은 2020년 1월의 캄보디아 여행기이다. 모든 문단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나는 정말로 쓰고 싶은 것을 쓰지 못하고 여기에 그 흔적만 남겨둔다.
애초에 이 여행기는 캄보디아의 씨엠립을 거쳐 캄보디아 최북단의 유적인 쁘레아 위히어를 거쳐 육로를 통해 수린, 그리고 태국 북단의 우돈타니 또는 치앙마이로 가는 긴 여정에 대해서 작성될 예정이었다.
다만 씨엠립 일정만 결정한 채로 우돈타니는 너무 심한가 싶어서 마지막 도착지로 치앙마이를 결정하고 나서. 바로 옆 부서의 신입사원 분이 거의 같은 일정으로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차마 치앙마이로 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원래 8박 9일의 일정은 4박 6일의 일정으로 바뀌었고 나는 모든 일정을 씨엠립에만 있게 되었다.
<가을은 남자와 힌두교의 계절>
씨엠립에 오려던 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한 10년 전 쯤 부터 친구들에게 가을만 되면 “가을은 남자와 힌두교의 계절”이라며 앙코르왓에 가자고 꼬셨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내 계획은 간단했다. 우리 같이 앙코르왓에 가서 사원을 보자 ==> 끝. 그 외에 디테일은 없다. 굳이 앙코르왓이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가을인 이유도 그냥 추석때 심심할까봐...정도의 이유였다. 내가 가고 싶지만 같이 누가 갔으면 좋겠어... 이 정도의 생각으로 여행을 꼬셔봤자 잘 될 리가 없다.
마침 친구들 사이의 리더십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던 나는 가을 여행에 대해 단체 메신져 방에서 언급할 때 마다 “네가 계획 다 짜면 휴가 봐서 같이 가든가 갈게” “응 그럼 나도 너 계획 봐서” “응 그럼 나도” 정도의 리액션 밖에 못 받았고 매년 그게 되풀이 되었다. 10년 동안 앙코르왓은 꿈도 꾸지 못한 채로 계획만 어딘가 폴더에 보관 된 채로 시간만 가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내 여행은 변덕이 전부이다.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는데엔 많은 것이 필요 없다. 녹색의 습지를 가로지르는 기차나 수면 위에 솟아오른 앙상한 나무가지의 이미지 같은 것 하나면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는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는 캄보디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없었다. 도착을 프놈펜이 아니라 씨엠립 공항으로 해야하는 것도 몰랐으니까.
<심야의 도착>
인천에서 씨엠립으로 가는 비행기는 심야에 있다. 대신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보다도, 프놈펜으로 가는 비행기보다도 훨씬 싸다. 비행기 안에는 단체 여행객들이 가득하다. 예전같지 않다고 했는데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걸까. 비행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도착비자를 받기 위해 달려간다. 나는 사전에 인터넷에서 비자를 받아두었다. 캄보디아의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저렇게 링크를 타고 가면 받을 수 있는데, 구글로 검색하다보면 업자에게 연결되어 아주 비싼 값에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이제 우리 현대인에게 중요한 것은 구글로 검색을 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공항을 나오니 완전히 까만 밤이었다. 심야의 비행기를 타기 위해 리조트에 차를 부탁해두었다. 사륜구동의 튼튼하고 승차감이 안 좋은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꼭 저승을 빠져나가는 길처럼 길은 까맣고 숲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다. 군데 군데 전구를 켜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숲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서웠다.
도착한 리조트는 더욱 무서웠다. 사람이 아무도 없고 마지막 체크인인 나를 기다려주기 위해 한 명의 당번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골길 (몰랐던 일이지만 씨엠립에는 포장된 도로가 많지 않았다) 주변의 리조트인 이 곳은, 나무와 작은 연못과 유수풀이 있는 28동 정도의 작은 마을 같은 곳이다. 새벽 1시에 가까운 시간이긴 했지만 짐을 들어주겠다는 걸 거절하고 랏지로 들어가며 너무 조용한 나머지 나 말고 손님이 있기는 한 걸까 하고 생각했다. 겁을 먹은 나는 문을 잠그고 캐리어로 문을 막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 위에는 “관대함은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라고 써있는 팜플렛이 놓여있었다. 일종의 동물들이 나오는 우화였는데, 말하자면 택시기사들과 호텔직원 등 당신이 마주치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팁을 마구 주지 말라는 경고였던 것 같다. 나는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첫째 날의 클라이막스는 고양이에게 밥을 준 것>
아침에 본 리조트는 밤에 볼 때 보다 훨씬 좋은 곳이었다. 조식 시간에 맞춰서 나와 과일과 빵을 먹었다. 거짓말이다 과일과 빵과 계란 후라이와 캄보디아식 쇠고기 국수와 버터를 먹었다 태국 음식에 비하면 캄보디아 음식은 별로라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가 태국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라임을 만진 손에서 좋은 냄새가 나서 하루 종일 이 냄새가 나길 바랐다.
리조트 앞에서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닐 뚝뚝 기사를 소개 받고 - 꼭 태국 영화에 악당으로 나올 것 같이 생긴 사람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둘째 날 나를 내버려두고 어딘가로 사라졌고 덕분에 둘째 날 여행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 매표소로 갔다. 앙코르왓 유적군의 매표소에서 끊을 수 있는 통합 권은 2020년부터 거의 모든 유적군에 적용이 되도록 바뀌었는데. 전에는 적용이 되지 않던 뱅 밀리아와 반테이 스레이도 통합 권으로 입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매표소는 5시부터 문을 여는데 그것은 아침에 표를 끊고 일찍 앙코르왓의 해돋이를 보러 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표의 앞에는 표를 산 사람의 얼굴과 일련번호가 있고 뒤에는 1부터 31일까지의 숫자가 찍혀 있어서 유적군에 입장을 할 때 펀처로 표시를 한다. 그러니까 13이라는 숫자에 표시를 하면 1월 13일에 입장을 했다는 표시인 것이다. 일일 당의 입장료를 나눠서 계산하보면 당연히 하루 입장권 보단 삼일 입장권이 삼일 입장권 보단 칠일 입장권이 싸다. 길 곳곳에 체크포인트가 있어서 공무원들(아마도 공무원들)이 서서 표를 계속해서 검사한다.
생각하기에 좀 이름 시간인 7시쯤에 유적군으로 들어갔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유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앙코르왓 유적군의 남문에는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서 사진을 찍는데 내가 탄 툭툭 기사는 멈춰달라고 하기 전에 엄청난 속도로 남문을 지나쳐가버렸다. 아 툭툭 기사분들 대단하네 하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나중에 와서 찍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것이 하나 나중에 그럴 기회 따윈 없었고 둘째 이 기사 분만 이렇게 툭툭을 빨리 모는거였다. 어떤 기사도 이 정도로 빠르게 툭툭을 몰지 않았고 이 기사가 모는 툭툭은 어떤 툭툭도 추월하지 못했다. 무의미한 장점이랄까...
나는 이 여행기에는 사원에 대해서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한다. 사원에 대한 이야기만 따로 떼어내서 다른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 여행기와 사원에 대한 글은 원래 하나의 글이었고 나는 가느다라한 접합 부분만을 이 여행기에 남기고 글을 통채로 떼어냈다. 한달이 넘게 이 여행기를 끝내지 못하다 보니 왜 그런 짓을 했지 하는 후회를 이백번째 하고 있지만 뭐 어떤가. 씨엠립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사원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한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할 이야기를 내가 굳이 또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그에 대해서 한 편의 글을 썼는데 말이다.
하여간 앙코르왓 유적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기에, 사람들이 오기 좋지 않은 때인데도 그렇다. 호텔 예약 사이트를 찾아보니 예약률이 30%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100%면 어떻게 되는거지 하는 생각과 도대체 왜 30%밖에 안되는 건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앙코르왓 유적군의 유적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역사를 잃어버리고만 도시답게, 우리가 이 도시에 대해서 알고있는 것은 너무 부족하고. 하나 같이 아름다운 유적들이지만 오랫동안 똑같은 유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왜 이걸 이렇게까지 보고 있어야 하는지 의심이 든다. 먼지로 가득찬 길을 지나서 아름다운 사원 앞에 도착했더니 단체 관광객들이 우글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는 것도 짜치는 이유이다. 흙길이 아니면 돌 바닥이기 때문에 발목과 무릎이 아플 정도인데 이렇게 하루 종일 유적을 보는 것 말고는 뭐가 있을까 고민이 든다. 열심히 보지 않으면 아쉬운데 열심히 보고 있으면 왜 이걸 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신기한 곳이다.
믿어달라. 나는 한국의 30대 회사원이다. 그것도 해외영업에서 일하고 있다 그것은 인류 1%수준의 실력으로 허황되고 말도 안되는 말을 숫자 까지 포함해가며 쓸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가상의 친구는 없지만 가상의 매출은 있는(그것도 엄청 많이) 있는 사나이이다. 하지만 나는 진정성을 갖고 짜쳤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운 장소는 많았다. 앙코르왓의 사원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다거나 창가에서 어색한 포즈를 취하는 것이랑은 다른 요소들이다. 세월이 켜켜히 쌓여 만들어놓은 그 모든 것들과 이제는 잃어버린 영광들, 그리고 신에게 서원했던 그 마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공간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놓고 말하자면 아무리 아름다운 공간이라고 해도 애초에 사람이 수만명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예술적인 감동을 느끼는 것은 돈을 받고 일하는 프로의 영역이다. 나같은 아마추어는 짜낼 수 있는게 별로 없어서 그냥 짜치는 걸 짜친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첫째 날에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것은 스라스랑이었다. 그냥 아무 것도 없는 저수지이고 그 주변에는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있고 정말 많은 개들이 낮잠을 자고 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와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보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리 할 수가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프레룹에 올라 한 시간을 넘게 해가 지는 걸 기다렸다. 생각해보면 앙코르와트에 해가 지는 것보다 프레룹에 석양이 닿는 것을 보는 것이, 그리고 한 시간이 넘게 해가 지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더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리조트로 돌아오고서, 나는 별다른 의욕이 없어서 리조트에서 저녁을 먹었다 새끼 고양이 몇마리가 내 발치에 와서 밥을 얻어먹었다. 농담 소재로 써먹으려고 북한 음식점에 가보려고 했지만 두 군데 다 닫았다고 한다. 맛없고 비싼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야 하고 생각은 했지만 한편 억울한 감이 있었다. 이래서야 여행에 왔다고 할 수 있나. 여행은 돌발적이고 웃기고 진짜 아무 짓이나 해야 여행이 아닌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에 웃기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친구들은 너무 실망했지만 나도 내가 이렇게 온건하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못했다. 방에서 프런트에 전화를 거니 전화가 고장나 있었다. 맙소사 업자를 불렀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프런트 사람의 표정을 보니 분명 며칠 정도 고장난 게 아닌 것 같았다.
<둘째 날의 클라이막스는 너무 빨리 왔고>
앙코르왓에서 보는 일출은 어쨌거나 씨엠립여행의 클라이막스이다. 현지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서 아침 5시쯤 나왔지만 후에 알게 된 것은 앙코르왓의 두 개의 연못 중 하나가 공사 중이어서 어차피 모두가 우글우글 한 곳에 모여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딱히 일찍 가지 않아도 뷰는 비슷했다는 것이다.
딱 콘서트를 끝나고 택시를 잡아 집에 가려고 하는 사람의 수만큼 사람들이 모여서 앙코르왓의 앞 뜰을 향해간다. 다들 자기네 모국어로 너무 어두워 앞이 안 보여 하고 투덜거린다. 앙코르왓만은 다른 유적군보다 입장 시간이 빠르다. 해돋이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앙코르왓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 쪽 연못의 왼쪽 물가에 자리를 잡았다. 풀숲이라 가렵고 축축했다. 한시간을 넘게 기다리며 사원의 그림자와 숲의 윤곽 위로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해가 뜬 직후 사원에 입장 할 수 있는데 가이드 북에 “해가 뜬 이후엔 앙코르왓엔 사람이 적으니 그 때 보세요”라고 말한게 생각나서 앙코르왓을 관람했다. 이게 사람이 없는거라고? 꼭 토요일의 신세계 경기점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사람이 없는거였다. 앙코르왓 꼭대기 층의 도서관 건물 구석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그곳만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 때 인드라의 신상이었던 것에 옷을 입히고 절을 하고 있다. 서양인들이 나타나 이것이 붓다의 상이냐고 나에게 묻는다. 나는 쓰고 있던 양키즈 모자를 보여주며 미안해 나 퀸즈에서 왔어. 하고 악수를 청하고 가버린다. 속은 것 같진 않지만...
그리고 앞에서 썼지만 앙코르왓을 나와보니 나를 데리고 다음 지역으로 갈 뚝뚝기사가 사라졌다. 한시간 동안 그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기분이 나빠질대로 나빠진 나에게 다른 뚝뚝기사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 이래서 리조트에서 관대함은 좋은 것만이 아니다 이런 우화를 갖다놓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이 넘게 본인 기사를 찾고 있던 내가 멍청해보였던 걸까. 타프롬 사원에 갔다가 호텔로 돌아가는데 20불을 부르는 기사를 보고 화가 나서, 여행 중에는 절대로 튀어나오지 않는 내면의 회사원이 튀어나왔다. 두 명을 경쟁시켜서 10불로 깎고 타프롬에 갔다가 호텔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10불도 아까웠지만 팁으로 2불을 더 챙겨주고 없어진 기사를 찾아보았다. 그의 동료들 말로는 그가 앙코르왓의 주차장에 있다고 한다. 나는 기가 차서 말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일단 앙코르왓까지 데리고 간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동료들에게 10불을 건네주고는 전해줘, 라고 말하고 숙소로 와버렸다. 가난한 사람의 수고비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에게 전해졌는지는 내 알바 아니었다.
오후에는 좀 쉬다가 다시 사원을 보러 가거나 박물관에 갈 생각이었으나 툭툭 기사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참고로 다음날 다음 리조트로 옮길 때 리조트 직원과 교섭할 때는 6불에 승락한 기사가 도착하자 짐을 붙잡고는 7불을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이 동네의 툭툭 기사들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풀사이드에 누워 책을 읽었다.
캄보디아의 공기는 탁했다. 우리가 기대하던 파란 하늘과는 전혀 달랐다. 이게 특별히 공기가 안 좋은 시기야? 라고 물어보니 건기에는 항상 이렇다고 한다. 나만큼이나 하얀 서양인들이 풀사이드에 누워 빈둥대고 있었다 평생 배고파본적이 있기나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긴 나도 언제 배고프기나 했을까. 나는 그 사람들만큼이나 피둥하고 하얀 내 몸이 부끄러워져서 금세 방으로 들어와 저녁을 기다렸다. 레스토랑에는 또 새끼 고양이들이 있을거고 그런 생각을 하니 다른 곳에서 밥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바 근처에서는 유럽억양의 영어를 쓰는 연주자들이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1시간쯤 그걸 듣다가 악수를 하고-악수를 하며 팁을 주고- 돌아와 또 일찍 잠들었다.
다음 날에는 호텔에서 소개한 택시 기사와 좀 먼 사원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잠이 들며 원래 사람은 하루 중 몇번씩 배가 고파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몇번이나 배가 고픈 걸까. 우리는 누구도 새끼 고양이만큼도 배가 고프지 않다.
<셋째 날 실은 넷째 날>
여행기에 리조트 얘길 적는 것은 바보 같다. 그런 것 치고 나는 여행을 오기 전부터 마지막 하루를 묵기로 한 리조트를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예산으로 따져도 비행기 값 + 나머지 3박의 숙박비가 마지막 일박의 숙박비와 비슷할 정도였다. 정문은 묵직한 나무문이었다. 툭툭을 타고 나무 문을 열자 색조가 전혀 다른 녹색이 가득한 인공의 낙원이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단 한치의 거짓말도 없는 표현이다 인공의 낙원.
캄보디아의 농촌을 컨셉으로 만들어진 이 곳에는 잔디로 만들어진 녹지를 만드는 대신 논과 논길을 만들어두었다. 오래된 오두막을 개조한 술집에는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듣고 해가 지는 것을 기다린다. 밤이 되면 개구리들이 울었고 사람이 없는 풀사이드에 나는 옷을 벗고 헤엄을 쳤다. 나는 마지막 날 예약해 둔 톤레압 호수의 투어를 취소하고 출국하는 시간까지 이 리조트에 머물러 있기로 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다시 글을 쓰고. 그렇게 씨엠립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냈다. 바로 전에 쓴 사원에 대한 글은 대부분 리조트에서 완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말이다.
“멀리 사원의 후문에는 지뢰 피해자인 군인들이 캄보디아의 전통 음악을 연주하면서, 같은 피해자들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있다. 사원 어디에 있든지 그 음악 소리가 들리고, 나는 희미하게 음악이 들리는 지점- 사원의 끄트머리, 숲의 가장자리-까지 걸어와 앉았다.”
어쩌면 내가 씨엠립에 다시 온다면 이 리조트에서 글을 쓰기 위해서 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꼭 이 곳을 오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돌아가는 길은 처음 올 때 처럼 완전히 까만 밤이었다. 심야의 비행기를 타기 위해 리조트에 차를 부탁해두었다. 아마 내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이 사람들은 차를 부탁해두었을 것이다. 꼭 저승을 빠져나가는 길처럼 길은 까맣고 숲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다. 군데 군데 전구를 켜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을 바라본다. 나는 숲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려다 숲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문다.
<옷을 입은 우리의 신에게 기도하는 법>
비행기는 한 시간을 늦고 두 시간을 늦는다. 나는 밤의 공항에 구석진 자리에서 내가 왜 이 여행을 오려고 마음 먹었는지 깨닫는다. 마침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것 같은 키가 크고 마른 아이 하나가 빨간 마그네틱 하나를 사려고 주춤거리는 모습을 본다. 아이는 동그란 이마를 문지르더니 기념품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서있는 줄로 돌아간다. 중국의 청도행을 알리는 사이니지가 보딩을 알린다.
나는 비행기가 떠난 후 아이가 사지 않은 마그네틱을 사서 가방에 넣는다.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그 얼굴을 잊어버리겠지만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아이에게 선물이라도 할 것 처럼 말이다.
무슨 이유로 지어졌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이 앙코르왓의 유적군은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도시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텐데 사람들은 불경하게 사원의 창에 몰려들어 어디 쇼핑몰의 메인 화면에 쓸 것 같은 사진을 찍고 있다. 신의 상은 언제부터인가 부처의 상이 되었고 불경한 행위는 그 어떤 행위보다 더 숭고하게 이해된다.
나는 여행에서 믿음과 배고픔에 대해서 생각했다. 레스토랑의 고양이들과 숲의 윤곽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정말로 진실인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의 수만큼 진실이 있다는 말은 불합리하다. 일어난 일은 단 하나 뿐이고 역사가 여럿이며 그 역사를 읽는 우리들 또한 다수일 뿐이다. 믿음. 나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려다 그만둔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 그리고 믿어야 하는 것들 말이다.
언제나처럼 나는 늦게 이해하고 나중에서야 말한다. 여행을 가고 또 돌아올 때 마다 내가 명확한 이유로 여행을 온 것이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유가 있어서 여행을 떠나는 것과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후 무언가를 깨닫는 것. 둘 다 사실 여행과는 하나도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변명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천 오백년 전의 사원 위로 해가 뜨고 그리고 지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붓다의 옷을 입은 인드라 상을 떠올린다. 아니 비슈누의 상이었던가.
내가 그 모습을 잊어버리기 전에 나의 신에게 기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비행기를 탄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다면 아무리 빠른 속도라고 해도 기도는 어디에라도 전해질 것이다. 나는 해야할 기도와 해야만 하는 기도 양 쪽을 모두 떠올린다.
그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내가 매일 같이 주로부터 멀어지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시나이까.”
20년 2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