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그냥 가장 바라는 세계에 다가가는 문제에 관해서예요.
- 코맥 매카시(2023), 스텔라 마리스. p327
 
오늘 퇴근하는 길에 사람들이 몰려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쪽을 보니 기가 막힌 토끼 구름이 떠있었다. 여름이었고 비가 그친 후 무더위가 시작하기 전이라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흰 색이었다. 분명 해가 질 때 쯤이면 더욱 멋진 하늘이 되겠지. 색은 보라색에 천국을 암시하는 듯한 형태의 멋진 뭉게구름.
 
나는 그 사람들과 오래 같이 있지 않았다. 그들이 감탄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방금 찍은 멋진 사진을 보내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나는 사진을 찍어도 보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웠던 탓이다. 걸음을 재빨리 해 커다란 회사 공터를 가로지르다가 그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을 깨달았는데.

애초에 나는 이 몇 년간 이런 사진을 보내도 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머릿 속의 무언가가 잘못되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완전히 혼자였다는 것을 아무런 계기도 없이 알아채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로 급하게 게이트를 넘어 집으로 도망갔다.
 

작년 여름, 작가 하나가 죽었다. 아주 유명한 작가이다. 나는 그의 죽음을 제 때에 애도하지 않았지만 세상 중에 만명 정도는 그의 죽음을 제 때에 애도했을 것이다. 아니지 이만명 정도로 하자. 아니 오만명 정도로 할까?
 
이렇게 말하면 안되겠지만 작가는 죽음으로서만 온전한 평가가 시작된다. 살아있을 때는 그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그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도 있지만. 작가가 너무 유명해지면 무엇보다 "너무 유명해서 싫어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 물론 세상에 몇 안되는 독서인구 중에 "너무 유명해서 싫어하는"사람들의 비중이 몇이나 되겠어 라고 얕볼 수야 있지만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런 세상에서 굳이 책을 읽고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는 제정신인 녀석은 별로 없다. 감히 말하건데 독서인구라는 녀석들은 기본적으로 "너무 유명하면 싫어"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 내기를 해도 좋다.

하지만 작가가 죽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갑자기 사람들은 자비로워져서 그가 현대 문학에 미쳤던 커다란 영향 같은 것을 앞다투어 얘기하고 흑백사진에 생몰을 적어서 올리기도 한다. 물론 너무 살아있는 전설이라는데 책이나 읽어볼까 같은 기특한 생각을 해주는 사람도 줄어들긴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죽어야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의 유명세는 기묘한게, 그의 몇 편의 영화와 그 영화의 명성을 완전히 갉아먹을 정도로 형편없는 시나리오 작업에서도 나타났다. 애초에 문장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희곡을 써도 그의 문장을 제대로 표현 할 수가 없어서 결과물이 형편없어진다고 해야할까.

예를 들어 내가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희곡 하나는 더 이상의 캐스팅은 없을 사무엘 존슨과 토미 리 존스의 연기로 영화화 되었는데 아무리 한국어로 읽었다지만 이게 같은 작품이 맞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잠들고 말았다. 중간에 잠이 들 정도로 길지도 않았는데 깨고 보니 엄청 상쾌하기까지 했단 말이지.

그렇게 문장이 아름답다면 시인을 해야하는게 맞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시인으로서는 치명적인 단점, 장광설이라는 버릇이 있어서 시인을 하기에는 또 적합하지 않다. 과작의 작가라서 대체로 한가한지 갑자기 뜬금없는 내용을 엄청난 분량으로 쏟아낸다. 주제에 관련이 없는 내용이냐고? 아니 기본적으로는 있다. 그래서 그런 점이 더 화가 난다. 애초에 플롯이 복잡한 작가가 아니라서 줄거리가 10줄 이내로 끝나는 소설이 오백페이지가 넘어간다.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그의 문장을 정말로 사랑한다. 왠지 집에 자동소총도 다섯 정 정도는 사뒀을 것 같은 노인네지만 (심지어 그는 군인 출신이다 없을리가 없다) 그의 소설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
예를 들어서 멸망한 세상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바다에 도착한다. 밑의 인용은 그 묘사이다.
 
저 멀리 잿빛 해변이 보였다. 둔한 납빛 물결이 느릿느릿 밀려왔다. 멀리서 소리도 들렸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세계의 해변에서 부서지는 어떤 이질적인 바다처럼 황량했다. (중략) 그리고 재가 그리는 잿빛의 스콜 선. 남자는 소년을 보았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파란색이 아니어서 미안하구나. 남자가 말했다. 괜찮아요. 소년이 말했다.
- 코맥 매카시(2006), 더 로드. p244
 
중략이라고 써두었지만 내가 생략한 것은 두 줄 반 정도의 문장이다. 짧고 간결하게 그는 상황을 설명하고 그보다 더 짧고 간결하게 사람의 마음을 묘사한다. 그는 좀처럼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의 문장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한다. 하나를 더 보자.
 
고요 속에서 눈이 소곤거리며 내렸고, 불꽃들은 피어났다 희미해지다 영원한 암흑 속에서 죽었다.
- 코맥 매카시(2006), 더 로드. p111
 
이런 글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조지 부시 주니어를 지지했다거나(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인터뷰도 아직 보지 못했다) 지구 온난화는 사기야 하고 8기통 차량을 밟으며 다녔더라도 (그가 환경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인터뷰도 아직 보지 못했다) 이런 문장을 쓴다면 남들에게 비밀로 하는 일이 있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것은 그의 유작인 연작 소설이다. 작년 겨울에 발매된 책을 이제와서 읽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리 쉽게 잃혀지지 않고 30페이지 쯤 읽다가 며칠을 쉬고 문장 몇 줄을 읽고 한 시간쯤 다른 짓을 하며 천천히 읽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엔 남녀가 나오는데. 남자는 자기를 떠나간 여자에 대한 생각을 십년도 넘게 지난 지금(작중 시간)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여자는 ... 아니 소설의 내용을 이야기 하는 것은 관두자. 그냥 말하자면, 아주 기나긴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정도로 해두자.
 
하여간 유작인 책을 읽고 있노라니. 내가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을 읽을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읽으면서 별별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가 정말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인간 존재 내면에 사라지지 않는 고독? 자아와 타자 사이의 갈등만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게 한다는 거? 모르겠다. 몇주 쯤 아니면 몇 개월  쯤 진득하게 생각해야 알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연구자가 아니니 이러다가 남이 써놓은 글을 읽고는 아이구 그렇구나 그런 내용이구나 하고 납득 할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성을 초월한 이치 같은것이 인간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가 직접적으로 "이것은 스파게티의 화신이다." "이것은 정부 관료제의 화신이다." 뭐 이런 설명을 집어넣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인간을 초월한 것이 분명한 것들 나오고. 평범한 인간인 등장인물을 말 그대로 박살내어 버리는 전개가 많이 등장한다. 어떤 초인 판사가 등장하는 서부 배경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 소설에서는 그가 문명의 화신 비슷한 것이란 걸 잘 숨기지도 않으며 책에 나오는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은 그 초인 판사의 손에 의해 말 그대로 박살난다. 말하고 보니 무슨 히어로물 같은데. 살인 강간 강도 방화 이 모든게 나오는 끔찍한 소설이다.
 
그런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는. 구원 받지 못하는 인간이다. 무언가를 구하겠다 는 의지를 가진 인간은 반드시 실패하고 그들을 정말로 구하는 것은 글쎄... 작중의 등장 인물들을 정말로 구하는 게 한 번이라도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 곰곰히 생각해봐도 기억나는게 없다.
그들이 받은 구원은 얄팍하고 불안한 것이고, 우리가 읽지 않는 동안 책 바깥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져서 순식간에 모든 등장인물들이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은 연약하다. 그들은 정말로 순간. 딱 어느 순간만 구원 받는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해야할지 우리의 필멸의 여정 중에 주어지는 잠시간의 위로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왜 갑자기 이 작가에 대해서 쓸 생각이 들었지 싶었는데. 잠시 서재에 앉아서 생각해보니 스스로 나에게 주어진 구원이 몹시 얄팍한 것이고 한 번도 구해진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아 빌어먹을. 서부극에 혼자 당나귀를 타고 가다가 머리에 총을 맞고 죽는 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닐텐데 왜 이런거에 꽂혀있지 하고 쓴 웃음이 나온다.
 
그래. 오늘 다른 사람의 책으로 가득찬 방에서 내가 정말로 혼자라는 생각을 했다.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래서 지금 글을 쓰다 말고. 그가 쓴 작은 희곡의 문장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그 희곡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구하려고 대화하는 내용 밖에 없는 책이다. 마지막 문장은 기억나지만 구원을 거부하고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말이 뭐였더라.
 
결국 원하던 구절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글을 쓰길 그만두고 서재를 뒤져가며 책을 찾아보려고 한다.

어째서인지 책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나는 필사적이 되어서 제발. 제발이라고 중얼거린다. 중얼거리다 못해 제발, 이라고 기도한다.
 
 
이제 댁이 뭘 구한 건지 알겠지요.
구하려고 했지. 구하려고 하고 있고. 열심히
- 코맥 매카시(2006), 선셋 리미티드. p135
 
24년 7월 24일의 글이다. 

사람이라면 모두 다 그런 것처럼, 나에게도 "나의 나무"가 있다.

"나의 나무"가 무엇인지 설명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나로서는 나의 나무가 없는 사람을 상상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긴 하겠다. 예를 들어 아직 나의 나무가 있어본 적이 없는...그러니까 한 3살 쯤 된 사람. 아니면 다른 별의 지적 생명체가 지구 문명의 멸망 후 인류 문명의 서버들을 어렵게 돌려서 내 글을 읽고 있다거나. 해독에 수고하셨지만 다른 별의 사람이여 이 글에 뭔가 유용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뒤로 가기를 눌러 어딘가에 있는 알콜스왑으로 물건 이리저리 닦아보기 포스팅이나 읽어보십쇼.

짧게 설명하자면, 내가 말하는 "나의 나무"는 살아가다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나무를 뜻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유명한 에세이집 <'나의 나무' 아래서>에는 소년 겐자부로가 몹시 사랑하여 자주 그 아래에 앉고, 마음이 외롭거나 할 때 위안을 받았던 커다란 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 중에 안 그런게 있는가 싶겠지만) 우습고도 슬픈, 무력한 소년시절을 쓴 이 에세이에서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이라는 가혹하고 잔인한 시대에서 아니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했던 그의 ”나의 나무“에서 나즈막한 기도나 오래된 이야기에게서 얻는 그런 위로를 받습니다. 훌륭한 책이랍니다. 아동 대상의 에세이지만 그의 다른 소설들 보다 나은거 아냐 싶을 정도니까.

아주 어릴 적에 내가 가졌던 "나의 나무"는 관목처럼 키가 작은 단풍나무였다.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뜰에 심어진 관상용의 나무이다. 크게 자라지도 굵고 단단하게 자라지도 못한채 자라버린 나무였다. 원래 그럴 태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 그 나무를 볼 때는 내가 너무 작았는데도 다른 나무보다 눈에 띄게 작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십 몇년이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는데 오래된 단지인 만큼 단지의 나무들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어떤 나무들은 5층 짜리 작은 아파트의 건물 높이 만큼이나 자라났지만. 그 단풍나무만은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 그 이유는 (아니 정말 그 이유에서 였을까)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그 나무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괴롭혀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 책을 읽지 않는다면 단지의 뜰, 아니면 주변의 야산을 쏘다녔는데. 무당벌레나 꿀벌을 수십마리씩 산채로 모으거나 개미들 위에 과자를 뿌려 개미들이 그걸 옮기는걸 구경하는데 영원같은 시간을 썼지만 그것이 지겨워지면 대체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아마 다른 나무는 내가 오르기엔 너무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그 나무에 매달렸을 것이다. 나무로서는 정말 곤란했을게 틀림없는데 어딘가에서 나무는 가지만으로 생식이 가능하다는 걸 읽고는(그건 아마 접붙이기에 대한 이야기였을텐데) 그래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단풍 나무의 싱싱한 가지를 몇개 부러트려서는 그 근처에 심고 물을 주고 그랬었다. 아니 못되쳐먹은 꼬마였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내가 점점 커지는 동안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더 쉬운 나무타기 상대가 된 그 작은 단풍나무는 결국 어른이 되어 무슨 교목처럼 키가 커진 나보다 작아지게 되었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렇게 된건 역시 내가 중학생이 되도록 그 나무에 매달려 지냈기 때문 일 것이다. 부드럽고 탄력있게 휘는 그 가지에 나는 더 커지고도 가끔 매달려보곤 했는데 부러질까 두려워 체중을 실을 수는 없어도. 어두운 밤 집에 돌아오는 길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되는 양 양팔로 가지를 잡고는 대롱대롱 매달려 마음이 내킬 때 까지 있곤 했다. 전세계의 소년소녀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 그렇게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역시나 그 작은 나무를 사랑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재건축으로 사라졌다. 나무들은 잘리거나 파내어졌다. 13동 앞에 서있던 커다란 백목련이나 6동 뒤로 줄지어 서있던 포플러는 아마 파내어져 팔렸을 것이다. 단단하고 곧은 훌륭한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작은 단풍나무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너무 매달려 커지지 못한 단풍은 그냥 잘려졌을 까 아니면 어느 좀 마음 착한 인부의 손에 파내어져 여느 부지의 정원 구석진 곳에 심어졌을까? 운이 나쁘자면 또 어디 학교의 운동장 같은 곳에 심어져 원숭이 같은 인간놈들을 세명씩 네명씩 매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단풍나무 생각을 하며 한번 알아볼까 싶다가도 자기 땅 한평 없는 월급쟁이가 나무의 행방을 알아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금세 그만둔다.

나무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게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다. 나무가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쓰다듬어 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그 등치에 기대거나 그늘 아래 앉는 것 뿐인데 나무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니. 인간은 정말 제멋대로가 아닌가. 우리가 나무를 사랑하든 증오하든 나무들이 우리를 구분이나 할 수 있으려나, 우리가 나무에 울분을 터트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그 아래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나무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싶다. 그저 바람소리에 맞춰 그 가지를 흔들고 나뭇잎 부서지는 그 소리와 함께 그늘을 내려 볕을 가리기나 할 뿐이지.
말하자면 나의 나무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다.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서 우리는 그저 서있을 뿐인 나무를, 그 그늘과 단단한 침묵을 사랑하고 마는 것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나의 나무란 대체 그런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생각하듯이 나의 나무를 생각한다. 어쩌면 당신을 나의 나무를 그리워하듯이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 시절 내가 좋아했던 나무는 단과대 옆에 서있었다. 7층에 있는 학생회실을 나와 창가에 서면 보이는 커다란 나무로. 여느 건물 3층 4층 까지는 닿을 듯한 여름이 되면 가지를 사방으로 뻗는 나무이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과 풍성하게 매달린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려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나는 어느 봄 학교에 처음 들어가 혼자 어슬렁거리다 문과대 창을 통해 나무를 보고는 한눈에 그 나무가 마음에 들어 매일매일 혹은 기회가 날 때 마다 창가에서 나무를 바라보았다. 질리는 일은 없었다. 복학을 하고 돌아왔을 때도 처음 한 것도, 졸업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것도 7층에 올라가 그 나무를 바라본 것이었다. 나의 학교 생활은 멍청하고 한심한 일화들과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읽은 책들, 그리고 변하지 않고 철이 되면 바람에 흔들려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번 겨울 볼일이 있어 학교에 돌아가 보니 그 나무는 있던 자리 그대로 있었으나 커다란 가지 대부분이 잘려져 있었다. 눈이 내렸지만 어떤 눈송이도 나뭇가지에 매달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또 7층에 올라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가 내던 소리를 떠올렸다. 항상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23년 2월의 글이다.

얼마 전 이상한 일이 있었다.

무선 이어폰을 끼고 화장실에 가며 폰을 자리에 놓고 가는 바람에 화장실 문을 닫자 블루투스의 신호가 끊겨 듣고 있던 노래의 재생이 끊겼다. 이상한 일은 노래가 끊겼던 일이 아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어 볼일을 마치고 나오며 무선 이어폰을 재작동하자 듣고 있었던 한국의 유행가가 아니라 낯선 외국어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흥겨운 리듬의 곡이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인데도 아는 노래처럼 느껴지는 건 보컬이 내가 예전에 많이 듣던 곡의 가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운 기분이 들어 노래를 몇 분 정도 듣다가 사무실의 자리로 돌아와 내 스마트폰을 보았다. 노래는 역시나 내 폰에서 재생되는게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명 다른 사람의 신호가 - 사무실 내에서 나와 같은 종류의 스마트폰을 쓰는 누군가 - 섞여서 들어간게 아닐까. 아주 예전 라디오로 음악을 듣던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일이다. 아니 그 때는 다 유선 헤드폰과 이어폰이라 그럴일이 더욱 없었으려나. 낯설고도 익숙한 외국의 노래에 아쉬운 기분 반으로 무선 이어폰 연결을 다시 설정해 내가 처음부터 듣던 노래를 들으려는데 문득, 어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익숙한 음악의 가수가 누구였지? 아니 것보다 그 가수의 그 노래, 내가 엄청 많이 들었는데 그게 제목이 뭐였지? 진짜로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나는 그리 부지런한 음악 감상자가 아니다. 스트리밍의 시대에 나만 그런 것은 아닐꺼야 하고 혼자 하고 혼자 듣는 변명을 해본다. 유튜브와 애플뮤직 두 개나 굳이 음악감상 앱으로 쓰는 것은 그냥 해둔 구독을 해지하지 않을 뿐이다. 스포티파이까지 쓰기에는 너무 듣는 노래만 들으며 멜론을 쓰기에는 내가 너무 속물이다.

컴퓨터가 되었든 스마트폰이 되었든 파일을 어딘가에 저장하던 시절에는 나름 분류도 하고 태그도 하면서 음악을 들었던 것 같은데. 요즘 음악감상 앱의 알고리즘은 너무 편리하여 어떤 가수의 곡을 하나 고르면 자동으로 그 다음곡이 알아서 흘러나온다.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고 어떤 기분인지 쓰면 검색이 괜찮은 재생목록을 골라준다. 생각은 필요 없고 그냥 기분만 있으면 된다.
앨범 전체를 들으며 앨범 전체의 구성을 하나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듣던 그런 감상법도 딱히 필요 없다. 하나의 좋은 곡이 끝나면 그것과 비슷한 그리고 더욱 포퓰러한 음악을 골라주니 항상 클라이막스만 골라서 신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얏호. 그러다보니 장르에 대해서도 가수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없다. 제목을 외울 필요도 없다. 그게 뭐 어때서요 라고 묻는다면 나도 솔직히 그게 싫다는 것도 이래선 안된다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 시대에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대체로 "소유"와 비슷한 의미였던 것 같다. 꽤 비싼 돈을 들여야만 음향기구를 갖출 수 있었고 LP나 CD, 이도 저도 아니면 Tape라도...하여간 물리적인 매체를 사서 듣는 것이 중요했다. 나도 CD의 부흥 무렵에 태어나서 그런지 그 후 대용량의 인터넷 회선이 당연한 시대가 되자마자 음악을 모으는데 열중했다. 유명한 당시의 유행가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유행곡을 하드에 저장하고 CD로 다시 리핑해서 들었다. 각자 컴필레이션 CD를 만들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이 로맨틱한 제스추어였던 시대이다.

나는 음악 수집에 꽤나 악질이라서 한국인은 나말고 아무도 모를만한 음악을 폴더로 정리하고 들으면서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때때로 인터넷에 잘난척하는 글을 써댔다. 아무도 모르는 음악에 대해서 글을 쓰니 조회수는 두자리수나 겨우 올라가고 가끔 달리는 댓글은 저 말고 이 아티스트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분이 계셨군요 어쩌고 하는 역시나 잘난척 하는 댓글들 뿐이었다. 복제된 컨텐츠의 시대일 수록 나는 내가 가진 데이터 베이스의 방대함과 희귀함에 (그리고 그걸 몹시 싼 비용 그러니까 드는 비용이 오직 나의 차고 넘치는 여가 시간인데, 생각해보면 10대 20대의 청춘만큼 귀중한 싸구려가 어디있을까 제기랄, 하여간 몹시 싼 비용으로 구축한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부심을 가졌다. 이런 취미는 본질적으로 몹시도 궁핍한 것이어서, 동시대 한국인의 기준으로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라 자부심을 가질 이유는 한 개도 없었는데 말이다.

요는, 한 때 나는 음악을 모으는 것과 듣는 것 모두에 시간을 마음 껏 낭비할 수 있었으며. 엄청난 시간을 다양한 음악을 듣는데 쏟았지만 거기에는 어떤 깊이도 없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하드디스크를 채우고 리핑된 CD에 네임펜으로 사람들은 알아주지도 않는 아티스트의 이름을 적는게 내 취미였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뒤의 결말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났다. 시대가 변하고. 인터넷이 더 발달하였으며 회선은 빨라졌다. 서버의 운용비용이 더 낮아지자 음악파일을 다운받는 시대에서 스트리밍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각 음악 사이트는 통합되었으며 결국 내 하드와는 상대도 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음악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멋진 (더 멋진?) 음악 저장고를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게 되자 금세 음악 모으는 것을 관두었다. 그랬던 것 같다.

애플 뮤직의 초기에는 전처럼 재생목록도 만들고 했던 것 같지만 뭘 쳐도 거기에 음악이 있는데 내가 뭐라고 개인 음악 저장고를 유지한단 말인가. 제기랄. 하지만 노래를 모으게 되지 않게 된 무렵부터 나는 그렇게 열심히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테니 단순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어느새부터인가 나는 더 이상 음악을 취미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외국 어딘가의 음악감상 카페에 들어가 커피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불편한 자리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한참을 울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건지 본인인 나 조차도 알수가 없다.

이제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그 노래가 유럽의 곡이 아닌건 알 수 있었다. 제목도 영어가 아니다. 유튜브에서 재생했던가 싶어서 재생 목록을 찾아보다가 1,2년 어치의 검색을 해서 나올 곡이 아니란걸 깨달았다. 샤잠 같은 곳에 콧노래로 노래를 불러보다가 내가 일반인 뺨치는 음치라는 걸 다시 기억해냈다. 기억나는 키워드로 구글링을 해보기도 한다. 무슨 짓을 해도 나오지가 않는다.

결국 집에 가는 길에 내 트위터를 검색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맘에 드는 노래는 유튜브 링크를 트위터에 올리곤 했는데 키워드 유튜브로 내 트위터를 검색하면 분명 제목이 나올 것이다 싶었다. 제목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러니까 왜 그 정도로 특이한 노래인데 제목을 기억못하는가 싶지만 하여간 내 트위터를 검색했다. 정말 다양하게 이상한 노래를 엄청나게 들었구나. 1년치를, 2년치를, 3년치를 넘어갈 시점에서 노래를 하나 찾았다.

원래 기억하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부분도 있고 가사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애초에 내가 전혀 모르는 외국어 (포르투갈어였다)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활동한 것은 1979년에 내가 듣던 곡은 1972년에 발표한 노래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찾아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 곡을 왜 듣게 된건가 싶어서 생각해보니 나는 한 때 남미의 재즈를 엄청나게 들었는데 그 때 이어졌던 것 같다. 왠지 그리운 기분으로 노래를 듣고 또 유튜브가 이어주는 다른 노래들도 따라 들었다. 아 역시 좋은 노래들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다른 곡을 듣고 있다.
유튜브에도 애플뮤직에도 없는 한 15년 전 쯤 발매된 곡이다. 혹시나 싶어서 검색해봤는데 역시나 한국의 스트리밍 사이트에나 있는 곡이다. 분명 내 하드 어딘가에 앨범 전체를 추출한 (그렇다 나는 앨범도 엄청나게 사댄 사람이다) 파일이 있을텐데 지금은 들을 길이 없다.

만오천원이든 구천구백원이든 결재해서 들어볼까 하다가 미리듣기로 음악을 들어본다. 듣고는 너무 좋아 한 번 더, 그리고 한 번 더. 그렇게 글 하나를 통채로 다 쓰는 동안 1분간의 미리듣기를 반복한다.


이 노래가 이렇게 좋았던가 아니면 내가 미리 듣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좋게 느껴지는 걸까. 그건 스트리밍 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22년 12월 30일의 글이다.

브라우저를 열고 닻이라고 검색한다.
이미지 검색 결과에는 우스울 정도로 비슷한 아이콘 이미지들만 가득하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낡고 검고 상처입어서는, 누군가의 몸뚱아리처럼 조용한 닻의 사진이었다. 조금 더 이미지를 스크롤해보다 생각을 달리해서 키워드를 바꿔 검색해본다.
어릴 적 나는 누군가에게 닻이 무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단어의 뜻을 물어보는 일이 좀처럼 없고 제 멋대로 단어의 뜻을 상상해보는 버릇이 있어 상대는 신기한 마음이 들었나보다. 나를 쳐다보며 뜸을 들이더니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잡아주는 무거운 추가 닻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뾰로통해져서는 물었다. 왜 배가 떠내려가면 안되는데? 그러니까 말야 왜 배가 그냥 가버리게 내버려두면 안되는거야?

나는 예전에 꽤 오랫동안 새벽3시가 되면 잠에서 깨어났다. 그냥 깨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공포에 질리거나 아니면 울부짖으며 잠에서 깨어났으며. 잠에서 깨어나면 때때로 오열을 했고 가끔은 바로 다시 잠들었으며 대부분 두통약을 삼키고 그대로 누워 해가 뜨길 기다렸다. 다른 사람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두통약이 고통을 잊는데 도움을 줬고 밤에 겪는 고통보다는 살짝 더 견디기 쉬운 소화불량과 가끔 좀 버겁게 느껴지는 위통을 대신 주었다. 나중엔 이틀에 한 번은 두통약을 샀고 결국 나중에는 두통약을 200알 단위로 샀다. 일본 아마존은 가격이 싼 대신 약물 오남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충고도 해주지 않았다.
글쎄 어째서 새벽 3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되기 전에 만났던 연애는 긴 짝사랑에서 이어진 연애였는데. 정작 연애는 길지 않았고 이별 후의 매일은 내가 얼마나 그 사람을 좋아했는지, 아니 사랑하고 있는지를 되새기는 길고 지루한 과정이었다. 술을 마셨고 아무 약속이나 잡아서 나다니고 금세 우울해져서 아무도 듣지 않을 노래들을 듣고 다녔다.
헤어진 뒤 그 사람과는 밥을 먹을 기회가 두번 있었고 몇번인가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다. 우리가 운명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집이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는데, 어찌됐든 나는 그럴 때 마다 과하게 행복해했다.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람이 심하게 불어 무엇이라도 저 편에서 날아오지 않을까 싶던 날. 언덕에 올라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니 하늘이 맑았고 구름은 가벼워 바람소리와 저 멀리 자동차 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때 내 일부의 어떤 것이, 아주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겨온 어떤 것이 정말로 물질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나를 떠나 휘익—날아가버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뭔가가 차오르는 것을 꾹 참아가며 성지순례를 하는 기독교도처럼 다리를 끌며 집으로 걸어갔고 집에 문을 따고 들어오자마자 문자 그대로 무너져 통곡했다.

그 뒤로 내가 새벽3시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최소한 그랬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아주 오래 전 일이 되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오랜만에 새벽3시에 잠에서 깼다. 1분도 어기지 않은 그 시간이다. 아직 추분이 되지 못한 한 여름의 하늘도 그 때는 어둡고, 나는 몹시도 혼자여서 무시무시하게 겁을 먹은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이 오길 기다렸다.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꼭 몸이 물에 녹아, 남겨진 마음만 돌처럼 가라앉고 잊혀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과 초에 묶인 사람처럼 마음이 답답해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방을 치우고 입으로 소리를 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할 수만 있다면 발을 구르고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는 나는 여기에 있어. 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 나는 닻의 이미지에 마음이 도달한다. 물 속에 조용히 잠겨서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묶어둔 무겁고 거대한 추. 물은 어둡고 더러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닻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나는 문득 그 닻이 꼭 내 몸뚱이처럼 느껴져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묶어둔 것이 따개비가 가득 붙고 녹색 해초들이 치감고 있는 내 몸이 아닐까 싶어져서. 황급히 일어나 거실의 불을 켜고 다시 끈다. 그렇게 하면 내 운명이 나에게로 주의를 돌려 내 목숨을 구해주기라도 할거란 듯이.

나는 그렇게 몇 번 더 새벽3시에 일어났다. 빈도는 점점 늘어나고 아마 곧 나는 매일 매일 그렇게 일어날 것이다. 내 운명은 왜 이렇게 천천히 다가오는 것일까. 하고 나는 울먹이며 말한다. 그리고 불을 켠다. 다시 끈다. 그리고 다시 켠다.

22년 7월의 글이다.

20년 11월 어떤 기사가 올라왔다. 시부야역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사망한 중년여성에 대한 기사로, 사인은 외상에 의한 지주막하출혈 - 뇌출혈의 일종이라고 담담하게 적고 있다. 뒷통수를 둔기로 가격당해 죽은 것이다.

며칠 뒤 확인된 사건의 개요는 간단했다. 죽음의 현장이었던 곳은 버스 정류장의 벤치로, 차가 끊기고 시작하는 그 짧은 심야 시간에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곤 했던 64세의 노숙인 오오바야시 미사코씨를 마음에 들지 않아한 한 남성이(그는 현장 근처에서 살고 있는 주민으로 알려져있다) 그를 돌을 넣은 페트병으로 가격하여 - 그 남성은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하였으나 - 살해한 것이다.

단신으로 처리 될지도 모르는 기사에 특이한 점이 있었던 걸까? 통행인이 많은 시부야 역의 일각에서 일어난 그 죽음의 무참함 때문 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신이 발견되었을 당시 그에 대해 신분을 증명 할 만한 것들이 없어서 최초 신원 불상으로 발표되었던 이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의 신분이 밝혀지게 되었고 범인은 그 후 일주일도 안되어 체포되었다.

내가 읽었던 기사는 범인이 체포된 시점의 기사로. 거기에는 가해자에 대한 긴 설명과 말도 안되는 변명도 같이 적혀 있었으나, 나는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기에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가지 매체에서 찾아 퍼즐을 맞추듯이 알아내었다. 피해자 오오바야시 미사코씨는 노숙인으로 시부야 근처의 사람들에게도 안면이 알려져 있었던 사람이었다. 다만 사람을 피하는 노숙자치고도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극히 꺼렸는데 노숙 생활을 한 것은 올 11월을 꽉 채워서 생각해도 9개월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히키코모리로 살면서 평생 거의 일을 하지 않았던 가해자와는 달리 30년이 넘게 일을 하면서 살았던 것이 된다. 

그는 20년 초 까지는 도내의 아파트에 혼자 살 고 있어 주거지가 안정되어 있었고 올 2월 까지도 파견직으로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주로 시식 업무를 담당하며 살아왔지만 최근 Covid-19의 확산으로 슈퍼마켓에서의 일자리를 잃었으며, 결국 어느 시점에선가 집세를 내지 못해 아파트를 나와 노숙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발표하였다.
다만, 전술한 바와 같이 노숙을 하고 있으면서도 행색이 깨끗하고 몸가짐이 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냥 보기에는 전혀 노숙인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시부야의 버스 정류장에서도 버스의 막차가 끊기고 첫차가 오기 전의 아주 짧은 시간에만 잠시 쉬어가려는 듯이 벤치 위에 앉아서 쉬기만 하였다고 하며 누워서 자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주변의 시민들은 말하고 있다.
또 그가 항상 똑같은 시간에 앉아있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노숙인인 것을 몰랐을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어쩌면 그가 노숙을 시작한 이후 짐을 두고 있는 다른 생활 공간이 있었고 단지 버스 정류장의 벤치는 밤을 잠시 피할 피난처 같은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찰이 그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3일이 걸렸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는 대해 결혼을 한 적이 없으며, 아이를 낳은 적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꼭 그가 아무도 찾지 않을 사람이었다는 듯 한 설명이었다. 죽음의 순간, 오오바야시 미사코씨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은 8엔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일본의 매체들이 8엔의 무상함과 비참함을 표현하려는 듯이 기사의 제목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보도된 후 시민들이 시부야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우리가 그 일 수도 있다고 시위를 했으며 그 모인 숫자가 100명이 넘는다는 사실은 제목에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몇개월이 지났다. 그의 죽음 이후 나는 계속해서 NHK 등 주요 언론매체에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왔지만 12월 이후 더 이상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죽음 이후로 일본사회에 무엇인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사회의 병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떠한 분열과 개인의 파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더 이상 그 기반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여러 산업 분야에서 중소 사업체는 무너져가고 실업자들이 쏟아져나온다. 투입한 자본을 돌려받지 못해 계속해서 무너져가는 사업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상황이 나은 편이다. 한쪽 켠에선 자신이 이제까지 쌓아온 기술과 숙련을 인정받지 못하고 비숙련 노동자로서 불완전한 고용상태에 몰리고 있다. 그들을, 아니 우리를 지탱해줄 그물은 어디에도 없고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일자리를 잃은 것이 우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눈짓을 몰래 보낸다.
 
여기 숫자가 또 몇 개 있다.
옥스팜은 20년 4월 Covid-19으로 인해 전체 소득이 최고 20% 감소 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며 이 경우 극빈층은 전세계적으로 4억 3천5백만명이 늘어 총 9억 2천 200만명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고, 월드 뱅크는 20년 10월 극빈층이 7억 3천만명으로 늘어났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월드 뱅크는 덧붙여서 이전까지 극빈층은 저학력의 농업 종사자들이 많았으나 현재는 기본 학력을 갖춘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극빈층이 늘어나고 있음이 두드러진다고 설명하였다.
같은 날 발표 된 미국의 재산 분석 전문기관 웰스엑스는 순자산 3천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전세계 갑부들의 수가 23만 8천여명에서 28만 여명으로 늘었으며 세계 갑부들이 5개월 동안 늘린 재산은 6조 83백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 모든 보고서는 오오바야시씨의 죽음 이전에 발표되었다. 나는 이러한 현상들이 인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부를 쌓은 사람들이 악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왕정에서 왕에 대한 무모하고 절대적인 충성이 죄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추구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 될 수 없다. 때때로 나는 그것이 우리 현재의 유일한 선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한다.
하지만 나는 숫자와 숫자화 된 사람들의 이름들을 떠올리고 이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단일화된 현상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우리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우리의 세대와 우리의 땅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신의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쌓아올린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지운다. 그리고 다시 글을 써내려간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21년 4월의 새벽의 글이다.

...
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주 옛날의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주 최근의 일도 아닙니다. 때는 숲 속에서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늘어나 열매를 줍는 동물들보다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훌륭하다는 여겨지는 평판이 생겨났고 비버씨가 댐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공터를 크게 늘려 더 많은 동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소리씨는 어째서인지 농사를 짓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가끔 사촌인 비버씨네나 이웃의 곰씨네의 밭에서 도움을 줄 때도 있었지만 한가한 시간에는 강변에 나가서 진흙을 골랐습니다. 아주 이상한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죠.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릇이라고 해도 여러분 집에 있는 그릇들 처럼 편리하고 멋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냥 진흙을 이렇게 저렇게 빚고 말려서 나무 열매 정도 넣어 둘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오소리씨의 사촌인 비버씨는 그런 오소리씨가 맘에 들지 않았답니다. 손재주가 아까웠던거죠.
며칠을 고민하던 비버씨는 그날도 강가에서 진흙을 모아 가던 오소리씨에게 댐을 만드는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네 취미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우리가 하는 일은 밭과 논을 늘리는 훌륭한 일이야. 오소리씨는 고개를 끄덕이죠. 비버는 오소리씨의 유일한 사촌이었고 훌륭한 비버가 하는 말이니 옳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아직 그릇의 훌륭함을 모르고 있어. 내가 장돌뱅이 개미햝이가 보여준 것 같은 흰 그릇을 만들어내면 알아줄지도 몰라.

오소리씨는 여름 동안 비버가 댐을 만드는 일을 열심히 도왔답니다. 비버의 댐은 나날이 갈수록 크고 튼튼해져갔죠. 해가 화창한 날에는 댐의 위쪽 끝에 햇볕이 하얗게 내리쬐어 오소리와 비버는 그 위에 누워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마른 여름이었지만 비버의 댐이 모아둔 물 덕분에 어떤 동물도 목이 마르지 않았죠.

눈을 감고 햇볕을 쬐던 오소리씨는 말했습니다. 비버, 나는 잠시 구릉지대에 다녀오려고 해. 나에게 여름 동안의 삯을 계산해주지 않겠어? 비버씨는 깜짝 놀랐죠 가을이 된다고 해서 댐의 공사가 끝나는건 아니었으니까요. 증축이 끝나면 보수공사가 있고 또 비버씨는 자신의 밭도 일구어야 했으니까요. 구릉지대는 왜 다녀오려는거야? 라고 묻자 오소리씨는 거기 좋은 흙이 있대 그 흙만 있으면 흰 그릇을 잔뜩 만들 수 있다던데. 라고 말했죠. 비버씨는 또 그릇 얘기냐 하고 한숨을 쉬었지만 오소리씨에게 나무 열매를 잔뜩 주었죠.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와. 내년 봄이 되면 새끼 동물들이 늘어날거고 숲에는 공터가 더 필요해.

비버씨는 그렇게 혼자서 오소리씨를 기다렸어요. 겨울은 금방 왔어요. 해가 길어지고 숲의 어떤 넓은 공터에도 겨울의 긴 햇볕과 그림자가 늘어져 동물들은 어떤 계절보다 더 게으르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냈죠. 비버씨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댐의 위를 돌아다녔습니다. 오소리씨와 같이 쉬던 댐의 끝에 다다르면 코를 킁킁 거리며 먼 곳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구릉은 멀고 이미 겨울이 되었으니 겨울이 지나고 오는 게 좋겠군. 비버씨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었습니다. 그 해의 봄은 유독 영원처럼 긴 봄이었지요. 많은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죠. 봄이 왔으니 천천히 출발하면 여름에는 도착하겠어. 비버씨는 일을 도와줄 일꾼들을 뽑았어요. 동물들이 찾아와 새끼들이 태어났으니 공터를 더 늘려야 한다고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죠. 오소리가 감독을 해줬으면 편할텐데...

그 영원 같던 봄은 아주 길게, 그리고 빠르게 사라졌고 금세 여름이 되었어요. 그 해 여름엔 비가 많이 오지도 적게 오지도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열심히 일했죠. 이제 비버와 오소리 둘이서 만들던 시절보다 댐은 훨씬 훌륭해지고 튼튼해졌어요. 다른 숲의 동물들이 기웃거리며 찾아와 댐을 구경했죠.
곰은 나무등걸에 앉아 바람을 쐬다 비버씨 네 댐은 우리 숲의 자랑이야 고마워 라고 감사를 표합니다. 비버씨는 머리를 긁적였어요. 오소리가 있었으면 더 좋은 댐을 만들수 있었을거야. 이런건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 가을이 되었어요. 이제 올때가 되었어 하지만 너무 늦군 오소리. 공사 현장에서 밥을 먹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비버씨는 고개를 들어서 사방을 보았죠. 하지만 이웃집의 너구리씨나 여우씨인 경우가 많았죠. 곰씨는 커다래서 아무리 몰라도 곰씨를 오소리씨로 착각할 일은 없었어요. 비버씨는 좀 퉁명스러워졌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군. 이라는 말이 비버씨의 말버릇이 되었습니다. 동물들은 때때로 그게 자기들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서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또 가을이 지났습니다. 겨울도 또 지나갔죠. 그 해 겨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비버씨의 말버릇은 변함이 없었지만 동물들은 그가 누굴 기다리는지 잘 몰랐어요. 숲의 시간은 빨리 지나가니까 몇몇 젊은 동물들은 오소리씨가 누군지도 몰랐죠. 그런 젊은 동물들이 보기에 비버씨는 숲에서 제일 훌륭한 동물이었고, 무서운 동물이었죠.

또 한 번의 봄이 지나고 그리고 어느날 여름.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날. 비버가 댐의 꼭대기에서 저 멀리 숲의 저쪽을 보고 있던 날. 오소리씨가 돌아왔어요. 흰 흙을 잔뜩 지고 그리고, 아기 오소리를 데리고 있었어요. 열매처럼 작고 아름다운 아이였죠.
오소리씨가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사촌인 비버씨였습니다. 비버씨 내 딸이야.
비버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군. 그래서 늦은거냐. 하고 생각을 했죠.
오소리씨가 원래 살던 동굴을 청소하는 동안 오소리씨의 작은 아이를 풀숲에 눕혀놓고 비버씨는 묵묵히 나무 뿌리를 갉으며 중얼 거렸죠. 이제 돌아왔으니 내 일을 도와줄수 있겠지

하지만 오소리씨는 돌아오고서도 비버씨를 돕지 않았어요. 그 댐은 이제 너와 내가 만들던 댐이 아냐 아주 훌륭해졌어. 하고 말하고 오소리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릇을 빚었고 딸을 키웠죠. 오소리씨는 정말 좋은 엄마였어요.비버씨는 댐의 높은 곳에서 나무를 갉다가 오소리씨가 딸과 산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버씨는 이제 더 이상 너무 늦는군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주 과묵해졌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오소리씨가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나 겨울이 가기 전의 어느 날, 오소리씨는 숲속의 동물들을 모아서 이제까지 만들어온 자기의 그릇을 보여주었답니다. 사촌인 비버씨, 친했던 곰씨, 이야기꾼 여우씨 등 많은 동물들이 모였죠. 정말 많은 그릇이 있었죠 나무 열매를 올려놓는 접시와 항아리. 빗살무니와 발바닥무늬 그릇. 오소리씨는 자랑스럽게 자기 그릇들을 소개했죠. 마음껏 가져가세요. 곡식을 넣는데도 쓸수 있을거에요. 이제까지 숲속에서는 곡식을 그냥 동굴에 쌓아뒀었거든요. 이제는 동굴 바닥에 두다 물에 젖는 일도 없을 거에요. 초대된 동물들은 오소리씨의 그릇을 구경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죠. 과연, 이런걸 하고 있었구나. 다들 웃는 얼굴로 오소리씨를 칭찬하고 오소리씨의 딸에게 너희 엄마는 아주 훌륭한 일을 하는구나. 하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죠.

그런데 그 때 오소리씨의 초대에 제일 먼저 나타나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던 비버씨가 갑자기 일어나 퉁명스럽게 소리쳤습니다. 말도 안돼 이런건 게으름뱅이의 취미일 뿐이야.
오소리씨는 당황해서 비버를 쳐다보았습니다. 비버 무슨 일이야.
우리가 매년 만들어내는 곡식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작은 그릇에 곡식을 채운다는거지? 나무 열매나 몇개씩 따먹고 배를 주리던 시절에나 어울리는 재주야. 우리가 털이 없어 앞발이 부드러운 인간도 아니고 이런 흙투성이 물건이 필요할리가 없잖아.
비버씨는 다른 동물들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시간 낭비 했군. 성실한 숲속 동물들의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다니 너는 어떻게 된거 아냐? 이런 걸 만들 시간에 댐에 나와 허드렛일이라도 시켜줄테니까. 동굴을 나가버리는 비버씨의 뒤를 웅성거리면서도 많은 동물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오소리씨는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은 오소리씨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은연중에 농사를 짓는 동물이 훌륭해. 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리고 비버씨는 댐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 중에 제일 훌륭했어요. 오소리씨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훌륭해 똑똑해 잘났어. 나는 상대도 안되지. 하지만 나는 그릇을 만들고 싶어. 
오소리씨는 낮에는 열매를 줍고 밤에는 그릇을 만들었어요. 동굴 가득 그릇이 쌓여갔어요. 가끔 개미핥기 장돌뱅이가 와서 그릇을 사주기도 했어요. 숲에서 만든것치고 훌륭해. 근데 여기선 아무도 안 쓰는거야?
충분히 훌륭하지 않아서 그래. 하고 오소리씨는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소리씨는 자기가 훌륭한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비버씨가 자길 인정해주지 않는거라고 생각했어요. 딸이 자라 스스로 땅을 파고 열매를 따올 수 있게 되자 오소리씨는 더욱 많은 시간을 그릇을 만드는데 쏟았습니다. 비버씨가 더 훌륭해 지는 동안 말이죠 결국 주변 숲 전체를 통틀어서도 제일 근면하고 훌륭한 동물이 되었죠.

오소리씨가 흰 흙을 가지러 구릉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황야의 문턱에서 쓰러졌을때도 비버씨는 댐을 짓고 있었죠. 소식을 들은 오소리씨의 딸이 오소리씨의 뼈를 오소리씨가 마지막으로 만든 그릇에 담아돌아왔죠.
뚜껑이 있는 항아리였어요 아주 특이한 작품이었죠. 그리고 작은 오소리씨는 이제 오소리씨와 완전히 똑같이 닮아 꼭 오소리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비버씨는 바쁜 일과 중에 부러 동굴에 찾아와 작은 오소리씨에게 말했어요. 알다시피 너희 엄마와 나는 사촌이다. 하지만 너희 엄마는 훌륭한 손재주를 썩혔어. 더 건실한 일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말야.
작은 오소리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비버씨는 앞발을 핥다가 말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너의 친척이다 일자리가 필요하면 언제라도 찾아와라. 하지만 작은 오소리씨는 비버를 찾아가지 않았어요 대신 그 많던 그릇을 숲 속의 동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죠. 나눠주고 남은 것들은 모두 팔렸습니다.
장돌뱅이가 와서 며칠에 걸쳐서 실고 갔죠. 남은 것은 엄마 오소리씨의 뼈가 든 뚜껑이 달린 항아리 뿐이었어요. 작은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들진 않았어요. 하지만 댐에서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미도 독수리도 느티나무도 알듯이 그 해 정말로 큰 홍수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손을 쓸수 없었죠. 비가 열흘 밤낮 동안 내렸어요. 해가 지나 더 크고 훌륭해졌던 비버씨의 댐이...결국엔 무너졌죠. 곡식 창고가 물이 잠겼어요. 숲의 반이, 아니 숲의 전부가 물에 잠겼죠 아무 것도 젖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파종을 위해 남겨놓은 것들도 모두 물이 묻어 썩기 시작했어요. 동물들은 아직 젖지 않은 나무 위에 올라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닷새가 지난 후였죠.

강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댐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개척한 공터는 대부분 다시 물에 잠겼고 숲은 아주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죠. 적어도 동물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모든 동물들. 살아남은 동물들이 겨우 해가 난 숲의 공터에 모였어요. 먹을수 있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파종할 씨앗에 물이 찬게 문제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습니다.

내가...인간 마을에 가서 씨앗을 구해오겠다. 곰씨가 입을 열자 모두 반대합니다. 여우씨가 말합니다. 무모한 짓 하지마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라. 털이 없어서 우릴 질투해 가죽을 벗기려고 드는 놈들이라고.
비버씨는 가슴이 타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다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았습니다. 인간 마을에 가야하는건 나야. 내 댐이 무너져서 이렇게 된거야. 내가 꼭 씨앗을 구해오겠어. 아직도 숲의 가장 훌륭한 동물이었던 비버씨가 그렇게 얘기하자 동물들은 모두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라 망설였습니다.

그 때 풀 숲에서 작은 오소리씨가 나타났습니다. 뚜껑달린 항아리를 안은채로 작은 오소리씨도 물에 휩쓸렸었는지 물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로 말했습니다. 씨앗을 구하러 가실 필요 없어요. 비가 오기 전에 제가 준비해둔게 있어요.작은 오소리씨는 뚜껑을 열어, 비버씨 앞의 겨우 마르기 시작한 땅에 항아리 살짝 기울입니다.
너..어머니의 뼈를...하고 놀란 비버씨 앞에 떨어진건

씨앗들이었습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숲에 비가 심상치 않게 오자 어머니 대신 씨앗을 넣어둔 것 입니다. 오소리씨의 뼈는 비에 씻겨 나갔지만 타타탁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젖지 않은 씨앗들이 공터에 떨어집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분명 어머니도 이걸 바라셨을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버씨는, 비버씨는 가만히 씨앗을 봅니다.


작년 겨울, 나는 러닝 코스라도 찾아볼까 싶어서 가벼운 차림으로 집 근처 산책을 나갔다. 내가 사는 곳은 수도권의 공업 도시로 넓은 산업 연구 단지와 그 기반 시설로 몇천 단위의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라 어디를 돌아다녀도 길게 달릴 만한 곳은 없었다. 크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도 주변은 그래도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3킬로미터 정도의 직선 루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후보지를 몇 군데 선정하고 나가보았던 것인데. 이내 나는 길 주변을 까맣게 채운 까마귀들에 질려서, 아니 겁먹고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까마귀들의 겨울 도래지가 된 것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겨울철 이 지역을 찾아와 산과 들에서 겨울을 지내던 까마귀가 도심지나 국도로 모여든 것은 정말 최근의 일로, 이 도시의 배경지였던 전답과 야지가 차례차례 개발되어 아파트가 된 탓에 밤에 안전하게 보낼 곳이 없어진 까마귀 떼들이 나머지 도심지로 몰려든 것이다. 송전선들이 집중되는 교통의 요지일수록 (전깃줄이 많아) 말 그대로 까맣게 까마귀로 가득해서 저녁 나절이 되면 히치콕도 질릴 정도의 까마귀떼가 몰려들고, 땅에는 일부러 뿌려도 어려울 정도로 하얗게 새똥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도 이런 상황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파트 단지와 회사로 이어지는 좁은 루트만 반복해서 돌아다니고 있어서 이 정도로 심각한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전깃줄에 매달려 있는 까마귀 떼를 보고 거의 질려 도망을 갔고. 나 말고도 다른 행인들이 파랗게 질려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까마귀라고 하면 반포지효라든가 오비이락이라든가. 여러가지 관련된 사자 성어도 많지만 무수하게 몰려있는 까마귀들에 대해서 표현한 문장은 찾기가 어렵다. 지금 그나마 생각이 나는 수도 많은 까마귀에 대한 문장으로는 ‘三千世界の鴉を殺し、主と添寝がしてみたい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이고, 서방님과 늦잠을 자고싶구나)’ 라는 일본의 도도이츠 (都々逸、남녀들 사이의 사랑을 노래하던 속곡)가 있다. 이는 출처가 정확하지 않으나 19세기 일본 양이지사였던 다카스키 신사쿠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해석하면 까마귀가 우는 아침이 되면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실테니, 삼천세계 즉 사바세계의 까마귀를 모두 죽여 아침이 오지 않게해 당신과 함께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구나...라는 내용이다.
한국에서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유명한데. 하여간 여성의 깊은 애정과 그 깊은 애정을 실현하는 방식의 과격함으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왜 하필 까마귀이냐 하면, 사실 까마귀는 아침에 우는 새로 유명해서지만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사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결성 때문에 저 위의 도도이츠에서 한 발짝 더 나간 해석도 있는데.
고전 라쿠고로 유명한 산마이키쇼三枚起請라는 이야기의 베리에이션 중 하나로. 대략 내용을 설명하자면 남자손님과 쉽게 결혼 약속을 하는 기녀를 둘러싸고 그 기녀가 손님 중 세명과 결혼 약속을 한 걸 알게 된 남자들의 호들갑을 떠는 것이 이 라쿠고의 주요 스토리인데 앞 부분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다 빼고 까마귀에 대한 것만 설명하자면.
마지막 부분 드디어 기녀가 신의가 없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며 ‘너같은 신의가 없는 사람들 때문에 (계약과 신의를 담당하는) 우에노 신사의 까마귀가 한 번에 세마리씩 떨어져 죽는 것이다!’라고 말하자 기녀는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세상의 까마귀를 모두 죽이고 싶은데요?’ ‘아니 까마귀를 죽여서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럼 느긋하게, 아침잠을 자보게요’ 라고 대답하고 라쿠고는 끝이난다.
아까 위에서 설명했던 유명한 도도이츠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비틀어서 남자가 다 뭐냐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느긋한 아침잠이다 라는 기세 좋은 대답으로 끝내는 셈이다.

근본적으로 이 라쿠고에서 나오는 키쇼라는 것이 기녀가 기녀에서 은퇴했을 때 누군가에게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문서, 요는 키쇼를 세 장이나 썼다고 못난 남자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세 장을 쓰든 네 장을 쓰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종이 한 장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근성이 마음에 안든디. 나는 원본의 도도이츠보다 이 라쿠고에서의 주인공이 하는 저 마지막 대사를 몹시 좋아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까마귀는 억울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인간인데 우에노의 까마귀들이 떨어져 죽어야 하는가. 게다가 인간이 늦잠 좀 자겠다고 (까마귀가 좀 시끄럽기로서니) 그걸 다 죽이겠다고 하다니. 삼천세계이든 우에노든 까마귀가 떼죽음을 당하는 것은 둘 다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동네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까마귀의 서식지에 아파트를 잔뜩 지어버리니 도심지로 까마귀들이 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 분연히 주먹을 쥐고 역시 까마귀는 나쁘지 않다 보통은 인간이 나쁘다. 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지만 국도변 보도를 완전히 하얗게 물들인 까마귀 똥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걸 물로 청소 하고 있는 자영업자 분들을 보면 아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고 인간에게도 나름의 억울한 부분이 있어! 하는 생각이 들고 최대한 까마귀가 없는 도로로만 다녀야겠다고 결심한다.

어느 날 나는 오늘에야 말로 새로운 루트를 찾아볼까 싶어서 잘 가지 않는 길로 가보다가 국도 곁 야지가 그대로 드러나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와 쓰레기들만 가득한 구석의 어느 국도 변에서 연석과 트럭 사이에 까마귀 두 마리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주변을 찾아보았고 그 두마리 주변엔 하얗게 똥이 떨어져 있었지만 어디에도 까마귀 떼는 보이지 않았다.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무슨 연유에 떨어져 죽은 것이리라. 묻어주기라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땅이라도 팔 것이 있나 야지를 둘러보는데, 분명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까마귀가 아니 까마귀 떼가 야지 근처 나무 근처 어두운 곳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나는 쓰러진 까마귀를, 그리고 저 멀리의 까마귀 떼를 번갈아가며 보다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저 땅에 떨어진 까마귀는 어떤 이유로, 땅에 떨어지고 만 것 일까. 누가 어떤 인간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떨어진 것인가. 나는 급하게 자리를 비우고. 까마귀들은 이번만은 봐주겠다는 듯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20년 12월의 글이다.

아니 그러니까 무려 두달을 기다려서 애플워치가 왔다. 10월 중순 쯤의 내 메모를 슬쩍 들여다보면 “연휴 중 변덕으로 웨어러블 기기를 하나 샀다. 하나도 필요 없는 비싼 전자 제품을 또 산 것이다.”라고 써있는데, 아 맙소사 변덕으로 산 애플워치를 이렇게 오래 기다려서 받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 동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하루에 한 번은 꼭 애플 공식 홈페이지에 들러서 로그인을 했고. 자기 구매 내역을 확인하려면 꼭 두 번 로그인을 해야하게 만든 애플 홈페이지의 구조에 치를 떨었다.

마스크를 재빨리 내려서 페이스 아이디로 로그인을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할 동안 내 기대치는 최고조에 이르렀고 두근두근 하는 마음에 구매내역을 확인하면. 항상 내 애플워치는 <준비 중>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대실망쇼에 목숨이 좀 줄었을 지도 모른다. 분명 내분비계 어딘가에 악영향을 미쳤을거라고.

그래서 매일매일 이걸 어느 시점에서 취소 하는게 가장 현명한 행동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가장 현명한 것은 이걸 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만...

그런거 있지 않나. 정말 필요한거냐 아니면 갖고 싶었던 거냐 하고 물어보면 별로 할 말은 없다. 양 쪽 다 아니기 때문이다. 변명조차 할 수 없다. 몇 년 간 사야지 사야지 하다가 결국 산 거지만 이걸 가지고 도대체 뭘 하지 싶다. 역시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이게 만드는 애플의 마케팅 팀의 승리겠지. 이걸로 뭘 해야할지도 모르면서 사게 만들다니.

순순히 사실을 얘기하자면 카드 결제를 하고 난 다음, 배송 예정일을 봤을 때도 주문일로부터 6~8주가 나왔다. 방망이 깎는 노인에게 8인 식탁을 부탁해도 저것보단 빨리 도착 할 것 같았지만 당시 나는 거꾸로 좀 안심이 됐다. 그 동안 좀 갖고 싶은 생각이 없으면 구매를 취소해도 될 것이고, 8주는 충동구매를 반성하고 스스로 뺨을 두대 정도 때린 다음 카드 결제를 취소한 후 안심하기 까지 충분한 시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숨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는 이번이 웨어러블 기기를 산 처음이 아니다. 그것고 굉장한 돈 낭비였는데.
순토의 카일라쉬라는 모델로 발매 당시 120만원 쯤. 정확히는 웨어러블이 아니라 아웃도어용으로 유명한 메이커에서 스마트폰 연동도 되는 모델을 발매한 것인데. 코퍼 모델의 간지에 반한 데다가, “특정한 위치를 입력하면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그곳까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먼지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 불명의 기능에 마음을 빼앗겨 그만 사고 말았다. 너무 인문계스러운 프로모션 포인트 아닌가요. 내가 어디에 있든 네가 있는 위치를 등록해 두면 너와 나의 방향과 거리를 알 수 있어...하고...

네 물론 거의 쓰지 않았고 방 찬장에 그대로 있습니다. 처음엔 여행 갈 때 마다 차고 나갔는데, 생각해보면 제가 여행을 가는게 무슨 오지도 아니고...그냥 일본이나 하여간 아시아 어딘가라서 딱히 방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물론 툼레이더 리부트 작에선 고대 히미코국의 유적이라면서 일본의 오지가 나오지만 제 말을 믿으세요 일본에 그런 오지는 없습니다. 식생도 우리나라랑 거의 같아서 방향을 몰라도 휘휘 동서남북 한 번 돌아보면 방향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 같죠? 제가 홋카이도를 몇번이나 갔다고 생각하시는거에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시계를 차고 다니는 습관이 없는 사람이 이틀에 한 번은 충전해줘야 하는. 그리고 기능은 시간을 알려주는 것과 이동루트를 트랙킹해주는 것 밖에 없는 물건을 차고 다닐리가 없었다...(물론 다른 기능도 자잘하게 많았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쓰는 건 그 정도였습니다)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플워치를 산 건 실수구만 싶긴 한데. 심지어 내가 샀다는 얘길 뒤늦게 듣고 구매버튼을 누른 친구가 나보다 3주 먼저 애플워치를 받았다. 3주 먼저 라기 보다 그 친구는 그냥 일주일 동안 배송이 빠른 다른 쇼핑몰을 쳐다보고 있다가 재고가 뜬 걸 보고 바로 주문을 했고 그 다음날 애플워치를 받았다. 100% 재생 알루미늄이라는 이유로 조금 장난감 느낌이 나는 블루 컬러를 산 나와는 다르게 친구는 스테인레스를 샀다. 과연...싶을 정도로 예쁘고 깔끔한 디자인이었으며. 나는 지금이야 말로 구매를 취소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과 아 억울해 진짜 이거 올 때 까지 기다린다!!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취소를 정말로 누르려던 날, DHL의 배송 번호가 떴다. 그러고도 약 7일간 추적 루트에 아무것도 뜨지 않아. DHL마저 나를 속이려는 건가 (저는 일 관련으로 DHL에 관해서는 무분별한 신뢰를 주고 있습니다)하고 화가 날 때 쯤에, 갑자기 회사로 DHL트럭이 찾아와 시계를 받았습니다. 어...감사합니다.

유용하냐고요? 어...일단 이제와서 이런 얘기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나는 시간 감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기차타고 다닐때 익힌 능력인데 대체적으로 지금 몇시 몇분인지를 가늠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원래부터 시계가 거의 필요 없습니다. 몇분이 지났는지도 대충 안다고요. 그래서 시계 페이스는 정보값이 제일 적은 사람 얼굴을 그래피티로 해둔 것을 하고있습니다. 귀여워요 누르면 조금씩 변한다는 점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쓰는 기능은 운동기록 기능과 아침에 깨워주는 알람 기능. 그리고 아이폰이 어디있는지 모를 때 커다란 소리를 내서 알려주는 기능 정도입니다. 후회하고 있느냐 하면 아니 뭐 어차피 산거고 귀엽고 해서 딱히 싫진 않습니다.

어쨌든 제 워치는 6세대에 파란색 알루미늄. 파란색 솔라루프를 하고 있습니다. 제 손목에 차면 정말 쪼끄마하답니다.

사람이란 원래 변덕스럽고 뭔가 실수를 하는 존재니까요. 실수를 함으로서 뭔가 고민도 해보고 수습도 해보면서 성장하는게 아닐까 한다니까요. 그래서 이번 애플워치 구매도 긍정적으로...잠깐만 어떻게든 그럴듯 하게 수습을 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20년 12월의 글이다.

기억은 어떤 순간을 머리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에 일어날 일을 기억해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일어날 일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당신은 어느날 밤 나에게 인사를 하고 급하게 사거리를 건너서 가버린다. 나는 몇 번이나 당신이 길을 건너는 것을 지켜보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신의 뒷 모습을 처음 본 밤의 일이다.

밤은 차갑고 미지근 하다. 공기는 낮게 깔렸고 나는 오늘의 내일에 비가 내릴 것을 안다. 우리는 내일도 만날 것이고 나는 또 똑같은 뒷모습을 보내고 혼자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실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날 밤은 내가 당신의 뒷모습을 보는 첫번째 날이다. 나는 내가 신은 나이키의 콧등을 보고 번화가의 진열장을 쳐다본다. 그 때 내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당신이 떠나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척 하고 어서 돌아가 오늘 마저 읽지 못한 책을 더 읽어야지 하는 표정을 하고 있다.

당신은 나에게서 도망치는 것 처럼 가버리고,
나는 당신이 가버리는 장면에서 등을 돌려 그 가버리는 모습을 끝까지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당신이 가버리는 장면에서 등을 돌려 그 가버리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쳐다보려고 애쓴다.

혹시 당신이 나를 한 번 더 쳐다보지 않았을까 하고 바란다.
내가 원한다면 나는 당신이 내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당신은 내 쪽을 쳐다보지 않았고 나 또한 당신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기억 속의 장면을 삼키기 위해 노래를 떠올린다.

- 해가 반짝이는 날 구름도 말끔하게 사라져버린 공기마저 달콤한 그날.
- 당신 나에게 그 거리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그 거리로 갈 수 있죠?

실제로 그러지 않았음에도 그 장면의 마지막에 노래를 부르는 나를 삽입한다. 꼭 그렇게 하면 시간을 되돌려 길을 건너는 당신에게 내 노래를 들려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나는 술집의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미 술에 얼큰하게 취해 얼굴이 빨개진 나는 안 좋은 버릇으로 먹지도 않을 안주를 뒤적거리며 이것도 저것도 더 시켜볼까 하고 생각한다. 테이블 건넛편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상대도 이미 한참 취해서 더 이상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눈치이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들라크루와 그리고 쇼팽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니 이젠 음악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 겨우겨우 회사원이나 하고 있는 제가 예술이 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건 주제넘은 일이지만

이라고 말을 꺼내면서 나는 주제넘게 예술론에 대해서 길고 지루한 의견을 말한다. 사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삶은 콩을 좀 더 시킬까였으면서, 상대의 눈치까지 보며 혹시라도 틀린말을 하게 될까봐 고리타분한 고전 독일의 미학론보다 하나도 나을게 없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칸트의 미학론이었던가 괴테의 미학론이었을까. 학교에서 배운 애매모호한 그리고 이제와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렇게 상대가 내 말에 질려하고도 남았겠지 하고 내심 안심하는 시점까지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상대가 하는 말을 놓친다.

네 뭐라고요? 라고 다시 물어본다. 상대는 약간 풀린 혀로 그럼 님이 생각하는 예술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뭐냐고요? 라고 다시 말해준다. 당황한 나는 너무 바보 같은 말투로 더 바보 같은 대답을 한다.

- 시간을 뛰어넘는 것이요.

...

녹음 된 파일을 본다. 200X년 X월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녹음 파일은 여러 개이고 젊은 나의 목소리이다. 건방지고 오만하고 자신에 차있으며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서,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어딘가 운동장이나 역의 뒤 구석에서 스스로만 납득 할 수 있는 이론들을 녹음하곤 했다. 때때로 알바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새벽이 흐리게 시작되는 그런 때면 감정에 복받쳐서 더욱 아무 말이나 하곤 했다.

그 중에 하나를 들어본다. 녹음된 상태는 좋지 않고 파일의 시작부분에 차가 다가왔다 멀어지는 소리가 같이 녹음되어 있다. 나는 이 녹음 파일이 어디서, 왜 녹음된 건지 떠올리려고 한다. 목소리는 약간 술에 취한 것 같고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 모든 이야기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불멸이란 결국 죽음에 대한 복선이다. 가장 유명한 불멸자인 아킬레우스가 발뒤꿈치의 약점을 제외하고 무적의 신체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결국 그 약점으로 죽을 것을 의미한다...

200X년의 나는 스스로가 아니면 아무도 듣지 않을 녹음 파일에 약 10분에 걸쳐서 결락과 제한이 만들어내는 불멸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이 불멸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두려워해야한다. 우리가 가진 영혼이 정말 불멸한다면 그 불멸하는 영혼은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후 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불멸성이라는 철학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해야한다.

나는 거기까지 듣고 녹음된 파일을 닫는다.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녹음되어 있는지 기억 해낸다. 나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이 파일을 지울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둘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

여덟? 아홉살때 쯤의 나. 아버지는 서른 다섯 쯤이다. 아버지와 나는 저녁을 먹고 있다. 생선을 먹던 그는 나에게 생선을 먹으면서 열역학의 제 1법칙에 대해서 설명한다.

- 쉽게 말하자면 네가 지금 먹고있는 생선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는 얘기야, 질량 보존의 법칙에서 모든 질량은 형태만 바꿔서 존재한다고 하지...

아버지는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만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내가 열역학을 이해하길 기대하며 한참을 설명한다.

- 젓가락으로 생선의 살을 발라내면...이 생선의 살은, 네 안에서 네 몸이 되고 또 에너지가 되어 운동을 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네 몸도 다른 형태로 바뀌어서 다른게 되는거야 어느 것도 사라지는 것은 없고 순환하게 된다.

- 지금 내가 말한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돼?
하고 아버지는 묻는다.

서른이 넘은 나는 대답한다.
관측하는 우리가 닫힌 계 안에 있으며 우리는 순환하는 것이 아닌 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여 결국은 더 낮은 곳으로 사라진다는거죠.
하지만 아버지는 서른이 넘은 나의 대답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묻는다.

- 이해가 돼? 세상에 어느 것도 사라지는 것은 없는거야.

아버지를 쳐다보며, 항상 과학보다 신학에 더 관심이 많았던 어린 나는 우물쭈물하다 그럼 우리의 영혼은 나중에 어디로 가요? 하고 묻는다. 불교도인 아버지는 무슨 생각인지

- 우리에겐 전생도 영혼도 없어
라고 대답한다.

...

이 우주는 불멸이 아니기에 약점도 없는 신, 브라흐마의 하루이다.
그의 하루는 길고 긴 계절로 나뉘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의 하루를 계절로 나누고 또 계절로 나눈 찰나와 같은 나눈 짧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라고들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이름은 칼리유가이며 우리는 불화와 불만의 아이들이다. 정당한 댓가와 정의는 이 시대와 조금도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당함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고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시대가 불의한 시대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데서 연유한다.
우리는 얼마나 하찮고 고귀한지 마음과 생각을 다하여 우리의 삶과 칼리유가의 시대를 벗어나 신의 하루를 세려고든다.

나는 때때로 그의 하루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주 전체를 하루동안 살아가는 그와 달리, 나는 겨울이 삶의 전부인 것 처럼 살아간다.
나는 겨울에 태어나 첫번째 기억조차 겨울에 대한 것이다. 모든 일들은 겨울에 일어난 일이고 나의 평생은 겨울에 걸쳐있다. 그런 시간 밀도의 차이는 내가 그를 인식하기도 쉽지 않게 만든다. 해를 볼 수 없을 촛불에게 내일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신의 하루는 인간에겐 의문의 덩어리 일 뿐이다.
내가 그에게 질문을 힌다고 가정할때 물어볼 것은 정해져있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보다 질문을 하고 대답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다 가더라도 신의 하루는 지루할 정도로 오래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들은 고스란히 신에게 전달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가 우리의 질문에 생각을 하고 대답을 할 때 까지 우리가 기다리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 시간을 가늠 해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의 대답이 도착했을 때 나는 연못 안의 얼어붙은 물고기이거나 또는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못한 노래일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겠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

오늘 아침 일어나 긴 바지를 입고 집 밖에 나왔더니 발치에 낙엽이 수도 없이 떨어졌다. 햇볕이 쨍해 모자 위에 후드를 쓰고도 눈이 부시지 않는 그늘로 걸었더니 찬 기운이 안개처럼 깔렸다. 평소보다 아침의 해가 더 낮구나 정말 겨울이 온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해가 반짝이는 날 구름도 말끔하게 사라져버린 공기마저 달콤한 그날.
- 당신 나에게 그 거리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그 거리로 갈 수 있죠?

나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기억을 떠올린다. 내가 아는 한 나는 손을 내밀었고 당신은 그 손을 잡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손은 서늘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그 감촉과 당신의 체온은 봄날의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나는, 나의 운명은 분명.

20년 11월의 글이다.

21세기 대중의 특징적인 경향 중 하나는, 믿음을 먼저 결정하고 그 믿음에 따라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행동 방식이다. 대중이 무엇을 믿고 싶든지 간에 그들은 인터넷에서 그 근거를 찾아낼 수 있고, 모두 자신의 주장만이 사실이라고 주장 할 수 있게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이런 시대를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이 시대를 예언한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실”을 인식하는 현대인의 현실인식 체제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내린 듯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내 말이 맞아? 하고 불안하게 질문을 하는 것 뿐이다.

<여행의 핑계>

이것은 2020년 1월의 캄보디아 여행기이다. 모든 문단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나는 정말로 쓰고 싶은 것을 쓰지 못하고 여기에 그 흔적만 남겨둔다.
애초에 이 여행기는 캄보디아의 씨엠립을 거쳐 캄보디아 최북단의 유적인 쁘레아 위히어를 거쳐 육로를 통해 수린, 그리고 태국 북단의 우돈타니 또는 치앙마이로 가는 긴 여정에 대해서 작성될 예정이었다.
다만 씨엠립 일정만 결정한 채로 우돈타니는 너무 심한가 싶어서 마지막 도착지로 치앙마이를 결정하고 나서. 바로 옆 부서의 신입사원 분이 거의 같은 일정으로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차마 치앙마이로 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원래 8박 9일의 일정은 4박 6일의 일정으로 바뀌었고 나는 모든 일정을 씨엠립에만 있게 되었다.

<가을은 남자와 힌두교의 계절>

씨엠립에 오려던 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한 10년 전 쯤 부터 친구들에게 가을만 되면 “가을은 남자와 힌두교의 계절”이라며 앙코르왓에 가자고 꼬셨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내 계획은 간단했다. 우리 같이 앙코르왓에 가서 사원을 보자 ==> 끝. 그 외에 디테일은 없다. 굳이 앙코르왓이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가을인 이유도 그냥 추석때 심심할까봐...정도의 이유였다. 내가 가고 싶지만 같이 누가 갔으면 좋겠어... 이 정도의 생각으로 여행을 꼬셔봤자 잘 될 리가 없다.

마침 친구들 사이의 리더십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던 나는 가을 여행에 대해 단체 메신져 방에서 언급할 때 마다 “네가 계획 다 짜면 휴가 봐서 같이 가든가 갈게” “응 그럼 나도 너 계획 봐서” “응 그럼 나도” 정도의 리액션 밖에 못 받았고 매년 그게 되풀이 되었다. 10년 동안 앙코르왓은 꿈도 꾸지 못한 채로 계획만 어딘가 폴더에 보관 된 채로 시간만 가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내 여행은 변덕이 전부이다.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는데엔 많은 것이 필요 없다. 녹색의 습지를 가로지르는 기차나 수면 위에 솟아오른 앙상한 나무가지의 이미지 같은 것 하나면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는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는 캄보디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없었다. 도착을 프놈펜이 아니라 씨엠립 공항으로 해야하는 것도 몰랐으니까.

<심야의 도착>

천에서 씨엠립으로 가는 비행기는 심야에 있다. 대신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보다도, 프놈펜으로 가는 비행기보다도 훨씬 싸다. 비행기 안에는 단체 여행객들이 가득하다. 예전같지 않다고 했는데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걸까. 비행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도착비자를 받기 위해 달려간다. 나는 사전에 인터넷에서 비자를 받아두었다. 캄보디아의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저렇게 링크를 타고 가면 받을 수 있는데, 구글로 검색하다보면 업자에게 연결되어 아주 비싼 값에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이제 우리 현대인에게 중요한 것은 구글로 검색을 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공항을 나오니 완전히 까만 밤이었다. 심야의 비행기를 타기 위해 리조트에 차를 부탁해두었다. 사륜구동의 튼튼하고 승차감이 안 좋은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꼭 저승을 빠져나가는 길처럼 길은 까맣고 숲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다. 군데 군데 전구를 켜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숲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서웠다.

도착한 리조트는 더욱 무서웠다. 사람이 아무도 없고 마지막 체크인인 나를 기다려주기 위해 한 명의 당번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골길 (몰랐던 일이지만 씨엠립에는 포장된 도로가 많지 않았다) 주변의 리조트인 이 곳은, 나무와 작은 연못과 유수풀이 있는 28동 정도의 작은 마을 같은 곳이다. 새벽 1시에 가까운 시간이긴 했지만 짐을 들어주겠다는 걸 거절하고 랏지로 들어가며 너무 조용한 나머지 나 말고 손님이 있기는 한 걸까 하고 생각했다. 겁을 먹은 나는 문을 잠그고 캐리어로 문을 막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 위에는 “관대함은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라고 써있는 팜플렛이 놓여있었다. 일종의 동물들이 나오는 우화였는데, 말하자면 택시기사들과 호텔직원 등 당신이 마주치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팁을 마구 주지 말라는 경고였던 것 같다. 나는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첫째 날의 클라이막스는 고양이에게 밥을 준 것>

침에 본 리조트는 밤에 볼 때 보다 훨씬 좋은 곳이었다. 조식 시간에 맞춰서 나와 과일과 빵을 먹었다. 거짓말이다 과일과 빵과 계란 후라이와 캄보디아식 쇠고기 국수와 버터를 먹었다 태국 음식에 비하면 캄보디아 음식은 별로라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가 태국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라임을 만진 손에서 좋은 냄새가 나서 하루 종일 이 냄새가 나길 바랐다.

리조트 앞에서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닐 뚝뚝 기사를 소개 받고 - 꼭 태국 영화에 악당으로 나올 것 같이 생긴 사람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둘째 날 나를 내버려두고 어딘가로 사라졌고 덕분에 둘째 날 여행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 매표소로 갔다. 앙코르왓 유적군의 매표소에서 끊을 수 있는 통합 권은 2020년부터 거의 모든 유적군에 적용이 되도록 바뀌었는데. 전에는 적용이 되지 않던 뱅 밀리아와 반테이 스레이도 통합 권으로 입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매표소는 5시부터 문을 여는데 그것은 아침에 표를 끊고 일찍 앙코르왓의 해돋이를 보러 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표의 앞에는 표를 산 사람의 얼굴과 일련번호가 있고 뒤에는 1부터 31일까지의 숫자가 찍혀 있어서 유적군에 입장을 할 때 펀처로 표시를 한다. 그러니까 13이라는 숫자에 표시를 하면 1월 13일에 입장을 했다는 표시인 것이다. 일일 당의 입장료를 나눠서 계산하보면 당연히 하루 입장권 보단 삼일 입장권이 삼일 입장권 보단 칠일 입장권이 싸다. 길 곳곳에 체크포인트가 있어서 공무원들(아마도 공무원들)이 서서 표를 계속해서 검사한다.

생각하기에 좀 이름 시간인 7시쯤에 유적군으로 들어갔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유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앙코르왓 유적군의 남문에는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서 사진을 찍는데 내가 탄 툭툭 기사는 멈춰달라고 하기 전에 엄청난 속도로 남문을 지나쳐가버렸다. 아 툭툭 기사분들 대단하네 하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나중에 와서 찍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것이 하나 나중에 그럴 기회 따윈 없었고 둘째 이 기사 분만 이렇게 툭툭을 빨리 모는거였다. 어떤 기사도 이 정도로 빠르게 툭툭을 몰지 않았고 이 기사가 모는 툭툭은 어떤 툭툭도 추월하지 못했다. 무의미한 장점이랄까...

나는 이 여행기에는 사원에 대해서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한다. 사원에 대한 이야기만 따로 떼어내서 다른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 여행기와 사원에 대한 글은 원래 하나의 글이었고 나는 가느다라한 접합 부분만을 이 여행기에 남기고 글을 통채로 떼어냈다. 한달이 넘게 이 여행기를 끝내지 못하다 보니 왜 그런 짓을 했지 하는 후회를 이백번째 하고 있지만 뭐 어떤가. 씨엠립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사원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한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할 이야기를 내가 굳이 또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그에 대해서 한 편의 글을 썼는데 말이다.

하여간 앙코르왓 유적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기에, 사람들이 오기 좋지 않은 때인데도 그렇다. 호텔 예약 사이트를 찾아보니 예약률이 30%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100%면 어떻게 되는거지 하는 생각과 도대체 왜 30%밖에 안되는 건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앙코르왓 유적군의 유적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역사를 잃어버리고만 도시답게, 우리가 이 도시에 대해서 알고있는 것은 너무 부족하고. 하나 같이 아름다운 유적들이지만 오랫동안 똑같은 유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왜 이걸 이렇게까지 보고 있어야 하는지 의심이 든다. 먼지로 가득찬 길을 지나서 아름다운 사원 앞에 도착했더니 단체 관광객들이 우글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는 것도 짜치는 이유이다. 흙길이 아니면 돌 바닥이기 때문에 발목과 무릎이 아플 정도인데 이렇게 하루 종일 유적을 보는 것 말고는 뭐가 있을까 고민이 든다. 열심히 보지 않으면 아쉬운데 열심히 보고 있으면 왜 이걸 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신기한 곳이다.
믿어달라. 나는 한국의 30대 회사원이다. 그것도 해외영업에서 일하고 있다 그것은 인류 1%수준의 실력으로 허황되고 말도 안되는 말을 숫자 까지 포함해가며 쓸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가상의 친구는 없지만 가상의 매출은 있는(그것도 엄청 많이) 있는 사나이이다. 하지만 나는 진정성을 갖고 짜쳤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운 장소는 많았다. 앙코르왓의 사원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다거나 창가에서 어색한 포즈를 취하는 것이랑은 다른 요소들이다. 세월이 켜켜히 쌓여 만들어놓은 그 모든 것들과 이제는 잃어버린 영광들, 그리고 신에게 서원했던 그 마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공간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놓고 말하자면 아무리 아름다운 공간이라고 해도 애초에 사람이 수만명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예술적인 감동을 느끼는 것은 돈을 받고 일하는 프로의 영역이다. 나같은 아마추어는 짜낼 수 있는게 별로 없어서 그냥 짜치는 걸 짜친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첫째 날에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것은 스라스랑이었다. 그냥 아무 것도 없는 저수지이고 그 주변에는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있고 정말 많은 개들이 낮잠을 자고 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와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보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리 할 수가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프레룹에 올라 한 시간을 넘게 해가 지는 걸 기다렸다. 생각해보면 앙코르와트에 해가 지는 것보다 프레룹에 석양이 닿는 것을 보는 것이, 그리고 한 시간이 넘게 해가 지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더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리조트로 돌아오고서, 나는 별다른 의욕이 없어서 리조트에서 저녁을 먹었다 새끼 고양이 몇마리가 내 발치에 와서 밥을 얻어먹었다. 농담 소재로 써먹으려고 북한 음식점에 가보려고 했지만 두 군데 다 닫았다고 한다. 맛없고 비싼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야 하고 생각은 했지만 한편 억울한 감이 있었다. 이래서야 여행에 왔다고 할 수 있나. 여행은 돌발적이고 웃기고 진짜 아무 짓이나 해야 여행이 아닌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에 웃기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친구들은 너무 실망했지만 나도 내가 이렇게 온건하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못했다. 방에서 프런트에 전화를 거니 전화가 고장나 있었다. 맙소사 업자를 불렀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프런트 사람의 표정을 보니 분명 며칠 정도 고장난 게 아닌 것 같았다.

<둘째 날의 클라이막스는 너무 빨리 왔고>

앙코르왓에서 보는 일출은 어쨌거나 씨엠립여행의 클라이막스이다. 현지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서 아침 5시쯤 나왔지만 후에 알게 된 것은 앙코르왓의 두 개의 연못 중 하나가 공사 중이어서 어차피 모두가 우글우글 한 곳에 모여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딱히 일찍 가지 않아도 뷰는 비슷했다는 것이다.
딱 콘서트를 끝나고 택시를 잡아 집에 가려고 하는 사람의 수만큼 사람들이 모여서 앙코르왓의 앞 뜰을 향해간다. 다들 자기네 모국어로 너무 어두워 앞이 안 보여 하고 투덜거린다. 앙코르왓만은 다른 유적군보다 입장 시간이 빠르다. 해돋이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앙코르왓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 쪽 연못의 왼쪽 물가에 자리를 잡았다. 풀숲이라 가렵고 축축했다. 한시간을 넘게 기다리며 사원의 그림자와 숲의 윤곽 위로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해가 뜬 직후 사원에 입장 할 수 있는데 가이드 북에 “해가 뜬 이후엔 앙코르왓엔 사람이 적으니 그 때 보세요”라고 말한게 생각나서 앙코르왓을 관람했다. 이게 사람이 없는거라고? 꼭 토요일의 신세계 경기점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사람이 없는거였다. 앙코르왓 꼭대기 층의 도서관 건물 구석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그곳만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 때 인드라의 신상이었던 것에 옷을 입히고 절을 하고 있다. 서양인들이 나타나 이것이 붓다의 상이냐고 나에게 묻는다. 나는 쓰고 있던 양키즈 모자를 보여주며 미안해 나 퀸즈에서 왔어. 하고 악수를 청하고 가버린다. 속은 것 같진 않지만...

그리고 앞에서 썼지만 앙코르왓을 나와보니 나를 데리고 다음 지역으로 갈 뚝뚝기사가 사라졌다. 한시간 동안 그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기분이 나빠질대로 나빠진 나에게 다른 뚝뚝기사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 이래서 리조트에서 관대함은 좋은 것만이 아니다 이런 우화를 갖다놓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이 넘게 본인 기사를 찾고 있던 내가 멍청해보였던 걸까. 타프롬 사원에 갔다가 호텔로 돌아가는데 20불을 부르는 기사를 보고 화가 나서, 여행 중에는 절대로 튀어나오지 않는 내면의 회사원이 튀어나왔다. 두 명을 경쟁시켜서 10불로 깎고 타프롬에 갔다가 호텔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10불도 아까웠지만 팁으로 2불을 더 챙겨주고 없어진 기사를 찾아보았다. 그의 동료들 말로는 그가 앙코르왓의 주차장에 있다고 한다. 나는 기가 차서 말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일단 앙코르왓까지 데리고 간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동료들에게 10불을 건네주고는 전해줘, 라고 말하고 숙소로 와버렸다. 가난한 사람의 수고비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에게 전해졌는지는 내 알바 아니었다.

오후에는 좀 쉬다가 다시 사원을 보러 가거나 박물관에 갈 생각이었으나 툭툭 기사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참고로 다음날 다음 리조트로 옮길 때 리조트 직원과 교섭할 때는 6불에 승락한 기사가 도착하자 짐을 붙잡고는 7불을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이 동네의 툭툭 기사들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풀사이드에 누워 책을 읽었다.

캄보디아의 공기는 탁했다. 우리가 기대하던 파란 하늘과는 전혀 달랐다. 이게 특별히 공기가 안 좋은 시기야? 라고 물어보니 건기에는 항상 이렇다고 한다. 나만큼이나 하얀 서양인들이 풀사이드에 누워 빈둥대고 있었다 평생 배고파본적이 있기나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긴 나도 언제 배고프기나 했을까. 나는 그 사람들만큼이나 피둥하고 하얀 내 몸이 부끄러워져서 금세 방으로 들어와 저녁을 기다렸다. 레스토랑에는 또 새끼 고양이들이 있을거고 그런 생각을 하니 다른 곳에서 밥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바 근처에서는 유럽억양의 영어를 쓰는 연주자들이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1시간쯤 그걸 듣다가 악수를 하고-악수를 하며 팁을 주고- 돌아와 또 일찍 잠들었다.

다음 날에는 호텔에서 소개한 택시 기사와 좀 먼 사원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잠이 들며 원래 사람은 하루 중 몇번씩 배가 고파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몇번이나 배가 고픈 걸까. 우리는 누구도 새끼 고양이만큼도 배가 고프지 않다.

<셋째 날 실은 넷째 날>

행기에 리조트 얘길 적는 것은 바보 같다. 그런 것 치고 나는 여행을 오기 전부터 마지막 하루를 묵기로 한 리조트를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예산으로 따져도 비행기 값 + 나머지 3박의 숙박비가 마지막 일박의 숙박비와 비슷할 정도였다. 정문은 묵직한 나무문이었다. 툭툭을 타고 나무 문을 열자 색조가 전혀 다른 녹색이 가득한 인공의 낙원이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단 한치의 거짓말도 없는 표현이다 인공의 낙원.

캄보디아의 농촌을 컨셉으로 만들어진 이 곳에는 잔디로 만들어진 녹지를 만드는 대신 논과 논길을 만들어두었다. 오래된 오두막을 개조한 술집에는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듣고 해가 지는 것을 기다린다. 밤이 되면 개구리들이 울었고 사람이 없는 풀사이드에 나는 옷을 벗고 헤엄을 쳤다. 나는 마지막 날 예약해 둔 톤레압 호수의 투어를 취소하고 출국하는 시간까지 이 리조트에 머물러 있기로 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다시 글을 쓰고. 그렇게 씨엠립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냈다. 바로 전에 쓴 사원에 대한 글은 대부분 리조트에서 완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말이다.

“멀리 사원의 후문에는 지뢰 피해자인 군인들이 캄보디아의 전통 음악을 연주하면서, 같은 피해자들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있다. 사원 어디에 있든지 그 음악 소리가 들리고, 나는 희미하게 음악이 들리는 지점- 사원의 끄트머리, 숲의 가장자리-까지 걸어와 앉았다.”

어쩌면 내가 씨엠립에 다시 온다면 이 리조트에서 글을 쓰기 위해서 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꼭 이 곳을 오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돌아가는 길은 처음 올 때 처럼 완전히 까만 밤이었다. 심야의 비행기를 타기 위해 리조트에 차를 부탁해두었다. 아마 내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이 사람들은 차를 부탁해두었을 것이다. 꼭 저승을 빠져나가는 길처럼 길은 까맣고 숲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다. 군데 군데 전구를 켜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을 바라본다. 나는 숲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려다 숲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문다.

<옷을 입은 우리의 신에게 기도하는 법>

비행기는 한 시간을 늦고 두 시간을 늦는다. 나는 밤의 공항에 구석진 자리에서 내가 왜 이 여행을 오려고 마음 먹었는지 깨닫는다. 마침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것 같은 키가 크고 마른 아이 하나가 빨간 마그네틱 하나를 사려고 주춤거리는 모습을 본다. 아이는 동그란 이마를 문지르더니 기념품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서있는 줄로 돌아간다. 중국의 청도행을 알리는 사이니지가 보딩을 알린다.
나는 비행기가 떠난 후 아이가 사지 않은 마그네틱을 사서 가방에 넣는다.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그 얼굴을 잊어버리겠지만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아이에게 선물이라도 할 것 처럼 말이다.

무슨 이유로 지어졌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이 앙코르왓의 유적군은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도시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텐데 사람들은 불경하게 사원의 창에 몰려들어 어디 쇼핑몰의 메인 화면에 쓸 것 같은 사진을 찍고 있다. 신의 상은 언제부터인가 부처의 상이 되었고 불경한 행위는 그 어떤 행위보다 더 숭고하게 이해된다.

나는 여행에서 믿음과 배고픔에 대해서 생각했다. 레스토랑의 고양이들과 숲의 윤곽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정말로 진실인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의 수만큼 진실이 있다는 말은 불합리하다. 일어난 일은 단 하나 뿐이고 역사가 여럿이며 그 역사를 읽는 우리들 또한 다수일 뿐이다. 믿음. 나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려다 그만둔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 그리고 믿어야 하는 것들 말이다.

언제나처럼 나는 늦게 이해하고 나중에서야 말한다. 여행을 가고 또 돌아올 때 마다 내가 명확한 이유로 여행을 온 것이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유가 있어서 여행을 떠나는 것과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후 무언가를 깨닫는 것. 둘 다 사실 여행과는 하나도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변명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천 오백년 전의 사원 위로 해가 뜨고 그리고 지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붓다의 옷을 입은 인드라 상을 떠올린다. 아니 비슈누의 상이었던가.

내가 그 모습을 잊어버리기 전에 나의 신에게 기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비행기를 탄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다면 아무리 빠른 속도라고 해도 기도는 어디에라도 전해질 것이다. 나는 해야할 기도와 해야만 하는 기도 양 쪽을 모두 떠올린다.
그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내가 매일 같이 주로부터 멀어지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시나이까.”


20년 2월의 글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