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가 시작하기 전, 친구의 차를 얻어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친구는 세계 제일로 막히는 길로 우회전을 했고, 걸어서 7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좌회전 신호가 5번 바뀌는 동안 느릿하게 지나가야 했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처럼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던 친구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너는 집착이 많아”라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경기도 제일의 쿨가이인데,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네. 하고 내가 투덜거리는 걸 짐짓 못 들은 척 친구는 대답은 안하고 뜬금없이 “이번에 산 데스크탑 말아...”하고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넘겼다. 이윽고 5번째 좌회전 신호가 되고 차가 좌회전을 하게 되었을 때 친구는 말했다. “네가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네 이름도 까먹었을거다.” 친구는 언제나처럼 운전을 지지리도 못해서 몸이 한 쪽으로 크게 쏠렸다.
<도쿄>, Matoma - Sunday morning
올해 한 번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12월 23일 부터 27일 까지의 여행이 첫번째이자 마지막 여행이다. 이 얘기를 하면 다들 당황하며 어딘가 가지 않았었나?하고 물어본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한 해 동안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12월 19일 밤 퇴근하기 직전 내 자리에서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후배가 보내준 도쿄 소재 미술관의 전시리스트 메모를 보고 미술관의 휴무와 개관 시간만을 확인했다. 그리고 현금을 산더미처럼..거짓말이다 나에게 산더미 같은 현금이 있을리가 없지 어쨌든 현금을 가져갔고, 가져간 속옷과 8년을 넘게 쓴 캐리어를 버리고 왔다.
온전하게 혼자서 만 있었던 5일 간 이었다. 계속 걸어다녔고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록을 써도 될 정도가 되었다. 말들이 흘러나오고 또 흘러나갔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순히 혼자서 생각하고 걷는 시간이었을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행기는 작은 주제로 몇 개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는다.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을수도 있고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여기서 쓰지 않은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책임지지 못할 이야기는 쉽게 하지 말아야지. 여기서 하지 않은 이야기는 내 안에 고여서 다른 형태로 변하게 될 것이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도, 여행기를 쓰는 동안에도 어울리는 음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소제목 옆에 있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도쿄와 어울리는 음악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도쿄”는 너무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총체적인 개념이다. 도쿄라는 이름 안에는 이노카시라 공원의 번쩍이는 고요함이 있고 아카사카의 우아한 번잡함이 있으며 신주쿠의 골목마다 짙게 스며든 거리의 냄새도 있다. 내가 도쿄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도쿄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 뿐이다. 이 넓은 지역을 모두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르긴 몰라도 도쿄 도지사(18년 현재 고이케 유리코씨가 역임 중이다)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백 명의 여행객이 있으면 백 개의 여행이 있을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 명 쯤 도쿄를 사랑하지 않는 여행객-나-가 있는 것도 괜찮을 법 하다. 하물며 도쿄는 인구가 900만명이 넘는다. 나 하나 쯤이야...그래 괜찮을거다.
뭘 했었지. 뭘 먹었었지.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뭘 했는지를 떠올린다. 스시처럼 일년에 이백번씩 먹는 것들은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사진을 보다보면, 기억보다 사진에 의존하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쁜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다수의 경우 현실보다 기억이 아름다우며, 기억보다 사진이 더 아름답다.
여행 도중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단 30분도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해서 가만 앉아 커피를 마신 적도 없다. 밤에는 다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를 들었지만, 그건 굳이 여기에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도쿄의 호텔방에 혼자 잘 때 그보다 더 적합한 음악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위에 적은 도쿄의 지명들은 이번 여행 때는 들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오뎅이란 뭘까>, Billiy Ocean - Red light spells danger
음식의 원형이란 뭘까.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원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노포 설렁탕집에서 면을 넣어주는 이유는 곡물섭취의 비율을 국가에서 강제하던 시절의 흔적이라고 한다. 진짜일까.
나는 음식은 원래 이런거야, 라든가 이렇게 먹는거야 라든가 하는 얘기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물론 외국의 음식은 현지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먹고 싶다. 그 나라의 음식은 항상 그 나라 사람들이 먹는 방법을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참치김밥을 생각해보자, 남한 인구의 80%정도는 참치김밥을 한 달에 한 번은 먹고 있으며 12%정도는 하루에 두 끼를 참치김밥으로 먹고 있...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중요한 것은 참치김밥은 맛있는 음식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점이다. 그 원형과 정통성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한의 많은 사람들이 참치김밥을 먹고 있다보니 전세계적인 규모에서 참치김밥의 발전, 참치김밥 벨 에포크(그런거 없다)를 이끌고 있는 것은 남한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형태의 참치김밥은 우리나라에 있을 것이다.
말이 길었지만, 이번 도쿄에서 고민하고 먹어보려고 했던 것은 돈가츠와 덴푸라, 그리고 오뎅이다.
이제와서 덴푸라가 일본식 튀김요리란 것을 헷깔려 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오뎅은 헷깔려하는 사람이 많다. 애초에 오뎅은 어묵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어묵은 오뎅에 들어갈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오뎅은 삶은 요리煮物의 일종이며, 나베요리鍋料理이기도 한 오뎅은 어묵과 이것저것을 넣고 간장으로 맛을 내어 삶은 요리를 말한다. 어묵이라고 해도 사츠마아게, 한펜, 치쿠와 등 엄청나게 종류가 많다. 일본인에게 치쿠와를 뭐라고 하죠? 라고 물어보면 오뎅이죠. 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치쿠와는...치쿠와죠 뭘 물어보고 싶으세요? 하고 어두운 표정을 지을 것이다.
결국 오뎅의 재료가 되는 것들은, 이것저것은 범위가 상당한데 기본은 무, 그리고 곤약. 삶은 달걀, 고구마, 다시마, 소 힘줄...요즘엔 심지어 토마토도 넣어서 먹는게 보통이 되었다.
애초에 오뎅은 두부와 가지 그리고 곤약 같은 것을 뭉쳐서 만든 미소덴가쿠味噌田楽를 생선으로도 만들기 시작한 것이 기원이다. 덴가쿠는 두부요리로 분류되는데 역사는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문헌 상에서 그 표기를 확인 할 수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 요리가 오뎅おでん이라고 불리우며, 익숙한 요리가 된 것은 에도의 명물이 되면서부터 일 것이다. 그 당시 두부를 네모나게 꼬치로 구운 후 미소를 발라(웃음과 함께 서빙한다는 얘기가 아니다)먹는게 에도의 명물이었다고 하는데. 에도시대 초기부터 꾸준히 생산이 늘어난 쇼유를 나베에 넣어 국물을 낸 다음, 재료를 넣고 탕을 끓이는 현대적인 형태의 오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술 안주로 널리 보급될 때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듯 하다. 달고 매운 오뎅이 술안주로 제격- 이라는 문구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니 과연. 만들어진지 이백년 쯤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오뎅의 가장 중요한 매력은 그대로라는 훈훈한 결론.
그래, 오뎅이 먹고 싶었다. 어느날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쇼유를 넣고 국물을 내어 신선한 무를 뭉텅뭉텅 잘라 끓인 다음 일본산 오뎅재료를 우당탕 넣으니까 너무 맛있는 오뎅이 나왔다. 아니 애초에 인스턴트 라면이랑 뭐 그리 크게 다를 게 있나 어느 나라든 서민음식이란 그런 것이다. 빠르고 싸게 맛있는 걸 만들 수 있다면 최고의 음식이다. 하지만 의문도 들었다. 내가 이 무서운 재능(하하!)으로 만들어낸 오뎅이 어느 정도 수준인 걸까, 본토인 도쿄 땅에는 더 맛있는 오뎅이 존재하는게 아닐까? 마침 때는 겨울, 오뎅을 먹기에 가장 적합한 계절이라는 12월.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먹어야했다. 나는 내 두 눈과 혀로 오뎅의 궁극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집에 쌓여있는 도쿄 식도락 잡지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첫째 날 호텔방에서 오뎅집을 찾아보았다. 눈에 차는 곳이 없다. 그 기재된 숫자도 적었지만 허름하지만 추억의 맛이라는 둥, 고급 정식집이지만 오뎅 메뉴가 있다는 둥 그런 집 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오뎅에 매료가 되어 2,30년 정도 오뎅만을 만들어온 장인이 하는 집이었다. 오뎅을 극한까지 연구하여, 어떤 재료로도 맛있는 오뎅을 만들어내며 오뎅에 온 힘을 다한 삶을 살아온 나머지 하나 뿐인 아들과는 사이가 나빠졌고 그 아들은 지금 가스미가세키에서 재무성 공무원을 하고 있다...는 백스토리도 있으면 좋겠다. 네 뭐...
결국 서점에서 18년 도쿄 미슐랭 가이드까지 사와 정독해보고 깨달은거지만, 오뎅이 그리 고급요리가 아니다보니 “맛집” 혹은 “명점”이라고 할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새롭게 연구되기에 오뎅은 너무 서민의 요리였고 이미 발전할 만큼 발전해 있었던 것이다. 이미 만드는 방법마저 완성에 가까운 지점에 이른 오뎅은 그 뛰어난 대중요리로서의 완성도 때문에 이자카야와 편의점에서 먹는 요리가 되었다. 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슬픔을 못 이기고 안경을 침대에 집어던진 후 잘 정리된 호텔의 푹신한 침대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었다. 네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냥 잤어요.
오뎅을 먹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차라리 세븐일레븐에 가서 한 국자 퍼서 먹을까...하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오뎅을 먹으려고 이 머나먼 도쿄 땅에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오뎅력을 높여줄 수 있는 요리로서의 오뎅을 원했다.
그렇게 먹이를 노리는 야수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다 오뎅을 먹을 기회는...네번째 날 저녁에나 찾아왔다. 여행 내내 미술관을 전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오뎅의 명점이라 불릴 만한 곳이 없어서 동선이 맞지 않았다. 괜찮은 오뎅집들은 뱅글 돌아서 찾아가지 않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찾아간 곳은 신바시 쪽 미슐랭의 빕스 구루밍인 가게. 일부러 저녁 개점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서 자리에 앉았다. 예약없이 혼자 온 외국인 손님-그렇다 나다-은 소중한 저녁식사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훌륭한 오뎅을 가져다 줄 코스를 시키고 기다렸다. 그런데 맙소사, 이천오백엔 정도의 코스지만 오뎅을 마음 껏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다짜고짜 사시미가 나왔다. 잘못 시킨 것은 아니었다. 사시미가 나오고 오뎅이 나오는 코스가 이 가게의 주 저녁 주요 코스였던 것이다. 가게 주인은 짐짓 사시미의 훌륭한 품질이 자랑이라는 듯이 한참 설명을 했고 나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제기랄 여기 오뎅 별로겠군. 비싸지 않은 코스인데 사시미가 나오면, 남은 오뎅이 보통일 거란 건 불 보듯 뻔했다.
접시에 서빙되어 나온 오뎅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한국처럼 국물에 담겨져 나오지 않을거란 건 알았지만 꼬치에 성의있게 종류별로 꽂아져 나온 오뎅을 다 먹는데는 세 입도 걸리지 않았다. 그릇에 조금 담긴 국물을 마셨는데 국물이 괜찮아서 더 서글퍼졌다. 코스를 다 먹는데고 생맥주를 두 잔이나 마시는데 까지 삼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다음 가게를 나오며 이게 뭐야 라는 생각을 스무 번 정도 했다. 실망과 애수가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져 미나토구의 골목에 길게 드리워졌다. 잊지 않을거야 (도쿄까지 와서 별로인 오뎅을 먹은) 슬픔은.
하지만 이 가게가 좋지 않은 가게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 밖에 안되었다는 것은, 역시 내가 마음 속에서 생각한 오뎅이 신기루 같은 환상이었을까. 일본에 가면 진짜 닌자가 있을 줄 기대하는 서양인의 쟈포니즘처럼 말이지. 참고로, 그날 너무 분해서 다른 음식을 또 먹었고 여행 중 덴푸라는 두 끼나 먹을 수 있었다. “하루에 저녁을 두 끼나 먹는자는 명예를 아는 자”라며 무지막지하게 무리를 했기 때문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비싸고 맛있었다. 나참...왜 이래 진짜.
<도쿄풍정>, Philip Bailey - Easy lover
도쿄가 익숙하다. 긴자에서 이어지는 번화가. 유락쵸, 신바시, 아키하바라, 칸다. 모두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다. (실은 큰 소리를 치지만 몰래 몰래 구글맵을 꺼내 방향을 확인해야한다) 출장을 왔을 때 시간이 남으면 오던 동네들이다. 이 동네가 가장 마음이 편한 점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직장인들이란 점이다. 세련된 패션피플이나 젊은이들처럼 직장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은 이 동네에 없다. 다들 비슷한 얼굴에 복장을 하고 퇴근 후에 이곳에 왔다(물론 개중에는 그냥 여기가 직장인 사람들도 있다) 하여간 서로를 쉽게 알아보는 우리 모두 직장인들이다. 내가 비록 백팩에 파카코트를 입은 관광객이지만 그들도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삐릿삐릿 너도 우리 중 하나다 삐릿삐릿 그렇지? <Y/N>
이번 여행에선 평소라면 오지 않았을 거리를 걸었고, 즐거웠다. 물론 나는 큰 겁쟁이이기 때문에 수틀렸다 싶으면 긴자로 도망가는 짓을 반복했다. 어느날에는 추위를 뚫고 토요스 시장에서 츠키지까지 걸어갔다. 또 하루는 도쿄역에서 내려 고쿄교엔을 거쳐 근대미술관을, 그리고 진보쵸에 들렀다. 우에노에서 칸다까지 걸어가 토리스키야끼를 먹기도 했다.
가장 즐거웠던 경험은 오모테산도와 하라주쿠, 그리고 시부야를 갔던 일이다. 하라주쿠는 전에 출장 중 하루 남는 주말에 들렀다가 이곳은 안되는 곳이야 라고 마음 먹고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싶었던 곳이었지만, 다행히 이번여행에선 괜찮았다. 정확히는 하라주쿠 바로 전의 시부야와 오모테산도였지만 다음에 여기까진 괜찮겠어 하고 캣스트리트까지를 경계선으로 삼아 구글 지도에 표시를 해뒀다. 사람이 많은 곳도 패션피플이 출몰하는 곳도 나에겐 너무 무섭다. 차라리 롯폰기 힐즈를 가겠다. 거긴 외국인도 많단 말이지.
도쿄의 풍정은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나 하나의 장면을 할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 쓰고 남길 뿐이다. 여기에 하나를 적는다. 역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갔었던 토요스 시장, 추위를 뚫고 다리를 두 개나 건너서 갔더니 그런 대실망쇼도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거기에 와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카이센동집에 무슨 미슐랭 맛집 처럼 줄을 서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나는 카이센동을 먹는 대신 츠키지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다리를 3개를 더 건넜다. 다리를 건너는 도중 추운겨울이 봄이 될리는 없었다. 너무 추워 슬램덩크의 삽입곡을 들으며 나는 강백호다 나는 서태웅이다 하고 중얼거리며 달려갔다. 아니 달린다고 생각하며 걸어갔다.
다리를 건너 가는 도중 운하 위로 커다란 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나왔다. 물론 추워서 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고보니 오모테산도에서는 차를 마셨고, 시부야에서는 음악찻집에 들러 음악을 들었다. 좋은 차를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듣는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까맣게 잊고있었다. 신경쓰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마모된다.
<미술관>, Kokoroko - Abusey Junction
오랫동안 의심하고 생각해온 것들이 있다. 우리의 자아가 생각보다 더 연약하고 부드러우며 현실세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간에 의탁하여 구성되어 있다는 의심도 그 중에 하나이다. 공간에 대한 체험은 기억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공간에 대한 기억은 우리 자아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공간을 기억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것에 가까운게 아닐까. 물론 나는 작가도 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의심-혹은 망상-을 구체적으로 입 밖에 내는게 부끄럽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막연한 심상에 따라 말을 뱉고 보면, 이게 얼마나 멍청한 소리일까 걱정이 되지만 좀 더 용기를 내보자.
나는 우리의 자아가 공간에 따라 다층적으로 존재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의심한다. 우리가 어떤 공간에 대해 충분히 집착 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 공간에 (시간을 뛰어넘어) 망령처럼 보존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가끔 과거의 내가 어딘가의 공간 속에 그대로 살고 있는 꿈을 꾼다. 바보같은 망상이지만 지금 여기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글을 쓰고 있는 나보다 다른 공간에 망령처럼 보전되어 있는 내 쪽이 진짜 나에게 가까운게 아닐까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특별한 공간에 대한 기억이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시나가와구의 하라미술관은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장소이다. 세르비아와 미얀마 대사관이 있는 주택가에 있는 이 미술관은, 1938년에 하라가문의 저택으로 지어지고 1979년에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어느덧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컨템포러리 아트 뮤지엄이 되었다.
이곳을 가려면 역에서 내려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야한다. 오사키 역에서 내리면 다리를 건너고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시나가와 역에서 걸어가면 메리어트 호텔의 부지를 지나쳐가야한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은 없다. 고급 주택가라 길이 반듯하고 나무들은 잘 손질 되어 있다. 차가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각지고 검은 택시들만이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골목을 지나다닌다. 여기쯤일까 하고 고개를 돌리면 작은 정원에 커다란 나무가 현관을 가리듯 서있다. 그게 하라미술관이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 가장 많이 돌아다닌 것은 역시 미술관들이다. 사실 다른 곳에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다. 도쿄는 국립, 도립은 물론 사립 미술관에서도 일본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풍부한 라인업을 자랑하는데. 우에노 같은 곳에선 마음 먹고 하루 종일 미술관에만 있어도 될 정도이다. 이번 여행에 들른곳은 시나가와 구의 하라미술관, 다이토구의 우에노 모리 미술관, 국립서양미술관, 도쿄도미술관, 도쿄 국립박물관, 치요다구의 국립근대미술관, 미나토구의 국립신미술관, 롯퐁기의 모리 미술관, 시부야구의 분카무라 미술관. 일요일 급히 찾아갔지만 이미 17일부터 휴관에 들어간 네즈 미술관까지 합치면 10군데이다.
어째서 이렇게 미술관을 다녔냐고 물어보면, 도쿄에서 미술관보다 흥미로운 곳이 어디 있겠느냐고 대답하겠다. 애초에 미술관이랑 추상적인 개념을 사물화하여 담은 공간에 진열해 둔 곳이다. 분카무라 미술관이나 롯퐁기의 모리 미술관처럼 거대한 빌딩 안에 있는 미술관도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들은 공간과 작품이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체험으로서의 미술관이다.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형태는 나오시마의 지추미술관이다)
특별한 공간은 특별한 체험이 되고, 그곳에서 우리는 분열되어 여러개로 나눠진다.
하라 미술관은 크지 않다. 본관은 몇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1층과 2층, 그리고 3층의 다락처럼 생긴 곳에 작은 방이 있을 뿐이다. 기획 전시들은 대부분 1층과 2층에 나눠져 전시되고, 상설전시는 기획전시를 하기 어렵다 싶은 작은 방들에 전시되어 있다.
사실 이 미술관의 상설전시는 다름아닌 이 미술관 자체의 건물이다. 상술했듯이 1938년에 지어진 바우하우스 양식의 건물인 이 저택은 우아한 계단과 두 개의 정원이 특징이다. 섬세한 흰 벽과 중정으로 이어지는 작은 복도는 전시를 하기에 적합한 공간은 아니다. 가장 넓은 장소조차 (거실과 한 개의 방을 틔어 만들었지만) 개인 주택이라고 봤을 때 넓은 공간이지, 미술관으로서 대형 미술작품을 전시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회화가 아니라 현대미술을 주로 전시 했는지도 모르겠다. 주 전시장에 이어진 비 효율적으로 보이는 반원형의 공간(예전에는 분명 정원을 바라보는, 거실의 일부였을 공간이다)과 유리창. 작품의 보관이나 유지에 신경 쓸수나 있을까 싶게 습기와 실내기온이 유지가 되지 않는 이 작은 미술관은 누군가의 집에 잠시 들른 것 같은 곳이다. 중정을 바라보도록 만들어진 공간은 카페이다. 대부분의 설치 미술품은 하라미술관 아크에 보관되어 있지만 몇몇 작품은 중정에 나가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나는 공간을 기억하려고 해본다. 현관에서부터 몇 발 자국, 처음에 보이는 것은 무엇. 오른쪽에 있는 방과 왼쪽에 있는 방. 기억의 공백을 유사한 기억으로 채워나가고 감촉과 기온을 그대로 기억 해 본다. 기억 속의 계단을 올라가며 몇 단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생각한다. 내 기억과 실제의 장소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 모교 교실, 중앙도서관의 어떤 서가 옆. 위치를 말 할 수 없는 어떤 사거리. 그런 기억 속의 장소 중에는 거대한 습지도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뛰어 놀던 아파트 단지와 그 단지에 딸려있는 작은 잡목림도 그런 장소의 리스트에 있다.
어떤 장소를 생생하게 기억하면 기억할 수록 나는 그 당시의 나도 같이 떠올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장소가 그대로이길 바란다. 그리고 그 장소에 같이 놓여 있는 예전의 내가 영원하길, 적어도 내가 아는 이상은 그대로 거기에 있길 바란다.
언젠가 내가 그 장소에 돌아왔을 때 예전의 나도 거기에 그대로 있는 걸 확인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그런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많은 장소가 사라졌고 또 사라질 것이다. 결국 장소들 조차 나의 기억 속에서만 안전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당신은 어느날 우연히 찾은 미술관에서 나의 망령을 만날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것이 나를 아주 많이 닮은 누군가가 아닐까 의심하다, 그 망령의 얼굴을 보고 그것이 “진짜” 나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아마도 나의 망령은 당신을 알아보지 못 할 것이다. 망령이란 결국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망령은 때때로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초조하게 어딘가를 바라본다. 망령은 그 장소가 사라질 때 까지 그 자리에 서있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작은 부탁이 있다. 그런 나의 망령을 미술관의 작은 정원이나 구석진 복도의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당신이 아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아서 천천히 당신의 옆자리 까지 이끌어주기 바란다. 나의 망령이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아마 망령은 당신이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윽고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있게 되면, 다만 당신이 그 기다리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여 환하게 웃고는 ‘왔어요?’ 하고 말할 것이다.
하라미술관은 2020년 폐관이 결정되었다. 언제 도쿄에 다시 오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한 번쯤은 미술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찾은 미술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도 외로운 줄 모르고 나는 카페에서 파스타와 차를 마시고, 케익까지 먹었다. 내가 시간이 다 되어 미술관을 나갈 때 까지도 사람들이 미술관을 찾았다
<정원이 있는 아침>, The police - every breath you take
정원을 좋아한다. 정원이 있는 호텔은 더 좋아한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정원을 보는게 좋다. 일본에 열번쯤 왔을 때 조식도 비즈니스 호텔도 너무 지겨워서 좀 더 괜찮은 호텔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1,2박쯤 하는거라면 어떤 호텔의 조식도 참을수 있지만 그게 며칠이나 계속 되기 시작하면 편의점 음식으로 매끼를 채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거의 없다) 중에서는 편의점 음식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의 편의점에 열광하는 이유를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고, 그걸 폄하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아니 편의점 음식 먹으면 금방 질리지 않나요? 간이 쎄거나 차가운 음식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만 볼 수 없다. 그냥 이걸 재미로 먹는다면 몰라도 두 번 이상 연속으로 먹으면 뭔가 회의감이 든다. 굳이 외국에 와서 돈과 시간을 들여서 왜 이런걸...하는 생각이 든다. 편의점에서 사야하는 건 1.5리터짜리 물과 탄산수 뿐이다.
이야기가 정말 다른 곳으로 새버렸다. 하여간 같은 호텔의 조식을 며칠이나 먹는다면 좀 돈을 들이더라도 신경을 쓴 조식을 먹고 싶다. 내가 자주 가는 호텔은 커다랗고 오래된 구닥다리 호텔이다. 도쿄 주제에 호텔부지만한 정원이 있고 그만큼 호텔의 숙박비는 비싸다. 그래서 호텔에 불만이 생길 때 마다 정원을 바라본다.
호텔에서 역에서 꽤 걸어야 하는 것도 그게 언덕길이라는 것도, 방이 생각보다 좁고 작다는 것도 (예전에는 어울리지 않게 방이 더 컸지만 리노베이션 이후 오히려 방이 작아졌다 맙소사) 정원을 보고있노라면 그러지말고 그만 용서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으로 어차피 여행오면 호텔은 잠만 자는 곳이니 합리적인 가격에 깔끔하고 위치가 좋으면 최고지...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정원의 연못가에 비단잉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자고 있는 것을 구경하다 보면, 경내 관음보살 사당 앞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다보면, 그래 뭐 좀 비싸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든다.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면 끝도 없이 아까운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패가망신의 지름길.
차가운 냉수를 자리에 가지고 와 단숨에 마신다. 계란후라이目玉焼き를 써니사이드업一面으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밥을 가지러 간다. 반찬을 많이 먹을게 아니라서 작은 접시에 밥과 반찬을 놓을 수 있게 해둔 곳이 좋다.
뭘 먹을까 밥도 좋지만 흰 죽이 좋다. 낫토를 달라고 부탁하고 청어구이와 무 간 것. 두부라도 있으면 더할나위 없다. 자리에 앉으면 낫토를 휘휘 비빈다. 겨자도 간장도 넣는다. 나는 한국인이니까 자극적이어야지 하고 택도 없는 생각을 하며 비빈 낫토를 흰 죽에 섞는다. 만약에 김을 같이 가지고 왔다면 김을 부스러트려 흰 죽 위에 뿌린다. 휘휘 비빈 후 한 입을 먹는다. 다 되었는지 모르고 자리에 그냥 앉아있으면 계란 후라이를 가져다 줄 때가 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계란 후라이에 간장을 뿌린다. 가끔은 간장도 뿌리지 않는다.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노른자를 깨서 먹기 시작한다. 차를 가져와서 같이 먹을까 하다가. 내일은 흰 쌀밥에 오챠즈케를 해서 먹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정원을 보고 가장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며 말을 건다. 안녕. 잘 잤어?
<영원>, Childish Gambino - Redbone
불교가 성립된 후 2천년이 넘었다. 만인의 고통을 개인의 자아로 설명하려 한 이 위대한 종교는, 우리가 그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현재의 고통은, 우리와 유리될 수 없다. 현세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우리가 스스로를 벗어낼 수 있을 때 까지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이다. 수천년 동안 불교를 알았던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불교를 이해해왔다. 한가지 얘기해보자, 자기 인식은 최고의 부조리이며 그 부조리를 깨닫는데서 자아가 시작된다고 현대인은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쓸 수도 있다.
달마는 내 앞에 붉은 눈이 쌓이기 전에는 너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겠노라 혜가에게 말한다. 혜가는 달마 앞에서 자신의 한 팔을 자르고, 말이 없던 달마는 너의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그 마음을 편하게 해주겠다, 고 말한다. 혜가는 대답한다 제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혜가와 달마 사이에 쌓인 눈은 혜가가 흘린 피로 붉다.
도쿄의 국립박물관에는 불상들만을 모아둔 세션이 있다. 불상은 일본미술의 중요한 부분이다. 선종과 민중신앙, 밀교가 묘하게 뒤섞인 일본의 불교는 민중에 대한 숭배의 대상이자 신앙을 완성시키는 상징물로서 불상을 내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박물관에서도 이렇게 불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모아둔 것은 일본의 불상만이 아니다. 아시아 각지의 불상이 모여있다. 재미있게도 불상은 그 성립시기, 지역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지역의 인종적인 차이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는 모습은 예술양식의 변화를 뛰어넘는다.
인도의 불상을 보자, 사실 성립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같은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작품과도 아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 같이 완성도가 높으며 서양 고전적이라고 해야할지, 근육질의 몸에 높은 콧대를 한 불상의 얼굴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문득 우리나라 일반적인 사찰 대웅전에 있는 석가여래상을 떠올린다, 황금칠이 되어있고 게슴츠레 뜬 눈을 한 불상 말이다. 인도의 불상이 사진에 가깝다면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불상은 데포르메다. 석가여래의 이미지만을 남겼다. 하지만 아니 어떻게 이렇게 잘생긴 상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조상님 도대체 왜 이러셨나요 하고 가슴을 친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불상, 돌로 만든 오래된 것들을 보자. 깨달음을 얻는 석가모니를 나가의 왕이 비와 바람에서 보호하는 장면을 재현했다. 동그란 얼굴에 눈썹이 짙고 잘생긴 눈을 하고 있다. 입술은 커다랗고 두툼하다. 석가모니에게는 32가지 신체적 특징이 있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그걸 무시하고 만들었을 것 같지 않지만 다르다 확연하게 다르다. 그렇지만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다. 그렇군요 님도 석가모니시군요 하고 불상을 보며 숙연하게 인정한다.
누군가 나에게 한국의 불상이 저런 머리스타일, 흡사 마카로니를 꼰 것 같은 것은 외국(인도)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인도인을 본 적이 없는 장인들은 결국 예전부터 내려온 불상의 이미지를 보고 불상을 만든다. 자연스럽게 머릿 속의 공백은 자기가 평생 보아왔던 얼굴로 채운다. 석가모니가 머나먼 서역, 그러니까 인도 어딘가에서 태어난 사람이란 것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기와 다른 이목구비를 했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자기도 모르게 구세주는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불상의 얼굴에 의도적으로 실존인물의 이미지를 삽입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의 많은 불상이 그렇다. 스승의 얼굴을 본따 불상을 만드는 경우도 흔하며, 예를 들어 천상도나 만다라를 만들 때는 수없이 많은 불타와 보살의 이미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상상력과 양식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실존인물을 본따 그림을 그렸다. 때때로 귀족들과 권력자들은 자기의 얼굴을 극락의 모습을 그린 벽화에 넣어주길 부탁했다. 서툰 기도처럼 극락의 형상에 자기가 포함되어 있으면 극락에 갈수 있을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우지 뵤도인의 봉황전에는 그렇게 “사람”의 얼굴을 한 천상도가 있다.
나는 어느날 어떤 불상의 사진을 보았다.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을 너무나 닮아 몇번이나 그 불상을 직접 보러 가려고 했지만, 결국 한 번도 그 불상을 보진 못하였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도 그 불상을 보지는 못했다.
우리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우리들의 얼굴을 불상에 새기고 있다면. 우리와 꼭 닮은 불상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름 모를 보살과 부처의 상을 볼 때 마다 거기에 내가 아는 얼굴이 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영원만큼의 생을 살 수 있다면 언젠가는 영원과도 같은 얼굴을 한 당신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17년에 쓴 글을 읽어본다. “별이 멸망한 후의 노래들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적고 나는 두 줄을 적었다. “우리들 유기체가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들이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별들이 멸망해 간다. 어느 가을 초입의 일이다. 나는 당신을 기다린다” 나는 무슨 말을 쓰고 싶었던 걸까. 어쨌든 이걸로 나의 이번 여행기는 끝이다.
나는 보통 하나의 장면을 쓰기 위해 하나의 글을 쓴다. 그 장면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쓰고 있는 동안 이해하지 못한다. 글을 쓰는 과정은 결국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이다. 하지만 나는 도쿄여행기를 다 쓴 지금도 아무것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마 당신은 내가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도 어울리지 않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toto의 Africa를 들었다. 여행기를 쓰면서는 Shaun의 Way back Home을 들었다. 여행기를 마지막으로 고치면서는 결국 Olafur Arnalds의 앨범을 들었다.
그럼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어디까지 가야 집에 도착 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18년 12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