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미망이다. 라고 하셨다. 나는 스승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며 가만히 스승의 게송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장작에 불이 붙어 타오른다고 하여, 장작을 원망할 것인가 불을 원망할 것인가. 100년을 살지 못함을 분히 여길 것이라면 태어남을 분히 여기기도 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너는 파도에 쓸려 나가면서도 바다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히 여길 것인가. 겉 그림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를 내가 아까는 앉고 방금은 누웠으니 다음은 앉고 그 뒤엔 눕겠구나 하였다. 그러자 속 그림자가 말하기를 내가 아까는 앉고 방금은 누웠으니 다음은 서도록 해야겠다. 그렇다면 너에게 묻겠다 너는 일어서겠느냐 앉겠느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식은 찻잔에 찻물을 더 했다. 물이 섞여 찻잎이 빙그르르 돌았다. 스승과 나는 찻잎이 도는 것을 보았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렸다 오전의 까마귀는 길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스승은 더 이상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스승이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몇년에 걸친 가뭄을 겨우 나고 살림이 힘들어진 암자에 살던 승려 하나가 어찌어찌 풀칠이라도 하려 나무열매라도 남은 것이 없을까 산등성이를 헤매고 있었다. 한 때는 열 댓 명은 머물던 규모가 작지 않았던 암자는 어느새 동문인 두 승려 밖에 남지 않았고 서로 도와가며 공부를 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 해의 가뭄은 혹독하여 그것도 올해가 끝으로 보였다. 둘 중에 넉살이 더 좋은 동문은 저잣거리로 탁발을 나섰고 융통성이 없는 승려는 산을 뒤지고 다녔다.

가뭄은 사람이 사는 곳에도 가혹하였지만 산에도 가혹하였다. 연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겨우겨우 떨어진 도토리를 모았으나 수확이 좋진 않았다. 태반이 썪었고 알이 작은 것들만 겨우 모아 그릇에 두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평소에는 갈일이 없던 산 속 까지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볼이 홀쭉한 승려는 너무 멀리까지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길거리로 탁발을 나간 동문에게 아무 것도 내어오지 못할 것이 더 두려웠다. 승려는 더…더 깊은 산 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승려 자신은 모르고 있었으나, 그는 이미 짐승들의 영역에 들어서 있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랑이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검은 짐승 하나가 풀 섶에서 몸을 일으키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승려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몇 줌의 도토리가 모여있는 나무 그릇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짐승은 파란 안광으로 승려를, 그리고 그가 쥐고 있는 나무그릇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윽고 들짐승 특유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냈다. 승려는 오금이 저려와 주저 앉고 말았다. 나는 죽는구나 이렇게 잡아먹히는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연실 외우며 양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짐승은 승려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다만 그를 그대로 둔 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수풀을 지나 저 편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뒤를 돌아 승려를 돌아보더니 아주 낮은, 사람이 중얼거리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고는 사라져버렸다. 승려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어째서 이 혹독한 가뭄에 호랑이인지 늑대인지 모를 짐승이 자기를 잡아먹지 않고 살려두었는지 알수가 없어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겨우겨우 끌고 숫제 기어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암자까지 겨우 도망쳐온 승려는, 그제서야 겨우겨우 모은 도토리와 나무그릇을 놓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굶주림은 호랑이보다 무서웠다. 차마 동문이 탁발해온 낱알을 염치없이 얻어먹을 수가 없어서 승려는 다음날 그 알량한 도토리라도 되찾으려 호랑이를 만난 곳으로 돌아갔다. 산 속으로 산 속으로.
그러나 분명 호랑이를 만났던 그 자리로 가도 도토리는 커녕 나무그릇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승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방을 뒤졌다. 호랑이가 어제도 나를 해치지 않았으니 오늘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믿으며 연신 불호를 외웠다. 그러다 짐승을 만났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석굴 하나를 발견하였다.

석굴은. 산등성이 수풀을 넘어 비탈길을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석벽에 있었다. 입구가 어른 하나가 겨우 들어갈만한 작았으나. 기이하게도 누군가가 오래전에 서툰 솜씨로 만든듯한 석불하나가 -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작은 바위로 알 것 같은 모습으로 - 놓여있었다. 승려는 호기심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산 속 깊은 곳에 수도승이 거처로 쓸 듯한 작은 암굴이 있을까. 이렇게 입구가 좁으니 어제의 커다란 호랑이가 쫓아오면 도망칠 곳으로 쓸만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암굴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석굴 안은 아주 작은 방 하나 정도의 크기였다. 역시나 누군가가 - 수도승일것이다 - 생활을 하였던 곳인지 오래된 세간이 놓여있었고 한 쪽엔 깎다가 말았는지 아니면 그걸로 끝이었는지 나무불상들이 여섯개 놓여있었고. 벽 한 쪽에는 돌로 된 앉은뱅이 탁상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그 위에는 승려가 어제 잃어버렸던 나무그릇이 놓여있었다. 쌀이 반쯤 차있는 채로.

승려는 짐승을 만났을 때 보다도 더 크게 놀랐다. 이 가뭄에 어디에서 쌀이 나서 여기 버려진 암굴에 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분명 이 나무그릇은 내가 어제 잃어버린 것인데 누가 이걸 여기에 가져다 두었단 말인가. 승려는 쌀이 담긴 그릇을 덜덜 떨며 만졌다. 이 쌀이 있다면 탁발을 하러 간 동문도 나도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이 쌀이 누군가 - 이 암굴에서 살고 있는 - 의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고민은 길었지만 승려는 결국 나무그릇에 든 쌀을 들고 도망치듯 암자로 돌아갔다.

탁발을 끝내고 돌아온 승려의 동문은, 승려가 끓여내온 쌀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암자의 사정을 뻔히 아는 그로서는 이런 하얀 쌀이 나올 곳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문은 분명 이 쌀이 떳떳하지 못한 곳에서 나온 것이라고 직감하였으나. 밥에는 죄가 없었다. 두 승려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너무 오랜만의 밥이었다.

배를 채운 동문은 승려에게 그제서야 슬쩍 물었다. 자네 이 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승려는 처음에는 말해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재촉에 승려는 결국 산 속에서 호랑이 - 짐승 - 를 만난 것과 석굴을 하나 발견 한 것. 그리고 거기에 쌀이 있었다는 것을 실토하고 말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동문은 승려를 탓할 수가 없어서 그런일이 있었나 그랬나. 하고 연신 소용도 없는 탄성을 질렀다.

다음날 동문은 승려를 재촉하여 쌀이 있었던 석굴로 같이 가보기로 하였다. 승려는 쌀을 훔쳤다는 죄책감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동문은 내심 거기에 쌀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두 승려는 산 속을 다시 들어가 비탈길 언저리에 숨겨진 석굴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두 승려는 돌 탁상 위에 또 쌀이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보게 자네 내가 뭐라고 했는가. 동문은 탄성을 질렀다. 쌀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승려는 당황하였다. 어제 분명 그릇에 있는 쌀을 다 털어서 가져오지 않았는가. 여기에 있는 쌀은 뭐란 말인가. 멍하니 있던 승려는 동문의 재촉에 정신을 차렸다. 둘은 구멍투성이의 가사를 소중히 오므려 쌀을 주워담았다. 쌀은 딱 두 사람이 하루를 먹을만한 양이었다.

그 쌀로 만든 밥을 먹던 동문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라고 불리웠지 않은가. 이 쌀은 분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우리를 위해 부처님이 내리신 쌀일 것이야. 그런가. 승려는 이틀 연속으로 벌어진 행운을 이해할수는 없었지만 부처님이 내리신 쌀이라고 하니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이 가뭄에도 불구하고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문은 탁발을 다니느라 자주 저자로 내려갔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오직 용맹하게 수행에 정진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내일도 석굴에 가보지 않겠는가? 동문이 권하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나 그 다음날에도 또 쌀이 있었다. 나무그릇을 챙겨온 두 승려는 하나에는 쌓여있는 쌀을 담았고 다른 하나는 쌀이 있던 돌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상하게도 또 쌀이 있을거란 확신히 있었던 것이다. 승려는 석굴 안 나무 불상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동문은 석굴 앞 석불을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둘은 절을 하고 또 절을 하였다. 이 후 둘은 매일매일 찾아왔지만. 쌀은 매일매일 쌓여있었다. 두 승려는 매일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탁발을 가는 일도 도토리를 줏으러 가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저자에는 결국 암자의 승려 둘이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매번 탁발을 돌며 이삭 부스러기를 받아가던 승려가 얼굴을 비추지 않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를 불쌍하게 생각한건지 아니면 주인이 없어진 암자를 차지하러 한 건지 떠돌이 승려 하나가 산 속의 암자를 찾아온다. 물론 두 동문 승려는 굶어죽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가뭄 중에 그렇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훤한 신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떠돌이 승려는 깜짝놀랐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저자에 소문이 좋지 아니하여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라고 말하자 어허 그렇습니다. 라고 두 승려는 미심쩍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두 승려는 아침에 받아온 두 사람 분의 쌀을 나눠 세 사람 분의 쌀죽을 만들어 떠돌이 승려와 나눠 먹었다. 양은 적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쌀이라 떠돌이 승려는 허겁지겁 자기 몫을 먹고 곧 암자를 떠났다. 두 분이 무사하다는 것을 전하겠습니다, 라며. 그리고 다음날 평소처럼 암굴로 가 쌀을 받아온 두 승려는 쌀이 두 사람 분보다 더 많은 세 사람 분의 쌀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로다. 떠나기는 하였으나 어제 세 사람이 암자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세 사람 분의 쌀을 주셨구나. 한 승려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승려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어제 쌀죽을 나눠준 떠돌이 승려의 눈치가 보통이 아닌 걸로 보였소. 분명 우리가 굶어죽었으면 암자를 차지할 생각으로 온 듯 한데… 다른 승려는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멀쩡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되는 것 아니겠소. 아니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 것이 문제이죠. 심지어 쌀죽까지 나눠주었으니 무슨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소? 이번 한 번만 찾아오는 것이 아닐 것 같아서 불안하오. 두 승려는 생각했다. 이것이 부처님의 은혜라면 몇 명의 승려 정도야 더 먹이는 것이 일은 아니지만, 만약에 이것이 정해져 있는거라면? 우리도 쌀을 못 먹게 되는 것이 아닌가? 둘은 불안하게 서로를 쳐다본다.

그 뒤로 지난번의 떠돌이 승려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두명이, 때로는 세명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두 승려는 불안해져 쌀을 남겨보려고도 하였으나. 여러번 시도한 결과 암자에 쌀이 남아있으면 그만큼 다음날의 쌀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손님이 찾아왔을때에도 쌀을 전부 쓰지 않으면 암자의 두 승려도 굶게 된다. 차라리 다음날 그들이 돌아갔을 때 사람 수만큼 많아진 쌀을 써서 배불리 먹는 것이 낫겠다. 그런 마음으로 암자의 두 승려는 대접을 소홀히하지 않았다.

그러나 떠돌이 승려들은 어느날부터인가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핑계를 댔지만 결국은 식사가 나오니 이 곳에 있겠다 이거였다. 겨울만 이곳에서 보내겠다는 자도 있었으나 자기 집처럼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대로 머무리는 자도 있었다. 그런 떠돌이들이 하나씩 늘어나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그 수가 도합 다섯. 두 승려는 그 숫자에 돌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까지 합치면 일곱 명의 승려가 석굴의 쌀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굴 안에 있는 나무 불상이 여섯 위, 돌 불상이 한 위 이 또한 일곱이라는 사실을 그 때 두 승련는 눈치 채지 못하였다.
두 사람이 받아오는 쌀도 자연스럽게 일곱사람 분으로 늘었지만 어딜 봐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두 그릇은 될 듯한 쌀을 매일매일 어디선가 받아오니 누가 이걸 모르는척 하겠는가. 산속으로 사라지는 두 승려를 몰래 따라오려고 하는 승려까지 있었다. 비밀이 지켜지긴 어렵다. 두 승려는 그런 생각을 하였고 결국 결심했다.

두 승려는 다른 다섯 명의 승려를 암자의 가장 큰 방에 모았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하였다.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불도를 정진하기 위해 매일매일 관세음보살에서 온 힘을 다해 기도를 드리던 날 밤. 산신의 사자가 암자에 찾아온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호랑이는 사람처럼 말을 하며 두 승려에게 너희의 정성이 갸륵하여 이 가뭄을 이겨낼 방도를 하나 내었으니 나를 따라오라, 라고 하였고 두 승려는 휘엉청 밝은 달 아래 호랑이를 따라 걸었고. 신비한 석굴을 하나 발견하였다고. 이름하여 쌀이 나오는 굴이라 하여 미혈굴.

다섯명의 승려들은 얼이 빠진 표정을 하였다. 쌀이 나오는 굴이라니 그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두 명의 승려는 자못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호랑이는 말하였다. 이 쌀은 부처님의 영험하신 은혜를 받아 산신의 허락으로 너에게 주는 것이니, 오직 불도에 그 뜻이 있고 용맹정진하기 위한 자들만을 위한 쌀이다. 삿된 자들에게는 단 한 톨의 쌀도 허락해서는 안되며 너희에게 암자에 있는 사람수만큼의 쌀을 줄터이니 너희는 그것을 먹고 불도에 정진하라. 다만 이 굴의 위치는 어떤 자에게도 비밀이며 의문을 표해서는 아니된다.

두 명의 승려는 그리고 이렇게 말을 끝마쳤다. 비밀을 지키지 않는 자나 미혈굴의 위치를 캐려고 하는 자는 내가 직접 와서 벌할 것이다. 짐짓 엄숙한 그 끝맺음을 듣고 다섯 명의 승려는 그것이 말이 되느냐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두 승려가 어딘가에서 쌀을 가지고 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들 모두는 그 둘이 가져오는 쌀로 연명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다섯 명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복된 일이요 복된 일이요. 부처님의 신령스러운 영험으로 벌어진 일이니 우리는 더욱 감사히 여기고 불도를 정진하여야 하겠소. 그러자 다른 승려들이 모두 입을 모아서 동의를 표했다. 그 뒤로 다른 승려들은 모두 두 승려가 어디서 쌀을 가지고 오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지 아니하였고 일곱 명의 승려는 길고 긴 가뭄을 무사히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날 쌀의 양이 줄어들기 전까지는.

쌀이 조금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칠분의 일이 줄어들어. 평소의 칠분의 육이 되었다. 밥을 하고 난 뒤에는 똑같이 칠등분을 하였기 때문에 모두의 밥은 정확하게 칠분의 일이 줄어들어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변화에 대해서 의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두 승려 중 하나는 그것이 다른 한 승려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뻔뻔하게 빌붙어있는 다섯 승려들을 내보내기 위해서 양을 줄인 것이 아닐까. 칠분의 일이 줄어든 정도로야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다섯 승려들은 빌붙어 사는 몸. 눈치를 채게 되면 불편해져서 암자를 나갈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좋은 수라고 생각하였다.

다섯 승려 중 누군가는 어떤 놈인지 모르겠으나 쌀을 훔쳤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암자에 있는 사람수와 쌀의 양을 고려하여 미혈굴에서 쌀이 나온다고 하나 만약 쌀을 훔쳐서 암자 밖에 숨겨둔다면? 일곱명이 아주 살짝만 굶주리겠지만 한 사람 분의 쌀은 확실히 확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쌀을 훔친 놈은 미혈굴의 위치를 아는 저 두 명의 중놈 중 하나의 짓이다.

일곱명의 승려는 모두 생각하였다. 지금은 일단 참는다. 아직까지는 무엇을 할만한 때가 아니다. 그리고 서로 밥의 양이 줄어든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쌀이 더욱 줄어드는데는 그닥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칠분의 일이 더 줄어들어. 원래의 칠분의 오가 되었다. 밥을 하게 되니 양이 궁색하여 일곱의 승려가 모여서 식사를 하는 시간은 짧아졌다. 애초에 대화를 나누고 뭐고 할 것도 아니었으나 최소한 안부나 감사 인사 정도는 있었으나 밥이 줄어드니 다들 입에 밥을 넣기에 바빠진 것이다.

두 승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요새 묘하게 쌀의 양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이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수행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되오. 우리가 더욱 열심히 정진하면 다시 예전처럼 쌀의 양이 늘어날 것이니 힘을 내십시다. 한 승려가 그의 말에 동의하며 오늘부터 관세음보살님께 맹렬히 기도를 드리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확신을 가졌다. 쌀을 빼돌리고 있는게 네놈이구나.
다른 승려는 또 생각하였다. 이런 식으로 쌀의 양을 줄이면 우리 다섯 중 하나라도 암자에서 도망치칠거라고 생각한게로구나. 참 아둔하고 어리석은 놈들이구나. 우리 다섯은 단 한 명도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미혈굴의 위치를 알게 되기만 하면. 너희 두놈들은 우리에게 암자에서 내쫓지 말아달라고 빌어야 할 것이다.

칠분의 사. 그리고 칠분의 삼. 쌀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칠분의 이.
처음 두 승려가 가지고 왔었던 쌀과 완전히 같은 양이 되었다. 밥을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적은 양이라서 이제는 쌀죽을 쑤어서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이제는 식사 공양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너무나 적은 양이라서 소중히 먹느라 그런 것이다.

다섯 명의 승려 중 하나는 생각했다. 저 두 놈들이 정말 철면피 같구나 우리 다섯명 분의 쌀을 꼬박꼬박 가져와 암자 밖 어딘가에 숨겼겠지. 중놈 주제에 욕심이 많아서 저런 짓을 하는구나.
다섯 명의 승려 중 또 다른 하나는 생각했다. 처음엔 저 두 승려가 수상했으나 이제는 이상하다. 우리를 내쫓으려고 한다면 이렇게 몇주 동안이나 쌀죽을 먹으면서 고생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 다섯 중 하나가 미혈굴의 위치를 알아내어…다섯명 분의 쌀을 빼돌리고 두 사람 분의 쌀만 남긴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 다섯명이 포기하고 이 암자를 떠나면 저 두 승려를 제압하고 미혈굴의 쌀을 독차지할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나를 제외한…최소한 세명이 여기에 작당을 했다는 얘기이다.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두 명의 승려 중 하나는 식사 공양이 끝나고 몰래 다섯 명의 승려 중 몇 명이 눈 빛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마음에 걸려서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가보니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다섯 승려를 볼 수 있었다. 옳커니 저 염치 없는 자들이 드디어 이 암자를 떠날 생각을 하는구나. 애초에 둘이 먹던 쌀을 일곱이 나눠먹으니 이렇게 배가 고픈거지. 어째서 쌀이 두 사람 분으로 줄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섯이 떠나면 둘이 먹기에는 충분하다. 이렇게 생각한 승려는 며칠이나 쌀죽만 먹어 배가 고픈 중에서도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인기척에 잠에서 깬 승려는 쉬잇…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뭔가가 휘둘러지는 소리와 머리에 뭔가가 와서 부딪히는 걸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승려는 동앗줄에 묶여있엇고. 다섯 승려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떤이는 몽둥이를, 어떤 이는 날붙이를 들었다. 다섯 승려는 먹지 못하여 바싹 말라 눈만 번뜩이고 있어 분위기가 흉흉하였다. 쉽게 일이 끝나지 않을 성 싶었다. 과연…그들이 며칠 전부터 몰래 나누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는가. 두 승려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몹시 후회했다. 다섯 승려는 일단 그들을 묶었으나 무엇을 할지는 명확하게 정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두 승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 밤 중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이오.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하니 동앗줄을 풀고 서로 대화로 풀어보지 않겠소? 다른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 같은 불제자가 아니오 몇 달 간 같은 암자에서 생활하였는데 대화로 풀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소? 그러나 다섯 승려는 그들을 풀어줄 생각은 없는 듯 하였다.

그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대화를 하더니 그 중 하나가 두 승려에게 물었다. 미혈굴, 그 위치가 어디오?

두 승려 중 하나가 나섰다. 지난번에 우리가 했던 말을 못 들었소. 미혈굴을 위치를 발설하면 산주인이 와서 필히 물어죽인다고 말하였소. 다섯 승려 중 하나가 피식 웃더니 몽둥이를 들어 바닥을 내리치고 말하였다. 헛소리는 그만하지 그 산주인은 불도를 정진하는 동도들끼리 쌀을 나눠먹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너희 두 놈 중 하나가 농간을 부려서 쌀의 양을 줄여서 가져오지 않았는가? 그 말을 듣자 두 승려 중 하나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동문이 실제로 그렇게 해서 다섯 승려를 내쫓으려고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 승려는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농간을 부리다니 오히려 농간을 부리는 것은 당신들 중 하나가 아니오. 우리가 항상 날이 밝은 다음 쌀을 가지러 간다는 것을 알고 앞 질러서 쌀을 훔치고 있는 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우리 둘은 오직 동도들의 편의를 위하여 처음부터 숨김없이 쌀을 나눴는데 이제서 당신들을 내쫓으려고 쌀을 숨겼다니 그것이 말이 된다는 소리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뒤에 서서 듣고 있던 한 승려가 분을 못 이겨 뛰쳐나오더니 몽둥이를 휘둘렀다. 네 이놈 말이라고 잘하는구나 네놈들이 알량한 쌀을 나눠주면서 얼마나 우리를 내려다 봤는지 모를지 아느냐. 분통이 터져서 참을수가 없구나. 몽둥이를 휘두른 승려는 씩씩대며 분을 참을 수가 없는지 발을 구르고 성을 내다 문득 주변의 시선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무슨일인가. 그가 휘두른 몽둥이에 묶여있던 승려 하나의 머리가 맞아 쓰러져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경악하는 승려도 있었고 얼굴이 파래진 승려도 있었다. 묶여있던 승려는 맞아서 쓰러진 승려의 곁으로 기어가 자네 괜찮은가 정신을 차리게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덧없이도 쓰러진 승려는 눈이 반쯤 뒤집어져 살아날 방도는 없어 보였다…맞은 위치가 안 좋은 탓이었으리라.

다섯 승려 중 하나가 다시 나섰다. 쓰러진 자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너 까지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대범하고 침착하여 승려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는 묶여있던 승려를 억지로 일으켜 쓰러진 승려에게서 떨어트리고는 말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미혈굴로 안내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네 명이 자네를 어떻게 할지 나도 말릴 수가 없다.

한 명의 묶인 승려와 다섯 명의 무기를 든 승려들은 산길을 걸어갔다. 아직 한 밤 중이라 걸음을 걷기에 불편하다. 몽둥이 하나에 묻은 피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 한 명의 묶인 승려는 반쯤 실성하여 걸음은 걷지만 헛소리를 중얼 거린다. 늙은 수행승이 숨긴 쌀이 어떻고. 석굴 구멍이 어떻고 하는 헛소리이다.
다섯 명의 승려는 몹시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원래 암자에 살던 두 명의 승려가 그냥 불쌍한 멍청이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쌀을 빼돌린건 누구인가. 그들 다섯 명 중 하나가 틀림없다.
그 중에 하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아까 대범하게 나서서 큰 소리를 치던 놈이 쌀을 빼돌려서 숨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 놈이 죽었으니 숨겨둔 쌀을 찾는 건 다 글른 일이 되었다. 산 어딘가에 숨겼겠지만 찾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승려는 피가 묻은 몽둥이를 보면서 묘하게 흥분하여 자신이 한 일을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놈은 너무 건방졌어. 그리고 분명 저 놈도 건방지겠지. 아니 우리 다섯 명 중에서도 건방진 놈이 있지. 그건 바로 저놈이다. 하고 침착한 승려의 뒷통수를 노려본다.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저 놈에게도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버르장머리를 가르칠 기회를 노릴때 풀 숲 저 멀리.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주인이다. 침착한 승려가 중얼거리면서 허리에 찬 날 붙이를 꺼내서 양손에 꼭 쥐었다. 호랑이라면 순식간에 그들 말라깽이 중들 여섯 명 정도야 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호랑이라면 여섯이나 되는 숫자 그리고 쇠붙이까지 가지고 있는 무리를 습격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한 명 정도는 물려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내가 될 순 없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침착한 승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묶인 승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풀 숲으로 달려나갔다. 산주인님 산주인님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호랑이는 분명 아닌 어떤 짐승의 포효가 밤하늘로 울려퍼졌다.

도망가버린 묶인 승려를 쫓을 것인지. 아니면 풀 숲에서 달려나오는 저 검은 짐승을 대비할 것인지. 그 잠시의 망설임 사이. 다섯명의 승려가 발톱에 갈가리 찢기고 갈려 나갔다.

묶인 승려는 미혈굴에 도착하였다. 짐승은 여기까진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에 미쳐서 반쯤 실성한 마음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산길을 무리하여 걸었다. 발도 손도 피투성이이다. 얼굴도 피투성이이다. 누가 흘린 피인지는 모른다. 묶인 승려는 미혈굴로 기듯이 들어가 그리고…평소에 쌀이 놓여있던 돌걸상 앞으로 기듯이 가 벽에 입을 가까이 가져간다. 벽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이 있다.

미혈굴에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모를 구멍이다. 묶인 승려는 미혈굴의 그 구멍에 입을 갖다대고 중얼거린다. 오늘은 오늘은 한 명이오. 나 한 명.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그러나 구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묶인 승려는 숫제 애걸 하면서 말한다 나 혼자란 말이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당신이 신불의 사도라면 충분히 나를 살리고도 남지 않소. 그러나 구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묶인 승려는 굴 안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길고 긴 꼬챙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언제부터 이런것이 있었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은 지워졌다.
그는 꼬챙이를 들고는 자못 분개하여 말했다. 나를 살려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 쪽에도 생각은 있다. 그리고는 꼬챙이를 들어서 벽의 구멍을 향해 힘껏 찔렀다.

다섯 명의 승려 중에 도망 친 것은 하나 뿐이었다. 손가락을 세개나 잃었다. 발톱에 당하여 어깨죽지에서는 피가 흘렸다. 하지만 짐승이 다른 승려들을 물어뜯느라 정신이 팔려있을때 그는 묶인 승려가 도망친 곳을 향해 달려갔다. 미혈굴 까지는 짐승이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거 말고는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상태로는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다. 과연. 미혈굴은 가까이 가지 않으면 좀처럼 알 수 없는 석벽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상처입은 승려는 미혈굴로 걸어들어갔다. 미혈굴에는 묶인 승려가 있었다. 그는 꼬챙이를 들고 실성한 채로 주저앉아있었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경련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제 정신을 다시 차릴 것 같지 않았다. 다친 승려는 미혈굴을 자세히 보았는데 한 쪽 구석에는 오래전 입적한 승려들의 사체처럼 보이는 것들이 여섯구 놓여있었다. 그리고 항상 쌀이 놓여있다는 돌로 된 걸상에는 쌀이 아니라 피가 흘려있었는데. 잘 보아하니 피는 묶인 승려가 흘린 것이 아니라 벽에 있는 작은 구멍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다친 승려는 직감하였다 미혈굴에서 쌀이 나오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멀리 짐승이 크게 울부짖는 소리와 승려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스승께서는 모든 이야기를 다 하시고는. 불편한 손이 아니라 온전한 손으로 찻잔을 잡아 찻물을 천천히 삼키셨다. 완전히 식어있는 찻물을 삼키는 소리는 컸다. 나도 스승도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승은 해가 지고 있는 산너머를 살피시고는 이윽고 너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나에게 물었다. 무엇을 여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은 나의 기색을 살피더니 다시 물었다. 너는 이야기에서 무엇을 얻었느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스승에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산을 내려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24년 8월의 글이다.


어제 집으로 오면서 내가 블로그에 너무 많은 글을 쓰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들도 그런 고민은 안 할텐데, 참 생각도 사서하시네요. 하지만 나는 작가가 아니다. 그냥 회사원이고 현실과 가상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단편들을 조금 올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블로그의 내용은 에세이이다.
너무 내 삶이라는 뜻이다.

차라리 소설만 써서 올리는 블로그를 했다면 좋았겠지만 여러분, 소설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힘듭니다.
6년 전 쯤 머릿속으로 구상해놓고 쓰지 않았던 소설을 요즘에 다시 쓰고 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고 세상에 갑자기 유리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어느날 부터 세상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체험을 하고, 다른 사람은 결혼하려던 애인과 헤어진다.
쓰다보니 점점 길어져서 내가 질리고 있는 중이다. 어째서 이렇게 베스트 극장 대본 같은 걸 쓰고 있담.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여러분은 베스트 극장이 뭔지 알고 있습니까? MBC에서 방영하던 단막극 프로그램이다.
위키를 찾아보았는데 베스트셀러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83년도(!!)부터 방영하던게 시작이었고 그 후로 이름을 바꿔가며 방영. 결국 2013년에는 종영을 맞이한 것 같다.
방송시간은 하여간 밤이었는데 한시간 정도 남짓 하는 내용으로 1회성 드라마들을 방영해주었다.
내용은 대중이 없이 치정극일 때도 있고 사회극일 때도 있다. 공포나 추리일 때도 있었는데 추측하기로는 드라마 제작에 필요한 리소스들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서  놀고 있는 인력이 없도록 뭔가를 계속 돌려야했고 정규 드라마 시간에 편성되지 않은 주요 스텝들의 훈련을 겸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그러다보니 실험성이 강한 작품도 꽤 많이 나왔었고 뒤에 굉장히 유명해지는 사람들이 여기서 데뷔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수의 명작 문학들을 영상화 하는 경우도 많아서 문학과 영상 사이의 가느다란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그런 방송이기도 했다. 다른 방송국에도 비슷한 성격의 방송이 있었지만 내가 챙겨본 것은 문화방송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의 나는 그렇게까지 문학적이지는 않아서 단막극에서 사회성이 짙은 것들은 꽝이라고 생각했고 터무니없는 내용이 나올 수록 좋아했다.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가챠를 돌릴 수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 돌릴 수 밖에 없고 대박이 터진다고 해도 상품은 기껏해야 한시간 동안 재미있는 시간 보내기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즐겁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없던 시절의 삶은 대충 이랬다. 매일 종이 신문을 보면서 공중파의 편성표를 본다. 그리고 좋아하는 방송의 편성시간과 또 무슨 특별한게 있는지 가슴 떨려하며 확인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방송이 하는 시간이면 경건하게 10분 정도 전부터 티비 앞에서 기다린다. 광고는 모두 본다. (그래 그것이 올바른 자본주의적인 태도이다.)
그렇게 보다보면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이어서 티비를 보고 그랬다. 그런 행태를 보고 모두가 아 티비는 바보 상자구나 하고 걱정하고 그랬는데 하하 걱정도 팔자셨다.
곧 유튜브가 나오는데 말이지.
또 뭘 좋아했냐면. 어린이 프로그램과 만화, 다큐멘터리와 코미디 프로그램.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그래 그러고보니 그 때는 비디오라는게 있었다. 그게 뭐냐면…그…동영상을 저장하는…테이프 레코딩…하여간 설명하기 어려우니 검고 단단한 필름맛이 나는 장치가 있었다고 알면된다.
넷플릭스의 혁신이 발생하기 전에 우리 20세기 인간들은 집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비디오테이프라는 게 필요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고 진짜로.
하여간 어머니는 가끔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 현금으로 얼마를 맡겨두고 누나와 내가 마음껏 비디오를 볼 수 있게 해줬다.
몇달 지나지 않아서 누나와 나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너무 성인물인 것을 제외(그렇다고 그냥 성인물은 보지 않았는가? 목이 잘리는 것 정도는 그냥 보았다.)하고는 보지 않은 영화가 없게 되었는데. 시네필을 만드는데 꽤 정석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금세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서 몸부림을 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당시 공중파에는 주말의 명화라는 시스템이 있어서 주말의 적당한 저녁때가 되면 주로 미국의 영화들을 방영해주었다. 얼마나 영향이 컸던지 극장에서 내려간지 몇년 되지 않은 할리우드 대작 영화 같은게 방영한다는게 알려지면 학교가 술렁이고 그랬다. 집에 비디오 재생기가 생기기 전부터도 그런게 있으면 챙겨봤는데, 비디오를 마구 보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혼탁해진 나는 티비에서 해주는 모든 영화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이라도 좋았다. 어떤 나라 영화라도 좋았다. 나는 영화가 시작하면 꼼짝 않고 그 영화를 다 보았고 다음 영화를 볼 때 까지 그 봤던 영화를 머릿 속에서 계속해서 재생했다. 인상깊은 장면을 생각하고 대사를 읊고. 이걸 다르게 만든다면 어떻게 만들면 될까를 생각했다.
현실보다 영화 쪽이 내겐 더 현실에 가까웠다. 어릴 때의 그 나이에는, 망상 쪽이 현실보다 더 사랑스러운 법이다.

어떤 영화를 봤는지는 굳이 여기에 쓰지 않겠다. 사실 어떤 명작이라고 불렸던 영화들보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스며든 것은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어떤 광경이다.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사람들과 각이 진 자동차를 몰아 어디론가 가는 남자. 아름답지만 어딘가 채워지지 못한 눈을 가진 여자. 캘리포니아의 햇볕과 홍콩의 밤거리 같은 것들 말이다.
어느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홍콩에 갔던 날. 비가 오는 홍콩의 해변을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데 저 멀리 비안개 너머로 홍콩의 거리가 천천히 보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떠한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당신에게 내가 무엇을 봤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21세기의 이야기이고.
나의 마음 속에 머물러있는 몇 되지 않는 사랑으로 가득찬 순간이다. 당신에게 말한다면 직접 말해주고 싶다.

어느날 후배와 영화를 보러가면서 얘길 했는데. 후배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안방에 기어들어가 - 안방에만 티비가 있었기 때문에 - 매일밤 잠이 든 부모님의 발치에서 영화를 두편, 때때로 한편을 보고 학교에 갔다고 한다. 본인의 학업은 둘째치고 본인의 부모님에게도 못할짓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어보았는데. 후배는 실로 광기에 가득찬 얼굴로 오빠, 그럼 오빠는 영화보고 싶은걸 참을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 영화는 해로운 매체가 맞고 어서 깡그리 다 불태워버려야한다.

나는 가끔 궁금해한다.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주인공들. 저 멀리 사라지는 햇볕 아래에서 찍은 것처럼 갈색으로 바래있던 그 광경들. 총을 맞아 쓰러진 사람들. 어딘가로 떨어져 굴러가버린 과일들. 그 모든 것들은 정말 세상 어딘가에 존재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모두 영화의 구성요소와 세트일 뿐으로 저 모든 사람들과 과일들 모두 촬영이 끝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일까? 그리고 모두들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걸까?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것들이 정말 나의 것일까 아니면 천개가 넘도록 본 티비 드라마 단막극의 주인공이 하고 있던 생각일까.

24년 8월의 글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외할아버지의 성묘를 가지 않았다. 안장을 할 때도 가지 않았으니 한 번도 가지 않은거다.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다. 지난주의 일요일 너무 피곤하고 괴로워서 이유없는 변덕으로 음력 7월 15일 중원절이 언제인지 꼽아보니 바로 그날이었다. 과연, 성묘를 가기에 적절한 시기구나 싶어서 성묘를 가기로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대전의 현충원에 계시다. 외가의 선산이 조치원에 있는 걸 생각하면 크게 다를 건 없다. 지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차를 타면 금세 갈 수 있는 곳이니 크게 준비 할 것도 없이 기차표만 예매해두고 온천이 되는 숙소가 있으면 하루 정도 자고 올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 외엔 대전에 사는 지인이 오는 김에 한 번 보자고 하여 저녁 기차로 예약 시간을 바꾼 정도이다. (결국 지인은 다른 일정이 생겨서 만나지 못했다.)

기차를 타기만 하면 대전은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다만 기차역까지 가는 것이 항상 문제라서 나는 기차를 타는 날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기차표값에 택시비를 슬쩍 끼워넣는 기적의 논리로 돈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가까운 대전이라면 그런 논리이고 먼 부산이라면, 그래 먼 부산이라면 기차값이 비싸서 택시비 정도야 거기에 더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만 그런 식의 기적의 계산법을 가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들하지 않는가 오늘은 평소보다 좀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치킨 시켜먹어도 되겠어. 체육 필기 시험을 잘 봤으니 내일 한국사 시험은 좀 조져도 되겠지. 이런거 말이다.

햇볕이 너무 강해지기 전에 성묘를 마치고 싶어서 대전에 도착하고 보니 8시도 되지 않았다. 오기 전에 가는 루트는 대충 보았지만 가장 편한 버스를 타고 가는 건 내키지가 않아서 굳이 대전1호선을 타고 현충원 앞에 가기로 했다. 술이랑 꽃 정도는 역에서 먼저 사가는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꽃에까지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기(택시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잖아)에 현충원 역 앞에 뭔가가 있겠지 하고 물도 휴지도 없이 대전역 성심당에서 산 빵을 씹으며 전철을 탔다. (빵은 샀다 그렇다.)

그리고 현충원 역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 대학교 앞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당황해서 현충원 역 주변을 잠시 돌았는데. 편의점 마저 없었다. 여러분도 영원한 고향처럼 머릿속에 한국의 시골이 한 두개 쯤 있을텐데 읍내도 되지 못할, 그 정도 시골이었다. 쓸데없이 국도 옆의 나무들이 우거져있었다.

셔틀버스를 타려고 줄 서 있는 것 같은 대학생들이 보였지만 그들에게 딱히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 현충원에 보훈매장이 있으니까…라는 좀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단 현충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현충원까지는 대략 3~4km로 보였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셔틀버스나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혼자 있을 때 평소보다 훨씬 이상한 판단을 한다. 그냥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다리가 남들보다 좀 튼튼한 편이고 걷는 것도 싫어하지 않아서 역 두세개 정도 거리는 그냥 걸어서 가는데 8월의 뜨거운 태양을 생각하면, 전혀 올바른 판단이 아니었다. 왜 아무도 날 말리지 않았을까. 그건 내가 친구가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진 않기 때문이다. 혹시 동무들이 많은 인싸 자식들은 인생의 이런 변곡점마다 시시적절한 조언과 말림을 받으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걸까? 몹시 억울하다.

현충원을 들어가고도 외할아버지의 묘소는 현충원 북쪽에 있어서 말도 안되게 긴 언덕을 걸어가야 했는데. 솔직히 얘기하겠다 보훈처 홈페이지에 들어가 외할아버지 묘소 위치를 확인할 때 부터 그냥 걸어가려고 생각하고 갔다. 편도로만 5km가 넘었지만. 내가 믿는건 (고작) 처서를 지나 좀 선선해지는 날씨였다.

그래도 시골길을 터벅터벅 걷다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길을 지나 의외로 멀지 않은 길가에 꽃집을 찾아서 너무 기뻐서 들어갔다. 조화들만 잔뜩 있어서 당황하여 가게 주인 분을 불렀더니 생화인 국화도 있다기에 그걸 한다발 샀다.
어째서인지 10송이 단위로 팔고 있었는데. 왠지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몇 뭉치를 더 사려다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싶어서 관두고 나서려는데 가게 주인 분이 소주와 컵을 챙겨주시더니, 고인께 한 잔 따라드리세요 라고 하셔서 얼떨결에 받았다.

국도 변에는 법 같은 걸로 정해둔 것처럼 골프용품 전문점과 오토바이 가게들이 있고. 집 가까운데 있으면 한 번 쯤 갔을 법한(한 번 만 갔을 법한) 무슨 톳으로 만든 음식이 메인 요리인 가게들이 있었다. 이런 가게들만 있어야 한다고 조례로 정한걸까? 분명 나의 홈타운 부천에도 도심을 벗어나 과수원이 있거나 국도로 좀 벗어난 곳으로 가면 저런 곳이 나온다. 무엇을 숨기랴 내가 살던 근처에는 수목원이 있었는데 그 수목원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곳에는 몇층짜리 낚시용품 전문점이 있었다.
도시구조이론이나 지대이론 등 (바제스니 뭐니 하는 것들 말이다)에 의하면 이런 전문점은 굉장히 넓은 범위의 시장을 커버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편의점은 반경 일킬로미터 이내의 손님들이 주로 이용하지만 이런 취미류의 전문점은 수요가 적기 때문에 수십킬로미터의 반경을 커버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돼 이런 가게가 겨우 수십킬로미터의 반경을 커버한다고? 내가 본 것이 대전의 유일한 오토바이 배터리 전문점이란 말이지. 남한에 유일한 곳이 아니고?

3킬로미터 이상을 걷자 슬슬 즐거워지기 시작했는데. 머릿 속으로 처음에 뭐라고 인사를 하지 하는 생각을 계속 했다. 할아버지 저에요. 할아버님 인사드립니다. 할로 구독자 여러분. 등등 하여간. 나는 외할아버지의 생전에는 항상 외할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어리광을 부린 적은 없다. 외손자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그런 노인이 아니었다.

아무 날도 아니었는데 현충원 주차장은 7부 이상 차있는 것 같았다. 보훈매장의 물품 가격은 합리적이었는데, 생화는 거의 없었고 조화가 대부분이었다. 뒤에가서 알게 된거였지만 각 묘지에 꽂혀있었던 꽃들은 다 조화로. 유족들이 꽂아두는거였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자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조화를 꽂아두고 명절마다 바꾸는 거였다. 나는 부러 생화를 찾은건데, 내가 바친 국화가 시들었다면 누군가 그걸 버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소주를 받았지만, 아무래도 좀 그렇지? 싶어서 법주를 샀다. 외할아버지가 술을 좋아했던가. 할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할머니가 질색을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모르겠다. 마셔도 취할 때 까지 마시지 않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다.

현충원은 좋은 곳이었다. 조용했고 나무가 모두 커다랬다. 청소년 고양이를 하나 찾아 사진을 찍었는데 싫은 표정도 없이 날 쳐다보며 야옹이라고 말해줬다. 나도 야옹이라고 대답해줬다. 땀에 젖을때 까지 걸어서 외할아버지의 묘비를 찾았다. 묘비 사이를 지나가면서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성묘를 좀 하려고요. 하고 굽실굽실 거리면서 지나갔다. 아무래도 그렇게 말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이다.

저 멀리 산이 보이고 까막까치 우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비석 앞에 서서 우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준비한 인사도 다 까먹고 죄송해요 울어서 죄송해요 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소연하는 것도, 자기 앞에서 우는 것도 싫어한 사람이다.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걸 어쩌겠는가.

술을 바치고 물을 부어 비석을 깨끗하게 닦고, 사진을 찍어서 이모에게 보냈다. 잘 계시네요 아직 누워계세요.
외할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햇볕을 받고 있으니. 그제서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게 실감이 났다. 그냥 외할아버지랑 싸우고 10년 쯤 안 본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사랑이란 이렇게 고통스러운거였다. 녹색의 산이란 저렇게 아름다운거였다. 벽처럼 둘러쌓인 산들이 숨도 쉬지 않고 서있었다. 내가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자 대신 벌레들의 날개 소리와 까마귀의 긴 울음 소리가 들렸다.

두서없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길래 남은 술들을 외할아버지 무덤 근처에 있는 다른 무덤들에 바치고 절을 드렸다. 바로 옆자리에는 외할아버지와 사관학교 동기인 유명한 분이 누워계셨는데 술을 더욱 가득 따라서 드렸다. 이모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돈 문제로 외할아버지가 그 분을 고소하셨다고 한다. 아니 죄송합니다. 어느 쪽에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또 올게요. 라고 하고 절을 두 번 더 했다. 다시 눈물이 나서 머리를 들을 수가 없었는데. 외할아버지 말투와 외할아버지 목소리로 그래 또 와라. 라는 말을 들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외할아버지 목소리를 하나도 잊지 않았다.

수분과 전해질 부족으로 죽겠다 싶어서 보훈매장에서 산 파워에이드를 꿀꺽꿀꺽 삼켰다. 내려가는 길도 너무 길었다. 현충원역까지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꽃집에 전화해서 저 아까 생화 산 사람인데요 소주를 주셨는데 생각해보니 값을 치르지 않았어요 계좌번호로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라고 물어보니 조문을 가는 분들에게 그렇게 한 병 씩 드려왔다고 한다. 감사하다고 번창하시라고 인사를 드리고 끊었다. 사실 그거 안 썼는데 말이지.

정말로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현충원을 나와 대전역으로 가는 버스를 비틀거리면서 탔다.

중원절이란 말은 도교용어로 같은 날을 불교에서는 우란분재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ullambana에서 나왔다고 한다. 굳이 해석하자면 똑바로 매달려있다는 말이 전화되어서 생긴, 거꾸로 매달려있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하나인 목건련은 신통제일이라 칭송되었고 마하목건련, 목련존자 등의 이름으로 칭송받았던 뛰어난 제자였다.
우란분경과 목련경에 따르면 그런 그가 어느날 천안통으로 지옥을 바라보자 생전에 많은 악업을 지은 어머니가 죽어서 아귀도에 떨어져 굶주림의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하늘을 날고 용왕을 조복시키는 마하목갈라나도 지옥에 떨어진 부모를 구할 수는 없었기에 스승에게 방도를 물었고 승려들에게 5가지의 과일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죄업을 씻고자 하였다. 죄는 선업으로만 대속 할 수 있는걸까.

그것이 우란분재의 유래로 알려진 이야기이고, 거꾸로 매달려있다는 것은 아귀도에 떨어진 목건련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그 후 멀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일로 보이나 목건련은 반대교파들의 시비에 쫓기다 결국 스승인 석가모니보다 먼저 입멸에 든다. 전설에서는 그가 일찍 죽음에 이른 것이 전생에서 부모를 죽인 대죄인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의 선업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도교의 중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행사이다. 인간의 죄를 계량하는 천관들이 일년에 세 번 그 죄를 가늠하는 날 중 하나가 중원절이고, 도교에서는 그날 음식을 차려놓고 부모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죽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말하자면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가끔 생각했다. 산자들이 우리를 생각하는만큼 죽은자들도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그들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지. 애처로울 정도로 어리석은 생각이나. 내가 아닌 누군가도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버스를 탄지 얼마 안되어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회사의 후배가 대전 갈 일 있으면 말해줘요 성심당 부탁 좀 합시다. 라고 말한게 생각나서 까먹었으면 모를까 해주겠다고 말까지 해놓고…싶어서 후배에게 연락을 하니. 마침 주말약속이 모두 깨져서 놀고 있던 후배가 1초도 안되어서는 대답을 하고 케익을 부탁했다. 운도 좋은 녀석이네 안 그래도 오후에 약속이 통채로 사라져서 할 일도 없었는데 해주마 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점심엔 맛있는거 드세요 태평소국밥이라든가…라고 후배가 말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가 오룡역(그 가게의 본점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역이다)에 도착하기 직전이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느껴서 바로 버스에서 내렸다.

과연, 육사시미와 내장탕 모두 거기까지 와서 먹는 후회가 하나도 없는 맛이었다.

후배가 부탁한 케익을 사서 카페에 앉아 이모와 메세지를 주고받는데. 이모는 흰 국화가 할아버지가 조문을 하러 갈 때면 항상 사서 가던 꽃이라고 말했다. 단지 한 번에 세 송이만 사셨다고. 그 이상은 사치인 것 같다 라고 하셨다고 했다. 다음에는 더 큰 국화 꽃다발을 사서 갈 생각이다. 근데 노인네가 날 더 이상 어쩌겠는가.

꿈에나 나와서 잔소리나 좀 하겠지.

24년 8월의 글이다.

문득 언젠가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다 떨어질텐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점점 과거로 돌아가서 내 마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일들을 다 꺼내어 글로 쓰고, 전해야 할 말은 모두 전하고 전하지 못할 말들은 다 삼키면. 그리고 그 뒤에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1990년대 가장 더웠던 여름을 말한다면 94-95년의 여름을 빼놓고 말 할 수 없다.
동북아시아의 폭염은 정말 최악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라서 베이징은 건국이래 최악의 폭염을 기록했다고 하고 한국에서도 가뭄일수와 더위 양 쪽에서 20세기 최고.
전국의 폭염일수가 29.4일. 2018년이 되기 전까지 어떤 여름도 94년보다 덥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공교롭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기억하라고 하면 기억이 나지만 94년-95년에는 내 인생에 대체로 아무 일이 없었던 시기였다. 단수가 자주 되었기 때문에 물통을 들고 물차를 기다려서 물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어디 오지에 사셨나요? 아닙니다. 나는 경기도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도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뭄이 발생하면 물차가 나가는 걸로 알고 있다. 다만 경기도가 다른 지방에 비해서 수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요즘의 경기도민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광경일지도 모르겠다. 집에 들통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물통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제 집에 들통을 가져다 두지 않는다.

예전엔 집에 항상 있었지만 이제는 집에 잘 두지 않는 걸 얘기해보자면 랜턴과 양초이다.
그렇게 전력 사정이 안 좋았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 시절에는 선풍기도 잘 안트는 집이 많았는데도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한 여름이 되면 전기가 끊기곤 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화를 내지도 않았고 어어 정전이네 하면서 능숙하게 양초를 꺼내서 집을 밝혔다.

그 당시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한 용어는 “열대야”였는데 밤이 되어도 덥다고? 그럴 수가 있나 놀랍구나 20세기 이러면서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래서 20세기 피플들은 열대야를 이겨내기 위해 에어컨을 사거나 선풍기를 틀었는가? 그렇지 않다. 20세기 피플들은 그냥 밤이 되면 집 밖에 나와서 누워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겠지만 그 당시에는 도시도 커뮤니티가 아직 살아있었고, 아파트 단지도 비슷한 시기에 이사온 구성이 비슷한 집들이 모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들 집에서 은박지처럼 반짝거리는 거나 진짜 대나무로 만든 돗자리(어휴 정말 간지템이로군요)를 들고 나와서 식구들끼리 누워있었다.
재미있는 체험으로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정상가족들을 구성하여 커뮤니티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충분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친)누나와 단 둘이서 집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 둘이 할 수 있는 건 창문을 활짝 열고는 양초도 끈 채로 어두컴컴한 집에서 애써 잠을 청하는 것 밖에 없었다.

조금 더 커서 태풍이 오던 날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나는 혼자였다. (왜 혼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자전거를 있는 힘껏 밟아 집에 돌아온 나는 태풍을 맞을 준비를 했다. 나는 구구단을 배우기 전에 이미 혼자서 밥을 해먹을 줄 알아서 당황하지도 않았다.

정전 중이라 건전지가 끝나면 랜턴의 불도 꺼지기 때문에 랜턴을 켜지 않았다. 전등 스위치는 모두 꺼둔채다.
아직 비바람이 오진 않았지만 창을 꼭 잠그고 선풍기가 켜지길 기대하며 미풍에 버튼을 눌러두었다. 그냥 서늘한 창문에 이마를 대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번개가 치고 천둥 소리가 올 때 까지의 숫자를 세면서 태풍이 얼마나 가까이에 왔는지 셌다. 세찬 빗소리가 들리고 뒤에서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선풍기가 켜졌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찍은 사진이 없다. 그래서인지 내 어릴 적의 기억은 군데군데 결락되어 있다.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몇년도에 뭘 했어 라고 물어본다면 어어 뭐였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오랫 동안 “올해”라고 인식했던 건 95년이었다. 머리 속에서 95년이 지나는 걸 거부하듯이 올해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하면 95년이 떠올랐다.

아주 오랜 후에 그 이유를 스스로 깨달았는데. 그 때 쯤에는 더 이상 95년을 올해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또 다른 해를 올해로 여기고 있다. 그런걸 보면 나는 뭔가를 배우는게 그리 빠르진 않은 것 같다.

매년을 기억하는 건 대체로 그 해에 읽었던 책들이다. 이 무슨 대책 없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나는 92년의 7월을 내가 광화문 교보문고에 처음 갔었던 해로 기억한다.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에 감동했는데
아버지는 딱 한권을 고르렴 이라고 불가능한 숙제를 내게 주었다. 지금의 나라면 무슨 책을 골랐을까. 나는 꿈 속에서는 대체로 책이 많은 곳에 있다.
교보문고였던 적도 있고 모교의 중앙도서관일 때도 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의 작은 도서대여점도 자주 나오는 곳이다. 나는 꼭 영원처럼 그렇게 책 사이에 있고 싶어한다.

92년 7월의 내가 고른 것은 그 해 발매 된 스트리트 파이터2의 공략본이었다.
왜? 뭐 대단한 책을 골랐을거라고 생각했는가. 그 책은 올컬러에 멋진 일러스트가 가득했다. 오타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냥 일본에서 나온 책을 불법 복제하여 대충 번역해서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몹시 실망한 눈치였지만 본인이 한 권만 고르라고 했기 때문에 의외로 군말 없이 책을 사줬다.

그러고는 충무김밥을 사줬는데. 요즘에야 충무김밥이 창렬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아버지에게는 20대의 추억이 담긴 음식이어서. 누나와 내가 맛이 없다고 하자 몹시 분개해했다.

그리고는 그 해 겨울 누나와 나를 정말 충무에 데려가 충무김밥을 사주었다. 그 때도 맛이 없어서 누나와 나는 같이 나온 오징어순대만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한 성격에 머리가 너무 좋은 아버지라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나는 정말 길고, 웃긴 이야기를 여럿 할 수 있다.
애초에 자식이란 그런 존재이다. 자기 부모에 대해서는 그게 분노이든 슬픔이든 끝도 없이 길게 얘기 할 수 있는, 우리는 그들 인생이 가장 가혹한 목격자이다.

하지만 책의 이야기를 하자. 나는 그 공략본을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보았다. 비유가 아니다 정말 너덜너덜해지고 찢어질때 까지 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책도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보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크게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나 내 지적 능력에 대해서 오해를 했는지 어느날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 교재를 사와서 나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또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정말 그만두자.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0세기이다.

방학은 좋았다. 책을 마음 껏 읽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결국 매년을 어떤 책을 읽었는지로 기억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94년만큼은 아니었지만 혹독하게 더웠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수학에 재능이 없다는 것이 판명이 난 나는 더 이상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 해 방학은 통채로 내 것이었다.

아무 할 일도 없던 나는 모비딕을 읽었다. 모비딕을 읽다가 어느 토요일 오후 공영방송에서 해준 모비딕의 영화판은 인상적이었다.
장면은 어둡고, 화면은 붉고 사람들은 땀을 흘리면서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대사를 했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땀 범벅이 되어서 선풍기 앞에 앉아 아아아 어어어 하고 소리를 내었다.
변성기가 되지 않았던 내 목소리가 선풍기의 진동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선장님 고래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말해보았다.

나는 아직도 종종 모비딕을 읽으면서 뺨에 닿았던 대나무 돗자리의 감촉을 떠올린다. 너무 더웠고. 나는 책을 읽는 것 외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죽음보다 더 외로운 여름이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

내돈내산임을 밝힌다. 아니 안 밝혀도 되는건가?

아이패드를 새로 샀다. 원래부터 생일선물로 아이패드 하나 사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어서 별로 고민 없이 샀다.
무슨 거짓말을 고하랴 나는 원래 뭘 살 때 딱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어 사야지 하고 사면 끝이다.
원래부터 그런 못된 습성을 가진건 아니고 믿어달라, 어릴 때 부터 나는 모든 걸 아껴쓰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어릴 때의 나와…지금의 나를 비교한다고 하면 비슷한 점이 훨씬 적은 것 같지만…하여튼

원래 여행기와 나의 근황을 부재증명이라는 이름으로 올리기 시작한 이 블로그가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무거나 올리는 곳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의 역할을 잊어버리면 안되겠기에 이렇게 근황을 올린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아이패드랑 매직키보드를 같이 샀는데 더럽게 더럽게 비싸면서 별로 제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일단 글을 써보면서 자신의 소비를 정당화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의 편집이 좀 이상하게 보인다면, 그건그냥  아이패드로 작성했기 때문이다.

요즘 티스토리에 글을 쓰면 적게는 30, 많게는 100이 넘는 방문객이 들어온다. 여러분이 이 티스토리에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원래 아무 글이나 쓰는 사람이고 아무 일이 없을 때 나의 텐션은 이 정도이다. 언제 어디서 물어봐도 귀신 이야기나 문학 이야기 두 세 개는 뽑아낼 수 있지만 (애초에 그런 인간이 아니면 블로그를 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나는 회사원이다. 우울하고 문학적인 마음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효율적으로 일하고 빨리 집에 가서 누워있는 것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관심있는 것은 글을 쓰는 것 뿐이다. 하루 종일 유령같은 마음으로 지내다가 두부 세일하면 두부 4모 살까, 하고 고민 하는 정도가 전부이다.
어제는 2시간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수육을 샀다. 아무래도 고기가 먹고 싶어서이다. 무친 무말랭이랑 그런 것들이랑 먹다 보니 두 입을 먹고 나서 더 이상 먹고 싶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먹었다. 복통이 심해서 2시간 정도 모로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다. 머릿 속으로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미술적 상징에 대해서 생각했다. 연기가 나는 거울이라고 불리운다니 얘네들의 제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거지?

그거 말고 뭐하고 지내냐면, 그래 아즈텍 신화의 신에 대해서 자기 전에 생각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을리가 없지.
극단적으로 편식을 하며 두부, 수박, 냉면만 먹고 있다. 회사에서 먹는 점심은 친구와 같이먹기 때문에 다른 사람처럼 그럭저럭 먹지만 왠지 집에 혼자가 되면 다른 걸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얼마 전 역의 쇼핑몰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에일리언의 신작을 보고나서가 아니고 그냥 냄새가 너무 역해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집에 돌아왔다.
이게 바싹 마른 녀석들의 식욕인가? 하고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집에 돌아와서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두부를 먹었다. 진짜 아무 것도 안 먹으면 배가 고픈걸 보니 바싹 마른 녀석들처럼 되기엔 무리 같다. 얼마 전에 회사 동료에게 저 살 많이 빠졌죠? 라고 하니 얼굴만 빠진거 아냐? 라고 하길래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누가 봐도 저자식 왜 저렇게 말랐지 소리를 듣고 싶다.

SNS에서는 아무나 일단 팔로잉 하면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내 이 증상들이 언제 나아질지 알수가 없어서 우선 내 머릿속에서 나 자신을 좀 뽑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게 가장 효과적이지만, 나가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을 하니 내 평소의 적당한 매너와 유머감각을 유지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최근에 아는 동생과 몇명이 차례차례 우리 동네에 찾아와서 만난 적이 있다. 엉망인 얼굴을 하고 나온 나와 잘도 놀아준다 싶었다.
(사촌)형이 동네로 찾아올 정도였으니 다들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냥 만화카페에 가고 싶은데 자기 동네에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깨가 아직도 낫지 않아서 어떤 운동도 하기 적당하지 않지만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정말 이상하다 나는 혼자가 되면 달리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거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달리기를 하고 글을 쓰길 반복한다.
지웅이형과도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형에게 그래도 글을 쓰면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상하죠? 라고 말하자 형은 아냐 맞어 그러니까 우리가 안되는거야 라고 대답했다.
형은 몰랐겠지만 나는 그 때 쇼핑몰 구석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형의 대답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아니 형의 대답이 감동적인 것으로 하겠다.

항상 글을 쓰고 나서 생각한다. 조금 더 살아가야지.

24년 8월의 글이다.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 한가지 이야기의 두가지 측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자춘전(杜子春傳)은 당나라 때 이복언(李復言)이 편찬한 <속현괴록(續玄怪錄)>의 명나라 시대 판본에 실려있다. 그 원본은 대당서역기에 실려있는 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두자춘 전의 원본에 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선 원본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북주, 수 연간의 사람인 두자춘은 본디 세가의 자식으로 부유하게 자랐지만 가문의 재산을 탕진하여 빈곤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는 어느날 정말 우연히 노인 하나를 마주쳤는데 노인은 자춘을 어떻게 여겼는지 갑자기 그를 도와주며 친척도 주지 않을 큰 돈을 무상으로 그에게 줍니다. 자춘은 그에게 크게 감사하며 앞으로 착실하게 살리라 다짐하였지만 그것은 몇년을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금세 재산을 탕진하였고 상심해있던 그에게 노인이 또 다시 나타나 아까보다 더 큰 재산을 내려주며 이 재산으로 잘 살아보라고 말합니다. 자춘 또한 더욱 기뻐하고 감사해하지만 첫번째보다 더 큰 재산도 몇년이 걸리지 않아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하고 상심해있던 자춘의 앞에 노인은 다시 한 번 나타나 그에게 이번엔 더 큰 재산을 줄텐데 이 재산을 가지고도 탕진하면 너는 평생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이야.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두자춘전은 실수를 반복하는 주인공과 그를 도와주는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몹시 매력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까지 읽었을 때 두자춘이 어떤 실패를 하고 어떤 반성을 하게 될까 기대하게 되는 법인데...의외로 두자춘은 여기서 실패하지 않는다.
 
몇 번의 재산의 탕진 끝에 교훈을 얻은 자춘은, 이번에 얻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재산을 자선을 위해 사용한다. 전화에 상처입은 지방을 재건하고 사람들을 구한다. 몇년 후에 자선을 행하고 있는 자춘을 만난 노인은. 그의 삶에 기뻐하면서 이제 살만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자춘은 노인을 향해 감사하면서 이제 속세의 삶은 누릴대로 누렸기 때문에 노인과 같은 신선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과연 노인은 신선이 맞았고 자춘을 자신이 살고 있는 화산에 데려가 신비로운 선술-연단술-을 행하는데 자춘에게 신신당부 하기를. 절대 입을 열어 말하지 말라. 그렇다면 너는 어떠한 해도 입지 않고 끝까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 나는 선단을 얻으며 너는 나와 같은 신선이 되리라. 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자춘은...생각도 해본 적 없는 신비로운 환상을 보게됩니다...
 
그러니까 두자춘의 세번의 기회는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길고 긴 프롤로그다. 그리고 내가 이 시점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일본의 소설가 아쿠다카와 류노스케가 지은 두자춘 전이다.
1920년 아쿠다카와는 잡지 <붉은 새>에 두자춘전을 발표하는데. 동화를 염두에 둔 구성과 그 내용으로 원래의 두자춘전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어떤 이야기냐면 앞부분은 완전히 같다. 
 
두자춘은 명가의 자식이나 게으르고 일을 하지 않아 요행만을 노리는데 어느날 신비로운 노인을 만나서 그에게 세 번의 기회를 얻고. 그에게 감사해하지만 자신도 신선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노인은 그를 제자로 삼기로 하고 아미산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아미산에 도착하자 노인은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한다면서. 대신 내가 없는 동안 너는 온갖 유혹과 사술에 시달릴 수 있으니 내가 없는 동안 너는 어떠한 일이 닥쳐도 한 마디도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받습니다.
 
노인을 기다리던 자춘이 본 것은 과연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그를 위협하더니 그 뒤에는 짐승들이 그를 위협합니다. 온갖 자연현상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금빛 옷을 입은 장군이 그에게 너는 누구냐 왜 여기에 있느냐고 위협을 합니다. 그래도 말을 하지 않자 수천 수만의 군병들이 그를 위협합니다. 입을 벌리라! 말하라 네가 누군지! 왜 여기로 왔는지! 하지만 자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금빛 옷을 입은 장군은 자춘의 목을 한 칼에 날려버리고 맙니다.
 
자춘은 지옥에 끌려갑니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 자춘은 저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자로서 엄한 벌을 받게 됩니다. 온갖 지옥을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받지만 자춘은 노인의 당부를 생각하며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기가 찬 염라대왕은, 한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려 축생도에 떨어져 있던 자춘의 죽은 부모를 데려옵니다. 자춘의 부모는 둘 다 말이 되어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었고 자춘을 알아본 듯 합니다. 지옥의 졸개들은 오직 자춘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자춘의 부모를 가혹하게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자춘은 부모가 고통을 받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며 몇번이나 입을 열까 하다가도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참습니다. 이윽고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우리는 괜찮다. 네가 행복한게 제일이니 네가 입을 열지 않아야 한다면 그대로 다물고 있거라. 라는 어머니의 말이 들렸습니다. 자춘은 참지 못하고 달려가 어머니를 껴안고 어머니라고 부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춘이 깨어난 곳은 처음 노인을 만난 낙양이었습니다. 노인은 어떠냐 이래도 신선이 될 생각이 들더냐 라고 묻습니다. 자춘은 부정합니다. 노인은 오히려 웃으며 네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자 이제 신선도 부자도 되지 못한 너는 무엇이 될 것이냐 라고 묻고. 자춘은 사람답게 정직하게 살겠다고 대답합니다.
...
 
이것이 아쿠다카와 두자춘전. 그의 나이 28세에 지은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원전의 두자춘전은 어떻게 될까? 아쿠다카와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두자춘이 선술에 걸려 환상을 보는 것은 완전히 같다...
 
입을 다물고 있는 자춘을 금빛 옷을 입은 신장은 위협을 가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신장은 어디선가 자춘의 아내를 잡아와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차마 여기에 쓰지 못할 만큼 고문은 가혹합니다. 아내는 자춘에게 빌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춘은 처음과 같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입니다. 아내는 자춘에게 원망의 말을 남기고 죽고. 신장은 지독한 놈이라고 혀를 차더니 자춘의 목을 한 칼에 날려버립니다.
자춘은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곳에서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아 온갖 지옥을 도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산, 화탕, 한빙, 검수, 발설...모든 지옥을 한 번씩 돌고도 자춘은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염라대왕은 격노하여 이 자는 심기가 음한자이니 다음 생에서 여자로 태어나리라 하고 그를 인간계로 쫓아냅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산동성 선부현 왕근의 집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한대로 여자아이로 태어난 두자춘은 어릴때 부터 아무소리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통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벙어리 아이가 태어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벙어리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미모를 가진 규수로 자라났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그녀이기에 구혼자가 끊이지 않았으나. 아버지 왕근은 그녀가 벙어리라는 이유로 아무 곳에도 시집보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노규라는 진사가 왕씨집 딸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끈질기게 구애를 하여 결국 혼담이 성사되었고. 왕씨집 딸이 벙어리임에도 불구하고 금슬이 매우 좋았습니다. 곧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도 말 한마디 없고 표정도 없는 왕씨에게 노규는 점점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들이 두살이 되던 해 일이 터지고 맙니다. 너는 남편을 공경하지 않느냐, 너는 내 글 솜씨에 존경하는 마음이 들지 않느냐 하며 화를 내던 노규는...노규는 겨우 두살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의 다리를 잡아 돌 위에 집어 던집니다. 원전은 아이의 머리가 깨지고 피가 다섯 걸음을 걸 정도로 흘러나왔다고 말합니다. 왕씨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릅니다.
 
왕씨, 아니 자춘이 깨어나보니 선술은 실패하였고 자춘의 눈 앞에 노인이 서있었습니다. 노인은 그가 칠정인 희노애구오욕(喜怒哀懼惡欲)을 모두 잊었으나. 마지막에 하나 사랑(愛)을 잊지 못하여 선단을 만드는 것도. 신선이 되는 것도 실패하였다며 그를 크게 탓하고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고 두자춘을 남긴 채 떠나갑니다.
 
어떤가? 두자춘전의 원전은 훨씬 잔혹한 이야기이다. 누군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고 어느쪽 이야기가 더 아름답고 사리에 맞느냐고 묻는다면 열이면 아홉은 아쿠다카와의 두자춘전을 고를 것이다. 
그렇다면 아쿠다카와가 어째서 두자춘전을 이렇게 편집-아니 재창작이다-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텐데 대답은 싱겁다. 애초에 이 작품을 발표한 붉은 새 부터가 어린이를 위한 아동문예집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난세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잔혹한 이야기가 반 이상이다. 거기에 어떠한 신비로운 전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오히려 전개와 결말을 바꾸지 않았다면 어린이 잡지에는 실릴 수 없을텐데 도대체 왜 굳이 이야기를 선택해서 각색했는지가 의문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추측 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애초에 아쿠다카와의 작품 중에 특별히 뛰어난 작품도 인기 있는 작품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도 아니다.
 
다만 왜 결말을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두자춘이 새 사람으로 바뀌는지에 대해서는 추측 할 수 있는데 그건 아쿠다카와가 어릴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어머니의 발광으로 인해서 외삼촌의 집에서 양자로 키워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양부모를 진짜 부모로 여기고 살아갔다고 하지만. 그가 11살 때 죽은 친 어머니에게서 광기를 물려받은게 아닐까 스스로 평생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가 한살이 되기 전에 큰 누나의 때 어린 죽음으로 광기가 발현된 어머니...그런 그에게 어린 아들이 살해당해 비명을 지르는 젊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1920년 당시 젊은 나이(겨우 스물 여덟살이었다)인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던게 아닐까. 1919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된 그는 자신과 똑같은 젊은이인 두자춘이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결말에서 모종의 구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결말을 알고 있다. 아쿠다카와의 두자춘전은 자춘이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에서 끝나지만. 1921년 아쿠다카와는 신경쇠약을 앓기 시작한다. 위궤양(위궤양은 그의 스승 나쓰메 소세키의 직접적인 사인이기도 했다). 불면증. 매형의 자살로 인한 빚. 그는 겨우 1927년에 자살한다. 두자춘이 새로운 삶을 다짐한지 7년 후의 일인 것이다.
 
나에게 두 개의 두자춘전 중 어느 쪽의 두자춘전이 인생의 진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고민을 하지 않고 원전의 두자춘전이라고 하겠다. 아쿠다카와의 두자춘전은 너무나 아름답니다. 결말은 완벽하고 전개는 매끄럽다. 그러나 원전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고 그냥 어느날 어떤 비렁뱅이의 악몽을 적어놓은 것처럼 두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몹시 진실되다. 그래서 나는 의문을 갖는다.

이것은 두자춘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왕근의 딸에 대한 이야기인가. 살던 곳도 태어난 곳도 몹시 불분명한 두자춘과 다르게 왕근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한 질량을 갖고 있다. 흡사 두자춘이 아니라 왕근의 딸이야 말로 진짜로 있었던 사람인 것 처럼 말이다. 나는 두자춘이 떠난 후 그 세계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가 떠난 후 왕근의 딸은 자식이 죽은 그 세계에 그대로 남아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꿈처럼 스러져 사라지는 걸까.
 
여기 내가 생각한 두자춘전을 하나 더 써서 남긴다. 모든 이야기는 원전과 같다. 단지 마지막 부분이 다르다.
 
술에 취한 노규는 왕씨부인의 아름다운 - 무표정한 - 얼굴을 보면서 소리를 지른다. 옛날 가대부의 아내는 남편을 천하게 여겨 웃지 않았으나 남편이 꿩을 맞추자 마음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나의 글솜씨와 인품은 꿩을 맞추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데 너는 왜 나를 보며 웃지 않는 것인가. 남편이 아내의 존경을 얻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내가 여자에게 바보취급을 받는다면 재산이 무엇이며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보라. 노규는 방 구석에서 불안하게 부모를 바라보고 있던 자신의 장자를 들어 왕씨 부인의 앞에 들이밀었다. 술에 취한 노규는 얼굴이 붉고 그 숨은 거칠다. 왕씨 부인은 아이를 보지도 노규를 보지도 않는다. 흰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눈은 슬프게 가라앉았다. 입이 떨리는 듯 하더니 곧 굳게 닫힌다. 보란 말이다. 노규는 왕씨 부인을 다그친다. 아이를 흔들며 소리 친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운다. 노규가 굳게 잡은 손이 고통스러운 듯이 아이가 몸을 비튼다.
 
노규는 방을 나선다. 문은 연 채로 그대로다. 방 밖에서 불안하게 기다리던 하녀 하나가 비명을 지른다. 마님, 도련님. 도련님이. 다른 하녀 하나가 뛰어와 방 안을 살펴보고 비명을 지른다. 의원을...의원을...하고 말을 더듬으며 기듯이 자리를 떠난다. 노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숫제 도망치는 듯 하다.
 
바닥에 엎드린 왕씨 부인은 아이를 안고 있다. 흰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검은 머리는 더욱 검어졌다. 커다랗고 촉촉한 눈은 더욱 커다랗고 촉촉해졌다. 입은 굳게 다물고 울음을 참는다. 어매, 어매요. 어매요...중얼거리는 소리가 난다. 왕씨 부인의 목소리는 아니다. 작고 붉어진 것이 어머니를 부른다. 왕씨 부인은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는다. 다만 피가 흘러나오는 곳을 손으로 부여잡고 피를 막는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
 
왕씨 부인은 괜찮아 엄마가 여기있어 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왕씨 부인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은 아주 어릴 적 병약하여 항상 아버지에게 안겨있던 그녀에게 아버지 왕근이 그녀를 달래며 해주었던 어떤 이야기이다. 이야기에서는 두자춘이라는 건달이 있었는데 그는 재산을 탕진하고도 기회를 얻어 신선이 될 수 있는 시험을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면 신선이 되게 해준다는 스승의 말을 신의를 다해 지켜 신선이 된다. 그리고 모든 자신의 잘못과 고통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왕씨 부인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까 궁금해한다. 아이는 이제 말을 하지 않고 자꾸 축 늘어진다. 의원은 아직도 오지 않는다.
 
왕씨 부인은 아이를 꼭 껴안고 울음을 속으로 삼키다가 방 한 쪽 구석에 서있는 당신을 발견한다. 당신은 이곳에 어울리는 복장이 아니다. 왕씨 부인은 당신이 신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신의를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신선. 희노애구구욕의 칠정을 모두 잊은 자신에게 사랑마저 잊었는지 확인하러 온 신선. 그리고 이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도. 혼자 몸으로 병약한 딸을 키우느라 모든 자산을 탕진한채 늙어버린 아버지도. 바닥에 가득 흘러가는 자신의 눈물과 아이의 피도. 그래서 정신이 나가버린 눈으로 당신을 쳐다본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 당신은 왕씨 부인에게 무슨 말을 할지.
 
24년 8월의 글이다…
 
 
.....왕씨 부인은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운다. 노규는 그 날로 나서서 큰 길로 도망치다 달리는 말에 치어 죽었다. 의원이 제 때에 당도한 덕에 아이는 순조롭게 회복한다. 말이 늦되는 것은 아닌지 걸음이 느린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걱정하였지만 왕씨 부인은 서툰 발음으로 괜찮아요 그래도 고맙기만 해요. 라고 말한다. 아이는 이제 왕씨 부인을 보고 곧잘 웃는다. 왕씨 부인 또한 아이를 보며 웃는다.

아버지인 왕근은 가끔 왕씨 부인을 찾아온다. 아버지는 늙었지만 아직 정정하다. 가끔 왕씨 부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왕씨 부인은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버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왕근은 알 수 있었다. 왕근은 마음 속 깊이 천지신명과 신선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왕씨 부인이 그 뒤로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신선이나 다름없는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그녀가 불행해지는 곳으로는 갈 수 없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기로 결심하였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겠다. 20세기의 이야기이다.
 
나라고 20세기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20세기의 후반에 태어났고 이제 21세기에 살았던 시간이 더 길어져서 20세기의 일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설령 아니 그렇다고 해도. 사람에겐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어느날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창문 밖의 눈오는 밤을 쳐다본 일. 우리 외엔 아무도 없는 호텔의 옥상에 앉아서 불꽃놀이를 봤던 일. 정글짐의 꼭대기에 앉아있다가 말을 걸었던 일.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더운 여름에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던 일. 아버지가 저 멀리 해변의 트라이포트를 향해서 저건 고래의 뼈야 라고 말해줬던 일 같은거 말이다. 사기꾼 자식 진짜.
 
20세기의 전경이라고 해도 지금과 크게 다를바는 없다. 나는 공업도시에서 자랐다. 어느 정도 공업도시였냐면 아파트를 벗어나면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사는 저층의 주거지들이 있었고 바로 공장단지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를 가려면 공장 단지를 가로질러야 했으니까 말은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아이들의 통학이 위험하고 어쩌고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엔 초등학생들의 값이 쌌다. 한 두명 정도 한꺼번에 등교에 늦어도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1학년 때 나는 반친구 두명과 놀다가 깜빡 늦어서 30분 정도 늦게 등교했는데 선생님은 우리가 오지 않은 것도 몰랐다)
오히려 내가 1학년일때 고가도로로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는데 서럽게 울고 있는 나를 공장 아저씨들이 번쩍 들어서 사무실에 데려가더니 약을 발라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제강제철을 위주로 하는 2차 가공 공장이었는데 그곳에서 가공된 철강제품을 인천의 수출단지로 보내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다. 얼굴이 시꺼멓게 검댕이 묻어서는 옳지 옳지 하며 사내니까 울면 안돼 하며 나를 토닥이고 보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공장을 아주 좋아한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지금과 결정적으로 다른게 있다면,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초등학생들이 정말 값이 싸서 역곡시장에 가면 싱싱한 초등학생 한 명에 오천원 정도했으니까. 어딜 가나 친구들이 많아서 아파트 아무 곳에나 가도 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다치거나 구르거나 하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나와 누나가 이유없이 꿀벌을 포충망 가득히 잡아서 가지고 다니다가 포충망이 찢어져서 내가 꿀벌에게 수십군데를 쏘였을 때도 (중간에 좀 다른 얘길 하자면 몇 년 후 소년이 꿀벌에 잔뜩 쏘여서 아나팔락시스 쇼크를 일으켜 죽는 영화가 나왔는데. 어린 나는 와 죽을뻔 한거구나 하고 소름끼쳐했다.) 내 친구가 통학길에 진도잡종인 커다란 개한테 청바지가 찢어지도록 물렸을 때도 어른들은 대단치않게 생각했다.

우리는 어땠는가. 어린애들도 보통 자기의 생명과 안전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한달에 두명 정도는 아파트 정글짐에서 뛰어내리다가 팔을 부러트렸으니까.
 
그렇다면 20세기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생명과 안전보다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건 우리 부천시 소사구만의 가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나는 가난과 불화의 상징 부천시에서 자랐다.) 100원짜리 동전이 초등학생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 무슨 동전 몇 닢에 목숨을 파는 용병 같은 소리인가 하드보일드 하구만. 하지만 정말이다. 20세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는 재화들은 대부분 100원 아니면 200원이었고. 500원짜리는 이미 고급의 영역이었다. 
 
여러분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간단히 말해주자면 거의 모든 아이스크림이 200원을 넘지 않았다. 500원을 넘어가는 것은...부의 상징 월드콘 정도였다. 엑셀렌트? 내가 너무 늙어보이지만 엑셀렌트는 내가 이미 좀 자아가 생긴 어린이였을 시절에 번개처럼 등장했다. 황금색 껍질을 가진 그런 비싼 물건은 어른들이 사주지 않으면 절대로 먹지 못하는 고급품 중의 고급품이었다.

우리 동네 태권도 사범님이 어느날 아주 침통한 표정을 하면서 얘들아 100원이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데 왜 뽑기(그 뭐냐 요즘엔 가챠라고 하지)를 하니? 그런 잡동사니를 사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렴. 이라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다. 이는 베트남 전에도 참전하신 진짜 20세기 인간 사범님과 우리 20세기 말의 어린이, 자본주의 악마 졸개들 사이의 차이였는데 우리는 먹을 것보다 재화(아무런 가치가 없더라도)와 도박(가챠는 도박이니까 말이지)에 혼이 나간 말세의 자식들이었다.
 
그런 말세의 자식을 가졌으면 응당 장난감을 좀 사줘야 했을텐데 부모님은 누나와 나에게 장난감을 그닥 사주지 않았다. 째째하다기 보다 아버지의 월급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쯤 아버지가 집에 가져다 주시는 돈이 80만원이라는 걸 알았는데 한국의 통계청 소비자 물가 지수 화폐가치 계산에 따르면 대략 1990년의 만원은 2020년의 이만육천원이다. 생각해보니 아니 집에 고작 200만원을 가져다 줬단 말인가? 확인해보니 1990년 기준 중위 소득은 92만원인데 명문대를 나와서 당시 모 기업의 이사였던 주제에 겨우 80만원을 받았다는 얘긴데 정말 믿을 수 없어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째째해서 나는 장난감이 거의 없었다.
 
대체로 가지고 노는 것은 사촌형의 장난감 중 더 이상 갖고 놀지 않는 것인데 나는 어른들이 꼴보기 싫어할만큼 내 장난감들 - 주로 레고였다 - 에 집착했는데. 가장 즐겨했던 것은 매일 5시쯤부터 공영방송에서 하는 만화를 보고는 그 만화의 내용을 내 장난감들로 재현하고 재창작하는 활동이었다.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때는 공영방송 외에는 제대로 된 채널이 없어서 하루 종일 만화만 틀어주는 채널 같은 건 없어서 아침에 만화를 보려면 잘 기다리다가 AFKN의 TV 방송을 봐야했다. 지금은 아날로그 TV송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 같지만. 그 때는 세서미 스트리트나 각종 일본 애니의 영어 더빙 버젼을 오전에 해줬기 때문에 다음 방송이 뭘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멍하니 AFKN을 봤다. 만약에 마징가 같은 것의 더빙 방송이 나오면 대박이었다!
내가 세서미스트리트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면 외국인들은 가만 듣고 있다가 근데 너는 한국인이잖아?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나도 어릴 때 세서미 스트리트를 봤다고. 내 인생에서 가장 영어를 잘했던 건 4세에서 7세까지 였다고. 집에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혼자 영어로 노래부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녔으니까.
 
어느날 나는 환상특급 (이게 뭔지 궁금하다면 트와일라잇 존을 검색해보면 된다)을 보다가 "악당의 최후"라는 제목을 보고는 어머니에게 가서. 엄마 엄마 최후라는 게 무슨 뜻이야?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스튜어디스 출신이기 때문에 영어도 꽤 잘 했는데 하루 종일 영어를 물어보는 내게 좀 질려서는 뭘 물어보든지 좀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시기였기에 그 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건 죽었다는 뜻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는데 난 악당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죽기를 바라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결말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왈츠를 추듯이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줬으면 한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그 최후라는 말의 무서움을 떠올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나는 때때로 그렇게 아무도 모를 이유로 우는 경우가 많았어서 누구도 나를 달래주지 않았고. 나 또한 아무에게도 내 슬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공업도시라고 해도 주변은 전부 산이었다. 그야 여긴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 바다 근처에서 자란 사람이 자기 어릴 때 얘길 해주면 홀린듯이 듣곤 했는데. 아파트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바로 저수지와 논밭. 그리고 과수원이 있었다. 지금 그 곳은 멋진 이름의 수목원이 되었는데 예전 논밭과 과수원이 있던 시절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온실 같은게 생겼잖아요 라고 말하면 우리 때는 비닐 하우스가 있었다구 라며 엣헴거리고 싶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게 지겨워지면 나가서 놀았는데. 내가 좋아하는건 역시 모래 장난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 아파트에서는 동네 놀이터의 바닥재를 교체한다면서 투표를 했는데 분명 우리 동에서는 압도적으로 모래를 밀었으나 결과는 합성수지로 결론이 났다. 모래 장난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들 까먹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못 분해했지만. 생각해보면 모래 장난을 하고 온 아이가 얼마나 더럽고 집에 모래를 잔뜩 흘리는지 까먹은 것은 내 쪽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모래 장난을 할 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다름 아닌 비가 온 직후이다! 그 전 까지 함정이나 파고 탑이나 쌓아올리는게 전부였다면 비가 오면 그 꾸정물로 해자를 가득 채우고 강을 만들어 그 위에 다리를 세우는 것도 할 수 있었는데. 어릴때 부터 건축이라면 이상하게 환장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신나는 이벤트라서 비가 그치기만 하면 집을 뛰쳐나가서 거대한 마을을 축조했다. 크고 멋지게 만들면 만들수록 동네 어린이들이 몰려들어서 나의 거대 마을에 고사리손이라도 보태겠다는 뜻을 표하곤 했는데. 나는 관대한 건설자요 시장이었기 때문에 동전 하나 받지 않고 그들의 참여를 허락했다.
 
시간 제한은 항상 5시였다. 집에 가야할 시간이다. 만화가 할 시간이었기 때문에 집에 가서 손발을 씻고 혼나지 않으려면 세수도 해야했다. 만화를 보면서 모로 누워있으면 누나가 와서 나 이거봐야해 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만화를 틀었고 그것도 보면서 구석에서 누워있으면 어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불렀다.
 
나는 오늘 반찬이 뭔지 묻지 않는다. 아까부터 갈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24년 8월의 글이다.

 
M의 이름에는 어떤 M도 들어가 있지 않다. M을 사랑한 적도 없지만, 첫사랑에 대해서 떠올리면 M이 떠오른다.
M에 대해서 이제 까지 몇 번이나 글을 써보려고 시도해보았는데. 좀 처럼 쉽지 않다. M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M에 대해서 떠올리면 약하게 보이기 싫어하는 그 나이 여자애 특유의 말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너 여고 나왔지? 라고 물어보면 응, 이러거나 어, 라거나 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왜? 문제 있냐? 라고 대답한다. 네가 어떤 개소리를 하려는지 안다는 듯이 말이다. M은 강남에 있는 유명한 사립여고를 나왔다. 여자애들은 귀찮아 라고 말하길래 왜? 라고 물어보니 아니 쓸데없이 꺄꺄 거리고 기회만 있으면 손잡으려고 하고. 가끔 안아달라고 그러고. 라고 하길래 너 고등학교때 숏컷했지? 라고 하니까 어떻게 알았어 2학년때 까진 숏컷이었지 하고 씨익 웃었다.
 
M은 도대체 뭐랑 닮은걸까 하는 생각을 곰곰히 한 적이 있었다. M은 눈썹이 칠한 것 처럼 두껍다. 눈은 무쌍에 시원한 눈매인데 웃고 있으면 만화에 나오는 눈웃음 처럼 된다. 콧대는 곧고 입은 담배를 필 때가 아니면 꾹 다물고 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곧다. 찰랑거리게 긴 검은 머리를 대충 매만지며 턱을 까딱하며 나를 바라본다. 뭘 쳐다보는데? 라는 뜻이다. 너는 동물을 닮았어. 라고 말하니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무슨 동물? 이라고 물어본다. 그 때 나는 머릿 속으로는 미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암사자를 떠올렸지만 19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리를 하면 안된다는 분별 정도는 있어서.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빨이 많고 뾰족한 동물 닮았어 라고 대답한다. 19살인 M은 나에게는 특히 가차가 없어서 너는 해서는 안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라고 말하며 내 이마를 민다.
 
인터넷으로 사람을 만나면 안된다고들 많이 말하기 전에 M과 나는 인터넷으로 알게 되었다. 수능보기 1개월 전부터 자체 휴식을 한 덕에 여유로웠던 나와 수능 보는 날에 어쩔수 없이 시험은 보러 갔지만 시험 시간 내내 잠만 잔 M은 친구들이 온갖 입시 준비에 바쁜 무렵 인터넷을 해대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채팅과 게시물 기능.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그리기 기능이 있는 커뮤니티였다. 나는 M의 말투가 너무 거칠어서 또래의 남자아이라고 생각했고 M은 내 말투가 너무 점잖아서 또래의 여자아이라고 오해해 우린 금세 친구가 되었다.
 
내가 수능을 보기 1개월 전부터(그 시절엔 수시가 없었다. 나는 나이가 많다 까불지 마라.) 자체적으로 공부는 안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M은 본인과 비슷한 케이스 (나는 고3 내내 모의고사 전국 5% 이내를 유지했다.) 라고 생각했는지 왠지 이것저것 나에게 장래의 고민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지는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그림을 그리는 프로가 되고 싶다는 얘기였다. 도대체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 커뮤니티에 그림 좀 올려보실래요? 라고 하자. M은 처음에 엄청 쑥스러워하면서 지금 PC방에서 하는건데 마우스로는 잘 못 그려요 잠시만요. 하고 후다닥 뭔가를 올려서 보여주었다.
 
반전은 없이 엄청 이해하지 못할. 형태도 색도 엉망인 그림이 하나 올라왔다. 중학교때 부터 친구들 중에 한 명 씩 있지 않은가? 나는 만화가가 될거야 하고 연습장에 하루 종일 뭘 그리는데 뭘 그리는지는 모르겠고. 뭐 그런 친구들. 딱 그런 그림이 하나 올라왔기에 아 이 친구는(나는 직접 만나게 될 때 까지 M을 계속 동갑인 남자애로 생각했었다) 대학에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등학생의 나 치고는 굉장한 분별력을 발휘해서는. 그림을 몇 개 더 올려주세요. 지금은 진짜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대답했다. 마우스가 진짜 손에 안 익네요 하며 M은 정말 많이 쑥스러워했다.
 
직접 얼굴을 보게 되기 까지 얼마나 걸렸던가. 2개월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M도 한가하기 짝이 없었고 M은 경솔하게도 본인이 알바하고 있는 장소를 나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뒷 쪽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길래 갔더니 검은 생머리의 예쁜 여자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어서 나는 깜짝 놀라. 아 죄송합니다. 하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M은 이 예의없는 새끼야 하고 나를 쫓아와서 삥을 뜯는 깡패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나를 질질 끌고 갔다.
 
그냥 멀쩡하게 공부로 대학을 갔다는 것 부터 시작해서 내가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재수없는 새끼야. 기만자 새끼야 하고 M은 화를 냈지만. 사실 더 놀라운 것은 M쪽이었는데. 그림을 올린지 3일 정도가 되자 갑자기 아 이제 마우스가 손에 익네 하더니 말도 안되는 뎃생으로 그림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속도였는데 나와 30분쯤 채팅을 하다가 야 다 그렸다 누나 그림에 댓글 달아라 라고 해서 가보면 프로가 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러프를 올려뒀고. 정말로 손이 익지 않았을 뿐이었는지 그림을 올리면 올릴 수록 뎃생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일반 인문계를 나왔을 뿐인 내가 누군가의 진짜 재능을 목격 한다는게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짝이었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주변에서는 우리 둘을 한 쌍인 것처럼 다뤘지만. M은 그 나이대의 여자애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를 더 좋아했고 당시의 나는 놀라울 정도로 이성에게 담백했다. 남중에 남고를 나와서 이성이 접근하면 깜짝 깜짝 놀라고 과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웃겼을 수는 있었던 것 같다. 나보다 딱 2개월이 어린 M이 나와 대화할 때의 1인칭은 누나였다. 누나가 말야. 누나 배고프다. 누나 담배피러 간다 따라와라. 나는 그렇게 M의 말이면 고분고분하게 듣곤 했다. 20대 내내 M이 나에에 남긴 영향은 컸다.
 
예를 들어 몇 년이나 후에 데이트 상대의 학교를 물어보면 이상하게도 M이 다녔던 학교 출신이 엄청 많았는데. 어느날 결국 그 학교 출신의 사람과 사귀게 되어 그 학교를 진짜로 가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친구에게도) M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M이 워낙 학교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처음 가본 곳인데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쯤엔 이미 M과 연락 할 수 있는 채널이 다 끊겨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강남 어딘가 사무실 뒷편 흡연장에서 야 요즘 뭐하냐 하고 서로 배실배실 웃으면서 안부를 나누고 헤어진 것이 다였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M이 나에게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은 18살, 19살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얘기라고는 학교와 가족 그리고 친구 얘기가 다이기 때문이다. M은 항상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지만(이 누나가 너 말고 친구가 없겠냐?) M의 최초의 이성친구였던 나는 M의 그 때 까지 인생을 통채로 알게 되었다. 거꾸로 나는 M에게 내 그 때 까지의 인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딱히 이유는 없었다. 나는 사실 항상 M의 재능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M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더 중요했지 내 얘기를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내가 M을 쳐다보면 M은 항상 재수없어. 내가 그렇게 좋냐? 하고 쳐다보지 말라고 윽박질렀지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일은 없었다.
 
M에게 6살인가 7살이 많은 남자친구가 생기기 전. 서울 어딘가에 골목을 나와 나란히 걸어가던 M은 뜬금없이 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는 찐따 답게 어어 뭐야 라는 얼간이 같은 리액션을 했는데. M은 당황하지도 않고 누나 춥다. 라고 하며 내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역에 도착할 때 까지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이라서 정말 추운 날이긴 했고 M은 빰이 얼어서 빨갛게 되어 있었다. 나는 18세 하고도 1개월 쯤. M은 생일이 지나지 않아 17세 하고도 11개월쯤 되었다.
 
글을 쓰다가 M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한다면 M은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M이라면 아마 시큰둥하게 추워서 손 좀 잡은거 가지고 그렇게 기억씩이나 하고 있는거 보면 넌 달라진게 없다. 라고 할 것이다.
 
어느날 SNS에서 내가 처음 보는 계정이 나를 차단한 걸 발견했다. 나를 차단한 계정이 한 두개가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기엔 팔로워가 수천명이 넘어가 만명이 다 되어 가는 계정이다. 궁금증이 일어서 구글에서 검색해서 들어가보니 일러스트레이터의 계정이다. 온갖 언어로 계정주의 그림에 대해서 상찬하는 코멘트가 가득하다. 예전에 날 알던 사람인가 싶어서 미디어를 찾아보니 그림이 눈에 익다. 네 그림은 십년이 지나도. 이십년이 지나도 알아 볼 수 있다.
 
하, 이 새끼. 하고 생각한다. 하여간 나는 아직도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좋아한다.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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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 Feather, Fly like an arrow.  (0) 2024.08.18

만22살이 되고 2개월 쯤 후였다고 기억한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나는 좋아하던 누나한테 연락이 와서 누나가 살고 있는 동네로 갔다. 피씨방에 있던 그 누나는 어 왔니 잠깐만 하고 게임을 계속했고 나는 3시간 정도를 따로 떨어진 자리에서 게임을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게임이 끝나고 그 누나(누나라고 해도 겨우 만23살이었다)는 나를 동네의 콩나물국밥집으로 데려갔는데 거기서 눈도 잘 마주치지 않으며 누나가 했던 이야기는 두가지이다. 1. 예전에는 네가 편했지만 요즘에 네가 불편하다. 2.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동생으로서 좋아한다.
 
나는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한 입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누나가 하는 얘길 들었다. 그럼 누나랑 나랑 몇년 동안 있었던 일은 뭐였어요? 같은 질문은 하지도 못했다. 지금의 나라면 푸하하 하고 웃고는 아주 웃기고 있구나 하고 말했을텐데 그 때의 나는 22살이 가지고 있을 법한 질문과 대답 밖에 없었다. 누나가 내 친구의 친구(나와 같은 나이였다)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걸 안 건 그 뒤 몇 주가 지난 뒤였다. 누나로서는 그닥 내키지 않는 정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누나는 깨작거리고 있는 나에게 근데 너 어떻게 집에 갈거야 라고 물어보았다. 지하철은 끊긴지 오래였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목이 메어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아직 차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뒤돌아서 가면서도 누나가 나를 다시 불러주길 기다렸다. 차가 있을 리가 없지. 새벽 2시 쯤이었고 차가 없는 건 누나도 모를리가 없었을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22살이 가지고 있을 법한 생각 밖에 없었다. 택시를 타려다가 누나가 불렀다고 술자리도 중간에 취소하고 이렇게 휭하고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멍청하고 싫어서 집에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 걸어가면 몇 시간이나 걸릴테고 누나와 거리가 떨어졌다는 실감이 들테니 다시는 이렇게 쉽게 여기까지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5시간이 걸렸다. 지금 다시 지도를 켜서 5시간이나 걸릴건가? 하고 찾아보았는데 역시 22살이나 가질 법한 지혜밖에 없었던 나는 아는 길로 간답시고 학교를 거쳐서 노량진-영등포를 거쳐서 집에 갔기 때문에 5시간이나 걸린거였다. 새벽이 끝나고 있었고 nujabes 앨범을 8번쯤 들었지 않았나 싶다. 졸립고 이상하게 상쾌해서 오전 알바도 취소하고 내내 잤다. 그 뒤로 누나가 몇 번 나를 불렀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19살부터 22살까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였던 누나와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의 내가 평가하기로는 나의 그 비이성적인 믿음 - 걸어서 집에 가느라 몇시간이나 걸린다면 이제 앞으로 이렇게 부른다고 쉽게 가지 않을 거란 생각 -이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다. 비이성적인 믿음이야 말로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법이다.
 
공정하게 말하기 위해 그 누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사회화도 덜 되어 있던 야생의 남자애 -내 얘기임- 하나를 잡아다가 밥도 먹이고 칭찬도 하면서 열심히 교육해서 쓸만해졌다 싶었더니 갑자기 자길 좋아한다고 드니까 침팬지 연구를 하는 인류학자에게 어느날 부터 침팬지들이 구애를 하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 누나는 나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애로 키우고 싶었던게 아닐까. 테이블매너나 데이트 하는 방법. 여자가 생각할 법한 좋은 남자가 되는 법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불행히도 나는 친누나도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도 잔소리를 들었기에 교육효과는 두배였다. 어디를 가나 아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지 말랬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래 여자애들을 대했다.
 
나는 그래서 그 나이대에는 또래 여자애들한테 그럭저럭 인기가 좋았는데. 그야 70%이상 집 안과 집 밖에서 계속되었던 사회성 교육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누나는 본인이 그렇게 키워놓고 내가 또래들한테 인기가 있는 걸 티내지 않게 못마땅해했고 인정도 하지 않으려고 들었는데 누나의 가장 친한 후배가 나에게 집착해서 셋이서 만나는게 불가능해졌을 때에도 누나는 나에게 네가 뭐 잘못한거 아니야? 예의범절을 지켜야지 하고 내 탓을 할 정도였다.
 
누나는 한 번 그리고 뜬금없이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거 아니니?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그냥 게임을 하듯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할 뿐이고 나도 그런 대상인거잖아. 나는 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라고 말했다.

내가 그 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여기에 쓰지 않는다. 제법 대단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그걸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나는 내 대답을 퍽 마음에 들어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앞서서 결말을 먼저 이야기했다. 누나가 나와 데이트 하는 사이가 되는 일은 없었고 (웃기고 있네 그 전에 하던건 데이트가 아니고 뭐냐 진짜 22살, 23살 둘이서 염병 천병 아이구 정말) 사실 그 누나가 하는 말이 맞았다. 연애의 관점에서 나는 그 누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후에 갑자기 깨달은거지만 나를 연애의 상대로 좋아했던 것은 그 누나 쪽이었다.

그 누나도 그 때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야 무엇이 사랑인지 이해하는 법이다. 우리의 관계는 반대로였다. 그 누나가 나를 연애대상으로 생각하고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나는 항상 그랬다. 나는 그 뒤로 오랫동안 거울처럼 누군가가 바라는 것을 되돌려주는 그런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나의 오랜 병이 되었고. 이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누나의 이상적인 연애대상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 후에, 좀 비극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누나를 잃은 나는 좀 더 차갑고 건조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 누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단지, 그 전에는 그 누나가 그걸 바랐기 때문에 친절하고 햇살처럼 밝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와 동갑이었던 남자친구와의 연애는 몇개월 가지 못했다. (그 후에 나를 차고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1개월 길어봤자 3개월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구여친들 중 그 누구도 확인 및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가설로만 남아있다. 쳇)
 
위에서 얘기한 것 처럼 누나는 때때로 나를 찾았고 부르기도 했으며 나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따로 만나는 일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그 뒤로 연애를 쉬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여자친구가 있을 때 여자들이랑 연락하면 안된다고 가르친게 다름아닌 그 누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뒤로 딱 두 번 더 단 둘이서 만났다. 나는 좀 더 건조하고 냉정한 사람이 되어 누나의 이상적인 남자애와는 거리가 멀게 되었고. 누나는 여전히 날씬하고 예뻤다. 두 번 다 술을 마셨다. 

이 시험 합격하면 뽀뽀해준다면서 나 합격했어. 진짜로? 어려운거 아니었어? 어...나는 천재니까...정도로 실없는 이야기나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뽀뽀는 해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게 엄청 짜증나는 걸 보니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대체로 그 누나의 연애 얘기를 들어주고 공통의 지인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누나는 한 번도 내 여자친구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술을 마시던 나는 뜬금없이 누나 첫째는 딸이야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처녀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얘가 라고 말했지만 나는 누나가 결혼하려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누나 이게 누나랑 나랑 만나는 마지막 날이야 라고 말했다. - 우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야. 누나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쳐다봤다.
 
내가 21살때의 일이다. 어느 역인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우리의 관계에 지치고 실망했던 나는 이제 이 누나랑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어느 역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얼굴을 쳐다보지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이걸로 끝이라는 생각에 안심과 짜증이 뒤섞여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누나는 남자친구와 만나러 가기 위해 역에서 밖으로 나가야 했고 나는 그 때 ...하여간 어딘가로 가는 길이었다. 여기서 - 그 누나가 있는 곳에서 - 벗어나기만 하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누나는 개찰구를 찍고 가는 나를 뛰어서 쫓아오더니 나를 붙잡고는 울기 시작했다. 너 그러면 죽여버릴거야 너 진짜 죽여버릴거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누나는 겨우 22살이었으니까 그럴만했다.) 나는 내가 뭘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살짝 겁을 먹어서는 이 사람이 어떻게 안거지? 하는 생각만 했다.
 
친구의 말로는 나는 가끔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있다고 했다.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누나가 결혼하는 주에는 전화가 와서 받았다. 나 진짜 결혼하기 싫어, 니가 나 어디로 데리고 도망가면 안되니? 라고 말하며 울었다. 나는 통화를 듣고 있다가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 사람은 나의 19살때부터 22살때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의 20살때부터 23살때 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또한 내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우리는 그 뒤로 정말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공정하게 말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 만난 여자친구는 누나와 같은 나이에 키도 비슷한, 학교도 같았던 사람임을 밝힌다. 3개월을 못가고 헤어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차였다)
 
그리고 그 누나의 첫째는 딸이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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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9] Forest, Gone are the days.  (0) 2024.08.18

 
광고 사진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찌푸린듯 웃는 듯 저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다. 흰 옷을 입고 바싹 말라서는 머리 끝이 부드럽게 말려있다. 이 사람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떠오른다. 떠오른 사람은 친구일 때도 있고 후배 일 때도 있다. 광고를 멍하니 오래 쳐다본다. 요즘 나는 자주 이런다.
 
이제는 죽은 캐나다 문학 평론가 노스럽 프라이의 얘기를 잠시 해보자. 이제는 내용도 가물가물한 책 <비평의 해부>와 <구원의 신화>에서 그는 원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신화적 이야기의 요소는 그 이야기 안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형으로서 전유되고 또 유비되어 다른 상징에 사용되고, 그렇게 변형된 신화의 원형은 현대의 서사에서도 발견된다...정도의 이야기이다.

신화나 문학에 익숙한 몹쓸 인간들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를 뭣하러 저렇게 설명하고 있지? 하는 생각을 하겠지만. 좀 더 설명을 해보자.
 
현대의 탐정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인 싸움도 잘하고 고독한 탐정은 아무런 댓가 없이 약자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데 이런 영웅의 이미지는 캔터베리 이야기 등 중세의 낭만시 영역에서 왕과 기독교에 충성하고 약자를 위해 댓가 없이 싸우는 용감한 기사의 이미지에서 시작했으며. 이 용감한 기사의 이야기가 시작한 원형은 술자리에서의 약속을 위해서 메두사를 해치우기 위한 여행을 떠난 페르세우스이다.

이처럼 모든 이야기에는 원형이 존재한다. 우리가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원형의 변주일 뿐이다. 설명하고나니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누구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나는 자주 듣는다.

인상적인 경험이 있다. 외가 어른의 장례식장에서 그냥 정문에 서있을 뿐인데. 생전 만나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한명 씩 ㅇㅇㅇ님 장례식장이 몇 호실인가요? ㅇㅇㅇ회장님은 와 계시나요 하고 물어보기에 신기해서 어 혹시 제가 누군지 알고 여쭤보시는 건가요? 라고 물어보니까 우아한 숙녀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 쪽 집안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생기셨는걸요 라고 대답해주셨다.

물론 지금 하는 이야기는 얼굴이 닮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완전히 남남인 누군가가 있는데. 나를 보고 그 누군가를, 혹은 그 누군가를 보고 나를 떠올리는 일, 말하자면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누가 우리를 보고 있을 때 우리의 무엇을 보는지 이해할 수 없긴 하다만.
 
어느날의 일이다. 온수역 1호선 플랫폼의 상행선 중간 쯤 벤치가 놓여져 있는 곳에 서있는데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좀처럼 전화를 하는 후배가 아니어서 이동하는 중이었지만 일단 전화를 받았다.

별로 대단하지 않은 신상 얘기를 주고 받더니 후배는 갑자기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응. 되게 똑똑한 척을 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에요. 응. 그러고는 후배는 머뭇거리더니 말한다 선배를 되게 많이 닮았어요.
 
내가 평범하게 생겨서 나랑 자기 아는 사람 누구 닮았다는 얘기 많이 듣는데 실제로는 안 닮았을걸?
아니 진짜 많이 닮았어요. 그리고 되게 좋은 회사 다녀요. ㅇㅇㅇㅇㅇ이에요.
오 좋은 회사다 나는 면접도 못 본 회사인데 능력있는 사람인가 보지.
선배도 좋은 회사 다니잖아요.
아니요 선배는 그냥 공장 다닙니다.
 
이미 약속은 늦었다. 그런데 후배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과 아직 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그런 이유없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다.) 
 
근데 얘기하는 것만 들어보면 진짜 비호감에 잘난척만 엄청 하는 사람인데 너랑 친해?
네 저랑 많이 친해요. 연락도 자주 하구요.
나랑 닮았다는 것 빼고는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말야.
괜찮은 사람이에요. 여자친구도 되게 예뻐요. 선배랑 닮은게 오히려 단점이죠. 
 
후배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 시점에서 그래 나 약속 있어서 이제 그만 끊어야겠다 또 연락하자. 라고 말해야한다는 걸 알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머릿 속에 떠오른 여러가지 말 중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그 사람 좋아한거니?
 
후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그거 알아요 선배는 진짜 잔인해요.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그 후배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나중에 다른 후배에게 물어보니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어느 한가한 날의 변덕으로 SNS를 뒤져 뭘 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머리가 하얗게 된 남자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귀여웠다.
...
 
형은 항상 내 여자친구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놀린다. 그렇게 10년 쯤 놀리기에 과학적인 접근법을 써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 어 뭐였지 맞다 공부를 잘함. 그리고 성실함. 가장 중요한 웃는 얼굴이 예쁨. 이라고 메모지에 쓰고는 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길 수 밖에 없어.
내가 안경을 쓴 사람을 좋아하는게 아냐 공부를 잘 하려면 안경을 쓰기 마련이고 (여기서부터 NG였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바싹 마르고 타질않아서 얼굴이 하얗게 된다고. 라고 말했더니 형은 웃는 얼굴이 예쁨 부분을 가리키고는 그냥 앞니가 큰 사람을 좋아하는거겠지.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니 맞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요새, 아니 요 몇년 동안 내 삶이 어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누군가를 볼 때 마다 누군가를 떠올린다. 웃는 얼굴이 겹쳐 보이고 예전에 들었던 말투를 들으면 속으로 깜짝 놀라 놓고는 다른 곳을 쳐다봐 표정을 감춘다.

나는 이 규칙성이 너무나 기묘하게 느껴져서 어느날 정리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머릿 속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를 선으로 이어보았다. 이 사람은 이 사람과 닮았어. 이 사람은 이 사람을 떠올리게 해. 그렇게 한참을 머릿 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머릿 속이 더 복잡해진다. 
모든 관계선을 지우고는 처음부터 다시 긋는다. 이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있었어 이 비슷한 일이 다른 사람과 있었지. 그리고 이 사람과 이야기하다보면 저 사람을 떠올리게 돼. 

그렇게 계속해서 줄을 잇다가 어떤 생각에 다다르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계속해서 생각한다. 이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었기 때문에 후회했어. 그래서 저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사죄인지 아니면 후회를 반복하지 않는 것인지 헷깔리기 시작했다.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전에 알았던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한다고? 왜 그런 짓을 하지?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백지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두개의 점을 연결하는 것 뿐이야.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나는 단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 사람들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지금을 후회하고 있을 뿐이란걸 깨닫는다.
 
언젠가 어느날 누군가를 만났다. 검은 셔츠를 입고 바싹 말라서 덩치가 작은 남자아이, 혹은 작은 새처럼 보였다. 나는 바람에 꽃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이 사람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미 가슴이 아려와서 오히려 쾌활하게 웃으며 조금 걸을래? 라고 말했다. 나는 걸어가며 내가 사과를 해야할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더 시간이 지난 어느날. 정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으면서 나는 순수하게 변덕으로 미안해. 하고 사과한다. 너한테 그렇게 하지 말아야했어 라고 말한다. 상대가 놀랐는지 아니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무 동요 없는 문자열이 다음에 커피나 한잔 해요 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제대로 말했는지 아니면 뭔가 실수를 했는지. 이 모든 것이 그냥 이기적인 충동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 그러자 하고 대답할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 그리고 쿳시의 지옥을 생각하자.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가들의 내세는 죽음의 순간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은 대심문관의 앞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이 전부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이야 말로 그들의 소설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언젠가 내가 대심문관의 앞에 섰을 때 대심문관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정말로 대심문관 같은 것이 있다면 그는 내 인생에 가장 친밀한 사람일 것이다. 내 인생 전체를 이해하고 판결을 내려 줄 사람 일테니 나의 모든 개인 서사를 꿰뚫을 수 있는 -  그러니까 내가 가진 모든 원형이 합쳐진 그런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볼까? 아니면 내가 이제까지 사랑해온 어떤 원형과는 상관없는 얼굴을 한 채로 나를 쳐다볼까?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무심코 기대한다. 어쩌면 대심문관은 당신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보길 바란 - 그리고 보지 못할 - 당신의 나이 든 모습을 하고 나를 내려보고 있지 않을까? 단정한 이마와 흰 얼굴을 하고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보며 지금부터 내가 해야할 일-참회와 고백-을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나는 혹시 그 때가 오면 눈물을 제대로 참고 대심문관에게 당신을 만난 지금이 나의 모든 인생 동안 기다려온 단 한 순간이라고 제대로 말 할 수 있을까?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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