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1월 21일부터 1월 29일까지 있었던 일본여행의 정산을 마쳤다.

누구에게 돈을 주거나 할 필요는 없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혼자서 정산을 하고 반성을 한다.아무런 반성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깔끔하고 단정한 것으로 변할까.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반성이 없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우리는 전혀 나아짐이 없이 어린이 만화동산에 나오는 동물들처럼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살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이번 여행은 여행기를 안 쓰게 될 혹은 부분 부분의 감상기만을 쓰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플레이 리스트로 여정을 정리해두려고 한다. 평소에는 플레이 리스트를 준비하고 여행에 갔지만 이번 여행은 좀 급작스럽게 갔기 때문에 현지에서 노래를 찾아서 하나하나 들었고 개중에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못들은 노래도 많다.

어떤 상황에서 어울리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바람이 부는 나오시마의 바닷가에서 혹은 고야산의 눈내리는 밤 오래된 절방에 앉아서- 음악을 듣는 것.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번 여행에서는 음악을 그닥 많이 듣지 않았다. 가끔 어떤 음악보다도 여행지에서 들었던 소음들에 대한 기억이 나를 위로할 때가 있다.

이번 여행의 가장 명확한 주제가라고 한다면 San Holo의 "Light"일 것이다. (웃기지도 않지만) 여행 중에 이 곡은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갔다온 후의 1주일 동안 내내 이 곡을 들었다. 나는 이번 여행으로 무엇을 바랐을까. 

San Holo - Light

https://www.youtube.com/watch?v=ULHeRdgeT54


#추가

글을 다 쓴 다음에 깨달았지만, 링크가 아닌 소스코드로 연결시킬 경우 저작권 위반이다. 곡을 듣고 싶으신 분은 알아서 링크를 복사하시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작업 다 해놓고 다 지웠다. 무의미한 노가다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1) 출국, 새벽

새벽 4시, 밤을 새다시피 하며 나와서 캐리어를 끌고 버스에 탔다. 종일 피곤했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미친 아저씨처럼 중얼거리고 방향을 자꾸 틀렸다. 공항에서는 전직하신 부장님을 만났는데 둘 다 피곤에 절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항의 커피샵에 멍하니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는 금방 서로 갈 곳으로 가버렸다. 도대체 이 여행을 왜 가는건지, 왜 거기에 가겠다는 건지 나로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닥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래의 4곡은 아이폰을 플라이트 모드로 바꾸기 전에 급하게 애플 뮤직에서 찾았던 곡이다. 그렇다, 저 중에서 모임별의 곡은 애플 뮤직에 없다. 그래서 히로시마 공항에 도착 후 유투브로 노래를 찾아 들었지만 왜 이게 그렇게 듣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Coldplay - Fix You

https://www.youtube.com/watch?v=k4V3Mo61fJM 


모임별 - 영원이 시간을 관통하는 그 순간 나를 보지 말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9HO08GwRMG0


P!nk - Just Give Me A Reason ft. Nate Ruess

https://www.youtube.com/watch?v=OpQFFLBMEPI


Lukas Graham - You're Not There

https://www.youtube.com/watch?v=IC-bSbXZBcU


(2) 히로시마, 후쿠야마, 오카야마(쿠라시키 미관지구)

히로시마는 전에도 "거대한 영등포"라는 감상을 피력한바 있는데, 미야지마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등포. 이번 여행에는 뜻하지 않게 비중없는 조연 정도의 위치에 머물렀는데 16년에 히로시마 풍 뎃판야끼 먹다가 체한 것은 절대 잊을 수 없다. 언젠가는 복수하러 가고 싶다.

이번 여행의 세 개의 목적지 중에 하나였던 쿠라시키. 후배는 이 곳에 대해서 "커다란 전주 한옥 마을이지요"라고 얘기 했는데 그 말에 100%동감하지만 동시에 이 곳이 어떤 우아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 없다. 관광객들로 들끓으면서도 도시의 벽들이, 운하의 물들이 단단함을 가지고 존재했다. 우습게도 구라시키 시 자체는 일반적인 일본의 중소도시로 역에 내리는 순간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평범하다. 단지 구라시키 미관지구와 오하라 미술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로 아름다운 곳이 되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게도 찬란하게 빛나다가 쇠락한 도시가 주는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로서의 매력은 후쿠야마시가 더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공통적으로 히로시마에서 카가와에 이르기 까지 모든 도시가 조용한 우아함을 가지고 있다. 후쿠야마에서 겪은 교통정체 조차 뭔가 의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는 Dusko Goykvich의 곡 중 "The Fish"를 주로 들었는데 유투브에서 찾을 수 없어서. 하기 전체 앨범의 링크로 갈음한다. 

(실은 듣다 보니까 멈출 수가 없어서 이 앨범을 글 쓰는 내내 읽고 있다)


Dusko Goykovich - Samba Do Mar

https://www.youtube.com/watch?v=NCk1TrwVgAA


지금 생각해보니, 구라시키의 운하를 보면서 이 노래를 들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을의 코스모스와 좋은 여행을

山口百恵 秋桜コスモス

https://www.youtube.com/watch?v=89HBcy08960&list=PLREXMY7xQwKlyeUlpwptZ9KJ3_24Dlqw4


山口百恵 いい日旅立ち

https://www.youtube.com/watch?v=Dgv3vNdRVfU


(3) 오카야마(고라쿠엔)

오카야마를 상징하는 것은 오카야마 성과 고라쿠엔이며 이 지역에 가장 특징적인 것은 데님 소재의 직물들이다. 오카야마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세련된 도시였다. 전에 고베가 상상했던 것보다 근엄했던 도시였듯이 말이다. 화려한 조명이나 활기차게 들리는 음악 같은건 여기엔 필요 없어요. 하고 "거리"자체가 말을 하는 느낌이다. 나는 어쩔수 없이 여기서도 재즈를 엄청 들었는데 실은 나에게 재즈는 우아하거나 세련된 이미지가 아니라, 후회와 불안정함을 드러내는 이미지이다. 예전을 되돌리려는 듯이 클래시한 옷을 입고 길을 나서도 전과 똑같이는 절대로 될 수 없다. 나에겐 그런 것이 재즈이다.

아래의 곡들은 고라쿠엔의 찻집에서 팥죽(젠자이)를 마시면서 나온 음악들을 사운드 하운드로 잡은 것들이다. 과연, 훌륭하군 하고 감탄했는데. 팥죽은 별로였다. 애기를 들어보니 원래 녹차원이라서 녹차가 맛있지 젠자이는 그저 그렇다는 듯. 아이고


João Gilberto - LP Amoroso

https://www.youtube.com/watch?v=b81ywX5cUmQ


Desafinado - Eliane Elias

https://www.youtube.com/watch?v=iGctJbPaCBI


(4) 카가와(나오시마)

여행의 목적 중 하나가 지추 미술관에 소장중인 모네의 수련 이었던만큼 좀 억지로 루트에 포함이 되었다는 느낌인데(구라시키의 오하라 미술관에서 연작 중 하나를 본 뒤에 역시 그냥 나오시마는 가지 말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겨울 바다의 섬치고는 따뜻했고 역시나 겨울바다의 섬답게 미친듯이 바람이 불었다. 트위터에다가도 적었지만 이번 여행 중 가상의 여자친구와 동행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12번 차였고 그 중에 8번을 나오시마에 관련해서 차였다. 좀 명랑하려고 락 음악을 들으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대 실패였다. 바람 소리를 듣는게 더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세토 내해의 겨울은 맑았고 밝았다.

나는 자전거를 몰고 산길을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가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해변에 내려왔다. 바람이 불었고 저기 어딘가에 해가 떠있었다.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간절하게 바다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Maroon 5 - Don't Wanna Know

https://www.youtube.com/watch?v=ANS9sSJA9Yc


The Chainsmokers - Closer (Lyric) ft. Halsey

https://www.youtube.com/watch?v=PT2_F-1esPk


내가 너무 멀리 가버리기 전에 내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지만. 하고 중얼 거렸다.


(5) 카가와(다카마츠), 도쿠시마(도쿠시마)

도쿠시마에서 새벽3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첫 페리를 타러 갔다. 그 때는 Olafur analds의 "Island Songs" 앨범을 계속해서 들었다. 뭐 여행 내내 이 앨범이 거의 주제가라도 되는 양 짧게 짧게 이동하면서도 계속 들었지만. 이 앨범이 가장 어울리는 순간이 바로 이 때였을 것이다. 새벽이라 승객은 나 말고 여섯 팀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같이 탄 젊은 어머니. 간이 식탁에서 도시락을 먹던 남자. 구석에 앉아 바로 잠을 자던 사람. 나는 음악을 들으며 무언가를 그리고 쓰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깨어나보니 해가 떠있었고 와카야마에 도착해 있었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Ólafur Arnalds - Particles ft. Nanna Bryndís Hilmarsdóttir

https://www.youtube.com/watch?v=wEj7xYyj9n4


Ólafur Arnalds - Doria

https://www.youtube.com/watch?v=wFp6xnJbs0w


(6) 와카야마(고야산)

내가 장담하건데, 와카야마의 고야산이야 말로 블루스가 어울리는 땅이다. 전세계에서도 손꼽히게 블루스 땅이다. 물론 아무도 블루스를 안 들을 것 같긴 하다. 이 시기(1월)의 고야산은 눈이 많이 내리고 춥기 때문에 일본인은 앵간 해서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고야산의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서양인이거나 동양인 관광객(나) 뿐이었다. 석양을 찍으러 다이몬에 갔을 때 일본인 관광객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을 정도다. 그 사람들 사진만 찍더니 차에 타고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블루스가 어울린다고 쓴거 치고 블루스를 안 들은 것은 눈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련다.


Anthony Hamilton - Do You Feel Me

https://www.youtube.com/watch?v=1in5wAVOyIk&list=PLb75VpbNymWVrgZkU47_70_HGGFSxAsN1&index=2

B.B. King - The Thrill Is Gone ft. Tracy Chapman

https://www.youtube.com/watch?v=xVxCtt3s_1M&list=PLWCJOLJ9si2lFFJ_3lh3d3j9LbgIuVIhK


오래된 사찰인 콘고잔마이지에서 템플 스테이를 했다. 고다츠와 이불을 깔아줬고 저녁은 유토후의 가이세키 요리였다. 절에서 한게 아닌듯 맛있었고 즐겁게 먹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다 방의 창을 여니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가. 소리가. 소리가. 소리가 내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Nujabes - luv (sic.) pt 3 [ft.shing02]

https://www.youtube.com/watch?v=UyoYf7rZVGI


오쿠노인으로 가는 산 길에서는 아무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곳에 가게 된다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산 그 길에는 오직 나 밖에 없었다. 입산 제한이 걸렸었거든. 착한 어린이는 따라하지 마세요. 저도 거기 스님께 자기 책임하에 가라는 허락을 받고 간겁니다.

긴 산 길에는 수많은 묘지가 있었다. 천녀에 걸쳐서 모인 묘지 들이다. 아주 오래된 것들도 새로운 것들도 있었다. 나는 묻는다, 어떠한 번뇌가 있든지 이 곳에서 풍상을 맞고 시간을 보내고 생각하고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다 보면 부처가 될 지도 몰라. 

길은 대답한다. 우리는 바람이 되고 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겨울이 되고 번개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따뜻함이 될 것이다. 우리는 흐름이 되고 우리는 빛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아아, 우리는 소리가 될 것이야. 하고 나는 말한다.


(7) 오사카(난바, 신사이바시)

오사카는 나에게 내내 이런 느낌이다. 오래 된 영상으로 젊은 여성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듣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과 같은 나이였다면 나는 분명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을텐데. 하고


Tina Charles - I Love To Love

https://www.youtube.com/watch?v=ug2P9o6di2k


실제로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짧은 기차에서는 놀런즈의 다음 노래를 들었다. 

찾아보니 놀런즈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80년대 초반 일본에서 개최된 국제 가요제에서 우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과연 80년대 일본이 추구 하던 어떤 아름다움이 놀런즈가 원조란 말이지.


The Nolans I'm In The Mood For Dancing

https://www.youtube.com/watch?v=4UZYXFgQnAo


(8) 교토

교토에 있던 3박 4일 동안 매일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첫번째 날엔 이나리 신사, 두번째 날엔 가모가와 델타에서, 세번째 날은 롯카쿠인의 벤치에 앉아서였다. 지루하지 않았다. 지루 할 수가 없었다.


PETIT BISCUIT - Sunset Lover

https://www.youtube.com/watch?v=wuCK-oiE3rM


haruka nakamura - Lamp feat.Nujabes

https://www.youtube.com/watch?v=cHQ-oVSYkeU


Luv(sic) Part6 - Uyama Hiroto Remix featuring Shing02

https://www.youtube.com/watch?v=FvcyZOVCORM&list=RDcHQ-oVSYkeU&index=7


이번 교토에서 방문한 곳은 차례대로 도호쿠지, 후시미 이나리, 도호쿠지(재 방문), 센뉴지, 기온, 교토 고쇼, 가모가와 델타, 도다이지였다.

3박 동안 교토에서 묵으며 많은 생각을 했고 혼자 매일 술을 마셨다. 돌아다니고 후회하고. 고민하고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했다.

내 삶엔 아무 것도 없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번 여행 동안 계속, 진실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했다. 나는 봄에 닿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토요일은 따뜻했다. 흡사 봄처럼. 삶처럼 아름다운 토요일이었다. 토다이지의 정원이 보이는 툇마루에 앉았다. 그림자가 드리우고 햇볕이 내 손등에 와서 닿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 처럼 깜짝 놀랐다. 토다이지의 각 사찰에는 토요일을 맞아 다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이가 든 부인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모여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시를 읊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나는 불룩하게 튀어나온 주머니처럼 그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만 누구도 나를 내쫓지 않았다.

나는 상냥한 목소리를 들었다. 봄이 나에게 말을 거는 소리였다. 타인이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서 상냥함을 느꼈다면 사랑을 느꼈다면 그것은 내 안에 상냥함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봄이 나를 찾아올 것이다. 봄이 그렇게 말했다. 당신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넌 내가 없어도 괜찮아. 하고 다시 없이 사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빛. 그것은 중력이었다. 아직도 나의 삶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봄이. 봄이 올 것이다. 


(9) 돌아오면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1월 11일에 발매 된 이 곡을 계속 들었다.

누구도 날 알지 못해 내 어머니 집의 피아노처럼은. 넌 내가 뭔갈 가지고 있다고 했지 어떤 사람들은 그걸 소울이라고 했어.

너도 알지만, 나는 떠났어 내 둥지에서 날아갔지. 그래도 나는 혼자가 아닐거야 내 가슴 속에서 최고가 뭔지 내가 돌아올 거란걸

그래 너도 알고 있지.


Sampha - (No One Knows Me) Like The Piano

https://www.youtube.com/watch?v=njHcZMLDdSc


지금 생각해보니 이 음악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Roosevelt - Moving On

https://www.youtube.com/watch?v=ruNW8MeR_tM


Marshmello - Alone

https://www.youtube.com/watch?v=YnwsMEabmSo


山下 達郎 - Tatsuro Yamashita - Ride on Time

https://www.youtube.com/watch?v=s19SzmIcFmU


위의 플레이리스트보다 더 많은 노래를 들었다. 간단히 더 쓰자면 찰리 푸스의 "We Don't Talk Anymore"나 라라랜드의 OST들, Seafret의 "Wildfire", 윤하의 "빗소리" 같은 노래는 틈틈히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언젠가는 이 노래 들을 듣지 않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들었다.

사실, 내 예전 여행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내 여행기의 제목들도 거의 노래 제목이기 때문에 플레이리스트로 여행을 정리한다는게 이번만의 일이란게 아닌 걸 알 것이다. 사진은 나의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을 참조하기 바란다.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야 말로 현실의 증거라고.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고 현실에 닿아 이 글을 쓰고 있다. 

17년 2월 5일의 글이다.


지추미술관地中美術館에 대해서 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지추 미술관은 나오시마直島라는 섬/그리고 지추 미술관이라는 건물/그리고 그 안에 전시되어 있는 많지 않은 수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어느 하나를 빼고는 말할 수 성립될 수 없다. 구성요소가 적기 때문인가? 아니다, 안 그래도 각개의 전시물 사이의 느슨한 연결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구성요소가 너무 많지 않은가 생각이 될 정도이다.

(쓸 수 있을지 몰라도) 결론 부분은 명확하다. 비효율과 자연에의 접합. 나오시마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관람자의 체험이다.

여기 지추 미술관을 방문하고 전시물들을 본 뒤 부분적인 감상을 기록해두도록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그게 아주 먼 미래의 나 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있는 글은 아마추어의 인상비평 정도의 글이기 때문에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하신 분은 다른 글을 읽으시는게 좋겠다.

(1)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의 작품 시간/지연/정지, Time/Timeless/No time, 2004

콘크리트의 복도를 내려와 어두운 문을 지나면, 지추 미술관의 가장 심층에 놓인 이 작품을 보게 된다.
직경 2.2미터의 검은 색 구체가 중심에 놓여있으며 27개의 금박을 입힌 목제 기둥이 방의, 아니 공간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작품은 계단 위에 놓여진 ...일종의 오브제의 형태이다. 가장 낮은 바닥에 입구가 있으며 (계단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는) 그 위의 중간 단에 검은 색 구체가 놓여있다. 우리는 (관찰자라는 행운으로) 가장 낮은 단에서 시작하여 구체와 같은 단에, 그리고 구체보다 한 단계 높은 단위에 까지 오를 수 있다. 동쪽에 입구가 있는 이 공간의 천장은 궁륭형태에 사각지대 천창이 있어 나오시마의 태양광을 그대로 받아 비춘다. 일출과 정오, 그리고 일몰에 맞추어서 이 공간의 빛은 시시각각 변하나 공간은 넓다. 밝고 선명하며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 처럼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다. 우리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 뿐이다.

우리가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의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먼저 관찰하게 되는 것은, 사방에 배치되어 있는 기둥의 각도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황금색으로 코팅되어 있는 이 기둥은 바로 공간에 입장하기 전에 큐레이터가 친절하게 노란색 기둥에는 손대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했던 그 기둥이다. 어째서 각 기둥이 똑같은 규격이 아닌지 관찰을 하게 되면 금세 이 기둥들이 천장에서 쏟아지는 태양광을 반사하기 위한 오브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천창을 통해서만 조명이 변화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도 이 작품의 양상은 변화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중앙에 놓여진 검은 구체이지만 검은 구체에 주목하지 않고 이 공간만을 바라보게 된다면 예를 들어서, 미술관에 들어와 처음으로 이 작품을 보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확인하게 된다면 예민하지 않은 관찰력을 가지고 있어도 "시간"의 흐름이 이 공간의 주제이자 작품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지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나오시마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데.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인 <오픈 스카이>는 사각형의 닫힌 공간에 하늘에 집중 할 수 있는 사각형의 천창을 뚫어놓아 관찰자가 시간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나오시마의 하늘을 통해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의 중간에 놓여진 검은 구체-화강암으로 만들어진 2.2미터의 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오브젝트는 나오시마의 해변 열린 공간에 전시되어 있는 동일 작가의 작품인 seen/Unseen/Kown/unknow에 주요 전시물이 두개의 거대한 구형과 비슷하게 보이는데. 전시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시선을 잡아 끄는 이 검은 오브제는 "방점"이자 "소실점"으로서 이 공간에 있는 동안 우리가 이 오브젝트를 무시하고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전시 공간에 있는 이상 이 구형의 주변을 돌고 인식하고, 심지어 우리가 이곳을 떠나도 전시 공간을 떠올리게 되면 가장 먼저 이 구체를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시간에 의해 변화하지 않고 위치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으며 공간 자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점, 그렇다면 나는 감히 말할수록 있다. 이 검은 구체는 이 공간의 신이다.
신에 대한 은유이며 이 공간을 지배하는 신 자체이다. 우리가 말을 걸수도 없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 굴러떨어지거나 소실되는 일 또한 없다.
우리, 공간의 밖에서 온 관찰자가 검은 구체에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검은 구체의 곡면에 의해서 계단이 기묘한 모습으로 일그러져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양광을 비추기 위해 만들어진 천창과 함께, 흡사 한 개의 눈을 지닌 얼굴이 웃으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곳처럼 보인다.
그것은 신의 얼굴이다. 방 한 가운데에 위치한 신. 그 신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바라본다.

(2)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수련Warter lilies

바닥이 이상하다. 흰색의 작은 (일반적인 주사위보다 작은) 정사각형으로 바닥을 깔았다. 물 빠짐과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것 일까. 습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까. 신발을 벗고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습기가 가득찬 공간에 있다는 착각이 든다. 그렇다 그것은 착각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 습기란 작품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는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한 공간에 있다는 착각은 작품 앞에 서있는 때 더 강해진다. 모네의 수련. 늪의 표면에서 터져나온 색과 생명.

전시 공간 안에 수련 다섯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이즈에 따라 배치 한 것인지 뒷면 양쪽에는 100*200의 작품이. 양 옆에는 200*200의 작품이. 그리고 정면에는...200*300의 두 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걸려있다. 압도적인 이미지. 물기가 하나도 있을리 없는 공간에 느껴지는 습기. 높은 천장으로 소리가 난반사되어 울린다. 들릴리가 없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수련이란 원래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었던가. 어쨰서 이렇게 거대하고 무질서하며 깊은 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늪으로 가득한 이 전시공간에서 수련이라는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혼돈이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그 혼돈에서 터져나온 생명이다.

사실 나에게 이 작품은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 지추 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이 수련을 보기 위해서 였다. 같은 여행에서 오하라 미술관의 수련을 보았지만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동양화를 전공하였는데 몇 안되는 서양화 그림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같은 그림이 식탁의 내 자리에서 보이는 곳에 걸려 있었는데 검은 밤과 숲을 그려넣은듯한 그림으로 항상 아무도 이 그림의 윗쪽과 아랫쪽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농담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수련을 몹시 닮았다.


잊지 못하는 기억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외할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난 날. 

커다란 키에 양복과 목도리, 지팡이를 한 외할아버지는 턱을 굳히고 주변을 쳐다보았다. 


두번째로 만난 날 누워있던 어머니는 아버지, 아이들을 봐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눈썹을 찌푸리셨던 걸로 기억한다. 

외할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쳐다보고 장갑을 벗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에게는 총명하고 씩씩하구나. 

나에게는... 너는 새끼여우 같구나. 라고 하셨다. 새끼여우. 

누나는 그날 외할아버지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서 네 기억이 잘못된거라고 말했다.




17년 1월 5일은 외조부의 3주기이다.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항상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탄다고 하셨지만 

오늘 외할아버지를 만난다면 그 누구보다 수다쟁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몇 번이나 외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려고 했지만 3주기가 다 된 지금까지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겠다. 


입 밖에 내지 않은 사실들이라도 그것이 잊혀지진 않듯이 감정이나 기억들이 스러지지 않고 신발 속의 모래처럼 남겨져 있듯이. 

나는 이 마음이 완전히 가시는 일 없이 그대로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원히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사람은 이미 가버렸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감정이 남기고 간 것들이 계속해서 움직여간다.


기묘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2015년 9월 나는 교토에 여행을 갔었다. 

그 당시 나온 아이폰을 사러 간거였고 교토에 갔던 것은 일종의 벽에 도배할 때 쓰는 덧붙임 종이 같은 거였는데. 

생각보다 예약한 아이폰을 빨리 구매 할 수 있어서 오사카에서 교토에 도착하자 오후 한 가운데 쯤이었다.


내가 왜 굳이 니죠 성을 가려고 했는지, 교토역에서 내리자 별로 고민도 없이 캐리어를 질질 끌며 니죠 성에 갔다.


처음 가는 곳이었는데도 니죠 성에 가자 익숙하게 여기가 어떤 곳인지가 떠올렸다. 사람이 많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헤이안쿄의 궁궐이었던 니죠 성은, 그 후로 계속된 증축과 개축을 겪었으며 니죠의 어전과 그 정원은 우아하다. 

병사들을 막기 위해 축조된 벽과 해자, 그리고 연못들. 총을 쏠 수 있는 각도를 생각하여 꺾여진 길들.

끊임없이 니죠 성에 대한 것들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성을 관람하는 것이 다 끝나고 성 앞의 벤치에 앉자.

나는 그제서야 나에게 이런 것들을 설명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외할아버지였다.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일본의 정경을 사랑하셨기에 분기에 한 번은 일본에 다녀오셨다.

자주 어떤 곳이 아름다운지를 설명하셨다. 즐거운 듯이 예전의 일들을 얘기해주셨다.

크게 앓으셔서 더 이상 해외를 가지 못하게 되시고 나서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일본 출장에 다녀올 때 마다 외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먹거리들을 사서 보내드렸다.


할아버지가 조금 나으시면 제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일본에 며칠 다녀올게요.

어머니나 이모가 같이 가면 오히려 불편해 하실테니까. 어떠세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마음에 안드는게 있을 때면 그러시던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먼 곳을 쳐다보셨다.


니죠 성에서 가라스의 길을 건너 로쿠도인으로 가는 사거리. 나는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이제야 왔네요. 이제야 이해했어요.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반팔의 소년이던 외할아버지가 앉아 책을 읽던 곳.



나는 외할아버지가 얘기했던 정경을 근거로 4개 정도 후보지를 구글 맵에서 찾아냈다.

물이 흐르다 느려지고, 굽이 치고. 다리가 멀리 보이며 기온의 한참 남쪽. 강변으로 내려가는 경삿길.

밤이 되면 금방 까맣게 되었지만, 경삿길 부근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해가 질 때 까지-하고 말씀하셨다.

오래 찾을 것도 없었다. 북쪽에서 부터 차례대로 후보지를 가보다 세번째 쯤 나는 여기가 외할아버지가 있던 곳이란 걸 알았다.

반팔의 소년이 밤이 올 때 까지 산시로를 읽다가 일어서던 곳. 이제는 찻길이 생겨서 조용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모가와의 강변에서 조용히, 서른도 넘었으면서 새끼 여우처럼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뭐라도 해라. 돈을 벌어. 버러지처럼 살지 말아라. TV를 트시더니- 봐라 저기 자막 나오는 거

보험쟁이든 외판원이든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것이 아니냐. 제 밥값을 못하면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어.

할애비는... 할애비는 늙었어. 외손자가 제 몫을 할 때 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을 자신이 없어.
너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돼. 뭐라도 해라 뭐라도 제발.

혹은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큰 손자를 자주 그리워하셨다.

서울대 병원에 큰 병환으로 입원하고 계실때 병실을 지키다 이모와 교대하는 나에게 들리란 듯이 외손자는 어쩔수 없군. 이라고 중얼거리셨다.

친손주들은 영화에 음악을 공부하는데 그건 뭐라도 제대로 하는거에요 이모? 네가 참아. 너한테 투정부리시는거야 알면서.

외할아버지가 첫번째 쓰러지셨던 날. 나는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로 차를 돌려서 댁으로 갔다. 외할아버지는 낭패해하셨다. 

일어설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어. 걷지 못하는 짐승은 죽는거다.

이모와 외삼촌과 어머니와 내가 외할아버지의 옆에 있었다.

할애비는...이제 다 틀린 것 같다.

괜찮을겁니다. 외할아버님. 이라고 말하자 외할아버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외할아버지 댁에 있을 때의 내 자리 - 외할아버지의 애장서들을 모아둔 책장 옆 -에 서서 나는 외할아버지을 보았다. 

그래요? 외손자니까요?

일주일 후 두번째 쓰러지셨고 ICU에 들어가셨다.

1월 4일은 토요일이었지만 나는 회사일이 있어서 하루 종일 다른 곳에 있었다.

팀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장례 지원을 하는 일이었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외할아버지 많이 아프셔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일원동에서 흑석동의 병원 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
그리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 

나는 강남역에서 멈춰섰다. 외할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가실 분이 아냐. 그렇다고 해도 기다려주실거야. 

한시간이 넘게 강남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은 아무 나쁜일도 일어나지 않을걸 믿는다는 듯

(외할아버지가 나를 버리고 먼저 갈 일이 없을 거라는 듯이)

ICU의 면회시간이 끝날때 쯤, 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 할아버지는요? 응 괜찮아 많이 나아지셨어 하고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내일 일요일이니까 내일 면회시간에 올게요. 응 그래 고마워.

어머니와 나는 병원 주차장에서 한참을 그냥 앉아있었다. 너무 늦게와서 죄송해요. 아니야, 회사일 하고 있었잖아.


1월 5일. 나는 버스를 타고 종로에 도착했다.

아이패드 케이스를 사고. 커피를 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딴 짓을 하고도 어쩔수 없이 외할아버지가 누워 계신 병원에 왔다. 

혜화동의 병원으로 정오 쯤에 옮겨지셨다. 나는 이모가 울면서 건 전화에 잠에서 깨었다.

외할아버지에게 나는 세 명의 친손자와 네 명의 외손자 중 하나였다.

당신이 가장 사랑한 친손자는 외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서울의 집을 물려받았고 

외할아버지의 책장들을 물려받고 싶었던 나는 친척들과 등을 돌리게 되었다. 내내 장례식장을 지키던 나는 이제 이걸로 됐어요. 

하고 한 마디를 하고 식장을 나가 집으로 갔다. 

나는 당신의 시신도 묫자리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려주실거죠 외할아버지. 제가 갈 때 까지요. 

제가 할아버지를 뵈러 갈 때 까지 그대로 있어주실거죠?


입으로 내지 않은 진실이라고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내가 왜 외조부 댁 바로 옆의 대학에 갔는지, 의미없이 특차로 그 과에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할 사람이 물어보지 않았다.

네가 대학에 들어갔으니 이제 한 달에 한 번 할애비와 점심을 먹자구나. 괜찮겠느냐.

네 외할아버님. 

하지만 제가 왜 이 학교에 갔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물어보시지 않으시네요. 당신은 몇년 후에 저에게 미안하다고 하십니다. 

뭐가 미안하세요. 하나도 안 미안해요. 할아버지 저한테 미안한거 하나도 없어요. 안 미안해 할아버지 그런 말 하지마.

 
입으로 내지 않은 감정이라고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이야 말로 내 어린시절을 지켜준 내 진짜 아버지이며 당신이야 말로 내 이상의 "신사"라고. 

결국 나의 마음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뒤로 가끔 외할아버지의 책장에 대한 꿈을 꾼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란 것이 시간이나 공간 같은 보통은 넘어서지 못하는 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기억이나 감정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이 찌꺼기가 아니라 어떤 씨앗이 혹은 복수의 평면에 작용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몹시도 후회하는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대해 몹시도 부정적이다. 가모가와의 강변은 여우를 묻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16년 12월 30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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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홋카이도 여행기의 마지막이다. 이것은 일종의 유언이다.

나는 이제까지 내 안의 무언가를 버려서 삶의 의지를 이어갔다. 그래서 이번엔 글을 쓰는 것을 그만 둘 생각이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우울할 때면 청소를 한다거나 인간관계를 정리한다거나 하는 것의 조금 다른 표현일 뿐이다.

당신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무엇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한다. 


이번에 정리하는 것은 내가 글을 쓰려는 의지이다. 언젠가 아름다운 것을 쓸 수 있으리란 희망이다.

이런 글에 대한 동기만은 아주 오랫동안 나의 힘이 되어주었다. 

알량한 재능, 그리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스스로를 위로하겠다는 욕심. 오만함.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고집이었고 동시에 내 삶의 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글을 쓴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만 쓰겠다.

끝맺을 필요가 없는 글을 굳이 쓰는 이유는 이 마지막 글만은 나를 위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삿포로. 두번째 홋카이도 여행의 마지막이 될 날.

나는 삿포로에 도착하자마자 길을 잃었다. 농담이 아니다. 장방형으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주소도 알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길을 잃는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이런 식이다. 음음 목적지가 동14 남20이니까, 이 쪽으로 쭉 가서 꺾으면 되겠지! 하고 서 14 북 2에 가있는 식이다.

걸음은 엄청나게 빨라서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4블럭 정도는 거뜬하게 지나쳐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는데 정말이다. 나랑 같이 걸어다니면 알 수 있다. 장소를 찾는데 디테일하지 못하다.

망연자실해서 몇분 간이나 멈춰서서 자기 반성을 했다. 철새 여러분 나에게 힘을 주세요. 지구의 자기장을 느끼게 해주세요.

제법 발달해있는 시가지인 삿포로역-스즈키노역 라인과는 다르게 삿포로에도 덜 발달되어 있는 시가가 있는데 중심지에서 멀어질 수록 

건물들이 작아지고 낡는다. 나름 그런 것도 풍취지만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그런 여유는 없다. 

두번 째 홋카이도 여행의 실질적인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나는 해야할 것이 많았다.


홋카이도가 아무리 자연경관이 클라이막스가 되는 지역이라고 해도 삿포로에는 사람이 모이니만큼 볼만한 것들이 많다. 

홋카이도 전역에서 몰려온 식재료의 스프 카레, 라멘, 스시. 카이센동은 싱싱하고 전 지역의 스위츠 샵에서 모여든 유명 디저트들은 아, 왜 인간은 

하루에 먹을 수 있는 밥에 한계가 있나요. 오늘 하루 잔뜩 먹고 두달 간 굶으면 안 될 까요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사실 일본에 와서 나는 책이나 전자제품, 옷, 화장품 등도 꽤 많이 사는 편인데 실은, 아사히카와를 제외하면 

그런 "일본 여행 와서 기본인 쇼핑!"을 할 수 있는 곳은 삿포로 밖에 없다.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해. 이래선 후라노에서 첫차를 타고 여기에 온 의미가 없다. 나를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 손에 구글 맵을 숫제 그냥 켜둔 상태로 호텔을 찾아 걸어갔다. 

스즈키노 옆에 있는 호텔로 다가갈 수록 교통정체가 거의 없는 삿포로인데, 어째서인지 관광버스가 여기저기서 몰려들어 길이 막히는 게 보인다.

 코스프레라도 하는 듯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도 여기저기에 보였다. 나이대도 다양하여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들 부끄럽기 짝이 없는 복장에 진한 화장을 하고 씩씩하게 한 방향으로 모여들고 있다.

그렇다, 16년 YOSAKOI 소란부시 축제가 같은 시기에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도 여러가지 지역 축제가 있다. 

지금은 전국에서 200개가 넘는 팀이 모여들어 5일 동안 각자의 공연을 하고 시민들과 춤을 추는 축제가 되었지만, 

원래부터 소란 부시는 홋카이도 지역에서 청어잡이 철에 부르던 노래이다. 기본적인 가사는 이렇다


야렌 소란 소란, 청어가 오니 갈매기가 시끄럽구나 은빛 비늘에 여울이 빛난다 쵸이!


이런 가사를 지닌 민요에 전국 사람들이 춤을 추고 대회까지 연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다소 촌스럽던 민요는 이토 타키오라는 민요가수가 편곡한 버젼이 의외로 인기를 끌고, 

왓카나이 남중이란 곳의 특활 부가 전국 규모 대회에서 우승을 함으로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것이 1991년.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는 느낌으로 각자가 자기 지역에 맞는 가사를 붙이고 안무를 붙여서 각자의 특색에 맞는 

소란부시를 만들어내 공연을 하는데,  그 특징은 파워풀한 안무와 흥겨운 후렴구. 

내가 딱 마음에 든 교토 지역의 공연팀인 "샤라란"의 소란 부시 가사는 이렇다.


흐드러지는 벚꽃과도 같이, 나의 벗들이여 춤을 추어주어 고맙구나. 아프고 고통스럽던 날들이여 안녕.

잔물결이 밀려오고 우리는 모든 인연을 끊는 그 춤사위를 추네.


????그렇다. 그냥 아무말이나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처음 공연에서는 "피투성이가 되어 어둠 속을 달려나가는 나의 동지들이여"라는 마이크 워크

(그렇다 소란 부시를 하는 동안 이 팀은 정체불명의 MC하나가 계속 이상한 소릴 한다)를 하길래 미친놈들인가! 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다른 팀을 압도하는 군무 수준과 닌자를 이미지화 했는지 중2병을 빤듯한 구성에 나는 이 안무팀이 너무 좋아지고 말았다.

(급히 어느 지역 팀인지 알아내서 공연시간을 확인했으나 시간이 맞질 않았고.결국 그들의 공연을 보게 된 두 번 다 뜻하지 않은 우연이었다)


위에서 얘기한 것 처럼 YOSAKOI축제는 5일 간 시가의 중심이 되는 오도리 공원을 비롯 삿포로 각 지역의 공연 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유료 티켓을 사지 않아도 사도, 한 껏 즐길 수 있으며. 아무 공연장에 가서 질릴만큼 특색있는 공연들을 보고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면 되는 것이다.

호텔에서 짐을 맡기고 오도리 공원에서 소란부시 공원을 보느라 생각보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나는 삿포로 역에서 간단히 2시간을 기다려 스시를 먹고(하하하), 다른 무엇보다 생각을 하기 위해 홋카이도 대학에 간다.

1876년도에 개교한 이 아름다운 학교는, 삿포로 역 바로 위에 있으면서도 거대한 부지와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오래된 학교이기 때문에 건물은 고풍스럽고 깨끗하고 잘 정리 된 부지 내의 공원은 넓고 평화롭다. 

보통 닥터 스크루의 배경으로 유명한 대학교...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서른이 넘은 덕후인 사람들 뿐이겠지. 

원래 농학교였기 때문에 수의학과 농학이 굉장히 강한데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지금도 농과 대학의 편차치가 굉장히 높다. 

실용학문으로서 농학이 수준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본내에서 농학의 실용성이 높기 때문이다.


학교 부지에는 어딜봐도 관광객인건 나 정도 밖에 없었다. 

모두들 소란부시를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사람이 없는 곳을 굳이 찾아서 홋카이도 대학까지 온 나도 대단하다 싶다.

적당한 잔디밭을 찾아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한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운다. 

고통스러웠다. 정말로 휴가가 끝나서 고통스러웠던 것이 아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인정해야했다. 더 이상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것과 이제까지 해온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며 도망쳐온 시간 낭비였다는 것을.

도망치고 도망쳐서 어디에 다다를 것인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징기스칸과 맥주를 마셨다. 나오는 길에 샤라란의 공연과 우연히 마주쳤다.

이제는 갈 곳이 없었다. 나는 뭘 해야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호텔 방에서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걸어갔다.


나는 홋카이도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이제 여름이 지났고 가을이 끝나간다. 

곧 겨울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아래와 같이 쓴다.

언젠가 당신은 당신의 낙원에 다다를 것 이다. 거기에 나는 흔적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실이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당신을 잊어버릴 수 있다면 내 3분의 1을 불태우고 그 나머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괜찮은 거래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삶은 계속 되고 언젠가 사랑은 다시 시작 될 것이다. 감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돌아오는 편지처럼 어느날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된 편지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슬픔이고, 그것은 기쁨이다. 

어느 비오는 날 세상의 모든 우산이 펴지는 것처럼 당신의 마음이 활짝 펴져 사랑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죽은 사람처럼 살던 내가 여행에서 돌아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무슨일이 생길지 궁금하지 않은가.

어떤일이 일어날지 두근거리지 않는가?


나는 낙원에서 잠이 든 적이 있다.

삿포로의 북동쪽, 버스를 타고 가면 있는 모에레누마 공원은 건축가 이사무 노구치의 마지막 꿈이었던 공원이다.

1977년 쓰레기 매립장을 공원화 하겠다는 플랜하에, 1988년 모든 플랜을 짜고 88세의 나이로 죽는다.

공원이 열린 것은 2005년 그가 죽은 후 17년 후이다. 착공을 시작한 것이 1982년이니 23년에 걸친 거대한 프로젝트 였던 셈이다.

그는 지구 자체를 재현하고자 했다. 재생한 땅에 태어난 "낙원"

산과 숲을 공원에 만들고 재생 에너지로 모든 에너지를 감당하는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파도가 이는 해변을 공원 중심에 만든다.

인간의 흔적을 없애지 않으면서 자연을 재생하려는 목적. 그 얼마나 순진하고 오만한 플랜인지 모에레누마 공원은 아름답다.


나는 자전거를 빌려 두시간 동안 공원을 돌아다녔다. 산을 오르고 바람을 느끼고. 잔디밭에 누워서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면 나는 끊임없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찾고 있는 것은 뭐죠, 찾기 힘든 것입니까? 가방 속에도 책상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데 아직도 찾아볼 생각입니까?

그것보다 - 저와 춤추지 않겠습니까. 꿈속으로 꿈 속으로.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밤이 되고 삿포로 역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공원 저 너머에서 아직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이 "들려"왔다.

오도리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들 손을 들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흔들고 서로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춤을 추고 있었다. 

밤이 되면 금방 가게들이 문을 닫고 사람들은 서로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화가 났다.

여러분은 각자의 삶이 있잖아요. 우리는 모두 타인이잖아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서로의 삶에서 서로를 밀어낼 뿐이잖아요.

나를 배신할 거잖아요. 내 마음을 져버릴 거 잖아요. 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옆에 두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거잖아요.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내 착각이었죠. 차라리 날 죽이고 가요. 내버려두지 말아요. 이럴거면 처음부터 나를 발견하지도 말지 그랬어요.

그래, 내 사랑하는 당신. 저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이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러요.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을 추어도 바보, 춤을 추치 않아도 바보라면, 추지 않으면 손해.


야렌 소란 소란 소란 소란 소란 하이하이

목이 쉬도록 노랫소리를 높여라 팔이 떨어지는 춤사위로다 쵸이!


박수를 치고, 다시 춤을 추고. 앉아있다가 일어서고.

여느 꿈처럼 싸구려 전깃불과 스포트 라이트가 사방에 걸려있는데 사람들은 동작을 맞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모두가 자기 멋대로 노래를 부른다.


야렌 소란 소란 소란 소란 소란 불어오지 말아라 밤중에 돌풍아

남편은 오늘밤도 바다서 머문다 쵸이! 야세 에에야안사노 돗코이쇼 하아 돗코이쇼 돗코이쇼


나는 춤을 추지 못하고 공원의 구석에서 낯선 사람들의 춤을 추며 눈물이 가득 고여 밤이 희뿌옇게 사라져가는 것을. 내 마음이 가라 앉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꿈 속에서 춤을 춘다. 가장 멋지게 누가 봐도 감탄할 정도로 춤을 추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나는 춤을 추어야했다. 왜냐하면 내가 울고 있는 사이에 모두들 저렇게 즐겁게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것이 내가 6월의 홋카이도에서 깨달은 마지막의 것. 소음에서 걸어나와 춤을 추겠다는 것.

나의 나라로 돌아가, 당신에게 같이 춤을 추지 않겠냐고 권하는 것. 다시 한 번 더.




이야기는 나에게서 시작하여, 당신으로 끝이 났기에 여기서 여행기를 끝낸다. 

16년 10월 10일의 글이다.

토모는 어느날 죽어 무당벌레가 되었다. 무당벌레는 산 속의 개울에 빠져 물고기가 되었다. 

토모가 원래부터 무당벌레였던 것은 아니다. 


토모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로 이루어진 가족의 아이였다. 멍청하고 착한 토모. 

사람들은 토모를 사랑하기보다 불쌍히 여겼다. 흔히 자기 보다 약한자에게 베풀어지는 그런 "호의"는 짜증이 섞이기 마련이라 

토모는 눈치를 보는데 익숙했다. 


하지만 토모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말을 잘 하지 않았지만 입을 열면 너무나 재미있는 농담을 했다. 

토모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어머니는 토모의 실수를 엄하게 다뤘다. 

토모는 오빠를 사랑했다. 토모와는 다른 똑똑하고 활발한 오빠. 사람들은 오빠를 사랑했다. 


토모의 가족이 원래부터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모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나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자주 때렸고, 가끔 오빠나 토모를 때리는 일도 있었다. 

토모는 아버지가 토모를 던져 팔이 부러졌던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기억해서는 안될 일이었기 때문에 토모는 기억하지 못하는 척 했다. 


어머니는 가끔, 그리고 자주 집을 나가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있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어머니는 가끔 무섭도록 표정이 없어지곤 했다. 아름다운 어머니. 뱀처럼 차가운 어머니. 

울면서 매달리는 토모의 손을 뿌리치고 나가서 한참을 돌아오지 않던 어머니. 


아버지가 어머니가 어디에 갔냐고 물어보면 토모는 장 보러 가신다고 하셨어요. 곧 돌아온다고 하셨어요. 하고 더듬 거리며 말했다. 

넌 정말 비겁한 거짓말쟁이구나. 하고 아버지가 몇 년 후의 토모에게 말했을때 토모는 오빠를 감싸던 중이었다.

아빠, 오빠가 한거 아니에요. 제가 한 거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그래? 그럼 니가 했다는 증거를 보여봐. 쓰레기통에 버렸다며?

토모는 떨면서 쓰레기통을 뒤졌다. 뒤늦게 돌아온 오빠는 너 뭐하냐?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토모를 비웃으면서 비겁한 거짓말쟁이 새끼...라고 말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토모에게 너와 오빠를 걸고 아빠는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어. 

아빠는 계속 너의 곁에 있을거란다. 라고 약속을 했다. 

그것은 둘 다 거짓말이었다. 그 거짓말이 기뻤던 만큼 토모는 슬펐다. 비겁한 거짓말쟁이야 아버지는.


매일 매일 표정이 사라져가던 어머니는 어느날 토모와 오빠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우리 죽을래? 너희 엄마랑 같이 죽을래?

토모는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 토모는 죽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토모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오빠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버렸다. 아름다운 얼굴의 어머니는 구멍을 세개 뚫어놓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토모는 무서워서 어머니를 안았다.

어머니 토모와 함께 있어주세요. 제발 저를 떠나지 마세요. 토모는 본인이 한 말을 크게 후회하게 된다.


몇 년 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장식품을 던져 어머니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서 토모는 사람을 부르려 달려나갔다.

아버지가 그 때 한 말을 토모는 기억하고 있다. 너 새끼 꼼짝마 안 그러면 너도 죽여버릴거야. 

토모는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날 토모가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던 일은 사실이다. 

토모는 수백 번 그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무엇을 했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곱씹었다. 토모는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느날 어머니의 언니가 집에서 혼자 자고 있던 토모에게 찾아와, 불쌍한 토모. 어쩌니 하고 울었다.

아버지는 그 집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토모는, 솔직히 말한다면 안심했다.


그 뒤로 어머니와 오빠, 토모 셋이 사는 생활이 되었다. 오빠는 꾸준히 인기인이었고 사람들의 눈에 띄이는 사람이었다. 

누구도 오빠를 건드리지 못했지만 토모는 약했다. 토모는 흠칫거리는 일이 늘었고 선생님의 말을 듣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들은 잔혹하다. 약자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낸다. 선생님이 토모를 때리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토모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토모가 또 책을 읽어요. 선생님, 토모가요. 토모가요. 

이러오렴 토모, 너는 근본부터 잘못됐어. 

그런가. 나는 근본 부터 잘못 된 걸까?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나는 비겁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따돌림을 받진 않겠지 하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생활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은 잘 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단 한 푼의 양육비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오빠와 토모가 본가를 찾아가 좋아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했을 때.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할머니는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해하지 않는 이상 너희도 내 손주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토모는 여전히 토모에요. 울보 토모. 멍청한 토모. 

오빠는 토모를 일으켜세우고 집에 가버렸다. 


토모는 친구가 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빠가 나가면 토모는 집안일을 했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했고 남는 시간엔 책을 보았다. 글을 써서 꽤 큰 대회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았다. 

주말에 뭐했니, 하고 누군가 물어보면 아버지가 쉬는 날이어서 아버지랑 드라이브를 했어. 라고 말했다. 


저는 토모 입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떠났다고는 말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오빠와 토모를 사랑한다고 말했으니까. 나는 그걸 믿으니까.


소풍을 가서는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서 혼자 있었다. 돈을 쓸수가 없었다. 집은 가난해지고 있었다. 내가 아끼지 않으면 안돼. 

돈이 없다고 생각해서 문제집을 사본 적이 없었다. 교과서만 읽었다. 선생님이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어느날 방과 후에 선생님이 토모를 불렀을 때 토모는 또 작문 대회에 나가라시는 걸까. 하고 얼마 전에 쓴 에세이를 들고 교무실로 갔다.

교무실에는 담임 선생님 혼자셨다. 토모, 너 특수고에 진학할 생각 있니? 토모는 멍청했지만 항상 공부를 잘 했다. 

무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외우는 것도 곧잘 했다.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지 않았지만 가끔 친구들이 풀고 난 뒤의 문제집을 고등학생인 오빠가 가져다 주면 그걸 보고 공부를 했다. 

발음기호를 읽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를 읽지 못했지만 고등학교의 독해 문제도 어렵지 않게 풀수 있었다. 

사전을 살 돈이 없어서 토모의 사전에는 외삼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토모는 두근거렸다. 네 선생님. 저 가고 싶어요.


선생님은 웃었다.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 몇 명이랑 특수고 진학 수업을 운영하고 있거든 거기 들어오면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선생님한테 직접 수업도 받을 수 있단다. 

너한테 전혀 손해 보는 이야기가 아니야. 어머니에게 얘기해주지 않을래? 수업료가 비싸긴 해.

선생님이 말한 숫자는 토모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숫자였다.

선생님, 저희 집은 그럴 돈이 없어요.

그럴 돈이 없다고? 너의 오빠 ㅇㅇㅇ지? 걔 옆 학교에서 엄청나게 유명하고 ㅇㅇㅇㅇ고등학교 가지 않았나? 그런 애네 집이 돈이 없다고?

그랬다. 토모의 오빠는 지역에서도 유명한 인기인이었다. 화려했고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있었다. 

공부도 잘해서 지역 명문고를 가는데 큰 힘을 들이지도 않았다. 토모는 ㅇㅇㅇ의 동생이라고 불리울 때가 더 많았다. 

너 무슨 그런 거짓말을 하니. 오늘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내일 다시 보자.

토모는 집에 가도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토모에게 네가 집의 가장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가 떠난 뒤로 집이 너무 가난해졌다고, 집에는 큰 빚이 있고 우리 세 식구는 뿔뿔히 흩어져야 할 것 같다고.

토모, 네가 해야해.


선생님이 토모를 부른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토모는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 저희 집 가난해서 안되요.

갑자기 어금니가 부숴지는 느낌이 왔다. 주먹이었다. 하나가 가고 다른 하나가 왔다. 너 나 무시하냐?

토모가 쓰러지자. 오른 쪽 귀를 누군가의 발이 걷어찼다.

누가 좀, 토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선생님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듯이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학교 뒷편으로 나와 물을 마셨다. 귀에서 나던 피는 집까지 걸리는 40분 동안, 멈추질 않았다.

토모는 울지 않는 척을 하려고 노래를 불렀다. 쥐가 한 마리, 쥐가 두마리, 쥐가 세마리, 쥐가 네마리. 하는 노래였다.

반 친구 하나가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토모는 그게 아주 재미있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그 이후로 토모를 매일 불렀다. 일기를 쓰게했다. 거짓말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라며, 매일 노트 한페이지에 걸쳐 토모의 생활을 쓰게했다.

네가 그렇게 가난하다면 한 번 얼마나 가난 한지를 한 번 써봐, 니 거짓말도 지칠 때가 있겠지.


토모의 성적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답안지를 80%만 작성했기 때문이다. 

영재반의 뒷자리에서 토모는 매일의 일기를 적고, 영재반이 끝나면 담임에게 검사를 맡았다.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울면서 빌기 시작할때 쯤 거짓말쟁이라고 쓰여진 노트를 받은 후 

집으로 갔다. 


오늘 저는 복지 재단에서 받아온 쌀을 햇볕에 말리고 쌀 벌레를 골라냈습니다. 

오빠는 쌀 벌레가 나온 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끔 같이 벌레를 골라주기도 하지만 그건 저의 일 입니다.


오늘 저는 라면과 참기름을 공짜로 받으러 줄을 섰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저와 사진을 찍고 저에게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살아계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라면을 빼앗아 갈까봐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 라면을 뜯어보니 양념도 들어있지 않은 라면이었습니다. 


너는 거짓말쟁이야. 언제까지 이러는 줄 보자. 회식 중에 돌아온 선생님은 교무실에 혼자 기다리고 있던 토모를 보고 질렸다는 듯이 내뱉었다.

시뻘건 얼굴로 팔을 걷어붙였다. 이리 와, 하고 손가락으로 토모를 불렀다.


매일 매일 노래를 불렀다. 쥐가 한 마리, 쥐가 두마리, 쥐가 세마리. 집으로 가는 길에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네 달이 넘어갔을 때 토모는 저 사람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토모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특수 고등학교가 아닌 성적이 높은 일반 공립고등학교였다. 

너 성적도 개판인데 거기 써서 되겠니? 요즘 반에서 몇등하더라? 15등?

담임은 이죽거리며 토모의 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입학 시험 날 토모는 평소와는 다르게 모든 답안지를 작성했다. 

입학성적은 반에서 3등이었다. 전교에서 정확히 33등이었다.


토모의 키는 금방 커졌다. 마르고 길고 하얀 토모. 표정이 없는 토모. 언제나 제대로 씻지 않은 머리에 낡은 교복의 토모. 

참고서도 제대로 가지고 다니지 않고 수업시간이면 항상 밖을 쳐다보는 토모. 

공립학교에 들어간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이었다. 

그 학교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모두가 가난하고 모두가 공부를 잘하는 학교. 

토모는 별종 취급을 받았지만 학교의 일원이 되는 것은 허락받았다. 

3년 내내 토모가 반에서 30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며서도 모의 고사만은 10등 안에 드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경기가 안 좋은 시기였다.

 집이 좋지 않으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그런 아이들이 많았으니까. 입을 다물려면 얼마든지 다물수 있었다.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 동그라미를 쳤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중요해서 3년 내내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으려고 했다.

토모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4년을 견디기로 마음 먹는다. 십년. 

감옥에 들어간 큰 도둑처럼 혼자서 살아갈 힘을 얻을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린 아이가 아무 것도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었다. 

토모는 다짐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성적으로 조용한 대학교에 가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워서. 

아무에게도 맞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고, 손벌리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어린아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목표, 생존이 토모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꿈이었다.


토모의 마음은 오래 전에 죽었다. 

토모는 웃지 않았다. 

토모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도 모른채 집에 오는 길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나는 괜찮아 잘 하고 있어. 그것이 마음이 죽은 증거라는 것을 토모는 몰랐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대학교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사립대학교였다.

등록금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몇년이나 지나서 만난 조부모에게 토모는 고개를 숙였다. 

조부모는 집에 걸려있던 오랜 빚을 변제해주고 토모의 등록금을 내주었다. 

오빠의 등록금과 학자금을 대주기 시작했기 때문에 토모의 등록금을 대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빠는 조부모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토모는 일주일에 세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어머니가 토모에게 왜 아르바이트를 하니? 뭐 사고 싶은거라도 있니? 하고 물어봤을때 토모는 되물었다.

어머니, 저희 집 가난했던거 아니었어요?

아니, 우리가 왜 가난해?

어머니, 저희 집 빚 있다면서요.

아니, 그건 너희 아버지 빚이고. 우리집 안 가난해.

어머니가...저희 가난하다고 했잖아요. 빚이 많고 곧 집은 빼앗기고 저는 본가에서 커야 할 거라고. 네가 잘 하지 않으면 우리 집은 망한다고...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그만큼 힘들었었으니까.

토모 안에서 뭔가가 무너졌다. 토모는 정말 맞아도 싼 거짓말쟁이였던 것이다. 

토모는 누군가에게서 용돈을 받으면 모아서 양념과 소금 같은 것을 사 찬장을 채워넣곤 했었다. 

갖고 싶은 책이 있으면 하루 종일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책을 조금씩 읽었다. 토모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6군데의 서점이 있었다. 

주말 이틀을 꼬박 돌면 소설 한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하던게 가난 놀이였구나.

토모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등록금을 스스로 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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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의 기억이다. 모든 기억의 본질은 거짓말이지만. 

나는 거기에 진실이 한 줌 쯤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억들을 소중하게 간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2015년 봄, 나는 마포구 어디 쯤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다. 우리 둘은 자주 밤새 술을 마셨다. 문을 여는 술집을 찾아다녔고 아침이 올 때 쯤이면 카페에 앉아서 미역처럼 늘어져 있었다. 친구의 집은 걸어서도 갈수 있게 가까웠다. 친구는 집이 먼 나를 버리고 휙 가버리지 않았다. 미안해진 나는 마포구에서 분당까지 어떤 경로로 가면 제일 싸게 나오는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왜 우리 둘이 그렇게나 술을 마셔댔는지 모르겠다. 친구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의 이유는 간단했다 나에겐 강을 건너서 만나러 갈만큼 친한 친구가 많지 않았다.


"너 그래서 죽을 날 정해놓으니까 좋냐?"

"어어???"

"너 그거 거기에 써놓은거 너 죽을 날이잖아. 너같이 자기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애들 하는게 뻔하지 뭐"

"푸하하하 무슨 소리야 도대체"

"내 말이 틀려? 아냐 맞아 그것만 말해"

"어 맞아"

"얼마나 됐어?"

"음... 한 일년 좀 더 됐나. 조건을 걸어놓고 그게 안되면 죽기로 했어"

"조건이 뭔데?"

"이런 식으로 내년에도 살고 있으면 죽어야지, 하고 생각했어"


나의 플랜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서 빚이나 보험 같이 꾸준히 돈이 나가는 것들을 다 정리했고

주변 친구들에게 농담인듯, 농담이 아닌 듯 물건들을 나눠줬다. SNS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메모해서 책상에 올려뒀다.

언제쯤 회사를 관둬야 할지, 언제쯤 계약들을 해지해야할지 그런 것들도 일정을 정해놓고 차근차근 움직이고 있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구체적이고 집요하며 의지를 꺾지도 않는다. 한 번 정하면 망신창이가 될 때 까지 멈추질 않는다.

무엇보다 죽어야 할 이유가 아주 심플했다.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다. 나는 해야할 것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워?"

"나 어려운거 없어. 알잖아 나는 사는게 어렵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건 대체로 했고 못하는 것도 없어, 그냥 단지"


그냥 단지. 나에겐 이유가 없었다. 나의 실험은 실패했다.

나는 더 큰 것을 바라야 했지만, 작은 것을 바랐고. 내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들에 집중했다.

공부를 해야할 때 알바를 하고, 시험을 봐야할 때 책을 읽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단지 내 재능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걸 손에 넣었지만. 그게 다 였다. 그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사실"

'어, 나는 사실 가족을 갖고 싶었어'라고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단어 하나하나에 담겨진 내 마음이 너무 구질구질하고 구차해서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얌마, 이 누나가 너 안 죽게 해줄게"

"???무슨 소리야"

"봐봐 잘 봐봐. 너 같은 애들은 목표가 사라지면 아무 것도 못하니까. 죽기로 한 날을 잊어버리면 넌 못 죽어"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진짜라니까, 봐봐 자아 내가 하나 둘 셋, 하고 말하면 까먹는다 너"

"어??"

"하나, 둘, 셋. 자 까먹어라"

"어??"

"어??"


나는 그 뒤로 정말 내가 죽기로 한 날짜를 잊어버렸다. 

얼마 뒤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시계를 보더니 "자아, 지났다 짠"하고 말했을 때 나는 그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친구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 지금도 나는 그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홋카이도 여행은 친구와 계획한 것이었다. 친구는 내 계획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차라리 프랑스라던가 미국이라던가. 그게 낫지 않겠니?

하고 말했길래 홋카이도 여행은 플랜C정도로 홋카이도에 뭐가 있는지만 사전에 체크해두었다. 

하지만 여행을 같이 가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혼자 여행을 갔더랬다. 이것이 내 홋카이도 여행기의 가장 처음에 붙어있었어야 할 오프닝이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지 않을 뿐이다.


이제 여행기는 두 개가 더 남았다. 두 개 다 삿포로에서 있었던 일이다.



삼가 아룁니다.

노츠케 반도 네이쳐센터 I상.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저는 6월에 노츠케 반도를 방문하였던 한국인 K라고 합니다.

지금쯤 노츠케 반도는 여름을 맞이해서 더욱 아름다워졌겠군요. 꽃들이 피어나고 더 많은 새들이 반도를 찾아왔겠죠.

저는 홋카이도 여행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어느덧 몇개월이 지났지만 노츠케 반도를 방문하였던 일은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I상의 친절하신 가이드에 노츠케 반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봤던 추억은, 이번 홋카이도 여행의 가장 소중한 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노츠케 반도를 다시 한 번 가게 된다면 모래밭도, 바람도, 거품처럼 날리던 바다도 그대로 일까요. 

I상께서는 시간이 지나면 사구도 사라지고, 숲도 사라져서 이 곳이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거라고 말하셨었지만,

저는, 어째서인지 노츠케 반도의 모습이 변할 거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어떤 세상의 끝이라는 개념의 하나로서, 모습을 바꾸더라도, 위치를 바꾸더라도 영원히 이 별 어디엔가 

노츠케 반도의 풍경이 남아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만큼 그 곳은 아름다웠습니다. 

다시 뵙기를 기대하며.

 

16년 8월.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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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상,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떠올리지 않았던 것들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 하고 자아란 것은, 파도 위를 표박하는 물거품 같은 것이겠지요.

어떤 중요한 기억만이 사람의 깊숙한 곳에 남아 그 사람을 규정하고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는데

저는 아무래도 얕은 바다에서 튀기던 물거품과 황량한 사구 위에 불던 바람소리를 깊숙히 간직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날 아침 어항에서 I상을 만나던 일부터 배를 탈 때의 일. 바다를 달려 사구 위에 도착한 일

시간 순서대로, 아니 그 시간 그대로를 기억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듭니다.

 

과연, 싶을 정도로 홋카이도의 바다는 추웠습니다. 6월 인데도 불구하고 귀가 얼어붙을 것 같고

뺨이 덜덜 떨려오더군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가져온 후드티 두개를 겹쳐서 입어야 했을 정도였어요.

꼬락서니가 굉장히 우습게 되었는데. 웃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무시해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얕은 바다라 그런지 물거품이 튀어오르고 한참 해주시던 설명은 제대로 듣기가 힘들었습니다.

시레토코 곶에서 밀려나온 흙들이 모여서 사구가 만들어졌고 매년 조금씩 스러져서 앞으로 백년 쯤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실 상 지금의 노츠케 반도는 사라진다고 하셨던가요. 

 

실제 제가 노츠케 반도를 보았을때의 감상은 그런 불안정한 지형이라기 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육로로 본섬과도 이어져있고 네이쳐 센터나 등대, 산이 보이지 않게 사바나처럼 넓은 공터(물론 진짜 사바나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넓겠죠)

철새들이 도래하는 습지가 있는 땅이니 그리 쉽게 이 곳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100년, 긴 시간이죠. 100년 뒤에 제가 살아있기나 혹은 제 이름이라도 기억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애닳은 마음이 들은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처럼, 생명처럼 반도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세상의 어느 누가 강의 사라짐을, 산의 사라짐을 걱정할 까요. 누구의 평생 동안 그걸 목격할 날이 있을까요.

오직 사람의 힘으로, 때때로 하늘의 힘으로 땅이 패이고 무너져 다른 풍경이 되는 것을 보는 일이 있을 뿐이지요.

 

배를 타고 도착한 반도를 보는 순간, 저는 바로 이 곳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하하 하고 웃었을 때, (분명, 와아 저 사람 미친 사람인가봐 하고 생각했을게 틀림없을텐데도) I상은 제 쪽을 안 쳐다보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기가 차서 웃은게 아니라 이 곳이 마음에 들어서 웃고 말았습니다. 

언덕이나 산 처럼 높은 곳이 없이 높은 곳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2,3미터 정도의 평탄하게 넓은 땅.

바람이 멈출 곳이 없고 물이 고일 곳이 없이 황량하고 아름다운 땅. 이 곳에 발을 디뎠을 때의 감상은 그야 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약간의 흙 위에 바람을 이기고 자라난 풀들, 진흙을 밟지 않도록 해변에 놓여진 잔교를 건너자. 

바람이, 바람이,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아무 것도 거칠 곳이 없는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흡사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물 그림자도 없이 해변, 아니 해변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물거품 부서지는 흙과 바다의 경계에서 공기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엔 새가 많아요. 알고 계시나요? 하며 준비해온 쌍안경을 건내주셔서 바라보니 두루미가 있습니다.

몇 쌍 정도 두루미가 여기에 와 있어요. 오늘은 짝궁이랑 떨어져서 혼자 먹이를 찾으러 나왔나 보네요.

다른 동물들은 뭐가 있죠? 새 말고? 여우요. 여우. 네 홋카이도에는 여우가 많으니까요. 모르긴 몰라도 개보다 여우가 많을 걸요.

그냥 길에서 지나가다가 아 여우다 하고 보는 일도 많고. 아 여우다 할 정도로 여우가 많다구요. 그냥 마을에서도?

물론 삿포로 같은 도시는 다르겠지만, 여긴 시골이니까요.


그리고 급작스럽지만, 여길 찾는 분들의 반은 이걸 보러 오시는거죠. 라며 잔교 위를 걸어 I상은 해변가 위에서 말라버린 숲으로 갑니다.

분명 에전에는 잡목림이었을 곳이, 지형의 변화로 그대로 말라 죽어가며 소금끼 짙은 바람에 하얗게 말라서 남아있습니다. 

분명 지형이 변화함에 따라 전에는 그나마 비옥한 흙이 있었던 곳 위에 짠물이 들어온 것이겠지요. 

짠물이 올라와 땅은 갯벌이 되었고 어느새 주변은 바다로 둘러싸였습니다.

나무들은 금세 죽었고 썩어가고 무너져가며 하얀 풍경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더 울창하고 잔목들이 많았지만 점점 규모가 작아져가고 있어요. 이 마른 숲도 사라지고 있는거죠. 새로 잔목이 생겨날리 없으니까.

10년 전에는 훨씬 많았나요? 그렇죠 10년 전에는 정말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어요. 그래서 유명해졌고 사람들이 많이 왔었죠.

어때요 맘에 드시나요? 아주 맘에 듭니다.


갯벌을 지나면 좀 더 풀 숲이 우거진 곳이 나오고 잡목림이 있습니다. 본토에는 고산에만 나는 여러가지 꽃들이 여기엔 그냥 피어있어요.

춥기 때문에? 춥기 때문이죠. 봐요 고토리에요, 일본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새에요. 보이나요?

넓게 펼쳐진 풀 숲에는 일부러 뿌려놓은 것보다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또 죽어가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풀 숲 너머 네이쳐 센터 건너편에는 홋카이도 본섬과 맞 닿지 않은 거친 바다가 있었습니다. 깊고 푸르고 검다.

노츠케 반도를 넘어서면 쿠니시리가 있죠.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는 섬? 네 북방영토. 저 쪽엔 고래가 굉장히 많아서 반도의 등대에서 보면 가끔 고래가 보여요. 아 진짜? 엄청나게 빠르게 들어가버리기 때문에 사진은 아직까지 한 장도 못 찍었는데  한 번 보면 엄청나게 감동하게 되죠.

많이 보셨어요? 많이 보지만 볼 때 마다 감동해요. 고래니까요. 고래니까 그렇죠.


등대 밑 모래 밭에서는 뭐지 하고 발을 굴러보다, 여우가 뚫어놓은 굴에 발이 빠집니다.

여긴 엄청나게 넓군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거의 다 어부들이죠. 그리고 별장처럼 가끔 놀러오는 사람들.

초원을 걸어서 외딴 오두막에 들어갑니다. 새들을 관찰하는 작은 오두막이지요. 안에는 넓은 창을 열고 새들이 쉬는 연못을 볼 수 있습니다.

창문을 단단히 고정하고 자리에 앉아서 새들을 봅니다. I상이 가리키는 새들을 보며 새들의 이름을 따라합니다.

물새들은, 평온하게 앉거나 졸거나 헤엄을 치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하늘로 날아가고 또 그만한 수의 새들이 연못으로 날아옵니다.

영국 사람들이 겨울이 되면 찾아와요. 가끔 태국 사람들이 여름이 되서 찾아올 때도 있죠. 여기서 밖에 볼 수 없는 새들이 몇 종류 있으니까

그렇군요. 저는 연못 수면에 반사되는 햇볕을 망연히 쳐다봅니다. 


제가 이 모래투성이의 반도를 방문한 이유를 설명드렸던가요.

이 곳의 사람들은 이 홋카이도에서도 끝인 이런 곳에 왜 한국인이 혼자 찾아왔는지 궁금해 하더라고요.

하긴, 비행기를 두 번,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배를 타야 하는 곳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도 아닌데 혼자 이런 곳에 오는게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겠군요.

저는, 사실 홋카이도에 노츠케 반도를 보기 위해 왔습니다. 이 곳을 떠난 후에 이곳 저곳에 갈 계획이 있긴 하지만...


저는 꽤 오랫동안 살아갈 이유가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량한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을 보려고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해도 존중은 해야하는 법. (일종의 인권 보호인가. 하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저열함에 실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찾아온 이유는, 풍경이 아닌 개념에 가까운 것을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땅 끝이나 세상의 종말 같은 거창한 말로 설명하긴 그렇지만, 저 먼 곳에 있는 "피안"을 보고 싶었다고 하는게 비슷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가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이름의 고통, 무의미한 삶에 대해 느끼는 고통. 거기엔 해결책도 없고 결론도 나지 않으니

저는 저 멀리를 보고 싶었습니다. 저 멀리에 무엇이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반도를 나오는 길에 I상이 보여주신 숲을 기억합니다.

반도 중심의 마른 숲처럼 흰 색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숲. 지금은 사유지라서 들어갈 순 없고요.

언젠가 저 숲이 점점 가라 앉아서 또다른 세상의 끝 같은 풍경이 되겠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세상의 끝은 사라지지 않고 "이동"할 뿐이구나. 숲이 생명을 다하는 것처럼 끝도 생명을 다하고

또다른 숲이, 세계가 이어지게 되는구나. 하고 납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I상, 이 사구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그 전에 이 말라붙은 숲이 사라지고, 그 전에 "제"가 사라지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개념"들이 사라지기 전 까지는 제 안의 기억을 할 수 있는 한 소중히 간직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그것이 제가 저라는 개념의 종말을 맞이하는 가장 건전한 자세가 되겠지요.


차를 몰고 가다가 아 여우다. 하고 말하시고는 손가락을 해변의 한 점을 가리키셨었죠.

거기에 정말 여우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시는거죠? 하고 물어보니 뭐라고 대답하셨더라.

틀림그림 찾기 같은거에요. 라고 하셨었죠. 틀린그림 찾기.


다시 만날 날 까지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진다. 

어느날 남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를 듣자 그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신은 그에게 소명을 부여하기 위해 불타는 나무나 광휘에 휩싸인 사람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우연과 망상의 세계에서 그것은 어떤 형태라도 취할 수 있다.

비논리적인 흐름으로 이어지는 광고, 우연히 주변 사람들이 건네는 한 마디. 갈 생각이 없었던 곳으로 길이 이어지고.

우리의 편리한 뇌는 알아서 커다란 사람의 얼굴을 공백에서 발견하고, 커다란 누군가의 의지를 우연과 우연사이에서 연결해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5년 6월29일. 구시로.


(몇 번이고 똑같이 그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


너무 늦게 일어났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조식을 먹었다.  

캐리어를 맡기고 역에 오니 구시로 습원과 호수를 잇는 노선을 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노롯코라는 이름의 구식 열차를 타고 습지와 호수를 달리는 것이 구시로의 중요한 관광 상품인데 노롯코의 첫차를 놓쳤다.

관광센터가 열리기를 기다려서 물어본다. 어떻게든 안될까요? 아 다음열차 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기다리셔야해요

혹시 구시로에서 하고 싶으신거 다른게 없나요? 아뇨 그냥 구시로 습원을 걸어다니고 싶습니다.


내가 홋카이도에 오기로 한 것은. 구시로 습원에 대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동부의 구시로시 바로 북쪽에서부터 양탄자같이 펼쳐지는 것이 바로 구시로 습지. 일본에서 최초로 람사르조약에 등록된 총면적 183평방킬로미터의 거대한 습지이다. 이곳에는 에조 사슴, 흰꼬리 독수리를 비롯하여 2천 종류에 이르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여름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며 겨울에는 특별천연기념물인 단학도 찾아온다. 대습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주위의 구릉에는 여러 개의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구시로 시 습지전망대는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어 초록의 양탄자 위를 산책할 수도 있다. 특히 호소카 전망대는 눈 아래로는 구시로 강의 물굽이를, 멀리로는 아칸의 연봉들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일본정부 관광국 구시로 습원 안내 부분)


내가 본 사진은 넓은 녹색 사이로 오래된 기차가 대각선으로 난 철길을 따라 달리는 모습이었다. 스펙타클하거나 아름다울 것도 없는 비인간적인 광경.

달리는 기차는 이 땅에 무신경한 녹색을 사진으로 담을 때 촛점을 찾지 못해 당황한 사진 작가가 놓아둔 절취선 같았다.

도서관에서 빌린, 발간된지 10년쯤 된 가이드북은 다른 페이지는 너덜너덜했지만 이 페이지는 아주 깨끗했다. 

그래 여기를 가야지, 여길 걸어다닐거야. 하고 홋카이도 여행을 결정했다. 


하와이든가 프랑스든가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안가, 홋카이도에 갈거야. 나는 여길 걸어다닐거야. 하고 습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너도 참. 친구는 그것말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하와이에 갈 예정이었다. 그래 홋카이도 여행을 가기 전에는 그런 계획이 있었다. 나도 내가 그럴 줄은 생각도 못했다)


노롯코를 타고 전망대로 가는 것도 있고, 구시로 습지를 걸어다니고 싶으면 네이쳐 센터로 가서 하이킹 코스를 가보세요.

네이쳐 센터는 버스를 타고 가나요? 네, 시간표를 보여드릴게요.


구시로는 그 자체만으로도 조용하고 평안한 도시이다. 2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좀 그렇지만. 

항구는 깨끗하고 넓으며 본격적인 어항이라기 보다 잘 꾸며진 항구도시처럼 느껴진다. 성수기가 되면 로바다야끼나 구시로 주변의 아칸호 등을 즐기러 많은 사람이 온다고 하지만 구시로 시 자체에 상주하는 인구는 많지 않아 보인다. 미술관과 관광객을 위한 시장, 예를 들어서 항구에는 피셔맨즈 워프라는 순수하게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 있다. 식물원에 밥집 그리고 작은 해산물 소매 시장 까지 있어서 과연 홋카이도 동쪽의 중심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사람이 그닥 많지 않았고. 여름에는 이 주변에 로바다야끼의 가판이 쭉 늘어선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외의 시설물들은 붉은 벽돌을 써서 만든 것들이 많았다. 넓은 땅을 마음 껏 써서 다리와 석상을 배치해서 의외로 이 도시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활감은 적고, 어디랑 비슷한가 싶으면 러시아의 항구가 이런 느낌이겠지. 싶다.


(구시로에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비가 있다. 그가 쿠시로신문사의 기자로 잠시 일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쿠시로를 떠나기 직전에야 알았다)


아침시간이 지나서야 노롯코를 탔다. 석탄운송용 화차를 승객이 탈수 있게 개조한 차체는 안은 나무이고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차량은 아니다. 거꾸로 그 느릿느릿함과 불편함이 매력으로 여러가지 노선에서 같은 이름으로 운행되고 있는 열차이다. 항상 인기가 많고 성수기에는 어느 정도 사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탈 수 없다. 하지만 비성수기에 여기를 방문하는 사람이 그닥 많지 않아 이 열차를 탄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어린 사람이란 것은(서른이 한참 넘었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구시로 습원역에서 내려서 전망대를 구경했다. 구시로 습원의 전체 크기는 서울의 3배 정도 된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걸로 반족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나는 전망대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구시로 역으로 돌아가는 열차가 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저 쪽에서 부터 이 쪽까지 산도 없이 넓게 펼쳐진 광경을 보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바로 구시로 역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올라 네이쳐 센터로 들어갈 수 있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버스는 구시로 역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올라가 네이쳐 센터로 갔다. 거기엔 누구나 구시로 습지를 걸어다닐 수 있는 코스가 있다.

산 틈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길로 들어가니, 나무로 만든 센터가 보였다.

실례합니다. 

나는 센터에 들어가 안에 들어가 있는 아무에게나(한 명 밖에 없었다)말을 걸었다.

약초꾼 처럼 생긴 중년의 남자였다. 남자는 센터가 닫을 시간이 다가와 귀찮은듯 고개를 들었다.

여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횡단하려면 얼마나 걸리죠?

2시간? 3시간? 중간에 길이 공사 때문에 막혀서 오래 걸릴거에요.

중년의 남자는 종이 지도를 꺼내 선을 긋는다. 이렇게 나아가요.

선은 거칠고 곧게 종이의 반을 가로지른다.


(나는 구시로 습원을 나올 때 그가 가르쳐준 코스를 그대로 따라 나왔다 정말 한참을 걸어서 슬슬 무리다 한계다 하는 시점에서 "작년 곰이 출몰한 지역이니 주의해주세요"하는 표지판을 보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기어나왔다)


센터 밖에는 나무 잔교가 놓여져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갈 수록 소리가 커져간다.

그것은, 처음에는 바람소리처럼 들렸다.

새가 부르고, 바람이 부르고 나무가 몸을 흔드는 소리. 거칠 것이 없는 평평하고 광활한 습지를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

잔교를 조금 더 걸었을 뿐인데,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이곳 까지 오지 않는다.


녹색이, 녹색이, 녹색이, 녹색이 펼쳐져 있다.

녹색의 소음이 산불같은 소리를 내면서 사방에서 떨어져 내린다.

상상하고 있던 흙의 비린내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싱싱한 풀을 갓 잘라내었을때 나는 냄새만이 느껴진다.

여긴 거대한 풀의 한 가운데야. 세상에 놓여진 세상의 끝 중 하나야. 너는 그래서 여기까지 온거야.


나는 습원에 놓여진 나무 잔교의 한 쪽에 서서 귀를 기울여 사방을 본다. 눈으로는 어떤 새도 동물도 볼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내 옆을 치고 가버렸다. (나는 순순히 나의 끝을 인정했다)

나는 여기에 무너지기 위해 온 것이다. 멀리 바다를 건너, 기차를 타고 밤의 끝에 도착한 도시에서. 습지로.

무엇이라도 혼잣말을 해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음이 나를 안았다.


나는 그렇게 통곡하기 위해 찾아간, 그 땅 끝 같은 벌판에서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왔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음. 우주의 모든 곳에서 떨어져 나온 신호 같았다.

그것은 내 삶의 끝이고. (언젠가 혹은 바로 지금) 이빨처럼 나를 찢어 흩뿌릴 것이다.

나의 일부가 저 푸른 습지에서 소음이 되어 사라졌다. 

나는 소음과 끝의 위로를 받아들였고 습지를 걸어나온 나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조각이 되어 습지에서 산으로, 그리고 도시로 각자 걸어나갔다.


여기에 있는 나는, 3시간에 걸쳐서 구시로 습원을 가로 질러 산을 넘어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고,

구시로 역에서 오비히로 역으로 밤 기차를 탔다. 밤은 길었고 내내 같은 노래를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소음으로 인해 조각난 나를 채우려는 듯이 굴었지만 분리된 나를 이을 수는 없었다.

여러분은 영영 구시로 습원에 남은 나와 길을 돌아 나온 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남은 것은 일부분의 나 뿐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내 일부는 아직도 습지의 한가운데서 그 소음을 듣고 있다.




친구는 나에게 너무 가까운 이름이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쉽게 친한 척을 하기 힘들게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선배는. 하는 소릴 들었었다. 냉혈인간에 무표정하지. 하는 소리도 들었다. 사실 어디에 가나 항상 저런 소리를 듣는다.
그냥 엄청나게 같이 재미있게 놀고 얘기도 잘 통하고 보기보다 사교적인데 역시 이 사람은 마음을 안 열어. 하는 느낌이 있어요. 라는 소리도 들었다.
마음을 여는게 도대체 뭐야 이 멍청이들, 하고 마음을 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만을 친구들로 사귄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주 자연스럽게 너는 내 친구야. 하고 생각이 되는 사람들말이다.

중학교때부터의 친구 결혼 소식을 들었다.
페북에 그의 이름을 링크한 게시물이 떴기 때문이다. 오랜 연인인 그의 신부가 될 분이 올렸다. 나도 알고 계신 분이기에 "와. 결혼해요? 전혀 몰랐네"하고 댓글을 달았다. 사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둘이 아직까지 사귀고 있을거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분은 당황하셨는지 한참 남았어요 ㅎㅎ 하고 댓글을 다셨다. 정말 매너가 없었지. 그래도 한참 동안 친구에게 연락이 없었다.

서운했다.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생각보다 친하지 않은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평일 오후에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엄청나게 빈정댔다. 야 아냐 너 해외있더라구 그래서 전화 끊었어. 어이구 그러세요?
아 그래서 응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어이구 그러세요? 내가 그런 소식을 페북으로 들어야겠냐 것도 니 여친 게시물로 어이구.
친구는 변명하기를, 야 네가 보고 싶어서 연락을 하는 건 항상 나였잖아. 하고 말한다.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 몇 명 중에 제일 제정신이 아니고 퉁명스러운 것은 나였다. 그는 그런데 또 결혼한다고 연락하기 겸연쩍더라고. 하고 말했다 야 너 부천 안 오면 내가 니네 동네로 갈게 진짜 미안하다. 응? 연락하면 평일에 시간 좀 내.
물론 그 녀석은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앞둔 신랑이 얼마나 바쁜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니.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걸어와야 하는 서울의 끝은 멀어서 충분히 이것저것 생각해내기에 충분했다. 어쩌지 어머니한테는 뭐라고 인사드리지 걔 누나한테는? 일단 만나면 더럽게 멀다고 한 대 때릴까? 만나면 같이 셀카나 한 장 찍어야지 생각해보니 그 녀석 대학원 조교하던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니까-4년도 더 됐잖아.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름을 도대체 왜 바꿨는지(심지어 바꾼 이름이 촌스러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결혼식의 신랑은 바쁘니까 얘기할 시간은 있겠지. 한 2,3분 정도도 없나. 그러기엔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식 시작 겨우 10분 전이잖아. 제길 이 녀석 때문에 시험까지 취소했는데 축의금을 이렇게 많이 내다니 빅 손해란 느낌인걸...보나마나 그 녀석 친구 중에 내가 제일 멋있을텐데 너무 자리를 빛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아. 결혼식 장에는 사람이 가득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뿐이었다. 왜 저 녀석 아버지 자리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지. 그냥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신랑석이든 신부석이든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녀석이랑 나는 사람들로 가득찬 자리 구석에서 시시덕거리는 그런 학생이었다. 성적에도 운동에도 취미에도 관심없이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이 즐거워서 몇 안되는 친구들과 함께 바보같은 농담을 하는데 몇년을 보냈다.
오늘은 나랑 같이 구석에 앉을 녀석이 없구나. 신랑이잖아 그 녀석.

축의금을 내고 식장을 둘러보고 아 테이블제잖아 나 간다.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식장을 나왔다. 밖에는 아깐 없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야 뭐냐. 하고 말하고 친구는 평소처럼 뭐냐가 뭐야 꺼져. 하고 말하다가 입을 다문다.

그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때는 아주 옛날이다.

악수를 해본 적도 없는 우리는 아주 어색하게 악수를 하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간다, 하고 가버린다. 야 어디가? 하고 그가 물어보지만 이젠 내가 알던 이름도 아니고 낯선 표정에 낯선 말투의 사람에게,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만나지 않았고 나는 우리 둘 다 알던 오락실의 중학생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 뿐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옛날 우리는 학원도 가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고 오락실에 모여 오락을 했다. 집에 가고 싶지가 않았던 녀석들 뿐이었다. 작은 돈으로 오랫동안 게임을 하기 위해 오락실을 전전하면서 여러가지 게임을 익혔다. 한 명이 돈이 떨어지면 다 같이 나왔다. 매일매일 만나기 때문에 돈을 빌려주는 것도 우스웠다. 집까지 가는 길은 길었다. 내일 다시 방과후가 될때 까지 우리는 괴로웠다. 어쩌면 괴로웠던 것은 나 뿐인지도 몰랐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녀석이었으니까 내 외로움에 어울려줬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간다. 하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평소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평소처럼, 집까지는 나 혼자 가야한다.

16년 7월 23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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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날씨였다.

아십니까, 비가 오는 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털복숭이 아저씨처럼 술잔을 기울이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사내다운 풍취가 없어서 온천에 들어갔다 와서 책이나 읽는거죠.


전날 다이세츠잔의 한 쪽 구석인 소운쿄에 도착해서 오후를 보내고 나니, 멈추지 않는 비 때문에 쿠로타케를 가볍게 등산하려던 계획도 망해버렸다.

이상한 곳에서 부지런하기 때문에 소운쿄의 케이블카를 타고 쿠로타케의 중간 지점까지 올라가 산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지만

슬로프를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또 산 정상까지 왕복 2시간이 좀 넘는 스케쥴을 소화할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사방에 곰을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가득해서 그 전 날 시레토코에서 정말로 곰을 만난 나로서는 겁을 먹고는 일찍 숙소에 들어와 온천을 하고 잠이 들었다.

달리 할일이 없기도 해서인데 리조트형 관광지로 꾸며져 있다고 해도 결국은 산 속의 골짜기, 기념품 샵이나 라멘집, 이탤리언 레스토랑이 있지만 본토의 화려하게 디자인된 온천마을에 비하면 아무래도 소박하다. 야생의 사슴들이 그냥 공터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걸 보았다.

다음날 호텔 뒤의 산책로를 걸을 때도 얼마나 사람이 없던지 곰나오겠어 라는 생각을 서른 번은 한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문제는 날씨였다.

원래대로라면 다음날 일정은 비에이에 가서 자전거로 아오이케에 가는 거였는데, 이렇게 비가 내려선 3분만 자전거를 타도 독감에 걸릴 정도다. 호텔의 송영버스를 타고 아사히카와에 가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떠나는 아사히카와-비에이-후라노 라인은 15년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곳. 대략 어떤게 있는지도 알고 뭘 볼수 있는지도 안다. 어디를 가든 갔던 곳을 한 번 더 가는 수 밖에 없는데...하고 지도를 보던 나는 버스안에서 충동적으로 로쿠고를 가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후라노 시내에 위치한 곳이라서 비가 와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겨울 시즌이 아닌 후라노 시는 커다랗게 4개 정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비에이와도 이어지는 후라노 북부 지역으로 사실상 하계 후라노의 클라이맥스인 라벤더 밭과 멜론 농장이 있으며. 도미타 팜은 홋카이도에서도 아사히카와 동물원에 필적하는 유수의 관광지이다. 중심지인 후라노 시내는 사실 별다르게 볼 것이 없는 곳으로 시골 읍내답게 번화한 곳으로 후라노 마르쉐 정도가 그나마 볼만한 지역. 후라노의 서쪽은 겨울 관광의 중심지인 후라노 프린스 호텔이 있는 지역으로 와인공장이나 치즈 공방 같이 참가형의 액티비티도 가능한 곳이지만 비 겨울 시즌이라면 역시 약간은 애매하다. 후라노 지역이 상상 외로 넓기 때문인데(다른 홋카이도와 똑같다) 동쪽에는 로쿠고麓郷가 있다.

숲과 구릉으로 이루어진 후라노의 숲, 로쿠고. 후라노 시내에서도 꽤 멀기 때문에 유리 공방이나 잼 공방, 그리고 앙팡맨 숍 정도가 유명한 곳인데. 후라노의 다른 공방/농원들이 그렇듯이 메인이 되는 것은 방문자가 같이 참여해서 뭘 만들거나 하는 클래스가 유명하다.

달리 생각하면... 체험 클래스에 안 들어가면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곳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가 왜 로쿠고에 가겠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여기서 결말을 미리 말해주겠다. 나는 로쿠고에 가 수 킬로미터 시골길을 비를 맞으면서 걸었고. 시골길을 걷는 내내 나는 왜 자꾸 이런 여행을 할까 반성을 했다. 결국은, 그냥 뭐라도 해야지 하는 동아시아인 적인 부지런함이 아니었을까. 혼자 하는 여행 내내 나를 저주처럼 묶고 있는 동아시아인 적 부지런함. 오오 공자여 오오 맹자여. 농사천하지대본이여.


버스에 내려 아사히카와에 도착 할 때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심을 굶고 편의점에서 대충 빵을 사서 전차를 탔다.

아사히카와와 후라노는 가깝다는 이미지가 있는데도 1시간은 걸리고 그나마 전차도 많지 않다.(그건 작년의 여행때 뼈저리게 느꼈다)

비는 전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갈 수록 강해졌고 후라노 역에 도착해서 짐을 맡기고 후라노 사람들도 잘 모르는 로쿠고행 버스를 탈 때 쯤이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에이에 가지 않기로 한 본인의 현명함을 칭찬하고 그대로 호텔에 들어가 쉬기로 하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비는 중학교 수학여행의 벌칙게임 처럼 내렸다. 집요했고 개 중에 팔꿈치로 치는 비매너인 녀석이 있었고 가끔 멈추는가 싶더니 더 씩씩하게 내렸다.

버스는 다리를 건너 구릉을 타고 올라가 내가 봤던 그 어느 홋카이도의 거리보다 작고 초라한 시내에 도착했다. 로쿠고였다.

건물들이 있지만 가게는 아닌것 같고, 건물은 모두 적어도 20년은 될 듯하게 오래 되었다. 구글맵을 살펴보니 밥집은 두 서너 곳. 버스 정류장은 하나 뿐이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자전거를 빌렸을텐데 자전거를 어디서 빌려야 하는지도 알수가 없었다.


이제는 소똥이나 말똥 냄새가 난다 정도로 홋카이도의 어딘가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는다.

이 로쿠고는 로쿠고 숲과 전망대를 중심으로 작은 시내가 있고 농지와 여러가지 관광지가 흩어져 있는 구조이다. 그닥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찾아오는 것 같진 않지만 산천은 수려하고 길가의 농가가 평범하게 아름답다. 80년대 부터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촬영지였는지 여기 저기 그런 곳이 있다고 안내문이 붙어있지만 외국인인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차라리 아름다운 농토와 숲이 있어요 하고 홍보하는게 낫지 않았으려나. 8,90년대의 드라마가 어디에서 촬영되든 너무 오래 전 아닌가? (슬프게도 후라노 서부 지역도 그런 안내 푯말이 꽤 많다. 여기선 이런 드라마를 촬영했어요. 라고 써있지만 오다 유지 이전의 일본 드라마는 나에게 있어서 유사 이전보다 멀디 멀다. 대부분의 일본인에게도 그럴 것이다)

5시 경엔 후라노 시내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간다. 그 때 까지 글래스 포레스트라는 유리 공방과 잼 공방을 둘러보고(그래 가볍게 둘러보자고 생각했지) 후라노 시내로 돌아가기로 했다. 유리 공방은 로쿠고 읍내에서 바로 옆, 잼 공방은 5킬로미터 정도 시골길을 걸으면 있는데 학습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비가 좀 오지만 걸어서 가지 라고 또다시 생각했다.


유리 공방은 4,5건물 정도의 판매 건물과 유리 제조 공방이 같이 있는 곳이다. 어느덧 유리 공예 자체가 촌스러운 것으로 변했지만 이 공방은 그런 점은 전혀 부정하지 않고 물량으로 그걸 극복해내려는 것 같았다. 유리로 된 것이라면 거의 모든 종류를 다루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 오타루의 오르골 공방처럼 할수 있는 한 모든 종류를 진열해두고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이 중에 하나는 말야. 하는 느낌이다. 

가장 압도 당한 것은 작은 크기의 유리 공예품들, 각종 동물들을 갖가지 디자인과 포즈로 제작해놨는데 중형 전시대에 양쪽으로 가득차 두줄 정도 그런 물건들로 가득차 있다. 이런 집착이면 유리로 디오라마를 만들라고 해도 만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 토끼 인형이 제일 맘에 들어서 주의깊게 보고는 다시 올게요, 하고 나왔다.

가장 사고 싶었던 것은 묵직하게 언더락을 마시면 제일 좋을 듯한 유리잔들. 때마침 일본의 아버지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제품들을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공방의 앞에는 작은 화로가 있고 사람들이 유리를 불거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님, 이 유리는 베네치아적인 데포르메와 투명도가 핵심이군요. 부드러운 곡선은 얼마전 뉴욕에서 전시회를 한 그 분의 영향인가요.

자네는 공부를 많이 하는군, 이런 데이비드 카퍼필드 적인 디테일의 가장 중요한 점은 유리를 불 때의 호흡량에 따라 달라지지 나는 요즘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자전거를 육십킬로미터씩 탄다네.

(위의 대화는 제가 제 멋대로 생각한 것들입니다) 같은 훌륭한 대화를 하고 있겠지. 멀리서 멍하니 공방을 쳐다보다 걸음을 돌렸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이 정도면 잼 공방에 다녀와야 한다.

비 때문인지 길가에 피어있는 꽃에서 강한 향이 느껴진다. 공기가 맑은 홋카이도인데 하늘이 흐려 멀리 까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세븐 일레븐에서 사서 일본에 올 때 다시 가져온 우산은 너무 작다. 비는 지치지도 않고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한다. 

멀리서 아이가 보였다. 여자아이같은 뒷 모습에 우산이 없이 시골길을 걸었다. 어쩌면 5분 전 쯤에 지나갔던 초등학교의 학생인 것 같다.

예비 우산이 있던가.

우산을 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에서 우산 없이 걸어다는 아이에게 우산을 빌려준다고 했을 때 한 번도 우산을 받았던 아이가 없었다.

아무리 쫓아가려고 해도 의외로 걸음이 빨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잠시 길 옆에 떨어진 솔방울이 귀여워 사진을 찍느라 눈을 돌렸더니 사라져버렸다. 


길고 우아하게 굽은 시골길을 4,50분 걸었을까 표지판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가면 잼 공방이 나온다.

이 떄 쯤이면 비는 그치기를 포기하고 쏟아져내리기 시작하고 6,7팀 정도의 사람이 잼공방에 비를 피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잼 공방은 70평쯤 되어보이는 1층에 잼이 가득하다. 홋카이도의 자연은 풍요로워 일본내에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식량 자급율을 가지고 있다. 그건 일반적인 곡물 뿐만이 아니라 고기, 우유 등의 부식들의 생산량에서도 마찬가지라서 각종 과일 또한 엄청난 양으로 생산된다. 의심이 나서 제쳐본 잼들은 열이면 열 모두 홋카이도에서 생산된 과일들로 만들어진 잼이었다. 하나 정도는 외국산 잼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포기하고 크로와상 카탈라나와 카레를 시켜 밥을 먹었다. 온 몸이 노곤해져 3년만에 먹는 식사 같은 기분이다.

한 떼의 대만인들이 인당 하나 씩의 카레를 시켜 커다란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주방에는 쉐프의 음식을 쉐프의 어린 딸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일본의 카레는 한 접시로 모든게 설명되는 훌륭한 음식이다.


카레를 먹고 나오면 바로 보이는 것이 앙팡맨 샵과 앙팡맨의 석상들이다. 하나같이 비를 맞고 있지만 씩씩하게 여기 저기를 바라보며 서 있다.

히로시마의 어떤 절에서 아이들을 공양하기 위한 절에 앙팡맨의 석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비를 맞고 있는데도 쓸쓸하기 보다 용감하게 보인다.


호빵맨, 그러니까 앙팡맨 기념관은 고치현(야나세 타카시의 고향이다), 후쿠오카와, 나고야, 고베, 요코하마 같은 곳에 위치해있다. 홋카이도에 있는 곳은 앙팡맨 샵이니까 뮤지엄보다는 격이 낮은 곳인데, 1층에는 앙팡맨 구즈로 가득하고 2층에는 야나세 타카시의 "앙팡맨 전설"에 대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그림은 세균맨에게 주먹을 날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픈 동물들에게 자신의 머리를 떼에서 주는 장면. 작가는 태평양 전쟁의 참전병으로 전쟁 중에 전우 대부분이 죽고 기적적으로 생환하지만 전쟁 중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바로 배가 고팠던 것,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고 한다 영웅 중에 가장 훌륭한 영웅은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영웅이 아닐까. 그렇게 앙팡맨이 탄생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만화가가 된 그는 50이 훨씬 넘은 나이가 되어야 만화가로서 대성하고 90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일하다 94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별의 생명이 내려와 사람들에게 끝없이 자기를 베푸는 영웅, 귀환병은, 만화가는,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앙팡맨의 이야기를 그렸을까.

그가 처음에 그린 앙팡맨은 그를 전투기로 오인한 사격에 의해 격추되어 앙팡맨이 죽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전쟁으로 한줌의 재와 폐허가 된 고향에서 그는 어떤 생각으로 만화를 그린 걸까.

어딘가로 날아가는 앙팡맨. 석양으로 향하는 앙팡맨. 동물들과 손을 잡는 앙팡맨.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팝아트가 있을까.


돌아오는 길엔 비를 맞으며 시골길을 가던 아이를 생각했다. 가까이 갈수도 더 이상 멀리 떨어질 수도 없는 거리를 가던 아이.

우산도 없이 길을 걷다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숲이 시작하는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麓郷(로쿠고)의 로쿠란, 산 아래의 언저리를 의미한다.

그곳에는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살며, 산으로 간 사람들은 그곳을 고향처럼 여겨 때때로 돌아오기도 한다.


돌아가는 길에 글래스 포레스트에 들려서 유리로 된 토끼인형과 몇가지를 사야지. 선물을 해야겠다. 기뻐해줄지 잘 모르겠다.

"무엇을 위해 태어나 뭘 하며 살아있는가를 대답할 수 없다니, 그런거 싫다"

앙팡맨 샵에 새겨져 있는 야나세 타카시의 말- 이것은 앙팡맨 행진곡의 가사이기도 하다-이 잊혀지지 않는다.


16년 6월9일 후라노시에서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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