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인가, 겨울 나절 아직 봄이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노인과 둘이서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나무는 앙상하니 얼음을 털어내지 못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 오후라 멀리까지 바라보아도 사람 하나 없었다. 

밥을 먹고 돌아가는 길이었으니 산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발끝을 바라보며 걷던 노인은 익숙치 않은 외국어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기도를 하나요?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역시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누구에게요?"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앞서보다 더 천천히 나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나요? 

나는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짧은 말은 모두 필연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지만. 질문을 받은 이상 할 수 있는 최선의 언어로 대답해야하기에 나는 한기처럼 멈춰서서 생각을 했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확한 대답을 찾았다. “저 또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저는 저의 신에게 기도를 합니다. 저의 신은 침묵이며 숨결이고 질서입니다.
그는 중력처럼 연약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제가 어떤 때 어느 곳에서 기도를 하더라도 그가 저의 기도를 듣고 있을 거란 걸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때때로 제가 아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제는 모르게 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더 정의에 부합하는 행위로 느껴집니다.

저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말과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란 구절을 믿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게으르지 아니한다면 해야할 바를 성취할 수 있고 그 모든 것은 언젠가 소멸한다는 말 또한 믿습니다.
사랑이 없는 자의 노력 또한 신에게 닿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 마저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젠가 세계의 색이 흘러내리고 그림자가 무게가 되어서도 우리의 말들이 공중에 그대로 남아 우리를 증언할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언젠가 살아있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네, 저는 기도를 합니다. 왕국도 도시도 노래도 코끼리도 책도 모두 언젠가 낡아 사라질 것이고. 별보다 이 기도가 오래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노인은, 늙은 외국인 엔지니어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하더니 이윽고 그 질문이 사실 혼잣말이었다는 듯이 기도는 하는 게 좋지요. 누구에게라도 누구를 위해서라도.

나는 몇 년이나 지나서 노인의 말을 떠올리고, 그의 마지막 말 앞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오래 전의 일이었고 그는 이미 은퇴한지 오래라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수가 없다.

나는 그 늙은 엔지니어를 위해 기도를 해보려 노력한다. 그러다 나는 변덕스럽게도 신을 위하여 기도를 했다. 

이 세상에 누군가 선량한 마음을 지닌 이가 있다면 그 누구보다 외로울것이기에, 누군가 한 명 쯤은 그의 평온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물방울이나, 새가 날개를 휘두르는 소리처럼 기도는 멀리까지 전해진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의 기도가 신에게 가서 닿을지는 아직 알수 없다.



19년 12월의 글이다.

데스크탑을 껐다. 

사람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사무실을 떠날 때는 의식처럼 정해진 순서대로 행동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든 다른 자리 처럼 지금의 내 자리도 우연히 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항상 아주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책상 위의 쓰레기를 모아 버리고. 달력과 노트를 정리한 다음, 나 대신 자리를 지킬 사람 모양의 인형 하나를 올려 둔다. 아무리 정리해도 내 자리는 다른 누구의 자리보다 내 자리처럼 보이지만, 시도를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오늘 저녁 때 가을 비가 내릴 거라고 했는데 비는 아직 오지 않는다. 챙겨온 우산을 서랍에 넣고는 잠근다. 

커다란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노래를 튼다. 가방을 멘 다음. 의자를 넣고 한 번 더 사무실을 둘러본다. 누군가 사무실에 남아있을 때는 인사를 한다. 안녕히계세요. 아무도 사무실에 남아있지 않아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설 때엔. 불을 끈다. 안녕히계세요.

나는 회사의 정문에서 우리집 현관문 앞에 떨어트려 주는거나 다름없는 통근버스 노선이 하나 있지만, 너무 더워 걷기가 곤란 할 때가 아니면 출근 할 때도 퇴근 할 때도 그 버스는 타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왜 걸어서 출퇴근을 해요 라고 물어보기에. 개를 산책시키는 것처럼 스스로를 산책시키는 거에요, 라고 대답했다. 일어나서 잠이 들 때 까지 나는 대체로 계속 혼자지만. 완전히 혼자가 되서 어딘가에서 다른 한 곳으로 걸어가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걸어가는 것이 좋다. 겨울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 거라면 더 좋다. 꼭 정신의 메트로놈을 맞추는 것처럼 기분이 좋을 때는 진정하게 해주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기분을 낫게 해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추위를 느끼며 걷고 있노라면 내가 이렇게 걷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인 것 같다.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고 다리가 납처럼 무겁고 숨이 모래처럼 갈라질때 까지 걸어다니고 싶어진다. 나는 애초에 목적을 위해서 뭘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뭘 하고 싶어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음악을 틀고 신발 안에 발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해 보고 계단을 내려간다.

요즘은 예전처럼 퇴근이 늦지 않다. 일주일에 70시간을 넘게 일하던 때보다 훨씬 낫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한가하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간에 출근을 해도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면 저녁이 되고,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시간이면 일어나 집에 간다. 일을 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얼마 전 부터는 게임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요 몇 년 전 완전히라고 할 정도로 게임을 하지 않았는데, 그 때는 게임을 하지 않아도 생각해야할 사람들과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제는 생각해야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대신 게임에 대한 생각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과일을 먹어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괴물이라거나, 그 괴물에게서 (반드시 빼앗기고 말 운명의) 과일들을 지키는 유령들 이라거나 하는 유사 셰익스피어 적인 악몽의 서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규칙을 지닌 작고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게임 안으로 각자의 작은 촉수를 내밀어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 처럼 보인다. 게임 안에서 우리의 의지가 움직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즐거운 유희인 것 처럼 불편하고 이해하기 힘든 규칙에 따라서 (예를 들어, 너는 게임 안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지만 거북이와 정면으로 맞서면 죽고 말아, 혹은 너는 뭐에 부딪혀도 죽지만 네 키보다 높이 점프 할 수 있어) 게임을 플레이 한다.

규칙이 복잡하고 그래픽이 정교해져도, 게임의 법칙은 단 하나 뿐이다. 이해하기 힘든 불합리한 세계에 우리의 의지를 구현하는 것. 그리고 때때로 거기서 이야기를 떠올리고 또 우리 스스로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실체가 살고 있는 세상 또한 게임 안의 세계처럼 불합리한 규칙의 세계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는 것. 왜냐하면 게임에서의 죽음과 실패는 현실에는 어떤 영향도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가 결코 말하지 않는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는다. 
다시 생각해보자. 걸어 다니고 있지 않을 때는 항상 무언가를 읽고 있기 때문에 내가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문제가 너무 많은 것을 읽어서 라는 걸 내심 깨닫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임을 다시 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소설 또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게임보다 훨씬 안전한 매체이다. 글은 어떤 시대에서도 총칼보다 강한 적이 없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라는 말은 총칼을 가진 권력자들이 엄살을 부리며 하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런게 아니라면 너무 많이 읽어서 지상낙원을 이룩한 곳이 한 군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 내가 아는 한 모든 지상 낙원은 아스피린과 밀가루의 부족으로 멸망한지 오래이다.

높지 않은 건물인, 사실은 원래 공장이었던 사무실을 나와서 조금 걸어가면 커다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가 나온다. 사거리는 멋지게 뻗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운이 좋으면 해가 지는 시간에 퇴근을 해 엄청난 색으로 물들인 하늘을 보면서 퇴근 할 수도 있다. 매일 매일 같은 곳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 회사 부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고. 무엇보다 항상 같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못한다면 그런 활동도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그램에서 초기에 올린 사진을 보니 무려 2011년의 사진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갈 수록 내가 사진을 찍는 폰이 바뀌어서 요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록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들은 묘하게 선명하고 밝아졌다. 나는 그게 꼭 기억의 은유처럼 느껴져서 불쾌해지고 말았다. 자연적으로 열화되지 않은 이미지가 아니라 앞으로 발전해나가며 선명해지는 이미지라니, 언젠가는 인스타그램의 이미지가 현실의 해상도를 따라 잡을 지도 모른다고 늙은이 같은 걱정을 한다.

사거리를 지나갈 때는 어째서인지 잠시 멈춰서서 왼쪽의 커다란 건물을 흘끗 보고는 헤드폰의 볼륨을 올린다. 이제는 이유도 기억나지 않고 그냥 버릇이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듣는 것은 좋은 버릇이 되지 못한다. 듣는 음악은 대중이 없지만, 항상 가장 큰 소리로 항상 가장 빠르게 걸어 거리를 지나간다. 어떤 시간에 지나가든 간에 사거리에서 이어지는 그 길에는 사람이 있다. 모두 후회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 사람 처럼 걸어간다.

문득 내 출근길과 퇴근길의 루트가 달라지는 지점이 이 지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출근 길엔 좀 더 왼 쪽의 커다란 건물에 가까이 그 바로 앞을 걸어 작은 공원 앞을 지나가는데, 퇴근 할 때는 커다란 건물에서 약간 빗겨가 사거리의 중앙부를 가로지른 중앙대로를 따라 걸어간다. 무슨 이유 일까 생각해 보려다 스스로의 행동에 하나하나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아서 그만둔다. 사람은 대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제대로 이해받기 힘든 법이다.

어쨌거나 사거리와 중앙대로는 항상 엄청난 바람이 분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실상 우리 회사가 있는 곳은 거대한 공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바람을 막아줄만한 것은 거의 없고 커다란 빌딩이 연달아 서있어서 자연스럽게 바람이 강해진다. 가끔 내가 걸어가는 곳이 경기도 어딘가의 도시인지 아니면 지구 구석 어딘가의 황야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나는 바람이 강하게 불 수록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 토요일 급하게 출근을 하며, 벼락이 치는 것을 보았다. 아파트를 가로 지르고 언덕을 올라 내려가는데 회사가 있는 단지 저 쪽에 벼락이 치고 있었다. 태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엔 아무도 없었고 나는 벼락이 치는 곳으로 계속 걸어가며 그 장면을 혼자 보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꼭 태초의 산에 변덕스러운 신이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위험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홀린 광신도처럼 계속 걸어갔다.

새삼스럽게 세어보니 벌써 10년 가까이 이 회사에 있었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으나 나는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이 똑같이 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사는 곳이 달라져도 어디에서 일해도 나는 퇴근길에는 항상 한참을 걸어야 만족을 했다. 전철이 너무 가깝다면 전 역에서 내려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고 헀다.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걸어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너무나 많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나는 내가 시간 그 자체로 되는 것처럼 굴었다. 똑딱 거리는 시계처럼, 나무 위에 달려 있는 광신도의 시체처럼, 변하지 않고 도달 할 수 없는 어떤 시점처럼 행동했다. 꼭 영원히 거기에 존재할 계절처럼 살았다.

나는 누군가의 옆 모습을 떠올린다. 정신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바쇼의 마지막 시를 떠올린다. 방랑에 병들어/꿈은 마른들판을/헤매인다. 최초의 시는 기도였으며 모든 시는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시도이다. 스산한 기분에 사거리에 서서 한 마디 입 밖에 내어보려고 하지만, 한 마디 조차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인생이 꼭 누군가의 자리 건넛편으로 보는 재미없는 영화인 것 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멀리 길 건너에 보이는 사람들과 흘끗 보이는 모르는 사람의 집안 풍경은 우스꽝스럽게 따스해 보인다. 나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의 밤 길을 혼자 걸으면, 항상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이리저리 이지러지고 망가져도 겨울의 기온이 나를 다시 한 번 나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오로지 나 였으며 앞으로도 나 외에 다른 것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겨울이고, 내가 입으로 뱉는 것마다 추위, 머리 속에 있는 것은 바람 뿐이다. 나무가 쓸려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방을 고쳐매고, 어깨를 둥글게 구부리고는 계속해서 걸어간다. 밤처럼 쏟아지는 것은 비이다. 노랗게 붉은 나뭇잎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차가운 돌바닥을 밟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하늘이 거기에 있는지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어서 물에 젖은 안경을 손으로 훔쳐가며 그대로 걸었다. 
며칠 전 아침 똑같은 길을 거꾸로 올라가다가 가로수 옆에 기대듯 피어있는 작은 꽃을 하나 보았다. 처음 그 꽃을 보았을 때는 무심결에 지나쳤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그 꽃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비는 계속해서 쏟아지고 나는 그 꽃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별이 멸망 할 때 까지 서쪽으로 계속해서 가는 것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들이 당신들의 의지를 우리를 통해 구현하는 방식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한참을 멈춰있다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19년 11월의 글이다.


저녁 벚꽃놀이 집이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고夕桜家ある人はとく帰る

- 잇사


지금은 밤이고 부산 앞 바다를 지나는 중이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그 위를 지나 왔을텐데 이렇게 부산 위를 지나가고 있는 걸 확실히 인식한 적은 처음이다.

당신에게 부산이 어떻게 아름답다고 설명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나는 시속 810킬로미터에 상공 8500미터에서 이곳을 지나치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지금 지나가고 있는 부산 앞 바다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설명하고 싶다. 이런 속도로 움직이는 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잠시 뿐이다.

그러나, 당신 그 검은 바다 앞을 흔들거리는 등불들이 서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꼭 설명하고 싶다. 산과 바다로 이루어진 도시 밤의 상공에서 볼 때 꼭 커다란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영혼들 처럼 보이는데 검은 - 분명 산일 것이다 - 구름들이 빛의 무리를 집어 삼킬듯 일렁이면 빛 또한 점점이 저 멀리로 저 멀리로 이어진다. 바다를 감싸듯 커다란 원형의 신도심과 구도심은 각자가 하나의 벌떼들인 것 처럼 이어졌다 또 끊어졌다를 반복한다.

빛이 점점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하더니, 금세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숨을 멈추고 있는 시간보다도 빠르게 나는 도시의 상공을 지나쳐 왔다. 나는 눈을 감지도 않고 생각한다. 이제 부산을 지나온 것 같다. 우리가 꼭 모든 스쳐지나가는 것을 애정하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나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상공에서는 영혼 하나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는 잠시 더 높이 날았다가 금세 고도를 내릴 것이다. 그리고 영혼이 강줄기를 타고 우리에게 흘러오듯이 또 빛이 보일 것이다. 아주 금방, 곧. 우리가 숫자를 세는 것만큼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19년 10월의 글이다.

'부재증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1227] 사악한 자들의 기도  (0) 2019.12.27
[20191114] 이슬의 세상  (2) 2019.11.17
[20190515] 따분하다.  (1) 2019.05.15
[20190328] 여름이 없는 세계  (0) 2019.03.28
[20190314] Let’s do hard drugs and fix our problems  (0) 2019.03.14

글을 쓰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너는 웃을지도 모른다.

19년에 나온 뱀파이어 윅켄드의 신보를 듣고 있다. 오늘 오전에 그렇게 까지 급하지도 않은 업무 전화를 하다가 버스를 놓쳤다. 버스를 하나쯤 놓쳐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업무전화가 길었으니 사실은 세개 쯤 놓친 셈 이었고 그래 결국 비행기도 놓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만원 정도만을 물고 비행기를 바꿨지만, 본인의 바보 같음에 몹시 시무룩해져서는 항공사의 라운지로 기어들어가 책을 읽었다.

그러니까, 국적기의 라운지는 처음이었다. 전에 해외 출장 중에 국내선을 이용해야 했을 때 일정이 뜨자 동행한 회사 사람이 따라오라며 라운지를 데리고 갔을 때가 있긴 했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항에 넘쳐나는 것이 있다면, 눈치 없고 불평이 많은 사람들과 불편하고 별로인 의자가 아닌가. 그런걸 일부러 더 좁은 공간에 모아둔 곳이 있고 또 거기에서 굳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하지만 티켓을 새로 끊어준 직원 분께서 시간이 많이 남으셨잖아요, 라고 하며 친절하게 지도까지 그려서 주는데 달리 안 갈 이유도 없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오늘 이러한 사태가 일어날 복선이었는지 얼마 전 항공사의 등급이 하나 올라갔고 덕분에 쓰지 않으면 언젠가 없어질 라운지 사용권이 있었다. 라운지에 입장하며 라운지 사용권이 없으면 여길 돈을 쓰고 사용하는 건가, 하는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처음 들어가본 국적기 항공사 라운지의 의자는 공항의 의자보다는 나은 수준이라서 쿠션이라는 것이 있었다. 요즘 공항의 의자들은 100이면 90은 쿠션처럼 생겨먹은 구조물을 의자에 붙여놓고 앉는 사람의 엉덩이를 공격하기에 바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기개 있는 젊은이를 본 노인처럼 좀 흐뭇해지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무려 4시간이나 여기에 이러고 있어야 하잖아.

컵라면에도 볶음밥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서 찬장에서 맥주조끼를 꺼내, 탄산수를 벌컥벌컥 담아 꿀꺽꿀꺽 마셨다.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공식적으로 비행 중이라 연락도 되지 않을 상황에서 굳이 일을 해야하나. 나는 실은 어제도 10시가 넘어 퇴근했고 매주 지엄한 국법을 어기고 50시간에서 60시간씩을 일하고 있다. 출장을 가느라 오늘 내일 모레 3일은 그나마 하루 8시간 일한 것으로 체크가 될텐데 거기에 더 일을 하라고? 아니 심지어 오늘 오전 내내 일했잖아 일하느라 비행기도 늦어서 내 돈으로 차액냈잖아. 다시 한 번, 나는 탄산수를 담아 꿀꺽꿀꺽 마셨다. 그거 말고는 터져나오는 심술보를 달랠 길이 없었다.

가져온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집에서 반쯤 읽은 책인데 중간에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하면 다 읽지 못할게 될 것 같아 가져온 것이라 금세 다 읽고 말았다. 좋은 독서였다. 글을 안 쓰게 된 이후로 글을 읽는 시간이 늘었다. 좋은 책을 머릿 속에 넣고 그걸 곱씹는 것은 항상 좋은 경험이다. 하지만 어쩌나 지금은 시간을 보내는게 목적인 걸. 방금 다 읽은 책을 바로 한 번 더 읽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는다. 가져온 다른 책을 읽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읽은게 데이터와 세계의 진보에 대한 책이었는데 그 다음 책이 스티븐 킹의 단편집이라니. 균형있는 독서도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맥주 조끼에 탄산수를 담아 꿀꺽꿀꺽 마시는 것 뿐 일까.

나는 뒤늦게 아이패드와 넷플릭스를 떠올리고 벌떡 일어난다. 지난 번 비행 때 넷플릭스 동영상 몇개를 저장 해 둔 것도 떠올랐다. 의기양양하게 넷플릭스를 펴서 저장한 동영상을 보았다. 넷플릭스로 저장한 동영상에 만기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에러 메시지의 내용은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저장해주세요”였다. 그래 아무렴 상관없어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 있으니까. 하고 넷플릭스를 살펴본다.
그러고보니 요즘 입에 넷플릭스 볼거 없다는 말 달고 살지 않았었나. 주의 깊게 보고 다시 한 번 보았지만 그래 진짜로 넷플릭스에 볼 게 없었다. 굳이 비행기 안에서 볼만 한 것도 없었다. 미련을 버렸다. 이놈의 넷플릭스 내가 서비스 해지하고 만다. 하고 이를 갈았다.

이럴 거면 그냥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침 백팩에 랩탑을 넣어두었으니까, 그냥 열어서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사외접속시스템에 들어가 미뤄두었던 레포트 하나랑 메일 몇개 회신만 하면 되지 않을까. 백팩이 유혹적으로 열려있다. 그냥 손을 들이밀기만 하면 랩탑이 거기 있고... 하는 순간 거래선에서 전화가 왔다. 받기 싫다. 짜증난다. 아니 도대체 왜 이걸 받아야지. 왜 일을 해야하지 하는 생각에 또 맥주 조끼에 탄산수를 담아 왔다.

사실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별로 없으니까. 그러니까 하고 생각한다, 그래 이제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하면 너는 웃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뭔가를 하고 있으니까, 가끔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 하지 않아서 이런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한다.
나는 라운지의 소파에, 아니 그냥 쿠션이 붙은 1인용 의자에 기다랗게 기대 눈을 감고 노래를 듣는다. 나에게 남은 것이 글을 쓰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하지 말아줘. 글 같은 건 안 써도 되잖아. 차라리 그림을 그릴게. 지나가는 뚱뚱한 코카서스인을 그리는 건 어때?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림을 그리진 않는다.

그래 이럴거면 차라리 뭔가 쓰자 하고, 아이패드를 꺼내 정말로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이제 금방 비행기를 타야하는 시간이 되지만. 그래 이제 금방 시간이 다 될테지만. 지금은 글을 쓴다.

19년 5월의 글이다.




'부재증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1114] 이슬의 세상  (2) 2019.11.17
[20191010] 저녁 벚꽃놀이  (0) 2019.11.17
[20190328] 여름이 없는 세계  (0) 2019.03.28
[20190314] Let’s do hard drugs and fix our problems  (0) 2019.03.14
[20190314] You zombie bastards  (0) 2019.03.14

하기의 글은 단 한 줄의 진실도 없음을 사전에 공지드리는바 참조 바랍니다.

올해 2월 페낭에 갔었다. 그렇게 안가려고 갖은 수를 다 썼는데 소용이 없었다.
공항에 가니 거래선 구매가 차를 타고 마중을 나와있었다. “로컬 음식점 가려는데 괜찮아?” 괜찮아 나는 로컬을 아주 좋아해. “로컬을 좋아하면 중국어를 좀 배우지 그래” 아냐 정정할게 나는 역시 글로벌이 좋아 맥도날드 스타벅스는 내 인생의 길잡이지. 구매는 희미하게 웃었다.
작은 도시라던 페낭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우리는 정말 길가의 가게에 들어가 중국음식을 먹고 농담을 몇개 하고 음식 사진을 찍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 시간을 조금 넘겼지만 구매는 “늦어도 돼, 너랑 먹고 간다고 했어. 내 보스가 그 대신 너 돌아가기 전에 꼭 인사해야하니까 말 없이 출국하지 말라더라”하고 말했다.
몇개인가 미팅을 하고 비행기 시간에 쫓겨 나가며 나는 구매에게 인사를 했다. K 다음에 또 봐, 5월? 4월? 그 쯤에 또 올게. 구매는 양산을 썼는데도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또 봐”라고 말했다.

커서가 깜빡인다. 사람의 숨소리보다 빠르다. 심장이 뛰는 속도보단 느리다.
나는 메일을 쓴다. 친애하는 K, 당신의 퇴직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작년에 당신이 건강 상의 이유로 잠시 휴직하고 복귀 하셨을 때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퇴직하게 되실 줄 몰랐습니다.
나는 내가 쓴 문장을 다시 읽고, 잠시 생각하고 물을 마시고 다시 메일을 쓴다. 모든 말을 지우고 이렇게 쓴다.
‘친애하는 K, 우리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당신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매 담당자이고 그 회사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저의 파트너였습니다. 당신의 오랜 기간 도움과 서비스에 감사하고 당신이 퇴직 후에도 언제든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진심을 담아’ 나는 메일을 읽고 또 읽는다.

아직 나이가 젊어 내 누나 정도의 나이인 K는 4년 동안 나의 카운터 파트너였다. K는 암 말기로 더 이상 처치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퇴직을 한다고 한다. 그는 퇴직한다고 했던 날보다 4일을 더 출근했지만 나의 메일엔 회신을 보내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고 보니 꼭 공중에 돌을 던지는 것 같은 짓을 했다 싶었다. 어떤 곡선도 허공에 남는 일은 없고 다만 말도 하지 못하는 돌만 땅에 떨어진다. 돌을 던진 사람조차 어디론가 가버리면 남는 것은 땅에 떨어진 물질 뿐이다.

작년 A형이 죽었던 월요일의 아침, 나는 A형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몇달이 지난 후에야 그가 내가 전화를 건 걸 알았었는지가 신경쓰였지만 나는 그의 사망시간도 모른다. 멍청한 행사가 있어서 장례식에조차 갈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 전의 금요일 퇴근하는 A형과 같이 있었던 것은 나다. 나는 퇴근하려는 그를 붙잡고 업무 협의를 하고 형의 자리에서 메일을 보내고 담배를 피러 간다는 뒷꽁무니에 인사를 했다. 우리가 친한 사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정말 띄엄띄엄 했고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일 얘기만 했을 뿐이다.

아니 결혼을 했다고? 하고 놀라하자 “너도 참 대단하다 2년이나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결혼했는지도 몰랐냐”라고 누군가 면박을 줬다. 내가 A형에게 아 저 솔직히 결혼하신지 몰랐었어요 라고 하자 그는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가 나와 이야기 할 때 몇 번이나 웃었더라 뭘 좋아했더라 무슨 이야기를 했지. 가족의 이야기를 했던가. 아니 내가 A형과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가 뭐였지. “다다음주 쯤에 H수석 올라오면 치맥 좀 하지”라고 했었나. 뭐였지.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치맥하자고.

메신져 앱에 A형의 이름으로 새로운 친구 추천이 떴다. 모르는 얼굴이다. 나는 아직도 A형의 번호를 지우지 않았기 때문에 형의 번호를 받은 사람이 추천에 뜬 것이다. 프로필을 보니 환하게 웃고 있는 개구쟁이 소년이다. 스마트폰을 산 것이 신이 났는지 친구들의 사진을 많이도 올렸다. 그 프로필을 삭제하려다 그대로 멈춰서서 생각을 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왜 죽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의 가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형은 아이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사진 속의 개구쟁이가 형의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리도 없지만 형이 모습을 바꿔서 어딘가에 계속 살아있는게 아닐까 사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그 프로필을 지우고 전화번호를 지웠다.

여름, 친구들과 커피를 사러 단지를 가로질러 가는데 멀리 하얗게 햇볕이 비치는 곳에 A형이 얼굴을 찡그리며 지나가는 걸 보았다. 나는 어이- A책임-하고 그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흰 셔츠를 반팔로 접어 입은 그는 손으로 햇볕을 막더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가 A형을 기억해야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다.

구매 K의 후임 L은 좀 서툰사람이라 나에게 전화를 하는 걸 어려워하고, 메일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채로 똑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보내온다. 나는 꼼꼼하지도 살갑지도 않아서 L과 업무 호흡은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고집을 부리며 뭔가를 해달라고 연락을 해왔기에 전화를 하면서 아웃룩을 뒤져 K가 보낸 메일을 찾았다. 이건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 네 선임인 K랑 나랑 어떻게 협의 했었는지 메일 히스토리를 줄게. 혹시 나한테 전화연락하는게 부담되면 나만 넣어서 메일 보내도 괜찮아. 네 보스랑 내가 너보다 일 더 오래 했어. L은 어색하게 웃는다. K는 성격은 조용했는데 진짜 좀 까르르 웃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다음주에 다시 연락할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과연 다음주에 연락을 할까. 모르겠다.

나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나의 손자가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많아져서는 나를 추억하는 꿈이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 이미 죽어 공기와 먼지가 되어있을 내가 살아있는 것에, 내가 그렇게나 사랑한 나의 아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한참을 앉아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피할 수 없는 끝에 대한 위로란 것은 이렇게 허망하고 갸냘픈 것이다.

나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고 공중의 나는 새를 보살피는 우리의 신을 생각한다. 우리의 신은 지금 어디에 날아오르는 새를 보살피느라 우리를 안아주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그냥 허공에 그려진 곡선일뿐이고, 움직임과 상승 그리고 추락일 뿐이어서 신이 우리를 바라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허공에 선을 긋는다. 언제까지 손을 들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19년 4월의 글이다.

'붉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424] 비버씨와 오소리씨  (0) 2021.04.24
[20161011] 토모 (1)  (0) 2016.10.11
붉은 책  (0) 2011.09.24


“한때는 말이다 너 결혼도 못할 줄 알았다 못생겨서 말야” 하고 이모부는 말했다. 친척들과 주말의 부페에 점심을 먹으러 와서는 먹고 싶은 것도 없어 메밀국수를 한 대접 퍼와서 먹으려던 참인데 난데없는 이모부의 말에 쪽파를 입에서 조금 흘렸다. 흘려서 듣고 있긴 했지만 오늘 점심 모임을 갖기 전 머리를 하고 온 내 새 머리를 형수가 칭찬하던 참이었는데. 어느새 이모부가 내 얼굴을 욕하고 계셨다. 나는 “엥 제가요? 못생겼다고요? 와...”하고 얼빠진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머리가 반백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이 못생겨서 라는 것일까.

사실 오늘은 좀 외모에 자신이 있었다. 모임에 오기 전 하고 온 머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반백으로 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놀라, 물론 놀랄 이유도 없었지만 하여간 그래서 밥을 먹는 것도 까먹고 이모부를 쳐다보았다.

사촌형은 말을 돌리려는 듯이, “쟤가 날이 갈 수록 외삼촌을 닮아가는 것 같아요.” 하고 말한다. 이모부는 그걸 놓치지 않고 “외삼촌도 못생겼지”하고 받았다. 첫째는 못생기고 둘째는 그래도 깔끔하게 하고 다녀서 낫고.

저 평생 못생겼다는 말 이모부한테 처음 들어요. 라고 끊고 갈랬더니 ”네가 너무 남의 말을 안 듣는거 아니냐? 하여간 내 요지는 너는 어릴 때 엄청 못생겼는데 서른살 넘고 나서 점점 잘 생겨져서 지금은 볼만하다는 거야.” 하고 지치지도 않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거니, 결혼하고 니 어머니랑 같이 살아라. 하고 두 마디를 더 했다.

“싫어요” 나는 대답한다. “그거 사기 결혼이잖아요”
이모부는 짐짓 마음이 상하셨다는듯이 “그게 왜 사기 결혼이야. 사기는 모-럴이지. 모-럴 메리지 어떠냐 흐하하하하.” 이모부의 역정인지 농담인지가 재미있는지 조카는 망고를 씹다 말고 헤헤 하고 짧게 웃는다. 아기는 분위기를 못 읽어서 아기인거겠지. 조카는 아까부터 테이블 반댓편에 앉아 호쾌하게 포크를 들고 망고를 찍어 먹고 있었다. 농산물 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23개월의 아기라니.

접시를 꺼내는 형을 뒤에서 때린다. 아니 여긴 왜 온거야? “누구 말야?” 이모부! “우리가 아버지랑 밥을 먹는 자리에 너를 부른거야.” 와 나 진짜 인생에서 못생겼다는 얘기 이모부한테 처음 들어봐. 형은 “뭐라고? 그럴리가”하고 가버린다. 형수는 조카의 밥 시중을 들고 있고 이모부는 식탁 가득 음식을 올려두고 먹고 있다. 그 때 그 때 먹고 싶은 걸 가져다 먹으면 좋을텐데 이모부는 부페에 오면 먹고 싶은 모든 음식을 한 번에 퍼서 드신다. 조카와 이모부가 닮았다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흔든다. 맙소사 여든이 된 이모부와 23개월을 맞은 조카라니

일요일의 스시 부페는 사람이 붐빈다. 운동을 많이 한 사람들이 샐러드를 산더미만큼 담고는 몰래 고기와 탄수화물을 야채 안에 숨긴다. 스시는 밥만 둥글 둥글 남아서 돌아다니는게 반, 나머지 반은 정말 굶주린 사람만 먹을 것 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어 대충 굴린 밥 위에 올린 묵은지다. 꼬마 한 명이 예의바르게 눈썹을 찡그리고는 바지락을 올린 스시를 겨우 하나 접시 위에 올린다. 내가 쳐다보자 음, 하는 표정으로 집게를 자리에 내려놓는다. 나는 무더기처럼 떨어져 있는 밥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우리 둘 같은 사람만 있다면 부페는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텐데 말이야. 내가 먹는 양에 대한 친척들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달고 매운 맛의 면샐러드를 펐다. 입맛이 없어진지는 오래이다.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조카가 통통 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간다. 급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형수를 쳐다보니 도와줘요 하는 눈치라 내가 조카를 쫓아간다. 아이는 걸음이 느리다. 열심히 걸어도 내가 두 발짝만 크게 내딛으면 바로 그 앞에 있다. 손을 내밀자 조카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는다. 아직 23개월인 아이는 엄마 안아줘, 라고 말할 수도 통통거리며 달릴 수도 있지만 손을 높이 뻗어도 내 손까지 손이 닿지 않는다. 나는 허리를 구부려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따라간다. 검은머리에 뒷통수가 동그란 아이는 저 아래에서 저 위를 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이 곳을 보고 저 곳을 본다.

아이는 가게 바깥으로 나가려다 문득 허락을 구하듯 나를 본다. 바깥은 안돼 엄마한테 물어보자, 라고 말하니 휘이잉 뒤로 돌아 가게 안으로 간다. 손은 나를 그대로 잡고 있다. 언제까지 두 발짝 만에 너를 따라잡게 될까. 언제쯤 되면 네가 내 손을 잡지 않고도 멀리 걸어가게 될 까. 가끔 나는 조카가 내 딸 같다는 생각을 한다. 쳐진 눈과 하얀 얼굴과 사람을 싫어하는 먹보 아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의자에 앉아 아이를 쳐다본다. 아이는 칭얼대다 안겨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졸려? 하고 입 모양으로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 아이는 세상에 어떤 사람보다 “내 아이”에 가까운 사람이다. 볼은 둥글고 발걸음은 빗소리처럼 토도독하고 난다. 아기답지 않게 음습하게 나를 쳐다보는 조카를 보면 웃음이 난다.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눈에 마음이 저릴 때도 있다. 형수는 조카의 귀에 “삼촌이 너를 사랑한대”하고 상냥하게 속삭인다. 나는 엥? 사랑까진 아닌데? 뭐 그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니. 하고 딴청을 부린다.

가장 먼저 밥을 먹기 시작 한 것이 이모부였는데, 가장 마지막에 식사를 끝낸 것도 이모부였다. 이모부는 내가 본 것만 해도 세 접시 쯤, 오뎅 그릇과 라멘과 우동을 다 먹고 나서야 아 잘 먹었다. 하고 식사를 마치셨다. 한 시간 삼십분 쯤 걸렸나보다. 밥을 다 먹으니 얘기가 하고 싶으신지 뒤늦게 야채를 집어먹고 있는 형수에게 말을 건다. 도와줘요 하는 눈빛으로 형수가 주변을 돌아봤지만 나는 조카에게 반동결 크랜베리(세상엔 그런 것이 있다)를 먹이느라 바쁜 척을 하고 있다. 이제 갈까요? 손님도 많은데 다 먹고 안 가면 실례잖아. 하며 형이 형수를 구한다.

가까운 곳에 이모부를 내려다 드리고 형이 집안일 사소한 것들을 하는 동안 형수는 이모부의 길고 맥락 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잠이 들락말락하는 조카를 쳐다보다 이제 낮잠을 좀 자야겠다는 이모부의 말에 인사를 드리고 집에서 나왔다.

형이 다시 운전을 하고 조카를 안은 형수와 내가 뒷자리에 탄자.
형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다는거 엄청 귀찮지 않아요? 아니 생각해봐요 그냥 살아가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너무 신경쓸게 많아서 귀찮잖아요. “그래서 결혼하기 싫어요? 연애도 하기 싫고?” 하고 형수는 웃었다.

(아 그렇잖아요. 타인은 불안전한 저 자신의 그림자일지도 모르고. 이제까지 최선을 다 해 살아왔다고 생각한 건 그냥 변명일지도 모르고. 감정은 언젠가 무너지고 그 무엇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건 곧 언젠가 상처에 대한 복선 같은 거잖아요)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형수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한다.

“응 가끔 귀찮다는 생각도 해요. 결혼이라는게 가정을 꾸린다는게 만만치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저는 계속해서 열심히 살아왔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외롭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서른살이 넘도록 살아왔는데 어느날 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십년 가까이 내가 해온게 뭘까.”

“나는 열 아홉 살 때 처음으로 한국에 왔어요. 이제까지 살았던 곳이랑 달랐고 낯설었고. 친구들도 가족들도 한 명도 없었어요. 이제와서 한 번 더 제 인생을 살아보라고 하면 음 어쩌려나 다르게 살아보고 싶지 않을까 내가 선택한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지 않으려나.”여기까지 말하고 형수는 조카의 얼굴을 처다본다.

“하지만 어느날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아 역시 이제까지의 내 인생은 잘못 된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결혼을 잘 했다고 생각해요. 때때로 그냥 혼자 살 걸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선택지와 결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날 누군가를 만나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거기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무섭지 않아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세상은 영원히 겨울이고, 한 번도 여름에 당도하지 않았던거라면. 내가 여름이라고 생각한 것이 모두 착각이고 그게 다 아무 것도 아니라면 어쩔거에요)

하지만 나는 생각했던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 그렇군요 하고 수긍한다. ”응 그래요 삼촌도 언젠가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 생길거에요.” 나는 쓰게 웃는다.

오늘 밤 잠이 들면 열 아홉살이 되는 꿈을 꿀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전혀 모르는 학교에서, 이제까지 내가 배워본 적도 없는 것들을 배우게 될 것이고. 새로 친구가 된 사람들은 이번의 생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흰 가운을 입고 다니는 검은 얼굴의 키가 큰 친구나, 일곱 명의 마드리드에서 온 유학생들 처럼 말이다. 나는 이번 생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인연 하나 남기지 않고 웃고 농담을 하고 뛰어다닐 것이다.

어쩌면 이런 꿈이라면 뒷 모습만 볼 수 있는 사람도 등장 할 지 모르겠다. 너무나 무서워 차마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 같은거 말이다. 길을 걷다가 뒷 모습을 보고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차마 어깨를 두드려 말을 걸지는 못하고. 다만 꿈 속에서조차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볼 때 마다 혹시 이 사람일까 놀라게 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꿈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정말로 저런 꿈을 꾼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딘가에 적을 필요는 누군가에게 말 할 필요도 없다. 현실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번 생은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았으니, 잃어버려서 슬퍼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번 생의 우리는 만난 적도 만날 일도 없을테니까.” 꿈 속의 내가 망연히 중얼거린다.

집은 아직 멀었다. 형은 계속 운전을 하고 있고 형수는 창 밖을 본다. 조카는 한 손을 나에게 맡기고 잠을 잔다. 필시 고단했으리라. 집이 도착 할 때 까지는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잡고 있을 생각이다.

아이는 짧은 그 시간 동안 꿈을 꾸는지 발을 들어올렸다 내린다. 눈은 감은 그대로이다. 나는 아이의 숨을 세어보다 노래를 부른다.

“네가 있던 여름은 먼 꿈에나 있고, 하늘에 쏘아올린 불꽃놀이는 사라져 가네. 이야기는 했지만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하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아기는 깨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자신보다 사랑하는 것은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아주 작은 소리로 노래의 나머지 부분을 부른다.



차에서 내리면 아마 그곳은 여름이 없는 세계일 것이다.

19년 3월의 글이다.

'부재증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1010] 저녁 벚꽃놀이  (0) 2019.11.17
[20190515] 따분하다.  (1) 2019.05.15
[20190314] Let’s do hard drugs and fix our problems  (0) 2019.03.14
[20190314] You zombie bastards  (0) 2019.03.14
[20190120] The wonders  (0) 2019.01.20

영아 알겠어? 내가 왜 너한테 편지를 쓰고 있는지.

며칠 전 서럽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왜 그 길로 집에 돌아오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그 날에. 나는 바람이 너무 쎄고 비가 후드득 떨어져서 코트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집에 돌아가고 있었어. 헤드폰을 쓰고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볼륨을 키우고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어.

사고가 나는 걸 봤어.
집 앞 사거리 중 두 번째, 6차선과 4차선이 교차되는 그 사거리 앞에서 나는 사고가 나는 것을 봤어. 배달을 가는 스쿠터와 택시가, 신호가 바뀌는 것을 놓치지 않고 길을 건너려다 비에 미끌어져 스쿠터는 택시와 택시는 스쿠터와 서로 부딪혀서 스쿠터는 넘어지고 택시는 급하게 멈춰섰지. 내가 노래를 듣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비에 미끌어지는 소리도 스쿠터가 날아가는 소리도 들었겠지만 나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스쿠터가 미끌어져 날아가는 것만 보았어. 배달 박스가 날아가 몇 번이나 돌아 길바닥에 부딪히고 짬뽕과 짬뽕과 짬뽕이 바닥에 엎어졌어. 잘 포장 된 짬뽕의 내용물은 하나도 쏟아지지 않고 그대로 길에 엎어졌지. 스쿠터의 배달 기사도 똑같이 길에 엎어졌고. 길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멈춰섰어.

내가 왜 너에게 편지를 쓰는지 알겠니? 나는 네 생각을 했단다. 네가 스쿠터를 몰고 다니면서 가끔 배달을 하는거야 알고 있지만 그 때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실감했어. 글쎄 말야 아무리 숫자를 보고 통계를 봐도 실감을 못하면서 눈 앞에 일이 벌어지고서야 알 것 같았어.

스쿠터의 기사는 몸에 힘을 빼고 비에 젖은 길에 엎어져 있었어. 택시는 멈춰서서는 잠시 숨을 돌리는 듯이 하나 둘 셋 아니 여섯 일곱쯤을 세고는 비상등을 켰어. 사거리의 한 가운데서 멈춰섰거든. 다른 모든 차들도 멈춰섰어. 좌회전을 하는 차도 직진을 하는 차도 없었지. 모두가 스쿠터 기사가 숨을 쉬는지 궁금해했지. 그냥 밀려나가 엎어진 건지 아니면 나가 떨어진 건지. 숨을 세 번쯤 네 번쯤 쉴 만큼 되자 스쿠터의 기사가 천천히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어. 사람들은 계속 그를 쳐다봤고 갑자기 뭔가 알았다는 듯이 차들은 좌회전과 직진을 하기 시작했지. 기사는 절룩거리지도 않고 스쿠터를 일으켜 세우고, 전화를 걸며 택시로 걸어가기 시작했어. 택시는 눈을 깜빡이는 채로 문이 열렸고 기사가 내렸지.

아직 신호는 바뀌지 않았어. 나와 같이 횡단보도 앞에 서있던 중학생 쯤 되는 아이 둘이 멈칫 멈칫 하더니 길을 뛰어나갔어. 나는 아이들이 뭘 하는지 궁금해져서 멍청하게 그걸 쳐다봤지. 아이 둘은 길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배달박스와 엎어져 있는 짬뽕을 누워있는 짬뽕을 뒤집어져 있는 짬뽕을 수습해서 상자에 다시 고스란히 넣고는 둘이서 그걸 잡아 스쿠터의 기사에게 뛰어갔어. 아이 둘은 모든 걸 원래대로 해두고 싶은 것처럼 짬뽕을 차례대로 쌓고 배달 가방의 문을 닫아서 스쿠터 옆에 두었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묻지도 않고 원래 해야하는 일인 것 처럼 그렇게 했어.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게 그 아이들의 목적이었던 것 같지만- 다시 총총 뛰어서 원래의 건널목으로 돌아왔어. 스쿠터의 기사는 아이들을 보지도 못하고 택시의 기사와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길을 건너면서 쓰러진 스쿠터와 원래대로 돌아와있는 배달상자, 그리고 택시에 기대서 이야기를 하는 택시의 기사와 스쿠터의 기사를 보았어. 그리고 다시 아이들을 보았어. 아이들은 길을 건너지 않고 그대로 거기에 있었지.

영아, 아이 둘이 짬뽕과 짬뽕과 짬뽕을 수습해서 스쿠터의 기사에게 가져다 주고 다시 건널목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횡단보도에 서서 그걸 보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너에게 편지를 쓴단다. 나는 네 생각을 했어.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비가 오는 날의 이야기고 말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어?

19년 3월의 글이야.

'부재증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0515] 따분하다.  (1) 2019.05.15
[20190328] 여름이 없는 세계  (0) 2019.03.28
[20190314] You zombie bastards  (0) 2019.03.14
[20190120] The wonders  (0) 2019.01.20
[20181126] Losing me  (0) 2018.11.27

아침에 일어나니 12시간이 넘도록 잔 걸 알았다. 잠을 자면서도 이렇게 오래 잠을 자면 꿈을 꿀 거라고 생각했다.

인공지능은 나에게 도마뱀 종의 마지막 새끼를 넘기면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나는 새끼를 넘기고 인공지능의 사악함의 증거를 쪽지에 적어 모교의 학관 구석 기관실로 통하는 문에 숨겨두고 술을 마셨다.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들은 한 명 한 명 집으로 가고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 사람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를 위해서 뭘 했는지 하나도 몰랐을 것이다. 하고
꿈 속의 나는 나레이션 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그 사람을 되찾고 싶었고 동시에 내가 한 끔찍한 일을 미치도록 바로잡고 싶었다. 학교는 어느덧 한 번 도 가 본적이 없는 미로가 되어 있었고,
나는 녹색과 나무로 된 미로를 헤매면서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모여있는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가며 내가 남긴 쪽지를 찾아다녔다.

꿈이 끝나도록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사악한 인공지능이 약속 같은 걸 지킬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고 하지만 그렇게라도 당신을 돌려받고 싶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꼭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는 것처럼 말이다.

잠에서 깬 지금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그 사악한 기계장치의 신은 내가 누굴 사랑한다고 생각한 걸까 하는 것이다.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게 누군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코트를 챙겨입고 집을 나왔다.

이건
어느날 12시간을 내리 잔 날의 꿈 이야기이다.

'부재증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0328] 여름이 없는 세계  (0) 2019.03.28
[20190314] Let’s do hard drugs and fix our problems  (0) 2019.03.14
[20190120] The wonders  (0) 2019.01.20
[20181126] Losing me  (0) 2018.11.27
[20180917] Boy with a coin  (0) 2018.09.17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이 있는 법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래도 계속해서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을 보려고 노력했다. 이마에 주름이 질만큼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하얗게 보이는 곳을 넘어가려고 했다. 하고자 하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도들에 어떤 의미라도 있었을까, 나는 항상 무례하고 서툴렀다. 사람들의 눈을 마주보는게 두려웠다. 모든 시도들은 실패했다. 그런 시도들이 남긴 단 하나의 유산은 지금의 나 자신 뿐이었다. 나는, 나를 위한 유일한 역사가이다. 모든 계절이 지나가면 나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부산 출장 세번 째 날, 출장을 위한 모든 일정은 어제 끝났다. 회의록도 당일에 써서 보냈고 팔로업 사항도 모두 정리해두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하지 못할 것을 넘기고 아무 것도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훌륭한 회사원의 첫걸음이다. 이제 그런 내용으로 보고서를 쓰면 된다. 월요일에는 출근이다. 지금은 토요일이다. 출장을 가기 전에 부산에서 하루 더 있겠다고 말해두었다. 어차피 출장은 끝났고, 하루는 부산에 있고 싶었다.

새벽에는 비가 내렸다. 아스팔트가 젖어있었다. 이상하리만치 파란 색의 아침이다. 침대 옆에 메이크어룸 버튼을 눌러두고 9시쯤 호텔을 나와서 서면을 돌아다녔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도 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부산이 처음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다. 세 번쯤. 네 번쯤. 하여튼

아주 어릴 때, 다섯살이나 여섯살 때 쯤일 것이다. 겨우 걸어다녔고 너무 많이 먹고 토하던 시절이었다. 아마 처음 부산에 왔을 때 였던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형님을 만나러 가는 걸 따라왔었다. 이상하리만치 일방통행로가 많고 백화점 주변은 길이 너무나 막혀서 운전사로 따라온 아버지는 종일 짜증을 내셨다. 나이 대 치고는 키가 컸던 할아버지는 당신보다도 키가 크고 훤칠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잘 생긴) 노인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악수를 청했다. 후에 그 분이 몇 남지 않은 친척 중 한 명이며, 할아버지의 친형제가 아닌 사촌형인 것을 알았다. 너희 할아버지는 자기 친동생은 모르는 척 평생 연락도 안하더니 사촌 형한테는 뭐 저렇게 극진하대니 하고 할머니가 수군대시는 걸 한참 후에야 들었다. 이제는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백화점 주변을 대충 돌아다니다가 눈에 익은 것 같은 거리의 사진을 찍었다. 어릴 때 처음으로 왔었던 곳이 서면이 아니었을까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기억에 맞는 곳이 있을까가 궁금했던 것 같다. 20년도 더 된 예전 일인데 그럴리가 있을까. 골목 안에 들어가 눈에 보이는 스타벅스로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맙소사 서면에는 스타벅스가 엄청나게 많았다.
부산은 맛있는 커피가 많아요. 스타벅스 같은데 갈 필요가 없어요. 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서울에 오고서야 스타벅스에 왔어요. 제가 서울에서 커피를 마셔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아세요? 하지만 나는 어떤게 맛있는 커피인지 잘 모른다. 서른살이 훨씬 넘고서야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커피를 하루에 세 잔씩 마시기 시작한 건 2년 전 부터이다. 나는 카페보다 태권도 학원과 공장이 더 많은 곳에서 자랐다. 어떤 커피가 맛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오랜 만에 머그컵에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올 때 아무래도 이 스타벅스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익숙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보니 그 점포는 내가 일년 내내 먹고 싶어했던 손칼국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있는 스타벅스였다. 칼국수 집으로 가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걸어왔던 것 같다. 동서남북에 소문 난 길치인 나는 저녁 때 칼국수를 먹고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아침에 왔던 스타벅스가 있었을 때,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이 정도로 길을 모를 수가 있나 하고 반성한 다음 이윽고 아 이럴거면...아침에 그냥 칼국수나 먹을 걸 하고 생각했다. 나는 칼국수 좋아하니까 하루에 두 번 정도 먹는거야 어렵지 않다.

나는 평양 사람의 손자이다. 내가 먹는 칼국수는 일생 닭국물로 만든 칼국수였다. 할머니는 닭육수로 국물을 내고 고명은 호박과 손에 닿는 야채 되는대로, 닭가슴살을 북북 찢어서 면 위에 올려놓고 아범이랑 와서 칼국수 먹어라 하고 우리를 불렀다. 할아버지와 나는 둘 다 냉면은 물론 국수에도 아무 것도 넣지 않는다. 맛은 슴슴하고 고기향은 강한 칼국수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린이에겐 너무 강한 향이었다 나는 가끔 칼국수를 먹지 않고 투정을 부렸다. 할아버지와 외출을 하면 더 맛이 약한 서울식 고기국물 국수를 사주실 때도 있었다. 어떠니 입맛에 맞니. 하고 할아버지는 어린 누나와 내 표정을 살피곤 하셨다. 이십대에 월남 한 후 계속 서울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의 입맛은 서울사람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니 할머니에겐 비밀이다. 할머니는 항상 뭔가를 만들고 이게 이북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이야 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었을 때 외조부가 바지락 칼국수 먹어볼까 하고 같이 들어간 강원도 옹심이 가게에서 처음으로 바지락 칼국수를 먹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건 칼국수가 아니에요 외조부님 하고 말하기에는 너무 맛이 있었다. 그 뒤로 들깨 칼국수를 먹었을 때는 나참 이게 어떻게 칼국수야 하고 사리를 시켜먹었다.

저에게 칼국수는 서러운 음식입니다. 아십니까? 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가 말하기로 그는 어른이 되도록 멸치국물 칼국수만 먹어봤다고 한다. 닭육수의 칼국수만을 먹어본 어린 시절의 나처럼 그는 다른 국물 칼국수가 있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해서 칼국수란 곧 멸치 국물로 만든 음식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처음으로 맞은 서울의 겨울이 너무 춥고 늦은 밤 퇴근하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어릴 때 먹던 칼국수가 먹고 싶어졌다고 한다. 가까운 가게에 들렀더니 나온 것이 닭국물로 만든 진하고 면이 탱글하지 않아 전분이 물컹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는 너무 서러워서 닭국물 칼국수를 먹으면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안 먹지는 않고요? 네 너무 배가 고팠으니까요. 그 뒤로 그에게 칼국수는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그와 부산에 갔을 때 나를 데리고 온 곳이 서면의 칼국수 집이었다.

혼자 서면 시장에 들어가 가게를 찾았다. 저녁 늦은 시간이라 줄을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장님 칼국수 한 명이요, 하고 말하고 기둥에 붙은 거울 앞 자리에 앉았다. 멸치 국물에 쑥갓, 고추가루를 풀어서 국물을 저었다. 면발을 들고 삼킨다. 다 먹는데에는 오분도 걸리지 않는 나의 세상 없이 가장 서러운 멸치국물 칼국수.

두번째 날의 밤, 외국인들과 함께 해운대의 포장마차에서 회를 먹었다. 개불과 성게가 신선했다. 해물라면이 너무 맛있다며 온 것이지만 해물라면이 나올 때 까지 가야할 길이 멀었고 나는 안주로 나온 오이와 귤을 까먹었다. 저 쪽 검은 해변에 휴대용 앰프를 놓고 음악을 틀어둔 사람이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때때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기가 틀어둔 노래를 따라불렀다. 하나 같이 내가 모르는 노래들이었다. 분명 “나같은 죄인 살리신”같은 찬송가는 아니었다. 뭐라고 한 마디 할 법 한데 미국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그 쪽을 보는 듯 하더니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바다를 보고싶었는데 조명 하나 없는 까만 밤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어가 튀어나와 해변으로 걸어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부산 사람들은 바다에선 수박을 먹지 않아. 라고 어린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왜요? 문어들이 수박을 너무 좋아하거든. 그래서 과일가게에 수박을 가져다 두면 문어가 밤 중에 걸어와서 수박을 훔쳐가. 내가 고등학교 때 자갈치 시장에 처음 왔던 날 문어가 수박을 훔치는 것을 봤어. 사람 머리통만한 커다란 수박을 문어가 휙 하고 덮치더니 데굴데굴 굴러서 어디로 가더라고.

6시간이나 술을 먹고 절어서는 침대에 누워서 야경을 보았다. 27층이나 되는 높은 방에 있었지만 북쪽으로 향한 방의 창에서는 서면의 시내 풍경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다가 보고 싶은데, 하고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고모, 저 어릴 때 부산 몇 번 왔었잖아요. 혹시 고모네 집 서면이었어요? 아니 동래구 명륜동. 이상하다 전에 백화점 쪽으로 해서 갔던거 기억하는데... 맞아 집 앞에 롯데 백화점 있었어. 그랬구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출장의 첫 번째 날, 부산역에 왔다. 거래선의 손님은 늦잠을 자서 늦었고 나는 감기에 걸려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부산에서 제일 공기가 나쁠 부산 역 앞이 우리 동네 주택가보다 공기가 좋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콜록 댔다.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데 뒤에서 엄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습게도 나는 반쯤 고개를 돌려서 그 쪽을 쳐다보려고 했다. 나는 엄마라고 불릴 만 한 짓은 하나도 안 했는데 말이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대로 대합실을 가로질러 밑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어디서 택시를 타야 내가 가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아무 곳으로든 나와서 택시를 탔다.
감기에 걸려서 그 날은 종일 아팠다. 약을 최대한 강하게 조제 받아서 밥을 먹을 때 마다 여섯개씩 약을 삼켜야 했다. 부산은 어떠세요?라고 묻기에 부산 하나도 안 추운데요 이렇게 겨울에 안 추워서야 어디 쓰겠어요 하고 콜록거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하나도 신뢰성이 없었지 않았을까.

마지막 날 올라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커피를 마시러 광안리를 들렀다. 카페 거리의 반 쯤은 공사 중이었다. 남은 반 쯤은 폐업 중이거나 문을 열지 않았다. 캐리어를 끌고 공사 중인 거리를 따라 해변을 오른 쪽에 두고 걸었다. 공사차량이 길을 막고 물을 뿌려대고 있었지만, 아직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그 곳에 바다가 고스란히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바다.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를 찾다가 전에 한 번 가 보았던 3층의 가게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운이 좋게 창가에 앉아있던 손님이 나가던 중이라 그 자리에 그대로 앉을 수 있었다. 커다란 창에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카페는 전과 다름없이 햇볕이 가득하게 들어왔다. 밖을 바라보니 다리와 바다와 해변이 보였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착각이 들었다.

부산 바다를 쳐다보던 어린 내가 테트라포트를 보며, 아빠 저건 뭐에요? 라고 묻자. 아버지는 저건 고래의 뼈야 라고 대답했다. 햇빛 아래에서 하얗게 빛을 받은 테트라포트는 정말로 고래의 뼈처럼 보였다. 정말 오래도록 나는 사람들이 고래를 죽여 그 뼈를 바다에 쌓아둔다고 생각했다. 내가 친구에게 그 얘기를 하자 친구는 아 그러신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에요, 고등학교때 까지 그렇게 믿었어. 하고 말했다.

이제 곧 부산을 떠날 시간이 된다. 몇 달 동안 부산에 오고 싶어지면 기차 표를 찾아보았다. 얼마 전 집에서 더욱 가까운 곳에 기차 역이 생겨 나는 부산을 꽤 쉽게 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좀처럼 올 수가 없었다. 당신도 이해 할 것이다. 시간이 깊어질 수록 확인 하는 것들이 두려워지는 기억들도 있는 법이다. 그건 뭐였을까 싶었던 누군가의 감정, 정말로 그게 고래의 뼈였을까 싶은 돌로 만들어진 테트라포트들. 칼국수나 커피의 맛 그리고 바다의 모습들. 하얗고 파랗게 부서지는 저 먼 수평선들을 보는 것들 말이다. 했어야 하지만 할 수 없었던 말들처럼 나에겐 그런 것들이 잔뜩 있다. 단 한 명 뿐인 친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은 말들과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와, 눈치채지 못한 마음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자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주기를 하지 못한 말들은 하지 못한 말들을 돌보는 신 앞에 모여 숲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우리들이 하지 못한 말들을 장사 지낼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반건시와 감말랭이를 사서 기차에 탄다. 부산을 떠나 천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기차 안에서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어떻게 될까 하고 궁금해 한다. 내뱉어진 말들은 사라지긴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해낸 이론은 내뱉어진 말들은 서로에게 쌓여 우리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결국 우리는 서로가 한 말의 지층이며 쌓아올려진 단어들이다.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낸 것은 당신이 한 말들이다. 나는 당신의 일부이고 당신이 한 말들은 나에게 기록되어 하얀 뼈처럼 쌓아올려진다. 당신의 말은 고스란히 나에게 담겨져 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한 역사가이고, 모든 계절이 지나가고 서로를 기억할 것은 우리 뿐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쓰는 것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19년 1월의 일이다.

'부재증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0314] Let’s do hard drugs and fix our problems  (0) 2019.03.14
[20190314] You zombie bastards  (0) 2019.03.14
[20181126] Losing me  (0) 2018.11.27
[20180917] Boy with a coin  (0) 2018.09.17
[20180916] Either-or  (0) 2018.09.16


휴가가 시작하기 , 친구의 차를 얻어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친구는 세계 제일로 막히는 길로 우회전을 했고, 걸어서 7분도 걸리는 거리를 좌회전 신호가 5 바뀌는 동안 느릿하게 지나가야 했다.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처럼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던 친구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너는 집착이 많아라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경기도 제일의 쿨가이인데,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네. 하고 내가 투덜거리는 짐짓 들은 친구는 대답은 안하고 뜬금없이이번에 데스크탑 말아...”하고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넘겼다. 이윽고 5번째 좌회전 신호가 되고 차가 좌회전을 하게 되었을 친구는 말했다. “네가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이름도 까먹었을거다.” 친구는 언제나처럼 운전을 지지리도 못해서 몸이 쪽으로 크게 쏠렸다.


<도쿄>, Matoma - Sunday morning


올해 번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12 23 부터 27 까지의 여행이 첫번째이자 마지막 여행이다. 얘기를 하면 다들 당황하며 어딘가 가지 않았었나?하고 물어본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동안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12 19 퇴근하기 직전 자리에서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후배가 보내준 도쿄 소재 미술관의 전시리스트 메모를 보고 미술관의 휴무와 개관 시간만을 확인했다. 그리고 현금을 산더미처럼..거짓말이다 나에게 산더미 같은 현금이 있을리가 없지 어쨌든 현금을 가져갔고, 가져간 속옷과 8년을 넘게 캐리어를 버리고 왔다.


온전하게 혼자서 있었던 5 이었다. 계속 걸어다녔고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록을 써도 정도가 되었다. 말들이 흘러나오고 흘러나갔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순히 혼자서 생각하고 걷는 시간이었을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행기는 작은 주제로 개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는다.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을수도 있고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여기서 쓰지 않은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책임지지 못할 이야기는 쉽게 하지 말아야지. 여기서 하지 않은 이야기는 안에 고여서 다른 형태로 변하게 것이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도, 여행기를 쓰는 동안에도 어울리는 음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소제목 옆에 있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도쿄와 어울리는 음악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도쿄 너무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총체적인 개념이다. 도쿄라는 이름 안에는 이노카시라 공원의 번쩍이는 고요함이 있고 아카사카의 우아한 번잡함이 있으며 신주쿠의 골목마다 짙게 스며든 거리의 냄새도 있다. 내가 도쿄에 대해서 간단하게 있는 것은 도쿄를 사랑한 적이 번도 없다는 뿐이다. 넓은 지역을 모두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르긴 몰라도 도쿄 도지사(18 현재 고이케 유리코씨가 역임 중이다)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명의 여행객이 있으면 개의 여행이 있을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쿄를 사랑하지 않는 여행객-- 있는 것도 괜찮을 하다. 하물며 도쿄는 인구가 900만명이 넘는다. 하나 쯤이야...그래 괜찮을거다.


했었지. 먹었었지.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했는지를 떠올린다. 스시처럼 일년에 이백번씩 먹는 것들은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사진을 보다보면, 기억보다 사진에 의존하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쁜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다수의 경우 현실보다 기억이 아름다우며, 기억보다 사진이 아름답다.

여행 도중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30분도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해서 가만 앉아 커피를 마신 적도 없다. 밤에는 다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 들었지만, 그건 굳이 여기에 필요도 없는 것이다. 도쿄의 호텔방에 혼자 그보다 적합한 음악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위에 적은 도쿄의 지명들은 이번 여행 때는 들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오뎅이란 뭘까>, Billiy Ocean - Red light spells danger


음식의 원형이란 뭘까.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원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노포 설렁탕집에서 면을 넣어주는 이유는 곡물섭취의 비율을 국가에서 강제하던 시절의 흔적이라고 한다. 진짜일까. 

나는 음식은 원래 이런거야, 라든가 이렇게 먹는거야 라든가 하는 얘기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물론 외국의 음식은 현지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먹고 싶다. 나라의 음식은 항상 나라 사람들이 먹는 방법을 제일 알기 때문이다. 참치김밥을 생각해보자, 남한 인구의 80%정도는 참치김밥을 달에 번은 먹고 있으며 12%정도는 하루에 끼를 참치김밥으로 먹고 ...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중요한 것은 참치김밥은 맛있는 음식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점이다. 원형과 정통성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한의 많은 사람들이 참치김밥을 먹고 있다보니 전세계적인 규모에서 참치김밥의 발전, 참치김밥 에포크(그런거 없다) 이끌고 있는 것은 남한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형태의 참치김밥은 우리나라에 있을 것이다.


말이 길었지만, 이번 도쿄에서 고민하고 먹어보려고 했던 것은 돈가츠와 덴푸라, 그리고 오뎅이다.

이제와서 덴푸라가 일본식 튀김요리란 것을 헷깔려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오뎅은 헷깔려하는 사람이 많다. 애초에 오뎅은 어묵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어묵은 오뎅에 들어갈수 있지만 반대는 불가능하다. 오뎅은 삶은 요리煮物의 일종이며, 나베요리鍋料理이기도 오뎅은 어묵과 이것저것을 넣고 간장으로 맛을 내어 삶은 요리를 말한다. 어묵이라고 해도 사츠마아게, 한펜, 치쿠와 엄청나게 종류가 많다. 일본인에게 치쿠와를 뭐라고 하죠? 라고 물어보면 오뎅이죠. 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치쿠와는...치쿠와죠 물어보고 싶으세요? 하고 어두운 표정을 지을 것이다. 

결국 오뎅의 재료가 되는 것들은, 이것저것은 범위가 상당한데 기본은 , 그리고 곤약. 삶은 달걀, 고구마, 다시마, 힘줄...요즘엔 심지어 토마토도 넣어서 먹는게 보통이 되었다. 

애초에 오뎅은 두부와 가지 그리고 곤약 같은 것을 뭉쳐서 만든 미소덴가쿠味噌田楽 생선으로도 만들기 시작한 것이 기원이다. 덴가쿠는 두부요리로 분류되는데 역사는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문헌 상에서 표기를 확인 수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요리가 오뎅おでん이라고 불리우며, 익숙한 요리가 것은 에도의 명물이 되면서부터 것이다. 당시 두부를 네모나게 꼬치로 구운 미소를 발라(웃음과 함께 서빙한다는 얘기가 아니다)먹는게 에도의 명물이었다고 하는데. 에도시대 초기부터 꾸준히 생산이 늘어난 쇼유를 나베에 넣어 국물을 다음, 재료를 넣고 탕을 끓이는 현대적인 형태의 오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안주로 널리 보급될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하다. 달고 매운 오뎅이 술안주로 제격- 이라는 문구도 발견할 있었다고 하니 과연. 만들어진지 이백년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오뎅의 가장 중요한 매력은 그대로라는 훈훈한 결론.


그래, 오뎅이 먹고 싶었다. 어느날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쇼유를 넣고 국물을 내어 신선한 무를 뭉텅뭉텅 잘라 끓인 다음 일본산 오뎅재료를 우당탕 넣으니까 너무 맛있는 오뎅이 나왔다. 아니 애초에 인스턴트 라면이랑 그리 크게 다를 있나 어느 나라든 서민음식이란 그런 것이다. 빠르고 싸게 맛있는 만들 있다면 최고의 음식이다. 하지만 의문도 들었다. 내가 무서운 재능(하하!)으로 만들어낸 오뎅이 어느 정도 수준인 걸까, 본토인 도쿄 땅에는 맛있는 오뎅이 존재하는게 아닐까? 마침 때는 겨울, 오뎅을 먹기에 가장 적합한 계절이라는 12. 먹을 밖에 없었다 먹어야했다. 나는 눈과 혀로 오뎅의 궁극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집에 쌓여있는 도쿄 식도락 잡지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첫째 호텔방에서 오뎅집을 찾아보았다. 눈에 차는 곳이 없다. 기재된 숫자도 적었지만 허름하지만 추억의 맛이라는 , 고급 정식집이지만 오뎅 메뉴가 있다는 그런 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오뎅에 매료가 되어 2,30 정도 오뎅만을 만들어온 장인이 하는 집이었다. 오뎅을 극한까지 연구하여, 어떤 재료로도 맛있는 오뎅을 만들어내며 오뎅에 힘을 다한 삶을 살아온 나머지 하나 뿐인 아들과는 사이가 나빠졌고 아들은 지금 가스미가세키에서 재무성 공무원을 하고 있다... 백스토리도 있으면 좋겠다. ...


결국 서점에서 18 도쿄 미슐랭 가이드까지 사와 정독해보고 깨달은거지만, 오뎅이 그리 고급요리가 아니다보니맛집혹은명점이라고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새롭게 연구되기에 오뎅은 너무 서민의 요리였고 이미 발전할 만큼 발전해 있었던 것이다. 이미 만드는 방법마저 완성에 가까운 지점에 이른 오뎅은 뛰어난 대중요리로서의 완성도 때문에 이자카야와 편의점에서 먹는 요리가 되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있단 말인가. 나는 슬픔을 이기고 안경을 침대에 집어던진 정리된 호텔의 푹신한 침대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었다.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냥 잤어요.


오뎅을 먹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차라리 세븐일레븐에 가서 국자 퍼서 먹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오뎅을 먹으려고 머나먼 도쿄 땅에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오뎅력을 높여줄 있는 요리로서의 오뎅을 원했다.

그렇게 먹이를 노리는 야수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다 오뎅을 먹을 기회는...네번째 저녁에나 찾아왔다. 여행 내내 미술관을 전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오뎅의 명점이라 불릴 만한 곳이 없어서 동선이 맞지 않았다. 괜찮은 오뎅집들은 뱅글 돌아서 찾아가지 않는 이상 수가 없었다. 

결국 찾아간 곳은 신바시 미슐랭의 빕스 구루밍인 가게. 일부러 저녁 개점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서 자리에 앉았다. 예약없이 혼자 외국인 손님-그렇다 나다- 소중한 저녁식사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훌륭한 오뎅을 가져다 코스를 시키고 기다렸다. 그런데 맙소사, 이천오백엔 정도의 코스지만 오뎅을 마음 먹을 있을 알았더니 다짜고짜 사시미가 나왔다. 잘못 시킨 것은 아니었다. 사시미가 나오고 오뎅이 나오는 코스가 가게의 저녁 주요 코스였던 것이다. 가게 주인은 짐짓 사시미의 훌륭한 품질이 자랑이라는 듯이 한참 설명을 했고 나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제기랄 여기 오뎅 별로겠군. 비싸지 않은 코스인데 사시미가 나오면, 남은 오뎅이 보통일 거란 보듯 뻔했다. 

접시에 서빙되어 나온 오뎅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한국처럼 국물에 담겨져 나오지 않을거란 알았지만 꼬치에 성의있게 종류별로 꽂아져 나온 오뎅을 먹는데는 입도 걸리지 않았다. 그릇에 조금 담긴 국물을 마셨는데 국물이 괜찮아서 서글퍼졌다. 코스를 먹는데고 생맥주를 잔이나 마시는데 까지 삼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예의바르게 인사를 다음 가게를 나오며 이게 뭐야 라는 생각을 스무 정도 했다. 실망과 애수가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져 미나토구의 골목에 길게 드리워졌다. 잊지 않을거야 (도쿄까지 와서 별로인 오뎅을 먹은) 슬픔은.

하지만 가게가 좋지 않은 가게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도 밖에 안되었다는 것은, 역시 내가 마음 속에서 생각한 오뎅이 신기루 같은 환상이었을까. 일본에 가면 진짜 닌자가 있을 기대하는 서양인의 쟈포니즘처럼 말이지. 참고로, 그날 너무 분해서 다른 음식을 먹었고 여행 덴푸라는 끼나 먹을 있었다. “하루에 저녁을 끼나 먹는자는 명예를 아는 라며 무지막지하게 무리를 했기 때문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비싸고 맛있었다. 나참... 이래 진짜.



<도쿄풍정>, Philip Bailey - Easy lover


도쿄가 익숙하다. 긴자에서 이어지는 번화가. 유락쵸, 신바시, 아키하바라, 칸다. 모두 눈을 감고도 다닐 있다. (실은 소리를 치지만 몰래 몰래 구글맵을 꺼내 방향을 확인해야한다) 출장을 왔을 시간이 남으면 오던 동네들이다. 동네가 가장 마음이 편한 점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직장인들이란 점이다. 세련된 패션피플이나 젊은이들처럼 직장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은 동네에 없다. 다들 비슷한 얼굴에 복장을 하고 퇴근 후에 이곳에 왔다(물론 개중에는 그냥 여기가 직장인 사람들도 있다) 하여간 서로를 쉽게 알아보는 우리 모두 직장인들이다. 내가 비록 백팩에 파카코트를 입은 관광객이지만 그들도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삐릿삐릿 너도 우리 하나다 삐릿삐릿 그렇지? <Y/N>


이번 여행에선 평소라면 오지 않았을 거리를 걸었고, 즐거웠다. 물론 나는 겁쟁이이기 때문에 수틀렸다 싶으면 긴자로 도망가는 짓을 반복했다. 어느날에는 추위를 뚫고 토요스 시장에서 츠키지까지 걸어갔다. 하루는 도쿄역에서 내려 고쿄교엔을 거쳐 근대미술관을, 그리고 진보쵸에 들렀다. 우에노에서 칸다까지 걸어가 토리스키야끼를 먹기도 했다. 

가장 즐거웠던 경험은 오모테산도와 하라주쿠, 그리고 시부야를 갔던 일이다. 하라주쿠는 전에 출장 하루 남는 주말에 들렀다가 이곳은 안되는 곳이야 라고 마음 먹고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싶었던 곳이었지만, 다행히 이번여행에선 괜찮았다. 정확히는 하라주쿠 바로 전의 시부야와 오모테산도였지만 다음에 여기까진 괜찮겠어 하고 캣스트리트까지를 경계선으로 삼아 구글 지도에 표시를 해뒀다. 사람이 많은 곳도 패션피플이 출몰하는 곳도 나에겐 너무 무섭다. 차라리 롯폰기 힐즈를 가겠다. 거긴 외국인도 많단 말이지.


도쿄의 풍정은 쉽게 이야기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나 하나의 장면을 할수 있는 최선을 쓰고 남길 뿐이다. 여기에 하나를 적는다. 역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갔었던 토요스 시장, 추위를 뚫고 다리를 개나 건너서 갔더니 그런 대실망쇼도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거기에 와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카이센동집에 무슨 미슐랭 맛집 처럼 줄을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나는 카이센동을 먹는 대신 츠키지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다리를 3개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는 도중 추운겨울이 봄이 될리는 없었다. 너무 추워 슬램덩크의 삽입곡을 들으며 나는 강백호다 나는 서태웅이다 하고 중얼거리며 달려갔다. 아니 달린다고 생각하며 걸어갔다. 

다리를 건너 가는 도중 운하 위로 커다란 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나왔다. 물론 추워서 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고보니 오모테산도에서는 차를 마셨고, 시부야에서는 음악찻집에 들러 음악을 들었다. 좋은 차를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듣는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까맣게 잊고있었다. 신경쓰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마모된다.


<미술관>, Kokoroko - Abusey Junction


오랫동안 의심하고 생각해온 것들이 있다. 우리의 자아가 생각보다 연약하고 부드러우며 현실세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간에 의탁하여 구성되어 있다는 의심도 중에 하나이다. 공간에 대한 체험은 기억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공간에 대한 기억은 우리 자아의 부분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공간을 기억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것에 가까운게 아닐까. 물론 나는 작가도 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의심-혹은 망상- 구체적으로 밖에 내는게 부끄럽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막연한 심상에 따라 말을 뱉고 보면, 이게 얼마나 멍청한 소리일까 걱정이 되지만 용기를 내보자. 

나는 우리의 자아가 공간에 따라 다층적으로 존재 있는게 아닐까 의심한다. 우리가 어떤 공간에 대해 충분히 집착 있다면 우리가 공간에 (시간을 뛰어넘어) 망령처럼 보존될 있지 않을까. 나는 가끔 과거의 내가 어딘가의 공간 속에 그대로 살고 있는 꿈을 꾼다. 바보같은 망상이지만 지금 여기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글을 쓰고 있는 나보다 다른 공간에 망령처럼 보전되어 있는 쪽이 진짜 나에게 가까운게 아닐까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특별한 공간에 대한 기억이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시나가와구의 하라미술관은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장소이다. 세르비아와 미얀마 대사관이 있는 주택가에 있는 미술관은, 1938년에 하라가문의 저택으로 지어지고 1979년에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어느덧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컨템포러리 아트 뮤지엄이 되었다. 

이곳을 가려면 역에서 내려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야한다. 오사키 역에서 내리면 다리를 건너고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시나가와 역에서 걸어가면 메리어트 호텔의 부지를 지나쳐가야한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은 없다. 고급 주택가라 길이 반듯하고 나무들은 손질 되어 있다. 차가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각지고 검은 택시들만이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골목을 지나다닌다. 여기쯤일까 하고 고개를 돌리면 작은 정원에 커다란 나무가 현관을 가리듯 서있다. 그게 하라미술관이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 가장 많이 돌아다닌 것은 역시 미술관들이다. 사실 다른 곳에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다. 도쿄는 국립, 도립은 물론 사립 미술관에서도 일본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풍부한 라인업을 자랑하는데. 우에노 같은 곳에선 마음 먹고 하루 종일 미술관에만 있어도 정도이다. 이번 여행에 들른곳은 시나가와 구의 하라미술관, 다이토구의 우에노 모리 미술관, 국립서양미술관, 도쿄도미술관, 도쿄 국립박물관, 치요다구의 국립근대미술관, 미나토구의 국립신미술관, 롯퐁기의 모리 미술관, 시부야구의 분카무라 미술관. 일요일 급히 찾아갔지만 이미 17일부터 휴관에 들어간 네즈 미술관까지 합치면 10군데이다. 

어째서 이렇게 미술관을 다녔냐고 물어보면, 도쿄에서 미술관보다 흥미로운 곳이 어디 있겠느냐고 대답하겠다. 애초에 미술관이랑 추상적인 개념을 사물화하여 담은 공간에 진열해 곳이다. 분카무라 미술관이나 롯퐁기의 모리 미술관처럼 거대한 빌딩 안에 있는 미술관도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들은 공간과 작품이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체험으로서의 미술관이다.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형태는 나오시마의 지추미술관이다) 

특별한 공간은 특별한 체험이 되고, 그곳에서 우리는 분열되어 여러개로 나눠진다.


하라 미술관은 크지 않다. 본관은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1층과 2, 그리고 3층의 다락처럼 생긴 곳에 작은 방이 있을 뿐이다. 기획 전시들은 대부분 1층과 2층에 나눠져 전시되고, 상설전시는 기획전시를 하기 어렵다 싶은 작은 방들에 전시되어 있다. 

사실 미술관의 상설전시는 다름아닌 미술관 자체의 건물이다. 상술했듯이 1938년에 지어진 바우하우스 양식의 건물인 저택은 우아한 계단과 개의 정원이 특징이다. 섬세한 벽과 중정으로 이어지는 작은 복도는 전시를 하기에 적합한 공간은 아니다. 가장 넓은 장소조차 (거실과 개의 방을 틔어 만들었지만) 개인 주택이라고 봤을 넓은 공간이지, 미술관으로서 대형 미술작품을 전시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회화가 아니라 현대미술을 주로 전시 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시장에 이어진 효율적으로 보이는 반원형의 공간(예전에는 분명 정원을 바라보는, 거실의 일부였을 공간이다) 유리창. 작품의 보관이나 유지에 신경 쓸수나 있을까 싶게 습기와 실내기온이 유지가 되지 않는 작은 미술관은 누군가의 집에 잠시 들른 같은 곳이다. 중정을 바라보도록 만들어진 공간은 카페이다. 대부분의 설치 미술품은 하라미술관 아크에 보관되어 있지만 몇몇 작품은 중정에 나가 가까이서 있도록 되어 있다.


나는 공간을 기억하려고 해본다. 현관에서부터 자국, 처음에 보이는 것은 무엇. 오른쪽에 있는 방과 왼쪽에 있는 . 기억의 공백을 유사한 기억으로 채워나가고 감촉과 기온을 그대로 기억 본다. 기억 속의 계단을 올라가며 단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생각한다. 기억과 실제의 장소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생하게 기억할 있는 장소가 군데 있다. 모교 교실, 중앙도서관의 어떤 서가 . 위치를 없는 어떤 사거리. 그런 기억 속의 장소 중에는 거대한 습지도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뛰어 놀던 아파트 단지와 단지에 딸려있는 작은 잡목림도 그런 장소의 리스트에 있다.

어떤 장소를 생생하게 기억하면 기억할 수록 나는 당시의 나도 같이 떠올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든 장소가 그대로이길 바란다. 그리고 장소에 같이 놓여 있는 예전의 내가 영원하길, 적어도 내가 아는 이상은 그대로 거기에 있길 바란다. 

언젠가 내가 장소에 돌아왔을 예전의 나도 거기에 그대로 있는 확인 있도록 말이다. 물론 그런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많은 장소가 사라졌고 사라질 것이다. 결국 장소들 조차 나의 기억 속에서만 안전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당신은 어느날 우연히 찾은 미술관에서 나의 망령을 만날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것이 나를 아주 많이 닮은 누군가가 아닐까 의심하다, 망령의 얼굴을 보고 그것이진짜나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아마도 나의 망령은 당신을 알아보지 것이다. 망령이란 결국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자리에 그대로 있는 외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망령은 때때로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초조하게 어딘가를 바라본다. 망령은 장소가 사라질 까지 자리에 서있는 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작은 부탁이 있다. 그런 나의 망령을 미술관의 작은 정원이나 구석진 복도의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당신이 아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바란다. 그리고 손을 잡아서 천천히 당신의 옆자리 까지 이끌어주기 바란다. 나의 망령이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있도록. 아마 망령은 당신이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윽고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 있게 되면, 다만 당신이 기다리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여 환하게 웃고는왔어요?’ 하고 말할 것이다.


하라미술관은 2020 폐관이 결정되었다. 언제 도쿄에 다시 오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번쯤은 미술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찾은 미술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도 외로운 모르고 나는 카페에서 파스타와 차를 마시고, 케익까지 먹었다. 내가 시간이 되어 미술관을 나갈 까지도 사람들이 미술관을 찾았다


<정원이 있는 아침>, The police - every breath you take


정원을 좋아한다. 정원이 있는 호텔은 좋아한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정원을 보는게 좋다. 일본에 열번쯤 왔을 조식도 비즈니스 호텔도 너무 지겨워서 괜찮은 호텔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1,2박쯤 하는거라면 어떤 호텔의 조식도 참을수 있지만 그게 며칠이나 계속 되기 시작하면 편의점 음식으로 매끼를 채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거의 없다) 중에서는 편의점 음식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의 편의점에 열광하는 이유를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고, 그걸 폄하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아니 편의점 음식 먹으면 금방 질리지 않나요? 간이 쎄거나 차가운 음식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만 없다. 그냥 이걸 재미로 먹는다면 몰라도 이상 연속으로 먹으면 뭔가 회의감이 든다. 굳이 외국에 와서 돈과 시간을 들여서 이런걸...하는 생각이 든다. 편의점에서 사야하는 1.5리터짜리 물과 탄산수 뿐이다. 


이야기가 정말 다른 곳으로 새버렸다. 하여간 같은 호텔의 조식을 며칠이나 먹는다면 돈을 들이더라도 신경을 조식을 먹고 싶다. 내가 자주 가는 호텔은 커다랗고 오래된 구닥다리 호텔이다. 도쿄 주제에 호텔부지만한 정원이 있고 그만큼 호텔의 숙박비는 비싸다. 그래서 호텔에 불만이 생길 마다 정원을 바라본다. 

호텔에서 역에서 걸어야 하는 것도 그게 언덕길이라는 것도, 방이 생각보다 좁고 작다는 것도 (예전에는 어울리지 않게 방이 컸지만 리노베이션 이후 오히려 방이 작아졌다 맙소사) 정원을 보고있노라면 그러지말고 그만 용서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으로 어차피 여행오면 호텔은 잠만 자는 곳이니 합리적인 가격에 깔끔하고 위치가 좋으면 최고지...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정원의 연못가에 비단잉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자고 있는 것을 구경하다 보면, 경내 관음보살 사당 앞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다보면, 그래 비싸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든다.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면 끝도 없이 아까운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패가망신의 지름길.


차가운 냉수를 자리에 가지고 단숨에 마신다. 계란후라이目玉焼き 써니사이드업一面으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밥을 가지러 간다. 반찬을 많이 먹을게 아니라서 작은 접시에 밥과 반찬을 놓을 있게 해둔 곳이 좋다. 

먹을까 밥도 좋지만 죽이 좋다. 낫토를 달라고 부탁하고 청어구이와 . 두부라도 있으면 더할나위 없다. 자리에 앉으면 낫토를 휘휘 비빈다. 겨자도 간장도 넣는다. 나는 한국인이니까 자극적이어야지 하고 택도 없는 생각을 하며 비빈 낫토를 죽에 섞는다. 만약에 김을 같이 가지고 왔다면 김을 부스러트려 위에 뿌린다. 휘휘 비빈 입을 먹는다. 되었는지 모르고 자리에 그냥 앉아있으면 계란 후라이를 가져다 때가 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계란 후라이에 간장을 뿌린다. 가끔은 간장도 뿌리지 않는다.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노른자를 깨서 먹기 시작한다. 차를 가져와서 같이 먹을까 하다가. 내일은 쌀밥에 오챠즈케를 해서 먹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정원을 보고 가장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며 말을 건다. 안녕. 잤어?


<영원>, Childish Gambino - Redbone


불교가 성립된 2천년이 넘었다. 만인의 고통을 개인의 자아로 설명하려 위대한 종교는, 우리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현재의 고통은, 우리와 유리될 없다. 현세의 우리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우리가 스스로를 벗어낼 있을 까지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이다. 수천년 동안 불교를 알았던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불교를 이해해왔다. 한가지 얘기해보자, 자기 인식은 최고의 부조리이며 부조리를 깨닫는데서 자아가 시작된다고 현대인은 설명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수도 있다. 

달마는 앞에 붉은 눈이 쌓이기 전에는 너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겠노라 혜가에게 말한다. 혜가는 달마 앞에서 자신의 팔을 자르고, 말이 없던 달마는 너의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겠다, 말한다. 혜가는 대답한다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혜가와 달마 사이에 쌓인 눈은 혜가가 흘린 피로 붉다.

도쿄의 국립박물관에는 불상들만을 모아둔 세션이 있다. 불상은 일본미술의 중요한 부분이다. 선종과 민중신앙, 밀교가 묘하게 뒤섞인 일본의 불교는 민중에 대한 숭배의 대상이자 신앙을 완성시키는 상징물로서 불상을 내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박물관에서도 이렇게 불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모아둔 것은 일본의 불상만이 아니다. 아시아 각지의 불상이 모여있다. 재미있게도 불상은 성립시기, 지역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지역의 인종적인 차이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는 모습은 예술양식의 변화를 뛰어넘는다. 


인도의 불상을 보자, 사실 성립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같은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작품과도 아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 같이 완성도가 높으며 서양 고전적이라고 해야할지, 근육질의 몸에 높은 콧대를 불상의 얼굴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문득 우리나라 일반적인 사찰 대웅전에 있는 석가여래상을 떠올린다, 황금칠이 되어있고 게슴츠레 눈을 불상 말이다. 인도의 불상이 사진에 가깝다면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불상은 데포르메다. 석가여래의 이미지만을 남겼다. 하지만 아니 어떻게 이렇게 잘생긴 상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조상님 도대체 이러셨나요 하고 가슴을 친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불상, 돌로 만든 오래된 것들을 보자. 깨달음을 얻는 석가모니를 나가의 왕이 비와 바람에서 보호하는 장면을 재현했다. 동그란 얼굴에 눈썹이 짙고 잘생긴 눈을 하고 있다. 입술은 커다랗고 두툼하다. 석가모니에게는 32가지 신체적 특징이 있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그걸 무시하고 만들었을 같지 않지만 다르다 확연하게 다르다. 그렇지만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다. 그렇군요 님도 석가모니시군요 하고 불상을 보며 숙연하게 인정한다.


누군가 나에게 한국의 불상이 저런 머리스타일, 흡사 마카로니를 같은 것은 외국(인도)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인도인을 적이 없는 장인들은 결국 예전부터 내려온 불상의 이미지를 보고 불상을 만든다. 자연스럽게 머릿 속의 공백은 자기가 평생 보아왔던 얼굴로 채운다. 석가모니가 머나먼 서역, 그러니까 인도 어딘가에서 태어난 사람이란 것은 머리로는 이해할 있다. 그렇지만 자기와 다른 이목구비를 했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자기도 모르게 구세주는 분명 우리와 같은사람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불상의 얼굴에 의도적으로 실존인물의 이미지를 삽입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의 많은 불상이 그렇다. 스승의 얼굴을 본따 불상을 만드는 경우도 흔하며, 예를 들어 천상도나 만다라를 만들 때는 수없이 많은 불타와 보살의 이미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상상력과 양식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실존인물을 본따 그림을 그렸다. 때때로 귀족들과 권력자들은 자기의 얼굴을 극락의 모습을 그린 벽화에 넣어주길 부탁했다. 서툰 기도처럼 극락의 형상에 자기가 포함되어 있으면 극락에 갈수 있을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우지 뵤도인의 봉황전에는 그렇게사람 얼굴을 천상도가 있다.


나는 어느날 어떤 불상의 사진을 보았다.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을 너무나 닮아 몇번이나 불상을 직접 보러 가려고 했지만, 결국 번도 불상을 보진 못하였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도 불상을 보지는 못했다. 


우리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우리들의 얼굴을 불상에 새기고 있다면. 우리와 닮은 불상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름 모를 보살과 부처의 상을 마다 거기에 내가 아는 얼굴이 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영원만큼의 생을 있다면 언젠가는 영원과도 같은 얼굴을 당신과 다시 만날 있을지도 모른다.


......


17년에 글을 읽어본다. “별이 멸망한 후의 노래들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적고 나는 줄을 적었다. “우리들 유기체가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들이 없을 정도의 많은 별들이 멸망해 간다. 어느 가을 초입의 일이다. 나는 당신을 기다린다나는 무슨 말을 쓰고 싶었던 걸까. 어쨌든 이걸로 나의 이번 여행기는 끝이다.


나는 보통 하나의 장면을 쓰기 위해 하나의 글을 쓴다. 장면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쓰고 있는 동안 이해하지 못한다. 글을 쓰는 과정은 결국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이다. 하지만 나는 도쿄여행기를 지금도 아무것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는지 이해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마 당신은 내가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도 어울리지 않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toto Africa 들었다. 여행기를 쓰면서는 Shaun Way back Home 들었다. 여행기를 마지막으로 고치면서는 결국 Olafur Arnalds 앨범을 들었다.

그럼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어디까지 가야 집에 도착 있을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18 12월의 글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