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글을 7월 말에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주 단위로 예약을 걸어서 내가 제 때에 예약을 연장하지 않으면 글이 올라가도록 해두었다.

당신이 이 글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예약의 연장이 제 때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연장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글을 쓰는게 지겨워졌을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사는게 지겨워져서 그만 죽어버렸을 수도 있다.

예전의 작가들은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차마 불태우지 못하고 남겨둔 메모들이 오랜 후에 발견되어 책이 출간되고 그랬으나, 작가는 되지 못할 현대의 우리들은 그저 블로그를 지우지 못하여 그 흔적을 남긴다. 서비스가 상업성을 유지하는 한 우리의 문장은 서버에 남으리. 하여간 누군가 마지막 손질을 하지 못한 글이라니 으휴 완성도가 부족할 것 같다.

이 글 또한 완성도도 몹시 걱정된다.
나는 이 글을 더 손 볼 생각이 없는데다 지금 술을 몹시 많이 마셨고 그것도 운치있게 홀짝홀짝 먹는 것이 아니라 병을 들어서 꿀꺽꿀꺽 마셨다. 제대로 생각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왜 글을 쓰겠다고 키보드 앞에 앉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쓸지도 모르면서 그냥 한가지 아이디어 - 내가 예약을 갱신하지 않으면 블로그에 그대로 올라갈 글을 쓰자 - 를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유치한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어쩌면 이 글의 예약을 연장해야할 때 쯤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글의 어디를 고쳐야 할지도 생각날 지 모르지.

게다가 나중에 너희들에게 뭔가 나에 대한 이유가 필요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막연한 불안ぼんやりした不安”같은거. 농담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면 넘어가자.

그냥 내가 블로그를 업데이트 하는 걸 잊었을 때의 예비라고 봐달라. 아 이것도 농담이다. 내가 블로그를 그렇게 진지하게 할까? 진짜 진지하게 하려면 내 아이패드의 메모 앱과 스프링 노트들을 털었을 것이다. 내 서재 어디에 놓여있는지도 모를 것들.

아이고 술을 너무 마셔서 슬슬 숨이 막힌다. 빨갛게 올라온 취기가 딸꾹질을 일으킨다. 나는 보통 이렇게 까지 취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은 숨기고 타인에게만 솔직함을 강요하는 것이 나의 나쁜 버릇이긴 하다. 일단 뭐라도 솔직하게 말해보자. 내가 죽기 전 까진 말하지 않을만한 것으로.

나는 지금 서재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내 서재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던가? 쾌적하거나 아늑한 것과는 상관없이 숨이 막히는 공간이다. 나는 혼자 살고 있는 남자들이 대부분 그런것처럼 거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데 끊임없이 쌓이는 책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서재를 따로 두고 그곳에 컴퓨터를 두고 있다. 효율이나 깔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방에는 책장으로 가득차 있고 거기엔 또 책으로 가득차있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책도 아직 읽지 않았던 책도 대중없이 쌓여있다. 오래된 데스크탑들이 구석에 놓여져 있고 그나마 자주 쓰는 데스크탑 위주로 정리가 되어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냥 모든 것이 모든 것 위에 쌓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뭐 대대로 “나의 방”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서재 쪽이 진짜 내 방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어느 정도 철이 들자. 나는 쓸 수 있는 모든 돈을 써서 책을 샀는데. 책장을 사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책은 계속해서 위로 쌓여만 갔다. 나는 책으로 성을 쌓고 잡지로 해자를 만들어 어린 시절의 나를 보호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였을까.
어른이 된 지금의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여러가지 공포가 있었지만. 당시의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세계가 폐색되어 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끝이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갈 수 있는 곳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이의 공포는 어떤 때는 어른의 공포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솔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아니다 당신은 잘못 생각했다.
나는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다. 더더욱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끝을 직면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의 방을 찾아왔던 사람이 내 방에 대해서 감옥 같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는 그 편지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인생에 받았던 편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편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면 할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편지 정도로 중요하다. 그 편지는 멋진 글씨체로 나의 손자에게, 라고 써있다 내가 지구 어디에 있어도 나는 홍식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 편지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감옥과 같은 방의 주인에게, 라고 첫머리를 적었다. 당신은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는지 알 수 있는가? 자세한 편지의 내용은 여기서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걸로 나를 정의했다는 사실이다. 편지들은 대체로 누군가를 부르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한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엔 외면 했고 그 뒤엔 몇 번이나 읽었으면서도 결국 그 편지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네 말들이 다 맞다는 사실도, 너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너를 피하기로 했다는 것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답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수년이나 지난 지금. 비열한 변명을 해보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스피노자던가 세네카던가 희망과 공포는 비슷한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애정은 근거없는 희망과 내면의 욕망의 결과인 만큼 그 근원에서부터 공포를 담보한다. 나는 그의 얼굴를 똑바로 볼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짝사랑은 하지 않는거라고 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시간을 들여 답장을 쓰기는 하였다. 우리가 그냥 카페에 앉아서 잠시 농담이나 하는 친구였다면 좋았겠지 어쩌고 너는 나보다 한참 어리고 네 재능은 내 외로움을 구원하는데 쓰기는 너무 반짝거려 어쩌고. 그렇게 쓰고는 바로 찢어버렸다. 너무나 자기애로 가득찬, 그렇다고 솔직하지도 않은 한심한 답장이라서 보내지 않는게 맞았다.

얼마 전 친구는 나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대답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게 잔혹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단지 내가 벽에게서 자기에게로 잠시 눈을 돌려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감옥에 아직까지도 영원처럼 갇혀있는거고. (나는 아주 오랜 후에 그 사람에게 해야했어야 하는 대답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한다. 그건…또 다른 이야기고 속죄에 관한 이야기이다.)

때때로 나의 생명체로서의 수명에 대해서 생각한다. 회사원을 한지 십년이 넘었는데. 앞으로 십 년 더 회사원을 할 수 있을까 싶으면 잘 모르겠다.
이십 년 후는? 내가 보기에 이십 년 후엔 확실히 회사원은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서 정부 규탄 시위라도 하면 모르겠다.
아니지 지구 온난화로 물 속에 뽀글뽀글 잠겨 있을 가능성이 더 높겠다.

사람들은 어떤 나이가 되면, 그러니까 사회적인 위치가 안정되기 시작하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 같다.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혔다고 힙합전사처럼 투덜거릴 때야 모르겠지만. 십대 이십대때 생각하는 죽음은 사회적인 본인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필사적인 보정작업이라면
먼 훗날 벌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절망의 결과물에 가낍다. 네 여러분은 적응에 실패했습니다.

뭐라도 해보려고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해서 밥벌이를 하기 시작하고 또 그게 그럴 듯 해질 때가 되면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이 직업을 통해서 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보이는 시점이 오는데. 그게 사람을 좀 미치게 만든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놀라울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에서만큼은 굉장히 자신감에 차있고. 주변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니까. 네가 몰랐다면, 단지 그냥 내가 너와는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를 가볍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성장 한계점이 아직 보이지 않고 노력을 하면 할 수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일을 엄청나게 잘하게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이는 더 이상 열 여섯살이 아니어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생리작용 같은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는 일.

그것은 바로 폐색이다.

나는 어린 시절 항상 세상이 내 생각보다 좁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어른이 되면 그 기분이 나아질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시시각각 삶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고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뚜렷해지기 시작할 때 사람은 겁을 먹기 마련이다.

폐색이란 결국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이곳에 갇혀 있다는 감각이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뛰어난 역량과 노력으로 남들보다 더 높은 성과를 발휘한 사람일수록 그 고통은 더 크다. 내가 이걸 죽을 때 까지 해야한다고? 라는 마음과 내가 이걸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서로 싸운다. 내 인생에 다른 길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이제까지 쌓아올린게 아쉽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싸운다. 애초에 정답은 없다. 그냥 여러분은 폐색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머릿속에 갇히고 말았다. 판옵티콘의 완전한 반대니까 뭐라고 불러야 하지? 모노스옵티콘이라도 되나.

이런 폐색에 갇힌 사람들은. 여러가지 행동으로 자신의 폐색을 부정한다. 갑자기 자신의 주변 - 가족과 친구 - 에게 집착하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아이의 성장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20대 시절에 대한 향수인지 갑자기 사랑을 찾겠다고 불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에 더욱 매진하는 사람이야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더 얘기해볼까? 더 큰 가치에 매몰되기 위해서 종교에 빠져들거나 정치와 사상을 통해 본인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도 하고. 그냥 단순히 직업적인 측면에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재테크를 하고 놓쳐버린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운동을 하고.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요지는 그들 모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폐색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게 쾌락이든, 신앙이든, 관계이든 간에 하여튼. 그들이 진짜로 폐색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는…모르겠다. 나는 그들이 아니고 나는 저 방법 중 어떤 것도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나는 애초에 폐색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한가지 종류를 말해두는 걸 까먹었다. 그냥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죽음을 선택한 부류들은 확실히 자기 자신의 세상에서 탈출하는데는 성공하였다. 대단한 멍청이들이다.

직접적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나는 요즘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꼭 누군가에게 마음이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파형이 상승하고 또 하강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 죽음이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언젠가 주파수가 낮아지고 파형이 잦아들 때 점이 한개의 점으로 수렴하게 되는 바로 그 지점. 그 끝 점에 대해서 생각한다.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돌려도 결국 생각은 다시 돌아와 죽음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정말 질릴 정도로 지겨운 반복이다. 내가 정말로 죽지 않는 이상은 멈추지 않을 생각인 것처럼 느껴진다. 제기랄.

나는 한 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한 번에 보고 수많은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면 당신도 놀랄 것이다.
하지만 웃으며 농담을 하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달리기를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결국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구르는 돌과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 같이. 모든 하찮은 존재들의 기도같이.

나는 가끔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마다 나의 상상력이 빈약한 것에 진절머리를 낸다. 가끔 앞일에 대해서 뭐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면 문득 답을 말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저 사람들은 그냥 여러분보다 상상력이 빈약해서 가장 일어날 법한 일을 말하는거랍니다.

빈약한 상상력으로 노력해보자.
그러니까 내 삶은 아무 것도 없어.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사랑해야하는 사람도 없어. 근데 내가 왜 10년, 20년을 더 살아야하지? 하고 친구에게 말하자.

친구는 짜증을 내며 그래도 좀 만 더 살아봐 라고 말했다. 친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 더, 그게 나에게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때면 무언가를 내 인생에 삭제하는 것으로 삶을 유지해나갔다.

만약에 이 글이 내 블로그의 마지막 글이 된다면. 그건 내가 그냥 이 블로그를 버렸다는 뜻이다.
혹은 블로그가 아니라 글 쓰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거나.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겠지.
어느 쪽이든 당신과 나 둘 모두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당신을 정말로 소중히 여긴다는 고백이고 나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만약에 내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그것은 내 실수이다.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언젠가 아무 것도 없는 습지에 간 적이 있다. 흰색의 바람이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고 녹색의 풀들이 서로에게 부딪혀 엄청난 소리를 냈다. 마귀와 악령들이 공중에서 난폭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고 새들이 새된 소리로 날아다니며 그들을 비웃는 268제곱킬로미터의 녹색 땅에서 나는 정말로 몇 없는 두 발로 걷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공중에서 불어와 난폭하게 떨어져내려오는 그 무엇에 나의 일부는 불려 날아올라 굉음과 밝은 빛 아래에서 영원히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는 나는 나의 이름을 한 어떤 일부이다. 나의 일부는 영원히 바람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그런 내가 어떤 애정이나 행복을 갈구하는 것이 마땅한 일 일까? 그냥 웃기는 얘기이다.
나는 자격이 없는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영혼도 없다. 나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 폐색되어 있다.

나는 이미 몇번을 죽었다. 결국 여기에 있는 글들은 대체로 나의 헛된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아마도 실패했다. 하지만 바란다. 누군가는 실패하지 않기를. 당신을 봄을 만난 것처럼 사랑해주길.

처음에는 이 글을 7월에 썼다고 말했지만. 글의 예약 기간을 연장하며 글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7월에 쓴 글 위에 8월에 쓴 레이어가 올라와앉았고 지금은 9월이다. 처음 글을 썼을 때처럼 술을 마시고 있다. (외할아버지를 조문하러 갔을때 받았던 죽은 사람들을 위한 소주이다.)

지금은 더 이상 뭔가를 더해서 쓸 생각은 들지 않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샐린저의 어쩌고 라는 소설이다)중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글의 예약을 다시 연장해둔다.
가능하다면 당신이 이 글을 읽지 않기를, 정확히는 이 글이 오직 스스로를 위한 글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인용문은 이렇다.

“시모어는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이 결국 ‘거룩한 땅’의 어느 작은 곳에서 그 다음의 작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그는 절대 틀리지 않는 것일까? 이제 자러 가자. 빨리. 빨리 그리고 천천히.”

저 책의 주인공은 간절하게 자신의 형 시모어가 자살한 곳인 307호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주와 샐린저와 우리들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래 어떤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라틴어 경구였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빨리. 빨리 그리고 천천히 Festina Lente 혹은 급할 수록 돌아가라. 우습다. 결국 가장 멀리 돌아가는 것만이 307호에 당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니.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이 폐색에서 탈출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가? 누군가 내가 갇혀있는 머릿속에서 나를 끄집어내어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아가게끔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없는 다른 곳으로?

지루해졌다. 이제 그만 자러 가자.


24년 7월부터 여름 동안에 쓴 글이다.




바닥에 고무공을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색의 공이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넓은 바닥 위에 고무공을 던진다면, 그 공은 탄성에 의해 튀기기를 반복하다가. 점점 그 튀는 높이가 낮아지고. 어느 순간 바닥을 구르기 시작한다. 당신과 나는 그 굴러가는 공을 보면서 그 공이 어디까지 굴러가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날이 덥다. 금세 시원해질 것 처럼 매일매일 선선해지더니 그랬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덥다.
오늘은 뭐라도 해야했기에 연두색 티셔츠에 갈색 반바지를 입고 장을 보러 나갔다. 아주 느릿하게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바닥을 밟고 다시 뗄 때 마다 웃기는 소리가 난다. 밟지 좀 마, 안 그래도 참고 있으니까- 라는 의미의 행성의 투덜거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햇볕이 쎄다면 바닥은 금방 마를거야.
촤악, 촤악 소리를 내며 걷고 있으니까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요즘은 로드 러닝을 주로 한다. 아침엔 슬로우버피 3세트를 하고 어깨 스트레칭과 무릎 강화 운동 양쪽 3세트씩을 하고 출근한다. 러닝은 저녁 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이 하진 않는다. 나는 뛰는 걸 굉장히 좋아해서 쓸데없이 무리를 하고는 하는데. 20대때 다친 왼쪽 무릎과 발목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 이번에는 무리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가볍게 시속 7-8킬로미터로 3킬로미터 정도를 뛴다. 원래는 시속 10-11킬로미터 정도로 30분을 달리는게 내 운동 루틴이었지만. 체중은 늘고 근육은 줄어들은 지금 - 공평하게도 그렇게 되었다 - 그렇게 뛰면 반드시 다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안 그래도 지난주 주말 조금 신나길래 토일 연속으로 6킬로미터를 달렸더니 왼쪽 무릎이 묘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무릎이란 무리를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강화가 되지만 무리를 하면 바로 탈이 나는 신비로운 곳이라서 바로 고무밴드를 사서 레그 익스텐션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달리던 러닝도 하루 건너로 인터벌을 주었다.

로드러닝보다는 트레드밀에서 러닝하는게 무릎에는 더 안전한데. 나는 트레드밀이 너무 싫다. 트랙 러닝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진짜로 달려서 세상의 어느 곳에서 다른 어느 곳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러닝의 재미인 것 같다. 설령 그게 실제로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그냥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

나의 로드러닝은 크게 특이할 것은 없는데.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몸을 풀다가 현관문을 나가면 냅다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속 7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는거니까 절대로 빠르지 않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동네의 거리를 달리다가 아파트 단지의 커브가 있으면 틀고, 횡단보도가 때마침 파란불이 되면 길을 건넌다. 아니 왜? 이유는 없다. 정해진 코스도 없고 이정도 뛰면 된다- 정도로 정해둔게 있긴 하지만 어차피 동네는 동네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고 해봤자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앞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물론 길치 이슈는 있다. 나는 남해보타락산 관세음보살도 구해내지 못할 정도로 길치라서 신나게 뛰다 보면 여기가 어디지 하는 생각이 들게 길을 잃는데. 로드러닝을 할 때는 애플워치와 에어팟만 가지고 길을 나서기 때문에 - 그 외엔 수상할 정도로 짧은 반바지를 입은 중년 남성 정도죠 - 어차피 길도 찾을 수 없다. 그냥 내가 너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가길 간절히 기도하며 일단 신나게 달리는 것이다. 여러분 저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신이 납니다. 강도들 도둑들 소매치기 놈들아 너희가 나에게서 가져갈 것은 반바지 뿐이다. 아니 애플워치는 가져가시면 안됩니다 제 달리기 이력이 입력되어 있다구요.

어차피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뛰어나갈 체력은 없다. 삼십분 정도 연속으로 달리면 숨을 너무 심하게 쉬어 등이 아프기 시작하고. 심박수 평균 150을 넘어가는 페이스로 달리기 때문에 유산소 운동이 아니라 무산소 운동이 된지 오래이다. 오래 달리면 온 몸이 아프다. 고통스럽다. 땀이 범벅이 되고 코와 입 동시로 숨을 쉬다 보니 목이 갈라진 소리가 난다. 그런데도 왜 로드러닝이 즐겁냐고 하면. 나도 이유는 모른다. 상대가 없이 하는 섹스랑 비슷한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인류에게는 상대가 없는 성행위에 자위라는 적당한 이름을 붙여두긴 했는데. 무의미하고 가학적이고 육체를 소진한다는 점에서 로드러닝은 정말 그 뭐시기 그런 훌륭한 활동이다.

그렇다면 트레드밀에서 달리는 쪽이 훨씬 훌륭한 활동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텐데. 아니 트레드밀 러닝은 진짜로 아니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짓이고. 영국 공상과학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트레드밀은 시급 9,860원을 챙겨주는 노동으로서 나라에서 보상해줘야만 할만한 활동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트레드밀로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트에 갔다. 사람이 많기도 하지. 뭘 특별히 사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배추 두 포기를 사니까 의욕이 사라졌다. 나는 알배추를 좋아하는데. 그냥 잡곡밥이랑 쌈장 정도가 있으면 그걸로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농촌의 촌로 같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진짜로 그걸로 매일매일 먹는건 아니니까. 그냥 귀찮을 때 그렇게 먹는다는 뜻이다. 또 묘한 자책감이 들어서 깻잎도 사고 훈제연어와 중량이 그럭저럭 많지 않아 보이는 호주산 쇠고기도 샀다.

가족 단위로 모여있는 곳에 유일하게(정말 유일하게) 혼자 와 있으니 프랑스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내 쪽을 향해 환하게 웃길래 옆을 돌아보니 무릎 높이 정도의 아이 하나가 꺄르르 웃으면서 뛰어가는게 보였다. 흑백 영화겠지. 파란색 원피스와 검은색 원피스는 구분이 가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또 유니클로를 들렀다. 먹을 것이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며, 집 근처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유니클로 정도 밖에 없다. 먹을 것은 사두면 썩는다 얼마전에도 포도를 잔뜩 버렸다. 샤인머스캣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살려면 부피가 작아야 하는데 필기구는 좀처럼 쓰질 않는다. 책은 이미 너무 많이 샀다. 읽는 것보다 사는게 더 쉬운 물건이라니 이번 연휴 동안 도대체 몇 권을 읽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집 근처에 백화점이 있었던 시기에는 아무 이유없이 백화점에 갔더랬다. 그 덕분에 단칸방 자취 생활을 오래동안 벗어나질 못했다.

어머니는 내 나이에 쓸데없는 물건들을 사서 방에 쌓아두는 취미가 있으셨다. 대단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커트러리라든가 그런 것들. 굳이 살 필요가 없는 것들이 할인을 나쁘지 않게 한다 싶으면 일단 사서 가져다 놓으셨다. 이걸 왜 사는거에요 라고 하면 너나 너희 누나가 결혼할 때 주려고 라고 말했는데. 내심 이런 잡동사니를 나한테 떠넘기려고?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취를 하려고 집을 나갈 때도 어머니가 주는 잡동사니를 다 그대로 집에 두고 도망쳤다.

어머니가 마음이 공허하여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자식이었고 어머니 마음의 공허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나도 내가 먹지도 않을 음식들을 사고 읽지도 않을 책을 사며 입지도 않을 옷을 사고 있는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 어머니 차라리 그냥 비싼 물건들을 하나씩 사는게 어떠세요. 이런거 하나도 필요 없잖아요 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좀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어머니는 마음이 약하고 때때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잘 살아계신다. 그러나 왠지 과거형으로 쓰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두 자식들은 모두 어머니의 일종의 안티테제 같은 존재인데. 나는 내 안에서 어머니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 할 때 마다 징그럽다는 생각을 하지만 또 내심 안심하기도 한다. 그 안심이란 결국 내가 아버지의 클론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오는 안심이긴 하다.

유니클로에서 산 건 속옷과 후드티였다. 내 나름의 합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소모품이고 필요한 것이고 말야. 집에 가득 쌓여있는 언젠가는 버려야할 옷들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을 해보기로 한다. 집에 정리 해야할 옷들과 책들이 가득하다.
내 옷도 내 책도 아닌데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걸 정리하지 못하면 난 영원히 쓰레기더미에서 살아야 할텐데. 아직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용기라기 보다 의욕에 가까운 것이다.

고무공을 바닥에 쎄게 던지면 공은 크게 튀어오르지만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고, 튀어오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바닥을 구르게 된다.

어떤 생각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인생이 그러는 것처럼.
모든 운동은 크게 튀어오르는 것 같다가도 결국 바닥을 구르고, 또 어떤 한 지점에서 멈춘다.

당신과 나는 공이 언젠가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어떤 때는 그 공이 어디에서 언제 멈출지도 거의 정확하게 맞춘다. 그것은 공을 여러번 튀겨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그 공이 영원히 튀어 어딘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까지 올라가고 보이지 않을 천상에 다다를 것을 바라기 때문에 오히려 거꾸로 그 공이 어디서 멈출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나는 그냥 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삶에 대한 용기 그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그것은 결국 어떤 운동이다. 비가역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무의미에 대한 저항.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은 세상의 작은 어떤 곳에서 다른 어떤 작은 곳에 도달하는 것 뿐이다.

나는 내가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두렵다. 저 별로 멀지 않게 보이는 그곳.
내가 그 지점을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 또한 두렵다.

24년 9월의 글이다.



친구가 얼마 전에 <패스트 라이브즈>를 봤던 얘기를 하며. 가장 맘에 안 들었던 부분이라고 투덜거린건, 극 중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들의 전생 그러니까 패스트 라이브 때문이라고 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냥 취향에 안 맞는 영화를 굳이 본 것이 아니냐고 웃었지만 친구는 그게 몹시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설자楔子라고 부르는 동양 문학의 전통이다.

설자란 무엇인가. 옥스포드 랭귀지 사전에서는 설자를 이렇게 정의 한다.
1. 꺾쇠
2. 문예 작품에서, 어떤 사건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따로 설명하는 절(節)

그러니까 중국의 소설이나 혹은 경극류의 작품에는 앞 부분에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어떠한 주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는데. 현대적인 서사의 관점으로는 왜 이런게 있지? 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서술이나…사실 그 부분은 이야기의 주제와도 관련이 깊으며, 불교의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연결된 인과의 원인 부분에 해당하는데. 좀 더 간단히 말하자면 등장인물이나 중요 사건의 카르마 자체를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말 할 수록 뜬 구름 잡는 소리인거 같으니까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다.

<홍루몽>은 청나라 때 조설근이 지은 중국 문학사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소설 중의 하나로.
이걸 진짜로 처음부터 다 읽은 사람은 한국인은 나의 이모 밖에 보지 못했으나…설자 개념을 설명하기 좋은 책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사촌 남매들이기도 한 가보옥, 임대옥, 설보차 (한국인 감각으로는 어느 쪽이 남자고 여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텐데 가보옥이 남자이다)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와 공작위를 받은 개국공신 가씨 가문의 몰락과 재흥.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허무함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설자가 되는 부분은 주인공 가보옥과 임대옥의 전생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가보옥은 여와가 하늘을 복구하기 위해 모았던 돌이 오랜시간 동안 자아를 갖게 되어 선술로 인해 인간으로 전생한 것이고. 임대옥은 (가보옥이 되는) 전설의 돌이 인간이 되기 전에 우연한 기회로 물을 주어 살렸던 풀이 은혜를 갚기 위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설보차에겐 이런 대단쓰한 전생의 내용이 없는가? 없다…덕분에 세상은 가보옥-임대옥 커플링을 정설로 여긴다.)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이런 설자는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 홍루몽의 본래 이름은 석두기石頭記로 이 소설은 딱히 배경이 되는 설화가 없이 조설근의 창작 - 실은 작가인 조설근의 자캐가 주인공인 가보옥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돌머리의 이야기라는 석두기라는 제목이 지어진 이유는 조설근이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이 소설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 이기 때문에 작가가 이 작품의 설자인 여와의 돌이 전생하는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할 수 있다.

다르게 설명해보겠다. 주인공 가보옥은 사촌들인 임대옥, 설보차 사이에서 시종 갈등하는데. 몸이 약했던 임대옥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가보옥의 가족들은 결혼상대가 임대옥이라고 가보옥을 속이고 설보차와 결혼을 시키는데. 임대옥은 상심한 나머지 가보옥의 결혼식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너무 과한 설정이라고 생각하는가? 애초에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가보옥이 여와의 돌이 전생한 존재로서 고귀한 출생이나 어리석음을 설명했으며. 임대옥이 돌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풀에서 전생한 존재로 아름답지만 덧없이 사라질 존재임을 설명했다. 이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전개는 그들의 배경-전생의 삶-을 통해서 설득력을 가지고 현실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설명된다.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 모든 현상은 상호 의존적이며 어떠한 것도 독립적인 현상은 없다. 이러한 연기를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현대 이전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우리 현대인에게 뜬금없어 보이는 설자의 존재가 거꾸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패스트라이브스의 이야기를 하자면. 결말에 이르러서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게 그들이 인생에서 계속 서로 집착하고 잊지 못하고 인생이 겹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전생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와는 관련없이 이 부분이 영화의 앞부분에 삽입되어 있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훌륭한 설자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배경이 앞에 나와있다 : 동아시아 문학 전통의 설자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원인이 마지막에 가서 등장한다 : 할리우드 문화 전통의 반전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설자에 대해서 또 그럴듯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어떤 남자가 유명한 호수를 지나치다가 아름다운 두 명의 여인을 본다. 총명하고 부유하기까지 한 두 여인 중 하나는 평범한 서생인 그 남자에게 관심을 가져 개수작을 부려온다. 남자는 금세 그녀에게 빠져들고 결혼까지 하고 말지만 어느날 흉측한 승려 하나가 나타나더니 이보게, 자네는 큰일났어. 자네가 결혼한 여자는 엄청난 요괴일세. 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쓰면 오오 남자는 죽는건가. 큰일나는건가. 전형적인 요괴이야기겠군. 하겠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에는 어떤 판본이든 관계없이 항상 맨 앞에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수련을 거듭해서 쌓은 뱀으로 호수가 너무 아름다워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여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전따윈 없다.
원래부터 독자도 여자들도 스님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남자만 몰랐다.

다름아닌 이 이야기는 항주 뇌봉탑 설화가 변형된 <백사전>이다. 이 이야기 또한 여러가지 판본이 있지만. 공통적인 주제는 사랑이다. 처음부터 둔갑한 뱀이란 정체가 나오고, 영원처럼 천년을 살던 이 뱀은 정말로 그 남자를 사랑하여 같이 살고 싶어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악당은 중간에 나와서 남편에게 그 정체를 아웃팅한 승려이다. 잠깐만 이렇게 쓰니까 되게 현대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데…하여튼. 백사전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니 굳이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설명하지 않겠다. 홍루몽에 비해 분량도 짧다.

이제 여러분도 이제 설자가 무엇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거이다.

설자를 바이두에서 검색하면. 쐐기가 나온다. 애초에 설자라는 말 자체가 쐐기나 꺾쇠를 의미한다. 나는 쐐기의 사진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부처는 연기를 우리에게 설파했지만. 우리는 인생에 펼쳐지는 고통과 기쁨의 원인을 알 수 없다.
어떠한 이유로 이 마음이 나에게 왔는지 그리고 떠나가지는지도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기계는 적절한 입력값을 넣었을때도 항상 같은 출력값을 내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는 충분히 현명하지 못하여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다른 어떠한 영향을 줄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때때로 내가 당신의 인생에 그저 설자로서 존재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로 적힌 이름. 따로 적힌 말. 아니 이름조차 되지 못하는 배경.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참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설자가 되고, 우리의 현재의 삶은 미래의 설자가 된다.
이 마음조차 또 어떤 설자가 되어 누군가의 서사에 끼어들지, 나는 알 수가 없다.

24년 9월의 글이다.

아래의 문장들은 내가 아이패드에 남겨둔 짧은 메모들이다. 어떤 편지의 일부이며 단상이고 쓰다 만 소설의 일부이다. (내 글이야 뭐 그렇지)
아래 메모들에게는 각자 노래 이름으로 된 제목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제목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정말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어느 날 밤, 평소처럼 퇴근이 늦은 날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불을 끄고, 계단을 내려와 뒷 문의 현관 앞에 섰다. 코트를 챙겨 입고 헤드폰을 꼈다. 곧바로 문을 나서지 않고 유리문 밖을 바라보며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올 때 까지 기다렸다. 문장이 동작이 되고, 생각이 호흡이 되기라도 하듯이 나는 밤을 그대로 바라보다 밖으로 나섰다.

문 밖엔 직각의 건물들과 그 사이를 가로질러 전선이 늘어져 있었고, 아무도 칠할 수 없는 색들이 거기에 있었다. 사방을 보았다. 공업도시의 오피스 건물들이 하늘과 맞닿은 선을 보았다. 새삼스럽게 직선들이 추상을 향한 기도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벌리면 밤이 입안에 고여들까봐 입을 벌리지도 못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볼륨으로 음악을 들었다.

세상을 감각하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동작이다. 세계를 표현하는것과 표현된 세계를 감상하는 것이 전혀 다른 동작인 것 처럼 말이다.


(2)
나를 제외한 모든 세계에 한 명의 타인도 없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가 결국 불완전한 자신의 일그러질 상일 뿐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우리가 어떠한 것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고 애정 또한 고여있는 물처럼 어딘가에 쏟아져버리기만 할 뿐 이라면.

(3)
나는 항상 “달moon”이라는 단어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 지구의 단어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왔다. 이러한 종류의 어떤 불안정한 애정은 어디로 가고 어떻게 남을까. 나는 새삼 두려워진다.


(4)
나는 아무래도 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라고 생각을 한 건 밥을 먹고 해변을 산책하다가 중간 쯤 와서야.
중간이라고 하는 이유는...원래는 훨씬 더 멀리 까지 다녀와서 저 멀리 보이는게 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중간 쯤 네 생각을 하게 되고 너를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서 돌아갔어. 돌아가는 중에 스피커로 트로트 들으면서 걸어가시는 분이랑 동선이 겹쳐서...몹시 후회가 되었지. 이럴 바엔 그냥 저 멀리 까지 갔다가 돌아갈걸 그랬지.

하지만 바다보다 저 멀리 보이는 흐릿한 풍경들 보다 밤새 고집부리며 뒤척거리다 잠이 든 널 보는게 중요하게 느껴져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나는 이렇게 메모를 쓰고있지. 딱히 할 말이 있어서는 아니고. 지금 방으로 들어가면 나는 참지 못하고 너를 깨울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더 자게 해주고 싶거든.

어제 여러가지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아. 중간 중간에 나는 깜빡 졸았는데도 꿈에서조차 너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기분이 들어.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 중에 어떤 것은 어쩌면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나는 수많은 실패를 했어.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다양한 종류의 실패-실수 들이었는데 결국 그 모든 실패-실수를 하는 동안 나는 죽도록 후회를 했고 똑같은 바보 짓은 하지 않을거라고 맹세를 했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또 이렇게 커다란 후회의 전조가 될 일을 하고 있구나.
이제까지 배웠던 것들은 다 무의미한 어디 망해버린 공화국의 짧은 역사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너와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마실거고) 같은 풍경을 보며 서로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네.

나는 또 그리고 계속해서 두려워져 그리고 널 보고 있으면 그 실수들이 다 아무래도 괜찮을 일들로 느껴져. 가끔 꺄르르 웃는 네 웃음이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들이나 놀란 눈을 하고 고장이 나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나기도 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문제를 점점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걸까. 우리는 좀 더 제대로 뭔가를 해결해야하는게 아닐까?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누군가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얘길 해야하지 않을까?


(5)
오늘 며칠이더라? 아니 확인 안해봐도 괜찮아. 그냥 어떤 말로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말해본거야.
일단 잠시만 있자. 이제 곧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거야. 하나…둘 하고 셋. 봐봐 진짜로 나오지.

아주 오랫동안 너한테 편지를 쓰려고 했었어. 할 말이 있을 때면 편지를 쓰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나 스스로도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를 때는 편지를 쓰는게 정말로 어려워. 한 바닥이 넘는 편지를 쓰고도 결국 해야할 말을 찾지 못해서 찢어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냐.

깔끔하게 인정하고 시작하자.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죽을 것처럼 보고 싶어. 하지만 그래서 편지를 쓰는 건 아냐. 아니 제기랄 그래서 편지를 쓰는 거기도 해. 이렇게 편지를 쓰면 네가 보고 싶은게 조금이라도 가실거니까. 나는 때때로 죽을 것처럼 보고 싶다는 말이 너무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해. 만약에 죽게 된다면 그건…정말로 끝이잖아. 다시는 볼 수 없는거잖아. 근데 죽을 것 처럼 보고 싶다는게 말이 돼? 그냥, 그 말을 처음에 한 사람은 아마도 누군가를 보지 못하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았을거라고 생각했을거야. 스스로도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쓴거지. 그대가 보고 싶소 죽을 것처럼 보고 싶소. 꼭 지금의 나처럼 말이지. 나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잖아 안 그래?

언젠가 내가 지하철의 통로를 쥐 한마리가 뛰어가는 걸 봤다는 얘길 했던가? 아마 안 한 것 같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니까. 그건 내가 스무살, 아니 스물한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야. 그 때 우리집 앞이 종점이었던 호선이 하나 있었는데. 그 나이 때의 나는 그 호선의 전철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내가 사는 곳에서 멈춰선다는게 참을 수 없게 좋았거든. 그래서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마지막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갈 때가 많았어.

전철이 천천히 느려지며 살짝 쉰 듯한 목소리의 기관사가 - 나는 기관사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 곧 종점에 도착한다고 말하면 한숨처럼 느려진 전철이 멈추고. 몇 되지 않는 승객들 - 대부분이 주정뱅이 - 이 느릿하게 전철에서 내려. 그러면 전철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려는 듯이 전철의 불이 한번. 그리고 두 번 꺼지고. 종점의 막차는 어떤 승객도 태우지 않고 저 멀리 터널로 사라져버리지. 보통 역장들은 - 역장들은 내 얼굴을 알았어 나는 보통 첫차를 타고 알바를 하러 가서 마지막 차를 타고 돌아왔거든 - 플랫폼에 있는 손님들을 다 데리고 나가서 어 그리고…모르겠다 어떻게 하지? 역의 불을 끄나? 사람들이 더 이상 플랫폼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으로 닫아버리는거야 많이 봤지만 역을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쥐를 본 날은 - 아니 정말 대단치 않은 이야기야 -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날이었어. 그냥 나는 그날도 밤이 늦도록 알바를 했고, 이제 막차를 타고 들어왔으니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다른 알바를 하러 갈 차례였지. 그런데 그날은 왠지 너무 많이 지쳐서 막차에서 내려서 그냥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있었어. 그날따라 주정뱅이도 없어서 막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은 그런 날이었어. 그리고 쥐 한 마리를 봤어. 막차가 사라진 열차선 어디선가에서 나타나서는 뭘 찾는 것처럼 두리번 거렸지. 나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어. 아니 분명히 마주친 것 같아. 찍찍하는 느낌으로 내 쪽을 쳐다보며 두 번 수염을 움찍 거렸으니까. 그리고는 적은 없어 라는 식의 표정을 짓고는 또 어딘가로 열심히 사라졌어.

나는 솔직히 이 이후에 지하철에서 쥐를 본 적이 없어. 아니 진짜로. 차라리 우리 동네의 풀 숲에서 보거나 번화가의 하수구 근처에서 본 적은 있는데. 지하철에서 쥐는 정말 없단 말야. 그래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거야 신기했거든. 어디론가 사라졌던 쥐는 금세 열차 선로 근처에서 나타났는데. 친구. 아니 친구일까? 하여간 다른 쥐 한 마리를 데리고 나타났어. 그리고는 또 내 쪽을 보고 찍찍 하는 느낌으로 코를 찡긋 거리더니. 터널 저 편으로 뛰어갔어. 마지막 전철이 사라진 전차 정거장 쪽이 아니라 마지막 전 정거장이 있는 쪽으로 말이지. 친구도 그 쥐를 따라갔어. 꼭 이 방향에서 이제 더 이상 전철이 오지 않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두 마리의 쥐는 찍찍 거리면서 신나서 뛰어가버렸어. 나는 안중에도 없었지.

나는 느릿느릿 플랫폼을 기어나와서 역장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아저씨 여기 쥐가 있어요?라고 물어보니까 역장아저씨는 웃더니 네 쥐 있겠죠? 하고 말씀하셨어. 진짜 별거 아닌 이야기지.

우리가 그 두마리의 쥐처럼 용감했다면 좋았을텐데. 설령 죽음을 부르는 수십톤짜리 괴물이 그 어떤 재앙보다 빠르게 달려온다고 해도 어두운 통로를 함께 달려나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겁이 많은 나는 그러지 못했어.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너를 잃는게 두려웠어. 그 모든 감정들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모순일 뿐이었는데 말이야.


(6)
일주일만에 머리를 감았다. 새까맣게 더러운 냄새가 날텐데 다행히 집에는 아무도 없다. 아침에 배달시킨 커피에 진통제를 한 알 먹는다.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은 지 일 년 쯤 되었고 노트에 적어 놓은 채 정리하지 않은 메모들이 피딱지 나는 상처처럼 뭉그러져 있다. 이제 글을 쓸 때가 된거다.

아파트의 난방을 끄고 써큘레이터를 꺼내 바람이 잘 통할 것 같은 통로에 켜둔다. 창문을 열어 먼 곳을 쳐다보니 오래된 공원 저 건넛편에 나무들이 듬성하게 서서 잎을 늘려가고 있었다. 국도를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창을 좀 더 여니 소리는 더 이상 부드럽진 않고 더 크게 들려왔지만 창 앞의 울타리가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 보다 너무 낮아 깜짝 놀라 창을 다시 닫았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나는 창 밖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이제 그만 끝 마치려 하지만 어떻게 글을 끝맺어야 하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글의 순서는 시간의 순서나, 사건의 원인과 결과와 상관없다.

나는 요즘 계속 같은 꿈을 꾼다. 거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꿈은 몹시 꿈일 뿐이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상들은 나에게 의미가 많아서 잠에서 일어나면 나는 한참동안 꿨던 꿈을 곱씹고 어디에도 기록을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잊어버린다.

꿈은 그렇게 잊어버리지만. 어떤가 나는 당신이 이걸 모두 읽는다면 내가 어떤 노래를 들으며 이 글들을 썼는지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지금 듣고 있는 것은 다니엘 바렌보임의 BWV 846이다. 아무 의미도 없지만.

24년 9월의 글이다.





이 글은 2018-20년 사이에 쓴 글이다. 정확하게 언제 썼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여러군데에 글을 남겨두었는데, 이 것은 아이패드에 있었던 글이고 아이패드의 어플은 글의 최초작성을 알려주지 않는다. (갓뎀 애플아이엔씨)
이 글을 읽다보니 내가 아닌 누구를 위로하기 위해 썼던 글인 걸 깨달아. 미완성인 글을 조금 고쳐 블로그에 올린다.

아마 이 글을 받았어야 할 사람에게는 너무나 늦은 메세지 일 것이다.


3주 째 일요일 저녁에 카레를 만들고 있다. 커다랗게 자른 감자와 눅진눅진 할 정도로 진한 카레가 먹고 싶어서 계속 카레를 끓이고 있었는데 좀처럼 성공하지 못한 탓도 있다. 재료는 심플하게 감자와 양파, 그리고 때때로 아보카도나 토마토를 넣는다. 쇠고기가 있으면 쇠고기를 넣고 돼지고기가 있으면 돼지고기를 넣는다. 중요한 것은 결국 감자와 양파다.

골든카레 박스 뒷면을 보니 4피스 카레에 물은 1.2리터를 넣어야 한다. 처음엔 좀 진하지 않을까 싶어서 1.4리터를 넣었더니 카레가 무슨 국물처럼 되었다. 울면서 카레를 마시고 다음 주엔 물을 1.2리터를 넣었더니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토마토를 너무 많이 넣었고 감칠맛을 위해 넣은 아보카도가 덜 익었는지 쓴 맛이 났다. 월요일 저녁까지 차갑게 식은 카레를 먹으며 내가 뭘 잘못했지 하고 실패를 곱씹었다.

오늘은 일단 감자를 7개나 깎았다. 양파 커다란 걸 잘라 잘게 자른 후 캬라멜라이즈를 시도했다. 주간에 사둔 쇠고기를 잘게 잘라 갈변하기 시작한 양파와 섞고 볶은 후 커다랗게 자른 감자를 쏟아부었다. 냄비 밑 바닥이 타는 기분이 들어서 앗차 싶길래 물을 0.8리터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치킨 스톡이라도 넣을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보니 갈색에 아주 멋져 보이는 고깃국이 되었다. 역시나 이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형 카레를 넣고 15분 정도 끓이고 15분 정도 숨을 죽였더니 걸죽하고 감자가 커다란, 내가 처음부터 만들고 싶었던 카레가 되었다.

누군가 당신은 혼자 산 지 몇 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카레를 만드는 방법을 모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항상 카레 만드는 방법을 까먹어서 매번 카레를 만들 때 마다 그 방법을 발명해내야한다고 변명 할 생각이다.

그것은 100%의 사실이다. 애초에 나는 카레를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카레를 잘 먹는 사람이다. 어떤 종류의 카레든 상관없다.

몇 년 전인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처음으로 카레를 만들어 본 날, 그걸 먹어본 여자친구는 이거 되게 국 같아 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용기로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와 카레를 만들어 준 걸까. 생각해보니 다른 건 몰라도 예의범절은 올바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 전에는 내가 만드는 카레가 못 먹을, 아니 나나 먹을 음식이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스스로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그걸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체로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우주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나는 평범하리만큼 나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일들은 대체로 누군가에게는 몹시 이상하고 끔찍하게 들릴 수 있는 일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에서는 정의롭고 똑똑한, 그리고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온 우주는 그들을 돕고, 모든 노력은 보상 받으며. 마지막에는 행복과 화해가 약속되어 있지만 자아를 깨달을때 쯤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길거리에 마주치는 아무개 하나조차도 그 사람의 우주에서는 주인공이며 그에게는 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우주가 있다.

당신은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주는 나에게 친절하며 나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일들은 다 나의 뜻대로 이루어질거야 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 나름의 우주도 꽤 아름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은가. 나에게 적당히 무관심한 우주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우주의 진짜 얼굴을 바라보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원래 우주는 카레를 제대로 한 번 만들기 위해서도 3주가 넘게 걸리는 그런 귀찮은 곳이다.
나는 별명이 고등학교때부터 카레인 사람이고.진짜 카레 가루를 쓴 것도 아니고 마트에서 편하게 산 고형카레와 정육을 쓴 건데도 말이다.

들어주기 바란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다.
길고 긴 카레 만들기의 이야기를 한 것은 내가 이런걸 썼을 때 여기까지 읽어줄 사람은 당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아픔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잘 모른다. 당신의 말을 더 귀기울여 들었다면 좋았을텐데 형편없는 인간인 나는 당신의 도와달라는 말을 쉽게 흘려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에 바빴다.

우리 모두의 인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해야할 말을 올바른 시기에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좀 더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창 밖에서 보이는 탁한 색의 햇볕도, 어느날 문득 발 밑을 보았을 때 줄을 지어 걸어가는 개미들의 앞길을 피해주는 것도, 목이 마른날 마셨던 미지근한 물도. 우리가 마땅히 했어야 했던 인사들도 모두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작년에 썼던 글 중에 <현대인의 신념구조>와 <사악한 자들의 기도>는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이라고 말하니 좀 우습다. 어떻게 완성해야할지도 알고있었고 얼개도 짜서 기록해두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완성하지 못했을 뿐이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사람들에게 준 고통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이것저것 메모를 해둔 페이지를 넘겨보며 그래도 작년엔 쓰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올해는 쓰고 싶은 것 마저 없었다.

중력의 연구(1)이라고 써둔 메모에는 내 손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을 향해 낙하한다”
메모를 뒤집어 보아도 중력의 연구(2)는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다. 나는 조금 참담한 기분이 되어 볼펜을 찾아 “중력의 연구(2)”라고 적는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한 후 그 뒤를 이어서 적는다.

중력의 연구(2) “그들은 끌어당기는 힘을 발견했을 뿐, 밀어내는 힘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라고 쓴다.

언젠가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단지 모든 방향으로 낙하하고 있을 뿐이다.

24년 9월에 올린 미완성의 글이다.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미망이다. 라고 하셨다. 나는 스승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며 가만히 스승의 게송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장작에 불이 붙어 타오른다고 하여, 장작을 원망할 것인가 불을 원망할 것인가. 100년을 살지 못함을 분히 여길 것이라면 태어남을 분히 여기기도 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너는 파도에 쓸려 나가면서도 바다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히 여길 것인가. 겉 그림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를 내가 아까는 앉고 방금은 누웠으니 다음은 앉고 그 뒤엔 눕겠구나 하였다. 그러자 속 그림자가 말하기를 내가 아까는 앉고 방금은 누웠으니 다음은 서도록 해야겠다. 그렇다면 너에게 묻겠다 너는 일어서겠느냐 앉겠느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식은 찻잔에 찻물을 더 했다. 물이 섞여 찻잎이 빙그르르 돌았다. 스승과 나는 찻잎이 도는 것을 보았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렸다 오전의 까마귀는 길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스승은 더 이상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스승이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몇년에 걸친 가뭄을 겨우 나고 살림이 힘들어진 암자에 살던 승려 하나가 어찌어찌 풀칠이라도 하려 나무열매라도 남은 것이 없을까 산등성이를 헤매고 있었다. 한 때는 열 댓 명은 머물던 규모가 작지 않았던 암자는 어느새 동문인 두 승려 밖에 남지 않았고 서로 도와가며 공부를 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 해의 가뭄은 혹독하여 그것도 올해가 끝으로 보였다. 둘 중에 넉살이 더 좋은 동문은 저잣거리로 탁발을 나섰고 융통성이 없는 승려는 산을 뒤지고 다녔다.

가뭄은 사람이 사는 곳에도 가혹하였지만 산에도 가혹하였다. 연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겨우겨우 떨어진 도토리를 모았으나 수확이 좋진 않았다. 태반이 썪었고 알이 작은 것들만 겨우 모아 그릇에 두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평소에는 갈일이 없던 산 속 까지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볼이 홀쭉한 승려는 너무 멀리까지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길거리로 탁발을 나간 동문에게 아무 것도 내어오지 못할 것이 더 두려웠다. 승려는 더…더 깊은 산 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승려 자신은 모르고 있었으나, 그는 이미 짐승들의 영역에 들어서 있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랑이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검은 짐승 하나가 풀 섶에서 몸을 일으키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승려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몇 줌의 도토리가 모여있는 나무 그릇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짐승은 파란 안광으로 승려를, 그리고 그가 쥐고 있는 나무그릇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윽고 들짐승 특유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냈다. 승려는 오금이 저려와 주저 앉고 말았다. 나는 죽는구나 이렇게 잡아먹히는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연실 외우며 양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짐승은 승려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다만 그를 그대로 둔 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수풀을 지나 저 편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뒤를 돌아 승려를 돌아보더니 아주 낮은, 사람이 중얼거리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고는 사라져버렸다. 승려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어째서 이 혹독한 가뭄에 호랑이인지 늑대인지 모를 짐승이 자기를 잡아먹지 않고 살려두었는지 알수가 없어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겨우겨우 끌고 숫제 기어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암자까지 겨우 도망쳐온 승려는, 그제서야 겨우겨우 모은 도토리와 나무그릇을 놓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굶주림은 호랑이보다 무서웠다. 차마 동문이 탁발해온 낱알을 염치없이 얻어먹을 수가 없어서 승려는 다음날 그 알량한 도토리라도 되찾으려 호랑이를 만난 곳으로 돌아갔다. 산 속으로 산 속으로.
그러나 분명 호랑이를 만났던 그 자리로 가도 도토리는 커녕 나무그릇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승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방을 뒤졌다. 호랑이가 어제도 나를 해치지 않았으니 오늘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믿으며 연신 불호를 외웠다. 그러다 짐승을 만났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석굴 하나를 발견하였다.

석굴은. 산등성이 수풀을 넘어 비탈길을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석벽에 있었다. 입구가 어른 하나가 겨우 들어갈만한 작았으나. 기이하게도 누군가가 오래전에 서툰 솜씨로 만든듯한 석불하나가 -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작은 바위로 알 것 같은 모습으로 - 놓여있었다. 승려는 호기심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산 속 깊은 곳에 수도승이 거처로 쓸 듯한 작은 암굴이 있을까. 이렇게 입구가 좁으니 어제의 커다란 호랑이가 쫓아오면 도망칠 곳으로 쓸만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암굴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석굴 안은 아주 작은 방 하나 정도의 크기였다. 역시나 누군가가 - 수도승일것이다 - 생활을 하였던 곳인지 오래된 세간이 놓여있었고 한 쪽엔 깎다가 말았는지 아니면 그걸로 끝이었는지 나무불상들이 여섯개 놓여있었고. 벽 한 쪽에는 돌로 된 앉은뱅이 탁상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그 위에는 승려가 어제 잃어버렸던 나무그릇이 놓여있었다. 쌀이 반쯤 차있는 채로.

승려는 짐승을 만났을 때 보다도 더 크게 놀랐다. 이 가뭄에 어디에서 쌀이 나서 여기 버려진 암굴에 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분명 이 나무그릇은 내가 어제 잃어버린 것인데 누가 이걸 여기에 가져다 두었단 말인가. 승려는 쌀이 담긴 그릇을 덜덜 떨며 만졌다. 이 쌀이 있다면 탁발을 하러 간 동문도 나도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이 쌀이 누군가 - 이 암굴에서 살고 있는 - 의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고민은 길었지만 승려는 결국 나무그릇에 든 쌀을 들고 도망치듯 암자로 돌아갔다.

탁발을 끝내고 돌아온 승려의 동문은, 승려가 끓여내온 쌀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암자의 사정을 뻔히 아는 그로서는 이런 하얀 쌀이 나올 곳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문은 분명 이 쌀이 떳떳하지 못한 곳에서 나온 것이라고 직감하였으나. 밥에는 죄가 없었다. 두 승려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너무 오랜만의 밥이었다.

배를 채운 동문은 승려에게 그제서야 슬쩍 물었다. 자네 이 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승려는 처음에는 말해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재촉에 승려는 결국 산 속에서 호랑이 - 짐승 - 를 만난 것과 석굴을 하나 발견 한 것. 그리고 거기에 쌀이 있었다는 것을 실토하고 말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동문은 승려를 탓할 수가 없어서 그런일이 있었나 그랬나. 하고 연신 소용도 없는 탄성을 질렀다.

다음날 동문은 승려를 재촉하여 쌀이 있었던 석굴로 같이 가보기로 하였다. 승려는 쌀을 훔쳤다는 죄책감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동문은 내심 거기에 쌀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두 승려는 산 속을 다시 들어가 비탈길 언저리에 숨겨진 석굴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두 승려는 돌 탁상 위에 또 쌀이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보게 자네 내가 뭐라고 했는가. 동문은 탄성을 질렀다. 쌀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승려는 당황하였다. 어제 분명 그릇에 있는 쌀을 다 털어서 가져오지 않았는가. 여기에 있는 쌀은 뭐란 말인가. 멍하니 있던 승려는 동문의 재촉에 정신을 차렸다. 둘은 구멍투성이의 가사를 소중히 오므려 쌀을 주워담았다. 쌀은 딱 두 사람이 하루를 먹을만한 양이었다.

그 쌀로 만든 밥을 먹던 동문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라고 불리웠지 않은가. 이 쌀은 분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우리를 위해 부처님이 내리신 쌀일 것이야. 그런가. 승려는 이틀 연속으로 벌어진 행운을 이해할수는 없었지만 부처님이 내리신 쌀이라고 하니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이 가뭄에도 불구하고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문은 탁발을 다니느라 자주 저자로 내려갔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오직 용맹하게 수행에 정진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내일도 석굴에 가보지 않겠는가? 동문이 권하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나 그 다음날에도 또 쌀이 있었다. 나무그릇을 챙겨온 두 승려는 하나에는 쌓여있는 쌀을 담았고 다른 하나는 쌀이 있던 돌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상하게도 또 쌀이 있을거란 확신히 있었던 것이다. 승려는 석굴 안 나무 불상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동문은 석굴 앞 석불을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둘은 절을 하고 또 절을 하였다. 이 후 둘은 매일매일 찾아왔지만. 쌀은 매일매일 쌓여있었다. 두 승려는 매일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탁발을 가는 일도 도토리를 줏으러 가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저자에는 결국 암자의 승려 둘이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매번 탁발을 돌며 이삭 부스러기를 받아가던 승려가 얼굴을 비추지 않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를 불쌍하게 생각한건지 아니면 주인이 없어진 암자를 차지하러 한 건지 떠돌이 승려 하나가 산 속의 암자를 찾아온다. 물론 두 동문 승려는 굶어죽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가뭄 중에 그렇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훤한 신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떠돌이 승려는 깜짝놀랐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저자에 소문이 좋지 아니하여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라고 말하자 어허 그렇습니다. 라고 두 승려는 미심쩍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두 승려는 아침에 받아온 두 사람 분의 쌀을 나눠 세 사람 분의 쌀죽을 만들어 떠돌이 승려와 나눠 먹었다. 양은 적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쌀이라 떠돌이 승려는 허겁지겁 자기 몫을 먹고 곧 암자를 떠났다. 두 분이 무사하다는 것을 전하겠습니다, 라며. 그리고 다음날 평소처럼 암굴로 가 쌀을 받아온 두 승려는 쌀이 두 사람 분보다 더 많은 세 사람 분의 쌀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로다. 떠나기는 하였으나 어제 세 사람이 암자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세 사람 분의 쌀을 주셨구나. 한 승려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승려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어제 쌀죽을 나눠준 떠돌이 승려의 눈치가 보통이 아닌 걸로 보였소. 분명 우리가 굶어죽었으면 암자를 차지할 생각으로 온 듯 한데… 다른 승려는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멀쩡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되는 것 아니겠소. 아니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 것이 문제이죠. 심지어 쌀죽까지 나눠주었으니 무슨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소? 이번 한 번만 찾아오는 것이 아닐 것 같아서 불안하오. 두 승려는 생각했다. 이것이 부처님의 은혜라면 몇 명의 승려 정도야 더 먹이는 것이 일은 아니지만, 만약에 이것이 정해져 있는거라면? 우리도 쌀을 못 먹게 되는 것이 아닌가? 둘은 불안하게 서로를 쳐다본다.

그 뒤로 지난번의 떠돌이 승려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두명이, 때로는 세명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두 승려는 불안해져 쌀을 남겨보려고도 하였으나. 여러번 시도한 결과 암자에 쌀이 남아있으면 그만큼 다음날의 쌀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손님이 찾아왔을때에도 쌀을 전부 쓰지 않으면 암자의 두 승려도 굶게 된다. 차라리 다음날 그들이 돌아갔을 때 사람 수만큼 많아진 쌀을 써서 배불리 먹는 것이 낫겠다. 그런 마음으로 암자의 두 승려는 대접을 소홀히하지 않았다.

그러나 떠돌이 승려들은 어느날부터인가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핑계를 댔지만 결국은 식사가 나오니 이 곳에 있겠다 이거였다. 겨울만 이곳에서 보내겠다는 자도 있었으나 자기 집처럼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대로 머무리는 자도 있었다. 그런 떠돌이들이 하나씩 늘어나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그 수가 도합 다섯. 두 승려는 그 숫자에 돌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까지 합치면 일곱 명의 승려가 석굴의 쌀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굴 안에 있는 나무 불상이 여섯 위, 돌 불상이 한 위 이 또한 일곱이라는 사실을 그 때 두 승련는 눈치 채지 못하였다.
두 사람이 받아오는 쌀도 자연스럽게 일곱사람 분으로 늘었지만 어딜 봐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두 그릇은 될 듯한 쌀을 매일매일 어디선가 받아오니 누가 이걸 모르는척 하겠는가. 산속으로 사라지는 두 승려를 몰래 따라오려고 하는 승려까지 있었다. 비밀이 지켜지긴 어렵다. 두 승려는 그런 생각을 하였고 결국 결심했다.

두 승려는 다른 다섯 명의 승려를 암자의 가장 큰 방에 모았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하였다.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불도를 정진하기 위해 매일매일 관세음보살에서 온 힘을 다해 기도를 드리던 날 밤. 산신의 사자가 암자에 찾아온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호랑이는 사람처럼 말을 하며 두 승려에게 너희의 정성이 갸륵하여 이 가뭄을 이겨낼 방도를 하나 내었으니 나를 따라오라, 라고 하였고 두 승려는 휘엉청 밝은 달 아래 호랑이를 따라 걸었고. 신비한 석굴을 하나 발견하였다고. 이름하여 쌀이 나오는 굴이라 하여 미혈굴.

다섯명의 승려들은 얼이 빠진 표정을 하였다. 쌀이 나오는 굴이라니 그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두 명의 승려는 자못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호랑이는 말하였다. 이 쌀은 부처님의 영험하신 은혜를 받아 산신의 허락으로 너에게 주는 것이니, 오직 불도에 그 뜻이 있고 용맹정진하기 위한 자들만을 위한 쌀이다. 삿된 자들에게는 단 한 톨의 쌀도 허락해서는 안되며 너희에게 암자에 있는 사람수만큼의 쌀을 줄터이니 너희는 그것을 먹고 불도에 정진하라. 다만 이 굴의 위치는 어떤 자에게도 비밀이며 의문을 표해서는 아니된다.

두 명의 승려는 그리고 이렇게 말을 끝마쳤다. 비밀을 지키지 않는 자나 미혈굴의 위치를 캐려고 하는 자는 내가 직접 와서 벌할 것이다. 짐짓 엄숙한 그 끝맺음을 듣고 다섯 명의 승려는 그것이 말이 되느냐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두 승려가 어딘가에서 쌀을 가지고 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들 모두는 그 둘이 가져오는 쌀로 연명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다섯 명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복된 일이요 복된 일이요. 부처님의 신령스러운 영험으로 벌어진 일이니 우리는 더욱 감사히 여기고 불도를 정진하여야 하겠소. 그러자 다른 승려들이 모두 입을 모아서 동의를 표했다. 그 뒤로 다른 승려들은 모두 두 승려가 어디서 쌀을 가지고 오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지 아니하였고 일곱 명의 승려는 길고 긴 가뭄을 무사히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날 쌀의 양이 줄어들기 전까지는.

쌀이 조금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칠분의 일이 줄어들어. 평소의 칠분의 육이 되었다. 밥을 하고 난 뒤에는 똑같이 칠등분을 하였기 때문에 모두의 밥은 정확하게 칠분의 일이 줄어들어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변화에 대해서 의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두 승려 중 하나는 그것이 다른 한 승려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뻔뻔하게 빌붙어있는 다섯 승려들을 내보내기 위해서 양을 줄인 것이 아닐까. 칠분의 일이 줄어든 정도로야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다섯 승려들은 빌붙어 사는 몸. 눈치를 채게 되면 불편해져서 암자를 나갈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좋은 수라고 생각하였다.

다섯 승려 중 누군가는 어떤 놈인지 모르겠으나 쌀을 훔쳤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암자에 있는 사람수와 쌀의 양을 고려하여 미혈굴에서 쌀이 나온다고 하나 만약 쌀을 훔쳐서 암자 밖에 숨겨둔다면? 일곱명이 아주 살짝만 굶주리겠지만 한 사람 분의 쌀은 확실히 확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쌀을 훔친 놈은 미혈굴의 위치를 아는 저 두 명의 중놈 중 하나의 짓이다.

일곱명의 승려는 모두 생각하였다. 지금은 일단 참는다. 아직까지는 무엇을 할만한 때가 아니다. 그리고 서로 밥의 양이 줄어든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쌀이 더욱 줄어드는데는 그닥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칠분의 일이 더 줄어들어. 원래의 칠분의 오가 되었다. 밥을 하게 되니 양이 궁색하여 일곱의 승려가 모여서 식사를 하는 시간은 짧아졌다. 애초에 대화를 나누고 뭐고 할 것도 아니었으나 최소한 안부나 감사 인사 정도는 있었으나 밥이 줄어드니 다들 입에 밥을 넣기에 바빠진 것이다.

두 승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요새 묘하게 쌀의 양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이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수행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되오. 우리가 더욱 열심히 정진하면 다시 예전처럼 쌀의 양이 늘어날 것이니 힘을 내십시다. 한 승려가 그의 말에 동의하며 오늘부터 관세음보살님께 맹렬히 기도를 드리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확신을 가졌다. 쌀을 빼돌리고 있는게 네놈이구나.
다른 승려는 또 생각하였다. 이런 식으로 쌀의 양을 줄이면 우리 다섯 중 하나라도 암자에서 도망치칠거라고 생각한게로구나. 참 아둔하고 어리석은 놈들이구나. 우리 다섯은 단 한 명도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미혈굴의 위치를 알게 되기만 하면. 너희 두놈들은 우리에게 암자에서 내쫓지 말아달라고 빌어야 할 것이다.

칠분의 사. 그리고 칠분의 삼. 쌀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칠분의 이.
처음 두 승려가 가지고 왔었던 쌀과 완전히 같은 양이 되었다. 밥을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적은 양이라서 이제는 쌀죽을 쑤어서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이제는 식사 공양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너무나 적은 양이라서 소중히 먹느라 그런 것이다.

다섯 명의 승려 중 하나는 생각했다. 저 두 놈들이 정말 철면피 같구나 우리 다섯명 분의 쌀을 꼬박꼬박 가져와 암자 밖 어딘가에 숨겼겠지. 중놈 주제에 욕심이 많아서 저런 짓을 하는구나.
다섯 명의 승려 중 또 다른 하나는 생각했다. 처음엔 저 두 승려가 수상했으나 이제는 이상하다. 우리를 내쫓으려고 한다면 이렇게 몇주 동안이나 쌀죽을 먹으면서 고생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 다섯 중 하나가 미혈굴의 위치를 알아내어…다섯명 분의 쌀을 빼돌리고 두 사람 분의 쌀만 남긴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 다섯명이 포기하고 이 암자를 떠나면 저 두 승려를 제압하고 미혈굴의 쌀을 독차지할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나를 제외한…최소한 세명이 여기에 작당을 했다는 얘기이다.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두 명의 승려 중 하나는 식사 공양이 끝나고 몰래 다섯 명의 승려 중 몇 명이 눈 빛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마음에 걸려서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가보니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다섯 승려를 볼 수 있었다. 옳커니 저 염치 없는 자들이 드디어 이 암자를 떠날 생각을 하는구나. 애초에 둘이 먹던 쌀을 일곱이 나눠먹으니 이렇게 배가 고픈거지. 어째서 쌀이 두 사람 분으로 줄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섯이 떠나면 둘이 먹기에는 충분하다. 이렇게 생각한 승려는 며칠이나 쌀죽만 먹어 배가 고픈 중에서도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인기척에 잠에서 깬 승려는 쉬잇…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뭔가가 휘둘러지는 소리와 머리에 뭔가가 와서 부딪히는 걸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승려는 동앗줄에 묶여있엇고. 다섯 승려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떤이는 몽둥이를, 어떤 이는 날붙이를 들었다. 다섯 승려는 먹지 못하여 바싹 말라 눈만 번뜩이고 있어 분위기가 흉흉하였다. 쉽게 일이 끝나지 않을 성 싶었다. 과연…그들이 며칠 전부터 몰래 나누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는가. 두 승려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몹시 후회했다. 다섯 승려는 일단 그들을 묶었으나 무엇을 할지는 명확하게 정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두 승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 밤 중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이오.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하니 동앗줄을 풀고 서로 대화로 풀어보지 않겠소? 다른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 같은 불제자가 아니오 몇 달 간 같은 암자에서 생활하였는데 대화로 풀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소? 그러나 다섯 승려는 그들을 풀어줄 생각은 없는 듯 하였다.

그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대화를 하더니 그 중 하나가 두 승려에게 물었다. 미혈굴, 그 위치가 어디오?

두 승려 중 하나가 나섰다. 지난번에 우리가 했던 말을 못 들었소. 미혈굴을 위치를 발설하면 산주인이 와서 필히 물어죽인다고 말하였소. 다섯 승려 중 하나가 피식 웃더니 몽둥이를 들어 바닥을 내리치고 말하였다. 헛소리는 그만하지 그 산주인은 불도를 정진하는 동도들끼리 쌀을 나눠먹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너희 두 놈 중 하나가 농간을 부려서 쌀의 양을 줄여서 가져오지 않았는가? 그 말을 듣자 두 승려 중 하나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동문이 실제로 그렇게 해서 다섯 승려를 내쫓으려고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 승려는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농간을 부리다니 오히려 농간을 부리는 것은 당신들 중 하나가 아니오. 우리가 항상 날이 밝은 다음 쌀을 가지러 간다는 것을 알고 앞 질러서 쌀을 훔치고 있는 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우리 둘은 오직 동도들의 편의를 위하여 처음부터 숨김없이 쌀을 나눴는데 이제서 당신들을 내쫓으려고 쌀을 숨겼다니 그것이 말이 된다는 소리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뒤에 서서 듣고 있던 한 승려가 분을 못 이겨 뛰쳐나오더니 몽둥이를 휘둘렀다. 네 이놈 말이라고 잘하는구나 네놈들이 알량한 쌀을 나눠주면서 얼마나 우리를 내려다 봤는지 모를지 아느냐. 분통이 터져서 참을수가 없구나. 몽둥이를 휘두른 승려는 씩씩대며 분을 참을 수가 없는지 발을 구르고 성을 내다 문득 주변의 시선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무슨일인가. 그가 휘두른 몽둥이에 묶여있던 승려 하나의 머리가 맞아 쓰러져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경악하는 승려도 있었고 얼굴이 파래진 승려도 있었다. 묶여있던 승려는 맞아서 쓰러진 승려의 곁으로 기어가 자네 괜찮은가 정신을 차리게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덧없이도 쓰러진 승려는 눈이 반쯤 뒤집어져 살아날 방도는 없어 보였다…맞은 위치가 안 좋은 탓이었으리라.

다섯 승려 중 하나가 다시 나섰다. 쓰러진 자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너 까지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대범하고 침착하여 승려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는 묶여있던 승려를 억지로 일으켜 쓰러진 승려에게서 떨어트리고는 말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미혈굴로 안내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네 명이 자네를 어떻게 할지 나도 말릴 수가 없다.

한 명의 묶인 승려와 다섯 명의 무기를 든 승려들은 산길을 걸어갔다. 아직 한 밤 중이라 걸음을 걷기에 불편하다. 몽둥이 하나에 묻은 피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 한 명의 묶인 승려는 반쯤 실성하여 걸음은 걷지만 헛소리를 중얼 거린다. 늙은 수행승이 숨긴 쌀이 어떻고. 석굴 구멍이 어떻고 하는 헛소리이다.
다섯 명의 승려는 몹시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원래 암자에 살던 두 명의 승려가 그냥 불쌍한 멍청이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쌀을 빼돌린건 누구인가. 그들 다섯 명 중 하나가 틀림없다.
그 중에 하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아까 대범하게 나서서 큰 소리를 치던 놈이 쌀을 빼돌려서 숨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 놈이 죽었으니 숨겨둔 쌀을 찾는 건 다 글른 일이 되었다. 산 어딘가에 숨겼겠지만 찾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승려는 피가 묻은 몽둥이를 보면서 묘하게 흥분하여 자신이 한 일을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놈은 너무 건방졌어. 그리고 분명 저 놈도 건방지겠지. 아니 우리 다섯 명 중에서도 건방진 놈이 있지. 그건 바로 저놈이다. 하고 침착한 승려의 뒷통수를 노려본다.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저 놈에게도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버르장머리를 가르칠 기회를 노릴때 풀 숲 저 멀리.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주인이다. 침착한 승려가 중얼거리면서 허리에 찬 날 붙이를 꺼내서 양손에 꼭 쥐었다. 호랑이라면 순식간에 그들 말라깽이 중들 여섯 명 정도야 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호랑이라면 여섯이나 되는 숫자 그리고 쇠붙이까지 가지고 있는 무리를 습격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한 명 정도는 물려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내가 될 순 없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침착한 승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묶인 승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풀 숲으로 달려나갔다. 산주인님 산주인님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호랑이는 분명 아닌 어떤 짐승의 포효가 밤하늘로 울려퍼졌다.

도망가버린 묶인 승려를 쫓을 것인지. 아니면 풀 숲에서 달려나오는 저 검은 짐승을 대비할 것인지. 그 잠시의 망설임 사이. 다섯명의 승려가 발톱에 갈가리 찢기고 갈려 나갔다.

묶인 승려는 미혈굴에 도착하였다. 짐승은 여기까진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에 미쳐서 반쯤 실성한 마음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산길을 무리하여 걸었다. 발도 손도 피투성이이다. 얼굴도 피투성이이다. 누가 흘린 피인지는 모른다. 묶인 승려는 미혈굴로 기듯이 들어가 그리고…평소에 쌀이 놓여있던 돌걸상 앞으로 기듯이 가 벽에 입을 가까이 가져간다. 벽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이 있다.

미혈굴에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모를 구멍이다. 묶인 승려는 미혈굴의 그 구멍에 입을 갖다대고 중얼거린다. 오늘은 오늘은 한 명이오. 나 한 명.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그러나 구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묶인 승려는 숫제 애걸 하면서 말한다 나 혼자란 말이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당신이 신불의 사도라면 충분히 나를 살리고도 남지 않소. 그러나 구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묶인 승려는 굴 안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길고 긴 꼬챙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언제부터 이런것이 있었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은 지워졌다.
그는 꼬챙이를 들고는 자못 분개하여 말했다. 나를 살려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 쪽에도 생각은 있다. 그리고는 꼬챙이를 들어서 벽의 구멍을 향해 힘껏 찔렀다.

다섯 명의 승려 중에 도망 친 것은 하나 뿐이었다. 손가락을 세개나 잃었다. 발톱에 당하여 어깨죽지에서는 피가 흘렸다. 하지만 짐승이 다른 승려들을 물어뜯느라 정신이 팔려있을때 그는 묶인 승려가 도망친 곳을 향해 달려갔다. 미혈굴 까지는 짐승이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거 말고는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상태로는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다. 과연. 미혈굴은 가까이 가지 않으면 좀처럼 알 수 없는 석벽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상처입은 승려는 미혈굴로 걸어들어갔다. 미혈굴에는 묶인 승려가 있었다. 그는 꼬챙이를 들고 실성한 채로 주저앉아있었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경련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제 정신을 다시 차릴 것 같지 않았다. 다친 승려는 미혈굴을 자세히 보았는데 한 쪽 구석에는 오래전 입적한 승려들의 사체처럼 보이는 것들이 여섯구 놓여있었다. 그리고 항상 쌀이 놓여있다는 돌로 된 걸상에는 쌀이 아니라 피가 흘려있었는데. 잘 보아하니 피는 묶인 승려가 흘린 것이 아니라 벽에 있는 작은 구멍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다친 승려는 직감하였다 미혈굴에서 쌀이 나오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멀리 짐승이 크게 울부짖는 소리와 승려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스승께서는 모든 이야기를 다 하시고는. 불편한 손이 아니라 온전한 손으로 찻잔을 잡아 찻물을 천천히 삼키셨다. 완전히 식어있는 찻물을 삼키는 소리는 컸다. 나도 스승도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승은 해가 지고 있는 산너머를 살피시고는 이윽고 너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나에게 물었다. 무엇을 여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은 나의 기색을 살피더니 다시 물었다. 너는 이야기에서 무엇을 얻었느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스승에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산을 내려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24년 8월의 글이다.


어제 집으로 오면서 내가 블로그에 너무 많은 글을 쓰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들도 그런 고민은 안 할텐데, 참 생각도 사서하시네요. 하지만 나는 작가가 아니다. 그냥 회사원이고 현실과 가상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단편들을 조금 올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블로그의 내용은 에세이이다.
너무 내 삶이라는 뜻이다.

차라리 소설만 써서 올리는 블로그를 했다면 좋았겠지만 여러분, 소설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힘듭니다.
6년 전 쯤 머릿속으로 구상해놓고 쓰지 않았던 소설을 요즘에 다시 쓰고 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고 세상에 갑자기 유리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어느날 부터 세상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체험을 하고, 다른 사람은 결혼하려던 애인과 헤어진다.
쓰다보니 점점 길어져서 내가 질리고 있는 중이다. 어째서 이렇게 베스트 극장 대본 같은 걸 쓰고 있담.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여러분은 베스트 극장이 뭔지 알고 있습니까? MBC에서 방영하던 단막극 프로그램이다.
위키를 찾아보았는데 베스트셀러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83년도(!!)부터 방영하던게 시작이었고 그 후로 이름을 바꿔가며 방영. 결국 2013년에는 종영을 맞이한 것 같다.
방송시간은 하여간 밤이었는데 한시간 정도 남짓 하는 내용으로 1회성 드라마들을 방영해주었다.
내용은 대중이 없이 치정극일 때도 있고 사회극일 때도 있다. 공포나 추리일 때도 있었는데 추측하기로는 드라마 제작에 필요한 리소스들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서  놀고 있는 인력이 없도록 뭔가를 계속 돌려야했고 정규 드라마 시간에 편성되지 않은 주요 스텝들의 훈련을 겸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그러다보니 실험성이 강한 작품도 꽤 많이 나왔었고 뒤에 굉장히 유명해지는 사람들이 여기서 데뷔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수의 명작 문학들을 영상화 하는 경우도 많아서 문학과 영상 사이의 가느다란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그런 방송이기도 했다. 다른 방송국에도 비슷한 성격의 방송이 있었지만 내가 챙겨본 것은 문화방송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의 나는 그렇게까지 문학적이지는 않아서 단막극에서 사회성이 짙은 것들은 꽝이라고 생각했고 터무니없는 내용이 나올 수록 좋아했다.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가챠를 돌릴 수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 돌릴 수 밖에 없고 대박이 터진다고 해도 상품은 기껏해야 한시간 동안 재미있는 시간 보내기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즐겁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없던 시절의 삶은 대충 이랬다. 매일 종이 신문을 보면서 공중파의 편성표를 본다. 그리고 좋아하는 방송의 편성시간과 또 무슨 특별한게 있는지 가슴 떨려하며 확인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방송이 하는 시간이면 경건하게 10분 정도 전부터 티비 앞에서 기다린다. 광고는 모두 본다. (그래 그것이 올바른 자본주의적인 태도이다.)
그렇게 보다보면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이어서 티비를 보고 그랬다. 그런 행태를 보고 모두가 아 티비는 바보 상자구나 하고 걱정하고 그랬는데 하하 걱정도 팔자셨다.
곧 유튜브가 나오는데 말이지.
또 뭘 좋아했냐면. 어린이 프로그램과 만화, 다큐멘터리와 코미디 프로그램.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그래 그러고보니 그 때는 비디오라는게 있었다. 그게 뭐냐면…그…동영상을 저장하는…테이프 레코딩…하여간 설명하기 어려우니 검고 단단한 필름맛이 나는 장치가 있었다고 알면된다.
넷플릭스의 혁신이 발생하기 전에 우리 20세기 인간들은 집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비디오테이프라는 게 필요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고 진짜로.
하여간 어머니는 가끔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 현금으로 얼마를 맡겨두고 누나와 내가 마음껏 비디오를 볼 수 있게 해줬다.
몇달 지나지 않아서 누나와 나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너무 성인물인 것을 제외(그렇다고 그냥 성인물은 보지 않았는가? 목이 잘리는 것 정도는 그냥 보았다.)하고는 보지 않은 영화가 없게 되었는데. 시네필을 만드는데 꽤 정석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금세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서 몸부림을 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당시 공중파에는 주말의 명화라는 시스템이 있어서 주말의 적당한 저녁때가 되면 주로 미국의 영화들을 방영해주었다. 얼마나 영향이 컸던지 극장에서 내려간지 몇년 되지 않은 할리우드 대작 영화 같은게 방영한다는게 알려지면 학교가 술렁이고 그랬다. 집에 비디오 재생기가 생기기 전부터도 그런게 있으면 챙겨봤는데, 비디오를 마구 보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혼탁해진 나는 티비에서 해주는 모든 영화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이라도 좋았다. 어떤 나라 영화라도 좋았다. 나는 영화가 시작하면 꼼짝 않고 그 영화를 다 보았고 다음 영화를 볼 때 까지 그 봤던 영화를 머릿 속에서 계속해서 재생했다. 인상깊은 장면을 생각하고 대사를 읊고. 이걸 다르게 만든다면 어떻게 만들면 될까를 생각했다.
현실보다 영화 쪽이 내겐 더 현실에 가까웠다. 어릴 때의 그 나이에는, 망상 쪽이 현실보다 더 사랑스러운 법이다.

어떤 영화를 봤는지는 굳이 여기에 쓰지 않겠다. 사실 어떤 명작이라고 불렸던 영화들보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스며든 것은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어떤 광경이다.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사람들과 각이 진 자동차를 몰아 어디론가 가는 남자. 아름답지만 어딘가 채워지지 못한 눈을 가진 여자. 캘리포니아의 햇볕과 홍콩의 밤거리 같은 것들 말이다.
어느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홍콩에 갔던 날. 비가 오는 홍콩의 해변을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데 저 멀리 비안개 너머로 홍콩의 거리가 천천히 보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떠한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당신에게 내가 무엇을 봤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21세기의 이야기이고.
나의 마음 속에 머물러있는 몇 되지 않는 사랑으로 가득찬 순간이다. 당신에게 말한다면 직접 말해주고 싶다.

어느날 후배와 영화를 보러가면서 얘길 했는데. 후배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안방에 기어들어가 - 안방에만 티비가 있었기 때문에 - 매일밤 잠이 든 부모님의 발치에서 영화를 두편, 때때로 한편을 보고 학교에 갔다고 한다. 본인의 학업은 둘째치고 본인의 부모님에게도 못할짓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어보았는데. 후배는 실로 광기에 가득찬 얼굴로 오빠, 그럼 오빠는 영화보고 싶은걸 참을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 영화는 해로운 매체가 맞고 어서 깡그리 다 불태워버려야한다.

나는 가끔 궁금해한다.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주인공들. 저 멀리 사라지는 햇볕 아래에서 찍은 것처럼 갈색으로 바래있던 그 광경들. 총을 맞아 쓰러진 사람들. 어딘가로 떨어져 굴러가버린 과일들. 그 모든 것들은 정말 세상 어딘가에 존재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모두 영화의 구성요소와 세트일 뿐으로 저 모든 사람들과 과일들 모두 촬영이 끝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일까? 그리고 모두들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걸까?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것들이 정말 나의 것일까 아니면 천개가 넘도록 본 티비 드라마 단막극의 주인공이 하고 있던 생각일까.

24년 8월의 글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외할아버지의 성묘를 가지 않았다. 안장을 할 때도 가지 않았으니 한 번도 가지 않은거다.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다. 지난주의 일요일 너무 피곤하고 괴로워서 이유없는 변덕으로 음력 7월 15일 중원절이 언제인지 꼽아보니 바로 그날이었다. 과연, 성묘를 가기에 적절한 시기구나 싶어서 성묘를 가기로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대전의 현충원에 계시다. 외가의 선산이 조치원에 있는 걸 생각하면 크게 다를 건 없다. 지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차를 타면 금세 갈 수 있는 곳이니 크게 준비 할 것도 없이 기차표만 예매해두고 온천이 되는 숙소가 있으면 하루 정도 자고 올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 외엔 대전에 사는 지인이 오는 김에 한 번 보자고 하여 저녁 기차로 예약 시간을 바꾼 정도이다. (결국 지인은 다른 일정이 생겨서 만나지 못했다.)

기차를 타기만 하면 대전은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다만 기차역까지 가는 것이 항상 문제라서 나는 기차를 타는 날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기차표값에 택시비를 슬쩍 끼워넣는 기적의 논리로 돈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가까운 대전이라면 그런 논리이고 먼 부산이라면, 그래 먼 부산이라면 기차값이 비싸서 택시비 정도야 거기에 더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만 그런 식의 기적의 계산법을 가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들하지 않는가 오늘은 평소보다 좀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치킨 시켜먹어도 되겠어. 체육 필기 시험을 잘 봤으니 내일 한국사 시험은 좀 조져도 되겠지. 이런거 말이다.

햇볕이 너무 강해지기 전에 성묘를 마치고 싶어서 대전에 도착하고 보니 8시도 되지 않았다. 오기 전에 가는 루트는 대충 보았지만 가장 편한 버스를 타고 가는 건 내키지가 않아서 굳이 대전1호선을 타고 현충원 앞에 가기로 했다. 술이랑 꽃 정도는 역에서 먼저 사가는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꽃에까지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기(택시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잖아)에 현충원 역 앞에 뭔가가 있겠지 하고 물도 휴지도 없이 대전역 성심당에서 산 빵을 씹으며 전철을 탔다. (빵은 샀다 그렇다.)

그리고 현충원 역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 대학교 앞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당황해서 현충원 역 주변을 잠시 돌았는데. 편의점 마저 없었다. 여러분도 영원한 고향처럼 머릿속에 한국의 시골이 한 두개 쯤 있을텐데 읍내도 되지 못할, 그 정도 시골이었다. 쓸데없이 국도 옆의 나무들이 우거져있었다.

셔틀버스를 타려고 줄 서 있는 것 같은 대학생들이 보였지만 그들에게 딱히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 현충원에 보훈매장이 있으니까…라는 좀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단 현충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현충원까지는 대략 3~4km로 보였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셔틀버스나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혼자 있을 때 평소보다 훨씬 이상한 판단을 한다. 그냥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다리가 남들보다 좀 튼튼한 편이고 걷는 것도 싫어하지 않아서 역 두세개 정도 거리는 그냥 걸어서 가는데 8월의 뜨거운 태양을 생각하면, 전혀 올바른 판단이 아니었다. 왜 아무도 날 말리지 않았을까. 그건 내가 친구가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진 않기 때문이다. 혹시 동무들이 많은 인싸 자식들은 인생의 이런 변곡점마다 시시적절한 조언과 말림을 받으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걸까? 몹시 억울하다.

현충원을 들어가고도 외할아버지의 묘소는 현충원 북쪽에 있어서 말도 안되게 긴 언덕을 걸어가야 했는데. 솔직히 얘기하겠다 보훈처 홈페이지에 들어가 외할아버지 묘소 위치를 확인할 때 부터 그냥 걸어가려고 생각하고 갔다. 편도로만 5km가 넘었지만. 내가 믿는건 (고작) 처서를 지나 좀 선선해지는 날씨였다.

그래도 시골길을 터벅터벅 걷다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길을 지나 의외로 멀지 않은 길가에 꽃집을 찾아서 너무 기뻐서 들어갔다. 조화들만 잔뜩 있어서 당황하여 가게 주인 분을 불렀더니 생화인 국화도 있다기에 그걸 한다발 샀다.
어째서인지 10송이 단위로 팔고 있었는데. 왠지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몇 뭉치를 더 사려다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싶어서 관두고 나서려는데 가게 주인 분이 소주와 컵을 챙겨주시더니, 고인께 한 잔 따라드리세요 라고 하셔서 얼떨결에 받았다.

국도 변에는 법 같은 걸로 정해둔 것처럼 골프용품 전문점과 오토바이 가게들이 있고. 집 가까운데 있으면 한 번 쯤 갔을 법한(한 번 만 갔을 법한) 무슨 톳으로 만든 음식이 메인 요리인 가게들이 있었다. 이런 가게들만 있어야 한다고 조례로 정한걸까? 분명 나의 홈타운 부천에도 도심을 벗어나 과수원이 있거나 국도로 좀 벗어난 곳으로 가면 저런 곳이 나온다. 무엇을 숨기랴 내가 살던 근처에는 수목원이 있었는데 그 수목원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곳에는 몇층짜리 낚시용품 전문점이 있었다.
도시구조이론이나 지대이론 등 (바제스니 뭐니 하는 것들 말이다)에 의하면 이런 전문점은 굉장히 넓은 범위의 시장을 커버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편의점은 반경 일킬로미터 이내의 손님들이 주로 이용하지만 이런 취미류의 전문점은 수요가 적기 때문에 수십킬로미터의 반경을 커버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돼 이런 가게가 겨우 수십킬로미터의 반경을 커버한다고? 내가 본 것이 대전의 유일한 오토바이 배터리 전문점이란 말이지. 남한에 유일한 곳이 아니고?

3킬로미터 이상을 걷자 슬슬 즐거워지기 시작했는데. 머릿 속으로 처음에 뭐라고 인사를 하지 하는 생각을 계속 했다. 할아버지 저에요. 할아버님 인사드립니다. 할로 구독자 여러분. 등등 하여간. 나는 외할아버지의 생전에는 항상 외할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어리광을 부린 적은 없다. 외손자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그런 노인이 아니었다.

아무 날도 아니었는데 현충원 주차장은 7부 이상 차있는 것 같았다. 보훈매장의 물품 가격은 합리적이었는데, 생화는 거의 없었고 조화가 대부분이었다. 뒤에가서 알게 된거였지만 각 묘지에 꽂혀있었던 꽃들은 다 조화로. 유족들이 꽂아두는거였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자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조화를 꽂아두고 명절마다 바꾸는 거였다. 나는 부러 생화를 찾은건데, 내가 바친 국화가 시들었다면 누군가 그걸 버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소주를 받았지만, 아무래도 좀 그렇지? 싶어서 법주를 샀다. 외할아버지가 술을 좋아했던가. 할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할머니가 질색을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모르겠다. 마셔도 취할 때 까지 마시지 않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다.

현충원은 좋은 곳이었다. 조용했고 나무가 모두 커다랬다. 청소년 고양이를 하나 찾아 사진을 찍었는데 싫은 표정도 없이 날 쳐다보며 야옹이라고 말해줬다. 나도 야옹이라고 대답해줬다. 땀에 젖을때 까지 걸어서 외할아버지의 묘비를 찾았다. 묘비 사이를 지나가면서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성묘를 좀 하려고요. 하고 굽실굽실 거리면서 지나갔다. 아무래도 그렇게 말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이다.

저 멀리 산이 보이고 까막까치 우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비석 앞에 서서 우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준비한 인사도 다 까먹고 죄송해요 울어서 죄송해요 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소연하는 것도, 자기 앞에서 우는 것도 싫어한 사람이다.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걸 어쩌겠는가.

술을 바치고 물을 부어 비석을 깨끗하게 닦고, 사진을 찍어서 이모에게 보냈다. 잘 계시네요 아직 누워계세요.
외할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햇볕을 받고 있으니. 그제서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게 실감이 났다. 그냥 외할아버지랑 싸우고 10년 쯤 안 본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사랑이란 이렇게 고통스러운거였다. 녹색의 산이란 저렇게 아름다운거였다. 벽처럼 둘러쌓인 산들이 숨도 쉬지 않고 서있었다. 내가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자 대신 벌레들의 날개 소리와 까마귀의 긴 울음 소리가 들렸다.

두서없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길래 남은 술들을 외할아버지 무덤 근처에 있는 다른 무덤들에 바치고 절을 드렸다. 바로 옆자리에는 외할아버지와 사관학교 동기인 유명한 분이 누워계셨는데 술을 더욱 가득 따라서 드렸다. 이모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돈 문제로 외할아버지가 그 분을 고소하셨다고 한다. 아니 죄송합니다. 어느 쪽에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또 올게요. 라고 하고 절을 두 번 더 했다. 다시 눈물이 나서 머리를 들을 수가 없었는데. 외할아버지 말투와 외할아버지 목소리로 그래 또 와라. 라는 말을 들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외할아버지 목소리를 하나도 잊지 않았다.

수분과 전해질 부족으로 죽겠다 싶어서 보훈매장에서 산 파워에이드를 꿀꺽꿀꺽 삼켰다. 내려가는 길도 너무 길었다. 현충원역까지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꽃집에 전화해서 저 아까 생화 산 사람인데요 소주를 주셨는데 생각해보니 값을 치르지 않았어요 계좌번호로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라고 물어보니 조문을 가는 분들에게 그렇게 한 병 씩 드려왔다고 한다. 감사하다고 번창하시라고 인사를 드리고 끊었다. 사실 그거 안 썼는데 말이지.

정말로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현충원을 나와 대전역으로 가는 버스를 비틀거리면서 탔다.

중원절이란 말은 도교용어로 같은 날을 불교에서는 우란분재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ullambana에서 나왔다고 한다. 굳이 해석하자면 똑바로 매달려있다는 말이 전화되어서 생긴, 거꾸로 매달려있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하나인 목건련은 신통제일이라 칭송되었고 마하목건련, 목련존자 등의 이름으로 칭송받았던 뛰어난 제자였다.
우란분경과 목련경에 따르면 그런 그가 어느날 천안통으로 지옥을 바라보자 생전에 많은 악업을 지은 어머니가 죽어서 아귀도에 떨어져 굶주림의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하늘을 날고 용왕을 조복시키는 마하목갈라나도 지옥에 떨어진 부모를 구할 수는 없었기에 스승에게 방도를 물었고 승려들에게 5가지의 과일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죄업을 씻고자 하였다. 죄는 선업으로만 대속 할 수 있는걸까.

그것이 우란분재의 유래로 알려진 이야기이고, 거꾸로 매달려있다는 것은 아귀도에 떨어진 목건련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그 후 멀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일로 보이나 목건련은 반대교파들의 시비에 쫓기다 결국 스승인 석가모니보다 먼저 입멸에 든다. 전설에서는 그가 일찍 죽음에 이른 것이 전생에서 부모를 죽인 대죄인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의 선업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도교의 중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행사이다. 인간의 죄를 계량하는 천관들이 일년에 세 번 그 죄를 가늠하는 날 중 하나가 중원절이고, 도교에서는 그날 음식을 차려놓고 부모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죽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말하자면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가끔 생각했다. 산자들이 우리를 생각하는만큼 죽은자들도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그들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지. 애처로울 정도로 어리석은 생각이나. 내가 아닌 누군가도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버스를 탄지 얼마 안되어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회사의 후배가 대전 갈 일 있으면 말해줘요 성심당 부탁 좀 합시다. 라고 말한게 생각나서 까먹었으면 모를까 해주겠다고 말까지 해놓고…싶어서 후배에게 연락을 하니. 마침 주말약속이 모두 깨져서 놀고 있던 후배가 1초도 안되어서는 대답을 하고 케익을 부탁했다. 운도 좋은 녀석이네 안 그래도 오후에 약속이 통채로 사라져서 할 일도 없었는데 해주마 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점심엔 맛있는거 드세요 태평소국밥이라든가…라고 후배가 말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가 오룡역(그 가게의 본점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역이다)에 도착하기 직전이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느껴서 바로 버스에서 내렸다.

과연, 육사시미와 내장탕 모두 거기까지 와서 먹는 후회가 하나도 없는 맛이었다.

후배가 부탁한 케익을 사서 카페에 앉아 이모와 메세지를 주고받는데. 이모는 흰 국화가 할아버지가 조문을 하러 갈 때면 항상 사서 가던 꽃이라고 말했다. 단지 한 번에 세 송이만 사셨다고. 그 이상은 사치인 것 같다 라고 하셨다고 했다. 다음에는 더 큰 국화 꽃다발을 사서 갈 생각이다. 근데 노인네가 날 더 이상 어쩌겠는가.

꿈에나 나와서 잔소리나 좀 하겠지.

24년 8월의 글이다.

문득 언젠가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다 떨어질텐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점점 과거로 돌아가서 내 마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일들을 다 꺼내어 글로 쓰고, 전해야 할 말은 모두 전하고 전하지 못할 말들은 다 삼키면. 그리고 그 뒤에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1990년대 가장 더웠던 여름을 말한다면 94-95년의 여름을 빼놓고 말 할 수 없다.
동북아시아의 폭염은 정말 최악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라서 베이징은 건국이래 최악의 폭염을 기록했다고 하고 한국에서도 가뭄일수와 더위 양 쪽에서 20세기 최고.
전국의 폭염일수가 29.4일. 2018년이 되기 전까지 어떤 여름도 94년보다 덥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공교롭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기억하라고 하면 기억이 나지만 94년-95년에는 내 인생에 대체로 아무 일이 없었던 시기였다. 단수가 자주 되었기 때문에 물통을 들고 물차를 기다려서 물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어디 오지에 사셨나요? 아닙니다. 나는 경기도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도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뭄이 발생하면 물차가 나가는 걸로 알고 있다. 다만 경기도가 다른 지방에 비해서 수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요즘의 경기도민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광경일지도 모르겠다. 집에 들통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물통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제 집에 들통을 가져다 두지 않는다.

예전엔 집에 항상 있었지만 이제는 집에 잘 두지 않는 걸 얘기해보자면 랜턴과 양초이다.
그렇게 전력 사정이 안 좋았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 시절에는 선풍기도 잘 안트는 집이 많았는데도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한 여름이 되면 전기가 끊기곤 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화를 내지도 않았고 어어 정전이네 하면서 능숙하게 양초를 꺼내서 집을 밝혔다.

그 당시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한 용어는 “열대야”였는데 밤이 되어도 덥다고? 그럴 수가 있나 놀랍구나 20세기 이러면서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래서 20세기 피플들은 열대야를 이겨내기 위해 에어컨을 사거나 선풍기를 틀었는가? 그렇지 않다. 20세기 피플들은 그냥 밤이 되면 집 밖에 나와서 누워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겠지만 그 당시에는 도시도 커뮤니티가 아직 살아있었고, 아파트 단지도 비슷한 시기에 이사온 구성이 비슷한 집들이 모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들 집에서 은박지처럼 반짝거리는 거나 진짜 대나무로 만든 돗자리(어휴 정말 간지템이로군요)를 들고 나와서 식구들끼리 누워있었다.
재미있는 체험으로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정상가족들을 구성하여 커뮤니티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충분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친)누나와 단 둘이서 집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 둘이 할 수 있는 건 창문을 활짝 열고는 양초도 끈 채로 어두컴컴한 집에서 애써 잠을 청하는 것 밖에 없었다.

조금 더 커서 태풍이 오던 날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나는 혼자였다. (왜 혼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자전거를 있는 힘껏 밟아 집에 돌아온 나는 태풍을 맞을 준비를 했다. 나는 구구단을 배우기 전에 이미 혼자서 밥을 해먹을 줄 알아서 당황하지도 않았다.

정전 중이라 건전지가 끝나면 랜턴의 불도 꺼지기 때문에 랜턴을 켜지 않았다. 전등 스위치는 모두 꺼둔채다.
아직 비바람이 오진 않았지만 창을 꼭 잠그고 선풍기가 켜지길 기대하며 미풍에 버튼을 눌러두었다. 그냥 서늘한 창문에 이마를 대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번개가 치고 천둥 소리가 올 때 까지의 숫자를 세면서 태풍이 얼마나 가까이에 왔는지 셌다. 세찬 빗소리가 들리고 뒤에서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선풍기가 켜졌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찍은 사진이 없다. 그래서인지 내 어릴 적의 기억은 군데군데 결락되어 있다.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몇년도에 뭘 했어 라고 물어본다면 어어 뭐였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오랫 동안 “올해”라고 인식했던 건 95년이었다. 머리 속에서 95년이 지나는 걸 거부하듯이 올해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하면 95년이 떠올랐다.

아주 오랜 후에 그 이유를 스스로 깨달았는데. 그 때 쯤에는 더 이상 95년을 올해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또 다른 해를 올해로 여기고 있다. 그런걸 보면 나는 뭔가를 배우는게 그리 빠르진 않은 것 같다.

매년을 기억하는 건 대체로 그 해에 읽었던 책들이다. 이 무슨 대책 없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나는 92년의 7월을 내가 광화문 교보문고에 처음 갔었던 해로 기억한다.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에 감동했는데
아버지는 딱 한권을 고르렴 이라고 불가능한 숙제를 내게 주었다. 지금의 나라면 무슨 책을 골랐을까. 나는 꿈 속에서는 대체로 책이 많은 곳에 있다.
교보문고였던 적도 있고 모교의 중앙도서관일 때도 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의 작은 도서대여점도 자주 나오는 곳이다. 나는 꼭 영원처럼 그렇게 책 사이에 있고 싶어한다.

92년 7월의 내가 고른 것은 그 해 발매 된 스트리트 파이터2의 공략본이었다.
왜? 뭐 대단한 책을 골랐을거라고 생각했는가. 그 책은 올컬러에 멋진 일러스트가 가득했다. 오타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냥 일본에서 나온 책을 불법 복제하여 대충 번역해서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몹시 실망한 눈치였지만 본인이 한 권만 고르라고 했기 때문에 의외로 군말 없이 책을 사줬다.

그러고는 충무김밥을 사줬는데. 요즘에야 충무김밥이 창렬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아버지에게는 20대의 추억이 담긴 음식이어서. 누나와 내가 맛이 없다고 하자 몹시 분개해했다.

그리고는 그 해 겨울 누나와 나를 정말 충무에 데려가 충무김밥을 사주었다. 그 때도 맛이 없어서 누나와 나는 같이 나온 오징어순대만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한 성격에 머리가 너무 좋은 아버지라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나는 정말 길고, 웃긴 이야기를 여럿 할 수 있다.
애초에 자식이란 그런 존재이다. 자기 부모에 대해서는 그게 분노이든 슬픔이든 끝도 없이 길게 얘기 할 수 있는, 우리는 그들 인생이 가장 가혹한 목격자이다.

하지만 책의 이야기를 하자. 나는 그 공략본을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보았다. 비유가 아니다 정말 너덜너덜해지고 찢어질때 까지 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책도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보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크게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나 내 지적 능력에 대해서 오해를 했는지 어느날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 교재를 사와서 나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또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정말 그만두자.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0세기이다.

방학은 좋았다. 책을 마음 껏 읽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결국 매년을 어떤 책을 읽었는지로 기억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94년만큼은 아니었지만 혹독하게 더웠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수학에 재능이 없다는 것이 판명이 난 나는 더 이상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 해 방학은 통채로 내 것이었다.

아무 할 일도 없던 나는 모비딕을 읽었다. 모비딕을 읽다가 어느 토요일 오후 공영방송에서 해준 모비딕의 영화판은 인상적이었다.
장면은 어둡고, 화면은 붉고 사람들은 땀을 흘리면서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대사를 했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땀 범벅이 되어서 선풍기 앞에 앉아 아아아 어어어 하고 소리를 내었다.
변성기가 되지 않았던 내 목소리가 선풍기의 진동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선장님 고래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말해보았다.

나는 아직도 종종 모비딕을 읽으면서 뺨에 닿았던 대나무 돗자리의 감촉을 떠올린다. 너무 더웠고. 나는 책을 읽는 것 외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죽음보다 더 외로운 여름이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

내돈내산임을 밝힌다. 아니 안 밝혀도 되는건가?

아이패드를 새로 샀다. 원래부터 생일선물로 아이패드 하나 사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어서 별로 고민 없이 샀다.
무슨 거짓말을 고하랴 나는 원래 뭘 살 때 딱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어 사야지 하고 사면 끝이다.
원래부터 그런 못된 습성을 가진건 아니고 믿어달라, 어릴 때 부터 나는 모든 걸 아껴쓰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어릴 때의 나와…지금의 나를 비교한다고 하면 비슷한 점이 훨씬 적은 것 같지만…하여튼

원래 여행기와 나의 근황을 부재증명이라는 이름으로 올리기 시작한 이 블로그가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무거나 올리는 곳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의 역할을 잊어버리면 안되겠기에 이렇게 근황을 올린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아이패드랑 매직키보드를 같이 샀는데 더럽게 더럽게 비싸면서 별로 제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일단 글을 써보면서 자신의 소비를 정당화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의 편집이 좀 이상하게 보인다면, 그건그냥  아이패드로 작성했기 때문이다.

요즘 티스토리에 글을 쓰면 적게는 30, 많게는 100이 넘는 방문객이 들어온다. 여러분이 이 티스토리에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원래 아무 글이나 쓰는 사람이고 아무 일이 없을 때 나의 텐션은 이 정도이다. 언제 어디서 물어봐도 귀신 이야기나 문학 이야기 두 세 개는 뽑아낼 수 있지만 (애초에 그런 인간이 아니면 블로그를 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나는 회사원이다. 우울하고 문학적인 마음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효율적으로 일하고 빨리 집에 가서 누워있는 것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관심있는 것은 글을 쓰는 것 뿐이다. 하루 종일 유령같은 마음으로 지내다가 두부 세일하면 두부 4모 살까, 하고 고민 하는 정도가 전부이다.
어제는 2시간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수육을 샀다. 아무래도 고기가 먹고 싶어서이다. 무친 무말랭이랑 그런 것들이랑 먹다 보니 두 입을 먹고 나서 더 이상 먹고 싶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먹었다. 복통이 심해서 2시간 정도 모로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다. 머릿 속으로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미술적 상징에 대해서 생각했다. 연기가 나는 거울이라고 불리운다니 얘네들의 제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거지?

그거 말고 뭐하고 지내냐면, 그래 아즈텍 신화의 신에 대해서 자기 전에 생각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을리가 없지.
극단적으로 편식을 하며 두부, 수박, 냉면만 먹고 있다. 회사에서 먹는 점심은 친구와 같이먹기 때문에 다른 사람처럼 그럭저럭 먹지만 왠지 집에 혼자가 되면 다른 걸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얼마 전 역의 쇼핑몰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에일리언의 신작을 보고나서가 아니고 그냥 냄새가 너무 역해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집에 돌아왔다.
이게 바싹 마른 녀석들의 식욕인가? 하고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집에 돌아와서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두부를 먹었다. 진짜 아무 것도 안 먹으면 배가 고픈걸 보니 바싹 마른 녀석들처럼 되기엔 무리 같다. 얼마 전에 회사 동료에게 저 살 많이 빠졌죠? 라고 하니 얼굴만 빠진거 아냐? 라고 하길래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누가 봐도 저자식 왜 저렇게 말랐지 소리를 듣고 싶다.

SNS에서는 아무나 일단 팔로잉 하면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내 이 증상들이 언제 나아질지 알수가 없어서 우선 내 머릿속에서 나 자신을 좀 뽑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게 가장 효과적이지만, 나가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을 하니 내 평소의 적당한 매너와 유머감각을 유지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최근에 아는 동생과 몇명이 차례차례 우리 동네에 찾아와서 만난 적이 있다. 엉망인 얼굴을 하고 나온 나와 잘도 놀아준다 싶었다.
(사촌)형이 동네로 찾아올 정도였으니 다들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냥 만화카페에 가고 싶은데 자기 동네에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깨가 아직도 낫지 않아서 어떤 운동도 하기 적당하지 않지만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정말 이상하다 나는 혼자가 되면 달리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거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달리기를 하고 글을 쓰길 반복한다.
지웅이형과도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형에게 그래도 글을 쓰면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상하죠? 라고 말하자 형은 아냐 맞어 그러니까 우리가 안되는거야 라고 대답했다.
형은 몰랐겠지만 나는 그 때 쇼핑몰 구석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형의 대답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아니 형의 대답이 감동적인 것으로 하겠다.

항상 글을 쓰고 나서 생각한다. 조금 더 살아가야지.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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