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9월 30일 이제껏 없었다던 10일간의 휴가 중 5일을 보내기 위해, 교토로 갔다. 이번에도 여행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연휴 기간 동안 내가 밥을 해먹고 싶지 않았고, 이런 여행이라도 가야 연휴 동안 아무 것도 안 했다고 징징 안 대시겠죠- 라고 후배가 이야기를 했으며 때마침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비행기가 있는 곳이 간사이 뿐이었다. 계획 이라고는 아이폰을 사는 것과 일본에서 놀고 있는 후배와 저녁을 먹는 것 뿐이었다.

4박 5일 간의 교토 여행 동안 나는 아이폰을 사고 친구와 두 끼의 저녁을 먹었고 비가 오는 루리코인과 오하라를 들렀으며 사이호지에 갔다 사전 예약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일 해지는 가모가와의 강변에 앉아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칵테일 바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호텔에 가기 전 커피 하우스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여기저기 호텔이나 카페에서 밥을 먹었고 교토국립미술관과 산쥬산겐도를 들렀다. 나는 여행 내내 하고 싶은 말을 찾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직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고 나는 여행의 기록을 정리한다. 

이번 여행기는 <낮>과 <밤> 두 개로 정리한다. 두 가지의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야기를 거의 완성하고 보니 어쩌면 여행의 기록을 정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핑계이고 나는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진 건지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가 우리에게 혹은 내가 당신에게 할수 있는 말은 제한되어 있고 나는 힘들게 힘들게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한 마디만을 여기에 쓴다.

이번 여행에도 음악을 많이 듣진 않았다. 교토는 여러분의 생각보다 조용하다. 가게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는 편이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여행 중 월요일에는 종일 비가 내렸다. 이끼의 정원 위에 비가 내렸다. 당신은 어떤 소리가 날지 상상 할 수 있을까? 


가장 많이 들은 것은 Sonder의 Too fast
https://youtu.be/zZmPZDySFMI

그리고 Kamasi Washington 의 harmony of difference 앨범이다.
https://youtu.be/rtW1S5EbHgU


괜찮으면 이 글을 듣는 동안 이 곡들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 커피

커피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건 안하려고 드는 속물 근성 때문에 믹스 커피를 거부하고 살아온 기나긴 삶. 그 후 시애틀의 카페 체인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믹스가 아닌 커피가 당연해진 것도 20년이 다 되어 가건만. 
좋아하는 커피라면 몇 개 정도는 항상 댈 수 있지만, 커피라면 글쎄요 싶다. 콩의 차이와 배전의 차이를 아직도 모르겠다. 주는대로 마십니다. 
교토의 커피를 이야기할 때면 보통 8,90년대의 소위 서드 웨이브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콩을 쓰더라도 균일한 향과 맛을 내는 추출방식이 대세였던 시대에서 산지와 추출방법을 다양하게 하려고 했던 시도 말이다. 지금에야 당연하게 생각되던 콩 산지에 대한 애호가 대중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공급망을 통일함으로서 균일한 커피 맛을 만들려고 했던 대규모 커피 체인점이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지점과 일치한다. 거꾸로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산지"를 중요시하는 점이 교토인의 마음에 든걸까? 아니면 예술의 영역에 가버려서 귀찮게 변해버린 차노유(다도)에 질린 걸까. 가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만 교토의 번화가에는 골목 골목 마다 커피 하우스가 있다. 물론 교토의 여러 커피 전문점들은 길어야 겨우 100년 (그렇다, 소바 집에 500년을 넘게 하고 당고 집이 400년을 이어가는 동네에서 100년은 고작인 것이다) 정도의 역사를 가졌지만 실은 교토는 일본 내에서도 인구 당 커피 소비 량이 최고인 도시. 일찍 부터 아침을 먹으러 커피 하우스에 가보면 동네 사람일게 분명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 지역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내는 스타벅스의 컨셉 스토어도 교토에는 두 점포나 있으며, 니넨자카의 다다미 방 형식의 스타벅스는 한국에서도 기사화가 될 정도로 이슈가 되었다. 해당 사실로만 보면 그냥 스타벅스가 노력하는구나 정도겠겠지만 교토 인들의 커피 사랑을 생각하면 그래 이 동네는 그럴만 하다 하는 생각이 든다.
교토의 커피는 조금 특이하다. 배전은 지독하리만큼 진하게 하지만 추출은 맑다. 마시는 순간 차를 마시고 있는건가 하는 착각이 든다. 내가 잘못 주문한 건가 하고 커피를 내려놓고는 맛을 느끼려고 눈을 감아본다. 기름지지 않다. 향은 훅하고 들어오는 듯 하지만 결코 진하지 않다. 그래 나는 착각하지 않았어 내가 마시는 건 차야 커피가 아니라고. 나는 안심하며 잔을 다시 들고 조금 더 마셔본다. 아 하지만 커피이다. 카페인이 올라오지도 않고 입안에는 쓴맛이 아주 얇게 남다가 날아가버린다. 고소함은 없다.
교토의 오리지널이라고 불릴만한 커피라면 역시 이노다 커피인데 커피에 밀크와 설탕을 넣어주는, 일본에서라면 특이한 커피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응당 진해야할 이노다 커피 조차도 맛이 느슨하다. 이걸 싫어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에 극단적으로 가까우면서 결코 차의 맛은 아니며 성의가 없는 맛 또한 아니라니.
몇개의 커피 하우스에 들러서 커피를 마셨다. 의자는 딱딱하고 서비스는 과한 곳 하나 없이 딱 맞아 떨어진다. 팔짱을 끼고 괜찮은 문장이 떠오르기를 기다힌다. 교토에 와서 콜드브루 같은 걸 시킬리가 없다. 커피가 나오는데는 항상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커피가 나와도 금방 마시진 않는다 괜찮은 문장이 떠오르면 그걸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 밖으로 버리며>

매일 아침 일찍 교토의 커피를 마신다. 좋아하건 싫어하건 교토를 시작하게 하는 것은 커피이다.


- 강변
쇼와 39년 7월 10일 일본법률 167호 하천법에 의거하여 하천은 원류에서 하구 혹은 합류 지점까지 동일한 명칭으로 통일되게 되었다. 가모가와는 비와호에서 부터 흘러나오는 “요도가와”의 지류로 요도가와는 지역에 따라 세타가와, 우지가와 등으로 이름을 바꿔 바다로 흘러가게 된다. 고도 교토를 관통하며 흐르는 강 답게 많은 문학 작품에 등장하며 때로는 그냥 “동하(동쪽의 하천)”이라고 불린 적도 있는 듯 하다.
한국인이라면 아무래도 동서를 관통하는 하천에 익숙하기 때문에 어째서 이런 곳에? 하며 방향을 착각하기 딱 좋은 북남 방향의 하천이다. 거대한 분지인 교토를 오사카와 잇는 수운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어 왔으며 의외로 풍수지리적으로는 그닥 좋지 않은 위치라고 해서 후세에 말이 있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으나,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이미 교토는 천년 동안의 수도였고 그 동안 험한 일도 좋은 일도 수도 없이 많았는데. 
가모가와에 오게 되면 놀랄만한 것은 수서생물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대도시를 관통하는 강 치고는 깨끗하게 관리 되어 있어서 특히 새들이 많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점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가모가와 강변을 산책하거나 운동을 하고 있고 밤이 되면 산조와 시조 사이의 번화가를 중심으로 “가와도코”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가와도코는 나무로 된 바닥을 강변에 설치하여 음식점이나 술집을 강변에서 영업할 수 있게 한 장소인데, 밤이 되면 가와도코에서 설치한 노란 색 등롱들이 아름답게 빛난다. 결코 밤의 어둠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명을 설치해두었다. 
이런 가와도코를 제외하고도 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거나 밤의 강을 감상하는데 일본인들이 그들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를 자조적으로 “가모가와 등간격의 법칙”이라고 일컬으며 이런 무리들 사이는 자동적으로 등간격으로 배치된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데 과연, 딱히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 없이 다들 적당한 간격을 두고 강을 바라보고 있다.


- 숨

아마노산 콘고지의 목조 대일여래상은 항삼세명왕, 부동명왕과 같이 한 조로 취급되고 있지만 <국보>를 주제로 한 이번 교토 국립박물관의 전시에는 대일여래와 부동명왕만이 전시되었다. 
실상, 불상 미술은 간다라 미술에 의해서 기초적인 기술은 모두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성한 인간, 혹은 신으로서의 불상을 표현하는 방법 자체는 끊임없이 발전과 쇠퇴를 거듭해왔다. 신상이 상당한 과장, 데포르메를 가진 다는 것은 상식이다. 보통 거대한 인체의 형태를 하는 신상은 거대할 수록 그 모습을 한 눈에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작가는 신상의 머리를 상대적으로 크게 설계하고 참배자가 바닥에서 “우러러”볼 때에 자연스러운 위엄을 갖도록 한다.
태양의 화신이자 우주 제공의 조화를 상징하는 대일여래, 그리고 그 대일여래의 뜻을 받아 일체의 장애를 제거하는 그의 분노를 나타내는 이 부동명왕.
이 두 상도 동일한 강조와 불균형을 통한 조화를 통해서 만들어졌는데 기본적으로 실제 인체의 몇배나 되는 형태를 한 이 좌상들은 조형미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물론 우주가 혼돈 속에서 태장의 질서 속에 수태되고 완성되는 모습을 그리긴 하나, 이 조상의 기본 목적은 장엄함과 숭고함에의 표현이다.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설령 그것이 공포라도 좋다. 이걸 보는 자들이 이 앞에 엎드리고 신의 세계를 편린이나마 맛볼 수 있게 하기 위한 종교 철학의 구현이다.
부동명왕. 자리에 앉아 항마의 검과 금강삭을 지닌 채 자신의 앞에 선 참배자를 휘둥그레 쳐다보는 이 명왕은 정면이 아닌 아랫쪽에서 볼 때 솟아오른 어깨와 부푼 흉곽 때문에 자연스럽게 명왕의 동작 - 숨을 들이키는 호흡과 오른 쪽의 칼을 들고 휘두르려는 준비 자세-을 떠올리게 된다. 명왕의 정면에 있는 이상 그의 시야 밖을 벗어날 수 없다. 항마의 검은 당신을 향하며 금강삭이 겨누고 있는 상대는 당신이 된다. 신상이 숨을 다 들이키는 순간 동작은 시작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다. 아무리 정교하다고 하여도 목조로 만든 신상이 움직일리가 없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숨을 들이쉬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일여래. 원래는 가운데에 놓여있어야 할 이 금색의 조상은 부동명왕의 상과는 반대이다. 그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지혜의 수인인 지권인을 한 대일여래는 황금 빛으로 빛나며 눈을 반쯤 감았다. 그의 숨은 고요하며 들이키는 숨이 아니라 들이내쉬는 숨을 암시한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당신을 벗어난 모든 세계이며 그게 비추는 것은 당신을 포함한 모든 세계이다. 
내쉬는 대일여래와 들이쉬는 부동명왕. 세계는 불타의 한 호흡 위에 놓인다.


- 나무
서기 594년 건립된 오하라의 잣코인에는 일본의 유명한 “헤이케이이야기”에도 나오는 소나무가 있다. 그 구절은 대략 1186년의 봄, 고시라카와 법왕이 오하라에 행차하며 헤이케 일족의 명복을 빌고 있던 겐레이몬 도쿠코를 방문하는 장면이다. 
나카시마의 소나무에 기대어...애달프게 너울거리는 보랏빛 등나무 꽃이여, 라고 시인은 읊는다.
이 유명한 나카시마의 소나무는 2000년에 발생한 본당의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고 2004년 말라죽고 만다. 
오래된 이야깃 속에서 옛날과 지금을 이어주던 천 년의 세월을 보낸 소나무를, 지금의 우리는 흔적만을 볼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가 아니 어떤 사람들이 이 나무를 너무나 사랑하여 천년을 살게 했으나 그들의 사랑으로 조차 나무의 생명을 더 이어지게 하는 것은 어려웠구나. 



- 창
어두운 방안에 빛이 들어오고 손 때가 묻어 까맣게 되고 만 기둥들, 꺼끌꺼끌한 다다미. 사람들이 그 위를 걸어다니는 소리. 이끼 낀 정원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또 하나의 눈꺼풀을 감는다. 
눈꺼풀 뒤에 있는 방, 자리에 앉아 어딘가에 있는 창문을 연다. 볕이 충분히 들어오도록. 
나는 한참을 창 앞에 서서 소리를 듣는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언제인지 모를 녹색의 계절들이 스치면, 이윽고 충분하리만치 볕이 들어온다. 빛을 받은 사물의 윤곽선들은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한다. 색은 더 진해지고 형태는 더 분명해진다. 사물들은 따뜻해져가고, 그 직선과 곡선의 모든 형태를 더 날카롭게 빛내는 것도 잠시. 무너져내린다. 흐트러진다. 
먼 곳 하얀 모래의 별이 모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부드럽게 가라앉는 것 같다. 나는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색도 윤곽도 모두 그림자가 벌인 행위임을. 빛이 오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녹아없어지는 형태들. 밤이 오길 기다린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야 말로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인식 안에서 존재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혹은 우리 유인원 류는 두 가지 사건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으로 인식하는 사고-인과-를 발명해냄으로서 서사와 논리를 만들어냈다.

 어째서일까, 좀처럼 글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토마토 스프를 끓이고 빵을 버터에 발라 구워먹었고 미드를 한 시즌 통채로 보고 나니 그제서야 뭔가를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담배를 필 줄 알았다면 글을 시작하기 편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나의 동료 일반 인간들, 혹은 유인원들의 사고체계와는 다르게 이 글은 논리적인 서사가 없다. 

 17년 5월 31일 부터 6월 7일 까지 홋카이도를 여행했다. 올해로 3년 째, 초여름에 홋카이도를 여행하고 있다. 이미 길고 긴 홋카이도 여행기를 쓴 적이 있기 때문에 굳이 여행기를 쓸 필요는 없겠지만, 나중을 위해 간단한 메모를 써서 남기려고 한다. 친구는 이번에는 음식에 대해서만 정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는데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 전과 같이 플레이 리스트와 먹을 것에 대해서 정리하겠다.

- 프롤로그
 여행의 주제가는 Codes In the Clouds <Where dirt Meets Water>였다. 여행 중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이다. 이지리스닝에 가까운 곡(뭐라고? 이지 리스닝을 뭘로 보는거야) 이고 실은 어느 곳에 있어도 듣기에 알맞은 노래였다. 무섭도록 홋카이도의 어느 곳에서도 잘 어울렸다. 아마 아이누 민속 체험을 할 때 들었어도 좋았을 노래이다. 문과생의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지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노래의 제목이었다. 

 그 다음은 Kyte <Boundaries> 낮은 선율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같은 가사가 반복된다. Hear Silence choking you, Listen to the World. Run away speaking true, Break down in the cold. 라고. 맙소사 가사가 왜 이래. 하고 계속해서 들었다. 홋카이도에 있을 때는 항상 세상의 끝을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끝을 바라보는 것은 내 나쁜 습성인지도 모르겠지만 홋카이도에서 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그 어떤 경계를 넘어선 듯한 느낌이다. 네 물론 동네 마다 24시간 편의점이 있는 섬에서 그런걸 느끼다니 자의식 과잉은 확실합니다.

 여행 내내 별 심각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변을 흘끔 거렸고 그렇지 않을 때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문제다.

- 오타루의 플레이 리스트
 이 곳에 마을이 생겨난 것은 1596년, 1800년대 초의 홋카이도 개척 초기에만 해도 오타루는 삿포로보다 훨씬 커다란 홋카이도 제2의 도시였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와 고풍스러운 일본은행 건물,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있는 회관들. 모두 좋았던 오타루를 보여주는 유산이다. 지금이야 삿포로의 위성도시에 관광업으로 유지되고 있는 작은 거리가 되었다. 물론 도시 자체의 활력도 많이 줄어들어 오후 6시가 되면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고 거리에선 사람들이 자취를 감춘다. 아무리 비성수기의 거리라지만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나 신나던지!


 숙소가 보통 오타루라고 얘기하는 오타루 운하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오타루 짓코였기 때문에 항상 산책을 하며 왔다갔다 할 수 있던 점은 좋았지만 홋카이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황폐한 곳이 군데군데 있었다. 뉴욕의 힙스터들 한 떼가 몰려들어서 이제부터 갤러리를 열겠다고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거리는 결국 사람의 흐름, 아무리 관광지가 되어 유지가 된다고 해도 그 거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정한 흐름이 도시를 성장시키고 유지시킨다. 오타루가 관광지로서의 매력을 얼마나 유지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이 곳에서는 오타루 짓코의 보트 선착장을 바라보며 Glenn Gould 가 녹음한 Bach BMW 988, Bach BMW 1048 을 들었다. 그냥 바다를 보면 바흐를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보통은 그냥 사무실에 있을 때 듣고 싶어집니다만 네...그냥 좋아해서 들은 거 로군요. 겨울 바다도 아닌데 슈베르트나 쇼팽을 들을 순 없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겨울에 여길 왔다면 블루스를 들었겠지 싶다. 밝고 명랑한 Analogfish <Baby soda pop>은 어떨까? 오타루 짓코의 밤 풍경은 멋지다. 그리고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몹시 낭만적인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 오타루의 거리
 나는 홋카이도 여행을 가는 사람들에게 항상 오타루는 여행의 마지막에 배치하도록 권유하는데, 보통은 말을 듣지 않는다. 삿포로에서 너무 가깝기 때문에 무심코 오타루에 먼저 가게 되는게 아닐까 싶은데 하여튼 오타루는 홋카이도 3대 과자 대장인 롯카테이, 르타오, 기타카로가 거리 하나에 모여있기도 하고 오르골 공방 등 도 있어서 자칫 잘못하다간 세일만난 비단장수 처럼 봇다리 단위로 쇼핑을 하게 될수도 있다. 더 안 좋은 경우는 오타루에서 잔뜩 산 과자를 홋카이도 여행 내내 다 먹어치우고 출국하기 전에 한 번 더 사는 것이다. 당신이야 말로 오타루 지역 상권의 수호자이십니다.

 특히 르타오는 (이번 여행에서 깨달은거지만) 이름부터가 오타루(おたる)의 애니그램 (オタル->ルタオ)이라서 그런지 도시 전체에 아주 각양 각색의 컨셉의 르타오 지점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들 6시 전에 문을 닫았다 어쩌란 말인가) 수공예품과 디저트를 좋아한다면 오타루는 정말 개미지옥 같은 곳이다. 내가 추천하는 곳은 오르골 공방과 캔들 공방 정도. 특히 캔들 공방은 해외의 희귀한 캔들이 많아서 항상 공부하겠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르게 된다.

 다양한 경로로 미스터 초밥왕을 읽은 한국인에게 오타루의 먹을거리라면 역시 스시인데, 초밥 거리가 있을 정도로 스시가 유명한 오타루에서 기대한 만큼 맛있는 스시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생선의 신선도가 아주 뛰어난데도 실제로 스시로 먹어보면 기대한 만큼 맛있지 않다. 아니 어째서 이 곳은 쇼타의 고향이 아닌가.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도 오타루의 스시에 대해서는 기대가 높지 않았는데, 친구의 추천으로 스시집 ㅋ의 오마카세를 시켜보고 그냥 내가 스시를 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스시를 꽤나 먹어봤다고 해도 내가 스시와 스시의 재료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스시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초밥을 쥐는 요리사. ㅋ에서 스시를 먹은 후 뛰어난 재료를 선택하고 기술을 다해 만들었을 때 스시가 정말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맛있는데 인당 오천엔 오마카세라니, 인류에게 재능을 기부해서 다음 생에 진짜 좋은 걸로 태어나시려고 그러는 걸까.일본어를 모르면 예약도 주문도 안되는 시스템인데(예약할 때 오마카세로 할 것인지 다른 요청이 없는지 물어본다) 스시를 먹다 보니 중간에 예약없이 중국인 청년이 식사가 가능하냐고 물어보러 들어왔다. 거절하시는걸 보고 딱 예약 받은 만큼만 재료를 준비해두신다는 걸 깨달았다. 과연... 그리고 이 년 전에 예약 없이 ㅇ스시집에 갔다가 거절당했던 기억이 나서 왠지 유쾌해졌다.

 가장 맛있던 것은 광어 같은 기본적인 재료였는데, 사장님께서는 도키사케(홋카이도의 자연산 연어이다)같은 걸 더 맛있다고 생각할거라고 생각하셨는지 좀 시무룩해 하셨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일본의 오래된 도시는 항상 그렇듯이 소바가 맛있었다. 오타루에서 스시를 못 먹겠으면 그냥 소바를 먹는게 좋을 것 같다.


- 샤코탄, 바다와 하늘과 카무이미사키
 샤코탄은 오타루의 서쪽에 있다, 비쿠니 같은 어항도 있지만 바다에 맞닿은 산으로 이어진 지역이라 교통이 불편하다. 샤코탄에 가는 길의 버스에는 나 말고 세 명 밖에 손님이 없었다. 제복을 입은 운전기사가 모는 버스는 조심스럽게 시골길을 달렸다. 해변을 달리다 나무로 만든 집이 가득한 마을에서 방향을 돌려 산 위를 오른다. 샤코탄은 산과 바다가 맞닿은 곳이다. 가는 도중에 내가 먹은 체리 냄새가 났고 길가에는 작약도 패랭이도 아닌 보라색 꽃이 잔뜩 피었다. 오르막 길 옆 산 속에는 야구장이 있고 그 너머의 숲은 푸르렀다.

 비가 왔기 때문에 카무이미사키를 갔지만 오래 체류하지 않았다. 바다가 아름다웠지만 기후에 따른 영향이 커서 날씨가 맑은 날에만 샤코탄이 자랑하는 "샤코탄 블루"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바람이 조금만 쎄도 위험해서 올라가는 길을 폐쇄한다고...
그도 그럴 것이, 1900년대 초반에만 해도 카무이미사키의 등대에 살고 있는 등대지기 일가가 해변의 길을 건너 등대로 가다 사고를 만난 적이 있었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이 곳에 있는 염불터널은 위에 나온 등대지기 가족의 사고 이후 만들어진 터널이다. 양쪽에서 파기 시작했지만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염불을 외우면서 서로 방향을 맞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안 쪽에서 두 번이나 꺾이는 동굴이 되었다.(지금은 폐쇄된 곳이다)

 여러가지 전설이 있지만 사실 바다의 끝에 닿은 카무이미사키의 아름다움에 어울릴 정도로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다. 어떤 이야기도 이 곶보다 아름답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갈대가 핀 언덕을 오르면 곧 관문이 보이고 그 뒤로 곶이 보인다. 관문 뒤로는 보이는 것은 하늘과 바다.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고 그 발판은 몹시 좁았다. 분명 끝까지 올라가면 스크롤이 올라가고 엔딩이 나왔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 엔딩을 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중간에 돌아왔다. 카무이미사키 끝까지 가 보신 분은 알려주세요 엔딩 나오던가요.

 여기서는 아무 노래도 듣지 않았다. Death cap for cutie <I will Follow you into the Dark>를 들었으면 어떨까 싶다. 돌아오는 길에는 Arizona <Oceans Away>를 들었다. 버스의 창으로 빗방울이 부딪히고 거칠어진 바다가 아름다웠다. 지금 생각하면 이현우 10집의 <마취>도 괜찮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 삿포로의 샌드위치
삿포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썼다. 특히 몇 번이고 길을 잃고 있다는 얘기를 썼는데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길을 잃었다. 더 이상은 슬퍼서 쓰지 않겠다.
친구가 삿포로는 샌드위치가 맛있다고 했을 때 나도 샌드위치라면 환장하는 몸이지만,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한국에 오면 "닭한마리"를 먹는데 나는 그런 걸 먹어본 적이 없다. 그냥 한국인 블로그에서 돌아다니는 정보인가 하고 생각했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홋카이도의 노포 카페인 ㅅ에서 먹은 샌드위치는 엄청나게 맛있었다. 계란 샌드위치와 가츠 샌드위치는 나도 워낙 좋아하다보니 자주 먹었는데 이 곳의 샌드위치는 진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이 단연 이제까지 먹었던 모든 계란 샌드위치 보다 맛있었고 같이 시킨 후르츠 샌드위치는 소박 단순하나 대단한 맛이었다. 아주 신선한 부드러운 촉감의 하얀 빵에 신선한 제철 과일을 넣고 빵의 부드러운 식감에 지지 않는 살짝 단 신선한 크림을 넣으면 완성되는 샌드위치다. 내가 너무 신선함과 부드러움을 남발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먹어보면 알 수 있다 소프트 앤드 신선데쓰.

 오도리 공원 벤치에 앉아서 울면서 먹었다. 다음에 홋카이도에 가게 되면 꼭 다시 먹으리라.

 그러고보니 친구가 추천해준 홋카이도의 먹거리는 모두 다 맛있어서 이런 것이 재능의 차이인가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친구는 홋카이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면서 "이거 맛있을거야"하고 추천해준 것이다. 그 때의 나의 마음은 서울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홋카이도처럼 맛있는 후르츠 샌드위치는 만들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을 때의 감정과 비슷했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질투한 것처럼 질투가 났다.

 삿포로를 떠나면서 들은 노래는 신나는 락 음악인 Jimmy Eat World <The Middle>과 Gnash <I hate u, I love u> 좀 복잡한 심정이었다는 걸 밝혀둔다. 노래를 그닥 열심히 듣지 않았기 때문에 라인업이 거의 비슷비슷하다.


- 도야호
 여행 중에 마지막 까지 고민한 루트가 바로 이 도야호로 가느냐 아니면 니세코로 가느냐 였다. 렌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삿포로까지 송영버스를 보내주는 도야호로 가게되었다고 합니다. 보고 싶었던 요테이 산은 버스 안에서 볼 수 있었다. 도야호로 가는 길과 도야호에 도착해서까지 생각이 이것저것 많아서 복잡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 여행이 힘들어진다.

 하지만 도야호의 리조트에 도착하고 호수를 한 바퀴 걷자 많은 것들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용기가 생겼다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는 아름다웠다. 체류한 2박 동안, 호수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는데 전혀 질리지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의 거칠어진 호수도, 다음 날 나카지마에 다녀와서 낮잠을 자며 보았던 호수도, 날이 흐려져 수묵화로 그린듯했던 호수도. 그리고 매일 밤의 불꽃놀이와 비오는 하늘 아래서의 온천을 하며 보는 호수도 좋았다. 맑은 날이면 호수 너머로 요테이 산이 보였다. 분명 누군가는 산을 보고 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당신을 떠올렸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숲을 올라 꼭대기에서 공터를 걸었다.
 비가 오는 산을 올라 꼭대기에서 구운 계란을 먹었다.

 이렇게 이틀 밤을 보냈다.

 이곳에서 주로 들은 곡은 Olafur Arnalds <Near Light>, Douglas Dare <Swim> 이다. Arnald의 노래를 이지 리스닝의 부드러운 곡이지만 Swim은 불안하고 슬픈 곡이다. 날씨가 안 좋을 때 도야호는 먹물로 만들어진 세계처럼 변한다. 우리가 호흡하는 것이 공기가 아니라 물로 만들어진 무언가고 저 하늘은 우리가 알기 전에 물에 잠긴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나는 너무 많은 물을 보면 두려워진다. 그래서 이런 곡을 들었던 것 같다.

- 도야호 온천 리조트의 식사
 온천 리조트의 식사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온천 료칸의 식사라고 하면 좀 환상을 가지고 있겠지만, 혼자서도 씩씩하게 료칸을 잘 가는 저는 거기에 환상이 없습니다. 맛있는 곳은 맛있고 맛 없는 곳은 맛없지만 가격은 평등하게 비쌉니다. 그래서 의외로 온천 료칸과 리조트의 식사는 신경써서 고르는게 좋다. 굳이 고르자고 하면 리조트 쪽을 더 좋아하는데, 식사가 망할 가능성이 적고 온천 탕이 다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에 묵었던 ㄴ리조트의 식사는 훌륭했다. 부페의 퀄리티는 그냥 먹을만하지 싶었지만 따로 주문하였던 가이세키 석식/조식은 둘 다 수준급이었다. 가이세키 요리를 시키면 꼭 전반부에 사시미가 나오는데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막판에 나오는 튀김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시미도 튀김도 단독으로 먹을 때 훨씬 맛있다.

 실은 내가 일본에서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얀 쌀밥과 밥반찬. 절대로 부페로는 나올 수가 없는 맛이다. 야채 요리를 먹으면 그 지역의 음식문화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밥과 함께 오이절임 같은 걸 우물우물 씹고 있노라면 일본여행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국그릇에 뚜껑을 열고 국을 마시고 우물우물 밥을 씹는다. 정말로 잘 먹었습니다 하는 인사가 나온다. 물론 제가 이번에 먹은건 음식이 나오기 전에 전체 코스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요리장의 도장까지 찍히는 그런 가이세키였습니다. 미안합니다. 하나도 안 소박해.


- 비에이의 거리
홋카이도에 왔을 때 한 번도 비에이를 빼먹은 적이 없다. 아름다운 언덕과 그 바람들을 잊을수가 없다. 이번에도 청의 호수(아오이이케)에 다녀왔는데 비도 오고 성수기도 아닌지라 사람이 나 외엔 딱 두 명 밖에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듣고 있는 곡은 Olafur Arnalds & Nils Frahm <Life Story>이지만, 비에이에서 계속 흥얼거린 노래는 Beatles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Yellow submarine>이다. 그 외에 자이언티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선곡하는 재주는 없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구릉을 넘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푸른 언덕을 넘어서 바람이 불고 멀리 나무가 보이는 곳에 올라오면, 나는 이 곳이야 말로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곳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을 생각하면 머릿 속 어딘가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 비에이의 야채
 이번에 먹은 것은 만날 가서 먹는 대중식당 ㅈ의 튀김덮밥과 레스토랑 ㅇ의 요리.
한국인에게 너무 잘 알려진 것이 틀림없다. ㅈ에 들어갈 때는 한 무리의 붉은 등산복 한국인들이 있어서 압도당하고 말았으나 변함없이 맛있었다. 물론 큰 소리로 가게에서 떠드는 사람들 덕분에 피곤해졌다. 도대체 왜 본인들이 무리지어 있으면 좀 시끄러워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달리 생각해보면 한국인 등산객(등산객이 아닐수도 있다, 그냥 등산복을 입었을 뿐이다) 한 무리가 있는데 조용하다면 그거대로 무서울 것 같긴 하다. 

 먹는게 정말 즐거웠던 것은 역시 레스토랑 ㅇ의 요리. 특히 야채요리는 아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요 싶을 정도로 맛있었는데, 풍요로운 비에이의 밭에서 자란 야채인만큼 삶고 끓여서 그릇 위에 올려놓은 것만으로도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알고보니 얼마 전에 미슐랭에 새로 등재되었다고, 비에이에는 미슐랭에 등재된 가게가 둘이나 있는 셈이다. 한 곳은 프렌치, 다른 한 곳은 이탤리언이다.

- 후라노의 멜론
 (달리 쓸 곳이 없어서 비에이 부분에 쓰는거다) 내가 좋아하는 멜론은 후라노에서 판매하는 칸탈로프 멜론인데, 이제까지 유바리시에서 재배하는 유바리 멜론과 같은 종으로만 알고 있다 아무리 먹어봐도 맛이 달라서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유바리킹멜론은 스파이시 칸탈로프와 얼즈페이버릿을 교잡한 종으로 일반 멜론에 가까운 맛과 식감이 특징이라고 한다.
실은 후라노의 멜론이 유바리보다 수확철이 좀 늦기 때문에 이번에는 먹지 못했다. 홋카이도의 멜론 하면 유바리를 떠올릴 정도로 일본인의 유바리 멜론 선호도는 절대적인 것 같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보수적인 유바리 멜론보다는 부드럽고 진한 후라노의 레드퀸 품종이 좋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홋카이도의 멜론 얘길 하면서 후라노의 멜론이라고 정확하게 적지 못한 것에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 다음에 여름의 홋카이도를 방문하게 된다면 더 열심히 후라노의 멜론을 먹어줄 생각이다. 굳은 결심을 한다.


- 삿포로의 스프카레
 역시 스프카레라고 하면 야채인가. 이번이 스프카레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것 같은데 항상 고기투성이의 녀석을 먹다가 이번에는 야채 위주의 녀석을 먹었더니 즐거웠다. 꼭 겨울밤 땅에 묻어놓은 야채를 꺼내다가 자 스프 해먹자 하고 호호 불어가며 먹는 느낌이다. 홋카이도 대학 앞의 스프카레 집이었다. 국적불명의 인테리어에 딱히 인도 같지도 않고 네팔 같지도 않은게 맛은 일본풍이었다. 왜 이런 집이 맛있는 걸까. 한국에서 이런 디스플레이의 집은 100%의 확률로 맛이 없다. 

 홋카이도는 치사하다 고기도 싸고 맛있는 주제에 야채도 싸고 맛있다. 한국은 어차피 농산물시장 개방할거면 쌀 농사 말고 밭 농사 위주로 구조를 바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맛있고 신선한 야채는 항상 수요가 있다. 이미 망한거 어쩔수 없긴 합니다만 아쉽다.

- 삿포로의 징기스칸
 이번에 와서 안 건데, 징기스칸도 여러가지 스타일이 있었다. 처음 징기스칸을 먹은게 아사히카와, 그리고 그 다음이 다루마 - 둘 다 비슷한 한국식 고기 요리이다. 판 위에 야채를 깔고 양고기를 먹지만 소스 같은 것은 올리지 않는다 - 였기 때문에 꼼짝없이 징기스칸이란 양고기를 한국식으로 먹는 요리이다. 하고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새로 가본 마츠오의 징기스칸은 탕이 있었고 그 외엔 양고기와 야채 위에 소스를 뿌린다. 그리고 그것은...불고기 양념입니다. 어찌 되었든 한국식 고기 요리였습니다. 취향인 쪽은 다루마 같다 아무래도.

- 마지막, 소프트 아이스크림
 공항에 내려서, 그리고 공항에 돌아와서 르타오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훌륭한 맛이었다.
여기에 쓰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여행 내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계속 사먹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일 훌륭했던게 바로 이 공항에서 먹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었다. 왜 이 곳의 소프트가 맛있는지야 100개도 넘는 이유가 있겠지만, 소프트크림을 먹으며 이 여행을 오게되서 잘 되었다는 생각했다. 

 홋카이도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그것은 홋카이도에 오는 아주 훌륭한 이유가 된다.


- 에필로그
에필로그 곡을 고르는게 쉽지 않다. 어쩐 일인지 여행 중에 한 번도 듣지 않았던 노래를 고르게 된다.
밝고 명랑한 락인 The Charlatans <So Oh>, Kleerup <With Every Heartbeat> 그리고 (나에겐) 항상 홋카이도를 기억하게 하는 John Butler Trio <Young And Wild> 이 정도가 좋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한다면 여행 도중에 저스틴 비버의 <What do you mean>을 꽤 들었다. 좀 복잡했던 것 같다.

 굳이 추가 한다면 한 곡을 더 추가하고 싶다. Aaron Carter <Sooner or later>란 팝 음악이다. 이 글을 고치면서 이 곡을 들었다.

"빠르든 늦든 그녀는 시카고로 떠날거야, 빠르든 늦든 그녀는 가버릴거고, 나는 그녀에게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해"

 이 노래는 결국 용기에 대한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용기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다.


 지난 1월 여행 후 나는 반성이 없는 삶의 훌륭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몇 년 간 나는 계속해서 고민-꼭 다른 생에 있었던 일처럼 멀고 먼, 그러나 아직도 나와 같이 있는 그런- 하고 있는 것이 있고 나는 그 고민이 어떤 형태로도 해결 될 수는 없으나, 어딘가에 그에 대한 답, 혹은 보답이 있을거란 희망을 갖고 있다.

 여행 중에 문득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과거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미래는 오지 않았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연속 선상 어디에 우리가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건은 계속해서 과거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인과와 순차적인 사고 방식-서사-의 노예이길 거부한다면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총합이 현재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에 의해서 과거가 선택적으로 기억되어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기억이 바로 과거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 쯤의 좌표에서 당신의 인생에 놓이게 될까. 

 우리가, 우리를, 어디서부터 우리라고 여기고. 어느 시점에서 드디어 만났노라고 말 할 까.

17년 6월11일의 글이다.


이것은 딱히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후배는 이번 대선 때 이민 일정이 맞물려서 투표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송별을 겸해 밥을 먹는데 (투표를 할 수 있어도) 누구도 뽑고 싶지 않다는 얘길 담담히 했다. 후배는 모 당의 유력후보 중 한 명을 공개 지지했으나 그 후보는 최종 대선 후보는 되지 못했다.

결국 대선 후보가 된 그 후보의 지지자들에 대해서 그런 비열한 사람들이 승리에 도취되는 걸 보고 싶지도 않다. 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도 했다.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 같다. 누군가 정치인을 선거 등에서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후보가 말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가까운 사람들 마저 후보보다 당신을 먼저 공격하고 자못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 하게 설교를 한다. 실수를 하지 않아도 각종 네거티브에 시달려야 한다. 

선배, 그 사람을 지지한다고 한 후에 들을 생각도 없으면서 그 사람을 왜 지지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세요? 라고 말했다. 수고했다고, 공개적으로 누굴 지지한다는 것은 용감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걸로 후배가 기분이 풀렸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용감한 행동이다. 아무래도 나같이 무기력한 인간보다는 누군가를 열렬히 지지하고 사회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를 움직이는게 아닌가 싶다. 부정할수 없다. 우리가 피드백을 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는 요구하는 자들의 이끌림에 의해서 움직여나가고 형성되어 왔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다양한 요구와 의견을 반영하는 것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사회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런 열렬한 지지자들이 꼭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지지자를 지닌 정치인이 있을 때 그를 지지한다고 해서 모두 완전히 동일한 의견을 가질 수는 없다. 정치인이란 결국은 "챔피언"이고 더 많은 의견을 수렴하여 한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일수록 더 큰 영향력을 지닌 정치인이 된다. 수렴과 발산, 모순된 속성을 가진 이 정치인과 지지세력 사이의 균형을 우리들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정치인 그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비극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 속에서 탄생했다. 크게는 수많은 전쟁들 이고 작게는 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후배에게 상대 후보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욕을 퍼부은 사람들일 것이다. 아니 작지 않다. 나에겐 충분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나는 나같은 무기력한 부동층에게 한가지 제안하고 싶은게 있다.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어떤 특정한 이유, 그러니까 계층이라거나 특별한 정책 때문에 그 후보를 꼭 지지하고자 마음 먹은게 아니라면 나는 감히, 그러니까 감히 쉽게 누군가를 지지하지 않을 것을 권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당신 스스로가 선거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100%동일한 관점과 정책을 지닌 후보는 누구도 없다.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하며 짜잔 놀랍겠지만 선택을 하려면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건 Trade off를 통해 균형을 맞춰서 최상의 점수를 지닌 대안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안다, 귀찮은거. 그냥 우리 고향 사람이니까 하는 식으로 선택을 해버리면 간단하다. 당신이 가장 알기 쉬운 것 예를 들어서 국가관이나 안보관 같은 걸로 재빠르게 선택을 해버리고 TV토론을 할 때 축구경기를 하는 식으로 응원하고 투표소에 가서 딱 손 털고 투표 결과를 보는거, 그거 얼마나 쉽고 신나는가. 만약에 당신이 뽑은 후보가 당선이라도 되게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투표 인구가 4천만명 정도 되는데 당신이 누구한테 찍든지 당신의 표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사표인데 뭐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야하는가.

나는 명확한 도덕기준을 지니고 -반드시 투표하는- 침묵하는 부동층이 우리 사회를 더 낫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수는 30%까지도 필요 없다. 단지 15%만이라도 좋다. 단독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끝의 끝까지 선택을 유보하는 그런 부동층이 필요하다. 우리의 일부가 부도덕한 선택을 할 때, 명확하고 발전적인 기준을 원칙으로 삼아 선택을 하는 그런 부동층 말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SNS에서 도덕적인 뭐시기의 시기에 중립이나 지키는 놈들은 지옥불에 타버릴 것이다 라는 위협을 들어도 하아? 하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그런 태평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보다 악마에 가까워서 지옥불 쯤이야 뭐, 하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가 있다면, 나라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정체를 알수 없는 정치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지지층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만들 것이고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TV토론에서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않도록 참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정치인들의 열혈지지층이 서로를 비난하는 것을 자제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한다. 봐 우리가 싸우고 있는 사이에 저기 지옥불에 타고 있는 관중들이 눈썹을 찌푸리고 있어. 하고 말이다.

나는 진보를 원한다. 인권이 더 많이 보장되고 더 많은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를 얻고 능력에 따라 소득을, 그리고 그 능력은 정확하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존권은 나라가 보장해주는 권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경제적 성장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성장을 이루어야 하며 그것이 우리나라가 이 별의 구성원 중 하나로서 이룩해야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좀 더 애매모호한 지역에 나 자신을 두고 싶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이든 완벽하게 도덕적일 수 없으며, 우리가 너무 빠르게 선택을 해버리면 더 나아질 가능성을 빼앗기는게 아닌가 의심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최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17년 4월 24일, 대선을 어 며칠이지 얼마 앞두고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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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1월 21일부터 1월 29일까지 있었던 일본여행의 정산을 마쳤다.

누구에게 돈을 주거나 할 필요는 없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혼자서 정산을 하고 반성을 한다.아무런 반성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깔끔하고 단정한 것으로 변할까.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반성이 없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우리는 전혀 나아짐이 없이 어린이 만화동산에 나오는 동물들처럼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살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이번 여행은 여행기를 안 쓰게 될 혹은 부분 부분의 감상기만을 쓰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플레이 리스트로 여정을 정리해두려고 한다. 평소에는 플레이 리스트를 준비하고 여행에 갔지만 이번 여행은 좀 급작스럽게 갔기 때문에 현지에서 노래를 찾아서 하나하나 들었고 개중에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못들은 노래도 많다.

어떤 상황에서 어울리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바람이 부는 나오시마의 바닷가에서 혹은 고야산의 눈내리는 밤 오래된 절방에 앉아서- 음악을 듣는 것.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번 여행에서는 음악을 그닥 많이 듣지 않았다. 가끔 어떤 음악보다도 여행지에서 들었던 소음들에 대한 기억이 나를 위로할 때가 있다.

이번 여행의 가장 명확한 주제가라고 한다면 San Holo의 "Light"일 것이다. (웃기지도 않지만) 여행 중에 이 곡은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갔다온 후의 1주일 동안 내내 이 곡을 들었다. 나는 이번 여행으로 무엇을 바랐을까. 

San Holo - Light

https://www.youtube.com/watch?v=ULHeRdgeT54


#추가

글을 다 쓴 다음에 깨달았지만, 링크가 아닌 소스코드로 연결시킬 경우 저작권 위반이다. 곡을 듣고 싶으신 분은 알아서 링크를 복사하시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작업 다 해놓고 다 지웠다. 무의미한 노가다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1) 출국, 새벽

새벽 4시, 밤을 새다시피 하며 나와서 캐리어를 끌고 버스에 탔다. 종일 피곤했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미친 아저씨처럼 중얼거리고 방향을 자꾸 틀렸다. 공항에서는 전직하신 부장님을 만났는데 둘 다 피곤에 절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항의 커피샵에 멍하니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는 금방 서로 갈 곳으로 가버렸다. 도대체 이 여행을 왜 가는건지, 왜 거기에 가겠다는 건지 나로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닥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래의 4곡은 아이폰을 플라이트 모드로 바꾸기 전에 급하게 애플 뮤직에서 찾았던 곡이다. 그렇다, 저 중에서 모임별의 곡은 애플 뮤직에 없다. 그래서 히로시마 공항에 도착 후 유투브로 노래를 찾아 들었지만 왜 이게 그렇게 듣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Coldplay - Fix You

https://www.youtube.com/watch?v=k4V3Mo61fJM 


모임별 - 영원이 시간을 관통하는 그 순간 나를 보지 말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9HO08GwRMG0


P!nk - Just Give Me A Reason ft. Nate Ruess

https://www.youtube.com/watch?v=OpQFFLBMEPI


Lukas Graham - You're Not There

https://www.youtube.com/watch?v=IC-bSbXZBcU


(2) 히로시마, 후쿠야마, 오카야마(쿠라시키 미관지구)

히로시마는 전에도 "거대한 영등포"라는 감상을 피력한바 있는데, 미야지마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등포. 이번 여행에는 뜻하지 않게 비중없는 조연 정도의 위치에 머물렀는데 16년에 히로시마 풍 뎃판야끼 먹다가 체한 것은 절대 잊을 수 없다. 언젠가는 복수하러 가고 싶다.

이번 여행의 세 개의 목적지 중에 하나였던 쿠라시키. 후배는 이 곳에 대해서 "커다란 전주 한옥 마을이지요"라고 얘기 했는데 그 말에 100%동감하지만 동시에 이 곳이 어떤 우아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 없다. 관광객들로 들끓으면서도 도시의 벽들이, 운하의 물들이 단단함을 가지고 존재했다. 우습게도 구라시키 시 자체는 일반적인 일본의 중소도시로 역에 내리는 순간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평범하다. 단지 구라시키 미관지구와 오하라 미술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로 아름다운 곳이 되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게도 찬란하게 빛나다가 쇠락한 도시가 주는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로서의 매력은 후쿠야마시가 더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공통적으로 히로시마에서 카가와에 이르기 까지 모든 도시가 조용한 우아함을 가지고 있다. 후쿠야마에서 겪은 교통정체 조차 뭔가 의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는 Dusko Goykvich의 곡 중 "The Fish"를 주로 들었는데 유투브에서 찾을 수 없어서. 하기 전체 앨범의 링크로 갈음한다. 

(실은 듣다 보니까 멈출 수가 없어서 이 앨범을 글 쓰는 내내 읽고 있다)


Dusko Goykovich - Samba Do Mar

https://www.youtube.com/watch?v=NCk1TrwVgAA


지금 생각해보니, 구라시키의 운하를 보면서 이 노래를 들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을의 코스모스와 좋은 여행을

山口百恵 秋桜コスモス

https://www.youtube.com/watch?v=89HBcy08960&list=PLREXMY7xQwKlyeUlpwptZ9KJ3_24Dlqw4


山口百恵 いい日旅立ち

https://www.youtube.com/watch?v=Dgv3vNdRVfU


(3) 오카야마(고라쿠엔)

오카야마를 상징하는 것은 오카야마 성과 고라쿠엔이며 이 지역에 가장 특징적인 것은 데님 소재의 직물들이다. 오카야마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세련된 도시였다. 전에 고베가 상상했던 것보다 근엄했던 도시였듯이 말이다. 화려한 조명이나 활기차게 들리는 음악 같은건 여기엔 필요 없어요. 하고 "거리"자체가 말을 하는 느낌이다. 나는 어쩔수 없이 여기서도 재즈를 엄청 들었는데 실은 나에게 재즈는 우아하거나 세련된 이미지가 아니라, 후회와 불안정함을 드러내는 이미지이다. 예전을 되돌리려는 듯이 클래시한 옷을 입고 길을 나서도 전과 똑같이는 절대로 될 수 없다. 나에겐 그런 것이 재즈이다.

아래의 곡들은 고라쿠엔의 찻집에서 팥죽(젠자이)를 마시면서 나온 음악들을 사운드 하운드로 잡은 것들이다. 과연, 훌륭하군 하고 감탄했는데. 팥죽은 별로였다. 애기를 들어보니 원래 녹차원이라서 녹차가 맛있지 젠자이는 그저 그렇다는 듯. 아이고


João Gilberto - LP Amoroso

https://www.youtube.com/watch?v=b81ywX5cUmQ


Desafinado - Eliane Elias

https://www.youtube.com/watch?v=iGctJbPaCBI


(4) 카가와(나오시마)

여행의 목적 중 하나가 지추 미술관에 소장중인 모네의 수련 이었던만큼 좀 억지로 루트에 포함이 되었다는 느낌인데(구라시키의 오하라 미술관에서 연작 중 하나를 본 뒤에 역시 그냥 나오시마는 가지 말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겨울 바다의 섬치고는 따뜻했고 역시나 겨울바다의 섬답게 미친듯이 바람이 불었다. 트위터에다가도 적었지만 이번 여행 중 가상의 여자친구와 동행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12번 차였고 그 중에 8번을 나오시마에 관련해서 차였다. 좀 명랑하려고 락 음악을 들으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대 실패였다. 바람 소리를 듣는게 더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세토 내해의 겨울은 맑았고 밝았다.

나는 자전거를 몰고 산길을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가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해변에 내려왔다. 바람이 불었고 저기 어딘가에 해가 떠있었다.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간절하게 바다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Maroon 5 - Don't Wanna Know

https://www.youtube.com/watch?v=ANS9sSJA9Yc


The Chainsmokers - Closer (Lyric) ft. Halsey

https://www.youtube.com/watch?v=PT2_F-1esPk


내가 너무 멀리 가버리기 전에 내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지만. 하고 중얼 거렸다.


(5) 카가와(다카마츠), 도쿠시마(도쿠시마)

도쿠시마에서 새벽3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첫 페리를 타러 갔다. 그 때는 Olafur analds의 "Island Songs" 앨범을 계속해서 들었다. 뭐 여행 내내 이 앨범이 거의 주제가라도 되는 양 짧게 짧게 이동하면서도 계속 들었지만. 이 앨범이 가장 어울리는 순간이 바로 이 때였을 것이다. 새벽이라 승객은 나 말고 여섯 팀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같이 탄 젊은 어머니. 간이 식탁에서 도시락을 먹던 남자. 구석에 앉아 바로 잠을 자던 사람. 나는 음악을 들으며 무언가를 그리고 쓰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깨어나보니 해가 떠있었고 와카야마에 도착해 있었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Ólafur Arnalds - Particles ft. Nanna Bryndís Hilmarsdóttir

https://www.youtube.com/watch?v=wEj7xYyj9n4


Ólafur Arnalds - Doria

https://www.youtube.com/watch?v=wFp6xnJbs0w


(6) 와카야마(고야산)

내가 장담하건데, 와카야마의 고야산이야 말로 블루스가 어울리는 땅이다. 전세계에서도 손꼽히게 블루스 땅이다. 물론 아무도 블루스를 안 들을 것 같긴 하다. 이 시기(1월)의 고야산은 눈이 많이 내리고 춥기 때문에 일본인은 앵간 해서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고야산의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서양인이거나 동양인 관광객(나) 뿐이었다. 석양을 찍으러 다이몬에 갔을 때 일본인 관광객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을 정도다. 그 사람들 사진만 찍더니 차에 타고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블루스가 어울린다고 쓴거 치고 블루스를 안 들은 것은 눈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련다.


Anthony Hamilton - Do You Feel Me

https://www.youtube.com/watch?v=1in5wAVOyIk&list=PLb75VpbNymWVrgZkU47_70_HGGFSxAsN1&index=2

B.B. King - The Thrill Is Gone ft. Tracy Chapman

https://www.youtube.com/watch?v=xVxCtt3s_1M&list=PLWCJOLJ9si2lFFJ_3lh3d3j9LbgIuVIhK


오래된 사찰인 콘고잔마이지에서 템플 스테이를 했다. 고다츠와 이불을 깔아줬고 저녁은 유토후의 가이세키 요리였다. 절에서 한게 아닌듯 맛있었고 즐겁게 먹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다 방의 창을 여니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가. 소리가. 소리가. 소리가 내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Nujabes - luv (sic.) pt 3 [ft.shing02]

https://www.youtube.com/watch?v=UyoYf7rZVGI


오쿠노인으로 가는 산 길에서는 아무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곳에 가게 된다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산 그 길에는 오직 나 밖에 없었다. 입산 제한이 걸렸었거든. 착한 어린이는 따라하지 마세요. 저도 거기 스님께 자기 책임하에 가라는 허락을 받고 간겁니다.

긴 산 길에는 수많은 묘지가 있었다. 천녀에 걸쳐서 모인 묘지 들이다. 아주 오래된 것들도 새로운 것들도 있었다. 나는 묻는다, 어떠한 번뇌가 있든지 이 곳에서 풍상을 맞고 시간을 보내고 생각하고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다 보면 부처가 될 지도 몰라. 

길은 대답한다. 우리는 바람이 되고 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겨울이 되고 번개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따뜻함이 될 것이다. 우리는 흐름이 되고 우리는 빛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아아, 우리는 소리가 될 것이야. 하고 나는 말한다.


(7) 오사카(난바, 신사이바시)

오사카는 나에게 내내 이런 느낌이다. 오래 된 영상으로 젊은 여성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듣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과 같은 나이였다면 나는 분명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을텐데. 하고


Tina Charles - I Love To Love

https://www.youtube.com/watch?v=ug2P9o6di2k


실제로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짧은 기차에서는 놀런즈의 다음 노래를 들었다. 

찾아보니 놀런즈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80년대 초반 일본에서 개최된 국제 가요제에서 우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과연 80년대 일본이 추구 하던 어떤 아름다움이 놀런즈가 원조란 말이지.


The Nolans I'm In The Mood For Dancing

https://www.youtube.com/watch?v=4UZYXFgQnAo


(8) 교토

교토에 있던 3박 4일 동안 매일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첫번째 날엔 이나리 신사, 두번째 날엔 가모가와 델타에서, 세번째 날은 롯카쿠인의 벤치에 앉아서였다. 지루하지 않았다. 지루 할 수가 없었다.


PETIT BISCUIT - Sunset Lover

https://www.youtube.com/watch?v=wuCK-oiE3rM


haruka nakamura - Lamp feat.Nujabes

https://www.youtube.com/watch?v=cHQ-oVSYkeU


Luv(sic) Part6 - Uyama Hiroto Remix featuring Shing02

https://www.youtube.com/watch?v=FvcyZOVCORM&list=RDcHQ-oVSYkeU&index=7


이번 교토에서 방문한 곳은 차례대로 도호쿠지, 후시미 이나리, 도호쿠지(재 방문), 센뉴지, 기온, 교토 고쇼, 가모가와 델타, 도다이지였다.

3박 동안 교토에서 묵으며 많은 생각을 했고 혼자 매일 술을 마셨다. 돌아다니고 후회하고. 고민하고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했다.

내 삶엔 아무 것도 없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번 여행 동안 계속, 진실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했다. 나는 봄에 닿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토요일은 따뜻했다. 흡사 봄처럼. 삶처럼 아름다운 토요일이었다. 토다이지의 정원이 보이는 툇마루에 앉았다. 그림자가 드리우고 햇볕이 내 손등에 와서 닿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 처럼 깜짝 놀랐다. 토다이지의 각 사찰에는 토요일을 맞아 다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이가 든 부인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모여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시를 읊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나는 불룩하게 튀어나온 주머니처럼 그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만 누구도 나를 내쫓지 않았다.

나는 상냥한 목소리를 들었다. 봄이 나에게 말을 거는 소리였다. 타인이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서 상냥함을 느꼈다면 사랑을 느꼈다면 그것은 내 안에 상냥함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봄이 나를 찾아올 것이다. 봄이 그렇게 말했다. 당신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넌 내가 없어도 괜찮아. 하고 다시 없이 사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빛. 그것은 중력이었다. 아직도 나의 삶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봄이. 봄이 올 것이다. 


(9) 돌아오면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1월 11일에 발매 된 이 곡을 계속 들었다.

누구도 날 알지 못해 내 어머니 집의 피아노처럼은. 넌 내가 뭔갈 가지고 있다고 했지 어떤 사람들은 그걸 소울이라고 했어.

너도 알지만, 나는 떠났어 내 둥지에서 날아갔지. 그래도 나는 혼자가 아닐거야 내 가슴 속에서 최고가 뭔지 내가 돌아올 거란걸

그래 너도 알고 있지.


Sampha - (No One Knows Me) Like The Piano

https://www.youtube.com/watch?v=njHcZMLDdSc


지금 생각해보니 이 음악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Roosevelt - Moving On

https://www.youtube.com/watch?v=ruNW8MeR_tM


Marshmello - Alone

https://www.youtube.com/watch?v=YnwsMEabmSo


山下 達郎 - Tatsuro Yamashita - Ride on Time

https://www.youtube.com/watch?v=s19SzmIcFmU


위의 플레이리스트보다 더 많은 노래를 들었다. 간단히 더 쓰자면 찰리 푸스의 "We Don't Talk Anymore"나 라라랜드의 OST들, Seafret의 "Wildfire", 윤하의 "빗소리" 같은 노래는 틈틈히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언젠가는 이 노래 들을 듣지 않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들었다.

사실, 내 예전 여행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내 여행기의 제목들도 거의 노래 제목이기 때문에 플레이리스트로 여행을 정리한다는게 이번만의 일이란게 아닌 걸 알 것이다. 사진은 나의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을 참조하기 바란다.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야 말로 현실의 증거라고.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고 현실에 닿아 이 글을 쓰고 있다. 

17년 2월 5일의 글이다.



잊지 못하는 기억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외할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난 날. 

커다란 키에 양복과 목도리, 지팡이를 한 외할아버지는 턱을 굳히고 주변을 쳐다보았다. 


두번째로 만난 날 누워있던 어머니는 아버지, 아이들을 봐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눈썹을 찌푸리셨던 걸로 기억한다. 

외할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쳐다보고 장갑을 벗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에게는 총명하고 씩씩하구나. 

나에게는... 너는 새끼여우 같구나. 라고 하셨다. 새끼여우. 

누나는 그날 외할아버지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서 네 기억이 잘못된거라고 말했다.




17년 1월 5일은 외조부의 3주기이다.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항상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탄다고 하셨지만 

오늘 외할아버지를 만난다면 그 누구보다 수다쟁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몇 번이나 외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려고 했지만 3주기가 다 된 지금까지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겠다. 


입 밖에 내지 않은 사실들이라도 그것이 잊혀지진 않듯이 감정이나 기억들이 스러지지 않고 신발 속의 모래처럼 남겨져 있듯이. 

나는 이 마음이 완전히 가시는 일 없이 그대로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원히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사람은 이미 가버렸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감정이 남기고 간 것들이 계속해서 움직여간다.


기묘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2015년 9월 나는 교토에 여행을 갔었다. 

그 당시 나온 아이폰을 사러 간거였고 교토에 갔던 것은 일종의 벽에 도배할 때 쓰는 덧붙임 종이 같은 거였는데. 

생각보다 예약한 아이폰을 빨리 구매 할 수 있어서 오사카에서 교토에 도착하자 오후 한 가운데 쯤이었다.


내가 왜 굳이 니죠 성을 가려고 했는지, 교토역에서 내리자 별로 고민도 없이 캐리어를 질질 끌며 니죠 성에 갔다.


처음 가는 곳이었는데도 니죠 성에 가자 익숙하게 여기가 어떤 곳인지가 떠올렸다. 사람이 많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헤이안쿄의 궁궐이었던 니죠 성은, 그 후로 계속된 증축과 개축을 겪었으며 니죠의 어전과 그 정원은 우아하다. 

병사들을 막기 위해 축조된 벽과 해자, 그리고 연못들. 총을 쏠 수 있는 각도를 생각하여 꺾여진 길들.

끊임없이 니죠 성에 대한 것들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성을 관람하는 것이 다 끝나고 성 앞의 벤치에 앉자.

나는 그제서야 나에게 이런 것들을 설명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외할아버지였다.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일본의 정경을 사랑하셨기에 분기에 한 번은 일본에 다녀오셨다.

자주 어떤 곳이 아름다운지를 설명하셨다. 즐거운 듯이 예전의 일들을 얘기해주셨다.

크게 앓으셔서 더 이상 해외를 가지 못하게 되시고 나서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일본 출장에 다녀올 때 마다 외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먹거리들을 사서 보내드렸다.


할아버지가 조금 나으시면 제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일본에 며칠 다녀올게요.

어머니나 이모가 같이 가면 오히려 불편해 하실테니까. 어떠세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마음에 안드는게 있을 때면 그러시던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먼 곳을 쳐다보셨다.


니죠 성에서 가라스의 길을 건너 로쿠도인으로 가는 사거리. 나는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이제야 왔네요. 이제야 이해했어요.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반팔의 소년이던 외할아버지가 앉아 책을 읽던 곳.



나는 외할아버지가 얘기했던 정경을 근거로 4개 정도 후보지를 구글 맵에서 찾아냈다.

물이 흐르다 느려지고, 굽이 치고. 다리가 멀리 보이며 기온의 한참 남쪽. 강변으로 내려가는 경삿길.

밤이 되면 금방 까맣게 되었지만, 경삿길 부근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해가 질 때 까지-하고 말씀하셨다.

오래 찾을 것도 없었다. 북쪽에서 부터 차례대로 후보지를 가보다 세번째 쯤 나는 여기가 외할아버지가 있던 곳이란 걸 알았다.

반팔의 소년이 밤이 올 때 까지 산시로를 읽다가 일어서던 곳. 이제는 찻길이 생겨서 조용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모가와의 강변에서 조용히, 서른도 넘었으면서 새끼 여우처럼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뭐라도 해라. 돈을 벌어. 버러지처럼 살지 말아라. TV를 트시더니- 봐라 저기 자막 나오는 거

보험쟁이든 외판원이든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것이 아니냐. 제 밥값을 못하면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어.

할애비는... 할애비는 늙었어. 외손자가 제 몫을 할 때 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을 자신이 없어.
너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돼. 뭐라도 해라 뭐라도 제발.

혹은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큰 손자를 자주 그리워하셨다.

서울대 병원에 큰 병환으로 입원하고 계실때 병실을 지키다 이모와 교대하는 나에게 들리란 듯이 외손자는 어쩔수 없군. 이라고 중얼거리셨다.

친손주들은 영화에 음악을 공부하는데 그건 뭐라도 제대로 하는거에요 이모? 네가 참아. 너한테 투정부리시는거야 알면서.

외할아버지가 첫번째 쓰러지셨던 날. 나는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로 차를 돌려서 댁으로 갔다. 외할아버지는 낭패해하셨다. 

일어설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어. 걷지 못하는 짐승은 죽는거다.

이모와 외삼촌과 어머니와 내가 외할아버지의 옆에 있었다.

할애비는...이제 다 틀린 것 같다.

괜찮을겁니다. 외할아버님. 이라고 말하자 외할아버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외할아버지 댁에 있을 때의 내 자리 - 외할아버지의 애장서들을 모아둔 책장 옆 -에 서서 나는 외할아버지을 보았다. 

그래요? 외손자니까요?

일주일 후 두번째 쓰러지셨고 ICU에 들어가셨다.

1월 4일은 토요일이었지만 나는 회사일이 있어서 하루 종일 다른 곳에 있었다.

팀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장례 지원을 하는 일이었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외할아버지 많이 아프셔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일원동에서 흑석동의 병원 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
그리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 

나는 강남역에서 멈춰섰다. 외할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가실 분이 아냐. 그렇다고 해도 기다려주실거야. 

한시간이 넘게 강남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은 아무 나쁜일도 일어나지 않을걸 믿는다는 듯

(외할아버지가 나를 버리고 먼저 갈 일이 없을 거라는 듯이)

ICU의 면회시간이 끝날때 쯤, 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 할아버지는요? 응 괜찮아 많이 나아지셨어 하고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내일 일요일이니까 내일 면회시간에 올게요. 응 그래 고마워.

어머니와 나는 병원 주차장에서 한참을 그냥 앉아있었다. 너무 늦게와서 죄송해요. 아니야, 회사일 하고 있었잖아.


1월 5일. 나는 버스를 타고 종로에 도착했다.

아이패드 케이스를 사고. 커피를 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딴 짓을 하고도 어쩔수 없이 외할아버지가 누워 계신 병원에 왔다. 

혜화동의 병원으로 정오 쯤에 옮겨지셨다. 나는 이모가 울면서 건 전화에 잠에서 깨었다.

외할아버지에게 나는 세 명의 친손자와 네 명의 외손자 중 하나였다.

당신이 가장 사랑한 친손자는 외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서울의 집을 물려받았고 

외할아버지의 책장들을 물려받고 싶었던 나는 친척들과 등을 돌리게 되었다. 내내 장례식장을 지키던 나는 이제 이걸로 됐어요. 

하고 한 마디를 하고 식장을 나가 집으로 갔다. 

나는 당신의 시신도 묫자리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려주실거죠 외할아버지. 제가 갈 때 까지요. 

제가 할아버지를 뵈러 갈 때 까지 그대로 있어주실거죠?


입으로 내지 않은 진실이라고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내가 왜 외조부 댁 바로 옆의 대학에 갔는지, 의미없이 특차로 그 과에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할 사람이 물어보지 않았다.

네가 대학에 들어갔으니 이제 한 달에 한 번 할애비와 점심을 먹자구나. 괜찮겠느냐.

네 외할아버님. 

하지만 제가 왜 이 학교에 갔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물어보시지 않으시네요. 당신은 몇년 후에 저에게 미안하다고 하십니다. 

뭐가 미안하세요. 하나도 안 미안해요. 할아버지 저한테 미안한거 하나도 없어요. 안 미안해 할아버지 그런 말 하지마.

 
입으로 내지 않은 감정이라고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이야 말로 내 어린시절을 지켜준 내 진짜 아버지이며 당신이야 말로 내 이상의 "신사"라고. 

결국 나의 마음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뒤로 가끔 외할아버지의 책장에 대한 꿈을 꾼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란 것이 시간이나 공간 같은 보통은 넘어서지 못하는 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기억이나 감정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이 찌꺼기가 아니라 어떤 씨앗이 혹은 복수의 평면에 작용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몹시도 후회하는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대해 몹시도 부정적이다. 가모가와의 강변은 여우를 묻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16년 12월 30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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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나에게 너무 가까운 이름이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쉽게 친한 척을 하기 힘들게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선배는. 하는 소릴 들었었다. 냉혈인간에 무표정하지. 하는 소리도 들었다. 사실 어디에 가나 항상 저런 소리를 듣는다.
그냥 엄청나게 같이 재미있게 놀고 얘기도 잘 통하고 보기보다 사교적인데 역시 이 사람은 마음을 안 열어. 하는 느낌이 있어요. 라는 소리도 들었다.
마음을 여는게 도대체 뭐야 이 멍청이들, 하고 마음을 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만을 친구들로 사귄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주 자연스럽게 너는 내 친구야. 하고 생각이 되는 사람들말이다.

중학교때부터의 친구 결혼 소식을 들었다.
페북에 그의 이름을 링크한 게시물이 떴기 때문이다. 오랜 연인인 그의 신부가 될 분이 올렸다. 나도 알고 계신 분이기에 "와. 결혼해요? 전혀 몰랐네"하고 댓글을 달았다. 사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둘이 아직까지 사귀고 있을거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분은 당황하셨는지 한참 남았어요 ㅎㅎ 하고 댓글을 다셨다. 정말 매너가 없었지. 그래도 한참 동안 친구에게 연락이 없었다.

서운했다.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생각보다 친하지 않은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평일 오후에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엄청나게 빈정댔다. 야 아냐 너 해외있더라구 그래서 전화 끊었어. 어이구 그러세요?
아 그래서 응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어이구 그러세요? 내가 그런 소식을 페북으로 들어야겠냐 것도 니 여친 게시물로 어이구.
친구는 변명하기를, 야 네가 보고 싶어서 연락을 하는 건 항상 나였잖아. 하고 말한다.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 몇 명 중에 제일 제정신이 아니고 퉁명스러운 것은 나였다. 그는 그런데 또 결혼한다고 연락하기 겸연쩍더라고. 하고 말했다 야 너 부천 안 오면 내가 니네 동네로 갈게 진짜 미안하다. 응? 연락하면 평일에 시간 좀 내.
물론 그 녀석은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앞둔 신랑이 얼마나 바쁜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니.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걸어와야 하는 서울의 끝은 멀어서 충분히 이것저것 생각해내기에 충분했다. 어쩌지 어머니한테는 뭐라고 인사드리지 걔 누나한테는? 일단 만나면 더럽게 멀다고 한 대 때릴까? 만나면 같이 셀카나 한 장 찍어야지 생각해보니 그 녀석 대학원 조교하던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니까-4년도 더 됐잖아.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름을 도대체 왜 바꿨는지(심지어 바꾼 이름이 촌스러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결혼식의 신랑은 바쁘니까 얘기할 시간은 있겠지. 한 2,3분 정도도 없나. 그러기엔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식 시작 겨우 10분 전이잖아. 제길 이 녀석 때문에 시험까지 취소했는데 축의금을 이렇게 많이 내다니 빅 손해란 느낌인걸...보나마나 그 녀석 친구 중에 내가 제일 멋있을텐데 너무 자리를 빛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아. 결혼식 장에는 사람이 가득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뿐이었다. 왜 저 녀석 아버지 자리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지. 그냥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신랑석이든 신부석이든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녀석이랑 나는 사람들로 가득찬 자리 구석에서 시시덕거리는 그런 학생이었다. 성적에도 운동에도 취미에도 관심없이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이 즐거워서 몇 안되는 친구들과 함께 바보같은 농담을 하는데 몇년을 보냈다.
오늘은 나랑 같이 구석에 앉을 녀석이 없구나. 신랑이잖아 그 녀석.

축의금을 내고 식장을 둘러보고 아 테이블제잖아 나 간다.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식장을 나왔다. 밖에는 아깐 없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야 뭐냐. 하고 말하고 친구는 평소처럼 뭐냐가 뭐야 꺼져. 하고 말하다가 입을 다문다.

그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때는 아주 옛날이다.

악수를 해본 적도 없는 우리는 아주 어색하게 악수를 하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간다, 하고 가버린다. 야 어디가? 하고 그가 물어보지만 이젠 내가 알던 이름도 아니고 낯선 표정에 낯선 말투의 사람에게,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만나지 않았고 나는 우리 둘 다 알던 오락실의 중학생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 뿐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옛날 우리는 학원도 가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고 오락실에 모여 오락을 했다. 집에 가고 싶지가 않았던 녀석들 뿐이었다. 작은 돈으로 오랫동안 게임을 하기 위해 오락실을 전전하면서 여러가지 게임을 익혔다. 한 명이 돈이 떨어지면 다 같이 나왔다. 매일매일 만나기 때문에 돈을 빌려주는 것도 우스웠다. 집까지 가는 길은 길었다. 내일 다시 방과후가 될때 까지 우리는 괴로웠다. 어쩌면 괴로웠던 것은 나 뿐인지도 몰랐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녀석이었으니까 내 외로움에 어울려줬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간다. 하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평소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평소처럼, 집까지는 나 혼자 가야한다.

16년 7월 23일의 일이다.

몇 주가 지났다. 

피트니스에서 트레드밀에 올라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평소라면 안 볼 여행 프로그램을 봤다.

노인들이 타이완의 과일 가게에서 망고와 석가 같은 과일들을 먹고 있었다. 

트레드밀의 TV는 그닥 선명하지 않지만, 입가에서 물이 떨어지고 과일향이 사방에 퍼지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밤의 마트에 가서 망고를 샀다. 

노랗고 둥글 넓적하게 온순한 작은 망고를 몇개 샀다. 망고는 공화국의 사람 값처럼 쌌다.

나는 망고를 자르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운데에 대충 칼을 넣고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었다.

망고는 달콤하고 시었다. 과육은 생각보다 얇았다. 


나는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나는 뭐가 먹고 싶다거나 하는 걸로 떼를 쓰는 아이는 아니었다. 

달라붙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였지.할아버지가 해줬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언제 쯤이었을까 옛날 중국에 뭐시기 라는 이름의 남자가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가난한지, 부자인지 다른 가족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병에 걸린 늙은 어머니가 있었다.

새도 날지 못할 만큼 눈이 내리는 겨울, 쇠약해진 어머니는 남자에게 딸기가 먹고 싶구나. 하고 말을 한다.

노인의 투정이었을까 열이 머리에 까지 미쳐 제대로 생각을 못했던 탓일까. 한 겨울에 딸기라니.

하지만 쇠약해진 나머지 딸기가 나오는 봄까지 버틸수 없어 보이는 어머니에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을 하고 물러나온 남자는. 채비를 갖추고 산으로 떠난다.

강을 건너고, 숲을 가로지르고, 갖은 고생을 하며 연못 근처의 공터에 다다른 남자는 

거기서 빨갛게 익어 얼지도 않은 딸기를 발견해 소중히 품고 돌아와 노인에게 먹인다.

 

그래서요, 할아버지 딸기를 먹여서 어떻게 되었어요?

어떻게 되긴 어떻게 되다니, 그냥 딸기를 먹였다는 이야기야. 

병이 낫거나 그러진 않고요?

아니 도대체 뭐하는 병이길래 한참을 앓던 사람이 딸기를 먹는다고 낫는다더냐. 

- 그냥, 딸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 딸기를 가져와 먹인게지.

그게 뭐에요, 별로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너한테는 아직 이야기가 어려웠구나.


할아버지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에 틀렸다고 하는 법도 없으셨다.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 손자가 하는 말 들어보시오 이 아이가 이렇게 똑똑하다오.

내가 기억하는 한, 할아버지가 놀라서 호통을 치신 것은 5살쯤 되던 내가 선풍기에 손가락을 넣었을 때 였다.

아이고 이놈. 하고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매어주셨다. 그게 다였다. 아이고 이놈.


할아버지는 16년 3월, 금요일의 어느 밤에 돌아가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아프셨는지, 해로 세어도 한참이었다.

보통 사람은 돌아가시고도 남은 뇌수술을 받은지 십년도 넘었지만

이렇게 돌아가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걸 믿지 않은 것은 나 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강건했던 할아버지를 무너트린 건 노쇠였는지 우울이었는지.

가끔식 건강하고 힘이 강했던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일부로 보였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금방 다시 건강해질 거라고 믿은 것은 나 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눈이 망가지고 귀가 안 들리고 머리 한 쪽이 움푹 패였어도.

건강이 점점 나빠져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였다.

 

할애비는, 위가 찢어졌단다.

전보다 더 작아진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길을 가다가 쓰러지고 말았지. 사람들이 꼼짝없이 죽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일어는 났단다.


할아버지는 커다랬는데 건강한 땀내가 나고 성큼성큼 걸어다니셨는데

할아버지가 떼어냈다는 몸의 일부가 얼마나 컸던지 할아버지는 조그맣게 되셨다.

할애비랑 점심이나 먹자구나. 시간 있느냐?

할아버지랑 저는 제 평생만큼 시간이 있어요. 아시잖아요.

이야기하다가 가끔 혼자 잠드시는 것도 괜찮아요.

할머니 몰래 술드시겠다고 제 핑계 대시는 것도 괜찮아요.

걸음이 엄청나게 느려지신 것도 괜찮아요.

할아버지 다 괜찮아요. 내가 서투르고 느리게 걸을 때 할아버지가 거기에 있었잖아요.


친구들이 말이다. 이제는 죽어도 장례에 참석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루는 친한 친구 놈이 죽었는데도 코배기도 안 비추길래,

아이 이놈아 내가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데도 이렇게 식장엘 다녀왔는데 너는 뭐하는거냐? 하고 했더니

이보게 자네는 그래도 아파트 단지 밖에 나갈수나 있지. 하더라고

이것이 할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마지막 농담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이 있는데, 할아버지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다.

망고가 맛있고 더 달수록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의 뭐시기 라는 남자가 바로 이런 마음이었겠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아주 잠시라도 맛있는 것을 먹이려는 마음.

어머니, 먹어보세요 딸기에요. 입술이 말라붙어 터지고 죽도 못 삼키시는데도 딸기는 드시고 싶어하셨잖아요.

 

그리고 이것이 호흡기를 차시기 전에 할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대화이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순간 까지 의식이 또렷하셨다.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나 호흡기를 차셔서 말씀을 못하시고 그렇다 아니다 라는 의사 표현만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의지가 강한 분이셨다. 내가 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아마 끝까지 이겨내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셨던게 틀림없다.


할아버지, 고모가 전화해서 깜짝 놀랐잖아요. 이게 뭐에요

그렇게 됐다.

어울리지도 않게 누워서 뭐하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얘야, 할애비가 많이 어려울 것 같구나.

왜 자꾸 이상한 소리 하세요. 할머니랑 고모가 겁먹잖아요.

-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잖아요.

그래 그렇구나. 많이들 겁을 먹었겠구나.

어서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불고기랑 평양 냉면 먹으러 가요.

...요새 할애비는 불고기도 평양냉면도 별로구나.

그럼 뭐가 먹고 싶으세요?

글쎄다. 요새 먹고 싶은게 뭐였냐면.


나는 할아버지가 무엇이 먹고 싶으셨는지 끝까지 듣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일 못 오면 모레 올게요.였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나는 개처럼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게 내가 사람이라는 증거라도 되는 듯이 울었다.

나에게 그 마음은 사랑이었다. 재처럼 희미하고 지워지지도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16년 4월 비오는 날의 일이다.




 



내가 그 얘기를 들은 것은 어느 무당벌레로부터이다.


나는 가끔 공원에 나가 사람이 잘 찾아오지 않는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곤 하는데, 이 무당벌레는 신기하게도 풀이나 꽃 위에 앉지 않고 내 옷깃에 가만히 앉아서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성격이 급한 작은 벌레 답지 않게 한참이나 그림을 보고 있던 무당벌레는 풀쩍 날아올라 내 손과 연습장 위로 한바퀴를 돌더니 내 연습장 위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인간은 이런거 좋아해? 
 이런거?
 응, 그림 말야. 그림이라고 부르지?
 응, 나는 좋아해. 너는 좋아하니?


무당벌레는 대답을 하지 않고 파르르 하고 날아 연습장의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말했다.
나 말야 전에 그림이랑 얘기한 적이 있거든.
그러니까 무당벌레가 해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림은 처음에는 동그라미였대.
 동그라미?
 응, 동그라미. 동그라미에 눈이 이렇게 두개가 찍히고 그 아래엔 날개같은 모양의 금이 그어져 있었대.
 그거 웃는 얼굴이라고 하는거야.
 웃는얼굴? 그래 처음에는 웃는 얼굴이었다고 해.


그 그림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깨달은 건 어느 작은 여자아이의 손바닥 안이었다고 한다.
열이 나서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아이는 아빠를 붙잡고 보채고 있었다.
어쩌지, 아빠 잠시 다녀오면 안될까? 하고 아빠는 여자아이를 달래보았지만 아이는 무엇보다 무서워서.
모르는 사람만 잔뜩 있는 병원에 혼자 있는게 무서워서 아빠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자 아빠는 품 속에서 펜을 꺼내서.아이의 오른 손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점을 두개. 그리고 웃는 얼굴. 작은 아이 손 안에 그려진 작은 웃는 얼굴.
 아빠 이게 뭐야?
 친구야.
 친구?
 응 아빠 다녀올 동안 친구랑 같이 있어 정말로 금방 다녀올게.
아이는 아빠를 쳐다보고 손바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빠는 꼭 가야하나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는 웃는지 우는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녀올게. 하고 뛰어나갔다.
손바닥 안의 "친구"는 웃고 있었다.
그 때 까지 그림은 오직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소녀가 그림에게 귓속말을 했다. 안녕, 나는 네 친구야. 너도 내 친구니?
그림은 배시시 하고 웃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 곁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는 열이 내린채 자고 있었다.
정말로 착한 아이에요. 하고 누군가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자는 아이 옆에 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아이는 자고 있었지만, 웃는 얼굴 그림은 아빠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


아빠는 그 다음부터 아이가 떼를 쓰거나, 착한일을 하거나, 혼자 있게 되거나 하면 손바닥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처음엔 그냥 동그라미에 웃는 얼굴이었던 그림은, 언제부터인가 코와 귀가 생기고 머리카락이 생겼다.
아이의 손바닥은 금방 커졌고, 때로는 손등, 때로는 팔뚝에 여자아이를 그려줬다.
 이건 내 친구야.
 네 친구?
 응 내 친구야.
아이는 그림이 지워지니까 손을 씻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아빠는 설득했다. 네 친구는 어디 다른 곳에 가는게 아냐.
네가 손을 씻어서 지워지면 네 방에서 널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그림을 그리면 손으로 옮겨오는거야. 라고 말했다.
응, 그렇구나. 내가 안 보고 있어도 나랑 같이 있는거구나.
그래서 그림은 그 날부터 정말로 아이의 방에서 아이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배시시 웃음만 짓고 있다가 토라지거나 크게 웃을수 있게 되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는 그림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나 손이랑 발이 있으면 걸어다니고 싶어.
지금은 데굴데굴 굴러가기만 하니까?
응 지금은 데굴데굴 굴러가기만 하니까. 이곳저곳 다니려면 굴러가기만 해서는 안되잖아.
아이는 아빠에게 손이랑 발도 그려줘. 라고 말했다.
아빠가 처음으로 그린 손이랑 발은 정말 형편없었다.
아빠, 이런 손이랑 발은 얼음이 가득한 하얀 바다나 연기가 나는 산에 갈수 없어.
인도에 있는 왕비를 사랑한 왕이 세운 성에도 갈수 없고 말야.
맞아,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던 것 처럼 말야.
아니 도대체 저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걸까, 하고 아빠는 쓴웃음을 짓고 그날부터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아니 그 뒤로도 한참을 서툴렀지만 곧 아이만은 잘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모습을 그리고, 그 모습을 아이의 손바닥에 그려주었다.
 이건 네 친구지?
 응 내 친구야. 아빠가 없을 때도 항상 나랑 같이 있어줘.
아빠는 아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아이는 아빠와 공원에 가는 걸 좋아했다. 동물원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코끼리였다. 기린을 무서워했는데 한 번 기린 우리에 가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빠, 밥을 먹을 때는 식탁을 예쁘게 정리해야해. 하고 작은 식탁보를 깔아 밥과 반찬을 엉망으로 올려놓았다.
아빠는 잘했다고 상으로 공주 옷을 입은 친구를 그려주었다. 머리 위에는 별이, 옷에는 꽃이 달려있었다.
아빠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달려와서 아빠의 다리를 안았다.
이야기 해줘. 엄지 동자 얘기가 좋겠어. 하고 맘대로 이야기를 정했다.
그림과 아이는 자리에 누워 아빠의 엄지 동자 얘기를 들었다.
옛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습니다.
엄지 동자 얘기인데 왜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나와? 하고 그림이 묻자
쉿. 우선 잘 들어봐. 하고 아이가 아니 소녀가 말했다.


소녀는 자주 아팠지만 달리기를 좋아했습니다. 큰 소리로 웃으면서 달리고
학교에서 받은 과제 책을 빽빽하게 채우는 걸 좋아했습니다. 하고 소녀가 스스로 말했다.
가지런히 정리하면 좋아. 재미있어. 하고 그림은 따라 말했다.
둘은 좋은 친구였다.
소녀가 학교에 가게 되자 그림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아빠는 자주 소녀의 손에 그림을 그렸다.
아빠는 예전보다 더 바빴고 소녀가 혼자 있는 시간은 그림이 혼자있는 시간만큼 많았으니까.
멜빵 바지, 좋아하는 꽃무늬 원피스, 소녀가 좋아하는 피리를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소녀가 학교에서 피리를 불 때는 그림도 집에서 피리를 불었다. 
어느날 소녀는 볼이 빨갛게 되서 집으로 들어와 이거봐 이 가수 정말 멋있어! 하고 처음 듣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끝내준다.
 끝내주지?
소녀와 그림은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고 춤을 추다 지치면 책을 읽었다.
그렇게 백년을 소녀와 그림은 친구로 보냈다. 정말 백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소녀가 그림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 백년 동안 친구하자. 그러니까 아마 둘은 백년 동안 친구로 지냈을게 틀림없었다.


아무도 잠을 자지 않는지 시끄러운 밤이 있었다.
학교에 갔었었나, 놀러나간다고 했었나. 그날따라 소녀는 그림과 함께 외출하지 않았다.
아빠가 며칠이나 바빠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소녀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왜냐하면 정말로 들어올 시간이 훨씬 지나고도 소녀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 집에 전화가 울렸고 어느 샌가 집에 돌아온 아빠가 큰 소리로 통화를 했다. 
아직도 소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림은 소녀의 방 구석에 앉아 소녀를 기다렸다.
초조하게,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소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도 집을 나가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도, 아빠도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림은 소녀의 방에서 데구르르 구르고 엎드려 다리를 흔들고 책 사이에 숨어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그림은 알수가 없었다. 인형의 머리위에 올라서서 창가까지 올라왔을 때 그림은 창 밖에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아빠! 하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 그림은 깜짝 놀라 입을 막았지만 애초부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창문은 닫혀있었고 그림은 새처럼 작았으니까. 
아빠는 집에 돌아와도 소녀의 방에 들어오진 않았다. 들어올것 처럼 문을 두드렸지만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녀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아빠는 알고 있었다. 아빠는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그림은 혼자 시간을 보냈다.


며칠 뒤부터 아빠는 소녀의 방을 찾아왔다. 올 때는 방 문을 두어번 두드리고 조심스럽게 방을 연다음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을 쓸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금방 방을 나가버렸지만 때때로 방의 의자에 앉거나 방 바닥에 앉아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림은 아빠가 방에 들어올 때면 벽에 가만히 서서 그림인척 했다. 그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그림이 잘하는 거였다. 
소녀는 어딜 갔어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빠는 왜 그런 슬픔 얼굴을 하고 있어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빠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집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소녀의 방에선 울지 않았다.
울 것 같은 일그러진 표정이 되면 소녀의 방에서 급히 나갔다. 그 방에서 울면 누군가 자기가 우는 걸 듣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빠가 우는 소리는, 혹은 우는 걸 참는 소리는 소녀의 방에서도 아주 잘 들렸다.
그림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모든 걸 이해했다.


그날, 드물게도 아빠는 소녀의 방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방을 청소하다 피곤해진게 틀림없었다.
전날 밤 그림은 자기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을 집중해서 이상하게 들리지 않도록 소녀의 목소리로 "아빠"라는 말을 해보았다. 아빠. 아빠 일어나봐요.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천천히 움직여 아빠의 위를 비추자 아빠는 햇살보다 더 천천히 눈을 부비고 일어났다.
아빠 일어났네? 그림은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도 그림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던 아빠는 자리에 일어나 소녀의, 그림의 방을 나가버렸다.


매일 매일 소녀의 방에 찾아와 바닥에 앉아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림은 평소처럼 책 위에 앉아있거나 책상을 뛰어다니다가
아빠가 오면 아빠 안녕? 또 왔네? 하고 인사해주었다.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리에 앉아있다가 30분쯤 그림을 쳐다보다가 방을 나가버렸다. 한 번은 그림은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그 때 나 아팠을 때 말야 아빠가 가버리는거 싫었지만 손에 웃는 얼굴 그려줘서 좋았어. 아빠는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무 말 없이 나가버렸다.
그림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소녀인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날 부터 점점 그림은 소녀의 빈자리에 미끌어내려가듯이 변했다.
아빠는 이제 소녀의 방에 와서 그림을 쳐다보는게 아니었다. 그림을 그렸다. 연습장에 소녀를 그렸다. 하루에 한 장. 어떨때는 세장도 그렸다. 웃는 소녀의 모습 뛰는 소녀의 모습 밥을 먹는 소녀의 모습. 그림은 아빠의 그런 모습을 구경했다.


그림은 점점 색이 진해지고 키가 커졌다. 검은 색과 하얀 색이 아니라 분을 바른 것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볼이 생겼고 갈색의 팔꿈치와 무릎이 생겼다. 목소리는 (시험해보지 않았지만) 분명 먼 곳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를 낼수도 있을 것이다. 창 밖을 날아가는 굴뚝새에게 소녀가 하던 것처럼 "왕!"하고 짧은 소리를 질러도 보았다.


아빠는 점점 색이 흐려져 갔다. 머리 카락은 더 이상 새까맣지 않았다. 목소리는 작아지고 매일매일 마르고 앙상해져갔다.
아빠의 그림에 나오는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아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림은 점점 아빠가 걱정스러워져가기 시작했다. 아빠, 밥은 먹고 있어? 라고 묻자 아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빠 언제까지 이렇게 그림만 그릴거야? 라고 묻자. 아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림은 깨달았다. 내가 있기 때문에 아빠가 저렇게 작아지고 있는거야. 소녀의 방은 이제 소녀를 그린 아빠의 그림으로 가득차서 더 이상 소녀의 방 같지가 않았다.


그날은 소녀가 돌아오지 않은 날로부터 1년 정도 지난 날이었다. 아니 2년이 지났을지도 3년이 지났을 지도 몰랐다.
그림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 날과 같은 햇볕 냄새가 나는 날이었다. 모두가 행복한 표정으로 거리를 걸어다녔고 풀 냄새가 났다. 그래, 그림은 이제 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팔에 햇볕이 닿으면 따스했다. 머리카락을 입으로 물면 미끌미끌하고도 까끌까끌한 이상한 맛이 났다. 아빠는 소녀가 좋아하는 멋진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그림은 아빠가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림은, 아니 소녀는, 아니 아가씨는 창틀에 앉아 뒤를 돌아 소녀의 방을 바라보았다. 방은 그대로였다.
바람이 불고, 무당벌레가 춤을 추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아가씨는 창틀에서 뛰어내렸다.
붕, 하는 소리와 함께 아가씨는 날아올랐다. 얼마나 가볍게 날아올랐던지 지나가던 야구 꼬마가 와, 저 사람봐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야구 꼬마를 빼고 아무도 그녀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무당벌레는 날개를 파르르 떨고 다리를 두어번 사방으로 펴서 사람으로 치자면 아주 시원한 기지개를 폈다.


 ...그래서 그림은 사람이 되었대. 여자아이가 원하던 대로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갖가지 모험도 많이 했더라구. 멋진 남자랑 춤도 추고 토끼처럼 달려보기도 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바다도 보고 
 산도 보고 오래된 성도 보았대.


나는 무당벌레를 바라보았다. 무당벌레는 배가 고파졌는지 고개를 몇번 위아래로 흔들더니 점차 이야기와 나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무당벌레에게 노래하듯 물었다.


 북쪽에 하얀 얼음이 가득한 바다를 보았겠구나. 동쪽에 불이 난 것 처럼 연기가 나는 산을 보았겠구나. 
 왕비를 사랑한 왕이 세운 커다란 성을 보고 말이지. 봄에는 꽃을 보고 가을에는 달을 보고 밤마다 별을 보았겠지.


 그래 맞아 그거였어. 근데 어떻게 알았지? 


무당벌레는 포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올라 진딧물을 먹으러 가버렸다.








2015년 8월 31일, 11시 59분. World's end girlfriend의 앨범 Hurtbreak wonderland를 들으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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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이야기는 북미와 남미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죽은 배우자를 찾으러 가는 구전이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많은 버전이 있다. 때로는 남편이, 때로는 아내가 죽은 배우자를 찾으러 간다.

 

....

 

그는 위대한 사냥꾼이자 부족에서 제일가는 주술사. 마음 속 깊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했네.

 

아내가 죽자 일곱 개의 매듭으로 끈을 묶어 몸에 두르고 그녀의 무덤에서 그녀가 일어나길 기다렸네.

 

이윽고 이틀 밤을 꼬박 새자 무덤이 열리고, 생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녀가 일어나 무덤을 떠났지.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갔지.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는 날씬한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지

 

"나는 이제 죽었고 당신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나를 따라오지 마세요"

 

그녀는 황야를 가로질러 산을 넘었고 강을 건넜어.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갔지.

 

이윽고 며칠 밤을 걸려 저 건너편에 죽은자들의 섬이 보였고 강을 지키는 위대한 자가 그 둘 앞에 나타났어.

 

"산 사람의 냄새가 나는구나. 네 뒤에 있는 저자는 누구냐?"

 

"저 사람은 제 남편입니다" 아내는 위대한 자에게 머리를 숙였어.

 

위대한 자는 그를 쳐다보았지,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어 일곱개의 매듭으로 끈을 묶었기 때문이야.

 

"너는 무엇을 바라고 여기에 왔는가"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어 "저는 제 아내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자가!" 위대한 자는 숲이 떨릴 정도로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지. 하지만 그는 용감했어. 물러서지 않았지.

 

아내는 그의 어깨 끈을 잡았어. 죽은 사람처럼 차갑게 덜덜 떠는 아내의 손을 잡았지.

 

위대한 자는 그들을 보고 깊은 숨을 쉬었어. "그렇다면 너에게 하룻밤을 주겠다. 가라"

 

사냥꾼과 그의 아내는 카누에 몸을 실고 강을 건넜어. 물이 밤처럼 검었지만 두려울게 없었지.

 

죽은 자들의 섬을 건너는 카누에는 죽은자들의 죄가 카누 위에 돌처럼 쌓여 때때로 가라앉지만

 

사냥꾼은 아내의 손을 놓지 않았어. 그는 아무 것도 후회하는 게 없었거든.

 

죽은자들의 섬에 내리자 그들의 친척과 가족들이 그들을 환영했지. 낯선 자들 익숙한 자들 모두 친족이었어.

 

남자들은 함께 사냥을 나갔지. 여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자 모두 볼을 부비며 기뻐했지.

 

밤이 되자 불을 피워놓고 모두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어. 아내도 사냥꾼도 배불리 먹고 큰 소리로 웃었어. 

 

사냥꾼과 아내는 같은 텐트에서 잠을 잤지. 살아있는 사람처럼 따뜻했어. 

 

아침이 되자, 야영지는 온데 간데 없었어. 아내가 아니라 검게 탄 숯이 그의 잠자리 옆에 놓여있었지.

 

위대한 자도, 아내도, 친족들도 아무데도 없었어. 일곱 번의 매듭으로 꼬은 줄도 그들을 돌려놓진 못하였지

 

그가 실수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 단지 그에게 허락되어 있던게 단 하룻 밤이었을 뿐이야.

 

그의 아내가 자신의 인생을 꽉 채워서 살았던 것처럼 말이지. 결국 위대한 사냥꾼도 그걸 이해했어.

 

그는 며칠을 걸려서 갔던 길을 그 배에 배가 되는 시간을 걸려서 돌아왔지.

 

맹세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가 돌아오는 길에 검던 머리는 하얗게 되고 

 

뺨은 화살을 맞은 사슴처럼 패였지. 마을에 돌아온 그는 사람들을 불러 이야기를 시작했지.

 

이 모든 이야기는 위대한 사냥꾼이자, 부족에서 제일 가는 주술사인 그가 아이들에게 남긴 이야기.

 

이야기를 끝낸 그는 몸을 씻기 위해 강가로 향했어. 

 

강변에 선 위대한 전사, 노래를 불렀지 "아이야- 아이야- 내 이야기를 들어라."

 

노래가 끝나자, 독을 품은 작은 뱀이 수풀에서 살그머니 기어나와 그의 발목을 물었지. 그는 그대로 무너졌어. 

 

그는 그렇게 죽었지. 그는 그렇게 아내에게로 다시 돌아갔어.

 

그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았을거야.

 

伯樂 본명은 손양(孫陽). 생몰년 미상.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인물로을 감정하는 상마가(相馬家)였다. 그 안목이 특출나 여러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사람들은 본명인 손양 대신 백락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화 중 하나인 ‘伯樂相馬(백락상마)’의 백락이 말을 관찰하다 말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나왔다.

목공(穆公)이라는 왕이 백락에게 말했다. “당신도 이제 늙었으니 당신의 자손 중에 명마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하시오.” 백락이 대답했다. “명마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구방고라는 사람이 저보다 더욱 말을 잘 봅니다.” 목공은 구방고로 하여금 명마를 구하게 하였다. 구방고는 천하를 다니다가 돌아와 명마를 구했다고 보고하였다. “어떤 말이오?” 목공이 물었다. “누런빛의 암말입니다.” 목공은 하인으로 하여금 그 말을 살피고 오게 하였다. 하인은 그 말이 검은빛의 수말이라고 보고하였다. 목공은 불쾌하여 백락을 불렀다. “당신이 추천했던 구방고라는 자는 말의 색깔이나 암수조차도 구별 못하니 어찌 된 일이오?” 백락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말하였다. “구방고가 본 것은 말의 내면에 있는 명마의 소질입니다. 그것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므로 겉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구방고는 살펴야 할 것만을 살피고, 살피지 않아도 될 것은 빠뜨린 것입니다.” 목공이 그 말을 직접 길러보니 과연 천하의 명마였다.

...

 

모월 모일.

어머님의 기별을 살피고 밭에 나가 하인들과 기장을 살피었다. 노대가 올해는 비가 잦지도 부족하지도 않아 기장이 잘 자랄 것이 틀림없다고 몇번이나 반복하였다. 오후엔 구방인이 인편이 보낸 편지가 왔다. 술과 고기를 대접하고 편지를 읽었다. 급히 지필묵을 준비 시켜 몇 줄을 적어 돌려보냈다. 

모월 모일.

낮에 말을 보아달라는 사람이 왔다. 손대인 손대인 하며 내 분에 넘치는 선물을 가져왔기에 선물은 돌려보냈지만 말을 감정해주었다. 나보단 수도의 구방인이 명인이니 다음엔 그를 알아보오 하자. 어찌 천하에 백락선생보다 말을 감식하는데 뛰어난 자가 있겠소 하고 부끄러운 말을 하기에 손사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모월 모일.

기장을 돌보는 중 사람이 왔다. 백락 선생. 하고 부르기에 고개를 숙였는데 구방인이 찾아온 것이라 왈칵 껴안고 구대인 어찌 기별도 없이 오셨소 하고 물었다. 말없이 웃기만 하여 밤새 술을 기울였다.
내 말을 하나 골라두었다오. 하더니 요 근중에 본 말 중에 제일로 훌륭하니 선생께 보내겠소. 하며 웃었다.

싱겁기도 하다 그 친구. 어떤 말이길래 그토록 훌륭하오? 하고 물어보니 밤색의 암말이라오. 하고 대답했다. 새벽이 되자 곧 채비를 하더니 목공이 기다리시는 수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월 모일.

하루 종일 동풍이 불어 바람막이를 세웠다. 백락 선생은 귀하신 몸인데 어찌 이런 일을 직접 하는가? 하고 지나가던 근방의 촌부가 웃으며 묻기에 그러지 마시고 그늘에서 쉬시구랴 하고 술을 꺼내 한 잔을 마시라 하고 주었다.

말을 보는데 최고의 명인은 이제 구방인이라고 할 수 있소. 내 하나 뿐인 벗이라오. 하고 말하자 촌부는 과연 과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구방인이 보냈다는 암말이 도착하질 않았다. 수도에 돌림병이 돈다니 그 탓이 아닌가 싶다.

 

모월 모일.

수도에서 사람이 왔다. 머리에 베 끈을 동여매고 온 그는 곧바로 내 집 앞에 달려와 구방인이 병마로 숨이 경각에 이르렀으니 나를 모시러 왔다고 말했다. 경황이 없이 소매를 묶고 여행 채비를 갖추기도 전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수도에서 와서. 구방인 어르신이 한시라도 빨리 백락 선생을 모시러 오라 하였다고 했다.

동구 밖을 건너자 멀리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이 소매에 검은 천을 묶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망연자실하여 수도까지 다녀오는데 손발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모월 모일.

바람이 차가워지기 전에 보리를 심으려 근방의 사람들과 상의를 하였다. 

목공께서 사람을 보내 이제 말을 알아보려면 누구에게 물어야 하냐고 전갈을 보내셨다. 이제 저는 말을 찾으러 가기 위해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나이다. 멀리 수도를 향해 절을 드리고 서한을 인편에 전달하였다.


모월 모일.

구방인이 보낸 말이 도착하였다. 구방인은 밤색 암말이라고 하였으나 도착 한 것은 검은색 종마였다. 달리는 모습을 보니 역시나 천하에 다시 없을 명마였다. 잘 자란 보리 밭이 얼마나 푸른지 눈이 시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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