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당신에게 전하려 하지만. 왜 아름다운지는 너무 길어 쓸 수가 없다.
잃어버린 문장은 돌아오지 않고, 심상은 그대로 남아 저기 밤 어딘가를 헤매인다. 똑같은 꿈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어떤 심상이 낮의 나에게까지 다다른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정경은 세상의 끝이 틀림 없다. 하늘은 어둡고 세상은 온데간데 없이 땅그늘 저쪽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곳에 내가 있다. 군데군데 불그스러미, 나무는 검게 타고 희게 말라붙은 땅 위에서 그 뿌리는 타닥타닥 소리를 낸다. 불씨가 피어오르고 재가 눈처럼 흩날려 하늘을 하얗게 채운다. 손가락에 불이 붙을 것처럼 잔불들이 피어오르고 또 사그러든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들판이 불타오르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들판엔 필시 나 말고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숨도 쉴 수 없게 매캐한 연기와 타는 냄새가 가득하여 나는 무심코 입을 열려다 입을 열어선 안된다는 걸 깨닿는다. 입을 벌려선 안된다. 입을 벌리면 입 안에 재가 들어와 불이 붙을 것이다. 어떠한 말도 해서는 안된다. 나는 급히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문다누군가가 나에게 속삭인다. 봐,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나는 이제 조금 두려워

....

저는 요즘 매일 새벽 3시가 되면 잠에서 깨어납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울면서, 때로는 소리를 치면서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조용히 잠에서 일어나는 때도 있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아마 매일 아침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쩌면 아구찜을 너무 많이 배달시켜 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은 깊고, 제 집에는 저 외엔 아무도 없습니다. 벌레도 없는 19층의 집은, 다 먹은 하겐다즈 통과 아보카도 껍질의 원한에 찬 소리 외엔 고요하기만 해서 제 울음소리와 숨소리 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제 울음소리는 꼭 우리에 갇힌 커다란 짐승의 소리 같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우는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아마도 겁을 먹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견딜 수 없이 무서워진 것이지요. 저는 세상에 저 혼자만이 남아있는게 아닐까 의심하고 마지막 한 사람이 된 기분을 만끽하면서 오열합니다. 얕은 내세에라도 온 듯이 밤은 아무 소리도 없이 또아리를 틀고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 같은 바람 소리만 들려오는데 저는 누구에게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주 견딜 수가 없을 때는 글을 찾아 읽습니다. 한참이나 글을 읽고서야...저는 안심하고 다시 잠이 들 수 있습니다. 그 문장들이 저를 상처입힐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읽습니다. 그 글은, 기도문도 아니고 시도 아니지만 유일하게 저를 안심시킵니다. 

누군가가 때때로 이 별이 둥글다는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인지, 라고 에세이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 건넛편에 어딘가에 “내일”이 있다는 점에 기뻐하고, 또 “오늘”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있는 세계 건넛편이 있다는 점에 안심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사람은 정말 별 거 아닌 사소한 것에 안심한다는 점에서 먼 조상인 쥐들이랑 별로 다를바가 없는 것 같아요. 쥐와 토끼들은 항상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를 모아서 잠이 든 답니다.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는 세계의 반댓 편이라도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죠.

두 번째 잠은 항상 더 수월 합니다. 밤의 저와 낮의 제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처럼 두 번째 잠의 저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내려고 하듯이 빠른 속도로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비가 오는 절, 오래된 건물들.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 서울의 구석진 곳. 때로는 교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리들.

저는 미술관 앞에서 기다립니다. 커피를 사서 앉으면 옆에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나란히 앉아서 냄비 요리가 끓기를 기다립니다. 메뉴를 주문하고 신기한 라떼를 마시고, 창 밖을 바라보고 또 걸어갑니다. 꿈은 혼란스럽습니다. 손을 잡고 이마의 냄새를 맡고. 서늘한 손등이 제 팔짱을 끼고 저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합니다. 옆에 서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가장 아름다운 문장만을 찾아서 읽습니다. 공항에서 저는 전화를 걸고 선물을 사서 소파위에 놓아둡니다. 뛰어가는 사람을 종종 걸음을 쳐서 쫓아가고. 꽃을 사서 지하철을 탑니다. 로비의 구석에서 농담을 생각합니다. 어디 있어요 지금 거기로 갈게요 뭘 하고 싶어요 저는 똑같은 꿈을 다른 방향에서, 다른 꿈들을 모두 똑같은 의미인 것 처럼 꿉니다. 저는 이 두번째 꿈을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그 모든 소원을 담아서 꿈을 꾸지만 거기서도 나는 보고 싶었노라고 말을 하지는 못하고 다만 손을 뻗어 이마를 만집니다.

저는 매일 아침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출근합니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은 이야기의 영역이고, 이야기 속에서만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면 사람은 이야기 자체에 떠내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걸어서 회사를 나가는 그 시간을 통해서 저는 꿈과 현실을 분리해냅니다. 나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가 더 이상,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전에 저는 이야기를 자신의 닻으로 삼고 아침의 산책을 현실과 이야기를 분리하는 강으로 삼습니다.

잠에서 깬 저는, 밤의 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끔식 들이차는 눈물이나 숨이 막히는 느낌도 그저 딸국질이나 하품이나 다름없이 저는 물 한 잔을 마시거나 가까운 공원에 걸어가 야외의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돌아갑니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출근하고 투덜거리고 말합니다. 일이 끝나면 걸어서 집에 돌아갑니다. 석양을 보고 문득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것을 입에 담지 않습니다. 어떻게 아름다운지 설명 할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똑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자신을 상처입힐 문장들을 읽습니다.

그리고는 전과 그대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출근하고 투덜거리고 말합니다. 저는 그 글들을 너무나 사랑하여 무심코 정신을 집중해서 글을 읽으려고 하지만 너무 자세히 읽어서는 안됩니다. 딱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을만큼 거기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저는 눈을 감습니다. 

세계 건넛편에 일어난 일인것처럼 멀고, 또 어떤 것도 저에게 닿지 않습니다. 어째서 새벽 3시인지 생각해봐도 연유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태어난 시간을 모릅니다. 누가 일부러 지운 것처럼. 어머니는 묘시쯤이었을거야, 라고 말하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 사주는 불을 타고 나서 어디에서 사주를 보든 인생이 무난하고 부유하게 큰 병 없이 오래 행복하게 사는 사주라고 합니다. 나쁜 사주가 나왔을 때 누가 나쁜 사주라고 말을 할까만. 

언젠가 평범하게 좋은 사주라고 얘기를 듣던 때 궁금증이 들어서 제 생시가 묘시이거나 인시이거나 하는거에 따라 제 사주가 많이 바뀌나요? 하고 묻자 사주를 보는 노인은 달라지는 건 별로 없지 근데 너는 인시에 태어났으면 다른 사람은 구하겠지만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는 없어. 라고 말했습니다. 


....

이번에야 말로 저는 결심을 하고 대답도 없는, 전해지지 않을 그 말을 합니다. 나의 말은 내가 듣고. 그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가도 똑같은 꿈이 몇 번이나 반복 되고 어떤 심상이 밤으로 이어집니다. 잔불의 꿈은 저를 태워갑니다.

그리고 그대로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 흰 것이 입안에 내려앉기를 기다립니다. 이윽고 잔불을 품은 그 재는 눈처럼 가볍게 혀 위에 내려앉을 것이고, 비단을 찢는 소리를 내며 제 혀를 태울 것입니다. 제 혀는 죽고, 곧 썩어 검게 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만. 그 맛은 분명 달콤하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18년 5월 11일 밤의 글.


명나라 때 진 모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행색이 단정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 인물이 될 거라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이상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질 못하고 서른이 되도록 진사에 머물러 있었다.

본인도 세간의 평가와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바,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으나 잘 풀리지 않아 살림은 기울고 단정했던 외모도 초라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밝은 표정으로 장터에 나타나 비싼 술과 고기, 그리고 비단을 사기에 그의 친구들이 간 밤에 무슨 좋은 기별이라도 있었는가 하고 물으니 진 모는 아니 글쎄 어젯밤 집 근처에서 귀인을 만났어. 라고 말하였다.

이마가 곧다랗고 눈이 커다란 것이 분명 훌륭한 이였는데 나보고 지금은 시골의 촌부지만 장차 높은 자리에 올라 가문을 빛낼 것이라고 하고 가시더군. 곧 수도에서 좋은 소식이 올테니 걱정마시오. 하며 아무래도 내가 벼슬길에 오를 건가 보이.

친구들은 책상을 치고 웃으며 자네 놀림 받은 것은 아닌가. 그것은 꿈이 아닌가 하고 말했지만 만면의 희색이 가득했던 진 모는 아랑곳 하지 않고 집에 달려가 수도에서 손님이 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비단으로 새 옷을 짓고 좋은 술을 따라두고. 그러나 그 날 진 모의 집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그를 꿈에서 장원에 급제한 사람이다 장원공이다 라며 놀려대기 시작했고 진모, 아니 장원공은 낙심한 듯 보였지만 귀인을 만난 것은 사실이었는지 아침 저녁으로 집안을 쓸고 책을 읽고 용모를 단정히 하며 손님을 준비했다.

그러기를, 3년. 장원공에게 손님은 오지 않았다.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좋은 술을 준비할 수 없던 장원공은 장터의 놀림꺼리가 되었고 그는 대신 종이꽃과 깃발 같은 잡동사니를 사서 집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장원공, 장원공. 아이들은 종이 꽃을 가득 사 집으로 가는 그를 보며 놀려대기 여념이 없었고 그는 점점 야위여갔지만 어째서인지 단정한 얼굴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기를, 또다시 3년.

어느날 동문수학하였던 그의 오랜 친구가 장원공을 방문하였다. 집은 황폐하고 문은 부숴져 있는데 온갖 화려한 잡동사니가 장원공의 집에 가득하였다.
친구는, 놀랍도록 단정하고 평온한 얼굴의 장원공에게 소식을 들었다. 격조해서 미안하다. 라고 말문을 튼 후. 이제 그만 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을 하였다.

자네는 재주가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인데 어째서 이렇게 세월을 보내는가. 집안을 잡동사니로 가득 채우고 장터의 웃음소리가 되다니.

친구는 다정하나 엄하게 장원공을 꾸짖었다. 장원공은 오랜 친구의 질책에 몹시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가 돌아간 후, 장원공이 세상을 떠나는데에는 달포가 걸리지 않았다. 집을 차마 치우지 못해 아직 종이꽃이 가득 남아있는 장원공의 집엔 그리 많은 사람이 모이진 않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친구는 누구보다 슬퍼했다.

그리고 2달 후, 수도에서 사자가 와서 진 모를 찾았다. 6년전 암행 중에 이 고을에서 그를 보았던 태자가 그를 좋게 보아 새로운 관청을 세우게 된 올 중추절에 그를 등용하겠노라. 하고 물론 사자가 만난 것은 그의 쓸쓸한 무덤 뿐이었고 사자는 그의 집에 사람이 없었다는 증거로 그의 집을 가득 채웠던 종이꽃 중 하나를 들어 수도로, 태자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장원공 진모의 종이 꽃을 떠올린다. 오지 않는 소식을 기다리며 잡동사니로 자기 자신을 가득채우고 또 텅비어버렸던 사람의 마음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길 바라며. 다만 고개를 숙이고 입을 틀어막고 아무 말도 새어나가지 않기를 바라한다.

17년11월1일의 글이다.


과학위성 카시니는 토성과 그 위성을 탐사하기 위해 97년 발사되었다. 금성과 지구, 그리고 목성 사이를 떠돌다 2004년 토성궤도에 진입하여 13년간 그 탐색을 계속하다 17년 4월 토성의 고리 맨 안 쪽을 조사하는 그랜드 피날레 궤도에 진입. 동년 9월 15일 토성의 대기에 돌입하여 별의 일부가 되었다.

17년의 10월 4일인 오늘, 그저께는 K와 저녁을 먹었다. 어제는 소설 한 권을 들고 바를 돌아다녔다. 김렛을 시키고 카운터에 앉아 메모장을 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나오시마 여행기의 후편이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첫 번째는 이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글을 쓰는가...>

나는 술을 한 잔 더 시키고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늘은 혼자서 다른 가게에 가기로 한다. K는 어제 귀국했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며 이번 교토의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다.

 

- 술

나는 칵테일 중에는 김렛을 많이 마신다. 문학적인 이유입니까 라고 한다면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슴슴하지도 시지도 상쾌하지도 않은 그 묘한 경계선의 향이 좋다. 나도 술을 시작한 것은 소주였기 때문에 너무 단 술은 좋아하지 않는다.

김렛은 크게 보아 진 베이스로 구분되는데 그 유명한 마티니(베르무트를 반 섞는다)도 진토닉도 김렛도 금주법 시대의 느낌이 나는 톰 콜린스도 모두 진 베이스이다. 유럽에서 크래프트 진의 붐이 일어난 것은 09년 경,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는 술의 제법이 공인되어 명문화 된 것은 08년이 되서야였다고 한다.

모든 술은 세금의 역사이기 때문에 술의 제법은 거의 세법이 정한다. 하지만 곡물의 증류주, 즉 싸구려 재료로 대량으로도 만들수도 있어서 대충 대충 사탕수수로 만들면 럼이고 곡물로 만들면 진이지 하하하 하는 식으로 생산(알콜 도수는 40%정도로 조정한다)되고 판매되어 왔기 때문에, 다시 말해 국가에서 일일이 신경써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싸구려 술이었다. 

아직도 쥬니에브르 혹은 쥬네바는 네덜란드의 오리지널의 약용술 스타일을 뜻하지만 많이 퍼진 것은 영국 스타일의 드라이한 진. 크래프트 진 쪽은 여러가지 약초 예를 들어서 크랜베리 나 제라늄 같은 걸 쓰기도 하는 것 같다. 영국에서 진의 위치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그래 진로의 빨간 뚜껑 소주 정도 였던게 아닐까 싶다. 역시 술 또한 그 태어난 지역, 사랑 받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 후에도 오랫동안 칵테일의 베이스 정도로 오래 쓰이다 요즘에는 특정하게 정해진 형태가 없다는 점 때문에 로컬 크래프트 진이 많이 생겨나 진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난 모양이다.

우연히 들어간, 아니 거짓말이다 오후 3시부터 이미 오늘은 낮부터 술을 마셔야지 하고 마음 먹고 호핑할 술집을 찾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호텔에 반납하고 술집이 많은 시죠를 거쳐 폰토쵸, 모토마치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남아있을 때 구석 3층의 바에 올라가 유일한 손님으로 카운터에 앉았다.

추천이 있을까요. 라고 묻자 나온 술은 와사비 잎을 올린 진토닉이 나왔다. 

기본에 충실한 진토닉이지만 향은 압도적이다. 진하기 때문에 압도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와사비 뿌리보다 더 맑은 물에서나 수확이 가능한 잎와사비의 향은 맵지 않다. 맑다.

과연, 술도 결국 그 지역의 특산물이라는 걸까요. 굉장한 향이군요.

마스터는 아주 살짝 웃는다.

나는 연달아 술을 시킨다. 이미 바 호핑을 하겠다는 생각은 버린지 오래다. 이 다음은 김렛을, 그리고 그 다음은 앱생트를 베이스로 한 마스터의 추천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꼬냑을 베이스로 한 술을 시킨다. 향의 미묘한 부분을 캐치해서 그걸 얘기해주면 그럴 수록 마스터는 특이하고 재미있는 향을 가진 술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되지도 않는 외국어로 낄낄거리며 마스터의 술을 칭찬한다.

계산을 하고 일어서려는 참인데 마스터가 명함을 건낸다. 나도 명함을 공손히 받는다. 실은 저는 이 가게 이름을 읽는 방법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웃었다

아직 오후 6시가 막 된 참인데. 예정은 있으신가요.

꽃이라도 사러 갈까 싶어요.

네 꽃을 사러 갈 생각입니다.

 

- 미소

K와 스페인 요릿집의 카운터 자리에 앉아 칠레 와인을 마신다.

우리는 이미 엉망으로 취해있다. 모츠나베를 파는 작은 가게의 카운터에 앉아서 맥주를 각 두 잔씩 마시고 나베를 한 번 더 시켜서 두 잔을 더 마셨다. 오이무침이니 뭐니 하는 안주를 잔뜩 시켜서 먹고 마시기를 반복한다. 가게에서 나왔지만 비는 많이 그쳐있었다. 

아직 돌아가기엔 시간이 이르다. 아쉬워져서 칵테일을 마셨다. 외국인으로 가득한 가게에 들어갔지만 노래는 시끄럽고 칵테일은 이름만 봐도 싸구려 리큐르로 말았다. 잔당 860엔. 좋은 칵테일을 마시기엔 너무나 싸다. 옆 자리 러시아인들은 너무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K의 이마를 쳐다본다. K는 신기할 정도로 각도에 따라 얼굴이 달라져서 쳐다보는 재미가 있다. 되는 대로 싸구려 칵테일을 한 잔씩 들이켰지만 역시나 입만만 버릴 맛이었다.

어쩌지 하고 가게를 나왔지만 아직도 숙소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 축구를 틀어놓은 밝은 가게로 들어갔다. 역시나 여기도 외국인이 가득하다. 나도 외국인이지 나도 외국인이지. 하고 일본어로 칵테일을 두 개 시켰다. 여기 무한정 마실 수 있는 플랜이 있는데요, 라고 메뉴를 가리키니 선배 여기 칵테일 무한정으로 마시고 싶으세요? 라고 반문하길래 싸구려 칵테일을 두 잔씩 들이켰다. 역시나 싸구려는 싸구려였다. 입 맛을 계속 버렸다.

아까 비가 오니까 나베를 먹어요. 라고 말한 뒤 검색을 돌리기 시작했다. 교토는 항상 혼자 왔기 때문에 맛있는 가게가 어딘지 잘 모른다. 대충 아무 가게나 들어가 밥을 먹고 종일 걸어다니고 절을 보는게 내 교토 여행이기 때문이다.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서 모츠나베 가게 두 개를 찾아냈다. 맛있는 집인건 사실일텐데 전화를 돌려보니 예약이 가득차있다. 급해진 나는 검색어를 바꾸다 아까 찾은 가게의 분점을 찾아낸다. 여기다 싶어서 예약을 걸고는 백화점의 로비에 앉아서 K를 기다린다.

종일 걸어다녔고 저녁을 같이 먹을 줄 몰랐기 때문에 피곤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연기를 하는게 힘들었다. 시간이 남아서 백화점의 지하층에서 꼭대기 층까지를 왔다갔다 돌아다녔다. 그것이 무의미하게 체력을 낭비하는 일이란 것을 그 때는 몰랐다. 비는 생각보다 많이 내렸다.

정확히 시간에 맞춰서 도착한 K는 내가 비오는 날 무슨 고생이야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됩니다. 하고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가게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실은 예약을 해두고 딱 중간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그 중간 이후에 아주 좁은 골목길에서 현지인들과 몸을 좁게 구기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골목길 두 개를 지나고 모퉁이 세 번을 돌아 찾아봐야 작은 나무 간판을 볼 수 있다. 일행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여기에요, 라고 뒤를 쳐다보는데. 왜인지 K는 웃고 있었다. 

오늘 교토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오전 혼자 교토의 외곽 루리코인에 가서 그 유명한 창문을 찍었다. 예정에 없이 방문한 루리코인이지만 어차피 교토는 너무 많이 와서 어디를 가야할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가지 않은 곳이 남아있다는게 더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그 창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K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K의 이야기는 술에 취하든 취하지 않았든 아주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진다. 밤을 새도 한 순간도 끊기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재미있어하기 시작한다. 길게 이어지던 K의 이야기가 어느새 커다란 원을 그리기 시작하고 그가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K는 취했다. 나는 술이 깨기 시작했다. 와인을 마시면 머리가 아프고 나는 술이 아주 쉽게 꺤다. 괜찮아요 선배 얼굴이 엄청나게 빨간데. 그것은 제가 홍인종이기 때문입니다. 홍인종 인디언, 네이티브 아메리칸. K는 너무 오랜만에 듣는 단어라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안주를 시킨다. 안주는 올리브와 문어 타파스.

이야기는 원을 그린다. 다양하게 이상한 소리와 헛소리를 한다. 나도 K도 이제 못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이상한 소리를 주어섬기기 시작한다. 오늘 밤은 이게 마지막이다 우리는 이걸 마시고 K와 나는 언제 취했냐는 듯이 똑바로 걸어서 사거리에서 헤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K와 나는 같은 손등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많은 부분이 같고 아주 작은 부분이 다르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캐나다의 리조트와 일본의 여행과 오늘 걸어다닌 이야기와 서로의 날씨 경향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또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한다. 아무리 화제를 바꿔도 서로는 막힘없이 서로 딴 소리를 해댄다.

표정을 만드는게 귀찮다는 듯이 K는 되는대로 지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그제서야 그날 처음으로 웃는다.

 

- 꽃

교토의 꽃이라면 사라쌍수의 꽃이려나, 헤이케이 이야기는 그 첫머리 "기온정사"에서 이렇게 읊는다.

 

祇園精舎の鐘の声 기원정사(祈園精舍)의 종소리 諸行無常のひびきあり 제행무상의 울림 있으니

沙羅双樹の花の色 사라쌍수의 꽃의 빛깔 盛者必衰のことわりをあらはす 성한 자 필히 쇠한다는 이치를 드러낸다

 

사라쌍수란 석가모니의 열반시에 그 동서남북에 서 있었다는 사라수 나무를 뜻한다. 아열대에 가까운 인도의 나무가 교토에서 관리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힘든 관리가 필요한 모양이다. 실제로는 거의 노란 색 혹은 붉은 색을 띄나 교토에서 자라는 사라수 꽃의 빛깔은 희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아열대 기후에서 피어나는 꽃이라 초여름인 6월에 잠시 아름답고 풍성하게 피어나지만 쉽게 변색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필쇠의 이치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반대로 불교식 장례에서 쓰이는 종이 꽃의 모델은 사라수 꽃이다. 그렇다면 그 종이 꽃은 영원하다고 할 수 있을까.

교토는 일년 내내 꽃이 핀다. 아마 오래된 귀족 취미와 정원 문화에 의해서겠지만 겨울인 12월, 1월에도 남천이 만개하고 백량금이 피어난다. 봄은 말할 것도 없다 매화가 지자마자 복숭아 꽃이 피며 영산홍이, 사라쌍수가 여름이 시작하면 도라지 꽃. 가을이 시작되면 베고니아, 털머위, 사가키쿠가 피어난다. 그러나 일년 내내 피어나는 꽃은 당연히 없다. 사람들은 꽃이 피어나고 짐을 보며 생명의 유한함을 생각하고 생명이 이어짐을 떠올렸다.

꽃은 매년 같은 모습으로 피어나지만 사람은 서로 닮지 않는다. 하고 읊은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는 뜻일 것이다. 

곧 사라질지도 모를 꽃을 매년 매 계절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시간이 꽃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때문일 것이다.

 

- 밤

아직도 내 일부는 교토의 밤 거리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이미 한 달이 훨씬 지나서 계절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내 유령은 초가을의 옷을 입고 기온의 시조와 산조를 거쳐 카라스마루의 사거리를 돌아다닌다. 밤의 엘리펀트 팩토리와 이쿠보시를 들르고 다리 위에서 멍하니 달을 쳐다보고 밤을 생각한다.

내가 아는 밤은, 키가 크고 단정한 이마와 눈썹을 하고 있다. 흰 얼굴을 하고는 달처럼 웃는다.  곧은 손목과 손가락 나를 잡아채고 잰 걸음으로 달려가 나를 새벽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몇번이나 몇 번이나 밤은 내 잠을 빼앗았다.

밤이 나를 쫓아오길 기다린다. 아마 밤은 또다시 바람소리를 내며 내 앞에 나타나 나를 기다렸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밤을 위해 준비한 꽃을 건네며 당신은 어땠느냐고 물을 것이다. 당신도 나를 기다렸나요.

 

- 사거리

나는 기온시조 역 2번 출구 뒤의 벤치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다.

고로케 두 개를 샀고. 먹고 싶은 저녁을 골라뒀다. 너무 비싼 저녁이긴 한데 어차피 내가 살 거고 가격이 어떤지는 죽어도 얘기해주지 않을 생각이다. 오늘 저녁 하루 보고 다시 안 볼 사람에게 너무 과도한 것 같긴한데 내가 먹고 싶은 것이기도 했고 그럭저럭 아무거나 먹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밥을 먹고 혼자 커피를 마시러 갈 생각이다. 가지고 온 책을 더 읽고 일찍 자야지. 내일은 어디에 갈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이번 교토 여행은 너무 즉흥적으로 온 거라서 남은 일정에 뭘 하든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른다.

한참을 걸려서 교토로 오고 있는 사람이라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10월 1일 오후 7시 30분의 일이다.

......

이번 교토 여행기를 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오직 서툰 사람들만이 자기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를 문장으로 고백한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내가 보았던 순간들, 그 말들과 순식간에 번져나가던 미소. 진동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서.나는 추한 것 보다 사라져 가는 것들을 더 용서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표현 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의 순간이 괴롭다.

어쩌면 결국 아름다움이란, 스쳐지나가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천년을 이어진 이끼의 정원 위에 내리는 빗 소리이고 오후 나절 창 에서 내리 쬐어 테이블의 윤곽을 흐리게 만드는 햇살이다. 숨소리만큼 짧고 미소처럼 번져가는 것이며. 무참히도 아름다운 분홍빛 꽃잎. 어느날 밤 당신이 나에게 말할 그럴까 라고 말하는 짧은 대답이다. 

긴시간에 걸친 질문이 짧은 대답으로 끝나는 것처럼.  나는 아름다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이 스쳐지나가는 것이라면, 나는 언젠가 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하고 겁에 질려서는. 두 번을 세 번을 반복해서 말한다.우리(내)가 아름다움에게 할 수 있는 보답은 사랑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위성 카시니의 마지막 항해는 그녀의 고향 시간으로 2017년 9월 15일이었다. 자기가 태어난 별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인사는 토성과 고리 사이를 22번 통과하고 탐사하지 않은 곳을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위성은, 안테나를 지구 쪽으로 돌려놓기 애쓰며 - 토성의 일부가 되며, 토성의 하늘에서 그 여행을 끝냈다 (In the skies of Saturn, the journey ends, as Cassini becomes part of the planet it self) 카시니가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에는 희미하게 토성의 위성 안셀두스가 찍혀있다. 20년 간의 항해를 끝으로 그녀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그리워해온 별과 하나가 되었다.

우리시대의 누구도 카시니처럼 사랑하지는 못했다. 우리의 위안은 아직 우리에게 많은 순간들, 혹은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 뿐이다. 

설령 어떠한 끝이 약속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우리가 우리의 삶보다 더 긴 단위로 숫자를 셀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일종의 영원과 닿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낮과 밤이 간다고 해도 정말로 우리가 가진 사랑이 다 할 날이 있기야 할까?

아름다운 당신, 정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입 밖에 내지 않고 기도하는 것 뿐일까.

 

Olafur Arnalds의 "August"를 듣는다. 17년 11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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